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 선언 -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고병권.이진경 지음 / 교양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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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발생 이후 가장 완벽한 사회 체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상적 세계로 그려냈지만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홍길동은 ‘율도국’을 허생은 ‘빈섬’을 실험했으나 소설 속의 환상의 섬들일 뿐이다. 인류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그 꿈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철학자나 경제학자 혹은 문화인류학자나 사회학자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면 제각각 다른 대답을 내놓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인한 살육과 침략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된 세상을 위해 인간은 신을 창조했지만 그 분도 아직 우리에게 해답을 주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21세기에 등장한 <코뮨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과 이진경의 이름을 빌려 쓴 이 책은 발칙하고 신선하다. 기본적인 토대와 연구 성과들이 없다면 이 선언은 불가능했겠지만 서기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그들의 함성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참으로 난감해진다. 지금까지 흘러온 인류의 역사와 사회적 변혁의 면면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면서도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펼치는 이 선언문을 치기어린 발상이나 아웃사이더들의 외침으로만 보기에는 꼼꼼히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들이 많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주장했다. 급변하는 혁명의 시기에 선언을 한 걸출한 두 젊은이의 나이는 불과 서른과 스물 여덟이었다. 세계는 용광로처럼 변화의 불길로 들끓고 있었으며 세상은 곧 혁명으로 완전히 뒤바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완고한 세계를 뒤흔들긴 했지만 혁명의 기운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했지만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160년이 흘렀고 21세기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코뮨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의 마음과 갈피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과 같다. 현재까지 인류가 이룩한 역사와 사회적 토대는 결코 암울한 예측과 비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래와 역사에 대한 해석과 전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의 현실이 바람직하거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뮨주의 선언>은 21세기를 위한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 이데올로기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혹은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삶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인류 사회가 만들어 온 문명과 문화 사회 제도와 체제는 자본과 화폐 제도로 대표되는 시스템 속에 갇혀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원인과 해법을 고민하려는 노력들은 지속되어야 하며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통체’를 전면에 내세운 ‘코뮨주의’의 진정한 가치와 실현 방식들에 대해 귀 기울여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타당성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며 더 나운 세상에 대한 꿈을 반영하고 있다. 몽환적이고 이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성찰이고 나와 우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의 결과물이다. 고병권과 이진경 두 사람에 의한 발상과 전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함께 꿈꾸어야 가능한 혁명에 대한 이정표이다.

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머리말을 대신한 <코뮨주의 선언>은 본문으로 제시된 정치와 주체 그리고 감응이라는 영역에서 살펴보고 있는 세부적인 모델들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 왔거나 고민해 왔던 부분들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래의 삶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을 정리해 놓은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아카데미즘 안에 머물러 있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은 우리들 삶의 자유를 표방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기존의 형식적 틀에 온몸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아니라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려는 노력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로크에서 촉발된 개인의 신체에 대한 ‘소유’의 개념 그리고 사유화의 길을 걸어온 인류의 재산권에 대한 반성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유화의 개념에 반대하는 급격한 코뮨주의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지만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중이며 대중의 힘에 의해서만 모든 변화는 가능하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내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게 아니다. 이명박이 당선됐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과 소유의 압박에서 탈출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삶은 가능하다. 그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하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실패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실패해야 하며 그 실패의 과정과 결과들에 의해 우리는 또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비록 160년 후에 다시 선언된, 혹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과 변혁의 가능성을 내포한 <코뮨주의 선언>이 헛된 희망과 이상적 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 가능성과 변화의 노력까지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굳음 믿음이 필요하다. 선언의 마지막에 나온 말처럼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08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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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02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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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自尊)은 자존(自存)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자존(自存)이라는 것이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인식하는 주체로서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자아 존중감이 형성될 수 있다. 세계 혹은 대상에 대한 나의 태도와 인식 방법이 자존심의 출발이다. 마음은 자아 정체성과 주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사물에 대한 인식 태도는 타자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든다. 결국 자존심은 타자와 세계가 나를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반대의 경우 우리의 삶은 불안해지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흔들리는 촛불처럼 위험해진다. 내가 삶을 이끌지 못하고 생각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한 개인을 나타내는 정체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 불화하며 자존심을 지켜나간 사람들은 존경을 받는다. 신영복의 말처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는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는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이기적 욕망을 이겨낸 사람들의 고뇌 앞에 우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대를 고민하고 세상을 걱정하는 척하는 정치인들의 혐오스런 모습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과 사소하고 당당한 실천만이 조금 더 살만 한 세상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하종강, 아노아르 후세인, 정희진, 박노자, 고미숙 등 8명의 이야기를 들으며 올 한해도 저물어 간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2004년부터 매년 봄 특강을 하고 그해 가을이나 겨울에 책으로 묶어낸다. 2004년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005년 <21세기를 바꾸는 상상력>, 2006년 <21세기에는 바꿔야 할 거짓말>을 주제로 삼았고 올해는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으로 특강이 이루어졌다. 매년 이 책들을 읽으며 내년 봄에는 특강을 듣고 싶다는 생각만 4년째 하고 있다. 물리적인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면서 내년에도 책을 기다려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존심’이라는 키워드로 인문, 사회, 과학, 여성, 노동, 역사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 혹은 지식인이라 명명될 만한 사람들이다. 활자라는 형식으로 읽어야 하지만 강연을 듣는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책이다. 특강이 이루어지고 청중과의 질의응답으로 마무리되는 형식은 예년과 같다. 인위적인 시대구분이지만 21세기도 이제 7년이 지나간다. 20세기와 다른 세기를 살아간다는 특별함이 느껴지진 않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근대화 이후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슷한 속도감을 경험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우리는 쉽게 적응하거나 대처하지 못하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무엇이 잘못되어가고 있는지 관심을 갖지 않거나 알아도 고치려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거 내 이익에 반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외면한다. 이기적 욕망을 자존심으로 착각하거나 자본과 권력의 부당한 침해를 알지 못하거나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채 오로지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만을 지켜나가는 자존심이 가능할까.

  다른 책을 통해서 한두 번 이상 만났던 사람들이지만 변화하는 과정을 통해 또 강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듣는 이야기는 새롭다. 진중권, 정재승, 정태인, 고미숙 등 처음 이 특강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선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자존심’이라는 주제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결코 쉽지 않은 주제였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 나갔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특강을 찾아 들으러 가는 사람들보다 듣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진중권의 말대로 진짜 자존심은 자기가 자신을 존중하고 자기 삶을 배려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나와 내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존심은 이미 자신을 버린 것이다. 주변을 돌아본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배가 불러야만 자존심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자신을 지켜나가는 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자존심까지 각자 다른 모양과 색깔로 규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없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질 것 같아 용기를 내어 보거나 행동에 옮기다가 고민에 빠지는 일이 많다. 왜 나만 이러나, 내가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좀 더 쉽고 편한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좋은 사람, 문안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왜 어렵겠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불편한 사람도 있는 법이다. 하종강의 ‘부채감’은 자신의 선택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인식하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그 ‘부채감’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해결되지 않을 괴리감 때문에 고민할 정도의 나이는 지났지만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와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은 양립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상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 접점을 찾는 문제가 내게는 가장 힘들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일보다 보다 먼 미래와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며 고민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일들이지만 나와 한발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문제들에도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나와 직접적인 혹은 조금 떨어져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을 바꾸고 태도를 바꾸고 행동을 바꿔야 하는 이유와 고민들을 풀어내고 있다. 귀 기울여 보면 많은 화두가 던져진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항상 아주 작은 고민에서 출발한다. 나의 자존심은 내가 지켜나갈 수밖에 없으므로.


07120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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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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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행복 시대를 내건 정동영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국가가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 슬로건에는 일자리 창출이나 가정 경제에 국한된 문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지만 돈만 있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오로지 ‘돈’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공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바라본 결혼과 가족은 어떤 의미였을지 잘 살펴 볼 수 있는 책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다. ‘책세상’의 고전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혼과 가족의 형태가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최초로 관계 맺는 사회는 가족이다. 엥겔스는 국가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최소 단위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을 번역한 책이 아니라 전체 9장 중에서 1장과 2장만을 싣고 있다. 3장부터 9장까지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사회, 문화와 사상을 주유하는 일은 단순한 산책으로 여겨 즐겁기도 하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미로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군혼 형태를 띤 혈연 가족은 원시 사회가 보여준 인류 최초의 결혼과 가족 제도의 모습이었다. 부모 자식 혹은 형제 자매 간의 성교 금지에서 출발한 푸날루아 가족과 대우혼을 거쳐 일부일처제로 정착하기까지 인류의 성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자녀에게 재산 상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대에 비하면 결혼의 역사는 남성 권력의 강화와 여성 권위가 뒤바뀌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확고하게 굳어있는 가부장제와 차별적 시선들은 결혼과 가족제도의 왜곡된 변형 그리고 사유 재산 제도의 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가운데 하나는 사회 발전의 초기에 여성이 남성의 노예였다는 점이다. 모든 야만인 그리고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미개인,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미개인들의 경우에도 여성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 P. 77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노동 해방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은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도 공유했다. 사회 발전 초기에 여성이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존재였는지 따져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여성의 모습이다.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라는 인식은 엥겔스의 결혼과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삶에서도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일부일처제를 혐오했고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으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웅변보다 감동적인 실천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죽었다. 우리가 흔히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엥겔스가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혁명 정신’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변혁과 혼란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온몸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천적 노력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혼과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와 그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와 나란히 노예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즉 남자의 처분에 맡겨진 젋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애초부터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 P. 98

  군혼에 비해 단혼이 가지는 이익과 행복은 절반의 것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단혼은 최초의 계급적 억압을 초래했으며 노예제와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것이 엥겔스의 인식이다. 모든 진보는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발전과 행복은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 중 하나지만, 동시에 노예제나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즉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으로 관철되는 시대를 열었다. - P. 102


07120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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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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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성향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서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견고한 성을 만들어 나간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변하지 않고 좀 더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들을 기득권층 혹은 보수라고 부른다. 물론 물질적인 재산이나 권력, 명예의 높고 낮음으로 쉽게 좌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성향은 이것들의 소유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 어쩌면 이념 때문에 그것들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았느냐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한 자기 신념이나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잘 모르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다. 전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변화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 나의 삶이 쉽게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정치 따위에는 관심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로 욕심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바람일 수도 있으니까. 세상은 바보처럼 우직한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변화해 왔다. 그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신념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과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 온 것이다.

  엠마 골드만의 말을 인용한 최세진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제목이 지나치게 강렬하다. 내용을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는 상상력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좌파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의 이면을 살펴보고 드러난 현상에 만족하지 않으며 본질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 중 하나일 수 있다. 모르는 게 약이고 배속 편한 분들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돌이킬 수 없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며 대세를 쫓아가는 것이 편한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게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김규항의 말대로 그런 분들은 이런 책에 손도 대지 않는다.

  혁명은 거창한 대의명분도 범접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실천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이 180° 뒤바뀌는 것만을 혁명이라고 배웠다. 프랑스 혁명, 동학혁명 등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이 기존의 질서와 틀을 완전히 버리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온하고 과격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혁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예전에 ‘혁명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급격한 질적 변화’는 어느 날 그렇게 급작스럽게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오기를, 혹은 ‘그날’은 올 것이라고 줄기차게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그날을 위해 참고, 희생하고, 결의하고,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보니까 그날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혁명은 그날부터 시작하나고 믿었던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의식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 한 날에 일어날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은 오랜 논쟁과 투쟁, 반란의 결과물이고, 하루하루가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 혁명은 나날이 계속되는 일상 속에 지속되는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온 이 대목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이 말을 전해 듣는 독자인 나는 최세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SF라는 장르를 가지고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관계를 미래의 로봇으로까지 확장시킨 소설과 영화를 소재로 풀어나가고 있다. 즐겁고 재미있는 해커들의 이야기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왜 즐거움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 한 것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해 준다. 2부에서는 바그너, 쇼스타코비치, 마야코프스키 그리고 조지오웰과 존 레논, 피카소, 미야자키 하야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들의 삶과 예술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첨바왐바의 노래와 기행들은 대중 음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혁명은 즐거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혹은 역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람들과 사연들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다름 아닌 혁명의 역사였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은 얼마나 변화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은 2002년 ‘효선이와 미순이’를 위한 촛불 집회였다. 그것을 계기로 통신의 역사와 좌파적 상상력으로 이루어낸 변화들을 살펴보는 마지막 4부는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읽힌다. 인터넷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라는 충고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저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세상의 감추어진 진실들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들은 유쾌하고 즐겁게 보인다. 변화의 중심에서 혹은 고통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예술들이 미래를 위한 현실의 희생으로만 비춰지진 않는다. 내가 춤출 수 있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과 새로운 인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다. 체 게바라의 거친 수염이 아니라 양복쟁이의 단정한 넥타이에서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상업주의에 물든 체 게바라의 초상권 문제로 알베르또 꼬르다가 열받은 적이 있지만 평전에 붙어 사은품으로 온 목걸이를 나는 내일도 목에 걸고 출근을 해야겠다. 공짜로 얻는 체의 초상화가 그려진 목걸이를 걸고 현실 속의 혁명을 꿈꾼다면 체도 꼬르다도 이해하겠지...


0711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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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중독 - addiction. 병적 증상에 대한 의과적인 진단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환자라고 말한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인 상태를 일컬어 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미셸푸코의 <감옥의 역사>에 따르면 병원은 비정상인 미치광이들의 수용소에서 기원한다. 정상이 아닌 정신 상태나 정상이 아닌 몸의 상태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는다. 정상인으로 돌아오면 다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중독인데도 칭찬을 받거나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일중독이 그러하다. 일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도 힘들고 병으로 분류하기 어렵기도 할 뿐만 아니라 나쁘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 탁월한 능력, 일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괴물같은 인간형은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들어 치유 불가능의 상태에 이른다. ‘과로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의 기저에는 어두운 그늘과 잘못된 인식들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만 할 수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그리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고민한다. 돈과 시간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집만 ‘여가 시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레져 산업은 미래에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쫓기듯 그리고 ‘빨리빨리’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가만히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뒹굴뒹굴하면서 게으르게 보내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과연 그러한가?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이러한 통념과 편견에 대한 충고이자 학문적 고발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부록으로 번역하면서 일중독에 대해 연구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명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굶어죽는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이 크게 여유있게 전개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뛰고 일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전쟁같은 오늘을 보낸다. 매 시간 10건씩의 산재 사고가 나는 나라에 살면서도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뭔가 이상한 나라가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열심히 살자’는 말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강자와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멈출 수 없는, 지칠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달린다. 한 번 입력된 목표는 수정되지 않고, 뚜렷한 삶의 목표(대개의 경우 물질적 부, 사회적 명예나 권력)는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두를 중독으로 만들어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참으라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고. 공부든 일이든 우리는 목숨 걸고 한다. 남들보다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이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정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나아가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처럼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배타적 민족주의나 획일적 국가주의를 체득하게 된다. 원래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서의 쓸모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 파괴’다. 또 이러한 인간파괴가 이미 가능했기 때문에 그 환경파괴조차 쉬이 가능할 것이다. - P. 79 

  학교의 기능은 이미 순종적 노동 기계를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다양한 경험, 질서와 봉사, 배려와 희생은 잊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복과 머리, 지시와 복종, 반복 숙달, 야자와 보충, 입시 지옥 등 떠오르는 것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대부분 기업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을 갖춘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산학협동은 그대로 학교가 기업을 위한 노동자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하겠다는 협약이 된다. 취업과 실업은 천당과 지옥 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우리의 목을 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제 또다른 신분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회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일중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러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강수돌은 일중독의 심각성과 위험성 그리고 ‘동반중독’과 ‘2세 중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일중독의 특성과 유형을 나누고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근원을 살피고 가정, 학교, 군대, 직장으로 나누어 사회적 배경을 점검한 후 경험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일본, 미국,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한 4개국 비교 연구는 흥미롭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같은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일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대안과 주장이 미흡하다.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사회적 차원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추후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일중독을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P. 55)”라고 정의한다. 생존기계로서 기능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미래의 삶은 모든 것을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풀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교육 환경을 변화시키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쇠사슬로 묶어가고 있다.

  <‘나’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보여주었던 저자의 관점은 변함없다. 기존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낯설게 바라보는 대안들이다. 정답은 없지만 변혁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내재한다. 다만, 그 꿈이라는 것이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삶의 진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나 물질적 소유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중독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점검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알콜이든 약물이든 일이든 혹은 사람이든지 말이다. 나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 돌아본다. 중독은 집착을 넘어선 병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특히 사회적 비난이나 삶을 황폐화 시킨다는 자각 없이 끝을 모르고 질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일중독이나 의존적 관계중독이나 그 끝이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헛된 꿈일까?


0711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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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1-1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중독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로 인하여 자각하기까지는 모든 정신적 요소에 그 중독이 전이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거군요.
오타 신고 - 3문단 3째줄 ( 분dirk -> 분야가)

sceptic 2007-11-13 22:28   좋아요 0 | URL
그나마 자각할 수 있다면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이 책에서 대부분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우울하기만 합니다. 주변에도 극구 부인하지만(본인들은 성취감이나 보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죠.

오타 감사합니다...^^

2007-11-1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히끄 2008-05-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각종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 모두 방법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행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행하지 못할 때 그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 책은 다분히 개인의 몫으로 해결의 방안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 책을 다 읽고 보니 내용에서 이미 개인적으로 풀 수 없다는 걸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브레히트의 '동요하는 사람에게'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sceptic 2008-05-08 23:14   좋아요 0 | URL
누군가 길을 트고...모두가 함께 꿈을 꾸고, 제자리에서 실천하고...생각해 보지만 현실에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는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