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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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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글에 호감이 가는 것은 글에 감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 정제된 마음의 고요한 울림이다. 뜨거운 여름날 좁은 감방 안에서 여러 명의 죄수들과 생활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를 증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는 감옥으로부터의 토로는 알량한 이성과 뭇 감정들을 걷어낸 간결한 발림이다. 그런 그가 『강의』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은 것이다. 내가 아는 글쓴이는 누군가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다. 맹자도 ‘사람의 가장 큰 병폐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지 않았던가.


반신반의 펼쳐본 『강의』 안에서 귀가 순한[耳順]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부끄러웠다. 아니, 그가 나를 일부러 ‘부끄럽게’ 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의』는 여러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그가 ‘강의’라는 제목을 내세운 것부터 묘한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강의에 대한 반성’이다. 이제까지 고담준론에 머무는 무미건조한 강의를 떠나 함께 울고 웃고 떠들면서 인생의 희노애락과 생생한 세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야 진짜 강의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감방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글쓴이가 고전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세 권으로 정해져 있는 옥방(獄房)의 규정에 ‘단, 경전과 사전은 제외’라는 예외 때문이다. 이보다 강렬하고 필연적인 동기가 어디 있을까?


강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중국 제일의 고전들이다. 왜 그가 중국 고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5천년 동안 한결같이 읽히고 있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샘이란 곧 원류에서 시작해야 옳은 것이다. 그의 서술 방법에는 두 가지 배려가 담겨 있다. 하나는 책 안의 고전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배려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훑어보기는 했지만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글쓴이가 각권의 요지와 관점, 즉 중(中)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각권의 순차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대륙을 관통하는 황하의 흐름, 그 문명의 영토에 갈마든 사람들의 긴 호흡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에 관한 고찰이다. 시대와 민족에 소용이 되기 위해 영웅들은 뼈를 깎아가며 무기를 다듬고 그것은 그의 아들 손자들이 좀더 어려운 적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한 재료가 된다. 이러한 사정 위에서 피를 튀기며 최후까지 아귀다툼한 전국(戰國)의 칠웅은 관계를 가지며, 왜곡된 진시황의 표상과 제국 통합의 역사가 관계를 가지며, 맹자의 성선과 순자의 성악이 근사한 관계를 갖는다.


나는 귀가 고운 이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맹자,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관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나와 세상의 관계가 끊어졌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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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5-10-3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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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 개정판
채만식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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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에 나오는 인물군들을 보면 저마다 자기 생활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래서 '이 쳐 죽일 놈!' 하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윤직원 또한 '피로 낙관(落款)한 녹록(碌碌)치 아니한 재물' 이야기를 듣는다면 십분 그의 행실머리를 이해하고도 남음이리라.

채만식은 <태평천하>에서 너덜너덜한 사회의 모형을 윤직원 일가 내에 잘 담아 두었다고 보인다. 윤직원의 도당들은 꼭 한 꼭지가 부실하여 제대로 사람 구실 하는 사람이 없다. 만석꾼 윤용규의 장자 윤직원 영감이 제 아비에게 배운 기술은 치산하는 법과 금권(金權)의 시대를 알아챈 점, 세상의 세속적 생리를 간파하는 법 등이다.

더 나아가 윤직원은 세속에서 알아주는 가치들을 실현시켜 일가를 빛내려는 포부를 지니게 되었고, 그 작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것이 일신의 안일을 도모하기 위한 욕망에 뿌리를 두지 않았어도, 자못 치밀하고 적극적이라는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네 가지 사업이라는 것 안에 직원의 용사들이 투입되었으나 결국은 생과부에 통과부의 숫자만 늘리는 결과밖에 되지 못하였다. 또한 세록지신(世祿之臣)이 되어 대대손손 위풍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의 용감한 전사들이 경찰서장이다 군수다 하여 정규의 코스를 밟고 있기 위해 십만원 되는 거액을 의연히 뿌려대었다. 그렇게 윤직원은 작인들에게는 도지(賭地)를 상납받고 가권(家券)들에게는 인생을 통째로 상납 받는 이른바 물심양면의 지존이 되어 주공(周公)이나 진시황(秦始皇)의 반열에 올랐다.

윤직원 일가도 어찌 보면 사회일 수 있겠는데, 그 사회는 모양은 어찌됐든 공론(公論)에 의해 이끌려져야 한다. 지금 국회에서는 공론과 공평이라는 미명만 가지고도 얼마나 잘 버티고 있는가. 그런데 윤직원의 가정에는 그런 이상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최후는 비참하다.

윤직원의 일가를 보면 장남 윤주사와 장손 종수는 골수 놈팡이에다 오입쟁이다. 그들은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윤직원의 욕망에 이끌렸기 때문에 그의 그늘 안에 있었고, 뻗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안에 머물러 버렸다. 그래서 세상을 요리하는 기술보다 윤직원을 요리하여 생존하는 기술에 능하다. 그들은 윤직원의 용사들이란 명함을 가지고 윤직원의 재산을 야바위 해서 거나하게 해먹는 게 그들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윤직원이 어쩌지 못하는 또다른 무서운 존재는 며느리이자 과부 고씨이다. 윤직원의 양반 혼인 사업으로 인해 원치 않은 결혼을 하여 결국 생과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윤직원을 만날 때마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이러한 부적절한 관계의 원인 제공자는 단연 윤직원이니 할 말은 없는 것이다.

윤직원네의 이 가간사(家間事)는 사회 안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모두를 위한 정론(正論)보다 안일을 도모하여 담합하고 야합하는 무리들이 자꾸만 늘어가고, 선호하는 것은 점점 금권과 말초적인 가치들뿐이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 계층적 갈등은 날로 늘어가고 원수와 천적 등의 먹이 사슬 관계가 험악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또한 배운 것이 그런 것 밖에 없으니 한 세대가 태어나든 두 세대가 더 태어나든 정의 실현이나 격양가(擊壤歌;세상이 풍족하고 살기 좋을 때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만큼 비관적인 세계관을 채만식에게서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 더 음미하고 싶은 것은 작가의 언어이다. 끝내 이름 대신 직원(直員)이라는 걸리적 거리는 호칭으로 일관한 모습이라든지, '찬란한 네 가지 사업'이라는 작위적인 풍자도 입심 안에 구수하게 섞여서 재미와 현실 인식 이상의 어떤 의미심장한 시사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뭐 인생이 이런 것 아니겠어?' 하며 웃어넘기는 작가적 유연함은 당대의 소설가들에게 느끼는 중압감을 충분히 완화시켜 주었고, 공허하지 않은 생동하는 의미를 가슴속에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은 어떤 기막힌 상황에 부딪쳐도 '허허'하는 웃음으로 대처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필자는 꼭 채만식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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