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⑨

 

9. 그들 각자의 순수 (3) : 뉴랜드,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메이의 순수가 ‘결점을 용납하지 않는 결벽증’에 가깝고, 엘렌의 순수가 ‘진심을 숨길 수 없는 정직함’에 가깝다면, 뉴랜드의 순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정결함’에 가깝다. 뉴랜드는 다른 귀족에 비해 세속적 욕망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편이지만, 그만큼 세상물정에 둔감하며 현실감각이 없다. 엄청난 독서광이며 뛰어난 예술적 감식안을 지닌 뉴랜드는 책과 그림이라는 네모난 프레임의 내부에서는 한없이 자유롭고 낭만적이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세상이 책보다 흥미진진하고 그림보다 아름다울 거라는 환상이 존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고, 현실은 그가 좋아하는 책처럼 논리적이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그는 언제나 자신의 결정을 뒤로 미루며 스스로의 의견을 직접 내놓기를 꺼린다. 엘렌의 이혼을 만류할 때도 그는 다만 ‘가문의 생각’이 이러저러하다고 멋들어진 설교를 늘어놓았다. 엘렌은 물었다. “그들의 생각 말구요.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요. 당신도 이혼이 나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 순간 뉴랜드는 당황한다. 언제나 논리 정연한 ‘정답’을 준비해놓은 듯한 그의 두뇌 속 매뉴얼에는 ‘나만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한다는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결정적 순간에도 그는 늘 결정을 ‘외부’의 힘에 맡겨버린다. 그는 신혼여행 직후에 엘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바다를 바라보는 엘렌의 아련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그가 큰소리로 그녀를 불렀다면 충분히 들릴 만한 위치에서도 그는 그녀를 부르지 않는다. 어느 때보다도 그녀를 붙잡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배가 등대를 지나기 전에 그녀가 뒤돌아보면 그녀에게 가겠다고 말이다.” 

   엘렌은 독서와 예술로 감각의 세계를 확장한 뉴랜드에게 그 환상이 현실로 바뀔 수도 있음을 증명한 모험의 안내자였다. 한편 메이는 ‘모험’이라는 단어를 두뇌 속 사전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메이는 자신에게 맞는 취향의 수질관리를 하느라 주변의 모든 환경을 자신의 빛깔로 정화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결벽증적 순수를 유지하기 위해 남편에게도 ‘지나친 자유’를 꿈꾸는 것조차 금지한다. 남편이 읽는 책의 검열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다.

   “무슨 책을 읽어요?”
   “일본에 관한 책이야.”
   “왜 그런 걸 읽지요?”
   “모르겠어. 그냥…… 다른 나라니까.”
   “당신이 시를 읽어줄 때가 좋았는데.”

   메이의 마음속에서는 머나먼 나라, 가볼 수도 없는 나라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고 불쾌한 일이다. 메이가 그리는 귀족가문의 서재 풍경은 남편이 낭만적인 시를 읽어주고 아내는 우아하게 수를 놓는 것이다. 뉴랜드는 마음속에서만 독백한다. “그는 자신이 이미 죽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말이다. 아내가 죽으면 그는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는 아내라는 선명한 현실과 싸워 자유를 쟁취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가 자신의 모험과 자유를 방해하는 ‘상상 속의 간수’라고 생각함으로써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시킨다.
   그에게는 현실의 쾌락보다 환상의 쾌락이 달콤하다. 현실의 쾌락은 위험한 기회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결정적인 순간 늘 중요한 선택을 여성들에게 미룬다. 그는 마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아내를 원망하지만 결국 그의 아비투스가 모든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가슴속에는 엘렌과 함께 여행을 떠날 별장의 ‘열쇠’가 들어있지만 그것은 결국 그의 외투를 탈출하지 못할 것이며 엘렌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는 여전히 현실보다 상상이 매혹적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하면, 엘렌을 잡지 못한 뉴랜드의 무력함은 그의 축적된 과거와 잠재된 미래가 만들어낸 아비투스의 협상 결과다. 그가 여행 한 번 못 떠나게 발목을 잡는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것 또한 그의 육체에 뿌리깊이 각인된 아비투스의 결과인 것이다. 그는 상상속의 공간, 환상의 이미지가 현실의 잡다한 유해물질로 오염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결국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아처의 우유부단함은 신중한 성격에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아처는 그가 자라온 환경이 만들어낸 (메이로 상징되는)‘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아처는 앨렌이 나타나자 밋밋한 메이에게 싫증을 느끼고 메이를 가짜 순결, 오싹한 제도의 산물이라고 부르며 거부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 설명할 수 없는, 해결되지 않는 잉여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그만의 특이성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는 엘렌과 메이, 두 세계의 사이에 끼어 흔들리는 과정에서 자신이 결코 ‘메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예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뉴욕 사교계 인사들과 아처의 다른 점은 그에게는 문화적 유체이탈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교계의 관행을 끊임없이 객관화시켜 그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한다. 언제나 그 비판은 그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는 엘렌의 ‘환송 만찬회’에서 역시 다른 여인들과 달리 장갑을 끼지 않은 엘렌의 맨손을 바라보면서 간절하게 마지막 소원을 빌어본다. ‘이 손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어디든 따라가겠어’라고. 그러나 곧 자신이 화려한 만찬을 가장한 사교계의 거미줄 같은 감시망에 포획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밴 더 루이든 부인은 주인의 왼쪽에 앉음으로써 이 만찬이 ‘외국손님’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냈다. 올렌스카 부인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별선물보다 더 교묘하게 강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체면을 중히 여기고, 소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을 제외하면 ‘소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자신이 무장한 군대 한가운데 있는 죄수같이 느껴졌다. (……)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에서, 성급한 말보다 침묵에서 더 많은 것이 전해져 오는 죽음과 같은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서서히 죄어왔다.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410~412쪽. 
 
   

   그들이 연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만천하에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엘렌과 아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십수 년만에 돌아온 엘렌의 환영 만찬회 때는 노골적으로 집단 보이콧을 했던 바로 그 인사들이었다. 이제 엘렌이 추방당할 때가 되니 얼씨구나 하고 환송 만찬회를 열어주며 ‘외국인’의 추방을 기뻐하는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엘렌을 몰아내기 위해 이 파티를 주최한 것은 뉴욕 사교계의 공식 마스코트 메이였다. 메이는 자신이 임신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엘렌을 좌절시켰고, 메이가 잽싸게 준비한 엘렌의 환송 만찬회는 엘렌 추방작전의 화룡점정이었다. 엘렌은 몇 주 후 자신의 거짓말을 현실로 만듦으로써(그녀는 몇 주 후 임신에 성공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겠다는 뉴랜드마저 단념시킨다. 이제야 이 무서운 ‘소문의 공동체’의 힘을 깨달아버린 그는 고귀한 가문이라는 가족 납골당에 산 채로 매장당한 것 같은 공포를 느낀다.

   그는 자신의 낭만적 환상을 엘렌에게 투사하는 것에 만족하고 엘렌과 함께 진짜 세상에 나아가 전투를 벌일 용기는 없다. 환상의 쾌락에는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만 현실의 쾌락너머에는 엄청난 기회비용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늘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은 ‘이 세상 저 너머의 세계’조차 책으로만 경험하는 그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엘렌은 그가 마주친 유일한 실재이며 텍스트로 분석할 수 없는 야생의 실체였던 것이다. 그는 환상 속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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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 2009-08-0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마음으로는 엘렌을 동경하지만, 행동은 메이 같아요^^* 저도 가끔 같이 사는 사람이 읽는 책과 만나는 친구 등등을 검열한다니까요.

예인 2009-08-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비투스에 충실한 보수적인 메이,아비투스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엘렌,아비투스를 벗어나고 싶지만 현실 속에 안주하는 뉴랜드, 이 세명의 캐릭터를 아비투스를 중심으로 비교한 영화읽기가 흥미진진하군요. 인물 중심의 캐릭터의 묘사가 뛰어납니다. 철학과 문학을 아우르는 지식과 감수성 때문일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건필하세요.~~

시트러스 2009-08-07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했지만 결국 함께 할 수 없었던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가네요. 보통 이별의 원인을 성격차이로 얼버무리지만ㅜㅜ...우린 그때 서로의 탄탄한 아비투스의 장벽을 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후덜덜....^^

인디안밥 2009-08-0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환상의 쾌락이 더 강렬하다는 말에 공감해요. 연애를 하고 있긴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사랑하는 건지 사랑에 빠진 나 자신을 내려다보며, 사랑에 충분히 취해 있다는 안도감 자체를 사랑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그럴 때면 현실 속의 상대보다 잠들기 전 상상하는 누군가가 더 애틋하게 다가오거든요.

sotkfkd 2009-09-1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에서 시작하여 열한 번째 줄, '엘렌'은 '메이'의 오기가 아닌가요?

메이의 생이 참 안쓰러워요. 그렇담 그렇게 바라보는 나는? 이라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⑧

 

8. 그들 각자의 순수 (2) : 플라밍고를 닮은, 엘렌의 순수


   부르디외는 개인의 아비투스를 형성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부르디외의 눈에 비친 제도 교육은 사회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합법적인 장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육화된 문화적 불평등이 평생 지배/피지배의 권력구도를 재생산한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사회의 국가기관에 배치된 인력 분포를 보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국가기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중 90% 이상이 상층 부르주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에서 노동자계급의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입할 때 90% 이상 실업계로 진로를 결정하며, 이들 중 대부분이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또다시 노동자 계급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다.1)
   머나먼 프랑스의 이야기가 마치 우리 이야기인 듯, 슬프도록 익숙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육이 갖는 문화적 재생산의 역할은 유럽이나 아시아나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열로만 따지면 명실 공히 세계 1위를 다투는 한국.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힘겹게 축적한 상징자본이 그만큼의 문화적 지배를 재생산하지 못한다는 박탈감 때문에 오히려 더욱 경쟁이 격화되는 경향이 있다. ‘학력 인플레이션’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학력조차 ‘천국으로 가는 티켓’이 될 수 없다는 집단적 패배감 또한 ‘구별짓기’의 격화에 따른 문화적 효과라 할 수 있다. ‘학파라치’까지 만들어 사교육 열풍을 막는다는 정부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엄연히 존재하는 구조적 갈등을 전시행정으로 은폐하는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다.

   엘렌은 뉴욕 상류층의 문화적 환경에서 볼 때 가장 ‘저급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그녀에 대한 험담을 시작할 때 늘 ‘불쌍한 엘렌’이라고 운을 떼는 밍고트 가의 사람들이 보기에, 엘렌이 받은 교육은 비체계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비논리적이다. 엘렌의 부모는 방랑벽이 심했고 유럽의 이곳저곳을 떠돌다 죽었다. 엘렌이 받은 교육은 제도 교육과는 거리가 먼 데생이나 피아노 5중주 같은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것이었다. 엘렌은 앵글로색슨 계 미국인이 저급한 문화로 멸시하는 플라밍고를 멋들어지게 추고 나폴리 연가를 시원하게 부르는 등 이국풍(outlandish) 예능에 소질이 다분한 보헤미안 소녀였다. 상상력을 억압하는 뉴욕 백인 사회에서 그녀가 받은 이질적인 교육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에 위협적이었다. 그들은 매혹적인 엘렌의 이국 취향으로 인해 그동안 쌓아왔던 균질한 ‘취향의 커뮤니티’가 ‘잡스럽고 이질적인 외국취향’으로 물들까 두려워한 것이다.   

   그녀의 문화적 취향뿐 아니라 사람을 사귀는 취향 또한 사교계의 암묵적 규약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엘렌은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지닌 벼락부자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던 스트러더 부인과 사귀는가 하면, 소문난 바람둥이 보퍼트를 거리낌 없이 만난다. 그러면서도 ‘어떤 규칙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엘렌은 소외된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반사회적’ 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엘렌 또한 공동체의 시선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로운 ‘순수한’ 영혼이다. 관습에 순종하며 이질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메이의 순수(purity)와는 달리, 엘렌의 순수는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솔직하며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 순수함(honesty)이다. 

   엘렌은 밴 더 루이든 가의 웅장한 저택에 대해 거리낌 없이 “우중충하다(gloomy)"고 평가한다. 뉴랜드는 그녀의 솔직함에 충격을 받는다. 모두가 장엄하다고 격찬하는 밴 더 루이든 가의 저택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엘렌은 흔히 영화에 나오는 팜므파탈처럼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매혹을 지녔지만, 그들처럼 ‘도덕’과 ‘관습’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캐릭터는 아니다. 그녀는 애초에 자신의 신체를 집단의 아비투스에 가두는 모든 권력과 싸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엘렌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토록 원하던 이혼이었지만 메이와 아처의 가문을 위해 이혼을 포기했으며, 뉴랜드가 애절한 사랑고백을 했지만 메이를 생각하며 그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녀는 자신의 거주지와 친구들까지 간섭하는 귀족들의 노골적인 금족령을 견디지 못하고 보스턴으로 피란(?)을 간다. 그러나 사실 그녀의 도피는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생활을 가까이서 봐야 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함이었다. 마치 비즈니스상의 이유인 듯 가장하며 그녀를 급작스레 방문한 뉴랜드.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하는 그녀의 행동을 그 순간에도 ‘비관습적’이라고 콕 집어 지적해주는 모범생 뉴랜드 앞에서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비관습적’인 행동을 했다고. 거액을 제시하며 자신과 만나줄 것을 부탁하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뉴랜드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친다. “당신은 나에게 난생 처음으로 진짜 삶을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강요했어요. 누군들 이런 고통을 견딜 수 있겠어요?”
   엘렌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그러나 절대로 나약해보이지 않는 담담한 말투로 말한다. “난, 견디고 있어요(I'm enduring it).” 뉴랜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차분함에 말문이 막힌다. 그녀는 가식과 허세로 가득한 뉴욕의 본질을 속속들이 꿰뚫어버린 듯한 눈빛으로, 그녀의 전존재를 모두 드러내는 듯한 투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노골적으로 그녀를 거부한 미국을 그녀가 떠나지 않은 이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다만 멀리서라도 뉴랜드의 행복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뉴랜드가 안전하게 양가의 관심과 보호 속에 살아가는 것을 다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따스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녀의 슬픈 미소 뒤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는 극장이나 피로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서로 옆자리에 앉게 될 수도 있고 둘만의 시간을 다시 갖게 될 기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안 보고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할수록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는 것이 그녀의 순수다. 아주 가끔이라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아주 먼발치서라도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홀대하는 뉴욕에 남는다.
   함께 있지 않지만 어디서든 함께 있고, 멀리 있지만 언제나 가까이 있고, 그를 포기해야만 지킬 수 있는 사랑. 엘렌의 역설적인 사랑법은 열정과 욕망을 동경하지만 도덕과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그녀의 정결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엘렌의 순수는 가문이나 혈통이 가르친 것이 아니라 파란만장했던 그녀의 삶에서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결코 ‘학습되지 않은’ 순수였다. 복잡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사교계 사람들과는 달리, 엘렌의 원칙은 처음부터 단순했다. 그 모든 위험과 비방을 감수하고 왜 그토록 이혼을 원하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티없이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자유를 얻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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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부르디외의 책 『재생산』(장 클로드 파세롱·피에르 부르디외, 이상호 역, 동문선, 2000)을 참고할 수 있다. 교육을 통한 문화지배의 재생산을 한국적인 맥락에서 분석한 책으로는 <피에르 부르디외와 한국사회>(홍성민 지음, 살림, 2004)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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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5 1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렌의 캐릭터는 귀족적 아비투스로부터의 자유로운 여성이군요.
부르디외에 관한 책을 소개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비 2009-08-05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엘렌 같은 살아있는 예술 체험 교육이라니, 저도 한번 그런 전인 교육 받아봤으면~~^^*

블레이드러너 2009-08-05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플라멩고를 닮은 엘렌'. 오~오~오~ 작년 겨울 스페인에서 보았던 플라멩고. 훨훨 날아 갈듯한 자유로운 손짓 발짓 몸짓.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체되는 듯 한. 아, 저는 엘렌같은 여자라면 완전 땡큐죠^^* ㅋㅋㅋㅋ

sotkfkd 2009-09-1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그 노골적인 자본의 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⑦

 

7. 그들 각자의 순수 (1) : 메이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


   1921년 여성 작가 최초로 퓰리쳐상을 수상했던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 이 작품은 흑인뿐 아니라 모든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인종주의가 클라이맥스에 달했던 19세기 말을 배경으로 한다. 황인종의 이민이 홍수를 이루자 미국인들은 이것을 ‘황색 위협(Yellow Peril)’이라 선포한다. 1882년에는 중국인의 이민을 합법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남부 유럽인들도 ‘반몽고인’이기 때문에 중국인과 똑같은 법을 적용해 이민을 금지해야 한다는 황당한 주장이 제기될 정도였다.
   백인들은 황인종의 카테고리에 중국인은 물론 일본인, 피부색이 옅은 흑인, 유태인, 폴란드 인, 헝가리 인, 이탈리아 인, 아일랜드 인까지 포괄하여 ‘다인종사회의 위협’을 가시화했다.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던 극우 비밀결사 KKK가 활개를 치던 시대가 바로 이때였다. 미국 앵글로색슨족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백인의 피가 외국인의 피와 섞여 ‘저열한 잡종(!)’을 생산해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혼혈아란 ‘무정형적이며 형태가 없는 흐릿한 것’으로 규정되었다. 앵글로색슨의 피는 ‘친절하고 섬세한 피’라는 둥, 스페인 계·멕시코 계·포르투갈 계의 피는 ‘야만적이고 타락한 피’라는 둥, 그 잔혹한 배제와 추방의 수사학은 실로 기상천외하기 이를 데 없었다. 1)

   『순수의 시대』는 ‘우리’라 불릴 수 있는 내집단(in-gruop)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은밀한 배제와 노골적인 혐오감을 그린 우화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앵글로색슨 상류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상징적 마스코트가 바로 메이 웰렌드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관능적이며 예술을 사랑하고 독창적이며 반사회적인 엘렌과는 달리, 메이는 “경험이나 융통성, 판단의 자유 등을 갖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훈련된” 양가집 규수다. 메이는 남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천연두에나 걸리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메이의 순수는 곧 ‘다인종 시대의 다양성’을 거부하는 백인 상류층의 공포와 불안을 상징한다. 메이가 보기에 엘렌이 불행해진 이유는 그녀가 ‘외국인’과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기에 엘렌의 결혼은 가문의 혈통적 순수를 위협하는 ‘잡혼(雜婚)’이었던 것이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메이의 순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뉴랜드와 엘렌의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으로 점철된다. 그들은 처음에는 메이의 눈을 피해 조심스럽게 사랑의 암호를 주고 받는다. 그러나 엘렌은 뉴랜드처럼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않는다. 뉴랜드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자마자 엘렌은 말한다.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 뉴랜드는 처음에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엘렌의 모순적 어법에 스민, 치유 불가능한 슬픔의 메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엘렌이 뉴랜드의 첫 키스를 받아들이자마자 메이에게서 급작스런 편지가 도착한다. “드디어 결혼을 승낙받았어. 꼭 한 달 후야. 아처에게도 전보를 칠 거야. 말할 수 없이 행복해. 사촌 메이 보냄.”  

   뉴랜드의 사랑은 엘렌의 인내나 메이의 의지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전에 메이에게 ‘빨리 결혼을 앞당기자’고 졸랐다가, 오늘은 엘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오늘 날아온 전보의 내용에 따라 다시 메이와 결혼을 수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우유부단함을 보인다. 그는 엘렌과 결혼함으로써 가문의 영광을 훼손할 용기도 없었고, 메이와 결혼하여 엘렌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접을 정도로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메이는 뉴랜드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의 변화가 있음을 직감하고 결혼을 앞당긴 것이다. 메이와 뉴랜드는 드디어 결혼한다. 엘렌은 마치 모든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이, 초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여행을 떠나며 결혼선물을 남긴다. “아처는 전통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 자기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아내를 애써 해방시킬 필요가 없었다.”
   메이의 순수는 자신이 속해 있는 혈통과 취향의 커뮤니티 내에서는 한없이 친절하지만(그녀는 뉴욕 사교계 내에서는 최고의 현모양처다), 그 커뮤니티의 질서를 조금이라도 교란시키는 존재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잔인하다. 말하자면 메이는 부리는 하녀에게 헌옷을 던져줄 수는 있지만 그녀와 친구가 될 수는 없으며, 우연히 마주친 거지에게 적선을 베풀 수는 있어도 거지와 말을 섞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준수되는 게임의 법칙에 어긋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메이에게 엘렌은 그녀의 커뮤니티, 특히 미래의 가정을 위협하는 존재였고, 밍고트 가문의 순수를 더럽힐지도 모르는 위험한 존재였다. 그녀는 이제 대놓고 엘렌의 ‘행실’을 문제삼기 시작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메이는 남편에게 엘렌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다.

   “엘렌은 뉴욕과 집은 내팽개쳐두고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려 다닌대요. 엘렌이 말도 안 되는 사람이랑 결혼이라도 해버릴까 봐 미도라 이모가 엘렌을 지키고 있다지 뭐예요. 무엇보다도 엘렌은 왜 남편과 잘 지내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뉴랜드는 전에 없이 준엄하고 가혹하게 느껴지는 메이의 태도에 경악한다.
   “당신이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어.”
   “잔인하다고요?”
   “악마일지라도 지옥에 있는 사람이 행복할 거라고 말하진 않아.”
   메이는 그 투명한 순수로 넘실거리는 눈동자를 굴리며 차분하게 대꾸한다.
   “그러게 외국으로 시집가지 말았어야죠.”
   메이의 눈에 비친 엘렌은 ‘외국에 시집간 중뿔난 사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메이의 순수는 취향의 공동체 내부의 위생상태를 순도 99.99%로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자’라는 오염물질을 여과시킴으로써 유지되는 순수다. 메이는 신혼여행 기간 동안 유럽에 있을 때 유럽 귀족들도 놀랄만한 화려한 의상을 입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난 유럽인들이 우리를 보고 야만인들처럼 옷을 입는다고 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아요.” 그녀가 말하는 야만인은 정확히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이었다. 인디언은 야만인이고 자신은 문명인이라는 식의 태도는 명백히 인종주의적이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뉴욕 사교계의 순수성’을 대변하는 메이의 의식구조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가 이디스 워튼은 메이의 이러한 태도를 비판한다. 그것은 “포카혼타스가 격분할지도 모르는 경멸적인 태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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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작품이 그리는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허정애, '인종주의 우화로서의 <순수의 시대>', [영미어문학] 56호, 1999년, 65~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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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러너 2009-08-04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근대 초기 조선에서도 '중국인'과 결혼하는 조선인들에게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곤 했지요. '피'의 순수는, 일부에서는 여전히 진행중...

예인 2009-08-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혈통주의, 정말 갑갑합니다.
다른 집안 사람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자기 집안 사람보다는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치시절에 게르만족은 이유없이 우월하고
유태인은 이유없이 열등하다는 사고를 한번 만나보십시오.
오만정이 다 떨어집니다.

sotkfkd 2009-09-13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⑥

 

6. 아비투스의 딜레마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2>


   ‘마음은 굴뚝같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진실한 마음’이 아니라 ‘꿈쩍하지 않는 육체’다. 아내를 사랑한다고 주장하지만 설거지나 빨래는 결코 돕지 않는 남편들. 아내를 향한 지고지순한 순정은 가상하지만 설거지나 집안청소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 ‘육체의 무관심’이야말로 갈등의 씨앗이다. ‘작업’ 중인 여자에게는 손발이 오그라들게 매너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직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여성 동료에게는 ‘커피나 타 와, 프림 둘 설탕 하나!’라고 외치는 남성들. 뮤지컬 <헤드윅>에 열광하면서도 막상 실제 트렌스젠더와 마주치면 쭈뼛쭈뼛 움츠러드는 사람들. ‘학벌을 타파해야 한다’고 외치면서도 막상 아이비리그 출신을 보면 ‘역시 달라’라고 느끼며 몹시 우러러 보는 우리의 무의식까지도.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이론은 무엇보다도 ‘몸의 철학’이다. 육체에 각인되어 있는 수많은 관습과 욕망의 문신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수천 년 동안 투쟁하며 합의해온 육체의 행동 패턴.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그토록 힘든 이유는 그것이 성문화된 법전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합리적 이성의 명령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습관을 숨길 수 없는 ‘몸’이지 언제든 화려하게 분장할 수 있는 ‘마음’은 아닌 셈이다. 
   <순수의 시대>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몸과 자꾸만 변해가는 마음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등하는 인물은 뉴랜드 아처다. 엘렌은 뉴랜드의 인생에 있어 취향과 욕망 사이에 치명적인 충돌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취향의 공동체에서는 메이야말로 최고의 신부감이었다. 그러나 그가 한번도 목격한 적 없는 종류의 인간, 자신이 살아온 취향의 공동체와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한 엘렌을 만나자마자 그의 인생은 바뀐다. 잔심부름하는 하녀가 심부름 나갈 때 추울까봐 자신의 오페라 망토를 직접 입혀주는 엘렌, 모두가 수군거리며 욕하는 유명인사 버포트와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는 엘렌. 뉴랜드는 자신도 모르게 꽃가게에서 한번도 눈독들인 적 없는 노란 장미를 사서 엘렌에게 선물하는가 하면, 엘렌이 직접 불 붙여준 담배에 흠칫 놀라면서도 그녀와 태연하게 맞담배를 피우기도 하고, 그녀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비난하는 여동생 앞에서 그녀를 열정적으로 변호하기도 한다. “그녀 덕분에 밴 더 루이든 가문의 파티가 그 갑갑한 장례식 분위기를 떨쳐버렸다고!”
   그는 자신이 마치 엘렌 올란스카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선언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자유를 찾고자 하는 것이 미국의 이상에 따르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메이의 어머니 웰렌드 부인은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그건 외국인들이 우리에 대해 꾸며 낸 희한한 이야기일 뿐이지.” 엘렌의 출현으로 인해 그는 그의 인생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 있는 취향의 올가미들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이혼을 허용하지 않던 유럽을 떠나 ‘자유의 땅’ 미국으로 돌아온 엘렌의 낭만적 이상은 끔찍한 허상이었음이 밝혀진다.  

   뉴랜드는 그녀가 더 이상 추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의 이혼을 만류한다. 그러나 엘렌의 이혼을 막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남자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대고 ‘품위 없이’ 눈물을 흘리며 진심을 이야기한 첫번째 여자였다. 그의 합리적 이성은 ‘가문의 품위 유지를 위해 엘렌의 이혼을 막아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의 육체는 체면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엘렌의 거리낌 없는 웃음과 눈물, 거짓 없는 몸짓과 사랑스런 표정에 이끌렸다. 이 취향과 욕망의 균열 속에서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엄청난 일탈을 기획한다. 맨슨 후작부인이 엘렌의 남편이 지닌 엄청난 재력을 부러워하며 그녀가 유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자, 뉴랜드는 엘렌에 대한 억눌린 감정이 한꺼번에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 애가 어떤 것들을 포기했는지 아시겠어요? 소파 위에 있는 저 장미, 저런 것이 니스에 있는 남편의 으리으리한 정원 온실 안에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구요. 보석은 또 어떻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진주며 소비에스키 에메랄드, 검은 담비털 하며…….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팽개치다니! 그림이며 귀한 가구들, 음악, 지적인 대화……. 아, 아처 씨, 미안한 말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건 꿈도 못 꾸어 보았을 걸요! 그앤 그 모든 것을 맘껏 누렸다우. 모두 그 애를 여왕처럼 떠받들어주었지. 맙소사! 그애 초상화가 아홉 차례나 그려졌다고요. 유럽 최고의 화가들이 그애의 초상을 그리는 특권을 허락해달라고 애걸했지. 이런 게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애정이 넘치는 남편이 깊이 뉘우치고 있는데도?

-이디스 워튼, 송은주 역, 『순수의 시대』, 민음사, 2008, 203쪽.
 
   

   이렇듯 뉴욕의 귀족들은 ‘도도하고 고집 센’ 엘렌이 버리고 온 탐스러운 문화자본에 침을 흘릴 뿐, 엘렌이 결혼생활 내내 감내한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뉴랜드의 눈에는 그제야 엘렌 올레스카가 이제 막 지옥의 불길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뉴랜드는 엘렌을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 된 것이다. 뉴랜드는 엘렌이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후작부인에게 격노하여 품위 따윈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게 소리친다. “차라리 그녀가 죽는 꼴을 보는 게 낫겠어요!” 뉴랜드는 그제야 깨닫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거부감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던 자신의 내면에 일어난 감정의 파문을. 처음으로, 몸의 속삭임에 마음이 굴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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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 2009-08-0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를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불가에서 말하는 마음을 수행하는 최고의 경지는 마음이 실천과 같아야 되는 경지입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유가에서도 군자는 언행이 일치되는 사람입니다. 인격의 최고의 경지이지요. 부르디외가 아비투스를 관습과 욕망이 몸에 각인되어 있다는 것과 아비투스를 바꾸는 것이 진정한 실천이라는 말에 부르디외가 존경스럽게 보입니다.

블레이드러너 2009-08-04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몸 따로, 마음 따로, 사랑의 딜레마. 저같은 범인은 몸과 마음이 '언제나' 일치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겠지요. 신의 경지가 아닌 다음에야.

sotkfkd 2009-09-13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이 요구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영화 <순수의 시대>와 피에르 부르디외 ⑤

 

5. 아비투스의 딜레마 - 그것은 학습될 수 있는가 <1>


   영화 <프리티 우먼>은 거리의 창녀가 3일 만에 초특급 부르주아의 아비투스를 학습하는 경이로운 속성 엘리트 코스를 보여준다. 그녀가 부르주아들의 천국으로 입성하는 티켓은 바로 ‘신용카드’였다. 루이스(리처드 기어)는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창녀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고용’한다. 처음에는 밤의 파트너로, 나중에는 사교모임에 대동할 파트너로.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저녁 약속에 어울릴 만한 ‘품위 있는’ 의상을 사 입고 오라며 현금을 두둑이 건네지만, 싸구려 탱크탑을 걸친 비비안의 ‘행색’을 본 명품매장 직원은 비비안을 냉대한다. “당신에게 맞는 옷은 여기 하나도 없어요.” 그러자 루이스는 비비안을 직접 데려가 최고급 명품 매장의 여왕으로 만들어준다. 루이스는 비비안에게 냉소적으로 말한다. “사람에겐 불친절하지만 신용카드에게는 모두 친절하지.” 명품매장이 즐비한 로데오 거리에서 쇼핑백을 잔뜩 들고 경쾌하게 활보하는 비비안은 이제 더 이상 거리의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친구는 몰라보게 변한 비비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멋지다! 거리 출신 티는 하나도 안 나!” 비비안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돈만 있으면 쉬운 일이야.” 비비안이 부르주아의 세계에 진입하기 위해 필요했던 테이블 매너와 우아한 자태는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티 드레스를 입고 전용기까지 타고 날아가 오페라를 본다 해도 그녀가 ‘그들만의 리그’에 진정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예절 바른 냉대’를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널 창녀 취급한 적 없어.” 그는 그녀의 면전에서 ‘창녀’라는 단어를 내뱉음으로써 뜻하지 않게 그녀를 모욕하고 만다. 비비안은 쓸쓸하게 독백한다. “방금 그랬잖아요.” 그의 ‘뜻하지 않음’ 속에서, 즉 그의 무의식 속에서 그는 한 번도 그녀가 창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티 우먼>은 결국 비비안의 동화 같은 꿈을 실현시킴으로써 이 ‘양극화된 세계’의 갈등을 달콤하게 은폐한다. <순수의 시대>는 이보다 훨씬 현실주의적인 영화다. 엘렌의 1차적 아비투스는 뉴욕의 상류층에서 배태된 것이지만, 유럽에서의 자유분방한 문화생활과 결혼생활의 산전수전을 통해 습득한 2차적 아비투스는 달랐다. 엘렌의 취향과 행동 속에서 이제는 어린 시절 습득한 1차적 아비투스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으로부터 도망친 것 자체가 비관습적이지만(unconventional), 남성에게 맨손으로 먼저 악수를 청한다거나 당당하게 맞담배를 피우는 것, 하녀도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나는 것 등등은 사사건건 ‘그들만의 리그’가 오매불망 지켜온 전통과 관습을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녀의 이혼을 향해 공동체가 내린 판결은 그것이 ‘불쾌하다(unpleasant)’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이혼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양가는 ‘소문이 무성한, 이혼한 여자’가 존재하는 집안의 일원이 되기를 한결같이 거부했던 것이다. 

   엘렌은 완벽한 미국인으로 변신하여 고향에 정착하고 싶지만 아처는 경고한다. “당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을 거요.” 그것은 ‘남다른’ 엘렌의 독특함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너는 우리와 달라’라는 배제의 선언이기도 하다. 아비투스는 ‘연기’할 수도 있고 ‘학습’할 수도 있지만(그래서 타고난 신분을 속여 기상천외한 사기를 치는 사건들이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지만) 한 인간의 사회적 위치를 안정시키는 결정적 변수는 ‘공동체의 승인’이다. 엘렌은 오랜 유럽 생활 동안 습득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떨쳐내지 못함으로써, 아니, 그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정말 원한다고 표현함으로써 ‘그들만의 리그’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을 발급받지 못한다.
   신분과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사랑이 뉴스거리가 되고, 신데렐라 스토리가 해마다 버전-업되어 ‘욕먹으면서도’ 세계적으로 양산되는 이유는, 그만큼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이탈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끼리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어르신들의 노파심은 이 ‘아비투스의 충돌’을 되도록이면 피해가라는 현명한(?) 처세술일까. 뉴랜드가 엘렌에게 매혹을 느끼면서도 그녀의 맨손과 담배와 과감한 의상에 매번 화들짝 놀라는 것은 그가 습득해온 취향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비투스는 단지 제도나 교육을 통해 집단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비투스는 ‘인식’을 통한 학습효과를 넘어 ‘육체’에 각인된 무의식과 몸에 밴 습관이기에 더더욱 ‘포착’하기도 ‘극복’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취향은 노골적으로 ‘끼리끼리임’을 확인하기에는 왠지 낯 뜨겁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현대인이 외모만으로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계급을 판독하기 위해 사용하는 세련되고 우회적인 암호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말한다. 취향은 중매자라고. 취향이라는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을 통해 처음 만나는 남녀는 각자 자라온 아비투스의 ‘친화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현대인은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찾은 양, 자기 취향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 ‘천생연분’은 기실 우리의 치밀한 무의식의 용의주도한 주판알 굴리기를 통해 계산된 ‘아비투스의 연합’이 아닐까.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는 ‘나의 취향을 거스르는 사람과는 상대하기 싫다’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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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읽었어요 2009-07-3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의식하지 않아도 거부감을 느끼고 꺼리게 되는 관계들이 있는 걸 보면- 순수의 시대에서 말하는 것은 귀족사회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잣대와 편견을 대변하는 듯 하네요. 누구나 저마다 그 집단의 아비투스로부터 자유롭지 않을 듯. 대신 이 글을 읽으면서 자각은 할 수 있게 되었네요.

블레이드러너 2009-08-0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취향은 계급의 암호다!" 암호를 풀 수 있는 힘이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인 2009-08-01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에 대해 순수의 시대와 귀여운 여인은 좋은 사례가 되는군요. 말 그대로 필로 시네마가 유감없이 실력이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의 충돌보다 아비투스라는 보이지 않는 계급적대를 포함한 사회적 적대가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소외를 더 심화시키는 것 같습니다. 취향과 인격, 습관까지 미세한 정서들의 균열을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영화를 통해 잘 표현이 되었네요. 마르크스적 계급적대가 몰적인 선분의 충돌이라면 아비투스는 계급적대와 사회적 적대의 분자적인 선분이라고 하면 들뢰즈식의 아비투스에 대한 이해가 될 듯 합니다. 한편의 훌륭한 영화읽기였습니다. 건필하세요. ~~

예인 2009-08-01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망의 관점에서 계급과 아비투스는 그 근저에 식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식욕은 구별짖기, 공격욕동으로 나아가는 것 같고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하면 그 적대 속에서도 짝짖기 하려는 본능인 성욕동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편의 영화를 식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 프로이트적 성욕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나는 프로이트적으로 해석을 했는데... 그러면 인간의 문화라는 것은 성욕과 식욕의 억압이 문화라는 꿈으로써 상징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프로이트의 꿈 해석은 한 쪽 측면을 부각시킨 것이라 보면 될 것 같네요. 영화라는 장소가 인간의 무의식이 상영되는 장소거든요. 식욕,성욕,수면욕, 인간의 3대 욕구이지요. ~~

sotkfkd 2009-09-13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부르디외며 들뢰즈(댓글)까지 오랜만에 읽게 되는 이름들이어서 참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