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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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어쩌면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저장 장치일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 것인 경우는 없다. 편집되고 채색되며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혹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사실, 객관적 기억이란 건 없다. 심리적인 기재가 작동하기도 하고 왜곡된 감정이 개입되기도 해서 비틀어지고 희미하며 모호하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삶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에 앞서 공적인 기록이며 기억할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지른 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녀의 구술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다가 여러 번 목이 메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이 시대 어른의 기억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간직한 기록이고 역사이다. 신산스런 시대의 아픔이고, 피눈물로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살다 가버린 아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살아도 한 세상이었겠지만 그녀가 감당했던 모진 시간들 앞에서 저절로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엄마, 배가 고프다…….”는 전태일의 마지막 말에 엄마 이소선은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 이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져야했던 당연한 권리와 당연한 임금을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말과 맞바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팠고 고통스러웠으며 말하지 못했고 잠들지 못했던 시간들을 견뎌왔다. 그 중심에서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은 묵묵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혹독한 시간들을 살아냈으며 이제는 여든의 노인이 되어 지나간 시간들을 말하고 있다.

  구술한 내용을 정리해서 이 책을 쓴 오도엽은 ‘인간의 역사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갈음한다. 우리들의 기억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언젠가 망각의 강을 건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이 책은 이소선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이 시대를 살아 낸 노동자들의 기억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찾아갔다가 이소선의 마지막이 아니겠냐는 인사가 인연이 되어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소선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그대로 구술되어 있다. 너무나 정감있고 친근한 그 목소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말투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간이나 지나온 흔적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남자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고통과 시련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가난한 날의 질긴 인연으로 결혼하고 전태일을 낳고 쌍문동에서 살다가 아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배우고 그 아들을 먼저 보낸다. 그 이후 이소선의 삶은 많이 달라진다. 생활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태일이 대신 아들들이 더 많아졌다.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이 땅의 노동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다.

  2008년에 이소선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급이 생긴 것이다. 국민 총생산은 늘었고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부의 분배 문제와 노동 문제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이소선의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하종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하다가 울컥했다. 몸이 약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멀리서만 바라보던, 일당백의 역할을 해 오신 그분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시대가 기록해야 한다. 그분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또 다시 이 땅의 후배들이 채워나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자리를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와야한다.

  그러나 이 시대를 돌아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는 양극화만 심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발 빠른 종부세 환급 등의 정책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누가 뽑은 대통령이며 누가 만들어준 정부인지 국민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영화 <월․E>에서 이브가 고장난 월․E의 부품을 갈아 끼우자 잠시 기억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살아온 삶의 무늬가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의 흔적이다. 그 딱딱하고 거친 숨결이 우리들의 기억이며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꿈이었고 미래의 흔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시대의 삶은 수많은 이소선에게 빚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소선의 여든이 기억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였다고 믿고 싶은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현실은 혹독하다. 다만 ‘희망’이라는 환각제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기억을 통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꿈 꾸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언제가 떠나게 될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개인의 미시적인 관점이 모여 역사가 된다. 대통령의 행적과 외교 문서가 아니라 바로 이소선의 삶의 흔적,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역사와 기록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많은 이소선들을 읽으며 현재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작은 진보의 발자국일 뿐이다. 그 흔적들을 돌아보고 발자국의 방향을 따라 걷는 것조차도 힘든 시대가 슬픔으로 다가온다.


08120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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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권력전쟁 - 사이버 세계를 조종하는
잭 골드스미스 외 지음, 송연석 옮김 / NEWRUN(뉴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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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기술은 누구나 금방 손쉽게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정치적 국경을 사실상 지워버릴 것이며, 자유무역을 보편화시킬 것이다. 기술 발전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이란 없으며, 우리는 점차 공동의 언어를 채택해나가게 될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19세기 후반 전보가 발명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그로부터 100년쯤 후에 우리는 인터넷을 만난다. 1990년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출근부를 인터넷에 찍어야했던 문화적 충격은 아득한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넷스케이프 2.0의 아이콘은 등대였다. 캄캄한 정보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상징적이었다. 10여년 만에 인터넷 세상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인터넷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어느 것의 역사든 과거는 늘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권력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세계를 조정하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터넷은 미국의 국방부에서 탄생한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이것이 발전되면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본다. 도메인 네임과 프로토콜 그리고 루트 서버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공상 과학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현실 세계의 강력한 실력자가 있고 그들에 의해 사이버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창조한 후 무한히 팽창되어 나가는 또 하나의 우주와 유사하다.

  이 무질서한 세상에는 항상 실제 권력과 자본들의 쟁탈이 치열했다.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의 충돌은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며 흥미롭다. 각국의 법률과 문화는 국경 없는 인터넷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실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프랑스 법정에 선 야후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책은 현실적인 국경과 영토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고 인터넷 혁명을 꿈꾸지만 결국 현실에 의해 지배되는 인터넷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조주 존 포스텔의 루트 권한 달환 시도는 싱겁게 끝나버린다. 결국 미국 정부 소유가 되어버린 인터넷은 국경 없는 아나키즘이 실현된 민주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검은 그림자와 숨은 권력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더구나 사이버 공간의 자유와 질서는 보이지 않는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 개념과 지리적 구분은 인터넷에서도 통용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법률이 충돌을 일으키면 분쟁이 생기고 각국의 제도와 법률에 따라 통제된다. 가장 극명한 예로 중국을 보여준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네트워크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게 되었고 특히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야후가 중국 정부의 통제 시스템의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은 우울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과 권력의 힘은 현실을 너머 이미 사이버 공간을 장악한 지 오래라는 이야기다.

  결국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주의와 인터넷의 결합은 교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적절한 통제와 눈부신 발전 속도는 중국 인터넷의 아이러니다. 재미를 너머 우려와 슬픔을 자아낸다. 소위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중국의 그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통제와 관리는 자유롭과 자율적인 인터넷의 특성과 상극이다. 그 한계와 자정능력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국판 소리바다 냅스터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파일 공유 운동의 시작과 결말은 음반업계의 막강한 로비와 자금력, 미국적 풍토, 저작권 등과 어우러져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하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많은 정보과 고민거리를 얻었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정부의 규제와 법률을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므로 당연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과 발전 속도는 단순하게 현실 생활과의 관계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상존한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진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지속적이고 꾸준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역으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여 성공한 이베이ebay를 저자는 승자라고 칭하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 독재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전자상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라면 결론은 쉽지 않다. 그 다양성을 토대로 각기 다른 룰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국경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역외 적용성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이 간다. 세계법의 필요성과 한계를 통해 앞으로 정부의 통제와 세계화의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는 우리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바로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강국, 통신 인프라가 거의 완벽하게 갖춰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문제 특히 국가 간 분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의 권력 전쟁은 현실 세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치열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결국 인터넷은 또 하나의 세상을 꿈꾸었지만 현실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은 혁명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고 보다 자유롭고 변화 가능성이 풍부한 가상 현실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 꿈은 어떻게 전개 될 지 알 수 없으며, 변화의 진폭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0811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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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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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소비의 과정으로 보면 참 재미있다. 무엇인가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것을 버리고 또 사기 위해 땀나게 돈을 번다. 또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고……. 지구를 빌려 쓰는 인간에게 무한한 특권이 부여된 적이 없으나 오만한 인간은 오늘도 땅 속은 물론 바다 속까지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난무하지만 오늘의 소비 욕망을 절대로, 멈출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익숙한 생활 패턴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고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부르고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어찌할 것인가? 지금 이대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을 위해 영원히 무한한 화석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으니 지배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우익 선생이 살아 생전에 TV 인터뷰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통해 선생이 말씀 하셨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얼마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인간 종족의 사회생활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서이다.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보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조망한다. 매우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가슴이 서늘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 삶의 조감도를 볼 수 없어 답답할 때 이 책은 유용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그 효용가치를 다 하고 쓸모없는 것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부른다. 세상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분류하는 것들 중에 정말로 쓰레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없을까?

  현대성(modernity)에 기초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상생활의 쓰레기와 무관하다. 생산과 소비적 측면의 인간을 비난하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난민을 비롯한 최하층 계급에 속해 현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 이웃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심 재개발과 뉴타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난민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분리된 채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 정보의 쓰레기부터 인간 쓰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가 낱낱이 고발된다. 우리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저자의 진단은 모더니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그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내 쓰레기,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로 대별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결국 쓰레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What's up?"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별 일 없었지?”라는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비극적 증언에서 출발한다. 안부 인사라고 하기엔 공포스럽다. 이 말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고단한 삶의 형태를 아우르는 말이 되고 있다. 감시와 처벌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에게 법의 준수와 제도적 안정이라는 말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대와 우정이라는 가치로 폭력적 제도의 정당성을 깨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모른척 외면할 수는 없는 일들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내 한 몸 아무 일 없기를 바라다가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What's up?"이라고 아침 인사를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린스펀이 20년간의 경제 정책의 실수들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더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긍정적인 시선과 내일의 희망을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사탕발림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움직임들이 드러나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과 행동하는 대중들이 연대하지 않는 한 견고한 현실의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점진적 변화든 급진적 개혁이든 목표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공할 만한 두려움으로 미래 사회가 진행될 것이라는 경고와 진단은 언제나 있어왔다. 비판적 관점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내어 놓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다.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어도 원인을 모르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시작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 사람의 견해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What's up?"이라는 인사말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생각을 다른 이의 표현을 따라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08102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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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8
강원택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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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말일 수도 있고 수평적 개념으로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를 정교화하고 법과 제도가 개입되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제도가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생활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 행위를 통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참여 행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대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선출된 정치인들의 행위를 굳게 믿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왕정이나 군주정을 통해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일천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은 더욱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 정치가 자리 잡지 못하는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계보 정치나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 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정책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인물 위주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정부나 정당이 집권을 해야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보다 권력이며 자본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한국의 정치는 일대 혁신을 맞이한다. 그 주역은 바로 인터넷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바야흐로 한국 정치는 진일보 했으며 그 위험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직접 민주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현실 생활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까지도 각 가정까지 파고 들었다.

  그 출발은 물론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 선 축제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노무현의 최대 업적은 ‘당선 그 자체’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와 효선, 미선을 위한 촛불 집회를 거쳐 노무현의 당선으로 마무리된 현상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국민들의 열망과 달리 참여 정부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움은 접어두고라도 개혁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가 어떠하든, 경제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의 모습이 어떠하든 웹 2.0 시대의 한국인들은 과거의 정치 형태와 권력자로서 정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치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넘어 왔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힘이다.

  강원택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서다. 인터넷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단점들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당연히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웹 2.0에 대한 현재와 미래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의제 설정의 민주화, ‘대중의 지혜’, 선거와 프로슈머 유권자라는 핵심 개념들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진화를 위해서 법과 제도를 살펴보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참여와 선거를 통한 정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정치인들을 욕하고 안주삼아 씹어대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반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기적 욕망인지 대다수를 위한 방법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도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와 눈팅족과 무뇌충의 저항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질주할 수는 없어도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은 소수의 정치인이나 권력가,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패배의식에서부터 변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웹 2.0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웹의 영역을 확장하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0810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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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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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생존의 논리는 인간의 유전자에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일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생존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더 낳은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물질과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무한 경쟁 체제에 온몸을 내맡긴 채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삶의 목적과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회마다 시대적 가치가 있고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주류의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방법도 있고 <꽃들에게 희망을>을 준다고 믿는 애벌레처럼 끝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뛰어드는 삶도 있다. 우리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그 흐름과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신안1리 마을 이장 강수돌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5권으로 펴낸 책부터 손에 집힌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강수돌 교수의 이전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본다. 어렵지 않게 답이 찾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만을 확인하는 책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는 것 또한 건방지지만 말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중독 벗어나기>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에서 출발한다.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과연 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 사회로 이행과정에서 게으름은 악이고 근면은 선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외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 먹자는 달콤한 유혹은 계속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양극화는 심화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가정에서 발원한 부모들의 교육 방식과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 체제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유효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80은 20에게 지배당하고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명문 대학에 입학 하는 순간, 대기업에 취업하는 순간,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경쟁의 덧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이제 지자체와 국가가 앞장선다. 초등학생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일제고사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가진 자를 위한 국제중, 특목고는 확산되고 건설과 토목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일과 직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에 불과한가.

  이른바 ‘팔꿈치 사회’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자기소외가 시작되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통과 연대가 대안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도대체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막막해진다. 실천적 대한이 아니라 한낱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속도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결국 경쟁은 학교에서 내면화되고 가정에서 공고화된다. 혹자는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는, 학부모의 요구를 잘 모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큰 일 날수 있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 무엇을 배우러 가는지.

  첫째,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大學)’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사회가 ‘상중하’라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깨 놓고 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넷째,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이 ‘인재’가 되고 ‘영재’가 되고 ‘천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인재, 영재, 천재와 같은 말들이 결국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 즉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섯째, 초중고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여섯째, 초중고 학생들도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곱째, 각종 시험에 대해 무조건 잘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시험문제야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고 나아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입시 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 경쟁, 생존 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교는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열 번째,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우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넘어, 사회질서 자체가 더 이상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를 직접 만났던 저자의 경험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만하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경쟁’과 무관하게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를 알고 싶다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보면 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 우리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거미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저자처럼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정과 환대의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081019-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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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0 0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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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2 20: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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