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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ㅣ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평점 :
오늘처럼 가끔 주말근무하는 날이면 일은 미루어두고 책장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간코너도 기웃거리고 이용자 반납도서도 들추어본다.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시집을 읽을까? 그동안 소홀했던 영어책을 볼까? 행복한 고민이다.
결국 고른 책은 안도현의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제목이 참 시적이네. 안도현의 시는 담백하게 사랑을 이야기한다.
박웅현이 추천한 안도현의 시를 읽으면서 마음으로 그려보니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글들이 씨줄 날줄처럼 와 닿는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도 지나고나면 바래지는데 그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다.
강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다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떼를 날려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p. 82
살아남은 자의 슬픔
비닐 조각들이 강가의 버드나무 허리를 감고 있다
잘 헹구지 않은 수건처럼 펄럭거린다
몸에 새겨진 붉은 격류의 방향,
물결 무늬의 기억이 닮아 있다
모두들 한사코 하류 쪽으로 손을 가리킨다
p. 34
조팝꽃
조팝꽃이 피었다
보란듯이,
그동안 내가 씹어 삼킨 밥알들을
그 가는 가지에 줄줄이 한알 한알 빠짐없이 붙이며
얼마나 많은 밥그릇을 비웠느냐고
조팝꽃이 여기, 저기 피었다.
p. 79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음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스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찾아가리
언덕이 가팔라 삼십년이 더 걸렸다고 농을 쳐도 그녀는 웃으리
돌아가는 내리막길에서는 뒷짐 지고 휘파람을 휘휘 불리
죽어도 사랑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리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p. 81
옆모습
나무는 나무하고 서로 마주보지 않으며
등 돌리고 밤새 우는 법도 없다
나무는 사랑하면 그냥,
옆모습만 보여준다
옆모습이란 말, 얼마나 좋아
옆모습, 옆모습, 자꾸 말하다보면
옆구리가 시큰거리잖아
앞모습과 뒷모습이
그렇게 반반씩
들어앉아 있는 거
당신하고 나하고는
옆모습을 단 하루라도
오랫동안 바라보자
사나흘이라도 바라보자
p. 88
<강> 너에게 가려고 나는 강을 만들었고,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울어야 닿을 수 있는 강이 만들어지는 걸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개울에 나뒹구는 하찮은 비닐봉지를 보며 눈살을 찌뿌리기 보다는 비닐봉지조차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 듯하다. 어떻게 이런 감성을 간직하며 살 수 있는 걸까? 비닐봉지는 그렇게 그렇게 떠 내려가다가 누군가의 손에 건져질까? 아니면 넓은 바다로 긴 여행을 떠날까?
<조팝꽃> 무심천을 걷다보면 내 종착역에 보이는 아롱아롱 밥알을 닮은 조팝꽃. 조팝꽃은 함께 어우러질때 더 아름답다. 내가 씹어 삼킨 밥알들이 환생한 거구나. 예쁜 꽃으로.......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을까? 자전거도 좋겠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꽃과 나무를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옆모습> 가끔 아이들, 옆지기의 잠자는 옆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를 향해 누워 있는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 누군가 내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은 나도 그도 행복할듯.
그의 시들은 조분조분 이야기하듯이 편하게 다가온다. 어수선한 마음일때, 무언가 욕심이 날때 그의 시는 나를 다독이는 힘이 된다. 이렇게 적어두고 가끔씩 읽어보며 상처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