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④

 

 4. 내가 떠나온 세계,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니체, 박찬국 역, <아침놀>, 책세상, 2004, 191쪽.

 
   

   도무지 길들이기 힘든 개인의 야성을 빼앗는 가장 효과적인 비결은 ‘노동’을 통해 개개인의 신체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노동이 최고의 경찰’이라는 니체의 날카로운 성찰은, 감옥에서야말로 훌륭하게 적용된다. 감옥에서는 노동이 최고의 간수다. 숲 속을 마음껏 질주하던 야수들을 규칙적인 생활과 소모적인 노동이라는 철책에 가둠으로써, 야수들은 가축으로 훈육된다. 쇼생크의 죄수들도 이러한 ‘노동의 철책’에 감금된다. 이번에는 야외 노동이다.
    죄수들에게는 임금을 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이 얼마나 완벽한 노동 착취인가. 쇼생크 감옥은 앤디가 복역한지 3년이 되던 해, 감옥 근처 공장의 지붕 보수공사에 죄수들을 동원한다. 이 보상 없는 고된 노동 뒤에는 뜻밖의 행운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것은 ‘감옥 바깥의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단 하나의 이점이었다. 앤디와 레드는 이 보수공사에 동원되는 행운(?)을 누린다. 감옥 바깥의 공기를 단 한 번이라도 마시고 싶은, 레드의 앙큼한 ‘뇌물 공세(간수들에게 담배 한 갑씩!)’ 덕분이었다. 

   고분고분하지 못한 죄수들을 폭행하는 데 엄청난 재능(?)을 선보인, 악명 높은 간수 하들리. 그는 죄수들의 노동을 감독하면서 동료 간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몇 년 전에 죽은 줄만 알았던 친형이 얼마 전에 죽어 유산을 남겼는데, 유산이 백만 달러나 된다는 거였다. 자기 몫으로 3만 5천 달러를 남겼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나머지, 세금 때문에 ‘한 몫’ 챙기기도 힘들겠다는 투덜거림이었다. 세금이 너무 많아서 새 차 한 대 뽑을 돈 밖에는 안 남을 거라고 불평하는 하들리의 중얼거림을 앤디도 듣는다. 묵묵히 지붕 공사에 참여하고 있던 앤디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겁도 없이 하들리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간수에게 무슨 봉변을 당할까 걱정이 된 레드는 앤디를 말려보지만 이미 앤디는 간수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중이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앤디가 던진 질문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들리 씨. 아내를 믿으십니까?” 하들리는 갑자기 자신에게 꽂힌 난데없는 질문에 놀라 앤디의 멱살을 맞잡고 지붕 끝으로 몰아세운다. 일촉즉발의 순간, 간수가 멱살을 잡은 손만 놓으면 앤디는 지붕 밑으로 떨어져 즉사할 참이다.  

   하들리: 네가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앤디: (멱살이 붙들려 숨을 제대로 못 쉬면서도 차분하게 묻는다) 아내가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냐는 겁니다. 
   하들리: (앤디의 멱살을 더욱 바짝 잡아당기며) 계속 나불거려봐. 확실히 죽여줄 테니까. 
   앤디: 당신이 아내를 믿는다면 그 돈을 고스란히 가질 수 있어요. 3만 5천 달러요.
   하들리: 3만 5천을 전부?
   앤디: 전부요. 잔돈까지 빠짐없이 전부 다.
   하들리: 설명해봐. 
   앤디: 아내에게 그 돈을 주는 겁니다. 국세청은 6만 달러까지는 1회 한도로 배우자 양도를 허락하거든요.
   하들리: 세금으로 안 뜯어가고?
   앤디: 네. 1센트도 건드릴 수 없죠.
   하들리: 흥. 네가 바로 그 은행가로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나더러 너처럼 감옥살이 하라는 거야?
   앤디: 합법적인 거예요. 국세청에 물어보세요. 똑같이 말할 거예요. 직접 조사해 보세요. (……) 그래도 서류 작성할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돈이 많이 들잖아요.
   하들리: 제기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녀석들!
   앤디: 변호사 대신 제가 서류를 작성해 드리죠. 비용도 절약되잖아요. 서류만 가져오시면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 대신…… 저희 동료들에게 맥주 세 병씩만 주세요.
   하들리: 뭐, 동료? 정말 웃기시는군.
   앤디: 보통 사람들처럼 그저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제 조건입니다. 

   하들리는 앤디의 제안에 어안이 벙벙하지만 변호사 선임 비용까지 한 푼도 안 드는 뜻밖의 행운을 놓칠 수 없었으니 그 ‘기묘한 거래’는 성립된다. 레드의 내레이션은 예전보다 조금 젖은 듯한, 애잔한 목소리로 이어진다. “쇼생크 감옥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1949년 봄. 지붕을 고치던 죄수들은 아침에 옥상에 둘러앉아 차가운 맥주를 마셨습니다. 쇼생크의 악명 높은 간수가 베풀어준 뜻밖의 호의로 말입니다. 그런 냉혈한도 부드러워질 때가 있더군요. 죄수들이 온몸으로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지붕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시다니, 마치 우리가 자유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마치 자기 집 지붕 위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았죠. 그 순간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듀프레인은 응달에 앉아 휴식을 취했습니다.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띤 채,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걸 지켜보았죠. 간수에게 잘 보이려고 했거나 친구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는지도 모르죠. 그는 단지 옛날처럼 보통 사람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주 잠시 동안만이라도.”

   찬란한 희열과 가눌 수 없는 슬픔이 공존하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앤디는 ‘동료’가 권하는 술도 마시지 않고, 자신은 술을 끊었다며, 다만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맞아보는, ‘감옥 바깥의 햇살’을 만끽하며. 아무도 앤디를 ‘동료’라고 부르지 않았지만, 앤디에게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료였으리라. 그가 원하는 것은 단지 동료들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는 이 순간, 정말 감옥 바깥에서 친구들이 시시덕거리며 맥주를 들이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한없이 평화롭고 자유롭다. 감옥 안의 어떤 폭력과 억압도 막아낼 것만 같았던 앤디의 투명코트는 이렇게 아름다운 기적의 풍경을 연출해낸다. 꼬질꼬질하게 차려 입은 죄수들이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맥주를 마시며 함께 둘러앉아 온몸으로 광합성을 하는, 이 멋진 풍경에는 성스러운 기운마저 감돈다. 앤디가 쇼생크 감옥에 최초로 들여온 것은 단지 맥주만이 아니라 맥주보다 알싸한 자유의 바이러스였다. 그는 혼자만의 탈출을 꿈꾼 것이 아니라, 희망 없는 이곳 쇼생크에서도, 창살 사이로 간간이 비치는 햇살처럼 따스한 자유의 틈새를, 함께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적어도 이 순간, 그의 몸은 간수의 속박 아래 있었지만 그는 아무도 모르게 유체이탈을 감행하여, 지붕 위를 훌쩍 날아올라 감옥 바깥의 세상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내가 말했듯이 앤디는 보이지 않는 코트처럼 자유를 입고 다녔고 한 번도 죄수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결코 그 예리함을 잃지 않았다. 앤디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긴긴 밤을 보내기 위해 감방 안으로 들어가는 죄수의 걸음걸이-어깨는 축 쳐져 있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떼어놓는―를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앤디는 따듯한 식사와 예쁜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어깨를 곧게 펴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감방을 향해 걸어가곤 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물러터진 야채덩어리와 잘 으깨지지 않아서 덩어리가 그대로 있는 감자, 죄수들이 정체 모를 고기라고 부르는 비곗덩어리와 연골투성이의 고기 비슷한 것 한두 조각과 벽에 걸려 있는 라켈 웰치의 포스터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 


 -스티븐 킹, <쇼생크탈출> 중에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도란도란 2009-09-10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죄수라는 사회의 약자입장에서, 강자의 포스를 드러내는,,,

둥이 2009-09-10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씩 케이블에서 방송하면 채널을 돌리기 힘든 그런 영화져^^

rememberingLenin 2009-09-10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95년엔가 고딩 때 이 영화를 봐서 기억이 어렴풋하군요. 앤디는 재치가 있는데, 노동의 단조로움과 강박을 깨는 그런 부드러움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은 평이하고 읽기 쉽지만, 어딘지 너무 평범한 것 같아 아쉽다는 인상은 드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바르트와 색계를 다루는 글에서도 <카메라 루시다>의 핵심인 '시간'의 문제가 색계에 가려진다는 인상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사진에는 과거의 '현재성'이 묻어 있으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맨손체조 2009-09-11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방에다가 아내 몰래 맥주를 반입해 놓아야 겠어요. '알싸한 자유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어서요^^*

sotkfkd 2009-09-2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유를 입고 다닐 것!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③

 

 3.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 다름은 무엇일까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평균적인, 공동의 체험’을 강요하는 것이 지금까지 인간을 길들여온 가장 심각한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 속담을 듣는다면 아마도 니체는 치를 떨지 않을까. 모난 것이 과연 ‘나쁜 것’인가, 그 ‘정’은 도대체 누가 내려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모난 돌이 정 맞는 현실이 ‘옳다’는 것인가……. 니체는 아마도 수없는 질문을 퍼부으며 모난 돌을 ‘다른 돌들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는 비겁한 권력의 맨얼굴을 파헤치지 않을까. 니체가 혐오한 약자의 근성은 바로 ‘무리지어’ 다니며 ‘우리가 표준이야, 우리가 대세야’라 외치는 패거리의 행태였다. 강한 자는 무리지어 다닐 필요가 없다. 강한 자는 자기 안에서 자신의 윤리를 창조해낸다. 결코 타인에게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자,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자연스럽게’ 행해도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약자의 무리들은 강한 자의 바로 이런 점을 증오한다. 굳이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 않고, 기꺼이 은둔하기를 선택하며, 무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강자의 ‘홀로 있음’을, 그들은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뭉크, <니체의 초상>, 1906. 

   
 

좀더 유사하고 좀더 평범한 인간들은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좀더 선택된 자, 좀더 예민한 자, 좀더 희귀한 자, 좀더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은 쉽게 고립되기 쉬우며,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 재난을 당하기도 쉽고 거의 번식하지도 못한다. (……) 유사한 것, 일상적인 것, 평균적인 것, 무리적인 것으로 ―비속한 것으로!― 인간을 다시 교육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거대한 저항력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91쪽. 

 
   
   레드(모건 프리먼)를 매혹시킨 앤디(팀 로빈스)의 매력도 바로 그 ‘홀로 있음’이었다. 앤디는 좀처럼 타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고, 말을 해도 두 단어 이상 입을 떼지 않음으로써 어떤 ‘무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앤디 듀프레인은 죄수들과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감옥 생활에 적응하려다 보니 그런 거라 생각했죠. 한 달이 지나자 앤디는 두 단어 이상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말을 건 첫번째 상대는 바로 저였습니다.” 앤디가 자신을 소개하며 다가오자 레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아내를 살해한 은행가시군. 왜 죽였소?” 앤디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한다. “난 안 죽였어요.”

   레드는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당신도 똑같군. 여기 있는 죄수 모두 자기는 무죄라고 생각하지.” 레드는 운동장에서 산책하는 죄수 중 한 명을 무작위로 골라 질문한다. “어이, 자네 죄명이 뭐지?” 죄수는 심드렁하게 대답한다. “흥, 무슨 죄? 무능한 변호사 때문이지.” 앤디는 굳이 변명하지 않고 침묵한다. 레드는 앤디의 심성을 떠보려는 듯이 질문을 이어나간다. “자네, 거만하다고 소문났던데. 자네는 우리들과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야?” 앤디는 형형한 눈빛으로 레드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런 식의 질문 자체가 부당하다는 듯이. “당신 생각은 어때요?” 레드는 인정한다.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앤디는 물품 공급원 레드에게 아주 작은 돌망치 하나를 구해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은 암석 수집광이었는데, 그 취미를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레드는 뭐든지 구해줄 수는 있지만 ‘흉기’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앤디는 여기엔 자신의 ‘적’이 없다며 그 작은 망치를 흉기로 쓸 일은 없다고 말한다. 레드는 앤디에게 경고한다. “적이 없다고? 두고 보자고. 자네에게 보그스 일당이 호감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아. 조심해.” 앤디는 순진한 눈빛으로 “난 게이가 아니라고 말하면 되죠.”라고 대답한다. 레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경고의 강도를 높인다. “저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저들의 머릿속에서는 ‘그 짓’밖에 든 것이 없어. 만일 내가 너라면 뒤통수에도 눈을 달고 다닐 거야.” 레드는 절대로 망치를 ‘흉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것, 불시 검열 때 걸리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일임을 분명히 해둔다. “그런데 당신을 왜 ‘레드’라고 부르죠?” 레드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내가 아일랜드인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자신의 인종적 특수성이 자신과 다른 죄수들 간에 ‘거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하지만 레드의 ‘다름’은 피부색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에 있다.

   레드는 단 한 번의 대화만으로, 앤디의 ‘다름’을 알아차렸다. 앤디는 거만한 것이 아니라 감옥 생활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죄수들, 자신이 ‘열등한 무리’로 전락했음을 인정하는 다른 죄수들과 ‘다른’ 사람일 뿐임을. “왜 사람들이 그를 거만하다고 수군거렸는지를, 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듀프레인은 말수가 적었습니다. 걸음걸이와 말투도 달랐습니다. 세상사에는 초연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마치 이 감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투명코트를 입은 것 같았습니다. 네,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그가 좋았습니다.” 이 감옥의 ‘죄수다움’을 만드는 온갖 폭력과 욕설과 굴욕으로부터 앤디를 지켜주는 ‘투명코트’를 알아본 것도 레드뿐이었다. 그 투명코트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무리의 도덕으로부터의 자유, 그 어떤 외부적 강제와 타인의 시선에도 휘둘리지 않는 무한한 자유의 에너지가 아니었을까. 앤디 앞에는 이 아름다운 투명코트의 강도를 시험하는 수많은 난관들이 기다리고 있다. 앤디를 향한 보그스의 끈적끈적한 시선은 그 첫번째 난관이었다.

   보그스는 샤워장에서 앤디의 몸을 샅샅이 훑어보며 추파를 던진다. “이봐, 너 아직 싱싱하지? 아직 아무도 안 건드렸지? 우린 모두 친구가 필요해. 네 친구가 돼줄게. 짜식, 좋으면서 내숭 떨기는!” 앤디는 뱀처럼 감겨오는 보그스의 시선을 무심하게 떨쳐낸다. 그러나 사건은 예고 없이 닥쳐왔다. 세탁장에서 노역을 하던 앤디는 가루비누가 떨어졌다는 동료의 말에 묵묵히 창고로 발걸음을 향한다. 창고에는 이미 계획하고 있던 듯 보그스 일당들이 앤디를 노리고 있었다. 그들은 떼 지어 덤벼들어 한 사람을 겁탈하려 한다. 앤디는 가루비누를 움켜쥔 채 “이건 눈을 멀게 할 수도 있어.”라고 위협해보지만 사지를 붙들고 늘어지는 여러 명의 건장한 남자를 혼자서 당해낼 수가 없다.
    보그스는 역겨운 표정으로 앤디의 저항을 즐긴다. “그래, 덤벼봐. 반항하는 게 더 즐거우니까.” 레드의 초연한 듯한 내레이션은 계속 이어진다. “듀프레인이 훌륭한 싸움꾼이어서 무사히 풀려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만, 감옥은 동화의 세계가 아닙니다. 듀프레인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우리 모두는 알 수 있었죠. (……) 종종 듀프레인은 얼굴에 멍 자국이 가득한 채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물리치기도 했지만 때로는 아니었습니다. (……) 처음 2년은 듀프레인에게는 최악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활이 계속됐다면 듀프레인은 완전히 망가졌을 것입니다.” 

   앤디는 혼자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 고통을 끌어안고 침묵한다. 그는 어떤 무리와도 섞이지 않고 무리 속에서도 홀로 은둔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는 구원의 손길을 자신의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어떤 패거리의 집단적 폭력도 더럽힐 수 없는 앤디의 투명코트는 과연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앤디는 분명 엄청나게 ‘모난 돌’이지만 자신에게 날아오는 망치질을 피하지 않는다. 그는 보그스 일당으로부터는 성폭행을 당하고, 감옥의 다른 죄수들로부터는 ‘거만하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모난 돌에게 가해지는 망치질을 당하면서도 자기 안의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는 ‘감옥의 교화’로 인해 온순하게 길들여지지도, 그의 육체를 탐하는 무리의 폭력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지도 않을 것이다. 강자는 끊임없이 각자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 지으려 한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 혹은 고귀한 자는 자신의 가치를 외부에 의탁하지 않는 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는 자다. 

   
 

고귀한 부류의 인간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낀다. 그에게는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로운 것이다”라고 판단한다. 그는 대체로 자신을 사물에 처음으로 영예를 부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한다. 이러한 도덕은 자기 예찬이다. 그 전경에는 충만한 감정이 넘쳐흐르고자 하는 힘의 느낌, 고도로 긴장된 행복과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부유함의 의식이 있다. 고귀한 인간 역시 불행한 사람을 돕는다. 그러나 거의 동정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치는 힘이 낳은 충동에서 돕는다.  

- 니체, 김정현 역, <선악의 저편>, 책세상, 2002, 276쪽.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milky way 2009-09-10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자는 끊임없이 서로 흩어지려 하고, 약자는 집요하게 서로 무리지으려 한다니, 순간 움찔하네요, 쿡ㅠㅠ ㅎㅎ

doingnow12 2009-09-10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표준에 맞춰 요리콩 조리콩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꽃가루같은 사람이 저라 저도 움찔..ㅋㅋ

맨손체조 2009-09-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고귀한 자가 되고 싶기는 하지만, 이건, 담배를 필 때도 무리지어 피지요^^*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②

 

2.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다? 

   니체는 도덕의 존재를 당연시하는 인류의 ‘상식’을 의심한다. 니체는 도덕이 인간의 선천적 본성도 아니며 보편적 기질도 아님을 밝혀낸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도덕의 역사적 가변성을 입증하고, 한 시대의 도덕이 다른 시대의 패륜이 될 수도 있음을, 도덕의 가치는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변모해왔음을 보여준다. 야스퍼스는 <니체와 기독교>에서 왜 인간이 ‘도덕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로 변모했는가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계몽의 과정을 통해 ‘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그동안의 문명화 과정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는 외부적 존재’ 없이는 살 수 없도록 길들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미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신의 그림자’에 철저히 길들어져 있기에, 인간은 ‘신과 닮은 존재’가 보좌해주는 세계의 안전판 없이는 끊임없이 불안을 느끼는 존재로 변모해왔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을 대체하는 또 하나의 절대성, 즉 ‘도덕’이라는 ‘신의 대용품’이 필요했던 셈이다. 

   앤디 듀프레인이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동안 레드(모건 프리먼)는 가석방 심사를 받고 있었다. 가석방 심사위원은 레드에게 질문한다. “20년을 복역했지요? 사회에 복귀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합니까?” 레드는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이 교화됐음을 주장한다. “네. 저는 준비됐습니다. 감옥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전 변했습니다. 더 이상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맹세할 수 있습니다.” 레드의 표정은 절박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심사위원은 레드의 서류에 ‘부적격(rejected)’ 판정 도장을 찍는다. 그는 젊은 시절 범죄를 저지르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20년 동안이나 별 탈 없이 복역했지만 사회는 그를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레드를 비롯한 쇼생크의 죄수들은 자신의 삶이 ‘적절하다/부적절하다’는 판정을 가석방 심사위원으로부터 인증받아야 할 처지다. 그들은 수많은 변수들을 고려하여 이 죄수가 감옥 밖으로 나가서 ‘위험하지 않은 인물’로 살 수 있는지를 ‘계산’한다. ‘교화된다는 것’은 바로 ‘예측 가능한 인간’이 되는 것이며 ‘계산 불가능한 의외성’을 최대한 제거하는 행위다.  

   레드는 이 영화의 내레이터이자 쇼생크 감옥의 터줏대감으로서 신출귀몰한 물자공급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담배, 마리화나, 애들 졸업 축하주도 구할 수 있죠. 뭐든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요. 인간 백화점이죠. 듀프레인이 와서 영화배우 사진을 구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도 문제없다고 했지요. 듀프레인은 아내와 정부를 죽인 죄로 1947년 쇼생크 감옥으로 왔습니다. 전직 은행 부지점장이었죠.” 듀프레인이 쇼생크에 입성하던 날, 죄수들은 새내기 죄수들을 향해 내기를 한다. ‘신참 죄수들 중에서 누가 먼저 울음을 터뜨릴까’에 내기를 거는 것이다. 감옥에서는 현금보다도 소중한 담배를 저마다 내기의 판돈으로 걸며 키득거리는 고참 죄수들. “처음에 듀프레인은 제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았죠. 그게 제 첫인상이었습니다.” 레드는 아무도 담배를 걸지 않은 ‘꺽다리 귀공자’ 앤디 듀프레인에게 담배를 무려 10개비나 건다. 

   이제 감옥에서의 첫날밤이 시작된다. “죄수들은 저녁 점호를 위해 감방으로 돌아가라.” 악명 높은 쇼생크 감옥의 소장 노튼은 죄수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너희는 중죄를 저질렀다. 그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것이다. 첫번째 규칙. 욕설금지! 내 감옥에서는 신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그 외의 규칙들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질문 있나?” 듣고 있던 신참 죄수 중 한 명에게서 질문이 터져 나온다. “밥은 언제 먹나요?” 너무나도 ‘초딩스러운’ 질문에 관객의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치려는 순간, 소장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지고 간수는 전의를 불태우며 신참에게로 다가간다. “먹으라고 할 때 먹고, 싸라고 할 때 싸면 된다. 알았나? 이 더러운 자식!” 단지 밥은 언제 먹느냐는 질문을 했다는 이유로, 죄수는 흠씬 두들겨 맞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신참들의 얼굴은 어두워진다. 이제야 감옥에 온 것이 실감 났다는 듯, 고통받는 동료의 모습에 자신의 미래를 투사한다. 저렇게 되지는 말아야지, 죽은 듯이 살아야지, 무사히 살아 나가기만을 빌어야지……. 폭력은 이렇게 인간을 길들인다. 좀더 비굴하게, 좀더 나약하게, 좀더 온순한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교화’의 진정한 목적이다. 소장은 이 ‘교화’의 대리인으로서 마치 자신이 신의 사도인 양 죄수들을 협박한다. “난 두 가지를 믿는다. 원칙과 성경. 너희도 그렇게 될 것이다. 믿음을 가져라. 너희는 내 손에 달렸다. 쇼생크에 온 걸 환영한다.” 소장이 손에 쥔 성경은 마치 이 감옥에서 너희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은 ‘신의 뜻’이라는 양 신성한 위엄(?)을 과시한다. 

   레드의 내레이션이 쓸쓸하게 이어진다. “감옥에서의 첫날밤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태어날 때처럼 발가벗겨지고 살충제에 범벅이 된 채 돌아다녀야 하죠. 감방에 집어넣어지고 철문이 탕하고 닫히면 그제야 실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은 망가졌다는 것을요. 대부분의 신참들은 첫날밤에 거의 미칠 지경이 됩니다. 항상 몇몇은 정신없이 흐느껴 울죠. 매번 일어나는 일입니다. 단지 문제는 누가 먼저 우느냐 입니다. 이것만큼 재미있는 내기는 없죠. 저는 앤디 듀프레인에게 걸었습니다.” 이어서 감옥 안의 불이 꺼지고 신참들의 잠 못 드는 밤이 시작된다. 레드의 친구 헤이우드는 장난기가 발동해 자신이 담배를 건 신참(간수에게 폭행당한 바로 그 신참)에게서 눈물을 뽑아내려고 작정을 했다.
    “신참. 잔뜩 겁에 질려서 뭐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하고 후회하는 거야? 어이, 뚱보. 내가 말이야. 자넬 소개시켜 줄게. 자넬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 남자를 좋아한다고. 특히 백인 뚱보를 말이야.” 간수에게 폭행당한 충격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나약한 신참은 겁에 질려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집에 보내줘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여기서 꺼내주세요…….” 간수는 소란스러운 감옥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신참을 ‘처리’한다. 아까보다 한층 더 난폭해진 간수의 린치 앞에서 신참 죄수는 울다 지쳐 두들겨 맞고, 두들겨 맞다 지쳐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된다. 퍽, 쿵, 퍽, 쿵. 한 명의 죄수를 때리는 소리는 마치 쇼생크 감옥의 죄수 전체를 집단폭행하는 소리처럼 엄청난 울림으로 감옥의 밤을 뒤흔든다. 레드가 담배를 10개비나 걸었던 앤디는 정작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조용하다. 감옥의 첫날밤은 그렇게 끔찍한 풍경 속으로 사라져간다.

   다음날 헤이우드는 자신이 내기에 이겼다는 생각에 환호작약하며 다른 죄수들에게 담배를 잔뜩 받아내고 기뻐한다. “뚱보 녀석에게 감사의 키스라도 해야겠어.” 헤이우드는 히죽거리며 내기의 전리품에 흡족해한 후, 자신이 놀려먹은 그 신참 죄수의 안부를 묻는다. “타이렐. 자네 의무실 근무지? 그 뚱보 잘 있나?” 타이렐은 대답한다. “죽었어.” 헤이우드와 함께 시시덕거리던 고참 죄수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 신참이 머리를 심하게 맞은 모양이야. 의사도 없었어.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어. 응급처치도 못했다고.” 헤이우드의 표정은 싸늘해지고 모두들 할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지금까지 조용하던 앤디가 차분하게 질문을 한다. “그 사람 이름이 뭐였죠?” 모두들 신참의 대담한 질문에 놀란다. 헤이우드는 죄책감 때문인지 더욱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뭐라고?” 앤디는 마치 죽은 신참의 이름을 자기 혼자라도 기억하고 싶다는 듯이,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면 그 사람의 죽음이 조금이라도 덜 무의미해지리라는 듯이, 진지하게 묻는다. “누가 그 사람 이름을 아는가 해서요.”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이봐 신참, 네가 무슨 상관이야. 이름이 뭐가 중요해? 이미 죽어버렸는데.”

   감옥 바깥에서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던 앤디, 아직도 자신의 유죄를 인정할 수 없는 앤디는 이제야 쇼생크의 ‘게임의 법칙’을 깨닫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그 어떤 개개인의 ‘이름’도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은 ‘앤디 듀프레인’이 아니라 죄수번호 ‘37927’로 불리는 ‘관리 대상’에 불과함을. 이제 성공한 은행 부지점장 앤디 듀프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내를 사랑했던 기억은 물론 바깥세상에서의 모든 행복은 차라리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감옥 안의 죄수들은 이미 감옥의 도덕에 길들어졌으며 스스로의 욕망을 감옥의 도덕이라는 잣대로 자기 검열한다. 복종하지 않으면 세 가지 길밖에는 없다. 린치, 독방, 아니면 죽음. 죄수가 내면화한 감옥의 도덕은 ‘두려움’이 만들어낸 강제이며 ‘복종의 기술’에 다름 아니다. 즉, 이들에게 도덕의 기초는 ‘선의’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9-09-08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이라는 것은 옳고 그르다는 판단보다는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니체가 도덕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냥 깨 부셔야 하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어떻게 니체의 도덕에 대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바람돌 2009-09-0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도덕이 '게임의 법칙' 같은 건가요?

train 2009-09-09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삶'이라는 거대한 게임의 법칙이겠지요.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되는 사회의 규칙들....

sotkfkd 2009-09-20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덕!
 

 


영화 <쇼생크 탈출>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 Nietzsche) ①

 

1. 형벌은 인간을 길들일 수 있는가

 

   영화 <몬테 크리스토>(2002)에는 죽어야만 나갈 수 있다는 악명 높은 독방이 등장한다. 오랜 감방생활에 지친 주인공 에드먼드 단테(제임스 카비젤)는 이렇게 항변한다. “제 방에는 72519개의 돌이 있어요. 전 그걸 세 번이나 세어봤다고요!" 10년이 넘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던 젊은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늙은 죄수 아베 파리아(리처드 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그 돌들에 각각의 이름은 지어줘 봤나?" 인간을 교화(?)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감방에서 죄수들은 ‘자기 계몽’이 아니라 하염없이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를, 어떻게 하면 이 저주받은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야수를 가두기 위해 고안된 동물원에서 동물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감시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탈출하곤 한다. 생명체를 가두어 길들이고 형벌로 단죄하는 모든 권력에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 그가 니체였다. 

   우리는 자유를 빼앗긴 인간의 한계상황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을 보았다. <빠삐용>에서 <쇼생크 탈출>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의 탈출이 이미 예견되어 있는 영화에서 관객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갇힌 사람의 죄보다 훨씬 무서운 ‘가두는 자들’의 공포를 본 것이 아닐까. 야수처럼 사나운 죄수가 우아한 에티켓을 갖춘 교양인으로 변모하는 영화가 관객의 시선을 끈 적은 거의 없었다. 형벌은 결코 죄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것, 맹수를 조련하듯 인간을 교화하는 어떤 권력도 인간의 의지를 막을 수 없다는 것. 우리를 매혹시킨 탈주범들의 이야기는 늘, 아무리 반복해도 지겹지 않은 이 자유의 피비린 중독성을 이야기해왔다. 도덕의 이름으로, 법률의 이름으로 인간을 가두는 권력의 잔혹성에 대해서라면, 우리의 니체가 가장 할 말이 많지 않을까.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이나, ‘회한’이라 불리는 저 정신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고유한 도구를 형벌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현실과 심리를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 진정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바로 범죄자나 수형자 사이에서는 대단히 드문 일이며, 감옥이나 교도소는 이런 집게벌레 종족이 번식하지 좋은 온상이 아니다. (……) 형벌이란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단련하며 냉혹하게 만든다. 형벌은 사람을 집중하게 만든다. 형벌은 소외감을 격화시킨다. 형벌은 저항력을 강화한다.  


-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002, 427쪽.

 
   

    요컨대 형벌은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만, 인간을 효과적으로(?) 길들일 수도 없으며,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덜 위험하게 보이도록 연기할 수는 있지만, 자신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스스로의 야수성을 완전히 길들일 수는 없다. 도덕은, 법률은, 감옥은,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거대한 동물원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 니체의 관점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은 이렇듯 ‘갇힌 자’보다 더욱 악랄한 ‘가둔 자’들의 부당한 권력과 그 내면의 나약함을 흥미롭게 해부한 바 있다. 이 영화는 보고 또 보아도 볼 때마다 새롭게 읽히는 풍부한 사유의 보물 창고다. 아마도 그 이유는 <쇼생크 탈출>이 ‘선과 악’의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인간 본성의 다채로운 모호성을 화두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시작부터 쏜살같이 주인공의 ‘단죄’를 향해 질주하는 ‘법’의 광기를 냉정하게 보도한다. 검사는 단지 ‘무죄를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의 유죄를 확정한다. 

   검사: 피고는 아내가 살해되던 날 아내와 다퉜습니다. 심하게 다퉜죠.
   앤디: 들통 나서 잘 됐다며 숨기려고도 안 했어요.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더군요.
   검사: 그래서 뭐라고 했습니까?
   앤디: 그럴 수 없다고 했죠.
   (……)  

    검사 : 싸운 후 아내는 어떻게 했나요?     

   앤디 : 짐을 꾸렸어요. 그 애인이랑 살려고 말이죠. 애인은 스포츠 센터 골프강사였죠.  
   검사 : 아내를 미행했습니까?
    앤디 : 먼저 몇 군데 술집에 들렀습니다. 그 남자 집으로 갔더니 없더군요. 차를 한 켠에 세우고 기다렸죠.
    검사 : 무슨 의도로요?
    앤디 :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웠고 술에 취해 있었죠. 그냥 겁만 주려고 했어요…….
    검사 : 두 사람이 돌아오자 따라가 살해한 거군요.
    앤디 : 아뇨. 술이 깨고 있었고, 마저 깨려고 집으로 차를 돌렸어요. 도중에 강에다 총을 버렸고요. 분명히 말씀드렸던 대로요.
    검사 : 다음날 그 집 파출부는 총에 맞은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기막힌 우연의 일치 아닙니까? 단지 제 생각입니까? 살인이 있기 전에 총을 버렸다? 편리한 착상이군요. 사실입니다. 경찰이 3일 동안 강을 조사했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죠. 그래서 피고인의 총과 피살자의 총 자국을 대조할 수 없었죠. 그것 또한 대단히 편리한 논리 아닌가요? 안 그런가요? (……) 현장에서는 피고지문이 묻은 술병과 탄알 타이어 자국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의 팔에 안긴 젊은 두 남녀가 죽었습니다.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크다고 해서 죽음을 선고할 수 있습니까?    (……) 이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닙니다. 간통이 죽을죄는 아닙니다. 이것은 훨씬 더 잔인하고 냉혈적인 복수입니다. 한사람 앞에 4발씩 쏘았습니다. 6발을 쏜 게 아니라 8발을 쏘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총을 다 쏘고 난후 다시 장전하여 그들을 쏘았다는 겁니다. 남은 총알을 사랑하는 사람의 오른쪽 머리에요. 저는 피고 듀프레인에게 냉혹하고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으로 각각의 희생자에 대해 한 번의 종신형씩 두 번의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이쯤에서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물음표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정말 앤디 듀프레인은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녀와 정부를 살해했을까.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피고를 ‘죄인’으로 확정할 수 있을까.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한 인간에 대한 두 번의 종신형으로 저 사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본 법정에 부여된 권한’이라는 것이 과연 정당한 권력인가. 한 인간을 두 번의 종신형에 처할 수 있는 권력의 막강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인간은 인간을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어디서 부여받은 것인가. 그들이 도덕이라 주장하는 것, 그들이 올바른 행위라 규정하는 판단의 근거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도덕은 과연 인간을 더 나은 삶, 더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가.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는 모든 규율에 ‘도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도덕은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권력이 아닌가. 

   
 

그들은 존엄함과 덕에 대해 많은 말을 한다. 그들이 무엇인가를 하려할 때 그러지 말라고 제동을 거는 것, 그것을 두고 그들은 덕이라고 일컫는다! 그리고 태엽이 감긴 단조로운 시계와 같은 자들도 있다. 그들은 똑딱거린다. 이 똑딱임이 덕이라 불리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 아, “덕”이란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가! 그들이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 니체, 정동호 역,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153쪽.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dlatjsdud29 2009-09-07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영화네요. 쇼생크 탈출 재미있게 봤던 영화인데ㅋ 니체는 이 영화를 어떻게 읽어갈지 기대됩니다.

true lies 2009-09-0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벌은 인간을 냉혹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 소름끼치는 진실이네요...

깜신 2009-09-0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느낌의 글 잘 읽고 갑니다. ^^

sotkfkd 2009-09-20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⑩

   

 10. 하찮은 흔적에서 빛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자, 그는 승리할지니……

   
 

캠벨: 우리의 진정한 입문의례는, “산타클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힌두의 구루의 가르침 속에 있습니다. 산타클로스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이어주는 은유이지요. 관계라는 것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체험이 가능하지요. 그러나 산타클로스는 없습니다. 산타클로스는 관계를 인식하는 길로 아이들을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속성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 없이 인생을 살겠다고 하는 것, 인생이 원래는 이런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유치한 발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모이어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하여,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하고 있습니다.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132~133쪽.

 
   

   돌아올 기차표가 없는 머나먼 길을 떠나온 센에게, 용으로 변신한 하쿠는 자신의 등을 내어준다. 하쿠의 듬직한 등 위에 올라 하늘로 날아오르는 센. 그녀는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하쿠의 등허리 위로 펼쳐진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며 강력한 기시감을 느낀다. 인간의 언어로는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이 황홀한 느낌, 이토록 행복한 느낌을,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는 것만 같다. 밤하늘은 거대한 강처럼 느껴지고 나를 등에 태운 하쿠의 이 체온은 내가 분명 느껴본 적이 있는 따스함이다. 아, 그래, 그거였어……. 센은 마음속 깊숙이 둥지를 튼 하쿠의 기억을 드디어 발견해내고 눈물이 그렁해져 고백한다. “하쿠, 엄마한테 들은 얘기야. 기억은 흐리지만. 내가 어렸을 때 강물에 빠졌는데, 그 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대. 문득 생각이 났어……. 그 강의 이름이 코하쿠였어……. 네 본명은 코하쿠야…….” 그 순간 하쿠의 몸을 둘러싼 수백만 개의 용의 비늘이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처럼 화르르 흩어지며 하쿠는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하쿠를 겹겹이 옭아매던 가혹한 운명의 사슬이 이제야 벗겨진 것이다. 손을 맞잡고 볼을 비비는 두 사람의 얼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흩어진다. 

   “치히로! 고마워! 내 진짜 이름은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야.” 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온몸으로 웃음 짓는다.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 신의 이름처럼 멋져!” 하쿠는 자신도 센의 진짜 이름 치히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낸다. “나도 생각났어. 네가 내 안에 빠진 신발을 주우려고 했었지?” 거대한 아파트가 들어서자 강의 신이었던 ‘하쿠’는 인간 세계에서 퇴출당해야 했고, 하쿠는 자신의 이름도 존재도 잊은 채 마녀의 부하가 되어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쿠는 문명이 삼켜버린 자연이었고, 도시가 짓밟은 생명의 입김이었다. 치히로도 기억나기 시작한다. 그녀가 강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 하쿠는 그녀를 집어삼키지 않고 얕은 곳으로 옮겨 살려주었다는 것을. “맞아, 네가 나를 얕은 곳으로 옮겨줬지.” 내가 누구인지 몰라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하쿠가, 연약한 소녀 센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운명을 되찾게 된다.  

   이제 봉인은 풀렸다. 두 사람의 운명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던 운명의 봉인은 센-치히로, 그리고 하쿠의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운명의 전투로 풀린 것이다. 너를 찾아 떠나는 머나먼 길이 곧 나를 찾는 유일한 열쇠였다. 너를 찾지 못했다면, 너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나는 나의 존재 또한 잃어버렸을 것이다. 센의 영웅적인 면모는 그녀가 헤라클레스처럼 대단한 힘을 가지거나 아테나처럼 출중한 지혜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개인적인 욕망을 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통과 임무를 피하지 않았다. 마치 ‘자아’라는 정해진 실체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주어진 모든 상황에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내 것을 지켜야 한다’는 애착을 어느새 끊어버린 그녀에게는 이미 두려울 것이 없었다. 센은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투사적인 영웅의 전형이 아니라 지극히 내향적이고 수동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 숨겨진 엄청난 폭발력, 에너지를 끊임없이 자기 안에 가두어 놓는 내성적 캐릭터 속에 잠재된 정화와 재생, 치유와 배려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심드렁하고 무표정하며 몰개성적으로 보였던 치히로의 얼굴이 어느새 총명하고 매력적인 센의 이미지로 바뀌게 되는 것도, 그녀가 지닌 내면의 폭발력이 ‘육화’된 결과가 아닐까.      

   
 

개인적인 야망을 무화시킨 개인은 살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닥치건 거기에 몸을 맡겨버린다. 말하자면 익명의 인간,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 무대의상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배우는 이전의 그 자신이듯이. 


 -조셉 캠벨, 이윤기 역, <세계의 영웅신화>, 대원사, 1996, 234쪽.

 
   

   하쿠와 센은 부푼 가슴을 안고 유바바 온천으로 돌아온다. 유바바는 도끼눈을 뜨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아기는 데려왔겠지?” 유바바는 늘 아기방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기만 하던 수퍼베이비가 어느새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혼자 서다니? 언제부터?” 하쿠는 아기를 무사히 데려왔으니 센을 인간 세계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간단하게는 안돼. 세상엔 룰이 있는 법!” 유바바는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지만 수퍼베이비가 엄마를 제지한다. “엄마! 치사한 짓 그만해! 난 무지무지 재미있었어!” 유바바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아들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당혹스럽다. “규칙은 규칙인데……. 안 그러면 저주가 안 풀려!” 수퍼베이비는 단호한 표정으로 엄마를 협박한다. “센을 울리면 엄마를 싫어할 거야!” 유바바는 휘청거린다. “그런 심한 말을!” 그러나 센은 이제 유바바를 겁내지 않는다. 수퍼베이비 ‘보’의 ‘연줄’에 호소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표정으로 오히려 아기를 달랜다.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유바바는 센의 계약서를 돌려주며 미리 소집해 놓은 수많은 돼지들을 가리킨다. “이 안에서 네 부모를 찾아! 기회는 딱 한 번! 맞히면 너희는 자유야!” 센은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돼지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엄마, 아빠를 찾아본다. “여기에는…… 엄마, 아빠가 없는 걸요?” 유바바는 흠칫 놀란다. “없어? 그게 대답이냐?” 센은 다시 한 번 결연하게 대답한다. “네!” 유바바는 하는 수 없이 인정한다. “딩동댕! 정답! 성공이야! 정답이야!” 센은 이제 누구의 조언 없이도 주어진 미션을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모두들 고마워요.” 유바바 온천 식구들이 모두 모여 센의 해방을 뛸 듯이 기뻐해준다.
    마녀 유바바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굴러가던 군대식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유바바 온천에는 전에 없이 신명나고 활기찬 축제 분위기가 감돈다. 머쓱해진 유바바는 센에게 새침하게 말한다. “네가 이겼어! 빨리 가버려!” 센은 아무런 원망도 남아 있지 않은 얼굴로 오히려 유바바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남긴다. “고맙습니다. 신세 많이 졌어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센의 깊이와 넓이 앞에 유바바의 얼굴에도 어느새 사악한 기운이 사라졌다. 신화적 내러티브의 궁극에서는 결국 ‘적들’의 존재조차 사라지거나 무의미해진다. 적들이야말로 장애물과 싸우는 주인공의 내공 지수를 높이는 최고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우리의 운명을 조각하는 가장 예리한 칼날이다.

   “모두들 안녕! 고마워요!” 어느새 정든 유바바 온천 사람들과 작별한 센은 하쿠와 함께 엄마, 아빠를 찾으러 간다. 어느덧 하쿠와 헤어질 시간. “난 더 이상 못 가. 온 길로만 쭉 따라가면 돼. 터널을 나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면 안돼.” 하쿠는 센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한다. “난 유바바의 제자를 그만 둘 거야. 진짜 이름도 되찾았으니까. 나도 원래 세계로 돌아갈 거야.” 둘은 이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한다. “또 만날 수 있지?” “그럼!” “꼭이야!” “뒤돌아보지 말고 얼른 가!” 센은 하쿠와 헤어질 순간이 되자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이곳이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꼭 저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까. 이제야 이곳에 익숙해졌는데, 이제야 내 영혼의 짝을 만났는데.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라는 메시지를 거절하면, 오르페우스처럼 간신히 구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잃게 될 것이고, 소돔을 탈출하던 롯의 아내처럼 소금 기둥이 될지도 모른다. 영웅의 ‘귀환’, 그 마지막 관문은 ‘내가 겪은 이 모든 모험의 희로애락’에 미련을 갖지 않는 것이며,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면 그 뗏목을 불살라버리는 용기다. 
 
   “치히로! 뭐 하는 거니? 어서 와.” 엄마, 아빠의 부름으로 센(신화적 자아)은 어느새 치히로(일상적 자아)로 돌아온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 아빠는 철없고 나약하기만 하던 센이 자신들을 구원해준 ‘여신 포스’를 장착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어서 집으로 가자고 야단법석이다. 하쿠의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걷던 치히로는 터널을 다 통과하고 나서야 터널 저편의 세계, 자신을 삼켰다가 다시 토해낸 저 어두운 심연의 세계를 바라본다. 어떤 언어로도 정리할 수 없는 치히로의 마음을 아름다운 주제가가 대신해주는 듯하다.  

   
 

슬픔은 셀 수 없이 많지만 그 너머에서 분명히 당신과 만날 수 있어. (……) 살아  있는 신비함. 죽어가는 신비함. 꽃도 바람도 도시도 모두 같아. (……) 산산조각으로 깨져 버린 거울 위에도 새로운 풍경이 비춰져 (……) 바다의 저편에서는 이제 찾을 수 없어. 빛나는 것은 언제나 여기에,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었으니까.

 
   

   저 아련한 노랫말처럼, 우리가 가장 원했던 것은 우리 안에 있다. 천복을 따르는 것은 자기 내부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지 외부 세계의 ‘정복’이나 외계 생명체의 ‘구원’이 아니다. 조셉 캠벨은 영웅의 마지막 임무는 하계에서 얻은 깨달음을 ‘원래의 세상’ 속에서 ‘재통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센이 된 치히로, 하쿠를 품어 안은 센을 통해 우리 가슴에 스며들어온 신화를 살아내는 것, 그것이 우리의 새로운 미션이 아닐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화적 상상력은 현실을 거부하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현실의 중요성을 박탈하여 현실에서 멀어지는 대체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현실을 더욱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능동적인 판타지다. 그가 느낀 문명에 대한 절망, 인간에 대한 비애가 아무리 깊고 어두울지라도 그가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결코 길을 내주지 않는 이유도 이 능동적 판타지에 기반한, 지극히 명랑하고 낙천적인 신화적 상상력에 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주체와 타자, 죽음과 삶 사이에 놓인 거대한 장벽의 틈새를 포착해낼 힘이 아직 우리 문명사회에 가녀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아티스트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로 인해 우리는 신화로 들어가는, 아직 닫히지 않은 입구가 조금은 남아 있음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아직 완전히 밀폐되지는 않은, 그 가느다란 신화의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실오라기 같은 생명의 햇살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대한 예술의 마그마로 폭발시킨다.
   우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물들이 아직 완전히 ‘통합’하지 못한, 신화와 현실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극을 메우는 저마다의 ‘비법’을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 ‘비법’은 물론 하루아침에 전수될 수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먼저 간 어진 친구들의 발자국을 따라 우리는 그 비법의 조각난 흔적들을 탐험해볼 수는 있다.

   캠벨은 이 비법을, 신화가 풀어내는 무의식의 비밀을 통해 발견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세계 각지에 흩어진 신화적 상징과 서사를 수집하고 연구하며 신화에 숨겨진 삶의 비의를 추출했다. 캠벨은 속삭인다. 모든 곳에서 상징을 보라. 죽음을 딛고야 일어서는 삶의 비애를 긍정하라.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이미 주어진 삶의 고통을 부정하지 말라. 타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먹어야만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 그것이 삶임을 인정하라고.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기쁘게 참여하는 희열, 그것이 신화 속 영웅의 가장 아름다운 본성이라고. 비논리적이라고, 비과학적이라고, 난센스라고 비웃지 말고, 신화를 통해 인류의 잊힌 기억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라고.
    괴물을 죽인답시고, 미신을 타파한답시고, 우리 안에 은거하던 소중한 신들까지 죽이지는 말라고. 운명의 미로에서 좌충우돌하며 삶의 신비를 하나씩 걸음마 하며 배웠던 영웅들의 숨 가쁜 호흡을 들어보라고. 신화의 첫번째 기능은, 지금 여기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이곳을 성소(聖所)로 만드는 것이라고. ‘덧없는’ 신화의 ‘명징한’ 물질성을 눈치 챈 사람은, 어디서나 신의 광휘를 보고, 어디서나 신의 축복을 읽어낸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꿈, 누구에게도 말해보지 못한 수줍은 꿈을, 밤새워 공들여 또박또박 종이 위에 적어보자.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신화다.  

   
 

어떤 것도, 신(神)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더 크지는 않다.
 (……) 한 푼도 없는 나나 당신도 이 땅의 알짜를 구입할 수 있다.
 (……) 어떤 미약한 물건도 우주의 수레바퀴의 중심이 될 수 있다.
 (……) 나는 만물에서 신을 보고 듣지만 조금도 신을 이해하진 못한다.
 (……) 나는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본다. 그 하나하나에 신의 서명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 놓아둔다. 어디로 가든
 또 다른 편지가 틀림없이 영원토록 올 것을 아는 까닭에. 

- 월트 휘트먼의 詩, <풀잎>(1855) 중에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6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필로우북 2009-09-0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문학의 흥미진진한 묘미, 또 그런 인문학을 공부하는 분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멋진 글이네요. 주말을 여는 감동적인 글에 힘을 얻고 갑니다 :)

깃털하나 2009-09-04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센과 하쿠가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 정말 어여뻤지요....마지막 월트 휘트먼의 시가 오랫동안 마음에 여운을 남기네요.

쾌몽 2009-09-0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 편의 애니메이션에 이렇게 방대한 의미가 담길 수가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sotkfkd 2009-09-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조차 우리의 자아보다 크지 않다.

you & I 2009-11-04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거리에 떨어진 신의 편지들을 곳곳에서 보다니, 게다가 어차피 또 올 것이니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다니, 캬~ 멋지구리 합니다그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