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 살림지식총서 344
김용신 지음 / 살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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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래디컬radical이라는 말을 좋아하다는 강유원의 말을 좋아한다.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과감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을 용기라고 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고 사람과 시대를 구분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래디컬과 거리가 멀다. 신념이나 가치관도 한 사회의 결과물이고 보면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올곧은 정신은 높고 푸르다.

  우리 사회는 참혹한 근대사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여전히 유효하며 정치는 여전히 민감한 주제다. 일상생활에서 친구나 동료지간에도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고 선호하는 정당과 정치인이 제각각이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정당의 정강이나 정책, 정치인의 품성과 정치적 성과보다 감정에 우선하고 보수와 진보라는 자신의 성향과 일치한다.

  당연하게도 보수적 정당이나 진보적 정당이나 선명한 색깔을 드러내지 못하고 유권자의 눈치만 보거나 유권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나라당이라는 수구보수 정당과 그보다는 조금 더 개혁적이라고 스스로 외치는 민주당과 현실의 적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진보적인 민노당과 진보신당이 있다.

  최근에 들어 보수와 진보의 개념이 중요해진 것은 아니다. 오래된 이념 논쟁이지만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정권 교체 이후 현실 정치와 사회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권력과 정권 유지 수단으로 내세운 경제는 파탄 지경이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서민들은 더욱 힘겨운 생활이 보장되었다. 앞날은 보이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는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정신분석>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과 사람들의 이념에 대해 점검을 시도하는 책이다.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극도로 언급을 회피하고 있으며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 사회 구성원 개개인들이 한번쯤은 반드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 꼼꼼히 짚어나가고 있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은 흥미롭다. 사람들의 의식에 내재한 정치적 성향들은 나이와 계층과 성별과 학력과 지역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교육에 의한 것이거나 주변의 상황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주어진 환경과 인식의 전환점에 따라 보수와 진보는 결정되기도 한다. 모든 외적 조건이 진보적일 것 같은 사람도 보수적인 부분이 있고 대단히 보수적인 사람도 진보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지니는 이념적 성향은 개인의 이익과 결부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사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리사욕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은 보수와 진보의 의미와 정신분석적 의미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의 특성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퇴행적 정치 행태를 보이며 단 한 번도 국민들에게 감동을 준 적이 없는 정치인들 보며 정치에 대한 철저한 냉소와 혐오감만 늘어가는 일은 슬픈 일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살펴 보수와 진보의 병리 현상의 원인을 파헤치고 있다. 이념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는 건전한 갈등과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목숨을 걸고 죽거나 죽이거나! 최소한의 신의나 배려가 없는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바로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그 원인을 아는 것도 한국인으로 태어난 우리의 숙명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이 책의 의미도 결국에는 보수와 진보 너머의 길을 찾아보자는 것을 게다.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화합과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마나 한 소리를 해가며 이 책을 끝내는 저자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당분간 어떤 대안도 한국의 정치 현실을 의회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무의식에 내재한 한국인의 특성을 이해하고 진보와 보수의 원인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고민해 보는 것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퇴행적 민주주의가 판을 치는 현실을 바라보면 한숨만 절로 나온다. 법무부 장관이 국회의원을 조폭 다루듯이 하겠다고 공언하고 공권력은 서민들을 태워죽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보수 신문재벌에게 방송을 내주고 국민들을 길들이기 위한 작업은 강도높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적 통합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념을 떠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토론의 장을 마련하다 보면 우리에게도 ‘똘레랑스’가 생길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대상으로 보지 말고 서로의 주장을 단 한 번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줄 준비만 되어 있다고 하면 겁 없이 날뛰는 정부도 없었을 것이고 국민을 볼모로 내세우는 정당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래디컬하지만 표현 양상이나 현실에 대한 대응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낯선 시간과 생경한 사람들 때문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현실 속의 유리벽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혁명이든 개혁이든 어떤 이념과 규정으로도 견고한 현실의 벽을 허물기가 너무 벅찰 때가 있다. 힘겨운 싸움이지만 평생 지속되어야 할 것 같다. 어차피 그러하겠지만 모든 보수여, 이대로! 모든 진보여, 혁명의 그날까지!


090304-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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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터넷을 논하다 - 포털.이용환경 그리고 규제
권헌영 외 지음 / 서울경제경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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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10여 년 동안 가장 급격한 변화를 꼽으라면 단연 인터넷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제 인터넷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가 되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IT 강국을 표방하며 정보화 산업을 육성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부 주도하에 발전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선 것이 우리나라의 인터넷 환경이다. 모뎀을 이용해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을 사용하던 통신족들이 네티즌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했고 90년대 중반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한 사용자들은 미래를 가늠할 수 없었다. 자본이 결합되면서 벤처산업이라는 이름으로 희망의 배를 띄웠다.

  200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 상태로 접어든 듯하다. 포털로 대표되는 우리의 인터넷 사용 환경은 검색, 뉴스, 쇼핑이 한 번에 해결되는 구조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서비스가 한 곳에 모여 다양한 서비스로 확산되는 구조다. 원스톱 사용 환경을 표방하는 포털의 영향력은 점차 강력해지고 있다. 포털에서는 그 외에도 커뮤니티나 블로그, 미니홈피 등 다양한 서비스가 이루어지고 이용자들은 다양한 컨텐츠를 생산해 내고 있다.

  탄생에서 성장, 정착 과정이 워낙 다이나믹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변화 속도와 흐름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실 내일의 인터넷을 예측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인터넷에 관한 수많은 논의들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고 어렵다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그 변화 가능성을 내다보거나 중요한 흐름을 짚고 싶을 때 쉬운 방법이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다. 지금까지 인터넷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조금은 예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터넷을 論하다>는 ‘인터넷 정책 연구그룹(인정연)’에서 펴낸 책이다. 법학을 전공한 권헌영, 홍승희, 황성기 교수와 사회학을 전공한 배영 교수가 공동 집필한 책이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하나의 주제로 쓴 책이 아니라 연구 그룹의 결과물을 묶어냈다. ‘포털, 이용환경 그리고 규제’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인터넷 실명제 문제 등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법적, 제도적 측면과 사회적 현상들을 두루 살펴보고 있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에 대한 궁금증과 원인과 대책들에 대해서도 고민거리를 제공한다.

  먼저 배영은 ‘인터넷과 한국사회’를 인터넷 포털서비스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다. 인터넷 서비스의 진화와 포털의 진화는 그 맥을 함께 했다. 이제 문제는 콘텐츠다. 상생의 공간이 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고 있으며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볼 부분이다. 권헌영은 ‘한국의 인터넷 규제 어떻게 전개되어 왔나?’라는 주제로 법률적 측면에서 인터넷 규제가 어떤 흐름과 전개 과정을 거쳐 왔는지 살펴보고 있다. 황성기는 ‘한국에서의 인터넷 규제’라는 주제로 포털 규제를 통해서 본 한국 인터넷 규제의 현재를 조망한다. 봉건제형 인터넷 규제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묻고 있지만 답은 우회적으로 나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인터넷은 어디로 갈 것인가? 홍승희는 ‘인터넷, 그 새로운 환경과 범죄의 온상?’이라는 주제로 클린 환경을 위한 처벌주의를 다시 고찰하고 있다. 에필로그에서는 네 명의 지상 토론을 정리하고 있다.

  보다 다양한 관점과 주제로 논의가 풍부하게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많은 사람들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포퓰리즘에 휘말릴 수는 없다. 소위 ‘최진실 법’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살펴보았는지 그 부작용과 감정적 여론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독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규제할 수 없고 규제해서는 안 되는 공간과 매체의 특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스스로 고민해 보아야 한다. 정책 입안자들은 물론 포털 사업자나 일반 이용자들까지도 관점이 다르다. 이용목적이 다르고 각자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일어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인터넷이 어떤 공간이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래야 발전적 전망과 규제의 범위와 대상 혹은 규제 자체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인터넷 이용자는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이 또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인터넷은 산업적 측면이나 사회 공론장으로서의 역할에 이어 정치 공간으로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2002년을 기점으로 현실로 드러난 웹 2.0 시대의 한국 정치는 규제의 대상으로 전락할 것인가 자유롭고 민주적인 새로운 공동체의 도구가 될 것인가. 자율적인 규제와 자정작용만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법과 제도적 장치를 이용해서 규제 장치들을 늘려가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모두 동의할 수 있을까?

  한국의 인터넷은 특수성과 다른 나라와 다른 맥락 속에서 발전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대안들도 제시될 수 있다. 모두 함께 꿈꿀 수 있는 재밌는 놀이터에 울타리를 칠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함께 소통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특히 정보제공자와 매개자의 애매한 갈림길에 서 있는 포털들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도 다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다음과 네이버로 대표되는 두 포털의 변신과 새로운 시도들이 절실하다. 정책이나 규제보다 한 발 앞선 변화는 오히려 그것들을 무력하게 할 수도 있다. 포털과 이용자는 그렇게 더 즐겁게 놀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처음 인터넷에 접속했던 넷스케이프 2.0의 아이콘은 등대였다. 검은 밤하늘을 비춰주던 희망의 불빛처럼 인터넷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환한 희망과 꿈을 현실 속에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꿈이 현실이 되고 다시 현실을 통해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090216-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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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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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득적 권리를 우리는 인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실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나 권력에 의해 이 권리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그러한 권리가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억압과 순종을 내면화한다. 근대 이후 국가나 사회 차원이 아니라 개인 중심적인 가치관이나 철학이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여전히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와 먼 추상적 가치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학교에서는 여전히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는다. 자신의 머리카락 길이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으며 체벌과 폭력이 질서와 규정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국가차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인권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는 일은 특정 단체의 몫으로 돌릴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단일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종이나 민족 문제로 확산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가 절차적으로 발전해 오지 않은 까닭으로 여전히 진보적 가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나의 권리만큼 타인의 권리도 소중하고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리 보편적인 것 같지 않다.

  앞서 말한 대로 나이, 소속, 상황에 따라 고유하고 기본적인 권리가 얼마든지 제한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단순히 고유한 문화적 차원이 아니라 인권에 대한 생각과 고민 자체가 일천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개인주의보다 충과 효를 앞세운 공동체나 국가주의가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에 대해 누구든지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당위적 가치라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시민권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노력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모두가 인정하는 천부적 권리라도 현실에서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의한 것이다. 인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 생활의 방법론으로 자리잡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책세상’에서 Viva Activa(‘실천하는 삶’이라는 뜻의 라틴어) 시리즈 개념사 1권으로 최현의 <인권>을 펴냈다. 기존의 책세상 문고의 분량이지만 판형을 바꾸고 사진을 삽입해서 편집을 새롭게 한 정도의 책이다. 주요 개념이나 사건들에 대한 주석을 달고 분량에 대한 부담을 덜어 쉽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 책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

  이 책의 초점은 인권과 시민권의 상관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주창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출발한 시민권은 근대적 의미의 인권을 확립했다. 자연법에서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이다. 사회적 상황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편적 개념으로 확립될 만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고대의 시민권은 노예와 여성을 배제한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것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바로 근대 인권 사상의 역사이다. 시민권 제도의 발전은 근대 국민 국가와 민족주의가 등장하면서 또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이 책에서는 홉스와 로크, 루소를 중심으로 근대적 의미의 인간관에 대해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작은 차이와 주장들이 결국 근대 시민권 제도를 발전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논의조차 없었다는 사실이 아쉽기만 하다.

  인내천 사상 등 자생적인 개념들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충분히 논의되고 발전되지 못해 결국 유럽 중심의 사상사를 훑어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현대 인권은 시민권 이론의 발전과 그 궤를 함께 한다. 영국의 시민권을 중심으로 그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여성의 인권과 시민권에 대해 살펴본다.

  특히 소수자의 인권이나 장애인의 인권, 다문화 시민권 등에 대한 최근의 관심은 현실에서도 중요하게 고민해 볼 부분이다. 외국인과의 결혼, 다문화 가정의 사회적 문제, 장애인과 성적 소수자, 신념에 의한 병역 거부 등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다.

  저자가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지구 공동체의 지구 시민권은 ‘꿈’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세계화는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인권’ 측면에서 확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의미의 시민권이 확산되고 지구 공동체 차원에서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지켜질 수 있는 개념들이 확산되는 것은 우리가 함께 꾸어야 할 꿈이 아닐까 싶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 살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권의 기준과 대상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더 중요하다. 제도와 질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교묘하게 숨겨진 ‘인권’을 찾아보는 일이 우선이다. 나는 인간이며 내가 가진 최소한의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우리는 흔히 개념 없다는 말을 사용한다. 책 한 권으로 개념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 책은 사유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 개념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다. 나만큼 소중한 타인을 위해서도, 타인만큼 소중한 나를 위해서도.


0901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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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장 지글러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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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북부 판자촌에 사는 주부들은 저녁이면 냄비에 돌을 넣고 물을 끓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다. 어머니들은 배가 고파서 보채는 아이들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밥이 될 거다”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이 기다리다가 그냥 잠이 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배고픔에 시달리는 자식들을 보면서도 그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어미가 느끼는 수치심을 감히 무엇으로 가늠할 수 있겠는가? - P. 10

  어쩌자고 장 지글러는 이런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는가. 마음이 울컥하여 한동안 눈이 매웠다. <탐욕의 시대>는 이렇게 시작한다.

투쟁은 아는 것에서 출발하며, 투쟁을 통해서만이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획득할 수 있다. 약육강식 체제를 파괴시키는 일이 세계 시민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레지 드브레(1940~. 프랑스 출신 철학자, 교수, 기자.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의 혁명 동지로 지낸 일화로 유명하다 - 옮긴이)는 “지식인의 의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이다. 지식인의 의무는 민중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무장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 P. 17

  폐타이어나 고무로 하반신을 감싼 채 바닥을 기는 걸인을 가끔 외면한 적이 있다. 손에 집히는 동전이라도 넣어 주지 못하고 지나칠 때면 마음이 불편하고 무겁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마음은 표현하기 힘들만큼 괴로운 법이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있겠으나 우리가 알아야 할 세상의 진실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지식인의 책무에 대해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로 보이는 장 지글러를 사르트르가 보았다면 매우 반가워했을 것이다. 이 책은 연초에 읽기에는 상당히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대한민국이 전부가 아니다.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고 기아와 전쟁으로부터 우리는 자유로운가. 그 가공할 만한 위협들 앞에서 우리의 삶은 안온하기만 한 것일까. 이 책은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이유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로 잘 알려진 장 지글러는 2008년 4월까지 유엔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일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담한 현실들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던 책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독자들과 만났다. <탐욕의 시대>는 또 다른 진실에 대해 우리에게 짙은 감동과 아픔을 전해준다. 전자가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는 세상의 또 다른 진실을 알게 해 주었다면 후자는 그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보다 깊은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존재한다. 알지 못하는 사실들도 많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와 수치가 전하는 의미가 이토록 사무치게 전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에 대한 깊은 한숨과 회의를 갖게 한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지식들은 오히려 위험하다. 객관적일 수 없는 해석과 지나친 분석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통계와 수치를 제공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통계치를 통해 기아의 문제와 해결책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보고 있다. 남반구 대부분의 나라들 즉,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서남아시아 일부 국가들을 직접 방문해서 경험한 이야기들은 생생한 지구촌에 관한 21세기의 보고서이며 기아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집이다. 저자는 단순한 보여주기에 그치지 않는다. 기아의 원인으로 신흥 봉건제후로 명명된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보다 앞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물론 제국주의의 폭력이다. 부채와 기아의 관계를 파헤친 1장과 2장은 이면에 감추어진 국가적 이기주의와 제국주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에티오피아와 브라질의 사례를 통해 희망을 노래하고 혁명을 이야기한다. 프랑스 혁명 당시 상황의 봉건적 질서를 떠올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가. 단두대에서 사라진 혁명가들의 외침을 다시 살펴보고 시민혁명의 정신을 되새김질하는 저자의 의도는 세계의 현실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다. 부정적 시각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다른 인간들의 도움을 얻어야 존재할 수 있고, 스스로를 이루어나갈 수 있으며,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다. 사회를 이루지 않고 사는 인간, 역사가 없는 인간, 연민의 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가역성(可逆性), 상호 보완성, 연대감 등의 관계야말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 P. 329

  이 책에 인용된 끔찍한 숫자와 현실들을 다시 인용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자가 이 책을 쓴 진정성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은 문학작품만이 아니다.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도 많은 눈물을 자극했고 한숨 쉬게 했으며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오만한 물결 앞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피폐해지고 있는지 우리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과 승자 독식의 자본주의가 보여주는 건설 지상주의 대한민국의 현실도 결코 만만치 않다. 저자의 말대로 다시 시작하자. 무엇을?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이들 우연의 희생자 한 명 한 명은 나의 아내,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 나의 친구 혹은 나의 삶을 구성하며 내가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될 수도 있었을 사람들이다. - P. 330

  나는 노동조합 지도자가 아니며, 인민해방전선을 이끄는 리더도 아니다. 그저 제한적인 영향력을 가진 한 명의 지식인일 뿐이다. 나의 책은 내가 돌아다니며 목격한 세계에 대한 나의 진단을 제시한다.
  현재 이 세계를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다. 전 지구적인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 P. 332


  나는 저자의 끝맺는 말을 읽다가 한 없이 부끄러워졌다. 내 삶의 ‘우연성’에 대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한 것 같은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노동조합 지도자도 인민해방전선의 리더도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모두 우리들의 몫에 대해 보다 깊이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작은 지식과 인식조차도 무의하다. 생활 속에서, 작은 실천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뜻과 행동이 모여 다시 혁명을 시작해야 한다. 거꾸로 가는 시계를 돌려놓고 길찾기를 시작해야 한다. 다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꺾어버린 꽃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봄의 주인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꽃이란 꽃은 모조리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결코 봄의 주인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파블로 네루다) - P. 344 

 090105-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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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탐욕의시대] 우리에게는 수치심의 권력이 있다!!
    from Green Monkey Blog** 2009-02-06 14:12 
    [탐욕의시대] 우리에게는 수치심의 권력이 있다!! '수치심의 권력'에 조롱당할 수 밖에 없는 명텐도MB정권 탐욕의 시대 - 누가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드는가? | 원제 L’empire de la honte 장 지글러 (지은이), 양영란 (옮긴이) | 갈라파고스 게을러서 뒤늦게 읽기 시작한 책 . '다시 연대만이 희망이다'란 제목의 말머리부터 심상찮은 포스가 느껴진다. 저자인 장지글러는 1776년 신생 미합중국 최초의 주 프랑스대사로 임..
 
 
반딧불이 2009-01-1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올 한해도 님의 성실한 책읽기의 덕을 톡톡히 볼 것 같아요. 늘 고맙습니다.

sceptic 2009-01-17 16:50   좋아요 0 | URL
부끄럽습니다. 반딧불이님도 즐거운 책읽기 이어지시기 바랍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은 어쩌면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저장 장치일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 것인 경우는 없다. 편집되고 채색되며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혹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사실, 객관적 기억이란 건 없다. 심리적인 기재가 작동하기도 하고 왜곡된 감정이 개입되기도 해서 비틀어지고 희미하며 모호하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삶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에 앞서 공적인 기록이며 기억할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지른 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녀의 구술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다가 여러 번 목이 메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이 시대 어른의 기억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간직한 기록이고 역사이다. 신산스런 시대의 아픔이고, 피눈물로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살다 가버린 아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살아도 한 세상이었겠지만 그녀가 감당했던 모진 시간들 앞에서 저절로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엄마, 배가 고프다…….”는 전태일의 마지막 말에 엄마 이소선은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 이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져야했던 당연한 권리와 당연한 임금을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말과 맞바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팠고 고통스러웠으며 말하지 못했고 잠들지 못했던 시간들을 견뎌왔다. 그 중심에서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은 묵묵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혹독한 시간들을 살아냈으며 이제는 여든의 노인이 되어 지나간 시간들을 말하고 있다.

  구술한 내용을 정리해서 이 책을 쓴 오도엽은 ‘인간의 역사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갈음한다. 우리들의 기억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언젠가 망각의 강을 건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이 책은 이소선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이 시대를 살아 낸 노동자들의 기억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찾아갔다가 이소선의 마지막이 아니겠냐는 인사가 인연이 되어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소선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그대로 구술되어 있다. 너무나 정감있고 친근한 그 목소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말투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간이나 지나온 흔적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남자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고통과 시련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가난한 날의 질긴 인연으로 결혼하고 전태일을 낳고 쌍문동에서 살다가 아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배우고 그 아들을 먼저 보낸다. 그 이후 이소선의 삶은 많이 달라진다. 생활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태일이 대신 아들들이 더 많아졌다.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이 땅의 노동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다.

  2008년에 이소선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급이 생긴 것이다. 국민 총생산은 늘었고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부의 분배 문제와 노동 문제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이소선의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하종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하다가 울컥했다. 몸이 약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멀리서만 바라보던, 일당백의 역할을 해 오신 그분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시대가 기록해야 한다. 그분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또 다시 이 땅의 후배들이 채워나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자리를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와야한다.

  그러나 이 시대를 돌아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는 양극화만 심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발 빠른 종부세 환급 등의 정책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누가 뽑은 대통령이며 누가 만들어준 정부인지 국민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영화 <월․E>에서 이브가 고장난 월․E의 부품을 갈아 끼우자 잠시 기억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살아온 삶의 무늬가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의 흔적이다. 그 딱딱하고 거친 숨결이 우리들의 기억이며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꿈이었고 미래의 흔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시대의 삶은 수많은 이소선에게 빚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소선의 여든이 기억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였다고 믿고 싶은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현실은 혹독하다. 다만 ‘희망’이라는 환각제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기억을 통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꿈 꾸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언제가 떠나게 될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개인의 미시적인 관점이 모여 역사가 된다. 대통령의 행적과 외교 문서가 아니라 바로 이소선의 삶의 흔적,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역사와 기록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많은 이소선들을 읽으며 현재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작은 진보의 발자국일 뿐이다. 그 흔적들을 돌아보고 발자국의 방향을 따라 걷는 것조차도 힘든 시대가 슬픔으로 다가온다.


08120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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