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④

  

 

4. 미지와의 조우 :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2> 

   
 

마라톤 선수의 모습을 보라. 난생 처음으로 경주에 참가한 사람과는 달리, 전문적인 마라톤 선수는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여러분은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경주를 하는 것이다. 이기느냐 또는 지느냐가 아니라, 오로지 경주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사건이다. 모든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기느냐 또는 순위 안에 드느냐는 그저 부차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것이야말로 구속 없는 참여인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86쪽.

 

 

   


   이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온천을 지배한다는 마녀 유바바의 방. 치히로는 유바바가 풍기는 으스스한 첫인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뜸 자신의 요구사항부터 제시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치히로의 아래위를 훑어보며 유바바는 콧방귀를 뀐다. “비실비실한 애가 뭘 하겠느냐? 인간이 올 곳이 아니다. 800만 신들이 피로를 풀러 오는 온천탕이야!” 이제야 이곳의 정체를 조금 알 것 같다. 치히로는 온갖 귀신들이 모여 온천욕을 하는,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유바바 월드에 입성한 것이다. “그런데 네 부모는 뭐냐? 손님 음식을 돼지처럼 먹어치우다니! 너도 다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어. 새끼 돼지로 만들어 줄까? 아니면 석탄으로 만들어 버릴까?” 유바바는 마치 치히로 가족의 행적을 낱낱이 감시해온 것처럼, 치히로의 속마음까지 꿰뚫을 듯한 커다란 두 눈을 번득인다.


  

    유바바의 콧바람 한 번이면 훅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치히로는 두려움에 떤다.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없다면, 난 어떻게 될까. “떨고 있구나. 그래도 여기까지 잘 온 걸 보면 틀림없이 누군가가 도와준 게야. 칭찬받을 만해. 누구였어? 가르쳐 주렴.” 치히로는 자신을 도와준 하쿠의 선의를 기억해낸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안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기억해낸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꿈쩍도 안 한다. “내가 널 왜 고용해야 하지? 굼뜬 응석받이, 머리 나쁜 울보한테 맡길 일 따윈 애초부터 없어.” 그때 아기 울음소리가 난다. 험상궂은 마녀 유바바는 갑자기 온화한 표정으로 돌변하며 아기를 어르느라 상냥해진다. 유바바가 아기를 달래느라 정신없는 사이, 치히로는 집요하게 부탁한다.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꼭 좀 일하게 해주세요!” 유바바는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모든 게 귀찮다는 듯, 얼떨결에 “알았다니까!”라고 대답해버리고 만다. 
  

   마녀의 음험한 협박에도 넘어가지 않는 치히로의 첫번째 승리, 그것은 단지 살아남는 것이었다. 때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 그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존엄하다. “계약서다. 이름을 써라. 일하게 해주겠다. 대신, 싫다든가 돌아가겠다고 하면 새끼 돼지로 만들어 버릴 테다!” 새끼 돼지로 변해버리지 않고, 숯검뎅으로 변하지도 않은 채, 일단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 치히로는 영웅의 첫번째 임무를 달성한 것이다. “치히로라고? 이름 한번 거창하구나. 그 이름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센이다. 알겠느냐?” 센은 자신이 일할 목욕탕으로 배정된다. “이름이 뭐지?” “네? 치히, 아니, 센입니다.” 신화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통과제의의 첫번째 문턱에 오르기 위해서는,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시켜야한다. 그것이 엄마와 아빠, 그리고 치히로 본인의 이름이었다. 이제 그녀는 치히로가 아니라 센이다. 아니, 자신이 치히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되는 센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화적 통과의례의 첫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이다.   

   치히로는 신화 속의 ‘성스러운 공간’으로 진입했다. 그곳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다. 일상의 자극으로부터 완전히 봉인될 때, 시간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될 때, 내면의 탐구는 시작된다. 

   
 

성스러운 공간은 속세로부터 완전히 밀폐, 봉인되어 있다. (……) 여러분은 날짜나 시간이 주는 자극의 영향으로부터 보호받는 영원의 장소에 있게 되는 것이다. 명상을 할 때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즉 여러분 스스로를 봉인하는 것이다.
  

-조셉 캠벨, 다이앤 K.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262쪽.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두려운 모험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간의 장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도저히 일상의 숨 가쁜 시곗바늘을 순순히 따라갈 수 없을 때, 문득 스스로 행방불명되고 싶었던 경험이 있는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연기처럼 사라지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바로 그때가, 우리의 영혼이 내면의 탐구를 시작하는 때, 치히로(일상적 자아)의 행방불명이 센(신화적 자아)의 탄생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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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black 2009-08-2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밉상들은 비슷하게 생긴 것인가? 유바바, 나 아는 사람 닮았어. 어쩌면 성격까지도..-_-?

테마파크 2009-08-27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ㅎㅎㅎ 그런데 유바바는 왠지 무섭다기보다는 우스꽝스럽다는, 알고 보면 헛점 투성이 일 것 같은 마녀 유바바^^*

비로그인 2009-08-27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위 안에 드는 것이 부차적이라고 말하지만, 이곳은 순위를 중요하게 매기고 있다. 1등을 해야 좋은 세상...

치히로 2009-08-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오나시라는 멋진 캐릭터가 탄생한- 애니죠!

고구마로소이다 2009-08-2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고보면 어제의 나도 그제의 나도 모두 행방불명인데-시간적인 것으로 생각하면-하루하루를 매일 신화를 창조하듯이 살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완벽할까. (몽상가의 변)

dlatjsdud29 2009-08-2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센과 치히로라는 애니를 봤지만, 치히로가 행방불명 속에서 뭘 보고 왔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정여울 선생님은 치히로가 모험의 끝에서 뭘 봤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doingnow12 2009-09-10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키는 천재일까요?

sotkfkd 2009-09-13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오직 살아남는 것이 그 어떤 영웅적 행위보다 존엄하다!
맞습니다. 늘!

sotkfkd 2009-09-13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의 내면 탐구!
구속 없는 참여야말로 진정한 참여, 진정한 주체, 진정한 자아가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③

  

 

3. 미지와의 조우 :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1> 

   
 


여러분이 어렸을 때 하던 일,
시간을 초월하게 만들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바로 거기, 우리 삶에 깃든 신화가 자리 잡고 있다.  

-조셉 캠벨, <신화와 인생> 중에서

 

 

   

    앨리스가 토끼굴에 빠져 느닷없이 추락하고, 페르세포네가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지하세계로 낙하하고,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찾기 위해 하계(下界)로 내려간다. 신화적 서사 속에서는 이렇게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나락으로 추락하는, 돌아올 기약 없는 미지의 모험을 시작하는 주인공들이 있다. 치히로의 첫번째 임무 또한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것이다. 하쿠의 조언대로 일자리를 부탁하러 가마할아범을 만나기 위해서는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기나긴 통로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야 한다. 겁에 질린 치히로는 돼지가 되어버린 부모를 구해내기 위해, 아니 지금은 단지 살아남기 위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처럼 으스스한 통로를 향해, 무작정 낙하한다.  

   추락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치히로는 뜨거운 불가마 곁에서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노동을 반복하는 가마 할아범을 만난다. 치히로는 아직 돈 한 푼 벌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녀지만 꼼짝없이 불가마에서 일을 해야 할 판이다. “가마 할아버지 맞으시지요? 하쿠가 보냈어요. 일을 하게 해주세요.” 치히로는 일단 다짜고짜 말을 뱉어놓긴 했지만 힘겹게 일하고 있는 가마 할아범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도저히 두 팔로는 해치울 수 없는 노동을 해내느라, 할아범은 거미처럼 여러 개의 팔을 갖게 된 것 같다. “내가 가마 할아범이야. 욕탕 가마에서 혹사당하는 늙은이야.”
 
    할아버지는 말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날렵한 손놀림을 쉬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조수들은 올망졸망한 검뎅이귀신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자 치히로는 도리어 차분해진 표정이다. 가마 할아범은 치히로가 전혀 필요 없어 보인다. “일손은 충분해. 여긴 온통 그을음이야. 대타도 넘쳐.”  일하지 않으면 검뎅이귀신들의 마법이 풀려 숯검정으로 돌아가 버린단다. 유바바 왕국의 냉혹한 생존 법칙을 눈으로 확인한 치히로의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치히로는 포기하지 않는다. 가마 할아범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조용히 검뎅이귀신들을 도와 일을 하기 시작한다. 무거운 돌을 들어 가마로 나르는 치히로의 모습은 연약하지만 더 이상 어리광이 묻어 있지 않다. 그녀가 편안하게 엄마, 아빠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다면, 어디선가 이토록 힘겨운 짐을 지고 있는 가마 할아범과 먼지꼬맹이들의 삶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 나-가족-학교로 이어지는 일상적 공동체의 울타리를 벗어나자 ‘타인의 삶’을 만나게 된다. 안전한 일상의 DMZ 안쪽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타인의 삶을. 어쩌면 지금 곤경에 빠진 나보다 훨씬 더 오래전부터 고통을 겪고 있던 삶들을. 난생 처음 닥친 어려운 미션을 조용히 해내는 치히로.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치히로를 지켜본 가마 할아범. 그때 마침 ‘린’이라는 종업원이 할아범의 식사를 배달해준다. 할아범은 린에게 치히로를 맡긴다. “내 손녀야.” 졸지에 가마 할아범의 손녀로 불린 치히로는 깜짝 놀란다. “내 손녀가 일하고 싶대. 그런데 여긴 일손이 충분해. 유바바한테 데려다줘. 나머진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가마 할아범은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치히로의 어리버리한 겉모습에 가려진 그녀의 진심을 알아본다. “어디서 일하든 유바바와 계약해. 가서 너의 운을 시험해봐.” 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치히로를 데리고 유바바에게로 간다. 치히로에게 ‘인간의 구린내’가 난다며 힐끔힐끔 바라보는 유바바 온천의 귀신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치히로는 간신히 유바바의 방에 도착한다.


   
 

여러 해 전 어느 초등학교 교실에서 일어난 일로서, 내가 잘 아는 가정의 아이에 관한 일화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이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했다. “신화가 무엇이지?” 그 중 한 소년이 답한다. “신화는 내면세계에서는 진짜인데 바깥 세계에서는 진짜가 아닌 거예요.” 불행하게도 선생님은 이 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종종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깊은 심리학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 신화는 꿈과 같다. 꿈은 무의식이 보내는 전령이다. 무의식은 꿈을 통해 의식의 관심사나, 무의식이 지니고 있는 내용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로버트 존슨, 고혜경 역, <We-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 동연, 2008, 2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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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atjsdud29 2009-08-26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실이 답답할 때는 새로운 나, 다른 환경, 무모한 도전을 꿈꾸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신화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세계를 꿈꾸고, 다른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치히로가 다른 세계로 떨어진 것처럼 현실의 나에서 멀어지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면의 나를 만나게 한다는 것 같습니다.

on story 2009-08-26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뭔지 설명할 수는 없는데, 왠지 이 길을 따라가면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을 때. 그 길로 가면 훨씬 더 힘들 것 같은데 왠지 그 길이 맞는 것 같을 때. 그때가 우리 안의 신화와 만나는 시간인가봅니다...데자뷰 같은 그런..

mr.black 2009-08-26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가물가물했던 영화의 추억이 여울님 덕에 생생해지네요.

문익환 2009-08-27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도 언젠가 부모님을 위해 필사적으로 기도했던 때가 있었는데...

doingnow12 2009-09-10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앙..먼지 넘 귀여워..으흑(>_<)

sotkfkd 2009-09-13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광팬!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②

  

 

2. ‘미션 임파서블’과의 조우 : 내 안의 중심을 잃어버릴 때, 여행은 시작된다

 

   
 

제 막내아들 녀석이 <스타워즈>를 스무 번 아니면 서른 번쯤 본 것을 알고는, 제가 “너 그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녀석 대답이, “이유는 아빠가 평생 <구약성서>를 읽는 것과 같지, 뭐”였습니다. 그러니까 제 막내아들은 새로운 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이끌리오, 2002, 54쪽.

 

 

   

  


 

   만약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 왕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웬디가 피터팬을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포르도가 반지원정대와 함께 길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안락하게, 이미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는 있었겠지만, 우리의 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준, 언제든 기억의 서랍 속에서 꺼내볼 때마다 가슴 떨리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은 될 수 없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영화나 드라마로 리메이크되는 옛이야기나 판타지물들은 저마다 드라마틱한 영웅서사의 플롯을 갖추고 있다. 이 영웅의 내러티브는 성인군자나 위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통과의례의 원형이다. <센과 치히로의 모험>의 도입부 또한 이런 영웅의 전형적인 모험의 서사를 품고 있다. 치히로는 헐리웃 블록버스터식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어린 소녀를 깨워낸다.  

   치히로는 엄마, 아빠와 함께 이사를 가던 중 길을 잘못 짚어 낡은 터널을 지나게 된다. 자동차 뒷자석에 누워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엄마, 아빠에게 심심하면 칭얼거리는 평범한 어린 소녀 치히로. 그녀는 낯선 학교로 전학가기가 싫어 심술이 잔뜩 난 상태다. 터널 저편에 어떤 세계가 있을까, 호기심이 일긴 하지만 아직은 새로운 세계가 마냥 두렵다. 엄마, 아빠와 함께 터널 저편으로 걸어가자, 폐허가 된 테마파크처럼 보이는 거대한 공터가 나타난다. 아버지는 무서워하는 치히로에게 호연지기를 가지라는 듯,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껏 잘난 척을 한다. “이건 테마파크 잔해야. 90년대 초 우후죽순같이 생기더니 거품경제 때문에 전부 망했지. 그 중 하나일 거야.” 그러나 왠지 괴기스럽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터의 분위기가 싫어, 치히로는 빨리 돌아가자고 한다.

   이때 아버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유혹의 손길이 다가온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 모퉁이를 돌아보니 음식점들이 빼곡히 도열해 있다. 주인도, 종업원도 없는데 음식 냄새의 유혹을 참지 못해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는 아빠와 엄마. “주인 오면 그때 돈 내지 뭐!” “그러지 뭐! 정말 맛있어. 너도 먹어봐.” 부창부수로 죽이 잘 맞는 엄마, 아빠는 치히로의 마뜩찮은 표정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마구 음식을 먹어댄다. 불안해진 치히로는 엄마, 아빠를 설득한다. “돌아가, 주인이 화낼 거야.” 아빠는 음식 맛에 취해 이미 정신이 없다. “괜찮아. 아빠가 있으니까. 카드도 있고 지갑도 있어. 너도 어서 먹으렴!” 게걸스레 주인 없는 음식을 먹어치우는 어른들의 탐욕에 놀란 치히로는 혼자 되돌아가겠다며 음식점을 나선다. 하지만 혼자서 돌아가기가 무서워진 어린 소녀 치히로는 다시 엄마, 아빠에게 돌아오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돼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일 거야, 빨리 깨어나자, 치히로는 스스로를 다그치지만 본래의 엄마, 아빠는 어디에도 없다.

   공포에 질려 엄마, 아빠에게서 도망치는 치히로 앞에 낯선 소년이 나타난다. 치히로를 보자 깜짝 놀란 소년이 외친다. “여긴 오면 안 돼! 어서 돌아가! 곧 어두워져, 그전에 돌아가!” 엄마, 아빠는 돼지로 변하고, 난생 처음 보는 아이는 ‘이곳은 출입 금지야’라는 메시지를 다급하게 보내고, 돌아가는 길은 알 수 없어져버린 치히로. 겁에 질려 정신을 잃을 지경인 치히로의 손을 잡고 소년은 일단 달린다. 그러나 허둥지둥하는 동안 이미 해는 져버리고, 낯선 소년은 치히로에게 무언가를 먹이려 한다. “입 벌려. 이걸 빨리 먹어. 이 세계의 것을 안 먹으면 넌 사라져.” 치히로는 도리질하지만 소년의 눈빛에서 진심을 읽어낸다. 모든 게 꿈이라고 믿고 싶지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음식의 뻣뻣한 질감을 느끼며 비로소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설마 엄마, 아빠가 돼지로 변한 것은 아니겠지,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우리 부모가 돼지로 변한 건 아니지?” 소년은 전혀 놀라지 않고, 이 세계에서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듯, 소녀를 위로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꼭 만나게 돼.”

   소년은 이곳이 인간에게 금지된 구역이며 ‘유바바’라는 마녀가 지배하는 영토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일을 해야 한다고. 가마 할아범을 찾아가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하라고, 힘들어도 참고 기회를 기다리라고. “그분께 일하고 싶다고 부탁해. 거절해도 끝까지 졸라. 일 안하면 유바바가 너를 동물로 만들 거야.” 소년의 말은 하나같이 알아듣기 힘들지만 치히로는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으며 이 혼란스러운 미궁을 지금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 세상의 가장 편안한 울타리였던 부모님에게도, 이사 오기 전의 그리운 친구들에게도 연락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소년은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내 이름을 부른다. “치히로. 내 이름은 하쿠야. 난 널 알아.” 우리는 정말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의지할 곳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이 소년만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다. 나처럼 어리고 작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비밀을 알아버린 듯한, 서늘하면서도 외로운 인상을 풍기는 이 소년은, 마치 어떤 소중한 메시지를 전달하러 날아온 전령 같다. 치히로 앞에는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까.

   
 

영웅의 여정은 항상 부름으로 시작된다. 인도자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아라. 너는 지금 ‘잠든 땅’에 있다. 깨어나라. 여행을 떠나라. 저곳에 너의 의식의, 또한 너의 존재의 온전한 측면이 있건만, 아직 한 번도 손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너는 여기서 그냥 머물 것이냐?” (……) 그렇게 해서 여정이 시작된다. 모험에의 소명(부름)을 알리는 전령관 혹은 고지자는 어둡고, 징그럽고, 무섭고, 세상의 버림을 받은 존재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소명에 다르면, 낮의 장벽을 통과해 보석이 빛나는 밤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부름은 곧 어떤 사회적 지위로부터 떠나라는, 즉 여러분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들어가 보석을 찾으라는, 즉 여러분이 사회적으로 속박되어 있을 때에는 찾기가 불가능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다. (……) 영웅이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그걸 찾으러 갈 때, 그게 바로 출발인 것이다. 여러분은 문턱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조셉 캠벨, 다이앤 오스본 편,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1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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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black 2009-08-2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자식 속 썩이는 부모는 정말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you and I 2009-08-25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ㅎㅎ 아무래도 치히로의 깨달음을 위해 부모님이 잠시 희생제물로 바쳐진 듯.^^* 어른들은 까먹어버린 아이들의 모험을 그리는 게 미야자키 하야오식인가봐요.

맨손체조 2009-08-25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문턱을 넘고 싶어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고 싶어요^^* 그럼 다른 삶과 조우할 수 있을까요?

sotkfkd 2009-09-13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마지막 상자, 조셉 캠벨의 글 인용 부분, 둘째 문단 첫 번 째 줄 '다르면'은 '따르면'으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잘 읽었습니다.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①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자라지 않는다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조셉 캠벨

 

 

   

   바야흐로 ‘소녀들의 전성시대’다. ‘국민 여동생’이라는 한국형 신조어는 21세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압축하는 핵심적 문화적 코드가 되었다. 보아-문근영-김연아-원더걸스-소녀시대 등 성인을 압도하는 초특급 스타들로 이루어진 국민 여동생의 계보. 그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 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키덜트(Kidult)적 감수성이 묻어 있다. 또한 인생의 복잡다단한 통과의례를 10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단기간 속성 코스로 끝내버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의 정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의 소녀 스타들 뿐 아니라 <아이 엠 샘>을 통해 단숨에 전 세계 영화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다코타 패닝, <해리 포터>의 헤르미온느 역을 통해 10대에 세계적인 스타가 된 엠마 왓슨 등도 이 ‘소녀 시대’의 문화적 트렌드가 단지 한국형 신드롬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10대에 인생의 모든 희노애락을 다 경험해버린 듯한 이 소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하루도 빠짐없이 ‘검색어 순위’에 랭크되곤 한다. 

 

   언젠가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될지라도, 영원히 자라지 않는 우리 안의 소녀들에 대한 아련한 노스탤지아는 재패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수성이기도 하다. 이 ‘국민 여동생’에 대한 대중의 열광과 미야자키 하야오의 ‘자라지 않는 소녀들’의 차이라면, 그의 애니메이션 속 소녀들은 ‘실제 인물’을 대변하거나 ‘대중적 스타’로 유명한 것이 아니라 ‘신화적 상징’을 품은 소녀들이라는 것이다. 몸은 10대 소녀지만 마음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급인 원령공주와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의 올망졸망한 자매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 <천공의 성 라퓨타>의 ‘시타’나 <미래소년 코난>의 ‘라나’처럼 ‘구원의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공동체의 신화에 등장하는 원형적 인물들이다. 이 소녀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그림체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현대화된 신화적 모티브를 구현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독 ‘소녀들’의 이미지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자연과 인간의 관계, 신화와 인간의 네트워크에 가장 친밀하게 맞닿아 있는 존재들이 바로 소녀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은 가공할 살상 무기나 엄청난 자본 없이도, 이 스펙터클한 무한 미디어의 세계에 균열을 내는 거대한 인류학적 화두를 감당해낸다. 이 작고 여린 소녀들이 감당해온 엄청난 테마들은 바로 문명의 빛이 죽여버린 어둠, 혹은 제국의 총칼이 훑고 지나간 야생의 지대, 그리고 자본의 미사일이 황폐화시킨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어처구니없는 귀여움과 비현실적인 조숙함이 공존하는 이 소녀들을 보면,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현실과 환상의 경계, 신화와 현실의 경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물샐 틈 없이 구분하던 ‘합리적 이성’의 방패를 슬그머니 내려놓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어린이들을 생각하며 애니메이션을 만들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성인 관객들이 훨씬 많은 이유도, 어른들이 이 소녀들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을 바라보면 이 무한 경쟁에서 다만 살아남기 위해 더럽혀진 어른들의 남루한 삶이 새삼 부끄러워진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소녀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피터팬 콤플렉스’와는 사뭇 다르다. 피터팬 콤플렉스가 ‘나름 괜찮았던 우리 모두의 어린 시절’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향수에 가깝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소녀들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자기애적’이라기보다 ‘자기를 애지중지하느라 돌보지 못한 타인’에 대한 사랑을 환기시킨다. 

   
 

누군가가 아무도 몰래
작은 길에 나무 열매를 심고서
작은 싹이 돋아난다면
그것은 비밀의 암호
숲으로 가는 패스포트
멋진 모험이 시작됩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옛날부터 숲 속에 살고 있는
토토로 이웃집 토토로
어린 시절에만 찾아오는 신기한 만남
비 오는 버스 정류장에서
흠뻑 젖은 토토로를 만난다면
당신의 우산을 빌려주세요
숲으로 가는 패스포트
마법의 문이 열립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달이 뜬 밤에 피리를 분답니다
이웃집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토토로
만약 토토로를 만나게 된다면
멋진 행복이 당신을 찾아옵니다  


-<이웃집 토토로> 주제가.

 
   

   나는 가끔 내가 좋아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며 그들끼리의 가상 인터뷰를 기획하고는 한다. 만약 언어의 장벽도 시간의 장벽도 공간의 장벽도 사라진다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장 대화가 잘 통할 것만 같은 캐릭터가 바로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 아닐까. 숲의 날짐승과 길짐승, 나무와 풀잎 하나하나, 돌멩이와 벌레 하나하나까지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려 하는 나우시카와 원령공주는 조셉 캠벨이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아메리칸 인디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동물들과 곤충들을 향해 거리낌 없이 언외언(言外言)의 대화를 나누는 나우시카 vs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부르며 대화했던 아메리카 인디언들. 숲의 정령을 지키기 위해 인간이 떠받드는 기술과 자본의 엄청난 힘과 싸우는 원령공주 vs 문명화된 미국인들이 어떻게 대지와 하늘과 강과 바람을 ‘사고팔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인디언 추장 시애틀.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랍니다.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2002, 155~156쪽.

 
   

   우리가 오늘부터 함께 떠날 신화 여행은 현대 문명이 ‘귀신’을 몰아낸답시고 함께 몰아내버린, 우리 안의 가장 귀한 것들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 될 것 같다. 이 모험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는 바로 센과 치히로,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와 조셉 캠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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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 2009-08-24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미야자키 하야오와 신화라. 그리고 자라지 않는 소녀들^^* 벌써 다음회가 궁금해 집니다.

mr.black 2009-08-2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 천진한 영화에서부터 흘러나올 철학적 사유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

도로로커피 2009-08-2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맨날 일본어 노래로 아무 생각 없이 들었는데, 가사에 저런 뜻이 있군요. 순수하기도 해라. ㅎㅎ

doingnow12 2009-09-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야자키작품들을 보며 왜그렇게 가슴에서 뭉실뭉실 감정들이 피어나오는지를 꼭집어 표현할 수 없었는데 속시원합니다..ㅎㅎ미야자키작품이 주는 묵직한 감동들은 여울님이 표현한 나를 애지중지하느라 돌보지못한 타인에 대한 사랑.. 그것이 움찔움찔 마음을 그렇게도 동하게 했나봅니당..(>_<)캬..멋지셔요

sotkfkd 2009-09-13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
아름다운 우리 말!

러브 미 텐더 2009-10-06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우리 안의 잃어버린 소녀들을 찾아 떠나는 신화 여행. 미야자키 하야오는 언제나 광대한 영감의 보고이지요~^^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⑩

 

10. 네 잘못이 아니야(It’s not your fault)……  

 

   이제 윌과 숀의 심리 상담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스물한 살이 된 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평생 그의 인생을 밝혀줄 소중한 멘토를 얻었다. 숀으로 인해 윌은 자신의 빛을 가리고 있던 어둠의 실체와 대면했다. 윌의 고통은 단지 과거의 상처들만이 아니었다. 윌의 미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바로 ‘내가 고통의 근원이다’라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가는 곳마다 잇따라 일어나는 불행의 씨앗이 바로 자신의 존재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어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을 내팽개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을 떠나도록 방치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무력감, 그것은 ‘모든 게 내 탓이다’ 혹은 ‘나는 저주받은 존재다’라는 치명적인 죄책감을 낳았다. 숀은 그런 윌의 자책감을 알고 있다. 숀은 자신의 과거 또한 윌과 비슷한 상처로 얼룩져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윌도 처음으로 스스로의 상처를 담담하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숀 :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셨다. 늘 고주망태였지. 완전히 술에 찌들어서, 두들겨 팰 사람을 찾곤 했지. 난 엄마와 동생이 맞지 않게 하려고 먼저 덤볐지. 반지를 끼고 계신 날이면 더 볼만했어.
   윌 : 그 남자는…… 늘 탁자에 렌치와 각목과 혁대를 늘어놓고는, 절더러 선택하라고 했죠.
   숀 : 나 같으면…… 혁대로 하겠다.
   윌 : 전 렌치를 택하곤 했어요.
   숀 : 왜?
   윌 :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죠.
   숀 : 네 양부였니?
   윌 : 네……. 제 평가 결과는 어때요? 애정 결핍 같은 건가요?
   숀 : 이 기록들…… 모두 다 헛소리야. 네 잘못이 아냐.
   윌 : 알아요.
   숀 :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네 잘못이 아니야.
   윌 : 알아요.
   숀 : (숀은 윌의 내장기관까지 다 뚫어버릴 듯한 깊은 눈빛으로 윌을 바라보며 다시금 힘주어 말한다) 네 잘못이 아냐.
   윌 : 안다고요!
   숀 : (숀은 점점 윌을 벽 쪽으로 몰아세운다) 아냐, 넌 몰라. 네 잘못이 아니다.
   윌 : (윌은 숀의 집요한 반복에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안다니까요!
   숀 : (다시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같은 문장이지만 매번 다른 울림으로 윌에게 다가간다) 네 잘못이 아냐.
   윌 : (감정이 폭발하며) 알았으니까 성질나게 하지 말라구요!
   숀 : 네 잘못이 아니야.
   윌 : (이제는 절규하는 윌) 제발, 성질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선생님만이라도!  

   숀 : (숀은 여전히 놀라우리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네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평생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숀은 이 짧은 문장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네 잘못이 아냐.
   윌 : (윌은 그제야 숀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처음으로 울어버린다. 그리고 숀에게 안겨서 마음껏 운다) 젠장, 정말 죄송해요.
   윌 : (윌을 힘껏 품에 안으며) 다 잊어버려.

   내가 나를 해치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해칠 수 없다. 인간을 분석하는 그 어떤 이론도 살아 있는 인간의 상처에 완전히 다다를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성실한 ‘개입’은 연민이나 분석, 해부나 비판이 아니라 다만 가만히 서로의 존재에 스미고 번지는 ‘행위’를 통해 천천히 일어난다. 겹겹이 쌓인 위악의 제스처들, 그 두터운 연기력의 각질을 벗겨내면, 윌의  상처의 뿌리, ‘죄책감’이 놓여 있다. 나는 재수 없는 아이, 내가 닿는 모든 것은 다치고 상하고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것이 내 탓일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죄의식. 그곳을 향해 숀은 매번 다른 울림으로 번지는 주술적 언어, ‘네 잘못이 아니야!’로 다가갔다. 그 뿌리 깊은 죄의식을 떨쳐버리는 순간, 윌은 자유가 된다. 더 이상 심리 상담 같은 건 필요 없어진다. 상담 마지막 날, 윌은 자신이 ‘치료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않던 이 오만한 청년은, 태어나 처음으로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게다가 그토록 윌의 취직을 바라던 램보 교수가 소개해준 굴지의 회사 ‘맥닐 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윌은 자신의 천재적 재능을 발휘할 멋진 직장을 찾은 것이다.     

   윌 : 이걸로 끝인가요? 치료는 끝난 거예요?
   숀 : 그래. 넌 완치됐어. 이제 자유야.  
   윌 : 저기, 선생님께 정말…….
   숀 : 말 안 해도 알아. 네 마음을 따라 가렴. 그럼 괜찮을 거야. 
    

   윌은 부모도 형제도 없지만 그 어떤 부모 형제와도 바꿀 수 없는 친구 처키가 있음을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사슬로 자식을 옥죄는 부모가 아니라, 우정이라는 빛으로 친구의 어둠을 밝히는 처키와 그 일당들. 그들은 윌의 스물한 살 생일 선물로 자동차를 선물해준다. “축하한다, 짜샤!” 돈 없는 친구들이 여기저기 버려진 부속품들을 모아 뚝딱뚝딱 정성 들여 만든, ‘빈티지’형 자동차를 보며 윌은 자신이 이토록 큰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돈으로 살 수도 다시 기억하여 만들 수도 없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윌 헌팅 표 DIY 자동차. “나하고 빌리하고 부속을 모으고 모건이 매일 구걸을 좀 했지. 빌리하고 내가 엔진을 새로 만들었어. 스물한 살 생일 축하한다.” 태어나서 이렇게 못생긴 차는 처음 본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윌의 얼굴에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덧없는 우울의 표정이 어느덧 완전히 걷혀 있다.  

   다음 날 아침, 처키는 여느 때처럼 어슬렁거리며 고물 자동차를 끌고 윌의 집으로 간다. 헤이, 윌, 어서 나와! 쿵쿵쿵!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늘 졸린 눈을 비비며 건들건들 처키를 향해 다가오던 윌이 보이지 않는다. 처키는 놀라움과 상실감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로 윌의 텅 빈 방을 바라본다. 이제 정말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윌은 기별도 예고도 없이 떠났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윌이 드디어 내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제 윌을 볼 수 없지만 행복하다. 처키는 만족스러운 듯, 슬픔 따위는 이미 날려버린 듯, 여유롭게 웃으며 차에 탄다.

   한편, 골치 아픈 제자와의 아름다운 만남을 뒤로 하고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려던 숀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쪽지를 발견한다.

 “선생님. 램보 교수님이 제 일자리 때문에 전화하시면,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꼭 잡아야 할 여자가 있거든요!”

   윌은 젊은 시절의 숀을 제법 그럴 듯하게 흉내낸 것이다. 첫눈에 반한 여자를 잡기 위해 역사상 최고의 야구 시합 입장권을 날려버린 숀의 로맨틱한 정신을 계승한 윌의 편지를 보며, 숀은 투덜거린다. “망할 자식, 감히 내 흉내를 내다니!” 숀은 그제야 모든 걱정을 덜어놓은 듯 행복한 표정이다. 윌은 멋진 직장으로의 취직을 포기하고, 스카일라를 찾아 떠난다. 취직은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에 치명상을 입고 홀로 떠난 연인 스카일라는 다시는 잡을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스스로 자폐를 선택한 천재 소년 윌 헌팅은 이제야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한다. 풀 패키지로 세팅되어 있는 완전한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만나 미래의 불안정함을 함께 견디는 것, 다만 둘이 함께 ‘시작’한다는 것이 소중한 일임을. 윌의 고물 DIY 자동차가 고속도로를 상쾌하게 활주하며 영화는  끝난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구호물자만이 아님을 강조했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삶을 버티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처럼’ 사랑하고, ‘아주 좋은 시절처럼’ 꿈꿀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단지 의식주뿐 아니라 아름다운 것, 즐거운 것, 감동적인 것을 꿈꿀 권리가 필요하다. 수전 손택이 감행했던 어떤 날카로운 평론보다 매혹적인 ‘평론 활동’은,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던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던 일이었다. 모두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수전 손택에게 물었다. 언제 폭탄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서, 연극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게다가 슬픔을 잊을 만한 유쾌한 공연도 아니고, <고도를 기다리며>라니, 너무 우울하지 않냐고. 도대체 사람들이 연극을 보러 오기는 하겠냐고. 수전 손택은 이렇게 대답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폭격으로 망가진 사라예보의 이미지만 생각하느라, 사라예보가 과거에 활기 넘치고 매력적인 수도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하다. (……) 재능 있는 배우들이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듯이 교양 있는 관객들도 여전히 사라예보에 있다. 단지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배우들과 관객들이 극장을 오가다 폭격을 맞거나 총격을 당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관 밖을 나섰을 때뿐만 아니라, 침실에서 잠을 잘 때, 부엌에 뭔가를 가지러 갈 때에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수전 손택, 김유경 역, <강조해야 할 것>, 시울, 2006, 407~408쪽.

 
   

   그녀는 오래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사라예보를 위해, 사라예보를 향해 창작된 듯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하며 사라예보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물도 없고 화장실도 고장난 열악한 상황에서, 매일 폭탄 소리를 들으면서도, 언제 우리가 공연 중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고도를 기다릴 수 있는 자유, 예술을 만끽할 수 있는 자유,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사라예보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뉴욕 비평가와 함께했다. 그녀는 전쟁의 고통에 빠진 사람들이 모두 현실도피적인 오락물만을 원할 것이라는 통념과 싸웠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사라예보 사람들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예술로 변형하고 확인하는 것에서 오히려 힘과 위안을 얻는다.” (위의 책, 409쪽) 전쟁이 일어나도, 내 옆의 사람이 죽어가도, 우리는 살아야 하고, 살아 있다는 것을 가장 뜨겁게 확인하는 길은, 단지 우리가 먹고 입고 싸는 동물만이 아님을 깨닫는 일은, ‘예술’과 함께하는 일임을, 수전 손택은 온몸으로 증명했다.

   
 

문화, 특히 진지한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라예보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화장실이 오물통이 되지 않도록 변기에 물이 나오게 하는 데 거의 하루 종일 매달리면서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공장소로 가서 줄을 서 떠온 물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런 굴욕감은 공포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라예보의 연극관계자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해왔던 일을 계속한다는, 즉 자신들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작 물 긷는 사람이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라예보에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 하는 사람을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배우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다. 다른 연극인들도 기꺼이 우리 리허설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매일 극장에 간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성을 표현하는 즐거운 일인 셈이다. 
 

-위의 책, 412~413쪽.

 
   


   월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조명도 화장실도 물도 없는 무대에서, 배우가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호텔 식당 쓰레기통을 뒤져 빵을 찾아내 스텝들과 나눠 먹으며, 고도나 클린턴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오지 않는 소품을 기다리며, 수전 손택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수전 손택, 이재원 역,<타인의 고통>, 2004, 208쪽.

 
   

   내 몸의 고통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앓는다는 것. 그것은 연민이나 동정이나 분석이나 평가가 아니라, 그들 삶을 향한 완전한 몰입, 나를 잊어 너를 꿈꾸는 절실함이다. 아무런 ‘실용성’이 없지만, 나 아닌 타자의 욕망을 상상하게 만드는 공감의 장치, 내가 아닌 타자의 삶을 살아내는 망아(忘我)의 탈주. 그것이 예술의 힘 아닐까. 수잔 손택은 『문학은 자유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이 모든 불운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자유의 공간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여권이라고. “문학, 그것도 세계 문학에 다가간다는 것은 국가적 허영심, 속물 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운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은 광활한 현실로, 즉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었습니다. 문학은 자유였습니다. 특히 독서와 내면의 가치가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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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손체조 2009-08-21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도 그런 '여권'을 보내주세요, 여울님^^*

루비 2009-08-23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친구들이 만들어준 DIY 자동차, 완전 뭉클했지요. 윌에겐 그 고물자동차가 광활한 현실로 들어가는 멋진 여권....

기름종이 2009-08-24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익후, 이 영화 한 번 봐야겠네요. 줄거리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끼쳐.;; 재밌을 듯.

sotkfkd 2009-09-13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은 자유이다.
감동적입니다.
우리들의 모든 처키를 위해서 감사의 기도를!
잘 읽었습니다.

프라푸치노 2009-10-06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불운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자유의 공간으로 떠날 수 있는 여권! 가슴이 마구마구 뜨거워집니다. 콩당콩당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