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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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장정일을 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민음사에서 펴낸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이후에 독서일기시리즈를 한동안 탐독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더불어 스무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고민에 빠지게 했던 책들이다. 아마도 내 책읽기의 모태가 된 책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다양한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책읽기는 좀 다른 분야다. 가장 쉽고 만만하게 혹은 가장 속물적이고 과시적으로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책이다. 책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의 비법으로 여전히 과분한 헌사를 받는다. 여기에 편승한 11책 쓰기, 자서전 쓰기, 저자가 되는 법 등을 더하면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방법과 사람은 이제 차고 넘친다.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작가님이 될 수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

 

위대한 서문첫 문단이다. 장정일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동사무소 직원 운운. 독서일기서문에서 그는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싶은 어릴 적 꿈을 이야기했다. 발칙한 상상력과 시니컬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는 작가다. 글을 쓰는 것보다 책을 읽는 일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는 그의 말에 백 번 공감한다.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꿈은 이루었을까. 인간 장정일은 나는 잘 모른다.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잡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보다가 이제는 그가 엮은 서문까지 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장정일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겸손한 태도다. 서문을 모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기르고 통찰력 있게 엮는 데 그는 한 평생이 걸렸다.

 

위대한 서문의 서문도 위대하다.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

 

그가 서문에서 읽어낸 작가의 욕망은 긴 세월 탐독의 결과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글을 쓰며 느낀 작가의 굴레를 드러낸다. 허명을 드러내고 작가의 타이들을 얻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한 생명을 바쳐 만들어낼 만큼 가치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는 가능한가.

 

우선 이 책에 실린 서른 권의 책 목록이다.

 

1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 군사학 논고

2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3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 격언집

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6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7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8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9 체사레 보네사나 마르케세 디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10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11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2 노발리스, 파란꽃

13 앙리 벵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 아돌프

14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15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6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17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악의 꽃들

18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19 찰스 로버트 다윈, 종의 기원

20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2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2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3 앙브루아즈 폴 튀생 쥘 발레리, 테스트 씨

24 앙드레 기욤 폴 지드, 지상의 양식

25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나는 고발한다

26 앙리 루이 베르그송, 웃음

27 지그문트 슐로머 프로이트, 꿈의 해석

28 게오르그 짐멜, 렘브란트

2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30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이 목록에서 겨우 3분의 1쯤 읽어 자괴감이 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정일이 썼을 각 서문 앞에 놓인 작가와 책에 관한 간략하지만 명쾌한 해설 때문에 잠시 숙연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과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진다. 곳곳에 품이 든 흔적은 서른 개의 서문과 어울려 이 책을, 이 책의 목록을 두고두고 참고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날은 금세 저문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

 

책 띠지에 붙은 당대 최고 독서가라는 장정일에 대한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다. 당대 최고의 작가보다 독서가라는 명명이 빛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름의 노하우를 전하고 겁을 주고 비법을 뽐내며 명예를 드높인다. 지극히 이기적인 책읽기는 그리 권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샤를 단치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새겨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읽기의 본질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일이다 겨우 나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은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

 

서른 권의 고전에서 뽑아 낸 주옥같은 서문을 읽는 동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드의 말대로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는 충고를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누군가를 지겹게 하고 있다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쪽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 – 6쪽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쪽

나는 경건을 가장하여 채용된 편견들이 정신 안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대중이 두려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완고함에 있어서 불변이며, 이성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의 칭찬과 비난이 충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하지 않으며, 그와 동일한 감정적 자세의 희생양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습관에 따라서 이 책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성가신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책을 무시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그들이 이성은 신학의 하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신학 정치론』(1670년), 103쪽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쪽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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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 미국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허먼 멜빌 외 지음, 한기욱 엮고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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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건 없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오래 견뎌내는 건 말이 아니라 글이다. 글쓰기는 침묵과 수행이다. 부족한 인간이 안간힘을 쓰며 토해내는 사자후. 고전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오래 버티는 인류의 자산이다. 1830~1930년대의 미국 대표 단편소설을 엮은 필경사 바틀비는 근대와 민주주의, 청교도와 자본주의, 인디언과 흑인노예가 충돌하며 태동한 미국의 역사를 반증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최초의 민주적 근대국가를 이뤘으나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흑인을 노예로 삼은 모순이 내재한 나라가 미국이다. 인종과 계층, 지역과 종교가 충돌하며 미국은 오늘에 이른다. 지구상에 어떤 나라보다도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며 생동하는 삶이 얽혀있다. 겨우 열 한편으로 미국의 국민문학 형성기부터 모더니즘이 한창이던 시기를 읽어낼 수는 없으나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시대를 읽어내기에 충분하다.

 

너내시얼 호손의 젊은 굿맨 브라운,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도 인상적이지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편의점 인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작품으로 명불허전이다. 이런 인물 유형을 창조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월가로 상징되는 미국 자본주의 태동기에 바틀비는 다양한 존재로 해석 가능하다. 문학적 모호성 ambiguity를 함유한 독특한 인물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관찰자시점은 이 소설이 갖는 가장 큰 미덕 중 하나다.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날 아침 젊은이 하나가 여름이라 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문간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할 정도의 단정함, 애처로운 기품, 그리고 치유할 수 없는 고독. 그가 바틀비였다. -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58

 

바틀비의 행동은 일반적이지 않다. 정상적인 패턴을 벗어난다. 역자가 몇 년을 고심했다는 “I would prefer not to”는 바틀비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한기욱은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고 번역했다. 현실에 대한 거부, 관습적 사고에 대한 저항이라면 지나친 해석일까. 바틀비의 말과 행동은 독자 나름의 방식대로 받아들질 뿐이다. 당대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현대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부조리에 대한 거부일까. 단호한 외침이 아니라 침착하고 온화한 언어는 텍스트의 의미와 다른 울림을 준다.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이고 다짐했다.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

 

이밖에도 마크 트웨인의 캘레바래스 군의 명물, 뜀뛰는 개구리,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겨울 꿈이 인상적이다. 백 년이 훌쩍 넘은 번역된 단편임에도 장편에서 느낄 수 없는 단편의 힘을 느낄 수 있다. 19세기말~20세기초 세계사의 풍랑을 겪는 동안 미국인의 삶은 동시대 한국인의 삶과 다른 문제의식을 지녔으리라. 문화와 전통이 다르고 역사적 배경이 다르면 생각도 행동도 차이가 있다.

 

오래전에,” 그가 말했다. “오래전에 내 속에 무엇인가가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이제 그것은 사라졌어, 사라졌단 말이야. 난 울 수 없어. 마음을 쓸 수도 없어. 이제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 F. 스콧 피츠제럴드, 겨울 꿈, 306

 

돈에 속고 사랑에 우는 평범한 사람들의 속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다. 이수일와 심순애 같은 신파도 있고 위대한 개츠비같은 미국판 러브스토리다 있다. 피츠제럴드는 단편 겨울 꿈에서 유사한 모티브로 현대인의 속내를 이렇게 짚어낸다. 내 속에 무언가 사라졌고 이제 그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자각을 하는 순간, 달의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우주로 간 전기차 테슬라도 궁금하고 유리가가린의 소식도 듣고 싶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지켜야 할 것은 또 무언지. 먼지처럼 떠돌다 이내 사라질 나와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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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의 기술 - 과학이 알려주는 나이 드는 것의 비밀
마크 E. 윌리엄스 지음, 김성훈 옮김 / 현암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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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려면 떠나야할 때도 있지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에서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K(라이언 고슬링)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사랑했다면 함께 해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사랑하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다는 신파를 비웃는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사랑그자체일 수밖에 없으니 이런 류의 영화는 계속되리라.

 

한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죽어가는 과정은 단 한 순간도 멈춤이 없다. 모든 유기체는 성장하거나 소멸한다. 시간의 흐름은 세상만물에게 공평하다. 마크 E. 윌리엄스는 늙어감의 기술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노인의학은 소아의학에 대척점에 놓인다. 이제 막 온몸이 단단해지고 성장해가는 인간과 오래된 자동차처럼 여기저기 낡고 삭아가는 인간은 차이가 많다. 늙음과 죽음의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다. 그 숙제를 영생으로 치환하려는 사람도 있고 웰다잉well dying’으로 마무리하려는 사람도 있다. 철학자에겐 실존적 과제였으며 과학자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이 책은 사후 세계를 다룬 책과 구별되며 죽음 그 자체를 다룬 이야기와도 다르다. 일상에서 우리가 늙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다. “너희 젊음이 네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은 내 잘못으로 얻은 벌이 아니다.”라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노인에 대한 혐오는 근시안적 자기혐오와 다름없다. 스무 살이 넘어가면 모든 사람은 늙어간다. 사회적으로 노년으로 분류하는 나이가 되어야 늙음에 대해 관심을 갖는 건 아니다. 죽음이 삶의 그림자인 것처럼 늙음은 청춘의 그림자다.

 

저자는 건강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우리 몸이 어떻게 늙어가는지, 노화 현상의 특징은 무엇인지 알려준다. 그걸 늦추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추하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갖춘 사람을 그리 많이 보지 못했다. 몸의 반응, 감정의 변화를 제대로 알고 건강하게 늙어가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단순하게 건강하게 살자는 선언적 의미가 아니라 생의 주기와 일련의 과정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는 자기 삶에 대한 또 다른 통찰이다.

 

메이 웨스트는 인생은 한 번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산다면 그 한 번으로 족하다.”고 말한다. 지겨운 하루하루도 찬란한 하루도 지나고 나면 그 뿐이다. 허무와 냉소가 아니라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누구나 서른이 처음이며 마흔을 두 번 맞지는 않는다. 지나고 나면 50은 청춘이었음을 절감하리라. 머뭇거리지 말고 원하는 대로 선택했는지, 외면하고 포기하지 않았는지, 누구에게 기대고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는지 돌아보자. 남은 시간은 조금 달라야하지 않겠는가.

 

E. M. 포스터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가 계획한 삶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목표보다 수용과 적응을 강조한다. 내려 놓지 못하면 현재를 즐길 수 없다. 나를 기다리는 삶은 결코 내가 계획한 삶이 아닐 수도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발만 떨어져 나를 보면 모든 게 덧없다. 배고플 때 먹을 밥과 졸릴 때 잠들 수 있는 집이 있으면 나머지는 사치스럽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몸부림치지만 과정을 즐기지 못하고 결과를 알 수 없는 도박에 인생을 경우도 많다. 늙어가는 기술은 일련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방법이다. 행복한 삶은 무엇일까. 잘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독일 학자들은 노년에 생기는 독특한 스타일을 기술할 때 알터스틸Altersstil’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본질적 형태의 감소와 초월적 특성을 의미하는 단어다.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고야의 후기 작품들이 이런 노년 감수성의 빼어난 사례다. 이 작품들은 인간 경험의 본질을 밝혀주고 궁극적인 영적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 199

 

노인을 비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든 늙음이 추하고 재미없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건 아니다. ‘알터스틸이야말로 늙어가는 최고의 기술이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깊고 넓게 생각하고 타인과 세상을 인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간디의 말대로 내일 당장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리라.

 

의학 지식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없겠지만 과학 정보를 얻고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도 재미있다. 더불어 자기 몸을 점검하고 나이와 무관하게 건강상태와 감정 조절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주변을 돌아보자. ‘동안을 열망하지만 아이 같은 마음과 생각은 원하지 않는다. 놀랄만한 체력,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보다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사유의 깊이가 간절하다.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갖는 사람은 늙음의 기술을 아는 사람이다. 저자는 영혼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일이 궁극적으로 가장 훌륭한 기술이라는 비밀을 전한다. 그 방법은 이 책을 읽는 동안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모든 시간에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래야 늙음과 죽음의 공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사람은 죽기 전 한동안, 보통은 삶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기본적인 일상생활에서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부는 경제적 지원도 필요할 것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감정적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지원을 어떻게 제공받을까?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근본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이런 기분은 죽음의 공포보다도 훨씬 강할 수 있다. 바로 의존성의 공포다. - 301

 

 

 

팝핑[popping] : 재미를 보태고_대중성

1.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이강은 역, 창비, 2012.10.05.

2. 화장(2004 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문학사상사, 2004.01.26.

3.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윤희기 역, 열린책들, 2010.12.01.

 

펌핑[pumping] : 외연을 넓히며_동질성

1.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마음산책, 2004.05.01.

2.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홍상희 역, 책세상, 2002.07.10.

3. 노년에 관하여/우정에 관하여,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천병희 역, , 2005.06.30

 

점핑[jumping] : 깊이를 더해서_연계성

1. 죽음 그후, 제프리 롱, 한상석 역, 에이미팩토리, 2010.04.01.

2. 죽어가는 자의 고독, 노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역, 문학동네, 2012.12.10

3. 죽음이란 무엇인가, 셸리 케이건, 박세연 역, 엘도라도, 2012.11.21.

4.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데이비드 실즈, 김명남 옮김, 문학동네, 2010.03.19.

5. 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 임규정 역, 한길사, 200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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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 - 빅뱅부터 전쟁과 혁명까지
김서형 지음 / (주)학교도서관저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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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먹과 찍먹 사이

 

짬뽕과 짜장면, 물냉과 비냉 사이의 갈등은 이해하나 탕슉을 부먹이나 찍먹이냐로 고민해 본 적은 없다. 전혀 다른 음식, 서로 다른 맛을 넘어 이제는 같은 음식 같은 맛이지만 식감의 차이를 따질 만큼 우리는 배가 부르게 산다. 졸업식 날 온가족이 짜장면을 먹던 기억에 대한 언급은 꼰대질이다. 음식 문화가 변했다는 건 단순히 경제생활의 향상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트렌드는 문화가 되고 생활이 된다. 생활의 변화는 생각을 바꾸고 습관과 행동 그리고 운명을 조정한다.

 

사소한 차이에 시간이 결합하면 그 결과는 놀랍다. 스키 바인딩을 적절히 조절하면 큰 부상을 방지할 수 있지만 조절에 실패하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 빅히스토리는 136억년 넘어에 놓인 빛과 어둠에서 출발한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시간의 흐름 속에 현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부먹과 찍먹의 바삭거림 차이가 아니라 탄생-성장-소멸을 가늠하는 존재론적 차이다.

 

김서형의 그림으로 읽는 빅히스토리는 두 가지 면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우선 신선함이다. 그림으로 빅히스토리를 보여주고 있어 어느 한 쪽만 이해한 사람에게는 낯선 영역과의 결합을 보여준다. 물론 일관성 있게 전체적인 구성과 히스토리가 치밀하게 엮이지는 못했다. ‘우주와 생명의 탄생’, ‘인류의 빛과 그림자’, ‘혁명과 전쟁으로 우주와 인류의 빅히스토리가 모두 담길 수는 없다. 그래도 친숙한 그림에 담긴 과학, 신학, 역사, 사회, 전쟁, 근대화 이야기가 풍부하다. 또 하나의 장점은 한국인이 쓴 쉽고 적절한 설명이다. 번역서로만 접했던 빅히스토리를 우리글로 읽으니 더 쉽고 재미있다. 경어체를 사용한다고 해서 청소년용이 되는 건 아니다. 이런 책이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읽힐 필요도 없지만 누구나 거부감 없이 예술빅히스토리를 함께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을 덜어내고 지식과 정보를 간명하게 전달한다.

 

 

재벌과 학벌 사이

 

초등학교 시절, 눈밑을 벌에 쏘인 적이 있다. 한쪽 얼굴이 부풀어 올라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선생님들의 기상천외한 체벌에 시달렸다. 자로 손등을 때리거나 부러진 눈밑을 꼬집거나 부러진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종아리를 때리거나 구레나룻을 쥐어뜯거나……. 그때 그 시절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어 재벌을 알게 됐다. 학문 영역 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학벌 체제로 굴러가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재용 2심 판결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승복한다고 해도 36억 아닌가! 누군가 공무원에게 36억의 뇌물을 주고 풀려날 수 있을까? 재벌공화국의 오명은 대통령이 바뀐다고 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견고한 기득권의 시스템과 그보다 더 단단한 대한민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어찌 하루아침에 무너지겠는가.

 

동종교배는 열성인자를 낳는다. 대통령의 권력이 국민을 무시하는 세상은 교수의 권위가 새로운 학문적 도전을 배척하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학벌 사회의 견고함은 학문의 동종 교배에서 비롯된다. 선생님의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생각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대학은 발전이 없다. 교수 자리를 탐하는 학자, 승진에 목숨 거는 공무원, 이익에만 집착하는 기업이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재벌가의 몸종이 되지 못해 한이 되고 학벌로 줄 서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세상에서 우리들의 빅히스토리는 쓰일 자리가 없다.

 

우리에게 익숙한 빈센트 반 고흐의 삼나무와 별이 있는 길로 시작해서 모네와 고갱, 클림트, 루벤스, 김호도, 들라크루아, 윌리엄 터너, 조지 럭스의 헤스터가로 이어지는 스물 한 작품은 예술적 완성도 뿐 아니라 풍부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하나하나에 얽힌 우주의 신비, 생명의 탄생, 지구의 모습, 인류의 삶은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상상하게 한다. 분과 학문에 매몰된 학교 교육을 넘어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는 공부는 가능한가. 서로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생각과 도전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은 가능한가. 재벌과 학벌이 아니라 상상력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변화와 공존은 가능한가.

 

혼자 꿈을 꾸면 공상이지만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는 훈데르트바서의 말은 선언적 의미만 갖는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부딪치고 깨져도 소수의 가진자와 힘센자가 아니라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가진자와 힘센자가 되려는 노오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발상의 전환과 각자의 빅히스토리가 필요하다.

 

 

팝핑[popping] : 재미를 보태고_대중성

1. 호모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5.11.24

2. 호모 데우스, 유발 하라리, 김명주 역, 김영사, 2017.05.19

 

펌핑[pumping] : 외연을 넓히며_동질성

1.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이덕환 역, 까치글방, 2003.11.30

2. 빅히스토리, 신시아 브라운, 이근영 역, 바다출판사, 2017.12.04.

3. 시간의 지도, 데이비드 크리스천, 이근영 역, 심산, 2013.05.20.

 

점핑[jumping] : 깊이를 더해서_연계성

1.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까치글방,2010.10.06

2. 인간에 대한 오해,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역, 사회평론,200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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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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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은 내용 전체를 포괄하며 핵심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책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호기심과 흥미를 유발시켜야 할 뿐 아니라 책 전체 내용을 응축하거나 상징해야 한다.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는 매력적인 제목에 비해 내용은 단 하나에 집중하고 있어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이 책은 혐오를 위한, 혐오에 의한, 혐오의책이다.

 

일상적인 대화, 공적인 언어가 갖는 말의 힘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아니다. 혐오 표현은 말과 글을 모두 포함한다. 사적인 언어라기보다는 사회적 의제이며 상징적 메시지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사고를 반영한다.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지향점을 점검할 수 있는 도구가 언어다. 언어는 지문과 같다. 개인에게는 정치적 성향부터, 취향, 성격, 지적 수준, 관심사, 종교, 인종, 직업, 나이까지 가늠할 수 있는 도구다. 한 사회의 언어는 소통방식, 공동체의 의식수준, 규범과 질서를 드러낸다. 혐오표현도 당연히 개인 혹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대한 점검 도구로 활용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맘충과 노키즈존, 영화 청년경찰, 퀴어문화축제와 반동성애운동을 통해 한국의 혐오 논쟁을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혐오에 대한 법률적 논쟁 보고서에 가깝다.

 

법도 시대정신의 반영이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이 투영된 결과다. 각국의 특성과 문화, 공동체의 합의가 법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유럽과 일부 선진국을 참고할 수는 있으나 그들의 법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다.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촉발된 혐오 논쟁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피고 있지 못하다. 혐오 논쟁의 문제를 짚어내고 법적 제재가 가능한가, 형법으로 통제하는 게 올바른가, 사회적 논의와 대한은 무엇인가, 생활 속의 혐오는 없는가, 일반인들의 혐오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혐오가 오로지 좌파의 아젠다인가,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망치 대신 메스가 필요하다면 메스를 대는 부분에 대한 합의는 가능한가, 유럽식과 미국식 제제 어느 쪽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우리 사회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서 발원한 혐오의 근원은 무엇인가, 사회경제적 약자와 비정규직, 청년층에 대한 이해와 분석 없이 여혐과 남혐의 이분법적 접근 방식은 타당한가……

 

혐오 표현에 대한 기본적인 의식조사와 통계 분석도 없이 지극히 편향된 시각으로 시류에 편승한 책이라는 판단은 나만의 생각인가. 내용에 동의 여부를 떠나 논의의 흐름이 정교하지 못하니,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번역한 말이다, 영어에서 헤이트는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24) 정도로 만족해야 한다.

 

우선 저자는 남혐과 개독은 혐오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최소한 현재’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 여혐과 남혐, 이슬람혐오와 기독교혐오를 동일선상에 놓고 이거나 저거나 다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일”(48)이라고 말한다. 남혐은 이후에 미러링을 통해 그 사례를 제시하지만 B급 좌파, C급 페미니스트쯤 되는 내게 읽기에도 논리가 엉성하다. 여혐과 남혐, 이슬람 혐오가 기독교혐오가 등가로 놓일 수는 없고 같은 맥락으로 비판할 수도 없지만 여기서 양비론을 비판할 수는 없다. 남혐과 개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한 논리는 이해할 수 없다.

 

맘충이나 노키즈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맘충 따위는 농담으로 넘길 수 있다 …… 맘충이라고 말할 자유와 노키즈존 영업을 할 자유를 얻길 원한다면 아이와 엄마가 차별받는 사회 현실부터 바꿔야 한다. - 53

 

예를 들자면, 이 부분에서 차별받는 사회 현실은 어떻게 바꾸자는 말인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표현이다. 하나마나한 소리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라는 한 문장이면 인문학 코너의 모든 책이 다 필요 없다. 맘충이라는 말을 현실에서 들어본 적도 없고, 노키즈존을 본 적도 없어서 사회적인 이슈가 될 정도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 간의 예의, 암묵적 합의를 깨는 사람, 이에 대한 지나친 분노가 충분히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이 문제 자체를 떠나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독자의 인식 변화를 촉구하는 발언인지, 반성과 성찰을 요구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대형 화산 폭발로 인해 우리 땅 밑에 거대한 용암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용암을 제거해야 한다. 용암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화산 분출만 막아봤자 별 소용이 없다.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 있는 여성혐오는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다. - 104

 

앞뒤 맥락을 이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모든 남성들의 인식 기저에여성혐오가 땅 밑에 용암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남성에게 달린 의 위치가 차별이다. 여성의 관점에서는 남성의 모든 말과 생각, 시선이 혐오라는 주장이다. 그것이 범죄로만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궁금해졌다. 존재 자체가 여성혐오의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다는 말이니 조심하고 삼가라는 말인지, 그 인식 기저를 바꿀 용기를 내라는 말인가.

 

표현의 자유를 어떤 가치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미국의 수정헌법에 따라 법률적 규제보다 사회적, 문화적 규제가 철저하고 기업과 학교 등 자율적 자정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 미국과 법률로 규제하는 유럽을 비교한 내용이면 충분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규제처벌법은 각각의 문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과 같은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동시에미국처럼 혐오표현규제처벌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숭미(!)주의자이자 혐오표현 문제를 국가의 개입 없이사회에서 직접 해결하려는 행동가들일 것이다. 혐오표현 규제 옹호론이 맞서야하는 가장 까다로운 상대도 바로 이들이다.”(141)라고 주장한다. 원천 봉쇄의 오류다.

 

혐오표현에 대한 법률이 미비하고 문제 인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퍼센트 공감한다. 섬나라처럼 고립된 지정학적 위치와 유럽이나 미국처럼 인종, 종교 문제가 첨예하지 않았고 문화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 당연한 결과다. 법은 현실을 앞서 갈 수 없다. 사회 현실과 맥락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는 습관과 오류를 이 책도 피해가지 못했다. 토양이 다르면 자라는 식물이 다르고 같은 작물도 맛이 다르다. 주장과 설득이 아니라 학문적인 비교, 정리, 논쟁거리를 제시하는 정도에 머물러야 했다.

 

지금까지 나의 논의는 책의 내용과 저자의 주장과 무관한 형식과 논리에 대한 엉성한 화풀이였다. 새로운 앎을 얻은 것도 아니고, 기존의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으며, 대안을 제시하거나 해결방안을 제안하지도 못했으니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이라면 다른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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