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을 만나다 -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 지승호의 인물 탐구 1
지승호 지음 / 북라인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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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싫든 좋든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열정 혹은 냉소와 무관심은 개인적 성향일 뿐, 모두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온몸을 휘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에 대해서도 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겠다.

  ‘항소이유서에서 소셜 리버럴리스트가 되기까지’라는 부제를 단 <유시민을 만나다>는 지승호의 인터뷰를 통한 ‘인물 탐구’라는 이름에 값한다. ‘지승호의 인물탐구 1’이라고 했으니, 이후의 책들 또한 기대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유시민이라는 코드를 정혜신, 한홍구, 김정란, 유시춘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으며 2부에서 본격적으로 여섯 번의 인터뷰를 시기별로 나누어 싣고 있다. 마지막 부록이 압권이다. 스물여섯 청년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를 ‘정본(?)’이라는 이름으로 달고 있다. 본인이 직접 당시 복사본의 오류를 바로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재밌다.

  2002년 여름 유시민은 “바리케이드 앞에 화염병을 들고 다시 서는 심정”이라는 격문을 날리며 정치가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전에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등의 저술가로, 칼럼니스트로, ‘100분 토론’ 진행자로 알려진 그는 가장 선동적인 방법으로 정치에 입문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얼마 전 열린우리당의 당의장 선거에서 집단 이지메 수준의 비난과 수모를 겪어가며 침묵을 지킨 유시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것은 사실이다. 분파주의자이며 분열적이고 독선적인 개혁론자라는 부정적 평가와 더불어 토론의 달인, 정치 천재로 불리며 노무현 정권 창출의 특등 공신으로 미래의 한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행복한 역할과 소임을 저버리고 불행한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그를 더 이상 비판적 지성인으로 만나기는 어렵다. 싫든 좋든 그는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이 정치 환경에 적응하며 우리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인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모든 유권자에게 중요하다. 김영춘 의원의 발언대로 “저렇게 좋은 말을 저렇게 싸가지 없이 할 수 있냐?”는 정서의 문제로 그를 대할 수는 없다고 본다.

  2002년 대선을 통해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노빠 주식회사 대표, 노무현과 영혼의 샴쌍둥이’라 불리며 민주세력에게 사표 선동을 통해 비판적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신념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했다. 그것은 개인적인 신념일 뿐 민노당 지지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앙금을 남겼고 여전히 노회찬 의원을 비롯한 좌파세력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논리와 신념과 굽힐 줄 모르는 의지로 열혈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그 이유를 민언련 최민희 사무총장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첫째 과거의 정통 운동권 출신이라는 점, 둘째 일정 시점에서 현장과 거리를 두면서 학습할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사회를 객관적이고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 셋째 제도권 정치인으로 변신하되 그 방식이 순수하게 개혁을 바라는 세력들을 모아서, 그 세력의 대표성을 가지고 정치에 입문했다는 점을 들었다.

  물론 이런 이유들 뿐만 아니라 정통 TK 서울대 출신으로 지역, 학력 컴플렉스가 없고 과거 화려한 민주화 경력은 도덕적으로 완전하다는 점을 추가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열성 지지자만큼 그에 대한 비판적 정치인과 혐오 세력도 만만치 않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의 후배들인 386의원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당의장 선거에서의 모습은 ‘그토록 유시민이 그들에게 상처를 줬을까, 어떻게 말을 싸가지 없이 했길래 후배들이 저렇게 들고 일어나는가, 유시민은 옳고, 그들은 전적으로 틀렸는가’하는 자성을 누나 입장에서 했다는 유시춘의 말처럼 현재의 그를 돌아보는 거울이 될 것이다.

  유시민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영원한 자유주의자’라고 지승호는 말한다. 항소이유서에서 인용한 네그라소프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말처럼 그는 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라고 불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이름으로 우리에게 정의되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향력 있는 한 명의 정치인이 우리 삶에 주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비판과 지지를 함께 보내야 한다. 지역주의와 낡은 정치를 청산해야한다고 믿는다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있는 자리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믿는다. 양비론이나 특정 정당과 물에 대한 맹목은 우리 사회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방법이다.

  아무리 부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더라도 노무현과 유시민을 정치적 야욕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 위험 인물이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스트로 볼 수는 없다. 진정한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이란 ‘나쁜 수단으로 좋은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두 사람을 후자 의미로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판단일까?

  유시민이라는 한 정치인에 대한 평가의 잣대는 국민들 각자의 몫이다. 홍세화가 유포시킨 ‘똘레랑스’의 개념이 한국 정치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을 처음 갖게 한 정치인이 유시민이다. 개인적으로 유시민이나 강준만, 진중권, 한홍구, 하종강, 박노자 등의 말과 글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노회찬의 정치스타일을 가장 선호한다. 적과 아군들을 모두 웃겨버려 할 말을 없게 하는 그의 스타일은 지나온 경력과 앞으로의 가능성, 정치인으로서의 역량과 민노당의 미래만큼이나 궁금하고 기대된다.

  말과 글이 적확하며 상식적이던 지식소매상에서 자유주의 메신저의 상징으로 그가 보여줄 한국 정치가 그리 어둡고 답답하지만은 않다는 느낌을 갖는다. “안 되면 어때요? 열심히 해보고 안 되면 그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고, 거기서 의미를 찾고, 또 다른 부분에서 제가 할 일을 찾으면 되죠.”라고 자주 말하는 그가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보다는 제 자리에서 묵묵히 국민들에게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하며 책장을 덮는다.


200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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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서해클래식 4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 서해문집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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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고전의 힘은 현재적 유용성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며 통시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1516년에 출간된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50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고 있다.

  봉건 영주 시대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예고했다. 왕에게 복무하기 이전에 한 종교인이었던 모어는 인간의 불평등 문제와 사회 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전쟁과 살육, 가난과 기아, 범죄와 형벌에 대한 민중들의 모습은 비참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문제점에 대한 명쾌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 <유토피아>다.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누구나 꿈꾸는 나라……

  형벌의 목적은 악을 없애고 사람을 구제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범죄자들이 착하게 될 수밖에 없도록, 그리고 자신들이 저지른 해악을 남은 생애 동안에 보상하도록,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 본문 39페이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범죄자들의 사형 제도에 대한 견해로 모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모든 형벌의 목적은 보복이 아닐 것이다. 봉건적 형벌제도에 대한 모어의 생각은 이렇게 확제시된다. 개인적 차원이 아닌 사회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으로 범죄와 형벌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유토피아’를 시작한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훈풍이 불고, 종교의 절대권위에서 벗어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항해술의 발달로 바다건너 미지의 세계로 그 영역을 확대 시키던 시대적 배경으로 ‘유토피아’는 탄생된다.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그가 경험했던 ‘가장 좋은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존이었던 모어의 친구 피터 힐러스가 등장하여 라파엘의 이야기를 같이 듣는다. 이것은 허구적인 내용이지만 소설로 보긴 어렵고 장르나 형식을 구분하는 일은 어쩌면 무의미할 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이 들려주는 그 나라는 시대를 넘어선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 국가에 가장 근접해있다고 해서 16세기 초에 그려진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의 한 형태에 대해 많은 논란을 가져 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사회학적 관점이나 많은 학문적 이론을 적용해서 그 타당성 여부를 논하는 것은 모어의 의도를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화폐가 없으며,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공동 생산을 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되며, 모든 사람이 노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평등과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 유토피아. 빈둥거리는 귀족과 그들의 뒤치다꺼리에 여생을 보내는 하인이 없기 때문에 가난과 범죄가 없는 사회 유토피아. 오전 3시간, 오후 3시간의 노동으로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휴식과 수면, 강의를 통해 지적 쾌락을 추구하며 덕을 지켜나가는 나라 유토피아. 그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모순된 나라이면서 침략 전쟁을 부인하지만 용병을 이용하여 전쟁에 승리하는 등 갖가지 전쟁 전략을 가지고 있는 그들만의 유토피아. 전세계주의가 아니라 유토피아의 국민들만을 위한 유토피아.

  플라톤의 <국가>의 영향을 받아 철인 통치를 지지한다. 현명한 사람을 뽑기 위한 비밀 투표 등 가장 이상적이고 민주적인 사회 통치 제도이지만 공동 식사등 수도원에서나 볼 수 있는 전체주의적 발상도 곳곳에 드러난다. 이 책은 이렇게 완벽하지만은 않은 모습으로 현대인들에게 제시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어가 추구했던 이상적 세계의 근본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과 참된 진리에 대한 사랑이 배어 있다. 유토피아인들은 “덕을 자연에 따르는 삶이라고 정의”하여 스토아학파의 견해와 일치하는 듯 보이지만, 쾌락을 최고 선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가깝다. 또한 “누구도 자신의 종교 때문에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오래된 규정” 중의 하나이다. 이런 식으로 당대의 철학과 시대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현재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모어는 그들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을 제시한다.

  우리 삶의 참다운 행복인 쾌락에 대해 정신적, 육체적 쾌락으로 나누고 육체적 쾌락은 다시 감각적 쾌락과 건강으로 분류한다. 유토피아의 진정한 가치도 쾌락에서 비롯된다는 것으로 고통 받지 않는 육체, 즉 건강 자체를 대단히 커다란 쾌락으로 말하는 것이 새롭다.

  오늘날 번영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명히 말하건대, 나라(공공의 복지)라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의 음모 이외의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어요. 그들은 부정한 수법으로 긁어모은 것들을 잃어버릴 염려 없이 간직할 모든 수단방법을 고안해내고, 그러고는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여 가능한 한 싼값으로 그들의 수고와 노동을 사들일궁리를 합니다. 부자들이 나라(공공복지)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 그 나라 안에는 물론 가난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지요. - 이런 수단방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면, 곧바로 그것들은 법이 됩니다. - 본문 176페이지

  사회와 역사는 진보를 거듭했으며 발전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희망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을까? 16세기에 모어가 했던 이 말이 현재에도 변함없이 적용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경제 제도나 사회 체제의 변화와 발전이 모든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구가와 국민의 관계와 개인의 행복은 어떤 형태로 규정할 수 있을까?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인간 사회의 필연일지라도, 가난과 기아, 범죄와 형벌이 없고 전쟁 대신 평화만이 가득한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불가능할지도 꿈을 꿀 수는 있지 않을까?


2005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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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독서광의 생산적 책읽기 50 - 미래를 위한 자기발전 독서법
안상헌 지음 / 북포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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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의 운명에 관한 이런 얘기가 있다. ‘출판되는 책의 반만 팔리고 팔린 책의 반만 읽히며 읽히는 책의 반만 이해되며 이해된 책의 반만 활용된다.’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다. 누구한 한번쯤 질문한다. 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책 속에 묻혀 사는 사람들은 한번쯤 회의하게 된다. 독서의 목적과 방법, 그 효용에 대한 진지한 성찰! 실용적인 목적에서부터 자아발견과 시간 때우기까지 폭넓은 대답이 있을 것이다. 물론 여러 가지 목적에 따라 다양한 독서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 효과는 기대 이상으로 자신과 생활을 변화 발전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집단 구성원의 인지·판단·행동의 성향 체계인 아비투스에 따라 개별적 독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 다양한 독서 목적과 방법들, 거두고자 하는 효과를 한 방에 해결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생산적 책읽기 50>의 저자 안상헌은 그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언제나 책을 들고 다녀라’부터 ‘자신만의 독서법’을 써보라까지 50가지의 방법론이 그것이다.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새겨두고 독서를 하는데 지침으로 삼는다면 크게 해가 될 것은 없는 방법들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필요한 방법들이 아니며 누구나 지킬 수도 없는 방법들이다.

  책도 결국 선택과 집중의 문제다. 내가 읽은 책과 남이 읽은 책을 비교해서 그 책을 읽지 않을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내가 읽은 책을 자랑스러워할 필요는 없다.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혹은 자신의 경쟁력을 배가시키기 위한 책읽기 전략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며 나름의 독서 전략과 방법을 세워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책읽기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이 전하는 방법이 반드시 뚜렷한 목적을 위한 독서의 방법론을 제시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서행위 자체와 목적 보다는 과정과 방법론을 중시한 독서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아쉽다.

  물론 목적 없는 행위가 어디 있을까마는 표정훈의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나 <탐서주의자의 책>과는 다른 목적과 방법을 제시한다. 생산적이라는 말은 실용적이라는 말이다. 지식을 생산하고 정보를 선점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듯한 미래 사회에서 꼭 필요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직업과 성향, 책을 읽는 목적은 일반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독자는 누구나 제 나름의 독서 목적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 <생산적 책읽기 50>은 그런 의미에서 풍성한 식탁의 양념처럼 읽으면 된다. 허다한 책들 속에서 문득 방향을 찾지 못해 헤매거나 보다 효율적인 독서 방법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책이다.

  ‘아무리 위대한 책이라도 그 반은 독자가 만든다’는 볼테르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읽은 책의 반을 만들기 위한 방법이 사실 가장 어렵고 실질적인 독서가 된다. 밑줄긋고 옮겨적고 생각하고 음미하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야말로 독서의 참맛이 아닐까 싶다. 오세영의 ‘한 줄의 시’에서처럼 ‘행간을 건너뛰는 두개의 콤마’를 찾아내는 것이 바른 독서법이라고 나는 믿는다. 작가가 글로서 말하지 못한 그 행간을 읽어내는 방법과 재미가 내겐 늘 관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을 선택하는 기준과 방법이 늘 고민이다. 그것은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겠으나 아직도 쉽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 저 책을 읽지 못하니 인생이 짧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辭盡意不盡’이라는 말이 있다. 말을 다 하였으나 말하고 싶은 뜻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다. 저자가 말한 많이 읽고 많이 기억하는 1단계를 걸쳐 적게 읽고 많이 생각하는 2단계를 지나고 적게 읽고 많이 쓰는 3단계에 이르지도 못했으나 많이 읽고 충분히 생각하며 적게 쓰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욕심내지 않고 기본에 충실하며 빠진 이를 채우듯 이해하지 못한 고전을 다시 읽고 새로운 책에서 영감을 얻는 즐거움을 무엇과 바꿀수 있을까? 흐르는 물처럼 시간은 흐르고 내 생의 의미 찾기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한다. 누가 그렇지 않을까마는 자신이 선택한 행복한 생의 방법을 찾아 오늘도 책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2005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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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근담 현암사 동양고전
홍자성 지음, 조지훈 엮음 / 현암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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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맛을 속속들이 알면 비가 되든 구름이 되든 다 맡겨 둘 뿐 눈 뜨고 보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인정이 무엇임을 다 알고 나면 소라고 하거나 말이라고 하거나 부르는 대로 맡기고 그저 머리만 끄덕일 뿐이로다.(후80)

  야채의 뿌리를 뜻하는 ‘菜根’. 기름진 고기와 배부른 일상에서 야채의 뿌리를 씹듯 그 향과 그윽한 맛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이야기가 ‘菜根譚’이다.

  홍자성의 이 책은 다른 고전과 달리 그 뜻이 쉽고 명쾌하며 일상 생활속에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에 대한 충고이자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특정한 사상과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적인 인간의 속성에 대한 경고와 금언들이 마음밭의 행복을 찾아준다. 그래서 때로는 울림과 감동이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채근담은 전집 225장과 후집 134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것을 시인 조지훈이 자연의 섭리, 도의 마음, 수신과 성찰, 세상 사는 법도로 다시 순서를 재배열하고 역주를 다는 방식으로 엮었다. 각 장 사이에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뒤섞어 다시 배열하고 주제별로 묶어 놓아도 그 뜻에 손색이 없다. 조지훈의 역주 또한 읽을만해서 단순한 주석과 도움말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다. 

나아가는 곳에서 문득 물러섬을 생각하며 울타리에 걸리는 재앙을 면할 것이요, 손 댈 때 문득 손 놓음을 꾀하면 호랑이를 타는 위험에서 벗어나리라.(후29)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어찌 이름에서 숨는 것만 하겠으며, 일에 익숙한 것이 어찌 일을 줄여 한가로움을 누림만 하랴.(후31)

  읽다보면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면도 있어 지루하기도 하다. 시대 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인간 삶에 대한 통찰과 수신의 덕목들로 가득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며 생의 목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만하다. 곁에 두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번씩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책이다. 

남의 작은 허물을 꾸짖지 말고 남의 비밀을 드러내지 말며 남의 지난 잘못을 생각지 말라. 이 셋으로써 덕을 기르고 해를 멀리할 수 있다.(전105)

공을 세우고 업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개 허심탄회하고 원만하나, 일에 실패하고 기회를 잃는 사람은 반드시 집착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전197)

성질이 조급하고 마음이 거친 사람은 한 가지 일도 이룰 수 없고, 마음이 온화하고 기질이 평안한 사람은 백 가지 복이 절로 모인다.(전209)

남의 나쁜 점을 꾸짖되 너무 엄해서는 안 되니, 그 말을 받아서 감당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전23)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갖춘 이도 있고 못 갖춘 이도 있거늘 어찌 나 홀로 모두 갖추기를 바라겠는가.(전53)

  밑줄 친 내용들이 모두 생활 속에서 공감할 수 있는 당연한(?) 내용들이다. 되짚어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면 물질적인 행복이 아닌 참다운 마음의 평화와 안전을 찾을 수 있겠다.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겠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설과 반어, 대구와 대조, 적절하고 화려한 비유 때문에 어렵고 공허한 도덕적, 실천적 삶의 원리들이 오히려 쉽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이 장점이다. 무엇보다도 전체를 읽지 않아도 그 뜻과 의미를 새겨가며 반복해서 읽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가 될 듯 싶다. 내용을 평가해서 무엇하랴. 그저 나름대로의 의미는 얼마든 새겨지는 것이고 밑줄이 늘어갈 수록 세월이 흐른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만.

음침하게 말이 없는 선비를 만나거든 아직 속마음을 보이지 말라. 발끈하여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잘난 체하거든 모름지기 입을 다물라.(전122)

몸가짐은 지나치게 깨끗하지 말 것이니, 모든 더러움과 욕됨을 다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할 것이요, 사람과 사귐에는 너무 분명하지 말 것이니 착한 사람과, 몹쓸 사람 또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모두 포용해야 한다.(전188)

냉철한 눈으로 사람을 보고, 냉철한 귀로 말을 들으며, 냉철한 뜻으로 느낌을 감당하고, 냉철한 마음으로 이치를 생각하라.(전206)

  풀뿌리를 씹어가며 살 수 없고 공기청정기를 메고 다니며 호흡할 순 없으나 가끔은 머리를 맑고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영혼의 청량 음료가 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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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공산당 선언 세계를 뒤흔든 선언 1
데이비드 보일 지음, 유강은 옮김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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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물아홉 살의 청년 맑스와 스물일곱 살의 청년 엥겔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을 발표한다. 혁명의 해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이판사판’으로 그 해를 기억했었다. 150여전에 발표된 선언의 혁명 정신과 계급 의식은 여전히 이 시대에도 유효하며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 의미를 간직할 것이라고 믿는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공장체제로 인한 인간 소외는 <선언>이 제기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이며, 21세기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는 맑스의 말은 <선언>의 기초가 된다. 역사 발전 과정 속에서 문제는 늘 행동과 실천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침묵하는 대중에게는 언제나 행동하는 혁명가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과 사회의 불안정을 경제적 불평등과 자본의 소수 집중의 문제로 보았던 맑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사회의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선언>을 시작했으며,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고 <선언>을 끝맺고 있는 것이다.

  맑스의 장례식에서 엥겔스는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발견했다”고 그의 삶을 요약한 것처럼 인류의 삶에 결정적 <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것은 1917년 혁명가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현실로 나타났고 뒤이어 마오에 의해 중국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구 유럽에서 도미노 현상처럼 실현되었다. 쿠바의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우리는 마지막 공산주의 혁명가로 기억한다. 선언의 현실은 스탈린과 같은 전체주의와 1인 독재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고 이전의 상황보도 훨씬 더 지독한 고통을 인류에게 안겨 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두 번째 세계 혁명의 해였던 1968년의 실패 뒤로 맑스주의는 대학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제는 학문의 영역으로 남겨져 버린 느낌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둘 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확신 속에서 <선언>은 작성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다. 그리고 생산도구를 국가의 수중에, 즉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수중에 집중시키며 가능한 한 신속히 생산력을 증대시킬 것이다.”라는 핵심 실천 강령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게 <선언> 되었다. 원문에 나타나는 당시의 노동 계급에 대한 맑스의 견해는 분명했고, <선언>의 대중성과 선동성은 지금까지의 어떤 다른 선언과도 비교할 수 없다. 물론 이십대의 청년 맑스의 상징성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평생을 이 선언에 대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한 것이 <자본Das Kapita>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혁명과 선언이라고 하기엔 그가 인류에게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유지 되는한 그의 선언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일을 경멸한다”고 원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맑스는 혁명을 역사 발전의 필연 법칙으로 인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견해를 밝히고 “현존하는 사회 ․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모든 혁명운동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선언 당시 혁명은 좌절되었으나 맑스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 엥겔스는 한번도 역사 발전의 필연적 법칙을 의심하지 않은 듯하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지시켜주고 신념을 지켜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진 혁명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선언>은 혁명으로 가는 길만을 보여줄 뿐, 혁명 이후의 정치나 사회의 모습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고 선동적인 인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뒤흔든 <선언>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가장 급진적으로 드러낸 문서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언>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도 나는 개인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맑스가 제시한 꿈을 더 좋아한다. 그가 말한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가 진정한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회제도나 경제 체제의 변화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맑스가 다시 살아나 오늘의 세계를 돌아본다면 괴로운 신음 소리를 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 고통받고 눈물 흘리는 불평등한 노동자 계급과 심지어 어린이들까지 노동 현장에 투입되는 제 3세계의 현실을 맑스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계급 투쟁’의 역사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선언할까 <선언>의 원문 마지막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극한 대립을 조장하는 선전선동의 구호가 아니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울분에 호소한 말이다. 인류가 역사 발전을 끊임없이 지속하고 있다면, 맑스의 <선언>이 더 이상 과거의 추억(?)이 될 수 있다면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하는 헛된 상상을 하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지도 모르는 불평등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해제를 쓴 고병권의 마지막 평가로 이 책의 의미를 대신한다.

  나는 선언을 세 가지 이름으로 부른다. 그것은 위험한 책이자, 생산하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그것은 위험한 복음이자, 혁명-기계이며, 영원회귀하는 유령이다. 하지만 누군가 하나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책’이다.



2005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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