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사랑, 결혼, 가족,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근원적 성찰
울리히 벡.벡-게른스하임 지음, 강수영 외 옮김 / 새물결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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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건 아니면 눈이건 또는 대양이건
한때 활짝 피었던 모든 것은 이제는 져버리고
오직 두 가지만 남았다네. 공허
그리고 상처입은 자아만이.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 번, 만 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용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 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한 때, 사랑이 생의 전부이던 시절 - 그 미망에 사로잡혀 온통 전 존재를 불태울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리라. 도대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산업화와 근대화의 자본주의 사회가 ‘위험사회’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아내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과 함께 ‘사랑’에 대한 주목할 만한 저서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을 남겼다. 이 책은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과 아이들의 새로운 미래를 성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사랑의 근본적 구조에 대해 조망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물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사랑’에서 시작된다.

  인생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다. ‘사랑’의 의미와 역할은 개인에 따르지만 이것 또한 사회화 과정에서 빚어진 남녀 간의 차이와 전통적 가족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결혼으로 열매 맺는다는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을 불행에 이르게 한다. 가족과 아이들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과연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하고 있는가.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과 그의 아내는 다양한 측면에서 사랑을 이야기한다. 이성 간의 사랑도 역사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사회적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사랑은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자본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아니, 결혼에 대해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자. 소설가 정이현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달콤한 나의 도시』 등을 통해 이미 사랑과 결혼에 대한 속물적 욕망에 대해 냉소를 날린 바 있다. 어느 사회든 경제적 기반과 결혼의 상관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에 대한 열망에서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인간이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 낯선 열정과 들림[憑]의 상태는 정상에서 벗어난 열기에서 비롯된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을까?

사람들이 사랑에 더 많은 희망을 걸면 갈수록 사랑은 그만큼 더 빨리, 모든 사회적 결속을 잃어버린 채 허공 속으로 사라져 간다. - P. 23

딜레마의 양측면, 즉 자기자신이 되는 것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 이 둘이 모두 뚜렷이 나타나고 제각기 주목해 달라고 아우성쳐대는 곳이 바로 이 오래된 결혼이기 때문이다. - P. 135


  저자들은 이 책에서 개인화가 초래한 삶과 사랑의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속적이고 관계 지향적이던 결혼제도가 개인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면 사회의 진화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결국 근대화는 자아의 발견과 결혼제도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는 지난한 과정과 다름없다. 사랑이냐 자유나 그것이 문제로다. 함께 사는 과정에 벌어지는 문제들은 고스란히 사회 문제와 연결된다. 교육과 취업, 가사노동이 산업혁명과 맞물려 남녀의 성별 투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개인화, 파편화 된 것 같은 현대사회에서 사랑은 더 중요해진다. 끈끈하고 1차적인 관계가 사회의 기본 구조와 바탕이었던 전근대 사회보다 역설적으로 사랑의 중요성이 커진 이유는 전통적 결속보다 개인적 안정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사랑과 이혼 과정에서 자유는 증대됐지만 안전은 감소했다. 시대가 변해도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능은 자식 사랑이다. 아이에게 모든 사랑을 쏟는다는 것은 아이를 자신의 아바타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늘어간다는 뜻이다. 타자로서, 독립된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종속변수가 된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저자들은 이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신흥종교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의 세속적 종교인 사랑이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고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사랑은 수많은 역설을 내포한 감정의 물결이다. 아무리 사회적 의미를 고찰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해석할 수 없는 불가해한 영역이 사랑은 아닐까?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 P. 296

  2010년의 사랑이 산업혁명의 발명품이든 신자유주의의 고통이든 사회 현실의 우울한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안에서 꿈을 꾸고 의미를 찾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박한 생각들은 변함없이 계속된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조차 사회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라는 말을 믿고 싶다.

사랑은 자본주의 안에 있는 공산주의이다. 노랭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며, 이는 그를 한없이 기쁘게 한다. - P.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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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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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아니, 우리 각자가 삶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생의 목표와 가치관은 변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질 수 있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와 행복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 사람들의 선택할 수 있는 폭과 범위는 각자 조금씩 다르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결정된 운명적, 태생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다른 부모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다. 그것이 전부 일수는 없지만 완전히 달라질 수도 없다. 개인의 선택과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느냐가 바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민주화의 척도가 아닐까?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주변을 돌아보자. 얼마 전에도 중산층이 줄어든다는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20대 실업률 증가, 중산층 감소, 양극화 심화 - 이런 객관적 사회 지표들은 단순히 경제 상황에 따른 사회 변동으로만 볼 수 없다. 정치제도의 합리성, 사회제도의 민주성, 경제적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선진국 혹은 복지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건전한 상식과 합리적 의사결정이 통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속한 집단은 그런가?

  세상 사람들의 냉소는 이제 한계를 넘어섰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정치에 대한 냉소, 경제적 이기주의는 2010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들이다. 학교에서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는지, 사회에 나가면 사람들이 괴물로 변하는지 가족과 친구,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만 잘 사는 사회가 지속 가능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게 아닌가?

  김용철과 삼성, 아니 우리 모두와 삼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단순한 한국의 재벌 그룹 이 상의 상징이 되어버린 ‘삼성’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나. 삼성그룹 구조본의 법무팀장이었던 검사출신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는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혹은 알고 싶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건강진단서를 보는 것 같았다. 설마 이 정도까지겠는가 그래서 설마 이건 아니겠지 하는 미련을 털어버리게 만든 책은 일요일 오전에 읽을 만하지 않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막힘없이 읽힌다. 기사문을 작성하듯 짧은 문장과 간결한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래서 사실을 전달하듯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 진실을 전달하겠다는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양심선언을 사람들은 벌써 잊었다. 주류 신문과 방송이 외면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발표 되었던 삼성의 비자금과 불법 승계의 썩은 고리들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류로 행사하며 세상은 이런 곳이라는 떳떳하게 밝히고 산다. 백주 대낮에 그들이 당당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그들이 되고 싶은 부끄러운 현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가마니로 덮어 놓은 부패한 음식의 악취가 천지를 진동하지만 코는 쉽게 그 냄새에 익숙해진다. 무뎌진 후각만큼 우리 삶의 가치는 성공한 재벌에 대한 면죄부를 향해 달려간다. 좀 더 많이, 확실하게 벌고, 보다 강한 권력을 갖는 자가 살아 남는다. 영화 속 조폭의 한 마디처럼 ‘강한 놈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 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십년을 지키기 어렵다는 말이다. 진시황도 죽었고 히틀러도 죽었다. 김일성도 죽었고 박정희도 죽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재벌은 죽지 않는다. 창업자의 손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룹의 지배권을 넘겨주기 위한 상상을 초월하는 뇌물과 그 모든 비리와 불법을 인정해주는 검찰과 언론을 가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오늘도 행복하신가?

  우리 주변에는 삼성에 다니는 가족, 친구, 선후배가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국어교사가 된 제자와 삼성전자에 입사한 제자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내 심정은 복잡했다. 김용철은 이 책을 통해 글로벌스탠다드를 지향하는 삼성의 비리를 고발하지 않는다. 이 책은 오롯이 비정상적, 비상식적 사고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는 이건희와 그 가신들 그리고 이재용에게 바쳐져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부패한 검찰과 썩은 언론을 위해 쓰여졌다. 이것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정서 문제이다. 당신은 삼성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삼성이 만든 제품이나 삼성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묻는 말이 아니다. 무노조 경영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삼성에 대한 태도는 바로 우리 사회의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삼성에 대한 입장은 재벌친화적인 우리 사회 주류의 가치관에 동의하는지 여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통한다. - P. 389

  감정적으로 혹은 법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삼성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대로 우리 사회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는 공포와 불안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지 않는가. 지금 이대로의 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떳떳하게 말해줄 수 있는가. 대기업, 판검사와 변호사, 언론인이 되어 우리 사회를 이끌어 달라고 당당하게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을 닮으라고 권해줄 수 있는가. 이 땅에서 아이들을 길러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부모와 교사의 입장에서 나는 이 책을 울면서 읽었다.

나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 - P.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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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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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농부의 졸라맨 허리에도
제 온몸을 팔아 한 몫의 인간이고자
고개 쳐들면 꺾이고 마는 노동자에게도

그 허리에 재물 올려 도둑놈도 얼씬 못하게
가시철망 두룬 재벌의 담벼락에도
그들돠 한패되어 시시때때 벌이는 쇼
고관대작들의 평화통일 축제에도 있다.
있다. 있다. 어디에도 있다. 아아아...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
3.8선은 3.8선에만 있는 것은 아냐

- 안치환, 5집 Desire


  깊은 밤에 만화책을 읽다가 눈가에 눈물이 맺혀 천장을 오래 보아야 했다. 하종강은 ‘부채감’ 때문에 노동운동에 투신했다는데 우리는 그 ‘부채감’ 조차 느끼지 못한 채 이 시대를 건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역사는 무어라고 기록할 지 자못 궁금하다. 먼 훗날 2009년 1월 20일 용산 참사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총리와 서울 시장의 형식적인 사과와 대책 협의가 이루어지고 1년 만에 장례를 치르는 동안 다섯 명의 철거민은 구천을 떠돌았다. 누구와 왜 싸웠는지 모른다.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었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모호하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형을 선고 받았다. 과연 용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여섯 명의 만화가가 그린 『내가 살던 용산』은 용산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숨을 거둔 다섯 명의 혼을 위로하는 듯하다. 그들은 왜, 어떻게 그곳에 있었으며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끔찍한 뉴스로 생각하기 쉽다. 사건의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현상과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태는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그마저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언론의 행태는 참사보다 끔찍하다. 도대체 용산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상림(72세), 양회성(58세), 이성수(51세), 한대성(54세), 윤용헌(49세).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들이 그곳에 가는 과정은 신산스런 삶을 살아가던 순박한 우리 이웃들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준다. 돈이 없어 어려운 생활을 꾸렸던 사람들, 장사가 잘 되다가 보증금에 대출금까지 건질 수 없게 된 사람들, 혼자 힘으로 견디기 어려워 힘을 나누던 사람들……. 죽을 정도로 잘못을 한 사람들일까? 경찰 특공대가 투입되어 진압할 정도로 위험한 폭도들이었을까? 왜 살기위해 국가권력이나 자본과 싸워야 하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자.

  이 책을 쓴 만화가들은 용산 망루에서 숨을 거둔 유가족과 철거민을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야 하는 가족들과 그것을 그리고 써야 하는 만화가들의 만남이 아프게 느껴진다. 한 컷 한 컷 정성스럽게 만화를 보다가 글보다 감동적인 그림을 만나기도 했고 그림의 감동을 뛰어넘는 대사를 만나기도 했다.

  행간을 뛰어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면 컷과 컷 사이의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것이 만화의 즐거움이다. 김수박의 ‘철거민’, 유승하의 ‘잃어버린 고향’, 신성식의 ‘던질 수 없는 공’, 김성희의 레아호프, 그들이 만든 희망, 앙꼬의 ‘상현이의 편지’, 김홍모의 ‘망루’ 와 용산 참사일지로 구성된 『내가 살던 용산』은 전국민 필독서로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었지만 30여년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현실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괴감. GNP가 높아지고 빛의 속도로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우리 현실은 아니 가난한 이웃과 없는 사람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함께 어깨 겯고 웃음과 행복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앙꼬의 ‘상현이의 편지’는 고(故) 이성수씨의 아들 입장에서 서술된다. 다른 만화보다 특히 긴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아이들의 입장에서 부모와 이 시대를 어떻게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와 아픔을 누가 보듬어 줄 것인가. 한 시대를 공유한다는 것은 시대의 아픔과 구성원의 고통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관심과 따뜻한 정성이다. 진실을 알고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용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철거민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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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수난사 - 여자보다 강한 어머니들 이야기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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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보고싶어요 어려서부터 우리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하는 외식 몇 번 한 적이 없었고 일터에 나가신 어머니 집에 없으면 언제나 혼자서 끓여먹었던 라면 그러다 라면이 너무 지겨워서 맛있는것 좀 먹자고 대들었었어 그러자 어머님이 마지못해 꺼내신 숨겨두신 비상금으로 시켜주신 자장면 하나에 너무나 행복했었어 하지만 어머님은 왠지 드시질 않았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머님은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야이야~아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후회하~고 눈물도 흘리고~……’

21세기 아이들이 랩으로 소화한 god의 <어머님께>라는 노래의 일부다. <불효자는 웁니다>로 시작된 ‘어머니’에 관한 노래는 80년대에 산울림의 <어머니와 고등어>가 짧은 가사와 경쾌한 리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땅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노래를 부르신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혼자 흥얼거리시던 ‘얼굴’이라는 가곡이 있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그래서 내게 ‘어머니’의 노래는 ‘얼굴’이다. 지금도 가끔 궁금하지만 한 번도 여쭙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떠올린 ‘빛나던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지.

  아버지와 전혀 다른 정서와 이미지로, 항상 눈물과 함께 등장하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니’는 오늘도 안녕하신지 모르겠다. 여자와 아주머니 구별되는 ‘어머니’의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했다. 강준만의 『어머니 수난사』는 조선시대부터 2008년까지 역사적 관점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는 책이다.

  아들을 낳아야만 대접받는 사회에서 시작된 어머니의 수난은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거쳐 전쟁 미망인의 고통을 넘어 입시전쟁을 통해 인정 투쟁으로 계속되도 있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어머니’는 신성함의 탈을 쓰고 여성들의 굴레로 남아있다. 성역할의 올가미는 문화적인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근대 이후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급변했지만 가정에서 ‘어머니’의 상징성은 변함이 없어 보인다.

  이 책은 강준만 특유의 화법과 글쓰기 방식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후주(後註)가 34페이지 달할 만큼 본문 내용은 방대한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철저한 고증과 각종 자료에서 인용한 글쓰기 방식은 시대별로 ‘어머니’의 위상과 의미를 밝히는 데 더없이 객관화된 방식이다. 공시적, 통시적 관점의 적절한 조화로 군더더기 없이 시대별로 깔끔하게 정리된 내용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여성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잘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이전의 책에서도 저자가 사용한 이 방법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신문과 방송은 사실(fact)의 전달이 기본이지만 책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고 본다. 저자의 해석과 분석보다 인용이 많은 책은 독자에게 저자 특유의 개성과 일관된 관점을 직접 체험하기 어렵게 한다. 발터 벤야민이 인용문만으로 책을 쓰고 싶다던 욕망을 실현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은 책이 아니라 거대한 신문으로 읽힌다. 책과 신문의 ‘어머니’ 관련 기사들을 정교하게 편집해 놓은 느낌이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면 매우 성공적이지만 한 권의 책이 들려주는 커다란 울림은 부족하다. 맺는말에서 ‘아줌마 혐오와 어머니 신성화’를 넘어서 현실의 문제를 성찰하고 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이 아닌 다음에야 현실적 대안과 문제들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 사적 전개 과정이 도대체 어떤 영향과 결과로 이어졌는지 조금 떠 꼼꼼하게 짚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지나친 정보의 나열로 난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의 나열로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데 의미를 둘 수 있겠지만 인용된 책과 자료들이 당시 여성과 사회 현상에 대한 분석인 경우가 많이 2차적 해석이 아닌 단순한 정보의 나열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은 조금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강준만의 저작은 읽을 만하다. 누가 이만한 노력과 정성을 쏟아 하나의 주제를 통해 꼼꼼하게 사적 전개 과정을 읽어낼 수 있겠는가. 그가 보여준 학문과 사회 현상에 대한 접근 방법과 언론에 대한 대응 방식은 그의 글을 신뢰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힘이다. 색다른 글쓰기 방식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의 노력과 성과가 훨씬 크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물과사상사의 ‘인사갈마들총서’ 시리즈가 보여준 재미와 믿음은 흰 화면에 한복을 입은 여인의 뒷모습을 내세운 어색하고 촌스런 표지가 오히려 순수한 진실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어머니 얼굴의 주름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가. 이 책을 통해 쌓여온 세월의 무게와 대한민국의 ‘어머니’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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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2 -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 읽기의 혁명 2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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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형잡힌 지식인. 사람마다 꿈이 있고 희망이 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균형을 잃지 않는 통찰력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나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와 세계의 관계망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인과관계와 사회 현상에 대한 학습은 반드시 필요하다. 토대를 구축하고 나면 종횡무진 누빔과 가로지르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진정한 지식과 혜안은 하루 아침에 얻어지지 않으며 거시적인 관점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지극히 편협할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면 역지사지가 가능해지고 똘레랑스가 위력을 발휘한다. 모두 내 생각과 같을 수 없고 판단의 근거가 합리적이고 논리적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가끔 벽에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 때가 있다. 책을 읽고 사람을 읽고 세상을 읽는 것은 우리 삶의 진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지난한 고통과 한숨, 좌절과 절망이 기다릴 때도 있고 벅찬 감동과 희망찬 미래를 만날 때도 있다. 그 길이 즐겁고 행복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함께 걸어갈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믿음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세상을 읽는 중요한 도구 중 하나인 신문은 여전히 우리의 의식을 규정한다. 어느 신문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볼 것이냐가 문제다. 손석춘은 『신문 읽기의 혁명』1권에서 편집된 신문지면을 해체해서 재구성하라고 주문했다. 신문은 편집이다. 어떤 기사를 선택해서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신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문 기사의 내용은 편집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 책의 2권이 13년에 출간되었다. 1권의 핵심이 ‘편집’이었다면 2권의 중심에는 ‘경제’가 놓여있다.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는 부제는 책 전체를 요약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해서 섹션별로 신문을 구성하는 방법이 보편적이지만 저자는 경제를 통해 정치를 읽어야 한다는 논리다. 경제가 수단이고 정치가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신문읽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12월 28일은 UAE에 47조원에 달하는 원전을 수출한 내용이 주요기사다. 하지만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사설은 서로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조선일보 사설의 제목은 사설 ‘우리 기술과 정상 외교 기량이 만나 일군 47조 원전 수출’이지만, 한겨레는 ‘원전 수출이 달갑지만은 않은 이유’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력과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춘 내용과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볼 수 없는 원전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경제라는 잣대로 개발과 환경 문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두 신문의 관점은 서로 다르다. 이에 대해 오마이 뉴스는 ‘불안한 한국형 원전, 위험까지 수출?’로 표현하고 있으며, 미디어 오늘은 각 진영의 논쟁을 ‘원전수주 반대한 한겨레 폐간하라’로 정리하고 있다.

  경제면을 넘어서야 경제가 보이고 광고를 읽어낼 수 있어야 본격적인 신문읽기가 시작된다. 정치와 경제는 우리 사회를 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신문의 품격은 결국 ‘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치와 경제 논리로 정파적 신문 읽기를 유도할 수는 없다. 그 함정에 빠질 때 독자들은 바보가 되고 개인의 이익과 국가의 이익을 혼돈하고 국가의 이익이 결국 누구의 이익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문 깊이 읽기의 세 지층으로 세계화, 민중, 이해관계를 제시한다. 현실적인 신문읽기의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오늘 신문은 내일의 역사가 된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뉴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어떤 기준으로 신문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인터넷 신문의 약진, 신문재벌의 방송진출 등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으려면 스스로 학습하는 길밖에 없다. ‘카더라’ 통신에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주권시대의 신문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책을 끝맺는다.

  우리 개개인이 누군가가 정해놓은 틀 속에서 평생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주체가 되어 자아를 더 풍요롭게 실현해가는 주권혁명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다. 신문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평생학습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자신의 경제생활을 단순히 ‘취업’이나 ‘호구지책’으로 여길 게 아니라 정치생활과 연결 짓는 다리로 신문을 읽으며 새로운 사회의 주체로 자기를 창조적으로 형성해갈 때, 그때 신문 ‘읽기의 혁명’은 곧 ‘혁명 읽기’다. 그때 신문 읽기는 예술이다. - P. 280



091228-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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