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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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젖은 들풀 냄새가 배어 나오는 봄비가 내리는 밤이다. 빈 공간을 채우던 적막이 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창밖을 떠돌고 있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살아 있다는 안도감과 하루하루 바쁜 생의 언저리에서 이렇게 늘 잠깐의 여유로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행복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할까. 책 속에는 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인생의 정답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만 하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현실 세계의 존재감 정도는 전해준다.

  감히 ‘사랑’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귀기울여 들어볼 자세는 되어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처럼 이야기해도 나는 진지하게 바라볼 자세는 되어 있는 것이다. 그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는 작품은 1982년 처음 구상되었고 2004년에 출판되었지만 그것은 무의미하다. 작가는 모든 작품을 모든 순간에 구상한다. 존재하고 사유하는 모든 대상은 어떤 형태로든 작가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되고 표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읽어내고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것을 읽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독자의 몫이듯이.

  ‘사랑’처럼 진부한 단어가 또 있을까. 이 진부한 ‘사랑’이야기를 마르케스는 어떤 의미로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는지 나는 그 행간을 짚어 볼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표현을 빌자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언어의 소리와 의미-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을 느낄 수 없어 번역소설은 늘 2% 부족한 감상을 전제로 한다고 믿는다. 나는 마음을 열고 늙은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어본다. 여든을 바라보는 그가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귀기울여 들어볼 뿐이다.

  단편도 장편도 아닌 150페이지 분량의 다소 어색한(?) 길이와 빛바랜 나무 등걸같은 활자의 색은 책을 읽는 내내 낯설다. 민음사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라틴 아메리카의 낯선 지명과 가보지 않아 상상하기 힘든 더운 날씨와 분위기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은 남는다. 온몸에 습기가 달라붙는 더위인지 바싹마른 고온인지 알 수 없고, 사회 문화적 배경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없어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전달 방식이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아 답답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들처럼, 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나 <농담>, <불멸>처럼 장편이 전해주는 작가의 목소리를 잡아내기 힘들어 개인적으로 버거웠던 소설이다.

  90세 생일을 맞이한 노인이 포주 카바르카스에게 전화를 걸어 여자를 부탁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살아온 주인공에게 얼마남지 않은 생에 대한 선물로 처녀를 주문한 것이다. 14세의 소녀를 맞이한 주인공은 손도 대지 않은채 하루 밤을 보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단추 공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는 잠이 들어 주인공을 기다렸던 것이다. 주인공은 소녀에게 ‘델가디나’란 이름을 붙여주지만 그의 본명도 사는 곳도 알지 못한다. 주인공의 이름도 독자들은 알 수가 없다. 익명성이 모호함 때문일지 모르지만, 그는 독특한 생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신문 칼럼니스트로서 명망있는 늙은이로 그려지지만, 특별한 인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가 느끼는 생에 대한 고독과 비애 때문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소녀의 무의미한 몸짓이 보여주는 생의 신산스러움 때문이다.

  소설 전편에서 두 인물의 대화는 드러나지 않으며 노인의 심리와 내면의 독백을 통해 소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무덤덤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선입견으로 14세 소녀에 대한 90세 노인의 사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 소설 읽기는 실패하고 만다. 나이를 잊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최초로 느끼는 열정과 그것을 통해 느끼는 생의 의지를 읽어내면서 나는 또다른 삶을 들여다 본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독백은 죽음을 목전에 둔 극단적인 나이를 통해서 오히려 극명하게 인간의 존재 방식과 삶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그렇다면 14세 소녀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이 남는다. 그를 위한 소품에 불과한 것인가. 소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변화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드러난다. 그곳에는 여전히 대화가 없다.

  언어가 사랑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이유와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때로 고통스럽게 때로 힘겹게 소설을 읽는다. 문학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정말로 ‘진부’한 의미를 찾을 생각은 없다. 다만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하다오”라고 전하는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대가의 소설속 주인공이 남긴 한 마디가 제 나름의 의미를 갖고 한 조각 퍼즐이 되어 내 생의 어디쯤엔가 끼어 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스럽겠다.

  여전히 비소리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2005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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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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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더 이상 이 책을 평가하는 것 지나친 주관으로 여겨진다.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다소 서정적인 제목으로 장영희 교수의 칼럼 모음집을 읽었다.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라는 제목으로 3년간 신문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책으로 묶었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다. 눈부신 햇살이 아침 창을 두드릴 무렵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향 좋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책장 넘기는 소리를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드커버와 그림을 곁들여 멋을 낸 것도 맘에 들지 않았고 수필 형식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미국과 영국 문학 중심의 책 선정도 맘에 들지 않았다.

  1급 장애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서강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중․고 교과서 집필, 번역가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저자의 치열한 삶의 모습에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며 혹은 일상 생활에서 겪은 소소한 경험들이 작품들과 밀착되거나 생동감있게 엮이지 못하고 인식론적 접근으로만 그친데 대한 아쉬움이 많다. 저자가 신문의 칼럼 형식으로 원고지 10매의 제한된 분량과 시간적인 압박을 받았음을 고려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머리를 식힐(?) 책으로 고른다면 문안하겠다.

  수필 형식의 책을 돈주고 사서 아깝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같은 일을 반복한다. 동질감을 나눌 수 있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글들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때가 많지 않다. 편협된 가치관이나 주관적인 세상에 대한 잣대가 작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생각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 가를 가르친다”는 윌리엄 포크너의 말로 3년간의 칼럼을 마무리하는 저자는 유방암 치료후 척추암으로 투병중이다. 보다 깊이 있는 그녀의 글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하고 유려한 문체는 쉽게 읽힌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건강한 모습으로 새로운 내용으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쁜 신문 <조선일보>에 연재된 칼럼이었다면 사지 않았을 것이라는 편견과 무관하게, 좀 더 꼼꼼하게 책을 고르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2005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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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니콜 튀펠리 지음, 김동윤.손주경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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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와 함께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모더니티에 대한 디드로의 선언으로 19세기 미술은 문을 연다. 1848년 제2공화국 선언부터 세잔이 사망하는 시기까지의 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있는 이 책은 급격히 다양해지고 팽창하는 유파들을 이전시대처럼 명명 지을 수 없고 <19세기 미술>이라고 묶었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상장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아르데코 등이 혼재했던 시기였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한다. 종교와 권력에 복무하던, 권위와 신화에 종속된 예술이 아니라 화가의 시선과 자연의 빛이 주는 느낌과 역할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예술을 창조하기로 마음먹은 최초의 화가 쿠르베는 ‘올랭피아’, ‘아틀리에’ 등을 통해 현대성을 말한다. 특히 ‘오르낭의 장례식’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작품속에 등장하는 현실속의 소시민,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실주의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마네의 ‘풀밭 위의 식사’는 정장 차림의 남자들 옆에 나체의 여성을 그림으로서 부르주아 전원풍 목가의 불순함을 그려내고 있어 충격을 주었다.

  이 시기는 니세포르 니엡스에 의해 최초로 사진이 발명됐던 시기로 미술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드가나 로트렉은 사진을 통해 크로키나 동작의 목록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시선의 포착과 인간의 인식 작용 사이에 놓인 간격을 가늠했다. 또한 사진은 일본판화와 같이 프레임, 앵글, 원경, 전경 등 새로운 공간구도를 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의 일본 미술은 인물과 인물의 배치법인 화면 공간구성법과 배색법은 모네, 드가, 반 고흐, 고갱 등에게 영향을 끼쳤다.

  풍경화 장르가 전성기를 이루었던 19세기 후반은 프랑스에서 혁신적인 작업이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자크 루소, 샤토브리앙, 생피에르, 영국의 조지프 터너, 존 컨스터블 등의 풍경화가 인상적이었다.

  ‘인상, 떠오르는 태양’으로 유명한 클로드 모네의 그림을 보면 “풍경이 자아내는 감각의 측면에서 인상주의적이다”라고 한 카스타냐리의 말로 표현된다. 피사로, 세잔, 기요맹, 바지유, 모네, 르누아르 등의 인상주의 화가그룹은 본격적인 현대성을 발현하기 시작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까마귀 떼 나는 밀밭’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죽음을 예견한듯 보인다. ‘해바라기’의 작가로, 생 레미 프로방스 정신병동에 감금된 채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는 동시대와 20세기 화가들에게 복잡한 영향을 끼쳤다. 야수파에게 생생한 터치를 인상주의에는 색채의 상징적 역할을 전수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과 고통스런 질병 속에서 그가 빚어낸 예술혼이 그의 그림을 빛나게 하고 있다. 십수년 전에 읽었던 그의 평전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중적인 그림일 수 없으나 경외감을 가지고 그의 그림을 대하게 되는 이유는 단지 그의 생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그림이 보여주는 강렬한 색감과 붓의 터치는 미술에 문외한인 나에게도 더할 수 없는 여운을 주었었다.

  폴 세잔은 현대 예술, 특히 큐비즘과 야수파의 문을 연 프랑스 회화의 거장이다. 야수파는 색채를, 피카소와 브라크의 큐비즘은 구성을 중시했다. ‘생트 빅투아르 산’과 ‘사과와 오렌지’ 등을 통해 색채와 형태의 엄격한 균형에 바탕한 그의 특징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큐비즘과 야수파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평가된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인 상징주의 화가들은 사물의 보이는 모습을 넘어서 숨겨진 현실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윌리엄 헌트, 로세티, 존스, 드샤반 등이 여기에 속한다. ‘천국의 문’과 까미유 클로델과의 연인으로 너무나 유명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들은 사랑과 삶에 대한 염세주의적 개념은 보들레의 ‘악의꽃’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폴 고갱의 <백마>는 색채 사실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움을 선택한 그림으로 평가 받는다. 타이티에 말년을 보낸 고갱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원시적 상징성은 후세에도 많은 논란이 되었다.

  건축에서 보여주는 절충주의와 예술의 총체로서 ‘아르누보’라 명명되는 세기말 징후는 당연해 보인다. ‘예술과 사회를 엮어줄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술을 창조하려는 생각’이 아르누보를 단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영국의 ‘아츠 앤 크래프트’, 프랑스의 ‘성찰적 미학’ 그리고 개인 주택으로까지 발달되는 과정들이 이 시기 만물과 만인을 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소개가 간략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건축가로 그의 건축 화보집을 보다가 스페인으로 뛰어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소개가 미흡해서 아쉽다.

  이렇게 폴 고의 죽음과 더불어 19세기는 막을 내리고 20세기 시작되었다. 고갱은 원시적 예술표현의 문을 열어줌으로써 큐비즘 형성에 근본적인 역할을 하게될 아프리카 가면의 ‘발견’에 화가들이 민감하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그의 그림은 미술의 영역이 존재론적 측면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20세기 미술의 성찰을 예견하고 있다.



2005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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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에디나 베르나르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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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부터 시작된 미술 여행이 이제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근대미술과 현대미술로 나누어 일별하는 일만이 남겨져 있다. 20세 초반부터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되는 1945년까지의 기간동안 세계사는 급박한 소용돌이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과 혼란 그리고 새로운 전망에 대한 모색을 가능하게 한 시기였다고 정리할 수 있다.

  러시아에서 1차 혁명이 일어났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발표되었으며 프로이트의 ‘성욕 이론에 관한 세 논문’이 발표된 것은 1905년의 일이다. 일본과 우리 나라 사이에 을사 늑약이 체결된 잊지 못할 불과 100년 전의 일이다. 근대 미술은 폴 고갱과 세잔의 죽음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미술의 한계는 이러한 사회적 불안과 과학적 혁명을 반영하며 정신분석학에 기여한 무의식과 니체, 베르그송 등의 철학적 직관들이 이 시대의 미술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한마디로 규정 지을 수 없으나 나름의 특징을 짚어 낼 수도 있겠다.

  색에 의한 혁명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간의 가장 내밀한 충동에 대한 이들의 거리낌 없고 심오한 분석은 에드바르 뭉크와 표현주의 화가들, 신즉물주의와 마술적 사실주의 화가들, 심지어 초현실주의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20세기 첫 번째 미술 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야수파는 색의 자율성과 화가의 감정적 개입을 인식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티스, 드랭, 루오, 블라맹크, 칸딘스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창가 풍경, 탕헤르’에서 보여주듯이 푸른색에 대한 마티스의 집념은 색채의 강렬함과 더불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표현주의 운동은 독일에서 야수파와 같은 시기에 전개되었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야생의 실존주의적 분노”, 미술가들의 감정과 세계에 대한 비극적 성찰이 결합된 것이다. 스페인의 고야, 영국의 블레이크, 독일의 프리드리히 등을 꼽을 수 있다. ‘다리위의 소녀들’, ‘카를 요한의 저녁’, ‘절규’ 등으로 유명한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은 이런 한 유파의 특징을 넘어 근대 미술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봄 햇살은 우울한 등불로, 한가한 풍경은 음산한 분위기로 표현하며 어둡고 복잡한 감정이 주조를 이루는 그의 그림은 현대인의 불안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이해된다. 앙리 루소와 모딜리아니의 그림도 눈에 띈다. 주로 초상화와 양식화된 누드화를 그렸던 모딜리아니의 인물들은 생전에 주목받지 못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추종자로 일컬어지는 샤갈의 그림들이 소개되지 않아 아쉬웠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그의 그림들은 하나의 유파로 규정지을 수 없을만큼 강렬했고 자유로웠다.

  형태에 의한 혁명으로 명명되는 입체파와 미래파, 절대주의자, 구축주의자들은 형태의 재구성을 통해 이전의 운동들이 진행해온 색에 의한 혁명의 성과를 심화하였다. 그들은 처음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들은 앞선 세기들의 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학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20세기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시각의 현실이 아니라 관념의 현실에서 차용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입체파의 특징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이 첫 번째 입체파 회화는 세잔의 영향을 받았다. 고국 스페인의 수난 당하는 바스크 지역에 헌정하는 걸작 ‘게르니카’는 고통과 죽음과 공포를 직각의 선과 대각선의 대비에 의해 혼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마르셀 뒤상, ‘전쟁’을 그린 오토 딕스, ‘붉은 광선주의’를 그린 라리오노프, ‘호밀 수확’을 그린 말레비치 등 미래파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역시 뒤틀린 현실과 급변하는 사회속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의식들을 반영한다.

  “회화 앞에 물질의 해체에 관한 전망이 열리고 있다” - 바실리 칸딘스키
  “조형적 수단은 무채색이 아닌 원색으로 이루어진 직각의 면과 프리즘이어야 한다.” - 피터 몬드리안

  추상의 시대를 연 것은 칸딘스키다. 마넬리의 ‘서정적 폭발’, 클레의 ‘붉은 풍선’, 되스부르크의 ‘역-구성’, 리트벨트의 ‘적색과 청색의 의자’, 등은 청기사와 신조형주의라는 이름으로 이전에 보여지던 회화와 또 다른 충격과 느낌을 전해준다. ‘넌 날…’이라는 작품으로 뒤샹의 화려하고 복잡한 심미의 세계를 보여준다. 문학에서 기원한 다다이즘은 미술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형이상학적 실내’를 그린 조르지오 키리코를 기준으로 삼은 현실주의 또한 인간 무의식의 변형된 모습들을 비춰주고 있다. 아쉬운 것은 르네 마그리트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부족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있는 화가중 한사람데 ‘가면을 벗는 우주’ 한 작품 만이 소개되고 있다. ‘욕망의 수수께끼’, ‘깨어나기 1초 전 사과-석류 주위의 꿀벌 한 마리의 비행에 의해 야기된 꿈’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는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초현실주의를 온몸으로 보여준 화가이다. ‘빨강, 노랑, 파랑’으로 가장 엄격한 신조형주의를 고수한 몬드리안은 추상의 영속성을 확고히 하였다. ‘왕의 슬픔’을 그린 앙리 마티스는 원색에 기초한 강렬한 색채와 푸른색에 대한 관심으로 독특한 미의식을 창조해 내었다. 그 밖에 조형과 국제적 양식들은 현재에 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진다.

  1929년의 대공황은 경제적 위기뿐만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위기이기도 했다. ‘인터내셔널’을 그린 그리벨, ‘실업자’를 그린 그로메르를 통해 구상으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사회적 사실주의와 노동자의 비참함에 대한 직접적 증언의 양상을 띠고 있다. 그랜트 우드, 에드워드 호퍼로 대표되는 미국의 회화나 라틴 아메리카의 회화는 간략하게 소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프리다 칼로의 남편인 리베라 디에고의 그림 한 점만을 소개하고 있다.

  히틀러의 등장과 중국의 대장정, 제 2차 세계 대전과 원폭에 의한 종전 등 20세 초반의 지구는 끓는 물과 같았다. 염세주의와 부조리의 철학이 유행할 수 밖에 없었으며 실존에 대한 불한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이전 세기와 비교할 수 없는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졌던 시기가 바로 근대미술에서 이야기 했던 20세기 초반의 모습이었다. 사회와 인간의 변화에 대응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 미술을 바라보고 화가를 이해하며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이 시대의 불안한 여유는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200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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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라루스 서양미술사 7
장-루이 프라델 지음, 김소라 옮김 / 생각의나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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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호흡으로 시작된 책읽기였다. 지난 가을 '한국사 이야기' 22권보다 힘들었던 이유는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프랑스의 라루스 출판사에서 발간된 서양미술사 일곱권을 생각의 나무에서 지난 연말에 번역 출판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세미술부터 읽기 시작했다. 한 번에 읽지 않고 한 권이나 두 권씩 읽는 방법을 취했다. 전체 분량은 7권 1,5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지만 시대별로 중세미술, 르네상스, 고전주의와 바로크, 낭만주의, 19세기 미술, 근대미술, 현대미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그저 단순한 미술사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시의 문화와 사회사 그리고 사상사의 흐름까지 결합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 깊이와 폭이 부족하고 아쉬운 부분도 많이 있지만 나름대로의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에게 미술사의 흐름을 사회, 문화사와 더불어 이해하고 풍부한 도판을 통해 개별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간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책 뒤에 사회, 문학, 예술 분야의 연표를 제공해서 대략의 흐름들을 정리해 놓은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적절하다.

  1946년부터 그러니까 제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의 미술을 현대 미술로 분류해서 20세기말까지를 정리하고 있는 마지막 현대미술은 익숙한 작가들보다도 현대 사상의 흐름 속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흥미있게 오히려 고전적 의미의 예술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 작품들이 결코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피카소의 ‘궁녀들’, 마티스의 ‘왕의 슬픔’을 필두로 장 뒤뷔페의 조각, 프랜시스 베이컨의 ‘울부짖는 교황 또는 이노켄티우스 10세’가 주는 색다름도 미래의 예술을 예견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소련의 스푸트니크호의 충격으로 미국은 교육 정책의 기저마저 뿌리채 재정비했고 드리핑 기법의 충격을 던지며 대중에게 다가선 잭슨 폴록의 그림만큼 도발적인 모습으로 뉴욕은 이제 세계 예술계의 무게 중심을 파리로부터 이동시켰다. 콜라주 기법으로 대중들을 또 다시 당혹시키는 앤디워홀의 ‘아홉 명의 재키’등 일련의 작품들은 미디어의 발달과 광고, 사진등 우리들 일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대상들과의 결합으로 예술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미니멀 아트, 키네틱 아트와 팝 아트 등 이름만큼 다양해진 20세기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유희는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누보 리얼리즘이 부활하여 아르망의 ‘쇼팽의 워털루’같은 충격적인 아상블라주가 탄생하고 구상이 부활하는 것도 다양성 측면에서 당연해 보인다. 핸슨과 위클뢰의 극사실주의는 사진과 미술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혼란스럽다. 추상이 부활하고 대지 미술이라 명명될 수 있는 작품들도 등장한다.

  세기말의 불안으로 표현될 수 있는 설치 작품들과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현대 미술의 또다른 성과로 표현된다. 해프닝, 퍼포먼스 등 고전적 의미의 미술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만 같고 관객은 혼란스럽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건축분야의 눈부신 발달은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기능적, 미학적 측면에서 공간의 건축을 예술과 결합시켜나가고 있다.

  20세기의 철학자들의 분석대로 미래 사회는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시대를 뭐라 명명할 수 없을 것이며 진행형의 예술을 규정짓는다는 것은 더욱 무모해 보이기도 하니까. 다만 현실을 넘나드는 다양한 표현 방식들과 예술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흐름들을 즐길(?) 수 있는 안목과 태도를 갖추는 것만도 쉽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결국 미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또다시 바보 같은 질문과 생의 의미를 다시 고민하게 되는 반복되는 어리석음(?)을 시작한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미술은 다원적이고 모호하고 유동적이었다. 도처로 몰려든 이 시기의 미술은 미추의 구분 너머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미술은 삶 자체와 대립 관계 속에서 삶을, 어쩌면 존속까지를 누렸다. 외견상 점점 더 특수화되는 사회적, 문화적, 제도적, 나아가 경제적 영역의 볼모가 된 미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산되고 미디어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이 시기 동안, 미술은 그 긴 역사를 통틀어 접했던 대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규모의 다양한 대중을 사로잡았다. 지적, 정치적, 경제적 공론의 대상이었던 미술의 다양성과 영향력은 장 둔감한 무관심을 극복하여 어떤 이들을 매혹하고 또 다른 이들을 선동했으며, 격렬한 논쟁의 촉매제가 되었다.” - <현대미술, 서문>중에서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겠으나 이것으로 길지만 행복했던 미술사의 여행을 끝마친다. 기약할 수 없으나 하루 빨리 유럽으로 날아가 실제 그림과 건축들을 하나 하나 뜯어 먹으며 감상의 시간들을 갖고 싶다는 욕망을 잠시 뒤로 미룰 수 밖에……

200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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