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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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영화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제목이 주는 이미지가 강렬해서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 존재의 근원적 속성 중 하나인 불안에 대해 쉽게 정의내리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만큼 단편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극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만큼 감성과 이성 모두를 자극하는 것도 없을듯 싶다.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그가 펴낸 저작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명저로 기억될만하다. 단지 시류에 영합하거나 얄팍한 상술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류의 책들과는 조금 다르다. 철학에서 대중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때로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내용의 깊이와 사색의 넓이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역할도 어렵지 않게 성공하고 있다. 진정한 에세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칭찬을 덧붙일 수 있는 수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의 책들은 원제를 먼저 살펴야 한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의 원제는 였고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원제는 이었다. 번역서의 제목이 판매부수를 결정한다는 통설처럼 이 책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의 경우 제목이 바뀌어 재출판 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경우에 해당한다. <불안>의 원제는 이다. 원제가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에 대해 한정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책장을 열어야 한다.

  먼저 이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전체 구성을 단순화한 것이 눈에 띤다. 크게 ‘불안’에 대한 ‘원인’과 ‘해법’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해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으로 나누어 진단하고 있다. 그 해법으로는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를 제시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P. 38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는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 P. 81

  사회적 ․ 경제적 지위에서 느끼는 불안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특히 근대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기 이후 인간이 느끼는 가장 극심한 불안과 공포는 물질적 궁핍에 대한 것이다. ‘돈’, 혹은 ‘부’에 대한 정의와 개념은 조금씩 다르게 논의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현대사회에서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은 극히 드물다. 종교적 삶을 택했거나 아주 특별한 인생을 살지 않는한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게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을 유발한다. ‘인간은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라는 보통의 말은 그래서 더욱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이 웃어줄 만한 확실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모두 다르겠지만 공통 분모가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끔찍하다. 욕망도 규격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불안(?) 때문이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 P. 124

  그렇다. 불안은 욕망의 하녀다. 그러나 그 하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욕망을 없애는 방법과 하녀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방법이 있겠지만 그 둘 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한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한다는 것은 표현 자체가 모순이다. 욕망의 절제라니? 그것도 자본에 대한 욕망을 적정 수준에서 절제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재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기 변명과 위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병든 영혼에 대한 처방전은 아니다. 그저 그 원인들을 진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불안’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것을 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 안도감은 무척 크게 느껴진다.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대상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의 ‘해법’에 대해서는 공감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우?철학과 예술이 주는 위안 그것이다. 사유하는 방식과 삶에 대한 태도에 따라 불안은 물론 극복되거나 치유될 수도 있다. 정치와 기독교를 통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치와 기독교가 가중시킨 ‘불안’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사회적 불안에 누구보다도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개인의 삶에 대적 영향을 끼친 분야를 불안의 해법으로 제시한 것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시한 ‘보헤미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했으나 실패담 위주이고 일반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현실과의 접목 문제나 구체적 접근 방법이 없다.

  보통은 이 책에서 수많은 고전과 학자들의 견해를 소개하고 종합하며 그것들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다. 불안의 원인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견해가 공존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해법도 종합적인 통합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싶다. 철학자가 수학자는 아니다. 더구나 인간의 심리 문제에 대한 해답이 어디 있을까.

  몇가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일상’이라는 측면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온 그의 연구와 일련의 저작들 속에서 빛을 발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분석해서 다양한 층위들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작가가 필요한 것은 모두의 바램일 것이다. 불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얼마나 적확한가?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 P. 268


200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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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교양사상서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정영하 옮김 / 산수야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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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은 현재의 의미망 속에서만 그 빛을 발한다. 단절된 불연속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고전을 읽고 음미하며 재해석하는 일은 헛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인류가 걸어온 발자취를 더듬고 그 과정을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반성적인 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지금 현재를 재발견하는 것이 고전이 주는 의미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19세기 중엽 근대의 이행기에 두드러진 저작중의 하나가 J. S. 밀의 <자유론On liberty>이다. 인류 문화사에서 근대의 기점론은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를 거쳐 기독교적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혹은 국가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근대의 중심에는 ‘개인’이 서 있다. 독립적 개체로서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문화의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밀의 자유론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다른 어떤 책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유론>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서설과 사상과 언론의 자유,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과 개인에 대한 사회 권위의 한계 그리고 원리의 적용이다. 각 장에서 밀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는 것은 물론 개인의 자유다. 자유가 지니는 의미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은 물론 특히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자유’의 본질과 의미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헌법과 법률로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서설에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적은 지배자가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제한이야말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 P. 12

  밀이 생각했던 자유의 본질은 다름 아닌 ‘사회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면 침해될 수 있는 개인의 자유는 원칙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출발하고 있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1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 문제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자유론’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 밀은 이어서 얘기한다.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일은 대중과는 언제나 이해가 상반되는 통치자에 대항하는 수단이었으며, 또 그렇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통치자가 국민과 융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통치자의 이해와 의지는 국민의 이해와 의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 P. 14

  이후 전개되는 언론과 사상의 전개에서 밀은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토론과 경험을 통해 능히 시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과연 인간이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잘못을 시정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은 정당한 것인가? 독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다. 사회가 분화되고 복잡해지면서 개인의 사회 경제적 위치에 따라 대립과 갈등이 생기고 통합된 논의나 지향점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배치될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밀은 어떻게 이야기 할 것인지 궁금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란 어느 시대에나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책이 있을까? 어떤 논의나 주장도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는 ‘진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상대적 가치 속에서 평가되어야하는 것이 ‘진리’라는 이름의 숙명이다.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우리가 새삼스럽게 ‘자유론’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문도 가져본다. 그렇다면 국가나 사회의 압제와 타인의 관계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는지 반문해본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근본적인 관계 설정과 범위와 한계를 고민하고 싶다면 <자유론>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한 국가의 가치는 국가의 구성원인 개인의 가치에 있으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존립하지 못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개인의 인생처럼 책에 나와 있는대로 혹은 보다 가치 있는 쪽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의 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보다 소중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을을 가져볼 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대중은 ‘혁명’을 꿈꾸게 된다. 그래서 밀은 이렇게 책을 맺고 있다.

  국가의 가치는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가치이다. 이들 개개인의 정신적 확대나 향상을 위하여 이익이 되는 것을 뒤로 제쳐두고 세부적이고 사소한 사무상의 행정적 수완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원하는국가, 또는 국민을 위축시켜서 그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꼭두각시로 만들고자 하는 국가는 그것이 국민의 이익을 위해서 행해진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어떠한 위대한 일도 결코 이룩하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가 온갖 희생을 다하여 이룩해 놓은 완전한 기구라 할지라도 그것의 원활한 운영을 기한다면 국가가 배제한 구성원의 힘 부족으로 인해 아무러너 도움도 되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 P. 278



200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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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
디팩 초프라 지음, 최승자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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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책의 부록으로 따라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디펙 초프라의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일곱가지 지혜>라는 짤막한 책은 출판사를 보니 <교양의 즐거움>을 주문할 때 따라온 것 같다. <성공에 이르는 영혼의 일곱가지 법칙>이라는 책이 밀리언셀러에 올랐다고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어 뭐라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그 일곱가지 법칙을 아이에게 적용시켜 보라는 자녀 양육법 지침서 내지 참고서다. 아주 친절하게 일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요일별로 할 일을 가르쳐 준다. 일곱가지 법칙이 아니라 칠십가지 법칙이 있어도 지침서를 참고해서 아이를 기르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를 진정한 성공으로 이끄는 선물’이라는 부체가 붙어있지만 ‘진정한 성공’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물질과 명예를 위한 성공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삶의 주체적 리더로서 영혼의 성공을 언급하고 있지만 지나치게 모호하고 명상적인 언급으로 일관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다고 해서, 혹은 특별한 자녀 양육법을 안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제대로 커간다는 것에 전부 동의할 수 없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모두 실천하지 않듯이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차이가 나고 행한다고 해서 개체로서의 타인인 아이들이 모두 부모의 의도대로 자라주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지켜봐주고 하나의 인격체로서 아이들을 대하며 ‘권위와 억압’을 배제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부모 정도만 돼도 성공한 부모라고 본다. 쉽지 않다. 부모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순간순간 아이에게 쇠뇌되고 반복적으로 주입시켜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길러진다. 세속적 성공을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 성공이 주는 삶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보고 아이가 행복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잘 할 수 있고 즐거워하는지 고민하는 부모는 많지 않다.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가 우선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는 것이 아이들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첫 번째 법칙(일요일) : 순수 잠재력의 법칙
“넌 마음먹은 대로 뭐든지 해낼 수 있어.”

두 번째 법칙(월요일) : 베풂의 법칙
“뭔가 바란다면, 먼저 그대로 베풀어봐.”

세 번째 법칙(화요일) : 원인과 결과의 법칙
“지금 내리는 선택이 미래를 바꾼단다.”

네 번째 법칙(수요일) : 최소 노력의 법칙
“거부하지 말고 흐름을 따라가렴.”

다섯 번째 법칙(목요일) : 의지와 소망의 법칙
“진정으로 뭔가를 바랄 때마다 씨앗을 한 톨 심는 거야.”

여섯 번째(금요일) : 법칙 초연함의 법칙
“삶을 여행으로 즐겨봐.”

일곱 번째 법칙(토요일) : 목적의식의 법칙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란다.”

  책은 이렇게 일곱 가지 법칙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권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인지 그저 그런 책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남는 건 별로 없다. 답답할 때 길이 없는 줄 알면서 찾아보기 위한 방법 정도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제목이 왜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곱 가지 지혜>인지 알 수가 없다. 책의 내용과 학교와는 무관하다. 뭔가 튀는 제목이어야 팔리나? 학교에서 뭘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200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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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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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질투는 나의 힘’중에서(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1989)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였던 기형도 시의 일부다. 다소 엉뚱하게도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고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이영애에게 한 말이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작은 언쟁이 연인들 사이에 오간다. 너무 유치해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영원한 사랑’에 대한 열망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과거에, 현재도, 앞으로도 아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인류는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이 인생이고 삶이고 인류의 역사인 것처럼.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the romantic movemet,1994>는 모든 연인들의 필독서로 권해도 좋을만하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연인 사이의 문제가 달라지는 것은 없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읽는다고 해서 실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 영원히 되풀이되는 주제에 대해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관심과 공감을 표시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의 매뉴얼이 나와 있다면 이런 종류의 책도 의미가 없어질테니 말이다. 이성과 사랑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이론일 뿐이다. 절대 독해 불가능한 타인과 사랑에 대한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해부하는 것과 현실적인 문제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 책은 더 없이 훌륭하게 다가온다.

  보통의 전작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essay in love,1993>와 <사랑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kiss & tell,1995> 사이에 쓴 책이니 사랑에 관한 3부작으로 엮는다면 가운데 토막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1년에 한권씩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대한 연구(?)를 3년에 걸쳐 완결한 것일까? 93년부터 95년까지의 시기면 69년생인 보통이 만 스물 네 살에서 스물 여섯 살까지 한 권씩 쓴 셈이다. 사랑에 관한 한 박사학위를 받아도 될 만하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일반화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통은 이 책에서도 역시 연인들 사이의 ‘사랑’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지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랑의 에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완벽한 풀코스를 선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식상하고 당연해 보이는 정식 코스에 숨겨진 비밀들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사랑에 관한 금언과 격언들은 다름 아닌 인간 관계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스물 네 살의 영국의 광고 회사 직원 앨리스는 파티에서 의사를 포기하고 금융업에 종사하는 서른 한 살의 에릭을 만난다. 친구 수지와 매트는 조연이고 등장인물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만나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하강곡선을 그리고 앨리스는 필립이라는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으로 끝난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는 없는것과 마찬가지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하거나 해석하는 내용들이 어렵지 않게 묘사된다. 많은 철학자들의 말과 문학 작품 속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지루하지 않게 분명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유머와 재치를 곁들인 보통의 문체는 가독성을 배가 시키고 깊이 잠수했다가 수면위로 떠오르듯 자연스럽게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런 문장과 책을 왜 마다하겠는가.

  책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보통 특유의 그림들과 해설들은 쉽고 재미있게 추상적 개념과 연인들의 심리들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주관과 객관이 뒤섞여 나름대로 논리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는 색다른 즐거움까지 덤으로 얹어준다. 그것들이 모두 객관적이거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공감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와 보편적 정서를 밑바닥에 충분히 깔아두고 있다.

  우리말 제목의 의미 - ‘우리는 사랑일까’는 현재 진행형인 연인들의 관계를 점검하는 시제다. 하지만 ‘사랑 이후’의 연인들이 훨씬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공유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이와 세대를 불문하고 사랑할 예정인 연인들에게,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더 이상 사랑이 필요 없다고 선언한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엉뚱하게도 에릭을 만나기 전 앨리스가 “나랑 세상 사이에 목도리 같은 게 끼어 있는 기분이야. 자연스럽게 느껴는 걸 막는 담요 같은 게 있어.”라고 말하는 부분에 공감하기도 하고, 앨리스가 에릭에게 이별을 선언할 즈음에 하는 생각 - 그이도 다를 바 없는 인간이구나. - 조지 버나드 쇼가 말한 ‘사랑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을 과장하는 흥미로운 과정’이라는 유명한 경구의 진부한 메아리였다. - 이 모든 사람과 공감할 만하다.

  20세기 사랑과 연인들의 심리에 관한 보급판 같은 책이라는 속된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면 부담없이 소파에 파묻혀 책장을 넘겨도 본전 생각은 나지 않을 것 같다.


2005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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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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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책만 보는 바보를 꿈꿔 본다. 세상에 대한 도피와 일탈의 성격으로 쉽게 말한다. “아~, 시골에 내려가 책이나 보면서 지냈으면 좋겠다.”하는 소망을 드러낸다. 나도 그렇다.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하늘을 벗삼아 책만 보며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태도가 다 다르니 사람마다 소망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책 속에 묻혀 사는 즐거움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강렬한 유혹임에는 틀림없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책만 읽는 바보를 ‘간서치(看書痴)’라고 한다. 조선 후기 한 시대를 살았던 이덕무(1741-1793)는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자서전 형식으로 글을 남겼다. 스물 한 살에 쓴 ‘간서치전(看書痴傳)’이 그것이다.

  이 책은 자서전 형식으로 이덕무 스스로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글공부를 하던 시절부터 늦은 나이에 연경에 다녀온 후 규장각 검서관으로 입궐하고 지방의 수령으로 내려가기도 한 그의 삶은 평범한 듯 보인다. 그러나 그의 글과 생각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어찌보면 역사속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특별한 공적이나 특징이 없어보이지만 그의 생각과 삶이 주는 잔잔하면서도 큰 울림이 있다.

  한번 서자에게서 태어난 자식은 대대손손 서자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은 그 후손들이 짊어져야할 삶에 멍에에 대해 관대하지 못했다. 적자와 서자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 삶을 결정했던 시대를 들여다 보는 일은 슬프다. 이덕무는 서자의 집안 출신으로 관직에 나아갈 길도 막혀있고 그렇다고 농토가 풍부하거나 상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니 스스로 ‘책만 읽는 바보’라고 칭할만 하다.

  만약 정조와 같은 왕을 만나지 못했다면 서자 출신의 이덕무는 평생 눈물과 회한으로 쓸모없는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을 것이다. 세상에 태어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상황으로 보아 중요한 일이다. 직업의 선택이나 생계의 유지 수단이 제한되어 있었던 이덕무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즐겁지만은 않다.

  다만 그의 젊은 시절 방안에 들어앉아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따라가며 책을 읽는 모습은 학문에 대한 열정과 책을 사랑했던 선비의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평생 책과 함께 하며 그보다 더 좋은 친구들과 교우했던 이덕무의 삶은 평범했지만 그의 생각과 글은 맑은 수채화처럼 깨끗하다.

  평생의 친구였던 유득공과 박제가 그리고 백동수와 이서구 등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책보다 더 진한 감동을 준다.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그의 두 칸짜리 집 마당에 책을 읽을 수 있는 방 한 칸을 만들어 주는 일화는 형언하기 힘든 친구들의 우정과 그 관계를 말해준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생활은 편리해지고 복잡해지고 속도가 지배하게 됐지만 이덕무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 18세기 후반의 어느 한 시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이덕무의 산문들을 자서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가의 솜씨도 깔끔하다. 문장의 흐름과 내용에 군더더기가 없고 이덕무의 글을 그대로 옮겨 나가는 부분도 어색하지 않다. 한 선비의 이야기로 책을 좋아했던 사람의 일생과 평범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전해주는 책이었다.

  이덕무의 친구 유득공과 박제가도 서자였다. 가슴 아픈 현실과 가난을 곁에 두고 살았던 그의 삶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며 백탑(원각사지 10층석탑)아래를 거닐던 이덕무의 젊은 시절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건 나이 때문은 아닐 것이다. 평생을 함께 할 친구와 존경할 만한 스승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높은 벼슬도 많은 재산과도 거리가 멀었던 이덕무의 삶은 그렇게 평범한 듯 보이지만 시대를 벗어나고자 했던 올바른 생각과 태도가 아름다운 간서치였다.

  현실적인 고통과 자책감 때문에 붙혀졌을 ‘책만 보는 바보’는 그 이면에 깔린 비애보다 현실에서 벗어나 글읽기를 좋아했던 한 선비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 있다. 하지만 책읽기의 행복과 모든 것을 나눌 만한 좋은 친구들과 함께한 그의 삶이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있을 수 없는 차별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 속에서 살았지만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책을 가까이 했던 그의 삶이 전해주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ž‹은 수묵 담채화처럼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그의 맑은 영혼이 느껴진다. 책속에, 글속에 많은 것이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고 진솔한 한 인간의 삶과 이야기가 영웅의 이야기를 넘어선 감동을 전해준다. 이 세상에는 책만 읽는 바보가 아니라 책도 안읽는 천치는 얼마나 많은가.


200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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