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떻게 보느냐’가 ‘어떤 세상인가’를 결정한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명한 파란 색지에 검은 글씨로 한 줄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쯤되면 제목과의 조합 속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청소년을 위한 ‘라면교양’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시리즈 중 하나이다. 1권이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이다. 단순한 가정법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뒤집어 생각하고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제각각이며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방식도 다양하기만 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문제는 세상은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의 차이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으며 역사는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인류의 건망증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어보지도 않은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읽고 싶지도 않다. 권인숙을 알고 대한민국을 알고 군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 때때로 한숨을 쉬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전부다. 미처 생각하지 않은 새로움이나 특별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으므로.

  청소년을 위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있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펀지>에 나올만한 질문이다. 짐작한대로 답은 아니올시다. 저자 하승우는 책세상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로 만난 적이 있다. 탁월한 솜씨에 감탄한 기억 때문에 저자에 대한 믿음과 제목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과연 군대란 무엇인가? 우스개 소리로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는 단군신화보다 유명하다. 간혹 확대 재생산되며 신화가 되기도 하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설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풍자와 해학의 결정판이며 어떤 훌륭한 문학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웃어넘길 수 없는 군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공상 소설 시리즈를 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내 경험이든 타인의 간접 경험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군대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실질적이고 친밀하게 접근한다. 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지, 남자들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지를 말하다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심드렁 할 정도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함께 흥분하지 않는 내용이다. ‘병역 거부’와 ‘병역기피’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가 그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 속으로 모두 병역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심지어는 심한 비난을 퍼붓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적 태도의 반영이거나 노예근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것이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 걸까? 국적을 포기하고 돈을 처발라가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병역을 기피하는 ‘그들’보다 양심적 거부자들이 더 나쁜(?) 사람들인가?

  강한 군대가 평화를 지키고, 군복무는 시민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군대가 약해지고, 먼저 총을 내리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대한 오해 혹은 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땅의 예비역 혹은 미래의 군인들이여 이 책을 읽어보라. 아니 군대에 보낼 아들이 있거나 애인을 두었거나 형이나 오빠가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읽어보자. 그들의 눈물젖은 편지를 읽고 공감하고 위로하기 전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군대’에 대해 다시 고민하자.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군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전쟁에 이기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인가. 국라라는 이름의 괴물을 짝사랑하게 세뇌시키는 ‘애국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평화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하기만 한가. 끝이 없는 질문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자라고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하게 변화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맺는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직선으로만 바라보면 시선에 잡히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보지 못한다. 지구도 둥글고 세상도 둥글고 사람의 삶도 둥글어서 우리는 유연한 곡선의 시선을 가져야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 P. 176

  인식의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과 알고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상식과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사실들이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달라질 수 있다. 그때-거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문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다.

  자, 여러분 대한민국 군대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신 분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혹은 군대에 가야하는 사람입니까? 애인이 군인이거나 친구에게 위문 편지를 쓰는 중이십니까? 약장수처럼 외쳐 봅니다. 현실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여러분에게 나옵니다.


080829-0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아파트 - 바보, 문제는 아파트야! 우리 시대의 위험한 문화코드 읽기
허의도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장면 1. 1980년대

  “아파트로 이사갈래?”
  저녁 식사 자리로 기억하는데, 어머니의 말에 모든 식구가 반대한다. 그게 사람 사는 집이냐, 닭장에서 어떻게 사느냐, 성냥갑처럼 갑갑하다……
  “싫으면 혼자 간다.”
  그렇게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 장면 2. 2000년대

  “그 집이 국회의원이 나온 집입니다. 터가 좋은가 봐요.”
부동산 중계업자의 말을 듣고 입맛이 떨어졌다. 정치인이 살던 집이면 정말 재수 없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누군데요?
  “단병호라고, 왜 있잖아요, ……”
  민노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전 민노총 위원장 단병호.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 분이 아파트에 사셨다니……. 농담이 아닌가 했고 사실이라면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의 대부 전 민노총 위원장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민은 사라졌다. 전 전주인이긴 하지만 존경하는 분이 살았던 집이라니……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중계업자에게 계약하자고 말해 버렸고 그 곳에서 밤마다 책을 읽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참 대책 없는 인간이다.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곯아보지 않은 먹물의 배부른 푸념일 수도 있겠지만 돈의 위력과 힘에 압도되어 본 적도 그것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생활은 생활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아파트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농촌 생활을 해 본적도 없으면서 늘 마음은 산에 가 있다. 단순한 동경과 낭만이 아니라 최소한 땅과 호흡하고 나무를 볼 수 있는 공간들이 필요하다. 언제 그 도서관 같은 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으나 누구에게나 소박은 희망은 있는 법이다. 사방팔방 아파트 콘크리트 덩어리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용소나 군사시설을 연상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이곳은 신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과연 ‘아파트’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묻는 것은 실존적인 고민해 해당된다. 삶의 뿌리와 기반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 계층과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면 미래와 희망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허의도의 <낭만 아파트>를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치적 입장과 사회경제적 위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반칙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 허의도의 입장은 매순간 삐걱거린다. 책을 쓴 목적도 입장도 모호하고 구석구석에 드러나는 모순은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중앙 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월간중앙’ 편집장이면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인인 그는 아파트가 없다. 나의 경험을 본문에 소개한 것을 보면 대한민국 아파트 투기 광풍의 피해자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은행에 다니던 시절 아파트를 분양받고 퇴사하면서 팔아버린 사연이나 그 후 최근에 구입 기회를 놓쳐 버린 경험은 책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했는지 설명한다. 먼저 아파트를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 1부는 박정희와 건설 공화국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서 출발해서 IMF를 거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이르기까지 경제 문제와 아파트의 상관관계를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논의는 대단히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고 있으며 감상에 기대고 있는 면이 많다.

  아파트를 키워드로 우리 경제의 발전과정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아니면 2부에서처럼 문화사회학이라는 측면에서 아파트의 의미와 역할을 집중적으로 풀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두 다양한 관점이 하모니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어설픈 만남으로 읽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나만의 감상일 수 있으나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과 분석을 전제로 하는 기획이거나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들여다보는 문화적 관점에 철저했다면 훨씬 읽을 만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시인으로 등단해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문장들은 읽을 만하고 인용된 내용이나 적절한 비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낸다.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파는 건설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될 만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아프게 그려낸다. 개발 독재 시절의 고통과 아픔은 이 시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물론 노무현의 ‘아파트’는 한 두 마디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는 어느 아파트 광고의 카피를 기억한다. 역겨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슬픈 천민 자본주의의 단면을 드러내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오늘도 안녕한가? 아니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안녕할 것인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뒤적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옹호론자든 반대론자든, 강남 공화국 시민이든 아니든 입장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한 손은 얼음물에 담근 사람처럼 묘한 표정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 된다.


080818-093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licia 2008-08-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찜했는데.
벌써 93권. ^^
잘 지내시죠, 건강하신거죠?


sceptic 2008-08-20 18:26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08-08-2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그 사회의 구성원 수만큼 많다. 우석훈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거쳐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최근의 생각들을 일괄하고 있다. 기획 의도와 내용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앞의 두 책과 구별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함께 묶여도 무관하다. 잡지나 신문 등에 실린 칼럼과 비평문을 모아 낸 모음집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던 민감한 문제들과 정부 정책이나 경제, 사회 문제를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돌아보는 추억담처럼 읽힌다. 벌써!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아닌가. 책을 읽는 동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 1년 만에 아련한 추억처럼 읽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책에 실린 내용이 그 이전에 쓰인 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잇달아 한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행간에 숨은 정보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밝히지도 않은 나이와 이력들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혀 마치 퍼즐을 맞춰 전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유 방식들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그의 행동 방식과 관심사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석훈의 글을 통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대단한 문학적 감수성을 숨기고 지극히 냉철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일찍이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들과 국제 기구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우석훈으로 하여금 현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석훈의 글들은 탄탄하고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하며 합리적이다. 그래서 계속 읽힌다.

  사람들의 술버릇 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중언부언 - 곁에서 듣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우석훈의 이야기 중에는 이렇게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세 권의 책을 짧은 기간 동안 읽어서 그런 느낌 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술주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는 거대 담론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해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는 하다. 책의 목적과 기능이 개별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목적과 방향에 대한 희망이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20세기에 넘어온 사람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인물열전’ 부분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아니라 인문학자 우석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노자와 진중권에 대한 평가 강금실과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우리 시대를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목하 열애중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할 것이고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주장하는 손학규와 김지하와 한통속으로 몰아갈 염려가 있겠지만 녹색환경과 생태 경제학이라 불릴 만한 일관된 관심과 주장은 평화 경제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름이 거창하고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우석훈이 주장하는 미래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최소한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 사회를 만들어가고 경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은 최소한 그만한 청사진과 철학적 신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GNP 2만불 혹은 3만불이 대한민국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숫자놀음에 불과한 단순한 경제지표를 볼모로 우리 모두는 부나비처럼 제 날개가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1% 혹은 10%를 위한 정책을 하위 50%가 지지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우석훈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 비합리적인 정치 성향에 대해 ‘성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이론화했다. 다양한 분석들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조중동의 기사를 자신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 비규정규직과 세입자들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분명하지 않고 사회적 타협이나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우석훈은 스스로를 ‘명랑 좌파, C급 경제학자’라고 명명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낙관과 막연한 믿음,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환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접속 코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고 접속하고 현실을 재편하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매우 명랑하고 즐겁게 말이다.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즐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석훈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작고 힘찬, 수많은 울림들을 하나로 모으는 확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080725-0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팜플렛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들
네모난 speaker 위에 놓인 네모난 tape
네모난 책장에 꽂혀 있는 네모난 사전
네모난 서랍속에 쌓여 있는 네모난 편지
이젠 네모같은 추억들
네모난 태극기 하늘높이 펄럭이고
네모난 잡지에 그려진 이달의 운수는
희망이 없는 나에게 그나마 기쁨인가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갑자기 화이트의 ‘네모난 꿈’을 듣고 싶었다. 가사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노래를 들었다. 네모는 궁글게 사는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둥근 지구가 네모난 꿈을 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은 여전히 모호한 환상과 꿈이라는 환각제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마약처럼 몽롱하게 먼 미래를 부정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뒤로 밀린다. 눈앞의 이익과 단기간의 손익 계산에 머릿속은 컴퓨터처럼 돌아간다. 잘 산다는 것, 행복한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열심히 사는 것 같은 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비웃기까지 한다.

  이렇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몇 가지 형태의 삶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학교를 다니는 목적, 대학을 선택하는 기준, 배우자를 결정하는 관점, 직장을 선택하는 방법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다. 최선은 중요하지 않고 이유도 물을 필요가 없다. 자명한 논리처럼 너무 분명해서 그것들에 대한 질문조차 우습게 들린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우석훈은 네모난 세상보다 무서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생태 경제학이라 명명될 만한 기준과 관점을 유지하면서 우석훈이 진단하는 대한민국은 끔찍하기만 하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장이자 진단서에 해당된다.

  속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를 살면서 ‘느림의 미학’을 말하고, 전 국토의 80%가 도시화되었으면서 친환경적인 삶을 외치고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수돗물로 청계천을 복원했다고 대국민 사기극을 쳐도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이거라도 어디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만이 대안을 찾고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비판 정신이 긍정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거대한 어항이라고 표현된 청계천을 필두로 토목공화국의 몰락에 대한 경제학자의 우려는 이상적인 관점이나 좌파의 논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화상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과 고민이 진지하다면 언제든 우리는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자 우석훈은 생태와 환경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는 단순하게 경제 논리와 숫자 놀음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며 미래 사회에 대한 우려와 냉정한 조언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최소한 ‘경제 이성’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 사회가 선택한 것들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은 선택 능력이 없다는 것인가? 판단 능력이 마비되어버린 감각의 제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참 다양한 반응과 대안과 비판과 미래를 그려 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좌파든 우파든 무관하게 최소한 이성적인 논의와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과연 현실 정치와 경제를 보는 관점에서 통용될 것인가의 문제는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만든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해도 가야할 길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행복하겠다. 문제는 그 길조차 모호하며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이미 갈림길을 지나쳐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생태적 사회를 위한 변화는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과연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믿어도 될까?

  이 책에서 우석훈 거시적 관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경제학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때로는 좌파는 우파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그들의 한계와 역량을 난도질한다. 간만에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한 느낌이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강유원을 만났을 때처럼 큭큭거리며 읽었지만 단순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문제들은 분명 아니다. 현실적인 대안이나 미래에 대한 아젠다가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보면 읽고나서 더 가슴만 답답해졌다.

  그래도 지금 이대로는 아니다. 아닌건 아닌거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는 책이다. 책은 어쩌면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자꾸 읽히고 정작 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고민의 끝자락에는 ‘실천’이 남는데 쉽지 않다. 아니 게으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동차 키를 챙기고 기름값에는 아예 눈감아 버리고 정몽준도 아니면서 버스비를 모르고 사는 생활 패턴에는 문제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만으로 용서되지 않는 부분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책 한 권 읽고 고개만 끄덕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 더구나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이명박을 보라.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노무현이 그리웁다면 당신은 이 책의 필독자이다!!!


080723-0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