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⑨

 

9. 나는 두렵다, 진짜 나 자신을, 만나게 될까 봐……   

   

   연민은 ‘고통받고 있는 타자’와 ‘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연민은 고통받는 타자를 바라볼 때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매우 편안한 안전장치다. 연민은 정치적으로 수동적인 혹은 보수적인 자신의 현상태를 은폐하며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거기에 있다’는 괴리감을 심화시킨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을 공고화한다. 나의 행복이 너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의 가능성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심리, 거기서 연민이 탄생한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154쪽.

 
   

    램보도 스카일라도 윌에 대한 연민을 멈추지 않는 한 그와 진정으로 대화할 수 없다. 윌은 스카일라의 사랑을 연민으로 오해하고, 그녀의 사랑이 지금은 진실일지라도, 언젠가는 연민으로 변질될까 봐 두려워한다. 램보는 윌의 천재적 두뇌가 세상에 유익하게 쓰여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숀의 입장은 다르다. 숀은 스승이 제자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조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안다. 지금 윌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의 함정을 뛰어넘어 타인과 당당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지식을 ‘어디에 쓸 것인가’보다 ‘어떻게 쓸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램보는 인정하지 않는다. 

   숀 : 이봐, 내 말 잘 들어. 윌이 왜 현실을 회피하고 왜 아무도 못 믿을까?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야.
   램보 : 젠장! 프로이드 타령 그만 해! 
   숀 : 그 애가 어떤 앤 줄 아나? 사람들이 자길 떠나기 전에 먼저 떠나게 만들고 있어. 바로 방어 심리라구, 알아? 그 때문에 20년이나 외롭게 산 애야. 지금 자네가 그 앨 몰아치면 또 그 악순환이 반복돼.

    램보는 ‘빨리, 더 늦기 전에,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숀은 ‘아직 윌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길을 찾도록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램보는 윌이 인생에서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지만, 숀은 윌이 진정한 사랑을 찾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제 숀은 더 이상 에둘러가지 않고, 윌의 상처의 뿌리에 다다를 직선주로를 찾는다. 

 

   숀 : 세상에 너 혼자 있는 것 같니?
   윌 : 네? 
   숀 : 영혼의 짝이 있어? 
   윌 : 무슨 뜻이죠? 
   숀 :널 북돋아주는 사람 말야. 
   윌 : (약점을 들켜 뜨끔한 듯, 그러나 별로 망설이지 않는 척) 처키요. 
   숀 : 처키는 널 위해 목숨도 내놓을 가족 같은 애지. 그런데 영혼의 짝이란 네 마음을 열고 영감을 주는 존재야. 
   윌 : (당황한 눈치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런 친군 많아요. 
   숀 :이름을 대봐. 
   윌 : 셰익스피어, 니체, 프로스트, 칸트, 교황님, 로크 등! 
   숀 : 모두 죽은 사람들이잖아.  
   윌 : 제겐 아니에요. 
   숀 : 하지만 대화를 할 수 없잖니. 서로 교감할 수가 없어. 
   윌 : (시니컬한 표정으로) 뼈다귀만 남아 있겠죠. 
   숀 : 내 말이 바로 그거야. 네가 먼저 다가서지 않으면 평생 그런 친구는 사귀지 못해. (……) 넌 무엇에 열정을 갖고 있지? 원하는 게 뭐야? 평생 벽돌공으로 산 사람들도 자식만큼은 너와 같은 기회를 얻길 바라고 있어. 
   윌 : 제가 원한 건 아니에요. 
   숀 : 그래, 타고났지. 그러니까 원치 않았다는 말로 빠져나갈 생각 마. 
   윌 : 빠져나가다니요? 게다가 벽돌공이 어때서요? 딴 사람의 집을 짓는 일은 고귀한 거라고요. 
   숀 : 알아, 우리 아버지도 벽돌공이었어. 날 교육시키려고 허리가 끊어져라 일하셨지. 
   윌 : 바로 그거예요. 아주 고귀한 직업이라고요. 정비공은 또 어때요? 덕분에 사람들이 출근하잖아요. 
   숀 : 그래. 모든 직업은 귀해. 40분씩 전철을 타고 가서 대학의 쓰레기통을 비우는 청소부 일도 그렇지. 아마 그래서 네가 청소부를 택했을 거다.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보마. 청소부라면 어디서든 할 수 있었어. 근데 왜 하필 세계 최고의 MIT에서 일하기로 했지? (비밀을 들켜 당황한 윌, 그런 윌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숀.) 왜 밤에 칠판 앞에서 어슬렁대며 세계에서 몇 명만이 풀 수 있는 문제를 푼 거야?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아니 모른 척하는 윌. 그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 앞에 설 때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앞에 설 때마다, 딴청을 부리거나 위악의 제스쳐를 취한다. 그러나 아무리 숨기려 해도, 진정 원하는 것은 내 의지의 검열을 넘어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야?”라는 단순명쾌한 질문 앞에서 윌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댄다.
    그는 셰익스피어, 니체, 프로스트, 칸트, 교황님, 로크 등등 위대한 고인들과 멋들어진 가상 인터뷰를 나누지만 그의 곁에서 살아 숨 쉬는 여자 친구에게는 솔직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죽은 멘토들에게는 밤마다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살아 있는 스승 숀과 램보에게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윌. 정말 원하는 게 뭐냐고 다시 한 번 묻는 숀에게, 윌은 목동이 되어 양이나 치고 싶다며 느물거린다.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다보니 진짜 나의 모습이 원래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한편 스카일라는 캘리포니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윌과 통화를 한다. 윌에게 그토록 박대를 당했건만 스카일라의 사랑은 오히려 깊어진 듯하다. 아직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윌과 함께 떠나고 싶어 한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윌에게 손을 내민다. 긴 말은 필요 없다. “윌, 사랑해…….”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널 사랑해, 혹은 네가 날 믿지 않아도 난 널 믿어,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스카일라의 속삭임은 그렇게 아프게 가슴을 할퀸다. 윌은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아직도 그녀에게로 완전히 스며들 용기가 없다. 스카일라는 떠나고 윌은 다시 혼자 남는다. 그러나 윌은 정말 혼자였을까?


 

   처키 :  교수님들과의 일은 어때? 다음 주면 스물한 살이 돼. 일자리 같은 거 마련해주신대?
   윌 : 그래, 앞으로 50년간 책상머리에 붙어 있으래.
   처키 : 그래도 돈은 많이 벌겠다.
   윌 : 실험실 생쥐 꼴이 되는 거지.
   처키 :  그래도 여기서 탈출할 순 있잖아.
   윌 :왜 탈출해? 난 평생 여기서 살 작정이야. 너하고 이웃에 살면서. 애도 낳고 리틀 야구장에도 함께 가고 말이야. 
   처키 :  넌 내 친구니까, 이런 말 한다고 오해하지 마. 20년 후에도 여기 살면서 노무자로 일하며 우리 집에 와서 비디오나 때리고 있으면 널 죽여버릴 거야. 장난 아냐. 정말 없애버릴 거야. 
   윌 : 젠장, 무슨 소리야? 
   처키 : 넌 우리한테 없는 재능을 가졌어. 
   윌 : 젠장, 다들 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난리야? 난 이 일이 좋다고! 
   처키 : 아냐, 이 빌어먹을 자식! 널 위해서 그러는 게 아냐. 날 위해서라고! 나이 50이 돼도 난 육체노동을 하고 있을 거야. 그건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넌 지금 당첨된 복권을 깔고 앉아 너무 겁이 많아 돈으로 못 바꾸는 꼴이라고. 병신 같은 짓이지. 네게 있는 재주를 가질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거야. 여기 친구들도 마찬가지야. 네가 여기서 20년이나 곯는 건 우리에 대한 모욕이야. (……) 매일 아침 너희 집에 들러 널 깨우고 같이 외출해서 한껏 취하며 웃는 것도 좋아. 하지만 내 생애 최고의 날이 언젠지 알아? 내가 너희 집 골목에 들어서서 네 집 문을 두드려도 네가 없을 때야. 안녕이란 말도, 작별의 말도 없이. 네가 떠났을 때라고. 적어도 그 순간만은 행복할 거야.

 

   이상하다. 두렵고 무섭다. 평생 나와 함께 술 마시고 마음껏 취하며 ‘세상 뒷담화’를 나누고 육두문자로 난무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몸싸움도 하고 음담패설을 하며 함께 늙어갈 것만 같던 배꼽 친구 처키. 내 친구 처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나보다 날 더 잘 아는 사람이, 너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는데. 예고도 인사도 없이 나와 헤어지는 것이 꿈이라니, 그게 너의 우정이라니.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었을 것 같은 구원, 혹은 희망이라는 단어가 늘 ‘함께 망가지던’ 친구 처키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윌의 눈빛은 깊게 흔들린다. MIT 교수 램보와 최고의 정신과 의사 숀과 매력적인 하버드생 스카일라의 삼중협공에도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던 윌의 마음의 문이, 드디어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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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2009-08-2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밴 에플렉의 저 대사, 정말 멋졌지요...저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이 영화에 나왔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명대사, 캬...쏘주를 부르는. ㅋㅎㅎ

mr.black 2009-08-21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윌의 주변에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 많군요. 오늘은 나도 저녁에 나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겠네요. ^^

sotkfkd 2009-09-13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민은 고통받고 있는 타자와 아직 멀쩡한 자신을 가르는 분계선이다.

우리 모두에게 각각 처키 같은 친구가 있기를!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⑧

 

8.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응시 

내 귀는 네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 어찌 네가 편할 것인가.
그리고 내게
네 마음밖에 그 무엇이 들리겠는가.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문학과지성사, 1994, 109쪽.

 
   

   사랑하면, 굳이 청진기를 갖다 대지 않아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리고, 사랑하면, 굳이 녹음기를 틀지 않아도 그의 목소리를 재생할 수 있다. 스카일라의 귀도 윌의 마음 안에 있다. 늘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일삼는 윌의 표정 뒤에 숨은 두려움을, 그녀는 듣는다. 윌도 편하지 않다. 그녀의 귀가 내 마음에 자리했으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에게 낱낱이 들키게 되어 있다. 그토록 감추고 또 감췄건만, 그녀는 내 두려움을 듣기 시작했다. 이제는 함께, 그 두려움의 터널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처음으로 그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한다.  

   스카일라 : 뭐가 그렇게 두려워?
   윌 : 뭐가 두렵냐고?
   스카일라 : 두려워하지 않는 게 있기나 해? 아무도 도전하지 않는 안전한 세계에 살면서 자신이 변하게 될까 봐 아무것도 못하잖아!
   윌 : 내 세계가 어떤지 뭘 안다고 그래? 어차피 난 네게 출신 천한 장난감일 뿐일 텐데. 결국엔 부모님들이 좋아하는 부자 놈과 결혼해서 친구들에게 재미 삼아 내 얘길 하게 되겠지.
   스카일라 : 왜 그런 잔인한 말을? 돈에 왜 그리 집착해? 내가 1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유산을 상속받았어.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가능하다면 그 돈을 돌려주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말야. 아버지와 하루라도 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말야. 두려워하는 건 너 자신이면서 괜히 내게 퍼붓지 마!
   윌 : 두려워 해? 대체 내가 뭘 두려워한단 거야?
   스카일라 : 날 두려워하잖아. 내가 사랑해주지 않을까 봐서! 하지만 나도 두려워! 하지만 노력은 해보고 싶어. 적어도 너에겐 정직하고 싶다고!
   윌 : 그럼 난 정직하지 못하단 거야?
   스카일라 : 형제가 열둘이란 거 정말이야? (당황한 윌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자 아직 그들이 나눈 사랑의 온기가 식지 않은 스카일라의 방을 나가버리려 한다) 어딜 가는 거야? 가지 마!
   윌 : 알고 싶은 게 뭐야? 형제가 없다는 거? 내가 빌어먹을 고아라는 거? 까놓고 얘기할까? 어렸을 때 양부가 담뱃불로 피부를 지졌어. 이건 뭔 줄 알아? 수술 자국이 아니라 놈이 칼로 찌른 상처야! 정말 이따위 것들을 알고 싶어?
   스카일라 : (그녀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다) 돕고 싶어서 그래!
   윌 : 돕겠다고?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내가 불쌍해 보여?
   스카일라 : 널 사랑하니까 함께 있고 싶을 뿐이야!
   윌 : 헛소리 집어 치워!
   스카일라 : 널 사랑해……. 날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고 말해줘. 그러면 다시는 전화도 안 하고 영원히 사라져줄게…….
   윌 : 난, 널, 사랑하지 않아!

 

   윌의 마음에 잠긴 스카일라의 귀가 조금만 더 예민했다면, 그녀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지금 윌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다. 윌 자신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 한,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다.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간 그녀의 귀가 조금만 더 밝았다면,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의에 찬 고백이 곧 처음 만나는 사랑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진 윌의 반어법이었음을 감지했을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토록 괴로워할 이유도 없을 테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몸에 난 끔찍한 상처를 보여주기 싫어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해야 하는 자신의 내면을, 자신도 모르게 폭로해버릴 필요도 없을 테니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난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저주를 내리듯 뇌까릴 필요가 없을 테니까. 그녀는 무방비상태에서 윌의 상처 속으로 돌진하다가 스스로 이마를 부딪쳐 치명상을 입고 만다.

   스카일라와 숀과의 만남으로 서광이 비쳤던 윌의 삶에는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윌을 세상 밖으로 꺼낸 램보 교수는 윌에게 멋진 일자리를 주선해주지만 윌은 그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린다. 맥닐 사의 면접 당일에 친구 처키를 대신 보낸 윌의 만행(!)을 알고 천하의 모범생 램보 교수는 분노한다. “네 시간엔 뭐를 하든 상관 않겠다. 하지만 내가 주선하는 자리에 나타나지 않으면 내 신용까지 영향받게 돼.” 윌은 또 다시 반항기 가득한 표정으로 건들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주선하지 마세요.” 램보는 당혹스럽다. 윌을 감옥에서 꺼내준 것도, 숀과 만나게 해준 것도, 모두 램보 자신인데, 램보를 바라보는 윌의 눈길은 경멸로 가득하다. 더 이상 윌의 눈빛을 참기 힘든 램보도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한다. “조금은 감사해야 하는 거 아냐?”
    윌은 감사는커녕 지겹다는 듯이 램보를 밀어붙인다. 윌이 누워서 떡 먹는 기분으로 쉽게 푼 문제를 램보가 풀지 못했다는 사실을 교활하게 이용한다. “감사요? 내게 이런 건 너무 쉬워서 장난 같다구요! 그걸 교수님이 못 풀다니 정말 안됐군요!” 윌은 자신이 푼 문제의 풀이과정을 적은 종이를 보란 듯이 태워버리고, 램보는 그동안 쌓아왔던 완벽한 젠틀맨의 이미지를 형편없이 구기며, 훨훨 타오르는 종이를 살려내느라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슬라이딩을 한다. 램보는 타버린 종이를 붙들고, 더 없이 비애로 가득 찬 표정으로 고백한다. “네 말이 맞아. 난 이걸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넌 재능이 있어. 솔직히 말하면 그걸 눈치 챌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된다. 널 차라리 못 만났더라면 할 때도 있어. 그럼 밤에 잠 못 이루지도, 세상엔 너 같은 인재들이 많을 거란 생각도, 안 했겠지. 재능을 헛되이 쓰는 걸 보지 않아도 되고 말야…….”

   램보는 질투와 연민과 애정으로 난마처럼 얽혀 있던 자신의 마음을 그제야 고백하지만 윌은 여전히 냉혹한 시선으로 램보를 쏘아보다 떠나버린다. 이제 모두가 깨달았다. 사랑스럽지만 두려운, 윌에 대한 연민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윌에게 진심을 보여준다 해도 윌이 스스로 위악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진심 어린 사랑 또한 윌의 마음에 가 닿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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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페 2009-08-1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황인숙 시인의 시가 텅 빈 가슴을 두드리네요...내 귀는 누구 마음에 들어갔는지...들어간 적이 있기는 한 건지...^^

mr.black 2009-08-1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아하면서도, 사랑하면서도 우리는 가끔 반대로 말하곤 하지요.

NA0217 2009-08-20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런 속 썩이는 남자 친구;; 정말 밉다능 ;ㅁ;

sotkfkd 2009-09-13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카일라, 램보의 노력이 더 필요하겠지요. 미미한 상처라도 당사자는 최고로 힘이 드는 법!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⑦

 

7.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 있을까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는 낯선 괴짜 할머니의 유모차에 탄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난다. 행인의 눈에 띄지 않는 밤,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는 할머니가 끄는 낡은 유모차를 타고, 도둑질하듯 은밀하게 세상을 구경한다. 이 소녀에게 뚝딱뚝딱 엉터리 휠체어를 만들어주는 츠네오. 조제는 츠네오가 끄는 휠체어를 타고 처음으로 아름다운 대낮의 풍경을 보게 된다. 평범한 하늘에 뜬 범상한 구름을 보며 마치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저 구름도 집에 가져가고 싶어”라고 속삭이는 조제, 다락방에서 헌책들을 벽돌처럼 쌓아놓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조제. 두 다리로 걷지는 못하지만 상상 속에서 세상 모든 곳을 바지런히 걸어 다니는 조제에게 츠네오는 사랑을 느낀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액자 저편에서 아련하게 미소 짓고 있던 타인의 삶이 처음으로 내 삶의 두터운 각질을 뚫고 침투해 오는 이야기다. 액자를 깨고 들어가 사진 속 그녀의 진짜 삶을 직시하고 그녀를 도울 수 있다고 믿었던 츠네오. 그는 막상 액자 너머로 들어가 만난 ‘진짜 세상’에 단지 ‘그녀의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간신히 넘어 들어간 그 아름다운 액자 건너편에는, 그녀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그녀를 부모님께 도저히 보여드릴 수는 없는 그의 공포가, 그녀와 잠시 동거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는 스스로의 불안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지만 그의 몸은 ‘연민의 마지노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에 풍덩 빠질 수는 있었지만 그 사랑 속에 끝까지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과 ‘사랑을 짊어지고 삶을 버티는 것’ 사이의 차이를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조제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도망치더라도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츠네오가 잠들었을 때 조제는 마치 머지않아 혼자가 될 미래의 자기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듯, 긴 독백을 한다.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안 불고 비도 안 와. 정적만이 있을 뿐이지. 별로 외롭지도 않아.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냥 천천히, 천천히 시간이 흐를 뿐이지. 난 두 번 다시 거기로 돌아가진 못할 거야. 언젠가 네가 사라지고 나면 난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걷지 못하는 소녀 조제처럼, 타인을 믿지 못하는 소년 윌 또한 스카일라의 사랑이 ‘끝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 고통의 반복 학습 효과로 인해 윌은 치명적인 피해망상을 앓고 있다. 그러나 윌은 숀이라는 타인의 삶을 엿보면서, 어쩌면, 어쩌면 자신도 사랑이라는 걸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숀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자신의 아픈 상처를 윌에게 보여준다. 아내가 병상에 누워 있던 6년 동안 직장조차 그만두었고, 아내를 만나기 위해 레드 삭스 팀 역사상 가장 큰 월드 시리즈 게임을 직접 볼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지만,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금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숀이 만약 아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역사적 야구경기를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정신과 의사로서 ‘경력’을 희생당하지 않고 출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숀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싶지 않냐는 윌의 질문에, 그저 내 아내는 죽었다고 말한다. 숀이라는 타인의 고통을 사유함으로써, 윌은 전혀 다른 각도에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스카일라는 윌에 대해 좀더 알고 싶지만 윌은 자신의 방도 자신의 친구도 보여주지 않는다. 자꾸만 숨기고 싶다. 나의 과거를. 선생님처럼 온몸의 모공을 열어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여자가 나의 모든 것을 알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이 헛똑똑이 천재 소년은 믿는다. 하지만 윌은 “내가 창피한 거야? 아니면 그 반대야?”라는 스카일라의 질문에 더 이상 못 버티고 드디어 윌에게는 가족과도 같은 친구들, 처키(밴 에플렉)와 그 일당들을 보여준다. 친구들도 깜짝 놀란다. 윌이 모르는 사람을 데려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처키는 윌에게 가장 자주 입는 속옷처럼, 언제나 거기 있는 오래된 골동품 가구처럼 편안한 존재다. 윌은 처키의 우정이 자신을 든든히 떠받치고 있는 기둥임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처키는 늘 걱정하고 있다. 내 친구 윌이, ‘우리’와는 너무 다른 윌이, 자신의 재능을 평생 썩히지나 않을까,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방에 갇혀 있을까 하고.

   처키와 친구들을 만난 스카일라는 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욱 따스해진다.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은 사랑에 빠진 여인만이 짓는 농염한 미소를 띠며 스카일라는 말한다. “윌, 나랑 캘리포니아에 함께 가자.” 윌은 놀란다. 그저 여행을 떠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가 캘리포니아에 있는 의대에 진학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이 농담이 아니라는 사실도. 윌은 스카일라의 품에 안겨서 정신없이 행복해하다가 정색을 하고 묻는다. “그래도 되겠어?” “그럼.” 스카일라의 표정은 이미 결정이 끝난 듯 단호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몰라. 그냥 알아.” 스카일라의 눈은 행복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자신의 직관을 믿는 사람, 자신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의 단단한 미소. 

    윌은 두렵다. 증명할 수 없는, 확신할 수 없는 일에는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 또다시 버림받을지도 모르니까. 또다시 혼자가 될지 모르니까. “이건 굉장히 심각한 결정이야. 캘리포니아에 함께 갔다가 내게서 네가 싫어하는 점이 있다는 걸 알면, 같이 가자고 했던 말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쯤엔 우리 관계도 깊어져서, 취소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마지못해서 함께 살게 돼.” 윌은 마치 가상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그들의 미래를 최대한 부정적으로 예측한다. 스카일라는 용기를 내어 사랑 고백을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한 것처럼, 이미 상처 입은 표정이다. 이제 액자의 프레임을 완전히 떼어내고 사진속의 인물, 그 사람의 날것의 삶에 부딪쳐야 한다. 그들은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연민의 마지노선’과 ‘사랑의 문턱’ 사이에 놓인 아슬아슬한 경계지대를 탈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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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어캣 2009-08-19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 속 조제의 다락방, 쿵, 하며 방에서 다이빙을 하던 조제가 어른거리네요....

mr.black 2009-08-19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무의식중에 하던 거짓말들이 실은 용기 없는 자의 종이 갑옷에 불과했군요. 공감 & 반성;

sotkfkd 2009-09-13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아슬아슬한 경계지대를 사는 우리들.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⑥

 

6. ‘가위손’을 닮은 천재 소년, 사랑에 빠지다

   영화 <가위손>에서는 흥미로운 퀴즈가 등장한다. ‘가위손’ 에드워드(조니 뎁)의 기이한 외모와 천재적 재능에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킴(위노나 라이더)과 가족들. 킴의 아버지는 에드워드의 ‘정상성’을 시험하기 위해 퀴즈를 낸다. “네가 길에서 돈가방을 봤다고 하자. 주위엔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어떻게 하겠니? A. 돈을 갖는다. B. 친구나 사랑하는 이에게 줄 선물을 산다. C. 불쌍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D. 경찰에 신고한다.” 킴의 동생들은 “나라면 그냥 갖겠다”고, 에드워드의 대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시시덕거린다. 에드워드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킴의 눈빛도 덩달아 흔들린다. 에드워드는 창백한 얼굴에 투명하게 묻어나는 진솔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킴의 눈동자를 뚫어질 듯 바라보며. “사랑하는 이에게 주겠어요.” 킴의 아버지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러고 싶겠지만 그래선 안 돼”라고 타이르고, 아이들은 에드워드를 한껏 놀리며 “바보야, 누구나 경찰에 신고해야 되는 걸 알아”라고 떠들어댄다. 그러나 그 순간 킴은 가위손을 향한 사랑에 빠진다.    

   에드워드는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만, 자신이 다가가는 모든 존재에게 ‘가위손’이 상처를 입힐까 봐 두려워한다. 가위는 에드워드의 천재적 재능을 실현시키는 도구지만 본의 아니게 킴의 물침대에 구멍을 내고, 킴의 동생을 자동차 사고에서 구해주려다가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 여기저기에 난 그로테스크한 흉터 또한 스스로 낸 상처다. 사랑하는 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는 순간 가위손은 상처를 내고 만다. 그가 사랑하는 자리마다 폐허의 공포가 드리운다. 에드워드는 킴을 안고 싶지만, 킴이 가위에 찔릴까 봐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킴은 에드워드를 사랑하기 위한 좁은 문을 발견한다. 그의 가위손을 겁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에드워드의 ‘등 뒤’로 다가가 그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이다. 정면의 포옹이 열정적인 욕망이나 달콤한 행복의 표현이라면, 등 뒤의 포옹은 ‘당신의 등 뒤에 내가 있으니, 불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말라’는 따스한 응원의 메시지를 담는다. 이 아름다운 백 허그(back hug)는 타인의 고통을 분석하거나 해부하지 않고 다만 등 뒤에서 조용히 껴안는, 사랑의 묘약이 된다.  

 

   우리의 천재 소년 윌 헌팅도 에드워드를 닮았다. 윌의 내면은 가위손의 얼굴처럼 상처투성이다. 양아버지의 알코올중독과 밤마다 계속되는 린치, 몇 번이나 버려지고 파양되었다는 사실,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다는 공포는 윌의 치명적인 내상을 더욱 깊게 만든다. 윌은 자신의 상처가 폭로될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의 상처가 지닌 기묘한 전염성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이다스의 손이 닿는 곳마다 딱딱한 황금으로 변해버리듯이, 자신의 손이 닿는 곳마다 폐허로 변해버릴까, 윌은 두렵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면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발랄한 하버드생 스카일라(미니 드라이버)에게 호기심을 느끼지만 좀처럼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스카일라와 ‘데이트’는 하지만 그녀에게 솔직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윌은 알고 있다. 스카일라와의 만남은,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숀과 가까워지는 윌은 스카일라와의 만남도 그에게 털어 놓는다. 호감은 가지만 자신이 먼저 전화하지는 않을 거라고. 이게 다 작업의 기술이라고.  

   윌 : 그 여자 애는 정말 예쁘고 똑똑하고 재밌어요. 그간 사귄 여자들하고는 달라요.
   숀 : 그럼 전화해, 로미오.
   윌 : 왜요? 그러다 똑똑치도 않고 재미없는 여자란 것만 알게? 지금 그대로가 완벽하다구요. 이미지 망치기 싫어요.  

   숀 : 반대로 완벽한 네 이미지 망치기 싫어서겠지. 정말 대단한 인생철학이야! 평생 그런 식으로 살면 아무도 진실 되게 사귈 수 없어.
   윌 : …….
   숀 : 내 아내는 긴장을 하면 방귀를 뀌곤 했었어. (죽은 아내가 생각나 애틋하지만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러 가지 앙증맞은 버릇이 많았지만 자면서까지 방귀를 뀌곤 했어. (이때부터 숀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기 시작한다) 지저분한 말 해서 미안하군, 큭큭. 어쨌든 어느 날 밤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강아지까지 깼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당신이 뀌었수?’ 하길래, 차마 용기가 안나 얼떨결에 ‘응!’ 하고 말았다니까!
   윌 : (키득거리며) 자기 방귀에 놀라서 깨요?
   숀 : 아내가 세상 떠난 지 2년이나 됐는데 그런 기억만 생생해. 멋진 추억이지. 그런 사소한 일들이 말야. 제일 그리운 것도 그런 것들이야. 나만이 알고 있는 아내의 그런 사소한 버릇들. 그게 바로 내 아내니까.
   윌 : (웃음이 잦아들며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소중한 사랑의 추억을 지닌 숀이 부러운 듯 애잔한 표정을 짓는다.)
   숀 : 반대로 아낸 내 작은 버릇들을 다 알고 있었지. 남들은 그걸 단점으로 보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야. 인간은 불완전한 서로의 세계로 서로를 끌어들이니까. 너도 완벽하진 않아. (……) 그 여자애도 완벽하진 않아. 중요한 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거야. (……) 이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너라도 짝을 찾으려면 노력이 필요해. 내게서 그 방법을 배울 순 없을 거다. 안다 해도 너같이 건방진 녀석에겐 알려주기 싫어.
   윌 : 왜요? 딴 얘긴 주절주절 다 해줬잖아요. 빌어먹을! 그쪽처럼 말 많은 의사는 처음 본다구요!  
   숀 : 가르치는 선생이라고 다 아는 건 아냐. 


   윌은 어느새 숀에게 어리광도 부리고 신경질도 낸다. 숀은 윌을 분석하거거나 해부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가르칠 수 없는 종류의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이론은 빠삭해도’ 실천할 수 없는 지식, 그것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것을, 몸으로 부딪혀야만 알 수 있으므로. 윌은 아름다운 액자 속에 끼워진 흑백사진처럼 멀리 있어 아름답던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다. 처음으로 스카일라가 살고 있는 하버드 기숙사로 찾아가는 윌. 스카일라는 윌이 반갑지만 급한 숙제가 있다며 내일 만나자고 한다. 할 수 없이 돌아서는 윌. 그런데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표정. 그는 스카일라의 급한 숙제를 대신 해준다. ‘수재’ 스카일라라면 밤을 새겠지만 ‘천재’ 윌이라면 3분 만에 후딱 풀 수 있는 그 숙제를. 그리고는 말한다. “내일까지 못 기다리겠어.”  

   첫번째 발걸음을 떼기가 우주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 번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처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지만 한 번 마음을 열자 봇물 터지듯 열정적인 사랑이 시작된다. 이제 해석하고 계산하고 짐작하고 미리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전화하고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하고 먼저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관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만 연관되면 자신도 모르게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한다. 스카일라가 ‘형제가 몇 명이냐’고 묻자 윌은 불에 덴 듯 뜨끔한 표정으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형만 열 두 명이라고. 신에 맹세코 정말이라고. 행운의 13번째이니까 자신은 행운아라고. 아직은 쉽지 않다. 그러나 윌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닫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윌은 처음으로 여인의 품에서 쾌락과는 다른 종류의 불가해한 따뜻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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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8-17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가위, 손, 손, 손, 손'. 예를 드는 영화마다 어찌나 그리 좋은 영화만을 고르시는지^^*

가위질손 2009-08-1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람의 마음을 노크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 바로 사랑이겠죠. 윌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해지네요. ㅎㅎ

sotkfkd 2009-09-1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가해한 따뜻함!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⑤

 

5. 전시되는 고통, 소외되는 인간


   눈앞에서 끔찍한 현실을 목격했을 때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영화 속에서 그야말로 ‘리얼한’ 화면을 발견했을 때 ‘정말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데!’라고 감탄하는, 스펙터클의 사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 영화 <라이온 일병 구하기>가 처음 나왔을 때 관객들은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라며 전투 장면의 현장감을 극찬했다. 그러나 <라이온 일병 구하기>의 숨 막히는 전투 신이 과연 ‘사실적’이어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일까. 사실감이란 본래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를 측정한 후 판단되는 감각 아니었는가. 그러나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관객은 총알이 눈앞에서 난사되고 사람이 피와 내장을 흘리며 죽어가는 실제 전투를 겪어본 적이 없다. 재현은 있지만 현실은 없다. 그러므로 재현과 현실 사이의 ‘거리’ 또한 측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서 ‘와, 이건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걸!’이라고 느끼는 바로 이 ‘리얼함’의 감각은 어디서 연원하는 것일까.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공격당했을 때 그 건물에서 간신히 피해 나왔던 사람들이나 근처에서 그 장면을 그대로 봤던 사람들은 처음 그 공습을 설명하면서 “믿을 수 없다”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영화 같다”고 말했다.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어 할리우드 재앙 영화가 만들어진 지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결국 어떤 재앙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자신이 짧은 시간 동안 겪었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을 “마치 꿈처럼 느껴져요”라는 말 대신에 “마치 영화처럼 느껴져요”라는 말로 표현하는 상황이 닥쳤다.) 


-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43쪽.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거대한 스펙터클로 재창조하여 미디어에 전시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라크전이 발생했을 때 미국이 전대미문의 ‘충격과 공포’를 자아냈던 방법은 바로 컴퓨터 전쟁 게임 같은 화면을 이라크 현장에서 연출하여 ‘전쟁을 영화같이’ 만든 후 그 편집된 화면을 전 세계에 방영하는 미디어 전략이었다. 현대인은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볼만한 구경거리, 화려한 스펙터클로 전시한다. 우리는 ‘기아’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소말리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등지에서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커다란 눈망울을 굴리는 아이들의 사진 이미지를 떠올리고, ‘전쟁’ 하면 할리우드 영화나 컴퓨터 3D 전쟁 게임에서 본 ‘스펙터클’을 떠올린다. 미디어가 규격화하여 보여주는 타인의 고통이 우리의 공감(共感) 능력을 규정하고 한계 지운다. 고통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주는 공포 혹은 ‘내가 저 고통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뿐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리얼’하게 보였던 것은, 전쟁에 대한 우리의 지식 때문이 아니라, 감독이 연출해낸 장면의 ‘자극’이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감각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위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디어가 훈련시키는 것만큼만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미디어 사이보그가 되어가는 걸까. 


 

   윌에게 상처 입은 숀이 깨달은 ‘윌의 허점’도 바로 그것이다. 윌은 모든 것을 다 안다. 그의 천재성은 단지 ‘계산 능력’이 아니라 엄청난 독서량과 기억력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윌은 그림 하나에 얽힌 인간의 심리를 눈앞에서 보듯 생생히 그려낼 정도로 상상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윌의 모든 지식은 책이라는 미디어와 머릿속의 상상력을 통한 간접 체험이다. 그는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광기 어린 사랑을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경험해본 ‘책상 위의 천재’인 것이다. 이제 숀의 반격이 시작된다.
    두번째 정신과 상담. 윌의 난데없는 선제공격에 고통스러워하던 숀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숀은 이제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한다. 너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새 생각하다가 갑자기 얻은 깨달음이 있다고. 그건 바로 윌, 네가 ‘어린애’라는 것이었다고.   

   숀 : 넌 네가 뭘 지껄이는 건지도 모르고 있어.
   윌 : 알아줘서 고맙네요.
   숀 : 당연한 거야. 넌 보스턴을 떠나본 적이 없으니까.
   윌 : 그렇죠.
   숀 : 내가 미술에 대해 물으면 넌 온갖 정보를 다 갖다댈걸? 미켈란젤로를 예로 들어볼까? 그에 대해 잘 알 거야. 그의 걸작품이나 정치적 야심, 교황과의 관계, 성적 본능까지도 알 거야, 그치? 하지만 시스티나 성당의 내음이 어떤지는 모를걸? 한 번도 그 성당의 아름다운 천정화를 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난 봤어. 또, 여자에 관해 물으면 네 타입의 여자들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겠지. 벌써 여자와 여러 번 잠자리를 했을 수도 있고. 하지만 여인 옆에서 눈뜨며 느끼는 행복이 어떤 건진 모를걸. 전쟁에 관해 묻는다면 셰익스피어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겠지. 다시 한 번 돌진하세, 친구들이여, 하며!
   하지만 넌 상상도 못해. 전우가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널 바라보며 마지막 숨을 거두는 걸 지켜보는 게 어떤 건지……. 사랑에 관해 물으면 너는 한 수 시까지 읊겠지만, 한 여인에게 완전한 포로가 되어본 적은 없을 걸……. 그녀의 눈빛에 완전히 매료되어 신께서 너만을 위해 보내주신 천사로 착각하게 되지……. 절망의 늪에서 널 구하라고 보내신 천사……. 또한 한 여인의 천사가 되어 사랑을 지키는 것이 어떤 건지, 넌 몰라……. 그 사랑은 어떤 역경도, 암조차도 이겨내지……. 죽어가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두 달이나 병상을 지킬 땐, 더 이상 환자 면회 시간 따윈 의미가 없어져…….
   윌 :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소한 감정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처음으로 잘난 척하지 않으면서 잠자코 듣고만 있다.) 
   숀 : 진정한 상실감이 어떤 건지, 넌 몰라……. 진정한 상실감이란, 타인을 네 자신보다 더 사랑할 때 느끼는 거니까……. 아마 넌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한 적이 없을  걸? 
   윌: …….      

      윌은 숨 돌릴 새 없이 이어지는 숀의 일갈에 허를 찔려 뜨끔하면서도,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모두들 엄마 손에 이끌려 떠난 후 황혼 속에 혼자 남은 아이처럼, 막막하고 슬픈 표정이다.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나만의 고통’에 빠진, 고독한 천재 소년. 윌은 자신의 고통을 말해도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내면을 보게 되는 순간 얼굴을 돌려버릴 것을 알았다. 그 또한 오랜 차별과 핍박의 경험이 만들어낸 ‘세상에 대한 지식’이었다. 윌은 ‘천재’로 판단되어 호명되는 순간 천재라는 존재를 길들이는 사회의 호명체계 속에 갇히게 된다. 그의 캐릭터에서 ‘천재 이외의 것’을 보려 하는 사람, 그의 명석한 두뇌 회전의 광휘에 가려 미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상처의 풍경을 본 사람, 그가 바로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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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생각해도 2009-08-14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대한 상처의 풍경, 나의 내면도 그림처럼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당신들'의 내면 역시. ^^

radiohead 2009-08-16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디어 사이보그라니, 어쩐지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네요, 휴~~^^

맨손체조 2009-08-17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로빈 윌리암스의 연기는 빛났죠. 우리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멘토가 있을까요?

sotkfkd 2009-09-13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빈 윌리암스는 늘 그렇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