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정의 - 백수 기자와 파산 변호사의 재심 프로젝트 셜록 1
박상규.박준영 지음 / 후마니타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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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의 플레이는 아름답다. 종목과 상관없이 모든 동작이 자연스럽다. 물흐르듯 거침없고 억지스럽지 않다. 메시와 호날두는 나달과 페데러와 비교된다. 나는 메시와 페데러의 스타일이 좋다. 원고를 마무리하는 날 호주 오픈 16강에서 한때 세계 랭킹 1위였던 노박 조코비치를 3:0으로 이겼다. 두 번이나 캘린더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호주의 전설 로드 레이버는 이 경기를 멀리서 지켜봤다. 그리고 오늘, 정현은 싱겁게 8강을 통과했다. 준결승 상대는 황제칭호가 붙은 로저 페데러. 무명의 선수들은 그렇게 거장의 벽을 넘는다. 세월은 가고 영원한 승자는 없다. 지구처럼 공은 둥글다. 한때, 화려했던 명성과 막강한 권력과 엄청난 부귀영화도 찰나에 불과하다. 언제나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다. 통장 잔고, 아파트 평수, 사회적 직위는 어떻게 그의 손에 들어갔을까. 우리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권력을 거머쥐는 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라. 승진을 준비하는 교사, 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관리자, 진급을 노리는 장교, 당선이 목적인 정치인, 경찰과 검찰의 승진 체계는 참담하다. 86년생 정현이 호주오픈 4강에 오른 날, 영화 1987를 미루고 있는 것처럼 오래 미뤘던 책 지연된 정의를 펼친 건 실수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사람은 때로 벼랑 끝에 서야 합니다. 걱정마세요. 살길이 열릴 겁니다.”

도망자로 한 세월을 산 류영준의 말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됐다. 슬픔과 상처 없는 사람 없듯이, 불안과 걱정 없는 인생 역시 없을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떠날 준비가 아니었다. 글쓰기에는 마감이 필요하듯이, 어떤 선택에는 준비보단 결단이 더 중요하다. - 18

 

박상규 기자와 박준영 변호사의 재심청구 사건 기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추악한 이면이다. 아름답고 즐거운 뉴스로 가득한 세상은 불가능하다. 파산 직전 변호사와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헤매던 기자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관심이 없으면 보이지 않으니.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 치사사건은 시작에 불과하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어떤가. 아직도 진행 중인 완도 무기수 김신혜사건. 지연된 정의는 지연된 인생보다 비참하다. 유우성 간첩조작 사건을 다룬 영화 자백부터 유서대필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씨에 이르기까지 역사책에서 경험했던 야만의 세월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외면하거나 눈감을 뿐. 그 누적된 시스템의 오류가 이명박근혜를 낳았고 원세훈, 김기춘을 만들었다.

 

황당한 범인 조작 사건의 발달은 대개의 경찰의 사건 조작과 검찰의 동조, 판사의 동조로 마무리된다. 완벽한 팀웍이다. 삼박자가 딱딱 들어맞는다. 가짜 살인범 3인조는 형사 장해구와 오재경이 조작했고 김앤장에서 돈벌레가 된 검사 최성우가 진범을 다시 풀어준다. 이명박 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던 당시 검사장 이종찬은 진실을 외면한다. 진범이 자백하고 조작된 사건 기록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티는 이유는 자신들의 명예, 권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한 돈벌이 때문이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신체적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한 국가의 폭력은 최악이다. 누명은 벗었지만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지도 피해자들에게 사과하지도 않는다. 뻔뻔해야 잘 사는 법.

 

국가가 존엄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은 삼례 3인조를, 고졸의 가난한 박 변호사가 사람으로 대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 박변호사의 변론은 거기서 출발하고, 다시 거기로 향했다. 박 변호사는 그걸로 싸웠고, 그걸로 이겼다. - 114

 

중국집 배달을 하던 15세 소년이 누명을 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진범이 나타나 황상만 형사가 집요하게 매달렸으나 검사는 끝까지 기소하지 않았다.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한 사람의 인생보다 중요한 건 자신들의 승진과 성공이었으므로. 묻고 싶다. 〇〇 형사, 정종화 검사, 김훈영 검사는 잘 살고 있나? 행복한가?

 

하지만 저는 죄가 없습니다.” K가 말했다.

……

그건 맞습니다.”

그러나 죄 있는 자들은 늘 그렇게 말하곤 하지요.”

_프란츠 카프카, 소송중에서

 

사건은 모두 그렇게 시작됐다. 완도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수가 된 김신혜씨 사건도 그러하다. 강성구 형사는 보고있나?’

 

이 책은 지연된 인생을 사는 변호사와 기자의 활약기가 아니다. 확신의 함정에 자들이 벌인 명백한 실수 혹은 의도된 오류에 대한 보고서다. 그들은 개인적인 영달과 포상과 승진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이용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라 함은 결국 공권력을 휘두르는 경찰과 검찰과 법원 조직에 몸담고 있는 인간의 실수와 오류다. 그러나 바로 잡히지 않고 바로 잡을 생각도 없다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법은 더더욱 정의와 거리가 멀다. 눈뜬장님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읽고 생각하고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한다. 등따시고 배부른 돼지의 죄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물었다. 손석춘의 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후 오랜만에 다시 보는 후마니타스의 우리시대의 논리가 여전해서 반가웠지만 우리 사회의 이면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텍스트로 확인되는 그 깊숙한 행간의 그림자는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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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전쟁 - 소비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김영준 지음 / 스마트북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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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을 따를 수 없소.”

그럼, 인연을 끊어요.”

 

그렇게 결심한 후 그가 선택한 삶의 길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을까. 에릭슨이 말한 결정적 시기는 생애주기마다 반복된다. 영화 나비효과를 비롯해서 타임 패러독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하루, 슬라이딩 도어즈, 롤라 런처럼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 법. 선택은 잔인하고 결과는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합리적이지 않다.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의 기준에 따라 선택할 수도 없고 손익계산서를 놓고 따질 수도 없다. 말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버튼을 누른다.

 

모든 선택은 부조리하다. 자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결정은 어떤가. 선택지가 없었던 사람부터 놀이로 시작한 사람까지 상황과 맥락은 제각각이다. 업종, 입지, 시기, 투자금액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누가 성공했든, 또 누가 문을 닫았든 결과에 따라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인지부조화가 발생하지 않도록, 귀인이론에 따라 그럴듯한 혹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창업에 관한 행정 절차와 세법 등 객관적 규정을 제외하면 단 한 군데의 영업장도 동일한 조건은 없다.

 

대왕 카스테라, 벌꿀 아이스크림부터 코인노래방, 인형 뽑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영업의 메커니즘을 한 권의 책으로 배우려는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다. 사람들은 흔히 누군가에게 세상 사는 게 그렇게 만만해보여?’라는 말을 내뱉지만 사실 그 말은 자기반성이다.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누가 똑같은 생각과 감정과 능력과 배경으로 똑같은 삶을 살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건 먼저 살아본 사람들의 오만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자식을, 제자를, 후배를, 가족을, 친구를, 어린 사람을 함부로 가르치려 들지 말라.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닌 기억이 선하다. 김영준의 골목의 전쟁은 전통 시장과 대형마트 사이에 놓인 자영업자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오해를 풀지도 진실을 찾지도 못했다. 김형준은 상품 가격의 결정과정, 자영업의 성패, 유행의 함정, 상권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나름의 시각으로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골목의 자영업을 분석한다. 현실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서 본질적 원인을 읽어내는 안목은 개인의 능력이다. 사적 경험과 통계 수치, 이론적 근거가 더해지면 믿음이 된다.

 

이 책의 장점은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혹은 선택의 여지없는 자영업이라는 이슈다. 익숙한 소재 선택, 알려진 사실에 대한 분석, 간과하기 쉬운 오해를 쉽게 풀어낸다.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설명하고 근거와 이론으로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하거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의 의지는 없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판세를 정확하게 분석하고 실패하지 않기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전략에는 분명 도움을 준다.

 

쉽게 말하자면 알아둬서 나쁠 건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가독성 있는 문장과 모든 사람이 일상에서 접하는 자영업은 누군가의 생업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미래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의 고통일 수도 있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경제의 흐름으로 트렌드와 라이프사이클의 변화로 자영업에 접근하는 책도 있겠지만 이 책은 그 모든 것을 현실적인 문제로 녹여버린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경제학 박사가 떼돈을 벌 수 없듯이 이 책을 읽고 자영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실수와 착각을 줄이고 오해와 편견을 없애는 역할로 받아들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안타까운 건 김형준의 분석과 조언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변화 가능성과 미래는 전혀 예측 불가능한 영역이라는 데 있다. 행동경제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자영업을 시작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마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시장 경제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대기업 프랜차이즈의 불공정한 계약과 갑질 논란, 대기업의 중소기업 기술 탈취, 재벌 3~4세의 떡볶이와 순대까지 체인점까지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할 구조적 문제만 해결해도 자영업자들의 숨통이 조금은 트일 수 있다. 치열한 경쟁과 임대료 문제가 관건이지만 자영업자는 창업의 문제일 뿐 아니라 내 가족, 친구, 이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용적 목적으로 읽힐 수 있는 책이지만 우리 사회의 단면을 이해하는 잣대가 될 수도 있다. 눈앞에 현실을 외면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경제 비판서는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다. 골목에 전쟁대신 평화가 찾아오길, 무엇보다 우리 삶이 전쟁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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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 조지 오웰 평론집
조지 오웰 지음, 조지 패커 엮음, 하윤숙 옮김 / 이론과실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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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인터넷은 놀랍고 신기하다. 성인이 된 후에야 모뎀으로 겨우 접속하던 시절. 한석규와 전도연처럼 영화 같은 일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네트워크 세상은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우매한 군중은 직접 민주주의에 버금가는 여론을 형성한다.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개인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던 시기에 벌어졌던 신은 죽었다의 재현이었다. 통제된 언론과 권력기관의 압력은 석기시대의 전설이 되었다. 대신, 실시간으로 퍼지는 뉴스와 sns을 통해 확산되는 사건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홍수에 휩쓸리듯 전체 판을 읽지 못하는 분노, 혐오, 증오는 확대 재생산된다.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을 하는 사람도 생긴다. 피아 구분 없이 총질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념, 정당, 계층, 성별에 따라 논리와 이성을 상실한 사람도 많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를 법과 인권, 표현의 자유에 대한 쟁점으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할까?

 

대중의 관행과 의견을 의식과 지성을 발휘해 조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사회의 이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권력을 진정으로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정부(invisible government)’를 이룬다는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프로파간다에서 지적한 현대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점은 포퓰리즘과 민심 사이에서 길을 잃은 듯하다. 여론조작은 프로파간다로 가능하다. 언론은 여론을 이끄는 대신 목소리 큰 놈에게 끌려가기도 한다. 질문할 줄 모르는 기자,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로 월급을 받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기자의 기사를 새겨듣는 독자가 사라진 시대는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검색해서 뉴스를 전하면서 기자인척 하거나, 팩트 확인 없이 추측과 사견을 섞어 해설을 하는 기자는 이제 여지없이 걸러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뭘 연구하는지 모르는 연구원이 없는 연구소장이나 혼자 일하는 각종 모임과 단체의 대표처럼.

 

아날로그의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디지털 시대에 비하면 땅 짚고 헤엄치기였을 것.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정보격차 때문. 지식과 정보를 독점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낮에 수평선을 본 사람과 밤에 파도소리만 들은 사람만큼 크다. 조지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에서 천국과 지옥은 같은 곳에 있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41)는 말로 그 시절과 이 시대를 하나로 묶어버린다. 그렇다, 마음의 변화가 없는 제도의 변화는 소용없다. 시스템과 구조를 바꿔도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파간다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음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여성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평화와 비폭력을 내세운 마틴 루터 킹과 폭력과 투쟁으로 맞선 말콤 엑스를 비교할 수 없듯 페미니즘 운동에 메갈리아는 숱한 이슈와 논란을 가져왔다. 지금도 그 논쟁은 계속된다. 시간의 문제일 뿐 변화는 계속된다. 국가의 정체, 권력구조, 경제체제도 끊임없이 변했다. 사람들의 생각도 행동도 변한다. 그러나 자연스런 변화는 없다. 생각의 전환, 실천적 행동이 이어져 변화가 일어난다. 급진적, 일시적 변화를 혁명이라 하고 점진적, 단계적 변화를 개혁이라 하자. 보다 큰 개념인 인권을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다. ‘사형제 폐지는 어떨까.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물론 여성은 남성의 적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보편성과 범용적 원리를 들이밀지 말라는 논리는 타당한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김남주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이렇게 시작한다. 프로파간다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다. 그 방법의 핵심은 제도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구조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늦었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꾸지 못하면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진보는 환영이 아니며 실제로 이루어지지만, 느리게 진행되고 언제나 실망스럽다.”(42)는 말은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선언처럼 아프게 들린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게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은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디킨스 본인도, 빅토리아 시대 대다수 소설가도 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한편 모든 프로파간다가 예술은 아니다.”(78)는 말로 흔들리던 시대의 예술을 평가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소설은 그대로 가공할 무기였다. 글을 쓰는 사람들의 영향력은 지금과 다른 양상이었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세상을 보는 안목이 남달랐다. 그들의 말이 항상 옳고 선경지명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시선으로 사람들에게 변화를 요구했다는 의미다.

 

예술은 글 쓰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20세기를 여는 영화예술은 텍스트와 다른 힘으로 대중을 쥐고 흔들었다. 그것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는 방식대신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을 택했다. 찰리 채플린은 삼류 슬랩스틱 코미디의 달인이 아니다. 조지 오웰은 이 책에는 단 한편의 영화 이야기가 나온다. 위대한 독재자가 바로 그 영화다. 부분적으로만 봤던 영화 전체를 다시 봤다. 채플린은 영화 천재가 맞다. 영화 말미에 나오는 연설만 들어보자.


위대한 독재자》 마지막 연설

 

찰리는 모두가 예상하는 연설 내용과는 달리 민주주의와 관용, 상식적인 예의를 지지하는 투쟁 연설을 인상적으로 펼친다. 아주 대단한 연설로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헐리웃 영어로 바꿔놓은 형태라 할 수 있었는데, 나로서는 오래간만에 들어본 아주 강렬한 프로파간다였다.”(204)는 평가처럼 이 책의 제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는 예술은 찾기 힘들다. 선언적 의미의 민주주의, 자유, 평화, 인권, 평등에 대한 가치 기준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프로파간다는 20세기 예술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전히, 앞으로도 지속되야 할 예술의 가치를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매일 쏟아지는 책과 텍스트는 개인적 기록으로 의미 있는 비평으로 예술 작품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가치또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면 인정받을 수도 없고 그 판단 또한 모호하며 기준 또한 점점 희미해진다. 러디어드 키플링, T. S. 엘리엇, 살바도르 달리, 조나단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조지 오웰의 평가는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한 대로 정치적이다. 어떤 예술이 프로파간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소련은 고속 성장을 보이는 대국으로 과학 연구자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후하게 대우한다. 심리학과 같은 위험한 학문을 가까이 하지 않는 한 과학자에게는 특권이 주어진다. 반면 작가는 극심한 박해를 당한다. 일리야 예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은 막대한 돈을 받고 있지만 그와 같은 작가들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 즉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 - 341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내는 산물이어야 하며, 이 자아는 한쪽에 비켜선 채 진행되는 일을 기록하고 그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일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 결코 속지 않아야 한다.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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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프랑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드니 디드로 외 지음, 이규현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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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파이프가 아니란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라고 하자. 언중言衆들이 모두 라고 했으면 는 비가 아니라 가 된다. 지시하는 언어[형식]와 대상[내용]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만남이 숙명을 가장한 우연이듯이. 이를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라 한다. 이름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르다. 돌은 한국에서만 돌이다. 미국에서는 스톤이라 부른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이를 기표(記標, 형식, 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내용, signifié 시니피에)라고 명명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그림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인가? 그림은 사물의 재현이다. 당연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다. 파이프의 재현일 뿐. 글과 그림을 분리해 보자. ‘이것은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가. 파이프를 그린 그림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평면의 종이만 남는다. 그림으로 보여주려는 파이프와 추상적 개념으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약속인 텍스트는 상호 연관성이 없다. 파이프 그림과 텍스트는 캔버스 안에 동시에 놓여 있으나 이질적이다. 미셸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이 그림은 칼리그람(+그림)이다. 보여주는 것과 말하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 서로를 포개어 놓았다라고 지적한다. 글과 그림을 은폐한다는 말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숨김과 드러냄이라는 표면적 의미와 글과 그림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는 선언은 기존 질서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관습적 사고에 대한 경고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처럼 우리는 벽에 비친 그림자를 실재한다고 믿는다. 교육 제도, 정치적 이념은 말할 것도 없고 윤리와 종교적 교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는, 대다수가 인정하는 이념과 가치는 언제나 위험하다. 당신의 자유의지가 또한 그러하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면 무엇인가

 

드니 디드로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는 소설인가 아닌가. 소설이란 무엇인가. 300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용어인 꽁뜨conte와 누벨nouvelle은 어떻게 다른가. 소설의 이론을 소설로 보여주는 것은 가능한가. 반성적 사고는 새로운 출발의 전제 조건이다. 디드로는 기존의 소설에 반기를 든다. 소설다운(?) 소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면서 스스로 단편소설의 전형을 보여주려는 시도는 자기부정이다. 의심과 질문, 자기부정이 결여된 진보는 가능하지 않다.

 

프랑스의 단편들은 미국, 스페인라틴아메리카, 영국을 거쳐 오며 느꼈던 소설과 차이가 크다. 라틴아메리카의 환상적 리얼리즘과 또 다른 환상과 현실의 공존이다. 현대소설은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 즉 개연성 있는 허구를 전제로 한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한정짓는 어리석은 이론을 들추자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근대 이전의 서사문학과 다른 특징에 대한 이야기다. 꿈과 환상의 나라로 떠나는 여행은 여전히 계속되지만 프랑스의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며 독자를 혼란스럽게 한다. 고전소설의 전매특허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 구별되는 혼란이다. 발자끄의 붉은 여인숙과 메리메의 푸른 방은 그 자체로 사건의 재미를 보여주지만 문신론자들의 저녁식사, 씰랑스, 코프퓌아 왕에 이르는 동안 내용은 고사하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끌레지오의 륄라비와 블랑제의 낙서에 이르러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언어 자체가 환상이다. 소설은 세계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소설은 세계를 창조한다. 프랑스의 단편을 읽는 동안 지금-여기의 관점으로 세계문학을 읽으려는 어리석음이 그때-거기의 모습을 들여다보려는 욕망을 앞섰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봄 밤, ‘사랑이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면 누구도 그녀를 나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블랑제, 낙서, 458)라는 낙서만 남았다. 멀리 신호등에 걸린 자동차의 붉은 등이 흐릿하다. 일단 멈추지 않으면, 달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는다. 어둔 밤길 조심.

 

나는 밤을 열렬히 사랑한다. 사람들이 조국과 애인을 사랑하듯 나는 본능적이고 물리칠 수 없는 깊은 애정으로 밤을 사랑한다. 내 모든 감각으로, 밤을 보는 내 눈으로, 밤을 호흡하는 내 후각으로, 밥의 정적을 듣는 내 귀로, 어둠이 어루만지는 내 살갗 전체로 밤을 사랑한다. - 모빠쌍, ,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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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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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을 즐기는 방법 - 구글 지도와 유투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 공간은 사건에 선행한다. 작가는 가상공간에 인물과 사건을 배열하기도 하고,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창조하고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간은 이미 작가의 실존적 경험이나 상상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기막힌 공간을 창조한 작가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오마주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릴리퍼트와 브롭딩낵을 거쳐 라퓨타를 완벽하게 창조했을까. 수많은 신화, 전설, 민담의 공간을 차용했다. 어떤 공간을 창조하느냐에 따라 문학 작품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공간의 구조내지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문학적 공간에 적용해 보면 현실상상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 경험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실감나게 몰입하는 재미가 있다. 반면에 옷장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나니아 연대기식 상상력은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어느 쪽이든 세밀한 구조를 만들고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재창조된다.

 



로드 무비의 대명사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에서 나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OST를 다시 듣는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마틴과 루디, 세상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던 델마와 루이스. 그들이 달린 길은 공간적 구조가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드러내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는 공간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설이다. 1947~1949년의 미국의 길은 어땠을까.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간다. 다시 타임스퀘어로 돌아오기까지 13,000킬로미터의 대장정. 덴버에서 딘을 만나지만 1부는 오로지 샐 파라다이스 자신의 여행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미동부에서 서부로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이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대도시와 중도시를 계속해서 찾았다. 구글 지도를 펼쳐 확대 축소를 반복하며 뉴욕 주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샅샅이 훑었다. 책 앞쪽에 1~4부까지 이동 경로가 나오지만 항공지도와 구글 지도를 따라가며 읽었다.

 

2부는 샐과 딘, 메릴루, 에드 던컬이 함께 떠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전을 하며 이동한다. 3부는 샐과 딘, 샌프란시스코에서 롱 아일랜드까지 기록이다. 4부는 샐, , 스탠, 셰퍼드가 덴버까지 가서 남쪽으로 멕시코시티까지 간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 왕복 후 국경을 넘는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눈보라와 싸우며 이어진 길들은 그대로 500쪽이 넘는 소설이 되었다. 두툼한 소설책 두 권을 홀린 듯 넘긴 이유는 순전히 구글 지도와 유투브 때문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시골길을 샐과 딘과 동행한 이유는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재즈 때문이다.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홀리데이,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로이 엘드리지, 핫 립스 페이지, 텔로니어스 멍크, 스탠 게츠, 찰리 버드, 페레즈 프라도, 듀크 앨링턴이름이 나올 때 마다 검색하고 추억의 재즈를 듣는다.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도 좋고, 메릴루와 키스하며 운전하는 딘의 차 뒷자석도 좋았다. 어차피 달려야하는 게 인생 아닌가.

 

완벽한 평면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문학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건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작가의 묘사와 서술에 따라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인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지루하게 나열되는 미국의 지명을 따라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엉뚱한 방법 같지만 구글 항공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샐과 딘과 메릴루, 에드, 스탠, 셰퍼드의 위치를 추적하는 재미가 제법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유투브가 맡았다. 찰리 파커의 앨토 섹스폰 소리와 함께 뉴올리언스의 전성시대를 듣는다.




1부 샐

; 뉴저지패터슨~뉴욕~시카고~대븐포트~아이오와시티~디모인~덴버~스튜어트~오마하~그랜드아일랜드~셸턴~고센버그~노스플랫~샤이엔~롱몬트~덴버~센트럴시티~솔트레이크시티~리노~샌프란시스코~LA~플래그스태프~달하트~세인트루이스~인디애나폴리스~콜럼버스~피츠버그~해리스버그~뉴욕타임스퀘어(13,000킬로미터)

 

2부 샐, , 메릴루, 에드 던컬

; 뉴욕~워싱턴~리치먼드~테스터먼트~노스캐롤라이나 던~메이컨~모빌~뉴올리언스~배턴루지~보몬트~휴스턴~앨패소~라스크루시스~벤슨~투손~베이커필즈~툴레어~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

 

3부 샐,

;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솔트레이크시티~크레이그~덴버~오갈랄라~고센버그~커니~그랜드 아일랜드~콜럼버스~디모인~뉴턴~대븐포트~시카고~디트로이트~롱 아일랜드

 

4부 샐, , 스탠 셰퍼드

; 워싱턴~오하이오~신시내티~인디애나~세인트루이스~미주리~캔자스~애벌린~덴버~스프링스~달하트~프레더릭스버그~샌안토니오~러레이도~몬테레이~그레고리아~멕시코시티~뉴욕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는다. 그럼에도 공간은 더디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여행은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나와 세상을 낯설게 보지 못하면 살아있는 박제다. 잭 케루악은 마리화나 벤제드린 그리고 재즈로 이 소설을 썼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두점도 문장부호도 없이 길고 긴 두루마리를 토해냈다고 한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그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달뜬 여행의 피로감을 느꼈을까. 동부에서 서부로 다시 동부로 다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잭 케루악의 여행기에는 두근거림이 없다. 희망이나 꿈을 찾아 떠나는 식상한 구성이 아니라서 단숨에 읽혔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피곤하고 지친 여행자일 뿐이다. 샐과 딘처럼. 이 소설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네가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야?”(1, 95)

여행에서 돌아오면 역시 일상이다. 일상보다 피곤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딘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무언가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에서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건 위험해 보인다. 샐과 딘에게 여행은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머물지 못해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떠날 뿐이다. 길 그 자체가 인생이므로.

 

다시 돌아오면 일상은 그대로. 뉴욕은 뉴욕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움켜쥐고 낚아채고 건네주고 한숨 쉬고 죽음을 맞아서 결국은 롱아일랜드시티 너머의 끔찍한 공동묘지 도시들 중 하나에 묻히는 것이다.”(1, 174)

 

소설 도입부에 딱 한 번 소설의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들어보자.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평생 단 한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시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리 ㄴ유령의 삶이 되었다. 내가 미국을 반쯤 가로질러 와서 과거의 공간인 동부와 미래의 공간인 서부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었다는 사실, 아마도 그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이상한 붉은 오후의 그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 1, 33

 

길 위에서 낯설게 자신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이후의 여행은 길을 따라 일상을 사는 것처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며 때로는 충동적이다. 매일매일 낯설지 않다면 여행도 일상이다. 샐은 딘을 만나면서 길을 떠난다. 딘은 샐이 아니었다면 길을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남이 여행이다. 여행은 곧 새로운 관계 맺음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2차 대전을 직접 경험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와 구별된다. 비트 세대는 다시 혁명가 기질을 가진 힙스터hipsters’와 방랑자 기질을 가진 비트닉beatniks’으로 분류한다. 샐과 딘은 기성 사회를 떠나 글을 쓰고,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떠나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정착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된 구절을 찾았다. 번역은 좀 다르지만 길은 곧 삶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 아니 먼 길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을 수도.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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