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④

 

4. 당신의 불행이 당신의 질병을 부른다?


   카프카는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아프답니다. 폐 속의 질병은 내 정신적 질병이 넘쳐흐른 것에 불과하지요.” 이런 식으로 ‘정신적 요인’을 질병의 원인으로 치환시키는 사고법은 ‘당신의 성격이 당신을 죽일 수 있다’, ‘암을 유발하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암 환자는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된 사람이다’라는 식의 당혹스런 논리를 대중적으로 유포시키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라는 믿음은 16세기 후반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을 때부터 유포된 낭만적 환상이었다. 감정이 질병을 유발시킨다는 논리, 질병의 원인 자체가 개인의 불행 혹은 악행에 기반한다는 상상은 수전 손택이 열렬히 비판했던 ‘질병에 대한 은유의 시스템’이었다. 질병을 정신적으로 치환할수록 질병의 실체는 타자화된다. 모든 일탈이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됨으로써 사람들은 일탈의 원인 제공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는 순환논리에 빠져든다.

   수전 손택이 보기에 이런 관점은 질병의 책임을 환자에게 덮어씌우는 폭력이며, 의학적 치료의 필요성과 과정을 알고자 하는 환자의 의지를 꺾어버릴 뿐 아니라, 환자가 의학적 치료자체를 회피하는 결과까지 초래한다는 것이다. 어이없게도 ‘환자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따라 치료가 가능해진다는 당혹스런 환상이 유포되는 것이다. 

   윌은 ‘소년의 불행이 정신질환을 낳았고, 소년의 정신질환이 범죄를 낳았다’는 식으로 전개되는 기성세대의 판결에 저항한다. 윌은 자신의 불행과 범죄의 원인을 분석하려는 모든 권력에 구토를 느낀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천재 길들이기를 위한 정신분석 맞춤 서비스’를 해줄 수 있는 의사를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램보의 노력을 무시한다. 램보의 대학 동창 숀(로빈 윌리엄스)은 램보가 ‘이제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찾아가는 정신과 의사다.

   윌은 이번에도 또 냉철한 이성으로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진단하려는 의사의 속셈을 속전속결로 격파하겠다는 듯, 시건방진 표정으로 숀의 진료실을 두리번거린다. 윌은 ‘너의 불행은 네 과거의 상처 때문이다. 그 상처 때문에 너는 악행을 저지르거나 질병에 걸린다’는 식의 태도를 혐오한다. 그러나 윌 또한 이러한 전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윌은 숀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고 그림 속에 스민 내면의 상처를 투시하여 숀의 인생을 속속들이 분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마치 그림 한 장으로 숀의 인생 전체를  MRI 스캐닝하듯 훤하게 분석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득의양양하다.

   윌 : (건들거리며) 누구누구처럼 선생님도 곧 귀를 자를 것 같네요.
   숀 : 그래? 당장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서 고흐로 이름이라도 바꿀까?
   윌 : 풍전등화라는 말 알아요? 어쩌면 선생님이 그런 격인지도 모르죠.
   숀 : 어째서?
   윌 : 폭풍 속의 항구처럼 위태위태해 보여요. 머리 위의 사나운 폭풍우와 집채만 한 파도. 게다가 노는 부러질 것 같고. 너무 놀라 혼비백산할 지경이라 있는 힘을 다해 항구로 치닫는 꼴이라구요. 어쩌면 힘든 현실을 피하려고 정신과 의사가 됐는지도 모르죠.
   숀 : 맞아, 그거야! 그러니까 직분을 다 해야지. 빨리 시작하세.
   (숀은 그 정도의 예리한 분석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인정한다. 그러나 윌은 얼핏 잔인한 표정을 지으며 그림 속을 꿰뚫어볼 듯한 표정으로 숀에게 뇌까린다.)
   윌 : 잘못된 짝과 결혼했나 보군요.
   숀 : (이번에는 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입 조심해. 조심하라구, 알았어?
   윌 : (숀의 분노에도 아랑곳 않고 더욱 잔인한 표정으로, 더욱 오만하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숀을 밀어붙인다) 내가 맞춘 거죠? 부인을 잘못 얻은 거죠? 왜요? 배신하고 도망갔어요? 딴 남자랑 눈 맞아서? 
   숀 : (윌의 멱살을 잡고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다시 내 아내를 모욕했다간 널 그냥 안 두겠어. 그냥 안 두겠다구! 알아들었어?
   윌 : (조금은 당혹스런 표정을 애써 숨기며 애써 쿨한 척) 시간 다 됐네요.
   숀 : 그렇구나. 

   윌은 웬만한 의사나 교수의 실력보다 자신의 직관과 지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윌 스스로가 ‘나보다 나은 충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윌은 이번에도 자신을 치료하려는 정신과 의사의 자존심을 가차 없이 꺾어 자신에게는 치료가 필요 없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는 숀의 붓 터치와 색감을 분석하여, 숀의 심리를, 숀의 과거를 난도질한다. 숀의 표정은 지금까지 윌에게 봉변을 당한 다른 의사들처럼 ‘오늘 똥 밟았네!’ ‘재수 옴 붙었네!’ 같은 표정이 아니다. 진심으로 상처 입은,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이다. 윌은 숀의 고통을 규격화하여 객관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숀의 과거를 도륙한다. 이로써 숀은 말썽꾸러기 윌이 처음으로 끝까지 상담 시간을 지킨 생애 최초의 정신과 의사로 등극한다. 결과는 ‘막돼먹은’ 윌 군의 판정승일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obewithyou 2009-08-1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윌 헌팅으로 맷 데이먼과 밴 에플렉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었죠. 두 사람 모두 짱 멋있었음. 지금 봐도 대사가 서늘하고 먹먹...

맨손체조 2009-08-14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님의 오늘 글을 보니, 갑자기 MBC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생각나요. 너무 많이 울었던 그 드라마. 강부자와 서신애 공효진 그리고 장혁과 신구의 그 애절한 모습이 생각나요. 참, 톰 행크스와 덴젤 워싱턴의 <필라델피아>도 그래요^^*

울컥소년 2009-08-14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현실이 힘들어서 그런지, 상처입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괜시리 울컥하네요. 쩝 ㅠㅠ

sotkfkd 2009-09-13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밀고 당기기!
그곳에 진정 필요한 것은 진정성이다!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③

 

3. ‘천재’라는 꼬리표가 담을 수 없는 것들


   질병에 대한 가장 악질적인 환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범죄가 범인의 소유물인 것처럼(?), 질병도 환자의 소유물이라는 환상이 아닐까. 아픈 사람 스스로가 병을 만든다든지, 환자 자신이 질병의 원인이라는 식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범죄가 범인의 사유재산이 아니듯 질병 또한 환자의 사유재산이 아니다. 에이즈 인권 운동 포스터에는 이런 말들이 적혀 있다. “단지 내가 HIV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내가 죽음의 전문가일 것이라고 기대한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내 모든 에너지를 오직 ‘삶’을 향해 쏟아 붓고 있다.” “나는 HIV 보균자 그 이상의 존재다(I’m more than HIV-Positive).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신나게 춤추러 가고 싶고, 포켓볼도 치러 가고 싶다. 내 친구들과 함께.” 

   그렇다. 사람들은 누군가 HIV 보균자라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그 사람의 이름도, 존재도, 희망도, 취미도 깡그리 잊어버린다. 단지 ‘HIV 보균자’라는 사실만으로 (아직 발병하지 않았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데도) 존재 전체가 그 새빨간 낙인 속에 갇혀버린다. 사람들은 ‘에이즈’라는 낱말을 떠올리는 순간 동시에 ‘죽음’을 떠올린다. 마치 에이즈 환자라면 당연히 죽음에 대해서는 훤하게 통달했을 거라 지레 짐작한다. 그러나 정작 에이즈 환자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윌의 상처 또한 그렇다. 사람들은 윌 헌팅이 ‘천재’라는 것을 안 순간 그가 왜 ‘천재답게’ 굴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왜 그렇게 끊임없이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는지, 자신의 재능을 ‘실용적인 목적’으로 써먹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램보 교수는 윌의 이 병적인 행동만 교정하면 윌이야말로 세계 수학계를 뒤흔들 재목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 윌의 천재적인 재능이 그의 트라우마 혹은 정신질환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윌의 입장에서 이 공격적인 태도는 ‘질병의 발현’이라기보다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소극적인 복수 혹은 공격적인 방어다.
   그가 천재라는 사실은 어쩌면 이 영화의 트릭이다. 그는 남들에게 절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상처를 ‘천재’라는 화려한 커튼 뒤로 철저히 은폐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상처는, 그의 고통은 ‘천재’라는 꼬리표로도, ‘트라우마’라는 진단으로도, ‘자기애성 인격장애’라는 병명으로도 완전히 담을 수 없는 불가해한 미로이므로.  

   램보 교수는 구치소에 갇힌 윌을 빼내기 위해 협상을 한다. 판사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자신의 보호하에 윌을 석방하기로. 램보 교수는 윌에게 면회를 가서 그에게 조건을 제시한다. 첫번째 조건은 매주 자신과 수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두번째 조건은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다. 윌은 피식 웃는다. 램보는 심각하다. “내겐 치료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할 의무가 있거든. 둘 중 어느 조건이라도 이행하지 않으면 남은 복역기간을 채워야 해.” 윌은 이 조건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석방된다. 램보 교수와 함께 하는 수학 공부는 견딜 만하지만, 정신과 치료는 죽을 맛이다.
   윌이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치료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받는 것이다. 더불어 정신과 치료의 엄숙한 분위기도 한몫한다. 마치 ‘구원의 대상’인 양 그를 딱하게 바라보는 의사들의 눈빛을 그는 견디지 못한다. 윌은 자신을 치료하려는 의사들에게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자신의 문제가 ‘치료’로 해결될 수 없음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최면을 걸려는 의사 앞에서 최면에 빠진 양 가짜 연기를 하고, 상담을 하려는 의사에게 “당신 게이지? 지금도 날 덮치고 싶지?”라는 식의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치료는, 아니 ‘환자라는 낙인’은 윌을 더욱 나쁜 상태로 몰고 간다.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됐다. 첫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범죄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었으며, 범죄자는 비난받거나 처벌되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사가 그를 이해하듯이) 이해되고, 치료받고, 교정되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두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질병은 기본적으로 심리적인 사건으로 해석됐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의식적으로) 원했기 때문에 병에 걸리게 된 것이며, 의지를 사용해 스스로를 치료할 수 있으며, 질병으로 죽지 않기를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믿도록 유도됐다. (……) 질병을 심리학적으로 다루는 이론은 환자를 비난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수단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스스로 질병을 가져 왔다는 통고를 받게 되는 환자들은, 자신들이 당연히 병을 앓을 만한 짓을 했을 것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수전 손택, 이재원 역, <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86~87쪽.
 
   

   지금 윌에게 필요한 것은 진단이나 치료가 아니다. ‘너의 성격 때문에 너의 천재성이 질식당한다’느니, ‘너의 과거의 트라우마를 치료하면 너는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느니, 이런 식의 감언이설은 윌에게 먹히지 않는다. 그에게 필요한 사람은 그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해줄 사람이 아니라, 겹겹이 닫혀 입구조차 찾을 수 없는 그의 마음의 문을 열어줄 사람이다. 그의 ‘천재적인’ 자기방어의 치밀한 방범시스템을 뚫고,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그 자신도 잊고 있었던 자신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줄 사람. 이 가망 없는 게임에 드디어 구원투수가 나타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핸드크림 2009-08-1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수전 손택 젊었을 때 사진, 포스 작렬인데요~^^

블랙베리 2009-08-12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인생의 구원투수는 언제 나타날려나. 주변에 온통 악당들 뿐이다. ㅠㅠ

flytothemoon 2009-08-1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ㅋㅎㅎ 블랙베리님, 완전 동감입니다요^^ 굿윌헌팅의 로빈 윌리엄스는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이예요. 하지만 정말 저런 멘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게 하는 사람.

둥이 2009-08-1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난 램보 교수이길 원해야 하나여?
아님 윌이길 원해야 하나 고민중....

sotkfkd 2009-09-13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과 병원. 꼭 필요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까?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 - ②

 

2.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죄수’로 호명되다


   영화의 첫 장면. MIT 대학 교실은 대학원생들로 가득하다. 램보 교수(스텔란 스카스가드)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수학 수훈상 수상자답게 호기롭고 당당하다. 그는 수업을 마치며 학생들에게 과제를 낸다. “본관 복도 칠판에 푸리에 이론을 적어뒀으니, 누구든 학기 말까지 풀어주기 바란다. 그걸 푼 사람은 내 수제자로서 명예와 부를 얻게 될 것이며 그 성과가 기록되고 영예로운 MIT 테크지에 이름이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큰둥하다. 아무리 부와 명예가 좋다지만 워낙 어려운 문제라 자신이 풀어낼 리가 없다는 얼굴들이다. 수업이 끝난 후. 청소부 윌(맷 데이먼)은 칠판에 적힌 문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윌은 언제나처럼 청소기로 복도를 청소하다가 칠판 위에다 뭔가를 끼적인다.

   램보는 토요일 MIT 대학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던 중 학생의 전갈을 받는다. 문제를 푼 사람이 나타났다고. 궁금해서 월요일까지 참을 수가 없다고. 램보는 교실 앞으로 가서 정답을 확인하지만, 문제를 푼 영광의 주인공은 색출하지 못한다. 월요일, 램보 교수의 강의실에는 때아닌 인파가 몰린다. 묘령의 수학 천재가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 모여든 것이다. 역시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램보는 또 하나의 과제를 낸다. 자신과 동료들이 2년 넘게 걸려 간신히 푼 수학의 난제를. 그는 문제를 풀어놓고 나타나지 않는 학생의 행위를 교수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이해한다. “모두에게 공표하겠다. 학생의 도전에 우리 교수진은 열정적으로 화답할 것이다.”
   이런 소동을 알 리 없는 청소부 윌은 또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청소를 하다가 마법에 이끌리듯, 대수롭지 않게 그 문제를 풀어낸다. 드디어 램보 교수가 칠판 앞에 서 있는 윌을 발견한다. 웬 청소부가 장난으로 낙서를 하는 줄로 오해한 램보는 도망치는 윌을 뒤쫓으며 소리를 버럭 지른다. “학생들 칠판에 낙서를 하면 어떡하나? 거기 서지 못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수학계의 거물 램보 교수도 2년이나 걸려 간신히 푼 문제를 몇 분 만에 푼 바로 그 주인공이, MIT 학생이 아니라 고등학교를 중퇴한 청소부 청년이라는 것을. 램보 교수는 우여곡절 끝에 윌의 행방을 찾아낸다.  

   이 와중에 윌은 유치원 때 자기를 괴롭혔던 아이를 우연히 만나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이다가 투옥되고 만다. 알고 보니 갓 스물한 살 청년 윌 헌팅의 전과는 화려하다. 법정에서 윌은 마치 오랫동안 변호사 생활을 해온 듯 능숙하게 자신에 대한 변론을 하고 있다. 판사는 윌의 화려한 수사학과 능청맞은 태도에 치를 떨다가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윌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10분 간 자네 이야기를 들으며 자네 전과 기록을 훑어보고 있었는데 놀랍더군. 93년 6월, 폭행죄 입건. 93년 9월 또 폭행죄. 92년 2월에는 차량 절도죄. 게다가 그땐 자기변호를 해서 1798년 마차 소유권을 인용해 기각시켰더군. 95년 1월에는 경관 사칭죄. 상해, 절도, 체포불응죄. 모두 패소판정을 받아냈어. 물론 피고가 몇 번이나 입양됐다 파양됐고 그 중 세 번은 학대로 인한 강제 파양이란 거 아네. (이 순간 여유 만만했던 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하지만 경찰을 친 건 용납할 수 없어. 따라서 기소 기각 신청은 기각한다. 보석금은 5만 달러로 책정한다.”

   램보 교수는 윌이 판결을 받는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윌은 램보 교수에게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법정에서 ‘죄수’로 호명되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알튀세는 누군가를 이름 붙여 호명하는 것 자체가 권력을 생산하는 효과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행인에게 “어이, 이봐!”라고 불러 세우는 순간, 행인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180도 몸을 돌려 경찰을 바라본다. 1초도 안 되는 이 짧은 순간, 행인을 불러 세워 직무를 수행하는 경찰의 권력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은 아무나 불러 세울 수 있는 자신의 권력을 발동시킨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한 시민은 그 권력의 효과를 인정한 셈이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전 손택은 ‘암 환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에이즈 환자’라고 호명되는 순간, 그 사람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옭아매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물을 예리하게 감지했다.
   수전 손택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폐병으로 잃었다. 사랑하는 친구를 에이즈로 잃고, 자신은 유방암과 자궁암으로 고통받았다. 수전 손택은 정작 질병의 치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것은, 때로 질병 자체보다 환자를 더 괴롭히는 것은, 환자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갑론을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질병에 대한 각종 환상과 왜곡된 이미지, 질병과 환자를 둘러싼 제3자들의 열띤 논쟁들이 오히려 질병을 타자화시키고 환자를 소외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천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천재도, 크게 보면 이 사회에서 ‘환자’처럼 낙인찍히는 효과가 있다. 천재로 호명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의 ‘재능’과 ‘IQ’, 그의 ‘이용 가치’에만 관심을 쏟을 뿐 그의 진심에는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램보 교수는 윌 헌팅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천재’로 호명하지만 윌 헌팅이라는 인간 자체에게는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램보 교수는 윌의 인생에 있어 구원의 메신저 같은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윌은 어쩌면 평생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자폐적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윌의 재능이 중요할 뿐 윌이 빠져 있는 고통은 윌의 천재성을 방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하다. 그는 윌의 고통이 자가증식한 나머지 윌의 정체성 자체를 구성하는 세포가 되어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다. 치유되어야 할 바이러스, 제거되어야 할 병균으로서의 고통. 램보 교수는 천재소년 윌 헌팅을 발견하는 순간, 범죄자 윌 헌팅의 골치 아픈 인생과 맞닥뜨리게 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석류소녀 2009-08-11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맷 데이먼 완전 파릇파릇할 때네요. +_+

맨손체조 2009-08-1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영화도 멋지지만,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도 참 좋죠? 시네필 다이어리에서도 음악이 흘러나왔으면 좋겠네요. 그럼 곱절의 감동이 밀려오겠죠.

sotkfkd 2009-09-13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이나 좋아하는 영화, 아마 열 번은 봤을까?
잘 읽었습니다.
 

 


영화 <굿 윌 헌팅>과 수전 손택(Susan Sontag) - ①

 

1.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1>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사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소유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변형시켜버린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중에서.
 
   

   현대인에게는 눈물의 에티켓이 있다. 이토록 쿨한 세계에서는 아무 데서나 주책없이 눈물을 보여선 안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운다. 사방이 꽉 막힌 스크린 앞에서, 혹은 아무도 우는 내 모습을 보지 않는 텅 빈 방 안의 TV를 보면서. 화면 안에서는 저토록 넘쳐나는 눈물이 현실 속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현대인은 미디어의 화면을 핑계로, 구실로, 울고 웃고 떠드는 데 익숙하다. 그런데 현실을 가장 리얼하게 재현한다고 믿어왔던 ‘사진’을 보면서도 울 수 있을까.
   사진에는 무엇보다 ‘소리’가 없다. 소리에는 감정을 증폭시키는 특유의 힘이 있다. 우리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 비치는 화면을 보며 울지만 정작 거기서 ‘사운드’가 빠진다면 화면 속 인물에게 감정이입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포토저널리즘이 극대화된 현대의 사진문화 속에서 대부분 세련되게 다듬어진, ‘연출된 사진 이미지’에 익숙해진 우리는 사진이 막상 지나치게 리얼한(?) 이미지를 담고 있을 때 고개를 돌린다. 너무 끔찍하거나, 너무 ‘날 것’이거나, 그 고통이 내게 전염될까 봐, 혹은 사진으로 전시된 고통이 너무 생생해 구역질이 난다는 이유로.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과 세계에 대해 가하는 복수다”라는 도발적인 선언으로 유명한 평론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머나먼 나라에서나 일어나는 구경거리로 만드는 각종 사진들, 그리고 그 사진들을 유통시키는 저널리즘을 비판했다. 수전 손택은 신문이나 TV를 통해 매일 보는 재난 사진이야말로 현대인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만드는 가장 일상적인 매체임을 지적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스펙터클하게 전시하는 사진 이미지를 보며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함께 아파하기보다는 ‘전시된 고통’의 이미지에 마취되어,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끝내는 고통을 타자화시킨다는 것이다.

   
  실제의 공포를 근접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때에는 충격과 더불어 수치감이 존재한다. 아마 극한의 상태에서 발생한 현실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를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런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즉, 그런 사진이 촬영됐던 군사 병원의 외과 의사)이나 그런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했든 안 했든, 나머지 우리는 관음증 환자이다.
어떤 경우가 됐든 간에, 이런 섬뜩함은 우리를 구경꾼이나 겁쟁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자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들로.”

-수전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04, 67~68쪽. 
 
   

   수전 손택이 비판한 것은 ‘사진’이라는 미디어로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기 쉽게’ 편집하고 수정하여 ‘유통’시키는 현대인의 잔혹성이다. 그녀의 사진론은 ‘미디어’를 통해 매개되는 현실 속에서 과연 ‘진짜 고통’과 마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 영화도 미디어일 뿐이다. 영화는 두 시간 만에 끝나버린다. 그런데 영화의 러닝타임은 두 시간 안팎이지만,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상영되기 시작된다.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끊임없이 새로운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평생 동안 ‘1인분의 삶’밖에 살 수 없는 인간이 ‘타인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아주 제한적이지만 여전히 소중한 메시지의 통로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굿 윌 헌팅>은 ‘천재 소년의 성장 스토리’라기보다 ‘타인의 고통에 눈뜨는 소년의 내밀한 고백’으로 다가왔다. 자기 고통에 골몰하느라 이 세상 그 누구의 고통에도 무관심하던 한 소년이 비로소 타인의 고통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몇 번이나 입양되고 파양되었으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양아버지의 매일 밤 계속되는 린치에 학대당하던 소년. 자신의 고통을 반복하여 곱씹으며 매일매일 영화처럼 ‘리와인드’하던 소년. 그 고통에 중독되어 한 번도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해본 적이 없던 한 소년이,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이 ‘사진 속의 아련한 풍경’처럼 멀게만 느껴졌던 소년이, 진정한 소울메이트를 만나 ‘액자 속에 갇혀 있던 세상’을 비로소 날 것으로 만나는 이야기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7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맨손체조 2009-08-10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전 손택과 '본' 씨리즈의 맷 데이먼이 만났다. 또 어떤 격렬한 스파크가 일어날지 무척 기대 됩니다.

프라푸치노 2009-08-10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굿 윌 헌팅~ 케이블에서 해줄 때마다 매번 새로운 느낌으로 다시 보는 영화예요. 맷 데이먼의 풋풋한 모습과 밴 에플랙의 반항기 어린 모습도 다시 보는 재미~ㅋㅋ

벌꿀농장 2009-08-1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수전 손택, 너무 좋아하는 분. 여울님만의 생각과 수전 손택이 만났을 때, 또 어떤 재미있는 글이 나올지 궁금하네요. ^^

sotkfkd 2009-09-1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 참 맘이 아프네요.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 마지막회

 

10. 무한미디어 사회의 구별짓기하다


   몸은 살아 있는 문화의 블랙박스다. 몸은 한 개인이 흡수해온 모든 문화적 기호의 집결체다. 이제 현대인은 상대방의 피부 상태를 보고 ‘나이’를 짐작하기보다는 그의 ‘계급’을 짐작한다. 차이의 생산을 통해 차별화되는 신체 이미지들. 눈길 한 번으로 상대방의 계급을 휘리릭 ‘스캐닝’하는 경이로운 독심술이 가능해졌다. 명품 화장품, 명품 의류, 고급 피트니스 클럽 회원권 등의 소비상품은 상층문화의 ‘다름’을 구별짓기하는 기호들인 것이다. ‘나태한’ 몸은 게으름과 가난의 상징이며, ‘바람직한 몸’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패스포트가 되었다.

   몸에 의해 해석되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현대인들. 몸이라는 취향과 계급의 전시장을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하지 못하면 금세 ‘루저’ 취급을 받는다. 아니, 누가 특별히 그렇게 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루저’로 단죄한다. 김애란의 소설 「성탄특선」은 단지 크리스마스 데이트 때 입고 나갈 옷이 없다는 이유로 남친에게 연락도 없이 시골집에 내려가버린 20대 여성의 심리를 묘사한다.

   
  학비를 모은 뒤 남은 돈으로 멋을 부려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었다. 여자의 옷차림은 스카프를 둘러맨 오리처럼 어정쩡한 구석이 있었다. 여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한동안 새로 산 치마 한 벌에도 기분이 좋아, 온종일 혼자만의 자신감에 휩싸여 캠퍼스를 날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여자는 알게 되었다. 세련됨이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오랜 소비 경험과 안목, 소품의 자연스러운 조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옷을 ‘잘’ 입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잘’ 입기 위해 감각만큼 필요한 것은 생활의 여유라는 것을. 스물한 살 여자는 남자에게 예뻐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허영심이기 전에 소박한 순정이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날, 남자가 여자의 옷맵시를 한 번도 비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그날 혼자 소주를 마셨던 남자는 여자가 잠적한 까닭을 지금까지 모르고 있다.

- 김애란, 「성탄특선」,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91~92쪽.
 
   

   세련된 옷맵시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남친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소박한 본능조차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절망. 친구의 결혼식을 앞두고 옷장 앞에서 좌절해본 모든 여성들은, ‘잘 빠진’ 짝퉁 가방 앞에서 몇 번이나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여본 적 있는 여성들은, 소설 속 이 여자의 말 못할 아픔을 이해할 것이다.

   <순수의 시대>는 자신들의 순수를 지키기 위해 언제나 타자의 침입을 경계하는 귀족공동체의 승리를, 메이‘들’의 승리를 보여준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도착적 폭력으로 공동체의 순수를 엄호한다. 메이가 누리는 화려한 귀족풍의 의상과 웅장한 인테리어는 ‘우리’의 범주에서 그 어떤 일탈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자에 대한 위협과 협박의 제스처다. 엘렌의 환영만찬을 집단 보이콧했던 그들이 엘렌을 추방하기 위한 환송만찬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도 그들만의 순수를 사수하는 방식이다. 메이가 자아내는 티 없이 고운 순수의 이면에는 언제 ‘자기 것’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신경증적 공포가 자리하고 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어야 자신이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흘러 뉴랜드가 57살이 되고 메이가 죽었을 때 뉴랜드는 아들의 권유로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전히 파리에서 혼자 살고 있는 엘렌의 소식을 들었을 때 뉴랜드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린다. 이제 그와 엘렌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들이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머니는 걱정할 게 없다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부탁으로 아버지는 원하는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하셨거든요.” 뉴랜드는 아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게 매우 큰 안도감을 가져다주었고 그의 희생을 아내가 이해했다는 데 크게 감동했다.” 

   뉴랜드는 아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드리워놓은 감성의 그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뉴랜드는 엘렌의 집 앞에서 그녀의 집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현실 같군.” 이것은 가장 뉴랜드다운 방식이다. 환상 속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 뉴랜드는 환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기쁨을 희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인간이므로. 메이는 죽어서까지 그를 ‘메이의 커뮤니티’로 묶어둔다. 그가 메이의 이해에 감동받았다는 것, 그것은 그가 뉴욕 사교계의 아비투스를 드디어 완벽히 ‘자기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토록 숨 막혀 하던 ‘메이의 아비투스’를 마침내 자신의 내면의 세포로 ‘장기이식’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  

   부르디외의 탁월함은 ‘주관적인 감정’까지 ‘아비투스’의 영역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감정도 제도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능력이며, 감정이 자아 정체성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엘렌이 고상한 귀족의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며 ‘우중충하다’고 느끼는 감정 자체가 메이에게는 ‘불경’한 감정이며 뉴랜드에게는 ‘충격적’인 감정이다. 개인의 흥분이나 동정심, 말할 수 없는 무의식까지도 감정의 사회학적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분석이 놓치는 개개인의 ‘말할 수 없는 욕망’, ‘표현되지 않는 욕망’까지 상징적 권력의 동력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부르디외는 상징적 권력이란 세계를 만드는 권력이라 말한다. 즉, 남자/여자 높은/낮은 힘센/연약한 등등, 강자와 약자를 가루는 모든 대립항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고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권력은 집단적 ‘호명’을 통해 공고화된다. 알파걸, 엄친딸/엄친아, 강부자, 고소영 등 기득권을 상징하는 각종 별명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 대한 배제와 차별의 권력으로 기능한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 88만원세대(88만원 받는 신입사원), 장미족(장기간 미취업족), 사오정(45세 정년퇴직), 삼팔선(38세에 은퇴), 토폐인(토익 공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공시족(공무원시험 준비족), 취집(취업 대신 시집가기), 대오족(대학5학년생, 졸업을 미루는 학생)……. 이 모든 약자의 호명 또한 강자와 약자를 가르는 사회의 상징적 권력을 공고화한다. 이러한 구별짓기의 문화권력은 민주주의 사회가 지속될수록 견고해진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시너지효과를 일으킬 때, 누구나 개인의 노력을 통해 부르주아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퍼질 때, 허리가 휘어지게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놓으면 집값이 두 배 세 배로 뛸 것이라는 환상이 ‘대중화’될 때, ‘구별짓기’의 문화적 파장은 더욱 사회 깊숙이 내면화된다.

   우리는 아비투스의 그물망이 조종하는 대로 투표한다. 우리는 모든 선거가 자유로운 유권자의 선택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전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비투스의 그물들이 우리의 신체를, 의식을, 무의식까지도 쥐고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층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것조차도 그들의 문화적 선택이 지배계급의 논리에 따라 ‘규격화’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계급 착시’가 아닐까.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바로 인간의 육체를 통해 전달되는 권력 효과를 증명하는 개념이다. 단지 보수여당을 지지하고 투표하는 결과적 행위만이 아니라 뉴타운 공약 여부에 따라 후보를 판단하는 유권자의 취향 자체가, 뉴스에 대한 일상적 무관심이, ‘정치는 나와 상관없다’며 투표일에 휴가를 떠나는 무관심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습관적 냉소라는 아비투스를 구성하는 일상의 습속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속한 계급의 이익에 맞추어 개인의 선택을 내린다. 그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이거나 자각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적군과 아군의 대립을 단지 보수 대 진보식의 커다란 구분이 아니라 아주 촘촘한 문화적 일상적 구별짓기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강남식과 강북식의 이분법도 있고 외제차와 국산차의 이분법도 있으며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식의 기상천외한 이분법도 있으며 얼짱과 얼꽝식의 당혹스러운 구분도 있고 나이트클럽에서 ‘물관리’하고 홍대 앞 클럽에서 출입자의 ‘액면가’로 입장권 배부 여부를 가리는 풍속까지 포함되어 있다. ‘걔는 나랑 친해’, ‘쟤는 나랑 안 친해’식의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구별짓기를 비롯하여 일상의 아주 미세한 선택 하나하나가 상징적 권력을 창조하기도 해체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보수정당이나 진보정당이냐를 결정하는 투표 행위가 아니라 일상의 닫힌 선분을 만드는 모든 사소한 억압들과의 투쟁이라는 것을, 부르디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 ‘계급 배반’이 아닐까.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아름다운 강남좌파, 노동자계급에게 음악과 회화와 그 모든 예술의 감동을 무료로 공급해주는 최고의 아티스트들,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미명 아래 세계를 20대 80의 사회로 만든 신자유주의와 정면 승부하는 대통령을……. 우리는 오늘도 이 모든 ‘창조적 계급 배반의 상상 속 리스트’를 채워보며 부르디외가 투쟁했던 현대사회의 ‘새로운 앙시앙 레짐’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찾는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7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ellowcup 2009-08-0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홋. 재미나게 읽었던 부르디외 편이 끝났네요.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주제도 너무 기대돼요! 화이팅!

mint 2009-08-07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영화평론은, 그 영화를 실제로 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라고 생각해요. '순수의 시대'는 매우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더운 여름, 좋은 글 쓰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다음 글도 즐겁게 기다리겠습니다~ ^^

애플주스 2009-08-07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삶의 모든 과정이 보이지 않는 아비투스의 그물로 친친 감겨 있는 듯한 슬픈 환상...아, 떠나고 싶다!!^^

milkyway 2009-08-08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블라우스를 사고 나면 치마가 없고 치마를 사고 나면 신발이 없고...ㅜㅜ...완전공감입니다. 그래서 지름신의 악순환이 계속되지요.^^ 조금은 특별한 외출을 준비할 때마다 옷장과의 전쟁이 시작되는...

하나비 2009-08-08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 나름 좋은 카메라를 사고도, 다른 사람의 카메라를 본 순간, 주눅이 들었어요^^* 타인의 것에 대한 비교우위를 통해서 내 것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제 모습을 보며, 참 꿀꿀해요. 여하튼 다음엔 더 재미난 글을 부탁드려요. 여울님.

맨손체조 2009-08-08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딱 삼팔선에 걸려 있어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으랏차차!

월요일이싫어 2009-08-10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영화는 또 뭘까요? +_= 이번에는 내가 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

sotkfkd 2009-09-13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계에 존재하는 아비투스, 사실 글에서 느껴지는 문장 그 자체로서의 뛰어남에 존경을 표하다가도 작가가 드러내는 '메이' 적인, '뉴렌드'적인 언행에 주춤 뒤로 물러서야 할 때의 슬픔이란 얼마나 큰 지!
타자로 존재하던 이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타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