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권력전쟁 - 사이버 세계를 조종하는
잭 골드스미스 외 지음, 송연석 옮김 / NEWRUN(뉴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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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기술은 누구나 금방 손쉽게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정치적 국경을 사실상 지워버릴 것이며, 자유무역을 보편화시킬 것이다. 기술 발전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이란 없으며, 우리는 점차 공동의 언어를 채택해나가게 될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19세기 후반 전보가 발명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그로부터 100년쯤 후에 우리는 인터넷을 만난다. 1990년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출근부를 인터넷에 찍어야했던 문화적 충격은 아득한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넷스케이프 2.0의 아이콘은 등대였다. 캄캄한 정보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상징적이었다. 10여년 만에 인터넷 세상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인터넷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어느 것의 역사든 과거는 늘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권력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세계를 조정하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터넷은 미국의 국방부에서 탄생한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이것이 발전되면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본다. 도메인 네임과 프로토콜 그리고 루트 서버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공상 과학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현실 세계의 강력한 실력자가 있고 그들에 의해 사이버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창조한 후 무한히 팽창되어 나가는 또 하나의 우주와 유사하다.

  이 무질서한 세상에는 항상 실제 권력과 자본들의 쟁탈이 치열했다.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의 충돌은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며 흥미롭다. 각국의 법률과 문화는 국경 없는 인터넷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실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프랑스 법정에 선 야후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책은 현실적인 국경과 영토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고 인터넷 혁명을 꿈꾸지만 결국 현실에 의해 지배되는 인터넷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조주 존 포스텔의 루트 권한 달환 시도는 싱겁게 끝나버린다. 결국 미국 정부 소유가 되어버린 인터넷은 국경 없는 아나키즘이 실현된 민주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검은 그림자와 숨은 권력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더구나 사이버 공간의 자유와 질서는 보이지 않는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 개념과 지리적 구분은 인터넷에서도 통용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법률이 충돌을 일으키면 분쟁이 생기고 각국의 제도와 법률에 따라 통제된다. 가장 극명한 예로 중국을 보여준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네트워크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게 되었고 특히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야후가 중국 정부의 통제 시스템의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은 우울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과 권력의 힘은 현실을 너머 이미 사이버 공간을 장악한 지 오래라는 이야기다.

  결국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주의와 인터넷의 결합은 교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적절한 통제와 눈부신 발전 속도는 중국 인터넷의 아이러니다. 재미를 너머 우려와 슬픔을 자아낸다. 소위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중국의 그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통제와 관리는 자유롭과 자율적인 인터넷의 특성과 상극이다. 그 한계와 자정능력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국판 소리바다 냅스터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파일 공유 운동의 시작과 결말은 음반업계의 막강한 로비와 자금력, 미국적 풍토, 저작권 등과 어우러져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하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많은 정보과 고민거리를 얻었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정부의 규제와 법률을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므로 당연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과 발전 속도는 단순하게 현실 생활과의 관계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상존한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진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지속적이고 꾸준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역으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여 성공한 이베이ebay를 저자는 승자라고 칭하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 독재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전자상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라면 결론은 쉽지 않다. 그 다양성을 토대로 각기 다른 룰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국경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역외 적용성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이 간다. 세계법의 필요성과 한계를 통해 앞으로 정부의 통제와 세계화의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는 우리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바로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강국, 통신 인프라가 거의 완벽하게 갖춰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문제 특히 국가 간 분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의 권력 전쟁은 현실 세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치열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결국 인터넷은 또 하나의 세상을 꿈꾸었지만 현실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은 혁명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고 보다 자유롭고 변화 가능성이 풍부한 가상 현실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 꿈은 어떻게 전개 될 지 알 수 없으며, 변화의 진폭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0811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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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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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소비의 과정으로 보면 참 재미있다. 무엇인가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것을 버리고 또 사기 위해 땀나게 돈을 번다. 또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고……. 지구를 빌려 쓰는 인간에게 무한한 특권이 부여된 적이 없으나 오만한 인간은 오늘도 땅 속은 물론 바다 속까지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난무하지만 오늘의 소비 욕망을 절대로, 멈출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익숙한 생활 패턴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고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부르고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어찌할 것인가? 지금 이대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을 위해 영원히 무한한 화석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으니 지배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우익 선생이 살아 생전에 TV 인터뷰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통해 선생이 말씀 하셨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얼마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인간 종족의 사회생활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서이다.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보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조망한다. 매우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가슴이 서늘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 삶의 조감도를 볼 수 없어 답답할 때 이 책은 유용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그 효용가치를 다 하고 쓸모없는 것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부른다. 세상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분류하는 것들 중에 정말로 쓰레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없을까?

  현대성(modernity)에 기초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상생활의 쓰레기와 무관하다. 생산과 소비적 측면의 인간을 비난하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난민을 비롯한 최하층 계급에 속해 현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 이웃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심 재개발과 뉴타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난민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분리된 채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 정보의 쓰레기부터 인간 쓰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가 낱낱이 고발된다. 우리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저자의 진단은 모더니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그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내 쓰레기,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로 대별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결국 쓰레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What's up?"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별 일 없었지?”라는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비극적 증언에서 출발한다. 안부 인사라고 하기엔 공포스럽다. 이 말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고단한 삶의 형태를 아우르는 말이 되고 있다. 감시와 처벌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에게 법의 준수와 제도적 안정이라는 말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대와 우정이라는 가치로 폭력적 제도의 정당성을 깨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모른척 외면할 수는 없는 일들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내 한 몸 아무 일 없기를 바라다가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What's up?"이라고 아침 인사를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린스펀이 20년간의 경제 정책의 실수들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더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긍정적인 시선과 내일의 희망을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사탕발림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움직임들이 드러나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과 행동하는 대중들이 연대하지 않는 한 견고한 현실의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점진적 변화든 급진적 개혁이든 목표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공할 만한 두려움으로 미래 사회가 진행될 것이라는 경고와 진단은 언제나 있어왔다. 비판적 관점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내어 놓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다.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어도 원인을 모르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시작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 사람의 견해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What's up?"이라는 인사말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생각을 다른 이의 표현을 따라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08102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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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8
강원택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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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말일 수도 있고 수평적 개념으로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를 정교화하고 법과 제도가 개입되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제도가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생활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 행위를 통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참여 행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대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선출된 정치인들의 행위를 굳게 믿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왕정이나 군주정을 통해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일천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은 더욱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 정치가 자리 잡지 못하는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계보 정치나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 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정책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인물 위주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정부나 정당이 집권을 해야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보다 권력이며 자본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한국의 정치는 일대 혁신을 맞이한다. 그 주역은 바로 인터넷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바야흐로 한국 정치는 진일보 했으며 그 위험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직접 민주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현실 생활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까지도 각 가정까지 파고 들었다.

  그 출발은 물론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 선 축제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노무현의 최대 업적은 ‘당선 그 자체’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와 효선, 미선을 위한 촛불 집회를 거쳐 노무현의 당선으로 마무리된 현상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국민들의 열망과 달리 참여 정부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움은 접어두고라도 개혁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가 어떠하든, 경제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의 모습이 어떠하든 웹 2.0 시대의 한국인들은 과거의 정치 형태와 권력자로서 정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치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넘어 왔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힘이다.

  강원택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서다. 인터넷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단점들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당연히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웹 2.0에 대한 현재와 미래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의제 설정의 민주화, ‘대중의 지혜’, 선거와 프로슈머 유권자라는 핵심 개념들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진화를 위해서 법과 제도를 살펴보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참여와 선거를 통한 정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정치인들을 욕하고 안주삼아 씹어대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반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기적 욕망인지 대다수를 위한 방법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도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와 눈팅족과 무뇌충의 저항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질주할 수는 없어도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은 소수의 정치인이나 권력가,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패배의식에서부터 변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웹 2.0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웹의 영역을 확장하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0810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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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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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생존의 논리는 인간의 유전자에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일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생존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더 낳은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물질과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무한 경쟁 체제에 온몸을 내맡긴 채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삶의 목적과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회마다 시대적 가치가 있고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주류의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방법도 있고 <꽃들에게 희망을>을 준다고 믿는 애벌레처럼 끝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뛰어드는 삶도 있다. 우리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그 흐름과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신안1리 마을 이장 강수돌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5권으로 펴낸 책부터 손에 집힌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강수돌 교수의 이전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본다. 어렵지 않게 답이 찾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만을 확인하는 책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는 것 또한 건방지지만 말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중독 벗어나기>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에서 출발한다.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과연 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 사회로 이행과정에서 게으름은 악이고 근면은 선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외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 먹자는 달콤한 유혹은 계속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양극화는 심화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가정에서 발원한 부모들의 교육 방식과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 체제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유효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80은 20에게 지배당하고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명문 대학에 입학 하는 순간, 대기업에 취업하는 순간,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경쟁의 덧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이제 지자체와 국가가 앞장선다. 초등학생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일제고사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가진 자를 위한 국제중, 특목고는 확산되고 건설과 토목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일과 직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에 불과한가.

  이른바 ‘팔꿈치 사회’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자기소외가 시작되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통과 연대가 대안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도대체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막막해진다. 실천적 대한이 아니라 한낱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속도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결국 경쟁은 학교에서 내면화되고 가정에서 공고화된다. 혹자는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는, 학부모의 요구를 잘 모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큰 일 날수 있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 무엇을 배우러 가는지.

  첫째,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大學)’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사회가 ‘상중하’라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깨 놓고 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넷째,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이 ‘인재’가 되고 ‘영재’가 되고 ‘천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인재, 영재, 천재와 같은 말들이 결국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 즉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섯째, 초중고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여섯째, 초중고 학생들도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곱째, 각종 시험에 대해 무조건 잘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시험문제야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고 나아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입시 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 경쟁, 생존 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교는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열 번째,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우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넘어, 사회질서 자체가 더 이상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를 직접 만났던 저자의 경험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만하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경쟁’과 무관하게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를 알고 싶다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보면 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 우리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거미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저자처럼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정과 환대의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081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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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0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2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배신 - 21세기를 사는 지혜 인터뷰 특강 시리즈 5
김용철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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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듣게 된다는 말이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화두는 단연코 ‘김용철’과 ‘촛불집회’가 될 것이다. 벌써 아득하게 잊혀진 과거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무척 바쁘게 살거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문제도 바쁜데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왜 바쁜지, 계속 바쁘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지 묻고 싶다. 이명박을, 한나라당을 찍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지만 악화는 꾸준히 양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실연이 아니라 배신이다. 배신背信은 믿음을 등지다, 믿음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서로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신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신당한 수많은 사람들만 찾을 수 있다. 배신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정혜신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고 타인의 행동은 현상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신에는 수동태만 있고 능동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공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기적인 인간은 누구나 내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동어 반복의 결론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나 내 행동에 대해서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2004년부터 교양, 상상력, 거짓말, 자존심에 이어 올해는 배신이라는 주제로 한겨레신문사에서 특강이 이루어졌다. 시의 적절한 주제를 중심으로 인터뷰 특강이 이루어진다. 3월에 이루어지는 이 특강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매년 가을 책으로 만난다. 아쉽지만 놓칠 수는 없는 책이다. 5년째 꼬박꼬박 사서 읽는 이유는 내겐 소화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뉴스를 끊은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그것이 대안은 될 수 없다.

  고민보다 행동, 참여와 연대만이 살 길이다. 이 책은 내게 매년 자극과 함께 용기를 준다. 사면초가 - 홀로 서 있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마다 멀리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위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제자리에 엎드려 닥치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 3년만 지나면 강아지도 안다. 하지만,

  김용철은 왜 그랬을까? 검사 출신의 삼성 구조본부 팀장. 그의 선택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던 ‘카더라 통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삼성은 무엇이 달라졌으며 검찰은 어떻게 변했는지 점검해 보자.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은 조금 변했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과 말이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은 우리에게 배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과연 개인적 이익 때문이거나 배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들일까? 내부 고발자를 비롯한 수많은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한 책을 기다려 보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김용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헌법적 기관인 삼성과 맞서려고 했을까?

  2008년 한겨레신문의 인터뷰 특강 주제인 <배신>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반성하게 한다. 하종강의 말대로 본능적 유전자인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용기가 필요하고 생존을 넘어 선 실존적 고민에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배신 할 용기는 갖추고 있는가? 눈감고 귀막고 벙어리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김용철은 결코 스스로 배신자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김용철 외에도 정혜신의 ‘배신의 정신 분석’이 특별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배신의 개념을 구별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진중권은 언제나 대중을 배신하며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논리와 오호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가장 유사한 성향의 인간으로 혼자서 친근감을 느낀다. 과학자 정재승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뇌과학의 입장에서 이마 뒤쪽에 있는 전전두엽에 위치한 자존심과 배신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다른 책에서도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읽었지만 정태인의 FTA 이야기와 이명박 경제 이야기는 이제 저질 코미디에 가깝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슬프다. 계속 미루고 있는 조국의 강연도 인상깊다. 앞당겨 차근차근 그의 책을 보고 싶어졌다. 법은 여전히 평등과 서비스가 아니라 권력과 부정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다 즐겁고 발랄한 책 한 권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발딛고 선 이 현실에서 조금씩 움직여보지만 쉽지 않다. 더딘 발걸음이지만 불빛을 저버릴 수는 없다. 묵묵히 걷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지식인도 투사도 아닌 나같은 사람의 정체성과 실존적 고민들은 언젠가 다수와 대중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강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랬더니 슬몃 미소가 새어나왔다. 벌떡 일어나 뛰어야겠다. 또 다시.


0810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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