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 21세기를 사는 지혜 인터뷰 특강 시리즈 5
김용철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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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듣게 된다는 말이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화두는 단연코 ‘김용철’과 ‘촛불집회’가 될 것이다. 벌써 아득하게 잊혀진 과거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무척 바쁘게 살거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문제도 바쁜데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왜 바쁜지, 계속 바쁘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지 묻고 싶다. 이명박을, 한나라당을 찍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지만 악화는 꾸준히 양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실연이 아니라 배신이다. 배신背信은 믿음을 등지다, 믿음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서로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신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신당한 수많은 사람들만 찾을 수 있다. 배신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정혜신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고 타인의 행동은 현상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신에는 수동태만 있고 능동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공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기적인 인간은 누구나 내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동어 반복의 결론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나 내 행동에 대해서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2004년부터 교양, 상상력, 거짓말, 자존심에 이어 올해는 배신이라는 주제로 한겨레신문사에서 특강이 이루어졌다. 시의 적절한 주제를 중심으로 인터뷰 특강이 이루어진다. 3월에 이루어지는 이 특강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매년 가을 책으로 만난다. 아쉽지만 놓칠 수는 없는 책이다. 5년째 꼬박꼬박 사서 읽는 이유는 내겐 소화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뉴스를 끊은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그것이 대안은 될 수 없다.

  고민보다 행동, 참여와 연대만이 살 길이다. 이 책은 내게 매년 자극과 함께 용기를 준다. 사면초가 - 홀로 서 있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마다 멀리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위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제자리에 엎드려 닥치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 3년만 지나면 강아지도 안다. 하지만,

  김용철은 왜 그랬을까? 검사 출신의 삼성 구조본부 팀장. 그의 선택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던 ‘카더라 통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삼성은 무엇이 달라졌으며 검찰은 어떻게 변했는지 점검해 보자.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은 조금 변했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과 말이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은 우리에게 배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과연 개인적 이익 때문이거나 배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들일까? 내부 고발자를 비롯한 수많은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한 책을 기다려 보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김용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헌법적 기관인 삼성과 맞서려고 했을까?

  2008년 한겨레신문의 인터뷰 특강 주제인 <배신>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반성하게 한다. 하종강의 말대로 본능적 유전자인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용기가 필요하고 생존을 넘어 선 실존적 고민에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배신 할 용기는 갖추고 있는가? 눈감고 귀막고 벙어리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김용철은 결코 스스로 배신자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김용철 외에도 정혜신의 ‘배신의 정신 분석’이 특별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배신의 개념을 구별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진중권은 언제나 대중을 배신하며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논리와 오호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가장 유사한 성향의 인간으로 혼자서 친근감을 느낀다. 과학자 정재승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뇌과학의 입장에서 이마 뒤쪽에 있는 전전두엽에 위치한 자존심과 배신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다른 책에서도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읽었지만 정태인의 FTA 이야기와 이명박 경제 이야기는 이제 저질 코미디에 가깝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슬프다. 계속 미루고 있는 조국의 강연도 인상깊다. 앞당겨 차근차근 그의 책을 보고 싶어졌다. 법은 여전히 평등과 서비스가 아니라 권력과 부정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다 즐겁고 발랄한 책 한 권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발딛고 선 이 현실에서 조금씩 움직여보지만 쉽지 않다. 더딘 발걸음이지만 불빛을 저버릴 수는 없다. 묵묵히 걷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지식인도 투사도 아닌 나같은 사람의 정체성과 실존적 고민들은 언젠가 다수와 대중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강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랬더니 슬몃 미소가 새어나왔다. 벌떡 일어나 뛰어야겠다. 또 다시.


0810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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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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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놀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보다 우선 우리는 놀이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잊고 산다. 가끔 어린아이를 통해서 놀이를 재발견한다. 기억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놀이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잊은 것이다. 유년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놀이가 죄악시 되는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놀이보다 일이 우선시되는 사회는 피곤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달려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 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지상 목표인 삶은 암울하기만 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라 꼭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방법을 조금 바꾸면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 것일까? 지구상에 대한민국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놀이를 놓친다면 지루하고 딱딱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성스러움을 놓친다면 우리가 딛고 선 대지와의 연결성이 상실되어 버린다. - P. 17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free play>은 놀이와 우리들의 삶을 연결시켜 예술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딱딱한 예술론 책은 물론 아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걸 ‘놀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순 없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창조성은 놀이에서 출발한다.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천재적 감성에 의해 돌출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물론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열린 환경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 아닐까 싶다. 놀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인류의 조상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늘 놀기 위해 일했다. 일하기 위해 노는 불행한 인류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호모 루덴스의 본능이며 특권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이다. 놀이에서 출발하는 이 모든 즐거움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부의 축적과 승리를 위해 맹목적으로 달리는 경주마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한 번 일어날 뿐이다. - P. 41

  놀이의 원천, 과정, 극복, 결실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풀어낸 저자의 글을 풀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각 장마다 인상적인 선언들과 함께 열정, 의식의 흐름, 직관, 영감, 황홀경, 중독, 실수, 배움, 성숙, 확장, 생명, 예술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공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함으로 읽어내려 갈 수 있다.

  21세기에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 살아남지 않을까?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은 놀이에서 출발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일을 즐기고 행복한 마음을 열수 있는 능력은 나와 타인을 위한 배려이며 놀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은 넓고 하늘은 푸르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웃을 수 있다. 소유데 대한 욕망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다면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때때로 사는 게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다는 드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즐긴다는 건 단순히 돈이 있어야 충족되는 즐거움이 아닌데도 말이다. 관점과 방식의 차이일 뿐! 그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이고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이다.

놀이는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하고 행동 영역을 넓혀준다. 놀이를 통해 반응이 풍부해지고 유연한 적응력도 길러준다. 이는 놀이의 진화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현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난다. 놀이는 자신의 능력을 재확인시키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도록 한다. - P. 65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으로 오히려 강박증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다. 모든 억압과 순종적 사고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 그 안락함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 창조성과 상상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놀이는 진정한 자유의 출발이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은 놀고 싶어한다. 그 놀이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풀어내는 가는 개인적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사회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창조성과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냈지만 예술과 무관한 일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과연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이 단계를 연습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장과 진화를 통해 얻은 ‘창조의 자유’를 즐겨보자는 말이다. 자, 한번 놀아보자. 제대로!

창조의 자유는 성장과 진화가 가져다준 열매다. 창조적인 삶의 순환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단계를 거친다. 순수(혹은 발견) 단계, 경험(혹은 몰락) 단계, 통합(혹은 회복) 단계다. 탄생, 장애, 돌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은 물론 단순하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각 단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복잡하게 전환되고 서로 얽힌다. - P. 239


0809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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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2.0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진실한 고백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1
강신주 외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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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2.0세대. 신인류가 다가온다.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있다. 각 세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21세기의 주역이 될 새로운 세대에게 적용되는 첫 번째 특징은 웹 2.0세대라는 말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2008년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여’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 세대의 진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촛불집회의 의미를 기억할 것이며 이명박 정권의 검역 주권 포기와 근현대사 역사 교과서 왜곡시도, 경쟁 지상주의 교육 정책으로 인한 황폐화된 공교육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국가는 항상 대다수 국민의 뜻을 외면했고 기득권 세력의 집단 이기주의에 복무했으며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되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외면하고 왜곡 보도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 당한 채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국가의 정책 목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발랄하고 즐거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청소년들에게 있었다. 지식과 정보의 무한한 확장과 공유가 가능한 세대에게 웹을 통한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청소년에게>라는 책은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바치는 축사와도 같다. 어설픈 충고와 비전의 제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에 눈을 뜨고 억압과 순종의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하는 간곡한 당부와 진심어린 충고들이다.

  관점과 세대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나온 엄마들에게까지 시비를 거는 사법 권력은 법이라는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겨누고 있다. 국가는 폭력이므로 국가에 저항하라는 톨스톨이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은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화하는 청소년들의 시선과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판단과 대책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머리카락이나 치마의 길이로 학생들을 억압하는 교사들과 규율와 질서라는 미명아래 기존 질서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시스템이 건재하는 한 즉흥적이고 창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교사들조차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으로 과거의 틀을 답습하고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며 복지부동과 매너리즘에 길들여져 있는 한 대한민국의 청소년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과 훈육에 불과하다.

  이 책은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웹 2.0 시대를 당당하게 열어젖힌 청소년 세대에게 던지는 기성세대들의 말잔치에 불과하다. 세대 간 통합이나 연대,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청소년들에게 올바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슈퍼맨이 아니며 스스로 자가 증식하는 아메바가 아니다.

  인문학 정신을 기대하는 강신주, 홍세화, 김성동, 김조년, 고은의 발언들은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인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있으나 그들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얼마나 현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글과 말이 빚어낸 슬픔이 아니라 대한 민국의 경쟁적, 억압적 교육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미래도 있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최열, 박승옥, 김낙중, 김규동은 생명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경과 문화라는 21세기의 거대 담론에 대해 과연 청소년들이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부정적 현실에 바탕을 둔 삐딱하게 보기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의 마련과 현실 타개의 모색이 필요하다. 내일의 역사를 담당할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판단 능력과 다양한 관점의 세상을 보여줘야하는 것은 기성 세대의 의무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2.0 세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이이화, 우석훈, 권오성, 기세춘, 하종강, 이현주의 글을 싣고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비판적 관점에서 이들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젊음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이기주의와 왜곡된 물신주의에 저항하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는 지금 기성세대의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될 것이다.

  책임을 미루듯이 그들에게 맡기는 태도는 비겁한 기회주의에 불과하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에 해당할 만한 사람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그 작은 열망과 신념들이 모여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책을 얼마든지 쏟아져 나와도 좋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청소년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얼마나 읽어 줄 것인가? 누가 이 책을 읽힐 것인가? 그들의 부모와 교사들을 과연 이 책을 읽힐 만 하다고 판단할 것인가?

  기성세대의 생각이 어떠하든 그들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참여와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개방적이고 상호 작용이 가능한 그들의 힘은 결코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지금과는 달라야 하고 그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더불어 함께’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큰 세상을 바라보고 인류가 걸어온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다시 세웠으면 좋겠다. 세대가 교체되고 미래 사회의 아젠다가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즐겁고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믿음조차 없다면 현실은 견디기 힘들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순종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혼동하면 안된다. 이기적인 욕망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희생을 현대적 삶의 길이요 진리라고 인식해서도 안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청소년들에게 매일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마음의 눈으로 거울을 볼 시간이다.


0809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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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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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본능처럼 만들어낸다. 그 시절은 선악과 오호의 판단을 넘어 아련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디지털과 네트워크로 무장된 신인류의 삶을 과거와 비교할 때 단순히 진보했다거나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시절의 문법이 있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가 있었고, 연락이 닿지 않아 애태우는 밤이 존재했으며 친구나 가족의 소중함은 지금과는 다른 형식으로 다가왔다. 인관관계는 전면적이었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은 진지하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이제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할 만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맺는 관계의 수가 아니라 관계의 질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관계의 수가 많아지면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네트워크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물었다. 지구의 끝에 사는 사람들과도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이 요구되는가.

  클레이 서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Here comes everybody>는 우리말 동사를 활용하여 인터넷의 특성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모든 사람이 모인 곳은 시장이나 교회가 아니라 인터넷이다. 네트워크 공간을 맹신하라는 뜻이 아니라 필수적인 관계망의 현장으로 그리고 세상의 변화가능성의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이곳을 떠나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졌다.

  무엇을 상상하든 우리는 그 이상을 인터넷에서 확인하고 있다. 상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시도해보고 부딪혀 보고 대화를 나누고 행동에 옮겨보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생각의 속도를 뛰어넘을 듯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확한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그 방향과 목적에 따라 거시적인 안목에서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눈뜬 장님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세계와 구별되는 네트워크 세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해석함으로써 다음 세대와 모호한 미래를 에둘러 짐작하게 한다. 비판적이고 예리한 판단력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이다. 저자는 이런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새로운 사회는 결국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말한다. 세대를 점검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퍼진다. X세대, 신세대, 386세대, 네트워크세대…. 사회적 의미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붙었지만 실상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감각적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깊이 있게 분석하거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에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피상적인 이미지와 감각적 분위기로 그들을 파악한다. 그래서 선입견과 편견은 죽순처럼 자라나고 긍정 혹은 부정처럼 흑백논리로 그들을 재단한다.

  가장 최근의 예로 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배후에 전교조가 있다는 말에서부터(전교조가 정말로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경찰이 유모차부대까지 수사하는 현실에 이르면 할 말을 잊게 한다.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현실을 읽어내려는 무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또 다른 그들을 양산하기 위해 조중동과 기득권 세력은 얼마나 피눈물나게 노력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서두에서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것은 인테넷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고 21세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변화들이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인터넷 보급률이 높다. 노무현은 당선된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결국 역사의 물결이 거꾸로 흐르고 있지만 그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국민들의 댓가는 너무 크다. 요즘 입버릇처럼 말한다. 당신들이 뽑은 대통령, 5년간 온몸으로 느껴보라. 물론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노란 고름처럼 터지지도 않고 고여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상처의 주변이 더욱 심각하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대중의 탄생은 공유의 혁명과 실천하는 커뮤니티로부터 출발한다. 브리태니커를 비웃는 위키피디아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다음 세대 혹은 현실 세계의 큰 부분에 대해서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혁명에는 반드시 손해 보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절대 도래하지 않는다. 커다란 행복을 누리는 소수의 몰락은 필연이다. 그들의 세금정책과 부동산 정책, 교육 정책과 대북 정책을 들여다보라.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정책인가? 새로운 사회는 실천하는 대중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기적 욕망의 절제와 사적 소유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공유’할 수 없다. 공유하고 실천하는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현실에서 변화 가능성을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미래를 준비한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바람직한(?) 혹은 행복한 미래는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도 아니다.

  저자는 변화의 과정을 점검하고 분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 다음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이 현실을 분석하는 가장 훌륭한 틀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직업과 계층과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실에 적용 문제는 당연히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네트워크 세상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여전히 끌리고, 쏠리고, 들끓고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과 미래를 꿈꾸는가?

  나는 이 책에서 ‘공유와 실천’이 없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아주 작지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 키워드를 뽑아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하거나 미처 분석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0809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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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달팽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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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라는 대상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것은 군대에 가서였다. 비무장지대에서 니콘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표정까지 바라보며 생활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를 생각하며 군대의 조직과 남북 관계, 힘의 논리와 참담한 근현대사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고민했다. 수많은 책 속에서도 답을 구하기는 힘들었고 작계 5027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거대한 폭력 조직의 말단 조직원으로 참여한 기분은 참담했다. 이후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보인다. 당연한 인간의 권리가 이제야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은 친일파의 청산 문제보다 심각했다. 그들이 사회의 요직을 그대로 승계하고 해방 이후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조장하며 기득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현실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라. 경찰 국가, 병영 사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한 민국은 군대라는 말은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언제쯤 세대가 교체되며 억압과 폭력과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학교에서 재생산되는 계급과 순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폭력 집단은 영원할 수 있을까? 다소 과격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피카소가 살아생전 공산당원이었음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헬렌 켈러는 삼중고를 이겨낸 철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의 선봉에 섰던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페르 톨스토이가 비폭력적 아나키스트였으며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지금 우리가 <국가는 폭력이다>는 톨스토이의 외침에 귀기울여하는 것은 올봄 광화문을 뒤덮었던 촛불시위 때문이 아니다.

  국가는 집중되고 조직된 형태의 폭력을 대변한다. - 마하트마 간디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톨스토이의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지만 톨스토이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거두는 세금과 그것이 사용되는 방법과 그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군대가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뒤돌아보면 톨스토이의 주장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100여 년이 지났지만 19세기에 그의 생각은 21세기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부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오히려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외면한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부터 아니, 유치원에 다닐때부터 애국가를 배우고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며 맹목적인 충성심과 국민의 의무를 가슴 깊이 새긴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입학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국민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가르치고 순종적이고 억압적인 습관에 길들여진다. 지시하는 대상과 그것에 순종하는 학생이 있고 졸업 후에는 명령하는 상관과 복종하는 병사가 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몸에 밴 노예근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장유유서와 서열에 의한 위계질서는 피부처럼 편안하게 우리를 감싼다.

  톨스토이는 이런 모든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를 외친다. 세금도 내지 말고 정부기관에서 일하지 말아야 하며 군대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저하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소극적 저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정부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서 그 기능을 마비시키고 자연스럽게 국가와 정부를 없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선전선동과 급진적인 폭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국가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란스런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적 공동체를 꿈꾸었던 톨스토이의 신념이 여전히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주장했던 자족적 공동체, 상호 호혜적이고 이타적인 작은 농촌 공동체는 우리들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를 통해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애국심과 정부, 아나키즘에 대해 톨스토이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살인, 노예제, 사회주의, 기독교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일관되게 평화를 주장한다. 다가오는 혁명의 기운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톨스토이가 왜 여전히 우리 인류의 사상을 지배한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변혁의 과정과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그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했으며 ‘평화’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책머리에 하승우가 쓴 ‘우직한 바보, 국가를 거스르다’는 글은 최근에 그가 쓴 <군대가 없다면 나라가 망할까?>와 겹쳐지면서 다시 한 번 톨스토이의 사상을 일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정적이고 암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이야기로 몰아가는 외눈박이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겠지만 건전한 비판정신과 역사적인 관점에서 길어올린 통찰력은 독자들에게 덤으로 주어진다.

  과연 톨스토이는 왜 그렇게 평화와 비폭력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겼을까? 사람들은 왜 권력의 폭력에 순응해야만 하는가? 국가와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까? 이런 종류의 고민들이 황당한 질문이 아니라 ‘국가에 저항하라’고 외치는 톨스토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전은 시대를 넘어 명불허전이다.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 톨스토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일단, 국기에 대한 맹세부터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서는 아직도 애국조회가 거행된다면서요? 오호! 통재라!


08091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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