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 - '수학사랑' 박영훈 선생의 수학사 특강
박영훈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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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폭탄 테러가 일어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 존 매클레인 형사는 5갤런과 3갤런 물통 두 개를 가지고 정확히 4갤런의 물을 담아 테러를 막아야 한다. <다이하드 3>에서 테러리스트가 낸 이 문제를 얼마나 많은 사람이 풀었을지 궁금하다. 수학은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차분하게 고민하는 해결과정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수학은 우리에게 어렵고 지겹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과목일 뿐이다. 즐기지 못하고 극복해야 하는 과목이라는 선입견은 많은 학생들에게 집합과 명제를 넘어서지 못하게 한다.

 

눈을 뜨고 시계를 보면서 시작되는 현대인의 하루는 철저하게 수의 세계 안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부나 시험에서 벗어나 사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수학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수학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법이다. 학교에서 배웠던 수학은 현실에서 적용할 수 없는 문제 풀이 위주의 추상화된 세계가 대부분이다. 다양한 지적 호기심도 자극하지 못하고 현실적 유용성도 없는 분야로 수학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시험과 점수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이런 부담을 덜어내고 수학을 즐기는 방법은 없을까.

 

논리적이고 명쾌한 수의 세계에 매료되면 그 어떤 분야보다도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을 주는 분야가 수학이다. 강석진은 <수학의 유혹>을 통해 이러한 즐거움의 세계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작가의 수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다. ‘미쳐야 미친다’는 말도 있지만 수학에 미친 강석진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수학의 세계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만큼 재미있고 유쾌하다. 가장 실용적인 학문임에도 가장 추상적인 내용의 문제 풀이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이 책은 수학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할 뿐만 아니라 수학이 왜 재미있는 학문인지 알려준다.

 

수학을 ‘잘’하기 위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이론적인 해설서와 수학공부 비법이 오히려 아이들과 수학을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단기간에 점수가 올라가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수학에 흥미를 느끼고 수학의 중요성을 스스로 체득하는 데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책이다. 결코 만만치 않은 내용들을 설명하면서도 수학적 원리와 문제 해결 과정을 알기 쉽게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는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다. 축구공의 표면을 덮고 있는 정다면체의 비밀을 수학으로 설명하면서 우리가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들일수록 수학의 숨결과 신비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강석진은 수학이 우리 생활을 더욱더 풍부하고 깊이 있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는 믿음을 준다.

 

이렇게 즐겁고 편안하게 실제 생활에서의 유용성과 재미를 통해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면 수학의 기원을 더듬어 볼 차례다. 박영훈의 <기호와 공식이 없는 수학카페>를 따라가면 또 다른 수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오로지 공식을 외우고 수많은 기호를 통해 정해진 답을 찾는 것이 수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 수학의 기원을 살펴보자. ‘우리의 삶에는 끊임없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등장한다. 수학은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며, 수학이라는 학문은 인류가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축적한 문화유산’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수학에 접근하는 자세를 바로잡아준다. 우리의 인생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 수학이라고 말하는 강석진의 말이나 문제해결의 도구라고 말하는 박영훈의 이야기는 기능적 수학이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으로서 수학의 역사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고대 철학자들이 수학자들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논리적인 사고와 자연현상에 대한 호기심은 철학자들을 자연스럽게 수학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최초의 수학자 탈레스부터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물론이고 유클리드까지 다양한 수학자들의 이야기를 인문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수학이 시작된 역사의 현장을 찾아 수학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준다.

 

1부터 9까지 숫자 중에 하나를 떠올려 보자. 그 숫자에 9를 곱하고 두 자리 수가 나오면 각각의 숫자를 더한다. 그 수에서 5를 빼고 제곱을 한 다음 2를 더하면 당신이 어떤 숫자를 떠올렸든지 오늘 날짜인 ‘18’이 된다. 마술 같은 수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즐겁고 재미있는 수학을 만나게 된다. 중세 문학을 전공한 앤 루니의 <수학 오디세이>는 단순히 수학의 즐거움을 이야기하거나 수학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학이 발생한 배경과 역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인류 역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된 수학은 시대에 따라 그 발달 속도를 달리한다. 기원전 400년께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심에서 비롯되어 2000년 전 나일강의 삼각주와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사이의 평지 사이에서 단순한 셈 이상의 수학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앤 루니는 수학의 시작인 ‘숫자’에서 시작해서 수열, 기하학, 삼각법, 대수학과 방정식은 물론이고 미적분과 통계에 이르기까지 수학의 전 영역의 기원과 발생 과정을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로 풀어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고민한다. 문제해결 과정은 뛰어난 상상력과 추론 능력이 요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수학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 수학적 사고력을 기르려면 공식과 계산에 얽매이지 말고 실제 주어진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방식은 세상을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삶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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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절반, 여성 이야기 - 성차별 깨뜨리기 일곱 마당, 개정판 우리 청소년 교양 나ⓔ太 2
우리교육 출판부 엮음, 김혜연 그림 / 우리교육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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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서 행복해요가 우리 사회의 현실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깝게도 이 말은 그저 유혹적인 광고 카피에 불과하다. 이 기만적인 카피는 주방 가전제품을 선택하고 사용하는 것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예쁘고 성능 좋은 냉장고를 살 수 있는 여자가 행복하다는 이 광고에는 우리 사회가 여성을 보는 왜곡된 시선이 숨어있다.  

 

할머니, 어머니, 누나, 여동생, 딸에 이르기까지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를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할 수 있다. 2012년 대법관 후보 12명 중에 여성은 단 한명도 없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객관적인 공정성이 전제된 각종 시험이 아니면 여전히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불이익을 받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전히 히잡을 쓰는 중동의 여인, 할례의식을 하는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 등은 문화의 다양성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심각한 인권 침해가 벌어지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고민하고 생물학적인 성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에서 성역할을 다루는 젠더(gender)의 개념을 통해 여성학은 새로운 분야로 자리 잡았다.  

 

정치와 경제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여성들이 있지만 유럽에 비해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출산율 저하와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대한민국은 빠른 속도로 늙어가고 있지만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장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미래 사회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먼저 여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성은 삶의 주체로 홀로 선다.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의 역할을 벗어나 남성과 능력 경쟁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는 현실은 과거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깨뜨리고 있다. 공정한 경쟁에서 남녀의 능력은 차이가 없다. 차별은 차이와 다르다. 여성이 남성과 다르지만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말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여성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의 절반, 여성 이야기는 성차별을 깨뜨리기 위한 즐거운 놀이마당이다. 실제 여성들의 목소리를 통해 사례중심으로 풀어낸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존재인가를 진지하게 살펴본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단순히 성차별의 문제를 확인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책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이 길들여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대학생들의 발랄한 문제의식과 다양한 사회 현상들에 대한 고민이 즐겁게 펼쳐진다. 문학이나 대중매체에서 여성의 모습은 어떠하며 건강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하는지 살펴본다. 여학생들이 직접 쓴 꽁트 여자는 왜?’, 마당극 다 함께 웃는 명절그리고 다시 쓰는 신데렐라는 많은 생각 거리를 던져 준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한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려는데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경쾌하게 지적하고 즐겁고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려는 노력은 우리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무의식중에 했던 말과 행동들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에 비해 권인숙 선생님의 양성 평등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여성 문제에 접근한다. ‘평등의 방법과 태도는 다양하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자다움여자다움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머니의 희생을 미화하고 강요했던 과거 우리 사회의 모습과 다이어트와 외모지상주의 문제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꼼꼼하게 짚어본다. 청소년의 눈높이에서 여성의 특성은 물론이고 남성과의 불평등 문제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다. 단순히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볼 것이 아니라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아 대등하고 당당한 여성의 삶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주는 책이다. 

 

나임윤경은 여자의 탄생을 통해 여자의 일생을 살펴본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여성은 사회적으로 암묵적인 차별을 받는다. 작가는 여자의 생애 전체를 자신의 경험과 여성학 이론을 바탕으로 섬세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여성으로 길러지는 과정의 문제점, 학교에서 남학생과의 강요된 차이, 사춘기에 느껴야 하는 정체성을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사랑을 할 때도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빠지는 이유와 데이트 비용의 불평등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돈을 벌고 결혼하는 과정, 아줌마가 되어 받아야 하는 편견어린 시선에 대해 점검해 보자. 이 책은 여자로 태어나 철저하게 여자로 길러지고 여자로 살아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작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녹여내고 있기 때문에 친근하면서도 어렵지 않게 여성의 문제를 인식하고 그 대안까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책이다.  

 

남자든 여자든 어느 한쪽의 성을 가진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사회는 불가능하다. 지속가능한 사회, 모두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왜곡된 시선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불행하게 한다. ‘더불어 함께사는 지혜는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점에서 평등한 관계를 이루는 데 있다. 젠더(gender)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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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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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 때로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도망치려 했던 사람으로서, 이 소설이 끝을 맺어 기쁘다.

 

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는 독자들을 상상해 본다. ‘(,욕망)’(, 규범)’로 자신을 드러낸 김두식이나 우연과 필연 사이의 알 수 없는 인생의 간극을 드러내려는 은희경이나 그들이 말하려는 것은 인생이 아닌가.

 

모든 우연과 우연이 겹치고 스며 우리의 인생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불안과 혼란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에 대해 환멸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은희경의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의 가제본을 단숨에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상상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읽었던 김두식의 욕망해도 괜찮아때문인지 몰라도 소설가 요셉이 몸담고 있는 속물세계와 비루한 일상성 그리고 대책 없는 감상은 장삼이사들의 하루하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래전 어느 봄날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통화중인 한 여자를 바라보는 한 남자의 시선은 운명에 회오리를 몰고 온다. 그것이 바로 아이러니한 인생의 우연이고 그 우연은 의 서사를 만든다. 소설 전체의 액자에 해당하는 이 사건은 내부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모든 사건들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그저 와 연결되는 한 변곡점을 암시할 뿐이고 그 변곡점은 절대적인 서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역할이 아니라 계획될 수 없는 생의 이면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읽힌다. 아무려면 어떤가. 어차피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을 영원으로 가정한 채 달려가는 것이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소설의 내부 이야기는 소설가를 통해 문단권력이나 상업주의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어떤 분야와 조직이든 유사한 문제는 있다. 다만 그것에 대한 풍자와 반어 그리고 냉소적인 문체는 이 소설이 지닌 통속성을 갈음하는 것 같아 깔끔하게 읽힌다. ‘요셉두 사람 중 누가 태연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할 필요는 없다. 마치 호수 표면에 우아한 백조의 발놀림처럼 누구나 그렇게 태연을 가장한 채 혼란과 불안을 위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면과 분위기가 영화 <북촌방향>이 떠오르게 했지만 전혀 다른 곳의 시선들이 하나로 모이기도 하고 하나로 모였던 시선들은 제각각 인물들 속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조언과 충고를 구하는 사람도 질색이었다. 의욕적인 계획을 늘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원할 뿐이다. 충고를 구하는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희망을 기대했다. 비관이 신중함이고 냉정해야만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는 요셉의 충고는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 결국 시간만 아까웠다. - 19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밑줄 긋기였다. 소설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다. 자꾸 빨간펜을 찾게 되는 것은 공감의 다른 표현이다. 유사한 상황이었던 순간이 떠오르거나 작가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당혹스럽기도 하지만 소설의 군데군데 밑줄 그은 대목만을 들여다보며 작가의 말을 대신 떠올리는 즐거움을 누리기도 한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 241

 

흔해 빠진 이야기의 통속성도 문장으로 확인하고 나면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은희경의 소설이 서사 위주의 재미와 첨예한 갈등으로 인한 긴장감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한 분위기의 술자리처럼 느슨하게 읽히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이런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 243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과 슬픔은 무엇일까. 독자들은 자발적인 소설의 소비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 것일까. 그 나름의 이유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소설을 만나는 것은 어렵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면서 최소한 다른 즐거움을 포기한 기회비용이 생각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니, 그 다른 즐거움들에 대한 냉소를 키웠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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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해도 괜찮아 - 나와 세상을 바꾸는 유쾌한 탈선 프로젝트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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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정으로 당신이 욕망하는 것인가?” 그는 우리 욕망의 대부분이 자신의 욕망이라기보다 타자의 욕망이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던 것입니다. - 강신주, 상처받지 않을 권리, 머리말

 

철학자 강신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의 욕망을 분석하기 위해 라캉을 데려온다.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런 말이 아닐 수 없다. 내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있다는 말의 아이러니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를 통해 기호에 대한 욕망을 강조했다. 생산이 아니라 소비를 욕망하는 현대사회의 뒤틀린 욕망을 비판하고 있는 시선을 또다시 점검하자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안의 숨은 욕망을 부정하는 이유와 그러한 욕망을 드러낸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 음험한 시선과 들키고 싶지 않은 당신의 욕망에 대해.

 

누군가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말했고 또 누군가는 논어가 사람의 길을 열었다고 말한다. 유교적 질서는 그만큼 한국인의 삶에서 중요한 화두이면서 상반된 관점을 드러낸다. 우리 문화의 중요한 축을 이루면서 행동의 준거 기준이 되었지만 그 부당함과 문제점이 일시에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지배해 온 이데올로기가 바로 유교적 윤리다. 처음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해서 스스로 서열을 결정하고 온 가족이 마치 가족인 것처럼 형, 누나, 동생으로 지칭하는 버릇이 그러하다.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고 세월은 간다. 태어난 순서, 직장에서의 경력이 도대체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개인의 노력과 능력 그리고 사유 방식이 아닌 것으로 관계를 설정하려는 불편한 방식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어느 조직이든 그것부터 확인하려는 전근대적 태도를 일시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욕망이라니!

 

 욕망해도 괜찮아를 통해 꺼내기 조차 불온한 언어를 꺼내 든 김두식의 용기에 일단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 욕망)과 계(, 규범)을 키워드로 풀어내는 개인적 삶에 대한 고백은 누구든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용기에 해당한다. 불편해도 괜찮아와 유사성을 떠올리도록 한 제목은 출판사의 상업주의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국가인권위에서 기획한 인권이야기가 담겨있는 불편해도 괜찮아의 판매고에 힘없어 책을 팔려는 의도 이외에 욕망해도 괜찮아불편해도 괜찮아와 전혀 무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욕망해도 괜찮아불편해도 괜찮아에 못미치는 불편한 책은 아니다. 멘토 과잉의 시대, 자기 계발서 범람의 시대, 스펙 올인의 시대에 김두식의 고백은 오히려 불순한 현학적 자기 고백의 욕망에 충실한 책이다. ‘100퍼센트 장학금으로 스물일곱살에 미국에서 박사를 딴 후 서른한 살에 교수가 된 형이나 스물네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김두식은 우리 사회에서 성공한(?) 축에 드는 사람들이다.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저자는 부부 교사였던 부모님의 경제적인 상황을 자 가족의 사자 가죽으로 풀어냈지만 우리 사회의 99% 입장에서는 1%의 엄살로 비칠 뿐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타인의 죽음보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한계다. 김두식의 사회적 계급과 경제적 계층을 고려하면 하품나는 자기 고백에 불과하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해서 중산층 일반의 시선으로 이 책을 바라보면 그 어떤 책보다도 솔직하고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어쭙잖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욕망과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힘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불안한 욕망을 나이브하게 드러낸 김두식의 글은 읽는 사람의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욕망과 규범의 갈림길에서 갈등한다. 그것을 색과 계로 읽어내며 영화 , 의 두 주인공의 관계로 풀어내고 있다. 양조위와 탕 웨이의 관계는 색과 계의 충돌이다. 하지만 결과는 위태롭고 불안하다. 그것을 조절하며 자신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실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 어느쪽을 선택하든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후회가 남는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굳이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욕망을 인정하는 일로 시작하는 이 책은 학벌문제와 희생양, 신정아와 똥아저씨, 정신 승리의 비법, 중산층의 은밀한 욕망, 몸과 살의 소통 등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례를 통해 때로는 김두식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며 고백은 나의 힘이라고 외치는 이 책은 새빨간 표지만큼 발칙하다. 그래서 단숨에 읽히며 읽고 나서도 한동안 쓴 웃음을 짓게 된다. 세상의 모든 뒷담화에 던지는 도발이며 드러내지 않은 음험한 욕망에 대한 냉소다.

 

자기를 계발하라고 부추기는 세상의 모든 책들, 모르는 것을 가르치겠다는 세상의 모든 멘토들, 내가 아니면 이 나라가 망할 거라고 믿는 세상의 모든 정치인들 그리고 그 모든 사람을 손가락질하는 세상의 장삼이사들이여 진정 용기 있다면 이 책을 읽고 김두식에게 손가락질을 하시기를. 나는 내 손이 부끄러워 슬며시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다.

 

 

120606-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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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대학 가서 누리라고요?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청소년 인권 이야기
김민아 지음 / 끌레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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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 우리 삶의 현실을 읽는 사회 - ④ 인권 한겨레신문 연재 /

2012/06/04 23:4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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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은 대학가서 누리라고요

작가
김민아
출판
끌레마
발매
2010.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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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해 어퍼컷

작가
육성철
출판
샨티
발매
200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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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ㅋㅋ

작가
공현
출판
메이데이
발매
2009.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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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이래 학생들이 반세기 이상 입어오던 검은 교복을 하루아침에 벗어버리고 사복착용으로 바꿔 입었을 때 대부분 학부모들은 이로 인해 청소년범죄가 늘어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동아일보, 1984. 3. 30) 지나간 신문을 뒤적여보면, 1980년 교복 두발 자유화 이후 언론은 학부모들을 내세워 부정적 여론을 주도한다. 심지어 교복자유화이후 디스코클럽을 찾는 고교생들이 부쩍 늘었다. 이같은 현상 때문에 청소년들의 행태가 점점 향락 지향적으로 흐른다는 지적이 많다.’(동아일보, 1984. 12. 15)는 기사를 보면 웃음이 난다. 교복 자유와 이전에는 학생들이 디스코클럽에 교복을 입고 갔을까. 교복이 자유화되고는 디스코클럽에 간 학생은 그 전보다 얼마나 늘었을까. 교복을 벗으니 향략 지향적으로 흐른다는 지적을 한 주체는 누구였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28년 전 신문기사가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프레임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한 보호와 선도를 명목으로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권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그 적용대상과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사회적으로 합의하지 못한 상태에서 청소년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의 성장과정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왜냐하면 추억은 모든 기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써니>40~50대 중년들에게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파는 향수 마케팅에 불과하다. 요즘 청소년들에게는 아무런 재미도 감동도 없다. 부모 세대가 겪었던 학창시절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보편적 인권은 국가인권위회가 설립된 21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소년의 인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아직도 학교 담장을 넘어서지 못한채 학교 붕괴, 교권 침해 문제와 맞물려 인과 관계를 찾지 못하고 사회적 논란만 거듭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인권의 기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미국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토머스 페인은 1791년에 발표한 인권에서 인간의 평등권이라는 찬란하고 거룩한 권리는(그 기원이 인간의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생존한 개개인에게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뒤를 잇는 사람들의 세대와도 관련된다. 각 세대는 그 앞서간 세대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그와 같은 원칙에서 각 개인은 그 동시대인과 평등한 권리를 갖고 태어난다는 말을 통해 인권의 기원은 자연권임을 주장하고 있다. 시대와 세대를 뛰어넘어 인간이 갖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는 어떤 이유로도 어떤 제도로도 제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최현의 인권시민권차원에서 인권이란 무엇인지 살피고 있다. 프랑스 국회가 1789년 헌법 서문에서 채택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처음 등장하는 인권이라는 용어는 시민권과 동시에 탄생한다. 자연법에서 출발한 인권의 기원을 살펴보고 고대의 시민권의 변화를 알아본 후 근대 인권 사상과 시민권 제도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주로 서양을 중심으로 홉스와 로크, 루소 사상의 핵심을 살펴본 후에 근대 국민 국가인 프랑스의 사례를 점검한다. 현대사회의 인권은 여성과 다문화 등 보다 보편적이고 폭넓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 책에서도 지구 공동체 차원에서 인권의 개념과 범위를 확장 시키자는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시대의 변화와 사회 변동에 따라 인권의 개념도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의 현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특히 청소년 인권의 현주소는 어디쯤일까. 

 

김민아의 인권은 대학가서 누리라고요?나이가 어려도, 공부를 못해도, 대학을 가지 않아도 나는 지금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부제처럼 청소년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학생만 청소년이 아니다. 비학생도 청소년이다.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권리의 주체로서 청소년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중요하다. 아동권리협약, 유네스코 교육차별금지협약 등 본문 관련 조항들을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 배치해서 독자들에게 주장의 근거와 타당성을 제공하고 있어 설득력을 더하고 있는 책이다. 권리는 유예될 수 없으며 지금-여기가 중요하다. 청소년의 인권도 마찬가지도 가고 싶은 학교,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 책임은 성인들의 몫이다.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는 사회, 청소년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학교,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능동적 주체로 자녀를 인정하는 부모가 먼저 청소년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육성철은 세상을 향해 어퍼컷을 통해 서른여덟 명의 인권지킴이들을 인터뷰했다. 인터뷰이는 실제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해낸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는 청소년과 장애인, 비정규직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강제 이발을 진정한 이태준, 비학생 청소년 차별을 진정한 박호언, 비정규직 청소부 김순자,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진정한 양지운, 색각 차별을 진정한 김민수 씨 등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지 않으면 인권은 남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일지라도 생각은 조금씩 다르다.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무언가를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개인의 이익과 주관적인 취향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서 비롯된다. ‘인권 감수성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처지를 이해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는 감성.”이라는 국가인권위 김창국 초대위원장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120604-056~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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