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④

 

4.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3>


   메이의 금욕주의는 약혼자인 뉴랜드마저 답답하게 한다. 뉴랜드는 곧 결혼할 사이임에도 키스 한 번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사교계의 분위기에 숨막혀 한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접은 종이에서 오려낸 인형들처럼 서로 닮았소. 판박이 벽지 무늬처럼 똑같지. 당신과 내가 서로에 대해 새삼 놀랄 것이 있겠소?” 메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맙소사, 사랑의 도피라도 할까요?” 뉴랜드가 왜 좀더 행복해지면 안 되냐고 항변하자 메이는 그녀 특유의 순백색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 주인공들처럼 굴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엘렌을 통해 자유의 은밀한 속살을 엿본 아처는 메이를 다그친다. “왜 안 되지? 어째서 안 된다는 거요?” 메이는 약혼자의 평소와 달리 집요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전 당신과 논쟁을 할 만큼 영리하지 못해요. 하지만 그런 건 좀…… 천박해요, 그렇잖아요?” 메이가 가장 혐오하는 태도, 그것은 ‘천박하게’ 욕망을 그대로 표현하는 솔직함이었던 것이다. 메이가 보기에 그런 ‘천박한’ 사랑의 도피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나 벌이는 작태였던 것이다.

   메이의 주요 의상과 장신구의 특징은 주로 순백색을 위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메이의 티없이 희고 고운 피부와 절제된 순백의 드레스, 시리도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진주목걸이, 뉴랜드가 그녀에게 매일 아침 선물하는(!) 희디흰 백합. 이 모든 것은 뉴욕 상류층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순수’의 미장센이다. 온몸을 ‘순결’이라는 이름의 벽돌로 무장한 듯한 메이의 빈틈없는 아름다움은 ‘도대체 그녀에게 악의라는 것이 있을까’ 의심할 정도로 숨 막히게 압도적이다.
   한편 엘렌은 붉은색을 위주로 한 정열적인 드레스와 열정을 상징하는 노란 장미로, 메이의 순백색 코디에 눈이 먼 아처의 눈을 어지럽힌다. 메이가 언제든 ‘나의 순수를 위협하는 그 어떤 타자라도 추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극도의 방어적 캐릭터를 순백의 코디네이션으로 은폐하는 반면, 엘렌은 의상 자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뉴랜드는 그녀들의 차이를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는 노란 장미를 발견해냈다. 노을빛을 닮은 샛노란 장미는 이제껏 처음이었다. 처음엔 백합 대신 메이에게 보낼까 생각했지만 어쩐지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아름다움은 그녀에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풍성하고 강인하며 불타는 듯한 정열, 그것이 바로 엘렌만이 가진, 뉴욕의 귀족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관능적 아름다움이었다. 절제와 품위, 금욕과 순결을 숭배하는 밍고트 가문의 집단적 아비투스와는 아울리지 않는. 

   아직 엘렌은 자신이 처한 곤경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누가 뭐라 해도 뉴욕은 그녀의 고향이었기에 엘렌은 아무런 의심 없이 다시 그들의 커뮤니티로 돌아오고 싶어 한다. 그녀는 남편과의 어두운 과거를 떨쳐버리고 이혼하고 싶어 하지만, 뉴랜드는 그녀가 이혼 때문에 얻을 엄청난 불이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자신을 노예처럼 가둬 사육하는 잔인한 남편을 피해 고향으로 달아났지만, 뉴랜드가 보기에 고향만큼 위험한 곳은 없었다. 그녀의 이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온갖 추문의 굴레를 씌워 협박할 사람들도 고향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엘렌은 해맑은 얼굴로 말한다. “이젠 모두 털어버리고 완전한 미국인이 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처럼요.”
   그러나 뉴랜드는 알고 있다. 미국인, 게다가 뉴욕의 귀족이 되는 일은 ‘돌아온 탕아’ 엘렌에게 너무 어려운 도전임을. 아처는 그 모든 재산과 유럽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왜 이혼을 택하려 하는지 묻는다. 엘렌은 티 없이 맑은 미소로 대답한다. “자유를 얻잖아요.” 뉴랜드는 왠지 그녀가 말하는 자유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관능의 냄새를 풍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고고한 귀족가문의 규수들만을 상대했던 뉴랜드에게 엘렌은 숨길 수 없는 이국적 매혹으로 다가온 것이다. 엘렌이 원하는 자유는 뉴랜드가 즐겨보는 머나먼 나라 일본의 판화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었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방의 세계처럼 불가해한 판타지였다.

   아직 엘렌은 알지 못한다. 그토록 심플한 자유를 얻기 위해 그녀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정의롭고 낭만적이며 보기 드물게 여성친화적인 뉴랜드 아처는 그녀를 돕고 싶다. 그러나 그 또한 알지 못한다. 그에게 물들어 있는 뉴욕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오랜 시간 그들만의 생활방식이 만들어낸 암묵적 규약이며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을 넘어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육체에 각인된 것임을. 아비투스는 개인이 그 메카니즘을 인식하지 못할 때 더욱 선명하게 그 효과를 드러낸다. 우리가 매순간 부딪히는 아주 사소한 소비의 선택조차도 우리를 조각해온 집단적 아비투스의 보이지 않는 지휘 아래 있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말한다.

   
  개인과 집단을 둘러싸고 있는 집, 가구, 그림, 책, 자동차, 술, 담배, 향수, 옷 등과 같은 특성들 전체와 스포츠, 게임, 문화적 여가활동 등을 통해 탁월함을 드러내는 실천 속에서 체계성을 찾을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모든 실천의 발생원리이자 통일원리인 아비투스의 총괄적인 통일성 안에 있기 때문이다.
- 부르디외, 최종철 역, <구별짓기 上>, 새물결, 2005, 316쪽.
 
   

   엘렌이 그토록 꿈꾸는 자유는 밍고트 가와 아처 가를 비롯한 뉴욕 상류층의 가치를 위협하는 치명적인 이물질이었던 것이다. 피범벅이 된 육체를 심상하게 노출시키는 갱스터 무비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마틴 스콜세지 감독조차 <순수의 시대>가 얼마나 무서운 영화인지를 스스로 인정했다. 흔적 없이 존재를 잠식하는 귀족들의 우아한 폭력을 그려낸 <순수의 시대>. 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가 그가 감독한 어떤 영화보다 ‘잔인한 영화’라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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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7-30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비투스, 문화적 구별짖기, 특히 미국은 상류계층의 문화란게 따로 있어서 계층간의 구별짖기가 엄격하다고 합니다. 순수의 시대가 그런 아비투스를 그린 영화군요.

블레이드러너 2009-08-01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잔인한 영화"이고, 잔인한 삶이지만, 우리는 그 삶을 무의식적으로 욕망한다는 것. 저는 그래요^^* 어떻게 하면 그 욕망의 사슬을 끊을 수 있을까요ㅠㅠ

sotkfkd 2009-09-13 0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생각한다. '작태'라고 못을 박을 수 있는 맨 처음의 경계선은 무엇일까?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③

 

3.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2>


   <순수의 시대>가 묘사하는 19세기 말 뉴욕의 상류층. 그들은 패션의 중심지 파리의 유행을 원시사회의 토템만큼이나 숭배하고, 유럽의 파티 매너나 테이블 세팅을 신앙처럼 떠받든다. 그들은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탈출했으면서도 ‘앙시앙 레짐’ 시기의 유럽보다 오히려 악랄한, 원본보다 더 징글징글한 복제품 귀족사회를 구축하는 아이러니의 주인공들이다. 뉴랜드 아처 또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취향의 공동체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파리 귀족의 저택을 본뜬 건물 외관과 인테리어를 숭배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 시대의 가구와 나폴레옹의 뛰를리 궁전의 유품에 둘러싸여 여왕처럼 군림하는 삶을 동경했다.  

   메이와 뉴랜드가 속한 귀족사회는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오페라를 보러 간다는 ‘행위’ 자체에 혁혁한 의미를 부여한다. 막상 오페라 관람 중에는 남들 ‘뒷담화’나 일삼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페라의 내용이 아니라 ‘예술을 즐기는 척’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예술을 즐길 줄 모른다는 것은 이미 뉴욕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 중 가장 견문이 넓고 학식이 풍부하며 편견에 물들지 않은 아처마저도 ‘개인’이 아니라 ‘상류층’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는 그들의 집단적 아비투스를 대변한다.

   
  뉴랜드 아처에게 ‘취향’에 대한 모욕보다 끔찍한 것은 거의 없었다. 취향은 ‘예법’조차도 거기 비하면 단지 외적인 표현이며 부차적인 지위에 불과할 정도로 손에 닿지 않을 신성한 가치였다. 올렌스카 부인의 창백하고 진지한 얼굴은 지금 상황이나 그녀의 불행한 처지와 잘 맞아떨어져 그의 상상력에 호소했다. 그러나 터커(17~18세기 여성들이 걸친, 목에 걸어 가슴에서 합친 마직, 모슬린 따위의 천)도 없는 드레스가 야윈 어깨에서 흘러내리자 그는 충격과 함께 곤혹감을 느꼈다. 메이 웰랜드가 이렇게 취향의 명령에 무신경한 젊은 여자의 영향권에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불쾌해졌다.
-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3쪽.
 
   

   뉴랜드에게 그가 오랫동안 갈고닦아온 ‘취향’은 신성불가침의 소중한 가치였다. 최신 유행과 귀족적 취향에는 전혀 무관심한 엘렌 올렌스카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뉴랜드 아처를 당혹스럽게 한다. 그는 예법과 매너를 비롯한 공동체의 암묵적 규약을 일탈하는 엘렌을 이성적으로는 거부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남다름’에 이끌린다. 당시 귀족들의 파티에서는 여자가 남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엘렌은 따분한 파티에서 유일하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뉴랜드에게 당당하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곁눈질로 흘겨보는 귀족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 그러나 그녀가 꿈꾸는 자유의 불온한 매력이 뉴랜드를 사로잡기 시작한다. 뉴랜드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중 파티 장소에 메이가 도착하자 어서 빨리 메이에게 가보라고 속삭이던 엘렌. 그러나 메이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환영받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이렇게 말한다. “그럼 나랑 조금만 더 있어요.” 올렌스카 부인이 아주 작게 속삭이며 깃털 달린 검은 부채로 그의 무릎을 가볍게 친다. 이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뉴랜드는 뜨거운 애무를 받은 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그들은 엘렌을 따돌리기 위해 그 어떤 ‘드러나는’ 사전 모의도 하지 않는다. 그들의 귀족적 아비투스는 이미 무의식에까지 각인되어 있기에 애써 서로의 의견을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일부러 지휘하거나 계획하지 않아도,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사불란하게 한 여인을 냉대하고 해부하고 힐난하고 배제한다. 그들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부드러운 선율을 타고 우아하게 왈츠를 추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착하게 엘렌의 ‘부적절한’ 행동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사람이 붐비는 시간대에 줄리어스 보퍼트와 함께 5번가를 활보하다니, 엘렌이 실수했어.” 그들에게는 이혼하고 싶은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엘렌의 자유 자체가 불경스러운 것이었다. 엘렌의 친척들은 엘렌이 살고 있는 동네가 ‘글쟁이’들이 모여 사는 ‘보헤미안’의 냄새를 풍긴다며 그녀의 거처까지 옮기라고 종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타자의 침입을 경계한다. 뉴랜드의 약혼자 메이는 이 순수의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마스코트이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엘렌 추방 작전’의 숨은 선봉장이다. 메이가 태어나고 자라 오직 그것만이 세계이자 우주 전체라고 믿는 귀족들의 커뮤니티는 메이에게 있어 신성불가침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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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고양이 2009-07-29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떻게 보면 메이 역시 순수한 거겠죠. 자신이 속한 작은 공간이 세계의 전부고, 그걸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캐릭터니까, 어떤 의미로의 순수함이 또 있는 것 같아요. 다만 그 방법이 틀렸을 뿐.

시나몬 2009-07-30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편해도 저런 스타일 한 번 입어보고 싶다능. =ㅁ=

바이런 2009-07-30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의시대, 라는 제목이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건지 정말 몰랐어요. 저는 이 영화를 못봤고, 사실..스토리같은것도 들어본적이 없었거든요;;; 흠, 정말이지 영화가 보고싶어지네요.

darcy 2009-07-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순수의 시대 아직 못봤는데, 지금 글을 봐선 오만과 편견이 떠오르네요.

sotkfkd 2009-09-1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비투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②

 

2. 그들만의 리그 vs 초대받지 않은 손님 <1>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가장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유럽보다 더 유럽적인’ 귀족문화의 퍼레이드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재현한 1870년대 뉴욕 상류층은 지금의 뉴요커와 판이하게 다른 패션과 인테리어로 무장하고 있다. 1993년 아카데미 의상상을 수상한 영화의 명성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압도적이다. 이 영화에서는 빈틈없이 기획된 드레스와 분장, 소품과 인테리어 자체가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그들에게 옷은 단지 ‘날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다. 옷을 입고 머리를 만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은 걸릴 듯한 ‘그들만의’ 드레스 코드는 ‘과연 저 옷을 입고 화장실엔 어떻게 갈까’라는 관객의 엉뚱한 상상을 부추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토록 ‘화려하지만 매우 비실용적인’ 드레스로 온몸을 꽁꽁 결박한 귀족들이 ‘낯선 이방인’ 엘렌 올렌스카 부인(미셸 파이퍼)을 험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밍고트 집안사람들이 저럴 줄은 몰랐는데?”
   “더군다나 메이 웰렌드 양 옆에 앉히다니 이상하군요.”
   “저 여자의 인생 자체가 이상하지.”

   이 추악한 험담이 오가는 곳은 다름 아닌 ‘귀족적인’ 공간의 대명사, 뉴욕의 오페라하우스다. 엘렌은 의상부터 남다르다. 피부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다른 이들의 의상에 비해, 엘렌의 의상은 시원하게 목과 가슴골이 드러나는 도발적인 드레스다. 엘렌의 사촌 메이 웰렌드(위노나 라이더)의 약혼자인 뉴랜드 아처(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엘렌에게 인사하기 위해 다가갔을 때, 엘렌은 여름 햇살처럼 뜨겁게 작렬하는 고운 미소로 아무 거리낌 없이 손을 내민다. 카메라는 그녀만의 ‘다름’을 유난히 강조하듯, 장갑을 끼지 않은 그녀의 뽀얀 ‘맨손’을 클로즈업한다. 

   누구를 만나든 어느 장소에 가든 눈이 시리도록 하얀 장갑을 착용하는 것을 잊지 않는 다른 귀족들과 달리, 엘렌의 손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진다. 원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는 커다란 반지를 두 개씩 착용하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빛깔의 장갑을 착용하기도 한다. 약혼자의 키스를 받을 때조차 단정하게 새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메이와 달리, 엘렌은 누구에게나 거리낌 없이 맨손을 내민다. 그녀가 뉴랜드 아처에게 건네는 첫마디부터가 심상치 않다. 엘렌은 뉴랜드의 손을 반갑게 맞잡으며 심상하게 옛 추억을 이야기한다. “기억나요? 우리 반바지에 속바지 차림으로 뛰놀았잖아요.” 뉴랜드가 얼굴을 붉히자 그녀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고 편안하게 속삭인다. “문 뒤에서 내게 뽀뽀한 거 기억나요?”
   엘렌과 뉴랜드는 어린 시절 추억을 공유한 친구다. 유럽에서의 결혼 생활에 실패한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와 따스한 관심과 친절 속에 살아가고 싶어 한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유분방한 삶을 익힌 그녀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갑부 남편의 냉대와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을 결심한 것이다. 엘렌은 고향으로 돌아오면 모두가 그녀를 반겨줄 줄 알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엘렌의 귀환이 아니라 ‘엘렌의 스캔들’에만 관심이 있다. 지난 50여 년간 일어났던 상류사회의 스캔들을 일일이 메모하여 늘 지니고 다니는 실러튼 잭슨은 현대사회의 파파라치를 방불케 하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엘렌의 ‘불행한 결혼 생활’을 낱낱이 캐내려 한다. 엘렌이 남편에게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 비서와 엘렌이 동거했다는 괴소문 또한 이미 파다하게 퍼진 상태다.
   메이가 속한 밍고트 가문과 뉴랜드의 아처 가문은 뉴욕의 두 명문가로서 두 사람의 결혼은 전통과 권력의 환상적인 결합이었다. 그들은 엘렌이 돌아오자마자, 그들의 잣대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여성의 자발적인 이혼’을 결심한 엘렌을 교묘하게 따돌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엘렌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들만의 잣대’로 감시하고 관리하려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엘렌은 변호사인 뉴랜드 아처에게 자신의 이혼을 위한 법적 절차를 자문한다. 그러나 아처가의 사람들은 뉴랜드에게 ‘법적 어드바이스’가 아니라 ‘이혼을 금지하는 어드바이스’를 해주길 바란다. 뉴랜드의 가족들은 엘렌의 옷차림은 물론 이름까지 트집을 잡는다.

   “엘렌이 오후엔 어떤 모자를 쓸지 궁금하네요.”
   “오페라에 입고 온 드레스는 형편없던데.”
   “불쌍한 엘렌. 그 애의 성장과정을 알면 이해가 돼.”
   “첫 연회에 검정 드레스를 입고 온 여자에게 뭘 바래?”
   “백작 부인이면서 왜 엘렌 같은 이름을 고수할까요. 나라면 일레인으로 바꿨을 텐데.”

   도대체 ‘엘렌’과 ‘일레인’ 사이에 무슨 엄청난 아우라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아처의 여동생은 어이없는 성명학적 편견까지 과시한다. 우아한 식탁 매너를 고수하면서 마치 복화술처럼 조용히 이루어지는 이 험악한 대화에 뉴랜드 아처는 소름이 끼친다. “왜 그녀는 돋보이면 안 되죠?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고 얼굴도 못 들고 다니나요?” 그녀가 비서와 동거했다는 추문을 믿는 친척에게 아처는 항변한다. “그게 어때서요? 그녀도 새 삶을 살 권리가 있어요. 왜 여자만 매장당하죠? 창녀와 재미 보는 남편은요?” 

   가족과 친척들과 옛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향의 향수를 되살리고자 하는 엘렌의 꿈은 시작부터 무참하게 박살난다. 그리고 이 현대판 샤리바리(charivari,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의 현장에서 이미 엘렌은 ‘그들만의 리그’의 안정과 평화를 위협하는 이질적 존재로 낙인찍힌다. 격식이나 유행에 얽매이지 않는 엘렌의 취향은 밍고트 가와 아처 가의 ‘취향의 공동체’를 위협하는 감각의 바이러스였다. 부르디외의 말처럼, ‘취향’은 단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이 아니라 ‘계급’의 지표로 기능하는 것이다. 엘렌의 존재가 문제적인 이유는 그녀가 귀족의 ‘혈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적 ‘취향’과 ‘아비투스’를 실현하지 않기에 그들만의 리그에 결코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들의 우아한 미소와 으리으리한 의상은, 빈틈없는 테이블 세팅과 고상한 파티 매너는,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과시’하여 이방인의 접근을 원천봉쇄하는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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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아이 2009-07-28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오늘 집에 가자마자 영화 봐야할듯,,,ㅋ
영화보고 다시 읽으면 다른색깔로 다가올 글
너무 좋네요 ^^

고무장갑 2009-07-28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갈하다고만 생각하던 흰 장갑의 이미지가 저런 식으로 보이니까 상당히 섬찟하네요. 경계의 상징이라니..우우. ㅠ

파란볼펜똥 2009-07-28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번에는 꽤 사회비판적인 내용이네요! *_*

미셸파이어볼 2009-07-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헉. 미셸 파이어 사진 꼭 그림 같네요. 어디서 저런 꼭 맞는 사진을 구하셨을까.

sotkfkd 2009-09-13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획되어진 틀로 인해 우리는 숨쉬는 시간의 상당 부분을 허깨비에게 빼앗기면서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①

 

1. ‘구별짓기’의 디스토피아: 짝퉁에도 등급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던 창녀가 우아한 드레스를 떨쳐입고 오페라를 감상하며 눈물을 흘릴 때(<프리티 우먼>), 감옥의 죄수들이 <피가로의 결혼>을 들으며 난생처음 예술의 감동을 만끽할 때(<쇼생크 탈출>), 우리는 왜 달콤한 해방감을 느낄까. 영국 국무총리가 미국 대통령의 야코를 납작하게 만든 후 총리 관사를 휘저으며 막춤을 추고(<러브 액츄얼리>), 세계 최고의 여배우가 평범한 서점 직원과 사랑에 빠져 눈물 흘릴 때(<노팅 힐>), 왜 우리는 이 세상에 영화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될까. 영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런 파격적인 ‘계급 배반’의 환상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실현되는 행운을 누리기 어렵지 않을까. 자신이 속한 계급의 도식적 이미지를 일탈하는 캐릭터에게 우리가 매혹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지나치게 촘촘한 ‘문화적 구별짓기’의 그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닌지.  



   이제 단지 경제적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는 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일까. 현대인은 점점 정교한 잣대로 개인의 사회문화적 위치를 식별하고 서열화한다. 통장 잔고나 부동산 소유 여부를 넘어 ‘소비와 취향’의 잣대로 개인의 사회적 좌표를 확인하는 풍속. 그것은 마치 대단한 상품에 어울리는 대단한 사람들이 따로 존재하는 듯한 거대한 환상을 만들어낸다.

   
  백화점에 옷을 사러 갈 땐 동창회 갈 때만큼이나 공들여 화장을 하고 제대로 차려입고 나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특히나 이 백화점은 분위기가 유난하다. (……) 똑같이 맨얼굴로 서 있어도 이 동네 사람과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의 피부는 때깔에서 차이가 난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을 가려낼 수 있다. 그게 걸치고 있는 입성의 차이에서 나오는 느낌만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 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정미경, <내 아들의 연인>, [작가세계] 2006 여름, 228쪽.   
 
   

   맨얼굴의 피부와 표정만으로도 ‘이 동네 사람’과 외지인을 구별할 수 있다는 믿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나와도 이 동네 사람들과 외부인을 가려낼 수 있다는 확신. 강남 모 백화점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이 화려하지만 폐쇄적인 이미지, 이 동네 사람이 아니라면 왠지 이방인처럼 서걱거리는 분위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보이지 않는 문화적 장벽을, 작가는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이라 이름 붙인다.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자본의 위력이 개인의 삶 깊숙이 침투한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을 ‘계급의 논리’로 판가름한다. 이러한 무한 소비사회의 단면을 흥미롭게 보여주는 인터넷 문화 중 하나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이다.
   ‘코디가 안티야?’라는 말이 유행이 되는 시대. 스타들은 옷 한 번 잘못 입고 나왔다가는 너무 쉽게 ‘굴욕’의 주인공으로 추락하고 만다. 네티즌의 매서운 눈썰미로 매일매일 업데이트 되는 ‘같은 옷, 다른 느낌’ 코너는 볼 때마다 탄성을 자아낸다. 따로따로 서 있으면 저마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스타들이 ‘같은 옷, 다른 느낌’의 올가미에 걸리면 여지없이 ‘승자 vs 패자’의 이분법에 사로잡히고 만다.
   네티즌들은 스타들이 우연히 똑같이 입은 옷의 브랜드는 물론 제조년월과 가격까지 빠삭하게 추적해낸다. 평소에 각자의 개성으로 빛나던 두 스타들의 아름다움이 ‘같은 옷’이라는 ‘동일한 잣대’로 비교되는 순간 승패는 잔인하게 판가름 난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들을 ‘같은 옷’에 구겨 넣고 ‘이 옷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네가 아냐!’라고 선고하고 싶은 공격적인 욕망의 기원은 무엇인가. 아주 작은 차이라도 찾아내서 서열에 따라 줄 세우고 싶은 이 욕망의 뿌리는 무엇인가. ‘같은 옷 다른 느낌’은 아무리 명품으로 도배해도 결코 따라올 수 없는 ‘감각의 차이’가 있다는 소비사회의 무의식을 뼈아프게 형상화한다. 옷차림을 통해 그의 성장 환경 뿐 아니라 뿌리 깊은 무의식까지 진단해낼 수 있다고 믿는 사회, 짝퉁 사이에도 엄연한 등급이 있어 ‘얼마나 명품을 완벽하게 재현하는가’를 기준으로 상품의 가격이 매겨지는 사회. 우리가 매순간 결정하는 소비의 품목들, 먹고 마시고 입고 듣고 보고 즐기는 모든 것들에서 ‘자본주의의 아비투스’를 진단하는 것, 그것이 사르트르 이후 프랑스 최대의 지성으로 격찬받았던 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시선이었다. 부르디외의 학문적 관심은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제조되는가’였다.    

   ‘내가 너보다 요만큼 낫다’는 것을 필사적으로 증명해보여야 간신히 체면이 유지될 수 있는 삶, 레이스와 찻잔과 찻숟가락 하나하나에서도 자신의 귀족적 정체성을 일일이 박아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계. 이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투를 생생하게 그려낸 영화 중 하나가 바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다. 격조 높은 고고함의 미장센으로 은폐된 처절한 구별짓기의 전장, 그곳은 1870년대 뉴욕이었다. <순수의 시대>는 우리가 매순간 뼈저리게 의식하지만 늘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매끄러운 순수를 가장해야 하는, ‘너와 나의 다름’에 대한 풍요로운 인류학적 보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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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료수 2009-07-2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홋. 새로운 연재 시작되나 보네요. 이야기 듣기 전에 순수의 시대부터 보고 와야 겠어요. ㅎㅎㅎ

astromilk 2009-07-2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별짓기라니, 정미경 님의 저 글과 너무나도 맞아떨어지네요. 설명이 쉬워서 좋아요, 언제나 여울 님, 화이팅!

빵하 2009-07-27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맛깔스런 글에 푹 빠져,, 그간 봤던 영화속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네요
순수의시대라,,, 외모지상주의 세상을 풍자할만한 영화인지 벌써 궁금해지는데요^^

블레이드러너 2009-07-2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로운 연재, 기대 만빵, 두근 두근 두근....

예인 2009-07-27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사물화에 대한 사례와 표현이 돋보입니다. 루카치의 미학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문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보기드물게 대성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나게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군요. 디테일한 부분에 좀도 신경을 쓰는 것이 필요한 듯 합니다. 철학으로 영화읽기를 하면 한결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신만의 영화읽기가 첨가될 수 있으면 좋겠지요. 니체적으로 말해서 자신의 취향을 살리는 것이 예술에서만큼은 중요한 듯 합니다. 다소 파시스트적일지라도 ^^ 아무튼 독서량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건필하세요.

예인 2009-07-2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문과를 나오셨군요. 실례가 될지 모르겠는데, 제가 시를 연재하고 있거든요. 6년여에걸쳐 시를 90여편 정도 창작했습니다. 아직 등단은 못했구요. 60 편 정도는 서정시 30편 정도는 현대시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혼자서 시를 쓰다 보니까, 내 시가 좋은지 좋지 않은지를 모르겠더라구요. 제 시에 대한 감평을 해 줄 수는 없는가요.

오렌지샤벳* 2009-07-2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별짓지 않는 삶, 가능할까요? ^^a

야호 2009-07-28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 철학과 교수님의 촌철살인 강연을 듣고 있는 듯한. 멋져요! ^^

바이런 2009-07-30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부르디외+_+ 롤랑바르트편도 정말 잘 읽었는데, 이번편도 정말 기대됩니다! 시네필 다이어리 완전 팬이에요ㅎㅎ 여울님 만쉐이~

sotkfkd 2009-09-12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구별 짓기', 우리들이 스스로 마련해 놓은 무덤이라는 생각이 늘 들곤 합니다.
 

 


영화 〈색, 계〉와 롤랑 바르트 ⑧

 

5. 바르트의 풍크툼 : 어머니, 단 하나의 여자


   
  "나의 역사적 위치는…… 전위의 후위에 있는 것이다. 전위가 되려면 무엇이 죽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후위가 되려면 그것을 아직도 사랑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 바르트, 「『텔켈』 지와의 인터뷰」, 1998 ; 그레이엄 앨런, 송은영 역, 『문제적 텍스트 롤랑 바르트』, 앨피, 2006, 62쪽.
 
   


   『카메라 루시다』를 낳게 한 것은 바르트의 어머니였다. 엄밀히 말해,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그 어떤 사진도 그가 사랑했던 어머니 그대로를 재현할 수 없음에 절망했다. 남아 있는 사진들은 그저 그녀의 부재를 증명하는 덧없는 알리바이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의 다섯 살 어린아이 시절 사진을 발견한다. 그는 한 번도 실제 목격한 적 없는 다섯 살 어린이의 사진 속에서 그가 생각하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는 그 사진이 이끄는 사랑과 슬픔의 에너지로 사진에 대한 아름다운 철학적 에세이 『카메라 루시다』를 완성했다. 『카메라 루시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바르트의 유일한 여자, 어머니의 죽음에 바치는, 보낼 수 없는 편지였던 것 같다. 이 책이 품고 있는 최고의 아이러니는 그가 어머니의 사진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위해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적 사진을 싣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르트는 이 책에 어머니의 사진이 절대로 실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 사진을 재연할 수 없다. 그 사진은 오직 나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에게 그 사진은 자신과는 무관한 사진, ‘일상적인 것’을 표현한 수천 장의 사진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 사진은 결코 가시적인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실증적인 의미의 객관성을 성립시키지도 못한다. 기껏해야 이 사진은 시대, 의상, 촬영 효과 같은 스투디움 때문에 흥미를 끌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이 사진에서 아무런 상처도 보지 못할 것이다.
-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247쪽
 
   

   바르트에게 어머니의 사진은 어떤 대상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어떤 존재로도 대체될 수 없다. 그러나 바르트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사진을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보편성 혹은 객관성의 잣대로 사진을 재단하고야 말 것이다. 바르트는 이 피상적인 공감의 놀이를 거부한다. 어설프게 이해받느니 철저히 오해받는 쪽을 택한 것일까. 그는 어머니의 사진이 ‘재현될 수 없다’는 점, 논리적으로 소통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어머니의 사진을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존재를 할퀴는 풍크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였던 사진을 발견했을 때, 바르트는 그 사진이 그의 전 존재를 규정하는 치명적인 사건이 될 것임을 예감한다. 그에게 ‘사진’을 통해 세계와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한 불멸의 역작 『카메라 루시다』를 쓸 수 있게 한 것은, 다른 경험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어머니의 죽음이 초래한 삶의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었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발견했을 때의 아픔을, 그 풍크툼이 그려낸 영혼의 흉터를, 바르트는 이렇게 그려낸다. 돌아가시기 직전, 바르트의 노모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 아들 바르트의 세세한 보살핌을 받는 한없이 작고 연약한 존재였다고 한다. 

   
  결국 나는 오랫동안 나의 강렬한 내적 법규였던 어머니를 나의 딸로 체험했다. (……)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는 내가, 바로 어머니의 병을 통해 나의 어머니를 낳은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 위의 책, 246쪽.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찾아내려고 시작했던 사진 찾기의 경험이 결국 상실을 더욱 철저하게 재확인하는 경험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픔은, 마치 ‘내 어머니를 내가 낳은 듯한’ 새로운 희열로 전이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사진을 통해 더욱 생생하게 재확인하지만, 사진을 통해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그 사람을 생생한 홀로그램처럼 되살려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가 사진에서 그들을 다시 발견하고 다시 필연적으로 상실의 경험을 반복하는 패턴. 이것이야말로 ‘풍크툼’의 순간이다. 단지 ‘이 사진 참 잘 나왔네’라고 의례적으로 발언하는 ‘스투디움’(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상징)이 아니라, ‘사진 속에 있는 나’와 ‘사진 바깥에 있는 나’가 더 이상 ‘둘’이 아니게 만들어버리는 존재의 치명적인 관통상. 그것이 바르트가 이야기한 풍크툼이다. 풍크툼은 대상에 대한 완벽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가녀린 이해와 사랑이 아닐까. 완전한 상실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불완전한 사랑의 눈부신 아름다움.
   타인에게는 별 의미 없는 데면데면한 가족사진이나 군대 간 애인의 사진이, 그의 사진이나마 닳고 닳아 찢어질 때까지 만져보며 그의 부재를 확인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뼈아픈 풍크툼이 된다. 똑같은 사진이 누군가에게는, 아무와도 교집합을 찾을 수 없는 절실한 풍크툼이 될 수도 있고, 누구나 심상하게 지나쳐버리는 사진관 전시용 가족사진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똑같은 사진이 스투디움이자 풍크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경험했다. 그들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엄청난 사건을 몰랐을 때는 영화 초입의 판문점 사진이 그저 일반적인 ‘스투디움’에 불과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난 후, 그 슬픈 사진은 우리의 가슴에 저마다 판문점보다 더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버린, 뜨거운 불화살이 되었다. 

   <색, 계>는 절대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암살 대상)을 사랑해버린 여자가 자신의 죽음과 맞바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참혹한 죽음 직전에 비로소 아주 잠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투명한 속살을 드러내 보인 세계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다. 그 세계의 신비를 작가 장아이링은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현재 전쟁 국면이 일본에게 점점 불리해져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이 향후 어떻게 될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지기(知己)를 한 명 얻었으니 죽어도 여한은 없었다. 그는 그녀의 그림자가 평생 영원토록 자신의 곁에 머무르며 자신을 위로할 것임을 알았다. 그녀가 자신을 원망해도 상관없었고, 마지막 순간 자신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얼마만큼 강렬했었는지도 상관없었다. 그냥 감정이 있었다는 것으로 족했다. 그들은 원시시대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였고, 매국노와 매국노를 위해 결국 앞잡이가 된 관계였으며, 가장 마지막에 서로를 점유한 관계였다. 그녀는 살아서는 그의 사람이었고 죽어서는 그의 귀신이 되었다.
- 장 아이링, 김은신 역, 『색, 계』, 랜덤하우스, 2008, 67쪽.
 
   

   이 선생에게는 이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함과 동시에 ‘죽은 그녀를 여전히 사랑해야 할’ 형벌 같은 운명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쩌면 지독히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지음(知音)의 벗을 만났으므로. 이 세상 누구도 믿지 못했던 그가 믿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적어도 죽기 전에 만났으므로.

   무엇이 죽어버린 것인지 언제나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 이미 죽어간 것을 잊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 죽어 있는 것과 살아있는 것의 칼날 같은 경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야 하는 사람. 그가 롤랑 바르트였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사랑하지만 죽어버린 것들, 아니 죽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것들을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삶과 죽음의 경계도, 자아와 타자의 경계도, 영화와 관객의 거리도, 미디어와 인간의 거리도, 그저 넘을 수 없는 장벽만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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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9-07-24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앞에 남긴 댓글이 무색해져버렸습니다.^^;;

영계백숙 2009-07-27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색, 계> 시리즈는 끝나는 건가 봐욤? 덕분에 즐겁게 잘 읽었습니다. 꾸벅!

동네노는형들 2009-07-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늘 저녁에는 일찍 퇴근해서 <색, 계>보면서 <양념 통닭> 먹어야겠드아..ㅋ

둥이 2009-07-27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너무 젬있게 봤구^^
여울님을 통해 (색계를 통해?) 롤랑 바르트라는 철학자를
너무 편하게 봤어여^^

sotkfkd 2009-09-1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랑바르트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우리는 일말의 스투디움을 바탕으로 하여 각 개인 만의 풍크툼들 들쳐메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서로 의미를 해석하고 등을 지기도 하고 위안도 받으면서.
새삼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생의 여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여러 갈래로 가닥을 칠 수 없이 확대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