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친구 맞아? - 청소년을 위한 관계의 심리학 창비청소년문고 12
이남석 지음 / 창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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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킨 실타래를 푸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르기아스의 매듭을 자른 알렉산터 대왕처럼 단칼에 잘라 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 얽힌 실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는 것이다. 칼로 잘라 버리는 게 쉬워 보이겠지만 다시 돌이킬 마음이 없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에서 의지력이 약한 사람에게는 아주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실타래를 확 집어 던지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고통을 감내할 용기도 있어야 한다.” - 106

 

관계적 공격relational aggression이란 관계나 우정, 소속감을 훼손하거나 훼손하겠다고 위협하며 남을 공격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공격 대상을 집단으로 따돌리거나 무관심, 침묵으로 일관한다. 악의 있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상처를 주고서 농담이나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관계적 공격은 신체적 공격과 달리 매우 심리적이다. 공격받은 사람은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입거나 우울증과 무력감 혹은 자살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가해자는 그것이 관계적 공격이 아니라 피해자 탓으로 돌리기 쉽다. 이는 청소년기의 또래 집단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성향이 아니라 어느 조직이나 공동체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당신은 관계적 공격자가 아닌가?

 

우정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심리적 관계 양상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피를 나눈 사이라고 일컬어지는 가족은 물론이고 이해관계를 떠나 유년시절에 맺었던 친구 사이, 성장 후에 맺은 각종 친목 모임과 조직에서의 관계, 직장 동료, 동네 이웃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맺는 인간관계는 무한하다. 그러나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고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별로 많지 않다. 아무리 발이 넓은 사람이라도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편안하게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5~6명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이해관계를 떠나 신뢰 관계가 형성되기란 부부의 인연을 맺는 것보다 힘들다. 보이지 않는 갈등과 손익계산에 따라 머릿속에서 두드리는 계산기의 결과에 따라 사람들은 원근을 조절하고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어쩌면 인간의 모든 관계는 시간이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 된 관계일수록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일정 시간이 흐르고 나면 타인을 조금 더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첫 눈에 반해버린 이성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제외된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우정, 친구, 멘토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관계나 감정은 단기간에 쉽게 형성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는 더욱 그러하다. 24시간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시대에 우정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며 친구의 범위와 한계로 다시 설정해야 한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 매일 마주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받아야하는 상황을 한번쯤은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이남석은 우리 친구 맞아?라고 확인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쓰인 관계의 심리학이지만 읽다보니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불완전하고 미성숙한 나의 문제일수도 있으나 그 잣대로 타인을 평가해 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친구와 우정은 전부일 수 있다. 이남석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 청소년기의 관계를 톺아본다. 스토리텔링은 흥미를 유발하며 읽는 재미를 준다. 설흔의 우정 지속의 법칙이 우정의 의미와 방법론에 방점을 두었다면 이남석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뻔한 이야기로 우정의 의미를 살피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설교하는 게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관계 양상을 주문한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일은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가 풀어야할 숙제다. 하지만 그 모든 관계를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헤쳐 나가라고 할 수만은 없다. 친구와 이별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후 버림받았다고 울부짖는 사람이 겪는 감정의 착각을 정확하게 짚어주는 대목이 이채롭다.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 몸문화연구소의 내 친구를 찾습니다는 관계 자체에 집중한다. 연애, 우정, 스마트폰과 SNS, 나와 나의 관계, 가족, 어른과 권위, 연예인 팬덤, 관계중독, 멘토링에 대해 아홉명의 멘토가 나섰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청소년에게 의미있고 깊이있는 대화를 시도한다. 여기서 인문학적 관점이란 우리가 맺는 관계의 근본원인과 사회적 의미를 살펴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맺어야하는 관계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과 사회적 의미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사람마다 다른 환경적 차이와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기대, 롤모델로 삼은 사람, 사회적 평가, 직업과 집단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한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사회문화적 토대의 다양성이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소통나눔배려의 가치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래야만 한다는 당위성을 부정하긴 힘들다. 그러나 이제 관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페이스북, 트위터, 카톡 등 매일매일 관계를 맺고 정보를 나누는데도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면 자신의 관계를 돌아보라. 그리고 다시 한 번 겉과 속을 뒤집어 보자.

 

그렇지 않으면 후회할 거야라는 수많은 꼰대들의 외침을 들어야할 지도 모른다. 강신주를 비롯한 18명의 꼰대스럽지 않은 꼰대들이 10대들에게 던지는 후회할 거야는 본인들의 후회를 버무려 놓았다. 사람들이 말하는 스탠다드한(?) 성공의 길이 아니라 진짜(?) 인생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감히 그들에게 후회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다만 그들보다 아주 조금 먼저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색다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은 인생에 대해 할 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뻔한 멘토링이 아니라 현실적인 잔소리가 필요하다. 후회하지 않는 인생은 없다. 살아보지 않고 세상을 속단할 수도 없다. 만나보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해 판단하기 어렵다. 그래서 인생은 여전히 저지르는 자의 것이라고 믿는다.

 

그 믿음 때문에 비록 인생이 어그러질지라도 말이다.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은 미국 대공황 시절의 어둠을 배경으로 친구와 우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영특함과 미련함, 거대함과 왜소함 등 서로 상반된 모습의 친구 레니와 조지는 가난불안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울한 현실이냐 우정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이분법적 신파가 아니다. 작가가 보여주려고 한 현실보다 우정의 깊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해공감이다. 그것은 나의 관점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이 우선이다. 내가 옳다, 우정은 이것이다, 이 가치가 우선이다, 이래야 한다, 너는 틀렸다, 는 너의 논리가 나는 제일 무섭다. 우정은 너를 고쳐주겠다는 배려도 아니고 너의 생각에 공감하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는 고집도 아니고 나와 같은 목적과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과의 소통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똘레랑스가 우정이다. ‘생쥐와 인간은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도전과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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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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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은 정확한 해석을 바탕으로 대상을 재배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모호한 심적 멜랑콜리가 아니라 대상을 명확히 밝혀 제 자리를 찾아주는 경건한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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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141130-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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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풀도 아니고 북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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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2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책을 엄청 많이 읽으시는군요. 존경스럽네요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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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의 시작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프롤로그로 요약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말해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설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발적인 변화와 인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살아온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공감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낭만적 혁명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적 사랑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오히려 혁명을 비현실적 꿈의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 의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랑은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한 작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더운 여름 일요일 저녁 공원을 거닐 듯 가벼운 마음으로 치유 받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인문학적 산책의 동반자로 어울린다. 류동민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책 말미에 덧붙이듯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가리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김훈, 슬라보예 지젝, 홍상수의 <북촌방향>, 알랭 드 보통, 루이 알튀세르, 마오쩌뚱, 폴 스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하준이 그들이다. 폴 스위지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의 책들을 한 두 권씩 읽어보았고 <북촌방향>도 보았다고 해서 류동민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만 남겨지는 이 책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마르크스식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단기적인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6이라고 강조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과학적 논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6)라고 선언한다. 고개를 들고 문득 인문학적 상상력사회과학적 논리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떤 소통과 믿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위무되는 행위인지.

 

책을 쓰면서 책 읽기를 통해서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7)라는 말에 밑줄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그 배움의 의미 반대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서로 가 닿지 못할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 한 번째 테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았을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3)라고.

 

이 책의 구조는 --사회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관계 양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작동원리를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삶의 태도를 기웃거린다. 관계의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거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는 공산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와 자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엇갈림의 클리나멘이 때문이다. 저자는 클리나멘은 사물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엇갈림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78)라고 정리하지만 인과관계와 논리에서 벗어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또한 관계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과 권력의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힘이 배분되는가의 문제이지, 대상에 대한 절대적 힘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질투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 203

 

타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작동원리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노력은 게으른 자의 또다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모든 자유를 허락하라는 경구는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이미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229)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1인치의 논리도, 합리적 판단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 그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으려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 류동민과 함께 떠나는 마르크스식 자기 치유 산책 프로그램에 동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했던 여정, 즉 개인의 자기소외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을 분석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냉철함과는 다른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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