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과의 인터뷰
김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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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창밖에 비가 내리는 10월의 어느 하루는 수없이 많겠지만, 오늘은 기억될만큼 하늘이 낮은 회색빛이고 가을 바람 소리가 발목까지 시리게 하는 느낌이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연습장에 끄적거렸던 그 한마디가 가끔 첫사랑의 추억처럼 생각난다. ‘그리움’은 인간의 근원적 슬픔만큼이나 통속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치유될 수도 없고 부끄러워할 필요는 더욱 없는 그런 감정일 뿐이다.

  문제는 그 ‘무엇인가’가 ‘누군가’로 바뀌면서 맺게되는 관계의 고통과 인간에 대한 그리움과 실존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람을 그리워하고 인간을 싫어하면서 인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면에서 많이 동떨어져 있다. 보여줄 것도 내세울 것도 그리고 궁금한 것도 별로 없으니 말이다. 특히, ‘인간’에 대해서라면.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거나 특별한 생을 누리는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다른, 혹은 남들과 많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발동하면 그 사람의 뇌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마이크를 들이미는 사람이 바로 김경이다. 그녀의 인터뷰집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는 그런 책이다.

  인터뷰이의 선정이 일관성 없게 다양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 다소 당혹스럽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대수 다음이 노무현이고, 노무현 다음이 싸이다. 그렇지만 모두 독특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이라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든 어디에 살든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사람의 진면목이 궁금해 참을 수 없는 사람들로 김경의 눈에는 비치는 모양이다. 그런대로 그녀의 생각에 동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따라 많은 사람들과 잠깐씩 대화를 나눈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책이다.

  깊이 있게 여러 번에 걸쳐 한 인물에 대해 분석적인 인터뷰를 하고 다양한 그 사람의 모습들과 변화하는 과정들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인터뷰어 지승호와 김경은 다르다. 바자 피처 에디터라는 직함답게 패션과 최근 유행의 흐름을 짚어내는 가운데 인물을 선정하지만 때로는 바자라는 잡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진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한 사람에 대해 보고 듣고 대화한 내용을 가감없이 그대로 실어 놓은 앵무새같은 인터뷰와 김경의 인터뷰는 분명 차이가 있다.

  그녀의 화려한 글발과 감각적 태도는 가장 큰 장점이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기본일 것이고 그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과 그 사람을 해설하는 방식이 다분히 타고난 듯한 감각과 센스로 무장된 섬세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전달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그저 편안하게 평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읽는다면 나름대로 의미있는 접근이 된다.

  표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터뷰이들은 하나같이 ‘이 시대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이다. 매혹의 정도도 다르고 기호와 취향도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인물들을 선정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김훈, DJ DOC, 함민복, 강혜정 …… 김윤진, 이우일, 주성치, 크라잉넛, 노무현, 싸이. 무려 22명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한데 섞어 놓은 책은 만나기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단순히 가장 매혹적인 단독자들이라는 공통점만 가지고 있는 걸까?

  개인적 판단인지 모르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그들에게 ‘외로움’을 발견했다.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이 아닌 실존적 외로움이 보인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실력을 인정받으면서도 그들의 말에 묻어나는 외로움의 정체를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본능적이고 감각적인 내 촉수의 부정확한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그들의 말이 진심으로 닿는다. 공허나 허무와 다른 이름으로 넓은 공간을 채우는 공허한 울림처럼 자신에 대해 그리고 김경의 물음에 대답하는 그들의 표정이 보이는 듯싶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부족한 내게는 재밌있고 유쾌한 경험이었다. 무엇이든 즐겁고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분좋게 한다. 김경이 그렇다. 김규항의 말대로 그녀는 ‘대단한 꼴값’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맞은편에 앉아 일한 적이 있다는 소설가 김연수의 소개글도 김경 짐작하게 한다.

  가을비 오는 날 커피잔을 앞에 놓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다. 청승맞지 않게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뒤페이지 카피처럼, 사람만큼 흥미롭고 매혹적인 텍스트는 없다. 나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2005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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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박꽃
나카가와 요이치 지음, 김난주 옮김 / 샘터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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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사랑받고 싶어 몸부림치는 불행한 영혼은 잠 못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과 분노로 표출되어 타인에 대한 테러에 다름없음을 알기나 한 것인지. 또, 호의와 배려에 대한 감사를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소유욕으로 인한 간절함과 타인에 대한 감정조차 조절하고 싶어하는 광기에 가까운 안타까움을 사랑으로 착각하며 우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서 항상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불행을 과장하며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울부짖거나 내 불행이 전인류의 그것을 합한 것보다 더 치명적이라고 우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거나 슬쩍 손을 빼고 대상에 대한 분노로 그 감정의 방향을 선회한다. 미친짓이다.

  아름다운 사랑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선행되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나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사랑은 원한다고 얻어지는 뽑기 인형이 아니라 인형통 앞에서 애쓰는 그를 위해 통 속에 내 인형을 채워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다. 법과 제도,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를 넘어 근원적 사랑에 대한 정의는 나름대로 다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타인을 규정해버리는 사랑은 서로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 아니, 사랑이 있긴 한 것일까? 어떤 감정 상태를 사랑이라 부르는가? 사람마다 다른가?

  사랑이 어디 있는가? 영원한 사랑을 믿는가? 믿고 싶다면 나카가와 요이치의 <하늘의 박꽃>을 읽어보라. 1936년, 일본식 아니 나카가와 요이치식 절대 사랑과 만나게 된다. 일본 근대문학의 여명기에 탄생한 사랑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저는 오늘에 이르는 20 몇 년 동안 그녀를 가슴에 새기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생애를 걸었습니다. - 본문 6페이지

  사랑은 아름답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런 감정이며,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의 과다 분비로 인한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는 환각작용이다. 얼마나 기쁜일인가. 그 상태를 20 여년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20여년간 상대방의 마음을 괴롭힌 한 여자를.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여자로 기록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면서 도덕과 윤리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니 넘지 않고, 한 인간을 몰락(?)시킨 여인의 마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요이치는 또다시 사람들에게 묻는다, 사랑이 무엇인가?

  주인공 남자는 일곱 살 연상의 결혼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일방적인 짝사랑이 아닌 것이 문제다. 여인도 그 남자를 사랑한다. 섹스를 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남자의 마음을 가져가 버린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남자는 모든 인생을 그녀를 생각하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에 바친다. 몇 번의 프로포즈를 거절받지만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결혼이라는 도피처를 선택하지만 곧 헤어지고 만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그 남자는 끝내 사랑하는 사람의 허락을 받는다.

  스물 한 살에 그녀를 처음만나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그녀와의 결합을 꿈꾼다. 그러나 평소 몸이 약했던 그녀는 약속한 시간까지 서서히 죽어가고 어느날 그녀의 유서와 같은 편지를 받고 그 남자는 절망한다. 무려 23년간 그 남자가 기다린 것은 단 하루라도 그녀와 같이 살아 보고 싶었던 간절함이다. 사랑의 목적이 결혼인가? 아닌가? 남자가 기다린 것은 그녀와의 결합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신념과 집착이 이루어내는 유일무이한 거룩함은 아니었을까?

  지독한 사랑은 지독한 자기애와 결합된 집착이다. 자신의 스타일과 생각대로 타인을 규정짓고 같은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안되면 불행한 일이 벌어진다. 절대 혼자 불행을 감내하는 인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현실은 어떤가? 이 소설을 쓴 요이치는 이런 사랑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현실에 없는 지고지순한 아름다운 절대 사랑을 그려보고 싶었을까? 철지난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외치고 싶었을까?

  ‘하늘의 박꽃’이 되어버린 그녀를 생각하고 평생 사랑한 한 남자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고 그 남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으며 동일시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태도와 방법은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그 대상과 시기도 다 다르다. 평가하지 말자.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잴 수도 없고 부피와 무게를 가늠할 수도 없다. 사람들 가슴속에 자신이 키워온 크기만큼 존재할 뿐이다. 다만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비롯된다는 사실만은 기억하고 싶다. 집착과 자기애적 정신병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들은 시간만 흐르면 치유되지만 분노의 대상과 치명적 유혹을 견뎌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은 시간만으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남는다.

  문학과 현실 속에서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사람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통제할 수 없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많은 사람들은 소설 속 주인공 남자처럼 외친다.

  그때만큼,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던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세상을 사는 순리임을 저는 몇 번이고 저 자신에게 깨우쳤습니다. - 본문 62페이지


200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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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의 격정대화
장하준 외 지음, 이종태 엮음 / 부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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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도―난마(快刀亂麻)[명사] ‘어지럽게 뒤얽힌 사물이나 말썽거리를 단번에 시원스럽게 처리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한국 경제를 쾌도난마할 수 있다는 오만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큰일 난다. 잘 드는 칼로 뒤엉킨 삼타래를 잘라버린다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 삼실은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더구나 한 나라의 경제문제는 이제 사회 각 분야중에서도 핵심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한방에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면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다. 꼬인 실타래를 한올 한올 뽑아내는 심정으로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각론의 해법을 찾아내는 일은 실물 경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래서 ‘장하준 ․ 정승일의 격정대화’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오히려 역설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만큼 IMF 구제금융 이후 한국 경제의 어려움과 답답함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이전부터 내재해 있는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점들이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반증이다.

  이 책은 말지의 편집장이었던 이종태 기자의 제안과 진행으로 두 경제학자의 대담형식을 통해 한국 경제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 2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과거를 돌아본다. 개혁 강화는 종속 심화라는 아이러니, 박정희의 개별 독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재벌 문제, 과연 해답은 없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시장 개혁인가를 통해 지난 한국 경제의 문제점들을 섬세하게 때로는 세계 경제와의 비교 속에서 짚어내고 있다. 2부에서는 미래를 전망한다. 주주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질, 서로 자기 발등을 찍고, 있는 자본과 노동, 국가와 국가주의, 관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적 대타협을 그리며……로 나누어 현재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과 대안을 모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수 수구 언론이나 개혁세력이나 지금까지 해 온 말들이나 우리 경제에 대한 진단을 보면 속이 뒤집어 질 때가 어디 한두 번이었나. 국민을 바보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신념과 판단을 반성하거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점검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인지 답답할 때가 많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핀란드나 스웨덴쯤으로 이민가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하고 실제로 현실상황의 교육문제와 맞물려 이민을 결행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상황은 어려워지고 있다. 구체적 상황은 주변을 돌아보면 알 수 있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없다.

  장하준이나 정승일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의하고 속시원한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문제점을 모르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쓴소리 때문이 아니라 원인을 진단하는 과학적이고 차분한 태도와 거침없는 분석과 대안들 때문이다. 경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은 미래를 준비하는 기본 틀을 제공한다. 막말로 장사 하루 이틀할 것도 아니고 지속 가능한 경영을 외치는 기업과 선진 조국 창조를 외치는 국가는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 아닌가. 현실 사회에서 재벌은 정경유착이라는 불명예와 더불어 1인 총수의 지배구조, 편법 증여로 인한 탈법 등으로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물론 우리 나라 경제 상황에서 재벌의 순환 출자구조가 아니었다면 현대자동차나 삼성반도체 같은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도 일리가 있지만 국민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이유로 모든 면죄부를 재벌 손에 쥐어 줄 수는 없다.

  김대중 정권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은 한국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된 소버린이나 론스타같은 국적 불명의 금융자본이 이미 메뚜기떼처럼 훑고 간 자리에서 정부는 되늦게 세금 타령을 하고 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식 개발 독재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주주 자본주의의와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국민들도 올바로 인식하고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노사간의 갈등과 관치에 대한 편견이 우리의 미래를 암울하게 할 수도 있다. 철학과 이념이 바로 선 나라가 먼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한다. 중도 우파쯤 되는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도 혼란스럽다. 경제는 사회 각 분야와 긴밀한 관계한 맺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과오를 따질 수도 없겠지만 복지와 재분배에 대한 확고한 이념과 실천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지도 못하며 경제 발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라면 국민들이 나서야 한다. 전문가와 국가 정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차갑고 냉소적이다. 사회적 합의 이끌어 낼 수 있는 비전과 각론을 제시하는 정부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스웨덴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대타협이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한국적 토양에서 그런방식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지금 여기에 맞는 노력과 타협들이 필요하고 혁명이 일어나는 수준의 사회적 변혁을 꿈꾸어 보지만 국민 대다수의 동의가 어려울 것이다. 아니 대다수 국민들의 합의보다 일부 보수 기득권 세력의 목숨 건 저항이 얼마나 심각한가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8 ․ 31 부동산 대책과 이전의 대책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중동의 언론 플레이와 1%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피눈물나게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종부세와 보유세의 입법과정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21세기가 시작되었고 자본주의는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신자유주의의 깃발아래 세계를 통합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문제는 거대 담론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들 생활의 문제와 직결된다. 누가 잘 먹고 잘 살고 싶지 않겠는가.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찾아 보자는 이야기는 개짖는 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함께 행복하지 못하면 나도 행복하지 못하다는 진실은 역사가 말해준다. 한국경제는 앞으로도 안녕할 것인가?


2005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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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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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에서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이 가장 바보스러울지 모르지만, 그 상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을 돌아보며 아쉬움과 후회를 남긴다. 결정적 시기와 사건에 대해 후회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인류 역사의 변혁 과정에서 그 가정법을 사용하는 일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심각하지 않은 얼굴로 과거를 재생하고 현재화하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의 지성이라 일컬을 만한 지식인 하워드 진의 역사 모노드라마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marx in soho>는 즐거운 상상력이 빚어놓은 재미있는 희곡이다. 실제로 공연이 되었다고 하지만 레제드라마lese drama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배우의 연기로 각인되기 보다는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빚어내는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며 읽기 위한 희곡으로 더 어울린다.

  뉴욕은 현재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자본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 ․ 11테러로 더 잘 알려진 세계무역센터가 있는 도시 뉴욕에 마르크스가 시대를 뛰어넘어 나타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말들을 전해줄 것인가.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다.

  엥겔스와 더불어 세계를 뒤흔든 선언으로 기억되는 ‘공산당선언(1848년)’을 발표한 마르크스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엥겔스는 그보다 두 살 어린 스물여덟이었다. 이후 유럽 파리와 벨기에를 거쳐 영국에 망명한 마르크스는 불세출의 걸작 ‘자본(Das Capital)'을 출간한다. 아내 예니와 세 딸들은 극도의 빈곤과 가난 속에서 엥겔스의 도움으로 겨우 의식주를 해결하는 수준의 생활을 영위했다. 평생 마르크스를 괴롭힌 엉덩이의 종기만큼 가난은 그에게 버릴 수 없는 생의 동반자였다.

  아내 예니와 막내딸 엘레아노르는 가족의 울타리를 그를 감쌌고 또한 사상의 동반자였다. 이 책에서 프루동과 바쿠닌을 등장시켜 관객을 즐겁게 한다. 특히 바쿠닌과의 신랄한 비판과 언쟁은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엥겔스와의 관계가 오히려 마르크스의 입을 통해서만 제시되어 소홀하게 다루어진 면이 있다. 어떤가, 어차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모노드라마라는 사실만으로도 재미있는데.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는 항변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반증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했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철학자다. 우리 인류 역사에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면서 소홀하게 다루어지거나 일정한 거리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워드 진은 그런 인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희곡이라는 형식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모노드라마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인물을 대하게 된다. 물론 실존 인물에 대한 고증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담감이 없을 수 없겠지만, 상상력의 폭은 넓어지고 인물은 재창조된다. 살아있는 마르크스, 얼마나 흥미로운 주제인가.

  하워드 진은 그 인물을 영국의 소호가 아닌 뉴욕의 소호로 불러 냈으며 그에게 실컷 자신에 대해 항변하고 왜곡된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속시원히 말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법으로는 부족하다. 실제 공연에서 얼마나 성공을 거두었는지도 알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희곡은 공연을 관람하는 것보다 읽는 것으로 만족스러울 듯 싶다.

  뉴욕이라는 상징적 도시에 나타난 마르크스의 행보가 뚜렷한 인관관계를 형성하며 극을 이끌어 나가지 못하고 현재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 정도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좀더 세밀하고 깊이있는 대사와 뉴욕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최대한 활용한 내용으로 극이 전개됐다면 하는 아쉬움도 떨칠 수가 없다.

  하지만 서울에 나타난 마르크스였다면 즐겁게 읽지 못하고 우울하게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남의 나라 불구경하듯 현실과 동떨어진 사실이 아님에도 한다리 건너편에 세워 놓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놓쳤을 테니까 말이다. 짧지만 즐거운 상상을 통해 마르크스와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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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외인간 - 전2권 세트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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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더 이상 특별할 것도 신비로울 것도 없는 이외수의 소설은 하나의 틀로 굳어진 듯 싶다. 그 틀은 1992년 <벽오금학도>이후 굳어졌다. 이후 출판된 1997년 <황금비늘 1, 2>, 2002년 <괴물 1, 2>에 근작 <장외인간 1, 2>에 이르기까지 큰 흐름에서 변화가 없다. 1978년 <꿈꾸는 식물>, 1980년 <겨울나기>, 1981년 <장소하늘소>, <들개>, 1982년 <칼>을 이외수의 전정기로 본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그의 소설은 <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1975년 등단이후 30년간 많은 양의 책들을 쏟아내며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아온 그의 글들은 이제 힘을 잃어가는 것인가.

  미스 강원과의 극적인 결혼, 지독한 가난 등 자신의 이야기를 감수성 짙은 문장으로 풀어낸 1985년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를 통해서다. 올림픽 열리는 해에만 머리를 감고,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글을 완성할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등 그의 숱한 일화와 외모와 일상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화제에 올랐던 소설가 이외수는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정통 문학에서 비껴 서 있는듯 수많은 에세이와 우화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영혼의 세계를 주유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창 밖에 가을이 당도해 있었다’는 문장에서 ‘추적추적’과 어떤 특정 시간과 계절이 ‘당도’해 있다는 표현을 여전히 즐겨 쓰는 작가 이외수는 근작 <장편소설>에서도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장들과 표현들 비현실적 결말로 주목을 끈다.

  닭갈비집 ‘금불알金佛揠’의 주인 이헌수는 시인이다. 동생 이찬수와 동생의 동거녀 제영이와 함께 춘천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어느날 달빛처럼 스며든 여인 소요를 만난다. 닭갈비집 종업원으로 카운터를 지키던 소요가 사라진 어느날 하늘의 달이 사라져 버린다. 세상사람들은 달을 모르고 헌수는 미칠 것 같다. 월(月)요일이 인(人)요일로 바뀌어 있고 달과 관련된 모든 노래와 풍속들이 사라진 현실을 헌수는 받아 들일 수가 없다. 달을 아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돈에 눈이 먼, 가슴이 메말라 가는 사람들 때문에 사라진 달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결국 헌수는 정신병원 개방병동에 입원한다. 차차 두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안정이 온다. 병원에서 만난 한도사, 문보연, 오대단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많은 방식이 있음을 알게 된다. 환자처럼 보이는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정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이다. 프랙탈 예술을 하는 친구 김필도는 누드 모델을 구하려다 모델을 친구와 동거를 시작하고 선배에게 그림을 팔려다가 자신의 여자와 바람난 선배를 폭행해서 감옥에 간다. 병원에서 퇴원한 헌수는 필도를 면회하고 닭갈비집을 정상화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날 명품 중독증에 빠진 동생의 동거녀이자 자신의 후배인 제영이가 인체자연발화 현상으로 사망한다. 정신을 수습할 무렵 모월동(慕月洞)에서 찾아온 소년을 따라 가끔 헌수를 찾아오던 노인을 만나게 되고 달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는 달이 뜬다. 소요의 정체는 달의 주변을 유유히 날고 있는 시조새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과 허무 맹랑해 보이는 이외수의 소설들은 매번 사람들의 가슴들 적셔줄 무언가를 찾고 있다. 그 무언가는 감성과 낭만이다. 사랑이 사라져버린 시대, 돈과 물질이 눈을 가리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 때문에 하늘에 달이 사라져 버렸다고 믿는다. 달은 가장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자연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외수가 외치는 목소리는 어쩌면 단순하다.

  가슴속에서 사라진 것들은 가슴 밖에서도 사라진다. 물질로서의 달은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 있어도 정서로서의 달은 가슴속에서 사라져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로서의 달도 정서로서의 달도 망실해 버렸다. 기억 속에도 존재하지 않고 가슴 속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장외인간 1, 163페이지

  누가 일부러 가슴에 물기를 걷어내고 스스로 타죽고 싶겠는가. 김영하의 소설에 나온 비과학적인 죽음. 사람의 신체가 스스로 발화하여 타버리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산다는 것이 결국 무덤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모습이라는 비극적 인식이 아니라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본 사람들은 삶의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다만 여전히 밀린 숙제처럼 남아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답이 없다. 당연하다. 거기에 무슨 답이 있겠는가. 이외수도 다만 젖은 가슴으로 감성과 낭만을 잃지 말고 사랑이 가득한 ‘관계’를 꿈꾸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더 이상 그의 책을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말더듬이의 겨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감성사전’등의 에세이와 시집 ‘풀꽃, 술잔, 나비’까지 거의 모든 책들을 읽어왔지만 이제 유년시절의 추억과 재미있는 문장만으로 장편 소설 2권의 분량을 채워나가기에는 힘겨워 보인다. 장면 장면 에세이와 재미있는 우화로 풀어낸다면 더 좋았을 것같은 내용들이 많이 눈에 띤다. 소설 본연(?)의 임무가 뭔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 그만 소설을 놓아줄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혼탁한 세상에서 깨끗한 영혼을 지키자고 감성과 낭만을 그리고 사랑을 지켜 나가자고 외치는 기인이다. 춘천에 가면 격외선당(格外仙堂)에 살고 있는 찾아보고 싶을 것이다. 가을답지 않게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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