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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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이 단순한 질문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인권이며, 성별, 인종, 국적은 물론 나이, 장애, 성적 취향 등에 대한 차별을 부당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인권을 존중하는 삶의 시작이다. 성별과 인종, 국적과 나이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형성된다. 후천적인 문화적 토양에 기초하여 사회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타인을 보는 틀을 만들어왔다. 가족과 학교 사회와 국가의 영향을 받으며 익숙한 방식대로 타인의 관점을 습득한다. 반성적 사고와 성찰적 태도 없이 맹목적으로 혹은 다수의 편에 서는데 익숙하다. 아마 대부분의 ‘나’는 그렇게 세상과 타인을 바라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탕하도록 행위하라”는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상식에 해당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에 쉽게 동의하지만 실천하지는 않는다. 실제 생활에서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조금만 생각해 우리들의 모습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인지 깨닫게 된다.

인권은 기존의 관습과 문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현재도 각 지역마다 독특한 풍습과 전통에 따라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가 제한된다. 문화적 다양성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보편타당한 원리의 준칙에 따르면 당연히 개선되어야 할 악습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인권 수준과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은 어느 정도일까?

아마 보는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가인권위원회’를 눈에 있는 가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념적 잣대로 판단하는 한 인권은 아직도 우리에게 먼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인권의식을 심어주고 차별적 시선을 걷어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과 결과들은 보이지 않게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믿는다.

김두식의 『불편해도 괜찮아』는 2010년 대한민국 인권의 현주소를 진단하는 책으로 읽었다. 한국인들의 인권의식을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현실의 문제를 꼼꼼히 짚어내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내용들은 거꾸로 생각하면 우리에게 아직도 많이 부족한 생각이나 제도라는 뜻이다. 『십시일반』, 『사이시옷』은 만화라는 친근한 방법으로 차별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이렇게 작은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좋은 책이다. 김두식은 전작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보여주었던 우리나라 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을 ‘인권’이라는 보편적 영역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이 책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의 인권과 차별을 이야기 한다. 또한 종교와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 문제, 인종차별의 심각성을 역설한 다음 마지막으로 차별의 종착역인 제노싸이드(집단살해, 인종학살)로 정리한다. 전체 9장으로 구성되어 각각 독립적인 주제로 쓰였지만 ‘인권’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향해 집중 수렴하는 구조이다. 지금까지 나온 책들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인권’을 영화로 풀어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이야기라는 부제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저자는 영화에 대한 안목이 깊고 넓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각각의 주제에 알맞은 영화를 통해 딱딱하고 불편한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풀어낸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영상세대에게 드라마나 영화 이야기를 꺼내는 것보다 알기 쉽고 감동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저자는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은 안 된다. 사람들은 이기적 욕심과 편향된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것이 절대 진리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지식이고 실천이다. 아무리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으로 안다고 해도 가슴에 닿지 않고 행동에 옮겨지지 않는다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목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 아니라 상식에 기대어 이야기한다. 사람마다 상식이 다른 것이 문제지만 그 상식을 깨뜨리고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상식을 만드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지식인은 물론이고 평범한 우리들이 저지르는 가장 큰 잘못은 행동하지 않고 침묵하는 일이다. 알면서도 외면하고 이기적 욕심을 위해 모른척하고 말해야할 때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사소하지만 우주만큼 큰 차이가 있는 삶의 방법과 태도이다. 그래야 세상은 아주 조금 달라진다.

인간들의 DNA는 99.5%가 동일하고 오직 0.05%만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 0.05%에서 우리 모두의 다양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지요. 그 사소한 다름에 기초해 민족, 종족, 인종, 종교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말살하려던 역사상의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김두식, <불편해도 괜찮아>, 3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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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기업 이야기
권은정 지음, 손문상 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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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고민을 했지요. 소수 엘리트만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과연 정상인가? 많은 평범한 이들도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진보건 보수건 엘리트 의식이 강하지 않습니까?” - 원주의료생활협동조합 최혁진 전무이사, 107쪽

인생은 불공평하고 세상은 냉정하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본 사람들이 쉽게 내리는 평가이다. 하지만 이기적인 세상이 살만한 이유는 모두 자신의 잇속만을 차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더 많은 이익과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과 더 높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진정 행복할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라고 해서 욕망의 크기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작은 이해와 배려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는 일이 누구에나 중요하다.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이타심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책과 실천으로 극복해야 하는 우리들의 의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게으름, 무능력의 차별적 시선으로 그들을 평가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는 계층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일할 의지가 있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기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활기회의 확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기업과 달리 삶의 공간으로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은 불가능할까?

사회적 기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주주의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나눔과 배려를 선택하고 고객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아름답고 착한 기업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성공회대학교의 사회적기업 연구센터와 함께 사회적 기업가들을 만나고 인터뷰한 『착한 기업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과 희망을 제시한다. 아무리 승자독식시대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신자유주의가 최종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일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할 때 우리의 삶은 불행해지고 방향과 목적을 상실한 채 경쟁과 불안,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로울 뿐이다. 사회적 기업은 몇몇 사람들의 노력과 실천으로 이제 작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정책적 지원이 이루어지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간다면 우리 사회의 대안적 기업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시작 단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싹을 틔우고 민들레 홀씨처럼 점점 확산되어 가는 사회적 기업의 과거와 현재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뷰 형식으로 사회적 기업가들을 찾아 나선다. 자치 은행, 생활협동 조합, 생활병원, 장애인 오케스트라에서 건설회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놀라운 실천과 변화를 소개한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사라진 공동체를 되살리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노력과 실천이 부족할 뿐이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 ‘참 신나는 옷’의 전순옥 대표로 시작된 이야기는 ‘사랑의 손맛’ 백미선 대표의 이야기로 끝난다. 틈새 시장에서 사회적 기업의 아이디어를 얻은 사람들,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사회적 기업가들, 대안적 세계관을 현실로 옮긴 사회적 기업가들은 특별히 이타적 유전자가 발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우리들의 이웃이며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일 뿐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행복해야 진짜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이 책은 자본주의의 우월성과 경제 논리를 가르치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 대한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부자와 빈자의 이분법적 사고 방식으로 사람을 구별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살맛 나는 세상,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믿음을 버리지 말자. 이 책에 소개된 사회적 기업가들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배려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소수인 사회가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떤가.

경영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많은 청소년들이 바로 이런 기업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을 꿈꿔본다.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 가르치지 않는 것일까? 암기용 지식은 아주 작고 사소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얻는 데 우리는 얼마나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실수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경제 교과서 대신 이 책을 한 번씩 읽게 하는 것은 어떨지 선생님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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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한 세상 - 위기의 시대를 좌우할 열쇳말
박성민 외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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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확실성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이것을 인간의 패배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반대라고 믿는다. - 일리야 프리고진, <확실성의 종말>

 ‘삶을 지배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행운Vitam regit fortuna, non sapientia’이라는 키케로의 말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행운은 우연의 다른 말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모두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면 삶은 정교한 퍼즐과 같아서 수학적 연산과 논리적 예측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삶은 불안하다. 우연과 행운에 기대어 사는 것이 인간이 숙명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끊임없이 예측 가능한, 안전한, 확실한 삶을 꿈꾼다. 불가능한 꿈에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점점 더 불안하고 피곤하다.

  인간의 역사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리야 프리고진의 말대로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성’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지 모른다. 알 수 없는 미래, 불안한 확증은 어차피 모든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말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배원리가 모든 불확실성을 담고 있다. 인간은 그 불확실성에 끝없이 도전해 왔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문명은 발달해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삶이 예측 가능해진 것도 아니고 평화롭고 안정된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도 아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불안하며 예측할 수 없다.

  『불확실한 세상』은 현대 사회에 대한 진단이면서 과거와 미래 사회에 대한 해석이다. 열 명의 각 분야 전문가가 보여주는 ‘불확실성’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떤 원인과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독자들에게 되묻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반성이며 모르고 있는 분야에 대한 성찰이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들에 대한 지적 통찰을 위해 준비된 책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정치, 경제, 문화, 지구, 과학과 기술 분야 등 5개 분야에 각각 2명의 전문가가 ‘불확실성’을 주제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서문에 밝히고 있듯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소개한 내용을 조금 더 확대 발전시키면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이 없는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각론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이 하나의 주제로 모여 흐르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읽기 좋은 책이다. 순서나 계통이 필요한 읽기가 아니라 입체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하며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면서 읽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 관련 분야에 대한 충실하고 깊이 있는 관심과 공부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다. 어찌 보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해당 분야에 대해 제반 소개로 그칠 수 있는 단점도 안고 있다. 이런 종류의 책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이다. 하지만 이 책은 제한된 분량 안에서 충분한 고민과 정밀한 글쓰기를 통해 이러한 단점을 극복해 내고 있다.

정치란 '불확실'을 '확실'로 바꿔 대중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가시거리'를 확보해 주는 기술인 것이다. 좋은 정치란 대중이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도록 새벽에 쓰레기를 몰래 치우는 청소차와 같은 것이다. - P. 29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국민위에 군림하고 권력집단이 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협잡꾼에 불과한 정치인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정책 방향과 정권이 바뀌고 나면 또 다시 뒤집어지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시궁창의 쥐새끼만도 못한 이념 논쟁과 지역감정 부추기기로 일관하며 정책은 없고 선거의 몰이배만 있는 정치판을 보며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세상을 예상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아마도 가장 불안한 분야가 정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 책은 정치에서 출발한다. 박성민은 “사회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 혹은 도덕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야 미래를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양지로 나온 조폭과 유사하다.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공천 여부가 결정되고 지역색이 뚜렷하며 소신도 정책도 없이 오로지 당선가능성만을 점친다. 선출직 정치인의 경우 당연한 현실이겠지만 상식도 없고 자신의 말고 행동이 끊임없이 모순되는 정치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정치를 외면하고 현실을 부정한다.

  『야성적 충동』, 『블랙스완』, 『넛지』 등 최근 경제학의 ‘불확실성’에 주목한 많은 책들을 토대로 한 박종현과 최정규의 글은 정확하고 날카롭다. 우리에게 정치보다 훨씬 피부에 와 닿는 경제현실은 ‘불확실성’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실감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야이다. 리스크와 불확실성에 대한 저자의 용어정리를 살펴보면 왜 사람들의 경제행위가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에 의해 결정되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의외로 구멍이 많은 존재이다. 수많은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여전히 감정과 직관에 의한 판단일지도 모른다.

리스크(주사위 도박)란 무엇이 일어날지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고 있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임에 반해, 불확실성(주식 투자)이란 일어날 개연성은 있으나, 그 확률 분포를 알지 못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 P 92

실물 자산이나 금융 자산에 투자를 하거나 직장을 바꾸거나 결혼을 고려하는 등의 불확실한 상황에서 논리가 아닌 '감정'과 '직감이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 P 93


  문화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인 불확실성은 환경, 과학, 기술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래서 광우병, 유전자 조작 식품(GMO) 등 예측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지만 우리의 불안은 오히려 증폭될 뿐이다. 석유의 고갈, 지구 온난화 등 과학과 환경 분야의 불확실성은 오히려 고조하고 있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지속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손 놓고 앉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강양구의 말대로 사랑과 우애 그리고 연대를 직접 실천하는 길만이 인간의 길이다.

  세상은 불안하고 불확실한 곳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그 불확실성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는 일은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불확실한 세상을 확실한 세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덜어주고 함께 손잡고 걸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조금 더 가까이, 그리고 냉정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삼과 세상을 바라보자. 함께 걷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고 덜 불안할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선물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랑, 우애, 연대 등의 가치를 떠올리고 직접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다 - 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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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B급 좌파 김규항이 말하는 진보와 영성
김규항.지승호 지음 / 알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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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이념의 좌표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 없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람답게 살자는데, 모두 함께 행복하자는 데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그러나 우리들의 상식은 서로 조금씩 다르고 행복의 기준도 다르다. 그래서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나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남기 위한 경쟁에 목숨을 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삶의 기준과 목표에 따라 우리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사람들은 들을 이야기가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는다. 김규항의 글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꿈같은 이야기에 위안을 얻을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이야기로 들을까. 내가 김규항의 글을 읽는 것은 운동화 끈을 다시 묶듯 풀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이다. 혼자 걷다 보면 때로는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더불어함께 걷는 것 같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홀로 사막을 걷는 느낌일 때가 있다. 일면식도 없는 김규항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새 위안을 받게 된다. 정색을 하고 자신의 길을 힘차게 걷고 있는 것 같은 그의 신념이 때때로 부럽고 변함없는 그의 목소리가 가끔 그립다. 그래서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를 읽는다.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와 인터뷰이 김규항을 보고 자연스럽게 읽게 된 책이다. 스스로 B급 좌파로 칭하는 김규항이 말하는 이 시대의 진보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우리들의 현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된다. 말하자면 나는 김규항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에 과정도 다르고 결과에 대한 평가와 만족도 다르다. 부끄러움의 기준도 다르고 욕망하는 것도 다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삶을 함께 생각하는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 타인과의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견고한 질서에도 균열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대로 얼마나 우리가 더 버틸 수 있을까.

  인간의 소유욕에 대해 김규항은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을 비려와 “권선생께서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는 숙제 때문에 사람들이 바보가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그분은 어떤 사상이나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금욕 생활을 한 게 아닙니다. 욕망이 달랐던 거죠. 다른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평범한 사람들 안에도 그런 편린들이 있어요. 세상이 강요하는 욕망을 열심히 좇다가도 순간순간 허무감에 빠지는 건 실은 그런 편린들 때문입니다. 물론 대개는 더욱 욕망을 좇아서 허무를 극복하려 들지만요.”라고 말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 원하는 삶은 네모난 틀에 담기듯 비슷하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열여덟 살 아이들의 꿈이 공무원이라니! 날마다 두근거리고 재미있는 일을 꿈꾸며 내일을 향해 달려야 할 아이들의 꿈은 어른들의 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길들여진 아이들과 길들이고 있는 어른들에게 삶은 치열한 경쟁이며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고 소박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멈춰버리는 난쟁이의 꿈이다.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페미니즘, 2008년의 ‘촛불’과 2009년의 ‘추모’ 등 김규항은 우리들 삶의 갈피들을 읽어내며 구체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담론까지 종횡무진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인터뷰어 지승호의 인터뷰이에 대한 꼼꼼하고 성실한 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인터뷰이의 글을 통해 작은 생각 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 놓치지 않고 깊고 넓게 들여다본다. 지승호의 질문을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김규항의 시작과 현재를 알게 되고 생각의 흐름을 들여다보게 된다.

  예민한 문제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예수전』을 통해 이미 기독교와 예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던 김규항의 영성은 미국까지 날아가 헌금을 강요하고 전직 두 대통령이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김홍도 목사의 믿음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예수의 말을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니 당연히 믿음도 다르다.

지승호 : 백만장자들한테 ‘만족하느냐?’라고 묻자 가장 많이 나온 대답이 ‘딱 두배만 더 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대요.
김규항 : 그들은 영원히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부자와 낙타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아니 그런 이야기에 신경 쓰거나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부자가 나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욕망, 부자가 되는 방법과 그 출발선, 부자의 기준과 부자가 되려는 목적 따위에 대한 성찰이 없다는 게 문제가 아닐까.

  과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불피요한 것일까. 김규항은 내일을 위한 진보와 미래세대의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 『고래가 그랬어』를 발행한 이유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는 말에 공감한다. 키워지는 대로 길러지고 말하는 대로 믿고 시키는 대로 공부하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다만 어른들의 잘못된 생각이 심어지고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채워지지만 않는다면.

어떤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가격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가가 교육의 목표가 되었어요. 실은 교육이라는 게 사라진 거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게 아니라 상품으로 키우는 거죠. 그걸 교육이라고 부르면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올인합니다. - P. 292

  이 말에 나는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아이들에게 제시하는 직업, 미래, 꿈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지 함께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사람은 못 되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닐까. 김규항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동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오십보 백보의 싸움은 되지 않도록 나 스스로부터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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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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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한 때, 사랑이 생의 전부이던 시절 - 그 미망에 사로잡혀 온통 전 존재를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아내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남겼다. 이 책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사랑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조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물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사랑’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에 따르지만 이것 또한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남녀 간의 차이와 전통적 가족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열매 맺는다는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을 불행에 이르게 한다. 가족과 아이들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있는가.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본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아니, 결혼에 대해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자.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을 통해 이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를 날린 바 있다. 어느 사회든 경제적 기반과 결혼의 상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 낯선 열정과 들림[憑]의 상태는 정상에서 벗어난 열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갈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 P. 23

딜레마의 양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 P. 135


  저자들은 이 책에서 개인화가 초래한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속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던 결혼제도가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진화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근대화는 자아의 발견과 결혼제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과 다름없다. 사랑이냐 자유나 그것이 문제로다. 함께 사는 과정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고스란히 사회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 취업, 가사노동이 산업혁명과 맞물려 남녀의 성별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화, 파편화 된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 중요해진다. 끈끈하고 1차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바탕이었던 전근대 사회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전통적 결속보다 개인적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사랑과 이혼 과정에서 자유는 증대됐지만 안전은 감소했다.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은 자식 사랑이다.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아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타자로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신흥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세속적 종교인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역설을 내포한 감정의 물결이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사랑은 아닐까?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 P. 296

  2010년의 사랑이 산업혁명의 발명품이든 신자유주의의 고통이든 사회 현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의미를 찾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박한 생각들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사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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