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작은책 스타가 바라본 세상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1
하종강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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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하루 일과가 유럽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일이> 종류의 프로그램이었단다. 아침 8시에 등교해서 밤 10시가 넘어 하교하는 한국의 고등학생을 신기한 동물처럼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 목적과 과정에 대해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1% 대통령에 이어 0.1% 교육감이 당선되어 교육은 경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초등학생까지 지옥에 몰아 넣고 있다. 이제 곧 그 부작용과 휴유증이 나타날 것이다. 대한민국은 왜 기나긴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가.

  <작은책> 12주년 기념 노동자 7, 8, 9월 대투쟁 2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여섯 개의 강좌를 책으로 묶어냈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는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었기 때문에 가독성이 뛰어나고 이해가 쉽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발 꼭 한 번만 읽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한겨레신문사가 매년 봄 특강을 마련했다가 가을에 책으로 엮어내는 책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 전에도 비슷한 종류의 책이 있었겠지만 대중강연의 힘과 강사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활자로 전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색다른 의미와 재미가 있다. 프레시안에서 <여럿이 함께>를 묶어냈고 이번에는 작은책에서 이 책을 엮었다.

  박준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되둘이되는 역사에 대해, 안건모는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에 대해, 이임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정탱니은 한미 FTA 10년, 건강보험이 없어진다는 내용으로, 홍세화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저당잡힌 오늘에 대해, 하종강은 불평등에 저항은 본능이라는 내용으로 강연했다.

  여섯 명의 강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그들의 말과 생각은 고스란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채찍과 부채감으로 다가온다. 정태인이나 홍세화, 하종강이 강연한 내용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읽고 고민하고 생각한 내용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강좌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먼저 현실이 어떠한지,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내 삶과 생각과 행동은 왜 스스로를 배신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거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침묵하거나 20에 편입하기 위해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분류하면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로 먼저 양분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실천과 행동의 문제인데 현실적으로 그것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홍세화의 말대로 노조 집회가 끝나고 꺼리낌없이 무노조 경영 삼성의 핸드폰을 구입하는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동과 의식이 일치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이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하고 노조가 빨갱이 단체라고 생각하며 내 자식들은 노동자로 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거나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 비행기 조종사, 대학교수, 의사까지 노조를 결정하고 세상에 노동자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책의 3분이 1일 노동문제, 노사관계를 다루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빨갱이의 나라인가?

  대학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도대체 마음 놓고 대학에 보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중산층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의 수천만 원 병원비 때문에 퇴원시켜 3일만에 죽어버린 아이의 부모는 누구인가? 심심찮게 뉴스에 등장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무상교육, 무료진료가 불가능한 꿈이며 빨갱이들이 외치는 구호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은 누가 만들어 주었을까? 대학을 공짜로 다니는 프랑스, 병원비가 무료인 스페인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다면 이책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모두 의식화될 필요가 있으며 탈의식화할 의무가 있다. 2008년의 대한민국은 정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노력하는 사회가 아니다. 누가 죽든, 나와 내 가족만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내겠다. 내 자식만이 아니라 남의 집 자식과 다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는 학부모가 있다면 고개 숙여 절하고 싶다. 엄친아의 망령은 아이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미래는 암울하고 현실은 우울하다. 부정적 세계인식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

  수없이 읽었고 거의가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정태인의 글을 넘어 홍세화와 하종강의 강연을 읽다가 토요일 밤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슬픈 소설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 살 남동생과 다섯 살 누가를 반지하방에 열쇠로 잠가놓고 밥상을 차려 놓고 일을 나간 엄마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불이나 동생은 이불에 코를 박고 누나는 바닥에 누워 질실해 죽었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교육은 사회적 계층 구조를 강화한다. 세습되는 계급사회 이것은 전근대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전근대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말이다.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침침한 눈으로 TV를 켜니 마침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국제중 거쳐 특목고로 - 엄마들의 전쟁’. 방금 읽은 홍세화의 강연 내용을 영상물로 제작한 것 같다. 교육당국의 대책을 요구하는 마지막 멘트가 허탈하다. 도대체 교육당국이 누구인가? 국제정과 특목고가 늘어나면 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해지고 실력이 향상되는가? 누가 행복해지고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가는가? 누가 절망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비 가계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그들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 대한민국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을까? 누가 그 일을 할 것이며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 나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08083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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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잡힌 오늘
    from 마인드맵 활용 가이드- 만득이 블로그 2008-09-03 13:33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잡힌 오늘 이미지 출처: http://www.mediamob.co.kr/FDS/newBlogContent/2007/0829/apulsa/tunnelvision.JPG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한겨레 기획위원 프랑스 망명 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http://www.hongsehwa.pe.kr/zbxe/ 교육은 계층 상승의 기회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교육을 통한 신분의 수직 상승을 통해 누구나 귀족이나 관료가 될..
 
 
에링 2008-09-01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막하네요.

sceptic 2008-09-11 23:01   좋아요 0 | URL
막막하지만 길은 있겠죠...죽을 순 없으니까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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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느냐’가 ‘어떤 세상인가’를 결정한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명한 파란 색지에 검은 글씨로 한 줄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쯤되면 제목과의 조합 속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청소년을 위한 ‘라면교양’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시리즈 중 하나이다. 1권이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이다. 단순한 가정법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뒤집어 생각하고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제각각이며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방식도 다양하기만 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문제는 세상은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의 차이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으며 역사는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인류의 건망증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어보지도 않은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읽고 싶지도 않다. 권인숙을 알고 대한민국을 알고 군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 때때로 한숨을 쉬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전부다. 미처 생각하지 않은 새로움이나 특별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으므로.

  청소년을 위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있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펀지>에 나올만한 질문이다. 짐작한대로 답은 아니올시다. 저자 하승우는 책세상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로 만난 적이 있다. 탁월한 솜씨에 감탄한 기억 때문에 저자에 대한 믿음과 제목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과연 군대란 무엇인가? 우스개 소리로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는 단군신화보다 유명하다. 간혹 확대 재생산되며 신화가 되기도 하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설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풍자와 해학의 결정판이며 어떤 훌륭한 문학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웃어넘길 수 없는 군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공상 소설 시리즈를 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내 경험이든 타인의 간접 경험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군대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실질적이고 친밀하게 접근한다. 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지, 남자들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지를 말하다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심드렁 할 정도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함께 흥분하지 않는 내용이다. ‘병역 거부’와 ‘병역기피’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가 그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 속으로 모두 병역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심지어는 심한 비난을 퍼붓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적 태도의 반영이거나 노예근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것이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 걸까? 국적을 포기하고 돈을 처발라가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병역을 기피하는 ‘그들’보다 양심적 거부자들이 더 나쁜(?) 사람들인가?

  강한 군대가 평화를 지키고, 군복무는 시민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군대가 약해지고, 먼저 총을 내리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대한 오해 혹은 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땅의 예비역 혹은 미래의 군인들이여 이 책을 읽어보라. 아니 군대에 보낼 아들이 있거나 애인을 두었거나 형이나 오빠가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읽어보자. 그들의 눈물젖은 편지를 읽고 공감하고 위로하기 전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군대’에 대해 다시 고민하자.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군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전쟁에 이기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인가. 국라라는 이름의 괴물을 짝사랑하게 세뇌시키는 ‘애국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평화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하기만 한가. 끝이 없는 질문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자라고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하게 변화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맺는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직선으로만 바라보면 시선에 잡히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보지 못한다. 지구도 둥글고 세상도 둥글고 사람의 삶도 둥글어서 우리는 유연한 곡선의 시선을 가져야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 P. 176

  인식의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과 알고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상식과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사실들이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달라질 수 있다. 그때-거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문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다.

  자, 여러분 대한민국 군대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신 분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혹은 군대에 가야하는 사람입니까? 애인이 군인이거나 친구에게 위문 편지를 쓰는 중이십니까? 약장수처럼 외쳐 봅니다. 현실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여러분에게 나옵니다.


080829-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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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아파트 - 바보, 문제는 아파트야! 우리 시대의 위험한 문화코드 읽기
허의도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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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 1. 1980년대

  “아파트로 이사갈래?”
  저녁 식사 자리로 기억하는데, 어머니의 말에 모든 식구가 반대한다. 그게 사람 사는 집이냐, 닭장에서 어떻게 사느냐, 성냥갑처럼 갑갑하다……
  “싫으면 혼자 간다.”
  그렇게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었다.

# 장면 2. 2000년대

  “그 집이 국회의원이 나온 집입니다. 터가 좋은가 봐요.”
부동산 중계업자의 말을 듣고 입맛이 떨어졌다. 정치인이 살던 집이면 정말 재수 없는 집이라고 생각하며 시큰둥하게 물었다. 누군데요?
  “단병호라고, 왜 있잖아요, ……”
  민노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전 민노총 위원장 단병호. 순간 나는 멈칫했다. 그 분이 아파트에 사셨다니……. 농담이 아닌가 했고 사실이라면 기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운동의 대부 전 민노총 위원장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민은 사라졌다. 전 전주인이긴 하지만 존경하는 분이 살았던 집이라니……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중계업자에게 계약하자고 말해 버렸고 그 곳에서 밤마다 책을 읽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참 대책 없는 인간이다. 나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배곯아보지 않은 먹물의 배부른 푸념일 수도 있겠지만 돈의 위력과 힘에 압도되어 본 적도 그것을 부러워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생활은 생활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나의 아파트 생활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농촌 생활을 해 본적도 없으면서 늘 마음은 산에 가 있다. 단순한 동경과 낭만이 아니라 최소한 땅과 호흡하고 나무를 볼 수 있는 공간들이 필요하다. 언제 그 도서관 같은 주택으로 이사할 수 있을 지 기약할 수 없으나 누구에게나 소박은 희망은 있는 법이다. 사방팔방 아파트 콘크리트 덩어리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용소나 군사시설을 연상시킨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는 공간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지 못한다. 이곳은 신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욕망의 블랙홀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과연 ‘아파트’란 무엇인가? 그 의미를 묻는 것은 실존적인 고민해 해당된다. 삶의 뿌리와 기반의 문제이기도 하고 사회적 계층과 계급의 문제이기도 하면 미래와 희망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허의도의 <낭만 아파트>를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정치적 입장과 사회경제적 위치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반칙은 아니지만 이 책의 저자 허의도의 입장은 매순간 삐걱거린다. 책을 쓴 목적도 입장도 모호하고 구석구석에 드러나는 모순은 읽는 사람을 혼란에 빠뜨린다. 경제학을 전공하고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중앙 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월간중앙’ 편집장이면서 ‘이코노미스트’ 편집인인 그는 아파트가 없다. 나의 경험을 본문에 소개한 것을 보면 대한민국 아파트 투기 광풍의 피해자임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산업은행에 다니던 시절 아파트를 분양받고 퇴사하면서 팔아버린 사연이나 그 후 최근에 구입 기회를 놓쳐 버린 경험은 책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저자는  우리나라 아파트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그것이 어떤 사회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탄생했는지 설명한다. 먼저 아파트를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는 1부는 박정희와 건설 공화국의 의미를 고찰하는 데서 출발해서 IMF를 거쳐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에 이르기까지 경제 문제와 아파트의 상관관계를 짚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논의는 대단히 주관적 판단에 의지하고 있으며 감상에 기대고 있는 면이 많다.

  아파트를 키워드로 우리 경제의 발전과정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일관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아니면 2부에서처럼 문화사회학이라는 측면에서 아파트의 의미와 역할을 집중적으로 풀어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두 다양한 관점이 하모니를 이루는 게 아니라 이성과 감성의 어설픈 만남으로 읽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나만의 감상일 수 있으나 철저하게 객관적이고 냉정한 판단과 분석을 전제로 하는 기획이거나 사람들의 삶을 중심으로 아파트를 들여다보는 문화적 관점에 철저했다면 훨씬 읽을 만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저자는 시인으로 등단해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못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지만 문장들은 읽을 만하고 인용된 내용이나 적절한 비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충분한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낸다.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아파는 건설 공화국, 아파트 공화국으로 명명될 만한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아프게 그려낸다. 개발 독재 시절의 고통과 아픔은 이 시대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으며 그 시절을 추억하고 향수에 젖은 사람들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물론 노무현의 ‘아파트’는 한 두 마디로 말하고 싶지도 않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는 어느 아파트 광고의 카피를 기억한다. 역겨운 것이 아니라 차라리 슬픈 천민 자본주의의 단면을 드러내는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아파트는 오늘도 안녕한가? 아니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안녕할 것인가 궁금한 사람들은 이 책을 뒤적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옹호론자든 반대론자든, 강남 공화국 시민이든 아니든 입장은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한 손은 뜨거운 물에 한 손은 얼음물에 담근 사람처럼 묘한 표정을 짓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울을 보면 된다.


080818-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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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8-08-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 책 찜했는데.
벌써 93권. ^^
잘 지내시죠, 건강하신거죠?


sceptic 2008-08-20 18:26   좋아요 0 | URL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08-08-20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2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동을 거부하라! - 노동 지상주의에 대한 11가지 반격
크리시스 지음, 김남시 옮김 / 이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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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참 매력 없는 도시이다. 이웃 블로거 타다노부님의 말대로 사람들의 관계를 벗어나서 즐길 만하거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길러온 도시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하게 말해 기능적인 면과 편의성 측면에서 탁월할 지 모르지만 그것 이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누구나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숨은 뜻은 공유하기 쉽고 말해진 것을 긍정할 수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은 차갑고 인위적인 도시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도출된다.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 도시의 일반적인 특성이라는 강변이 가능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도시들을 비교할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끔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서울의 야경 때문이다.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어둠과 찬란한 불빛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본다.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도시의 어둠은 네온싸인으로 인해 더욱 웅숭깊은 비밀스러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인공위성에서 촬영한 사진을 보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의 밤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지구 전체의 모습을 살펴보면 흔히 선진국과 후진국의 구별은 더욱 확실해진다. 밤을 지워버리는 자본의 힘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간에게 어둠은 더 이상 휴식과 안정의 시간이 아니다. 밤은 극복의 대상이던 시절은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낮과 밤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일 뿐이다. 활동 시간은 무한대로 연장되었다. 끔찍하게도 그 활동 시간은 전부 노동시간의 연장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유혹은 밤을 밝혀 소비를 부추긴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공부하고 일하며 즐기고 관계 맺는다. 밤은 더 이상 밤이 아닌 시간이 되어 버렸다.

  대학 신입생 시절 열심히 따라 불렀던 “일하지 먹는 자여, 먹지도 마라! 자본가여 먹지도 마라! ~~”가 떠올랐다. 옮긴이의 글 제목이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도발적인 제목이다. <노동을 거부하라!>는 책은 제목부터 옮긴이의 글까지 전부 도발적이다. 노동지상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노동을 거부하라니?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숭고하고 도덕적인 가치인 ‘노동’을 거부하라는 말은 헛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은 과연 제대로 된 상식인가? 생각의 틀을 뒤흔드는 일은 쉽지 않다.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귀 기울여 가슴을 열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념적 지향을 떠나 존경스럽다. 이 책은 뉘른베르크에서 활동하던 좌파 연구 그룹인 ‘크리시스Krisis’가 발간한 책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체제 전복적인 글도 아니고 국가 변란이나 내란, 음모를 모의하는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을 고찰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노동하는 인간의 삶을 반성해보는 책이다. 지금까지 거론된 이론들을 점검하고 현실의 문제에 적용시키며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간과했던 ‘노동’의 문제를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과연 인간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떤 방법으로? 국가가 모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 할까? 아무도 일하지 않는 세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꼬리를 무는 의문부호는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조금씩 사라지고 11명의 이야기는 제각각 목소리를 높이며 혹은 차분하게 다양한 문제점들을 짚어 나가고 있다. 추상적 시간의 개념, 노동의 부패, 여성들의 노동, 저임금, 강제 노동, 노동 문화 등 하나의 주제를 둘러싼 주변을 점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인식된다. 자본주의 너머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책을 맺고 있는 이 책은 미래를 고민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

  현실을 벗어나 과거를 돌아볼 수 없고 거꾸로 미래의 모습은 언제나 현실에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구체적인 책의 내용과 이론들은 독자들의 몫일게다. 아마도 다양한 반응과 논쟁이 가능한 책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쉽게 권할 만하지는 않다. 일단 이론적 토대를 설명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점검하고 있기 때문에 만만한 내용도 아니고 쉽게 재미있게 풀어쓴 교양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에 맞춰 일어나 노동하고 밤에도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보자.

자본주의의 시대는 또한 ‘자명종’의 시대이기도 하다. 곧 사람들을 인위적으로 조명된 ‘일자리’로 몰아가기 위해 기괴한 시그널로 잠에서 깨우는 시계의 시대인 것이다.
……
야간 노동은 흔하지 않은 예외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런 시간의 고문을 인간 활동의 정상적인 척도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성과 중 하나다. - P. 52

  우리는 꿈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저절로 눈이 떠질 때 일어나고 졸릴 때 잠을 자는 인체의 시간을 말이다. 그나저나 책을 읽다가, 부지런함이 미덕인 사회에서 발칙하게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사위 라파르그는 왜 아내와 함께 자살했을까 궁금해졌다.

  시계가 없으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 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예전보다 ‘행복’해 졌을까? 더 여유있고 즐거워졌을까? 이렇게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일까?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책을 읽는 동안 의문 부호만 늘어간다.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현실 인식이 아니라 한번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고민없이 믿었던 상식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도 엉뚱한 맥락으로 레닌이 이 말이 긴 여운으로 머릿속을 맴돈다.

“자신을 무엇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실지로 그것인 건 서로 다른 문제다.”(레닌) - P. 247


080730-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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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그 사회의 구성원 수만큼 많다. 우석훈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거쳐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최근의 생각들을 일괄하고 있다. 기획 의도와 내용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앞의 두 책과 구별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함께 묶여도 무관하다. 잡지나 신문 등에 실린 칼럼과 비평문을 모아 낸 모음집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던 민감한 문제들과 정부 정책이나 경제, 사회 문제를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돌아보는 추억담처럼 읽힌다. 벌써!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아닌가. 책을 읽는 동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 1년 만에 아련한 추억처럼 읽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책에 실린 내용이 그 이전에 쓰인 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잇달아 한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행간에 숨은 정보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밝히지도 않은 나이와 이력들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혀 마치 퍼즐을 맞춰 전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유 방식들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그의 행동 방식과 관심사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석훈의 글을 통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대단한 문학적 감수성을 숨기고 지극히 냉철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일찍이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들과 국제 기구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우석훈으로 하여금 현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석훈의 글들은 탄탄하고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하며 합리적이다. 그래서 계속 읽힌다.

  사람들의 술버릇 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중언부언 - 곁에서 듣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우석훈의 이야기 중에는 이렇게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세 권의 책을 짧은 기간 동안 읽어서 그런 느낌 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술주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는 거대 담론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해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는 하다. 책의 목적과 기능이 개별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목적과 방향에 대한 희망이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20세기에 넘어온 사람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인물열전’ 부분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아니라 인문학자 우석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노자와 진중권에 대한 평가 강금실과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우리 시대를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목하 열애중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할 것이고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주장하는 손학규와 김지하와 한통속으로 몰아갈 염려가 있겠지만 녹색환경과 생태 경제학이라 불릴 만한 일관된 관심과 주장은 평화 경제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름이 거창하고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우석훈이 주장하는 미래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최소한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 사회를 만들어가고 경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은 최소한 그만한 청사진과 철학적 신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GNP 2만불 혹은 3만불이 대한민국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숫자놀음에 불과한 단순한 경제지표를 볼모로 우리 모두는 부나비처럼 제 날개가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1% 혹은 10%를 위한 정책을 하위 50%가 지지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우석훈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 비합리적인 정치 성향에 대해 ‘성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이론화했다. 다양한 분석들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조중동의 기사를 자신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 비규정규직과 세입자들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분명하지 않고 사회적 타협이나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우석훈은 스스로를 ‘명랑 좌파, C급 경제학자’라고 명명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낙관과 막연한 믿음,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환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접속 코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고 접속하고 현실을 재편하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매우 명랑하고 즐겁게 말이다.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즐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석훈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작고 힘찬, 수많은 울림들을 하나로 모으는 확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08072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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