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엔트로피
- 엔트로피 카지노, 당신의 지갑을 확인하라



엔트로피 카지노


나는 지금 어둡고 음습한 라스베가스의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 그보다 더 화려한 여인이 돈 많은 남자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다. 좀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나와 같이 전재산을 탕진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한 손에는 술병과 다른 손에는 빈 지갑을 들고 어디로 가는지 기약도 없이 헤매고 있다. 이것은 나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자식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도 우리는 이곳에서 마음껏 즐겼다. 태어나기도 전에 모든 자원과 가능성을 빼앗겨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시작해야 하는 불쌍한 후손들을 생각하니 마냥 즐겁게 천혜의 자원을 낭비하는 게 죄스럽게 느껴진다.
개중에는 대박을 터뜨려 인생 역전에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카지노 측의 상술에 불과하다. 이 게임은 언제나 카지노가 돈을 버는 게임이며, 우리들의 지갑은 점점 줄어드는 게임이다. 의심이 들면 당장 복권 뒷장을 펴 보라. 1등 당첨금 총액은 말단 당첨금 총액의 10분의 1도 안 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엔트로피 법칙에 의하면 지구의 어디에선가 질서가 더 생기는 것은 그 주위 환경에서 그보다 더한 무질서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진화란 점점 더 큰 무질서의 바다를 만드는 대가로 점점 더 큰 질서의 섬을 창조하는 것이며, 오늘 풀 한 포기가 자라는 것은 미래에 그 곳에서 풀 한 포기가 적게 자람을 의미한다. 어머니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집을 나서면 다 돈이다.


이 말은 '집을 나서면 다 에너지다'로 수정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있어도 우리들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우리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음식물을 섭취함으로써 죽음에 도달하고 있다. 음식물은 우리 몸에 영양을 공급하지만, 이면에 활성화 산소를 꾸준히 증가시킴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너지와 함수관계를 이루며 끝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 바로 엔트로피(Entropy)1)이다.


엔트로피 법칙



1. 우주의 에너지 총량은 일정하다. 때문에 생성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오직 그 형태만이 바뀐다.
2.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하며, 오직 한 방향, 즉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할 뿐이다.


즉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에너지는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인 반면, 엔트로피는 사용해버려서 재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를 말한다. 정밀한 공정을 통해 생활에 필요한 제품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써버린 에너지나, 사후에 감당해야 할 부대 현상(산업쓰레기 처리문제나 산업재해 등의 질환과 환경 문제 등)의 총계를 엔트로피라 한다. 때문에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항상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저장고에서 빼서 쓰는데, 저장고가 무한하다거나 늘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점점 줄어드는 에너지를 짜내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엔트로피의 양은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아져 우리와 열 종말(heat death ; 에너지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경우)의 거리가 빠른 속도로 단축된다.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를 즐겨 해본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켄(Ken)의 에너지가 100인 상태에서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노란 칸은 줄어들고 그 부분이 검붉게 보인다. 에너지 바가 모두 검붉어졌을 때 켄은 게임에서 패배한 것이다. 바로 검붉은 부분이 엔트로피이며 노란 부분이 에너지이다. 그래서 그 둘의 합은 항상 100이 되며, 그 게임이 끝나지 않는 한, 검붉은 부분이 다시는 노랗게 될 수 없다.


이 법칙이 문명화되기 이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은 직관으로 이해했고, 그 핵심 진리들을 그들의 문명과 세계관에 통합시켰다.
위에서 표현된 어머니의 말씀 이외에 '공짜는 없다' 또는 '엎질러진 우유를 놓고 울어봤자 소용없다' 같은 속담을 통해서도 누구나 이 법칙에 정통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엔트로피 이론의 입장


현대의 과학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크게 세 부류로 묶을 수 있다. 이른바 기술적 메시아주의, 수정주의, 생태주의 정도로 표현될 수 있는데, 「엔트로피」가 저술된 기본 개념은 생태주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신문의 과학면에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에 많은 과학자가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무한의 자원이 숨어 있으며 우리들은 그것을 찾아서 향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물려주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메시아 이론이다. 수정주의는 '꼭, 그렇지만은 않아(개그콘서트 버전)' 하고 말하며 맹목적 메시아 이론에 제동을 걸었지만, 메시아와 취지는 같다는 입장이다. 엔트로피가 말하는 생태주의는 그와는 다른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원의 보고는 둘째치고, 과학 문명이 낳고 있는 곳곳의 부작용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론이다. 생태주의에 입각한 엔트로피를 받아들인다면 과학의 이면성을 긍정하므로 과학의 외연이 늘어난다.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의 조화,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과학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독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진정한 과학도라면 과학이 우리 문명을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반문도 해보아야 한다고 본다. 철학도가 해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나의 입장이기도 하다.


엔트로피 패러다임



우리는 17세기 뉴턴주의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world machine paradigm)'의 영향력 아래 살고 있다.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로크, 스미스 등은 17세기에 기계적 세계관(the mechanical world view)을 일반 대중에게 크게 보급시켰던 천재들인데 이들이 자연을 대했던 사고방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전승되었다. 자연은 무한한 보고이므로 최대한 탐구하고 이용한다면 최대의 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구상했던 모든 기술은 자연의 저장고로부터 에너지를 변환시키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것들은 엄연히 엔트로피 법칙 내에서 작동한다.
그것은 사람보다는 기계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관이며, 양(quantity)으로부터 생명의 모든 질(quality)을 분리시켜 제거함으로써, 기계적 패러다임의 제작자들은 전부가 죽은 물질로 구성되는 차갑고 무감각한 우주를 만들어 버렸다. 자연에 대한 접근은 있되 자연 자체는 없는 것이다. 이들이 가진 자연에 대한 오해만큼 엔트로피는 축적되고 있었으며, 알 수 없는 엔트로피의 역공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이들의 이론이 환경에 대한 문제를 염두해 두었는지 판단해 보라, 이들의 이론이 사회문제나 경제 양극화 문제를 배려했는지 판단해 보라.


로크는 원시 시대에는 자연의 한계 내에서 얻을 수 있는 부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으나, 돈이라는 교환의 수단이 존재하게 된 이상 자산을 무한정으로 모으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부지런히 노력해서 돈을 많이 모은 사람들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땅의 개간에 있어서도 입장은 같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의 땅에서 생산하는 양을 개간한 땅 10에이커에서 수확한 사람(자연상태의 100에이커와 가공된 10에이커의 농작물 산출량은 같다는 착상에서 나온 생각이다)은 인류에게 90에이커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스미스도 경제 이론에서 같은 주장을 펼치는데, 경제 활동에 도덕성을 부과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 손'의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경제 활동 스스로 자본 투자, 직장, 재원, 생산 등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스미스와 로크 모두 물질의 풍요를 갈구하는 인간의 이기성을 미덕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엔트로피 법칙에 의한 '양적 도달 이론'2)으로 이들의 이론을 보자. 사실 이들의 미덕이 용인되는 선은 한계가 있다. 그들의 이론은 한계점 전까지 가치를 얻는 것이지만, 한계점이 넘어도 멈출 수가 없기에 위험한 이론이다. 자연 상태로 버려진 100에이커를 로크의 말에 따라 열심히 개간한 결과를 보라. 표토는 황폐화되었고, 병충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사용한 농약은 작은 생태계를 초토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농약에는 거뜬한 슈퍼 병충해를 키워왔을 뿐이다.
이웃 나라와의 잦은 전투로 오히려 노예국과의 전투에서 부상당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리우스가 받은 조롱을 슈퍼 병충해들은 재연하고 있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중에서


이들의 이론을 대할 때 한가지 염두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역동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고, 사회 전체가 가난과 생존의 위협에 괴로움을 당하던 시대이다. 에너지는 바닥이 나고 직면한 엔트로피 분수령을 해결해야 하는 지상과제가 이들 앞에 던져진 시기였다. 그만큼 이들의 필체는 강경하고 무한한 희망을 담지 않으면 안되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시대적 관점'에 한해서 의미 있게 이들을 바라볼 수 있지만, 이들의 이론이 지금도 우리 사회를 움직일 수는 없다. 유통기한이 끝난 우유를 먹으면 복통과 설사가 찾아올 뿐이다. 독립선언문과 헌법에 로크의 철학을 고스란히 새겨 넣은 미국이 '자원의 엄청난 쓰레기장'이자 '막대한 엔트로피 채무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처음부터 자연의 한계를 생각하고 계획을 짰어야 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눈치 빠른 독자들을 벌써 알아챘겠지만, 엔트로피 이론은 독자들의 관심을 동양으로 환기시킨다. 서양과 동양이 미덕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접점이 바로 엔트로피 패러다임이다.



서양인들은 진리와 지혜에 대한 동양식의 접근을 이해하는 데 많은 곤란을 겪었다. 서양인들은 부지런히 행함으로써만 이 세계의 온갖 숨겨진 신비를 벗길 수 있다고 믿었다. 서양인들은 그런 시도가 인간을 더 큰 지혜로 이끌고 궁극적으로 우주의 최상의 설계자와 대면하게 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끊임없이 진리의 단편들을 모아서 잇고, 주위의 세계를 조작하고 정돈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해 왔던 것이다. 동양 종교가들은 서양인의 열광적인 행동이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킬 따름이고, 그들이 추구하는 신성의 현시(現示)로부터 오히려 유리시킨다고 말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지혜를 가르친 모든 위대한 설법가들은 저엔트로피3) 생활에 고유한 가치관들을 신봉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가, 예수, 마호메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인도의 성인들은 모두 검소하고, 청빈하고, 재산을 사회와 나누는 모범적인 생을 이끌어 갔으며 누구보다도 자연의 한계와 생태를 잘 이해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기계적 패러다임이 지금도 우리의 신앙이 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전에 겪었던 인류의 엔트로피 분수령에서 찾고 있다.



13세기와 16세기 사이에 걸쳐 서부 유럽은 엔트로피 분수령을 맞고 있었다. 중세식 생활 방식의 기본적인 에너지였던 삼림 자원이 차츰 귀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이러한 부족 현상을 더욱 악화시켰고, 새로운 대안의 추구는 결국 나무를 석탄으로 대체하게 만들었다. 나무에 기초했던 에너지 환경이 석탄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자, 서부 유럽 사회의 생활 방식은 그 전체가 극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나무로부터 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은 중세 시대의 붕괴와 산업 혁명의 출현의 배경이 되는 주요 원인이었다.
……
14세기 중엽쯤에는 드디어 분수령에 이르게 되었다. 인구 때문에 에너지 근간이 흔들린 것이다. 토양의 척박화와 삼림 고갈의 심화는 서북부 유럽 지역의 인구 문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12세기 풍차를 사용함으로써(수차를 더 많이 사용하여) 이전에는 경작할 수 없었던 땅을 농토로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삼림을 더욱 황폐시키고 인구를 더 증가시키는 대가를 치르게 했다.
……
먹여 살려야 할 도시 인구의 증가는 경제 문제를 크게 악화시켰다. 도시는 11세기 잉여 농산물의 교환 장소로서 출발하였다. 이제 농산물보다 인구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자, 거래할 잉여 농산물이 없어졌고 따라서 도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중세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전체 조직이 한꺼번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기초로 하는 시대로의 전환기에 이른 것인데, 그런 전환기는 부분적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산업에서의 분수령은 두 가지 문제를 풀어야 한다. 나무를 대체할 에너지원을 어디서 구할 것이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운반할 것인가이다. 근대는 이 문제를 '근대적'으로 푸는데 일단은 성공한 듯하다.



근대의 증기 엔진은 석탄의 채굴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었고 또한 최초로 그렇게 사용되었다. 채탄 과정에서 석탄을 캐기 위해 땅 밑으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광산을 환기시키고 축축한 석탄을 끌어올리는 것이 차츰 문제로 대두되었다. 17세기에는 광산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어느 정도까지 깊게 파 들어가자 물이 나왔고, 따라서 공정에서 배수 작업이 문제로 떠올랐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은 기술적인 해결책을 요구했다. 그 해결책이 바로 증기 엔진이었다. 최초의 증기 펌프로 1698년 세이버리(Thomas Savery)가 특허를 얻었다.
채탄에 사용되었던 증기 펌프는 새로운 석탄의 환경으로부터 곧바로 출현했던 수많은 기계적, 구조적인 발명 가운데 최초의 것이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석탄을 캐는 문제가 증기 펌프의 도입으로 해결되자, 곧 마찬가지로 중대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석탄은 무거웠기 때문에 말이 끄는 마차로 장거리를 수송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당시 영국의 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였다. 석탄 마차의 무게 때문에 길은 엄청난 바퀴 자국으로 뒤덮여 비가 올 때에는 진흙탕으로 되어 운반이 거의 불가능했다. 동시에 석탄 수송용 말들을 유지하는 것에도 차츰 비용이 많이 들었다. 경작지가 심각하게 부족했기 때문에 말먹이와 사람 식량을 다 생산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수송 위기는 증기 기관차의 발명과 철도의 부설로 해결 국면에 들어갔다. 증기 펌프와 마찬가지로 증기 기관차도 석탄의 환경에 의해 필요성에 대한 직접적 기술적인 해결책이었다. 이와 같은 증기 펌프와 증기 기관차의 협동은 이후의 산업 시대의 기술적인 바탕이 되었다.


중세와 근대의 구분을 에너지원의 전환으로 본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근대 이전까지 품고 있던 자연에 대한 두려움은 베이컨이 과감히 깨뜨려 주었으며, 뉴턴은 수학적으로 해석해 주었다. 우리들의 근대는 보기 좋게 중세를 벗어났으나, 우쭐하는 새에 다시 엔트로피 분수령이 찾아왔다. 영화의 포스터와 같이 '이번에는 더욱 강력한 놈'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들은 근대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현대란 좀더 복잡다단해지고, 인간성의 상실을 통감하게 된 근대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란 것도 근대의 기계적 패러다임에서 나왔으므로, 다음 세기에는 근대를 극복한 패러다임이 요구되는데 저자는 그것을 엔트로피의 시대라고 하였다.


정적이고 절대적인 기계적 물리학은 상대적인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도전을 받았고, 세계는 진보와 진화의 장이라는 인식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통해 허구임이 밝혀졌다. 이밖에 철학에서의 로크의 세계관에나 경제에 있어서 아담 스미스의 이론은 당연히 엔트로피의 세계관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 패러다임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당위성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끈 엔트로피 분수령에 다시금 우리에게 찾아왔으며, 이대로 나아간다면 종말을 재촉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기성과 기계적 패러다임에 의존한 산업과 문명은 한계에 봉착했으며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지표에서 우리들의 자원과 환경이 한계에 봉착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전의 패러다임이 포함하지 않은 엔트로피 개념이 시대의 주역으로 당당히 자리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 세계관은 절대적이며 무한하다는 원리를 가진다. 문제는 이들이 자연을 본 시각에 있다. 이들에게 자연은 미지의 보고(寶庫)였으며, 우리가 자연을 이용하고 탐험할수록 자연은 우리에게 더욱 놀라운 보물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전파시켰다. 이러한 믿음이 현재에도 유효할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믿음에 의해 구축된 사회가 자연을 얼마나 피폐시켰는지 잘 알고 있다. 한 경제학자의 말처럼 사회 문제는 도시 기구가 확장됨에 따라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지만, 이런 문제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기껏해야 산술급수적으로밖에 증가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도박이 막판으로 치달을수록 판돈은 올라가게 마련이다. 판돈을 올리면 이제까지 잃었던 돈을 한번에 충당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은 엔트로피 카지노가 우리들을 죄어 매는 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판돈을 충당하기 위해 우리는 카지노측이 제공한 사채업자들에게까지 손을 건넨다. 그 결과는 예측이 가능하다. 사채업자는 처음에는 낮은 이자율로 우리들을 꼬득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가면, 이자를 1할에서 2할로, 2할에서 3,4,5할로 멈추지 않는다.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판돈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이 도박판을 끌고 가면서 망각한 점을 환기시켜 보자. 판돈이 커지면 잃었던 돈을 한 번에 만회할 수 있지만, 우리들이 가진 자산을 손쉽게 모두 잃어버릴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나와 내 가족, 친구들, 나아가 미래의 자식들의 재산까지도 탕진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카지노측이 그토록 염원하는 야심찬 노림수이다.



부는 부채와 같은 속도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없기 때문에 부와 부채의 1대 1 상관 관계는 언젠가는 깨지게 된다. 즉 부채에 대한 상환 거부나 상환 불능이 생기게 마련이다. 복리에 의한 증가는 인플레이션, 파산, 몰수와 같은 부채 상환의 반작용으로 항상 상쇄된다. 이와 같은 작용은 으레 폭력을 발생시키곤 한다.


경제 발전이란 것은 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부터 차츰 어려운 자원으로 바꾸어 감에 따라 좀더 복잡한 공정을 사용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며, 생태학적 맥락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연 환경을 보다 심하게 착취하는 방법의 발전이다.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때 국민총생산(GNP)은 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국민총비용(Gross National Cost)이라고 해야 하며, 우리가 발견한 에너지원의 혁신은 자연을 착취해 에너지를 얻는 방법의 혁신이며, 점점 열종말을 부추기는 혁신일 뿐이다.


 


위험한 엔트로피


엔트로피의 위험성은 꾸준히 증가하는 축적량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속도가 훨씬 빨라지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 저자는 이를 위해 시간의 예를 든다.



시간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유용한 에너지가 존재할 경우에만 존재한다. 소비된 시간의 진짜 양은 사용되어 버린 에너지의 양을 그대로 나타낸다. 우주에서 유용한 에너지가 고갈되어 갈수록 일어나는 사건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그것은 '실제'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 종말의 최후 평행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도 역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사용 가능한 자원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무한한 시간만 놓여져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보다 위험한 것은 그 폐해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예상할 수 없으므로 그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없다. 대부분의 전복은 조치 가능한 사태를 방치한 결과이다. 로마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보라.



"로마의 멸망은 로마의 융성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로마는 환경의 자원으로 융성한 것이 아니라 중동 아시아, 이집트, 북 아프리카 등을 철저히 약탈한 것으로부터 융성되었던 것이다. 로마 대도시를 유지했던 바로 그 과정이 로마를 멸망시켰다."(무정부주의자이자 생태론자인 북친(Murray Bookchin)의 견해)
일단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하자, 로마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도시가 커질수록 더 많은 에너지 투입이 요구되었고, 더 많은 에너지가 들어올수록 무질서가 커졌다. 무질서가 커질수록 여러 종류의 혼란에 대처하는 제도의 하부 구조는 많아졌다. 그 과정이 무한하게 계속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군대에 의해 유지되었던 에너지 공급이 차츰 줄어들었고, 끝내는 군대가 사용하는 에너지 양이 군대가 얻어오는 양보다 많아지게 되었다. 과도한 경작 때문에 농산물 수확량도 줄어들기 시작했으나 노예를 먹이고 재우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었다. 도시 기관들이 거대해지고, 비용이 많이 들게 되자 그것들은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과대하게 팽창했던 도시는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고, 군대에 의하여 짓밟혔고, 급기야는 그 에너지 환경과 알맞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 멸망하고 나서의 로마 인구는 3만 명 정도였다.


저자는 현대 도시도 로마와 비슷한 방법으로 식민지화함으로써 지탱되었으며 결국 로마의 길을 갈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서울 거리를 걸으며 우리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작은 우리 마을을 지나다니며 아는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 주위가 물이지만, 마실 물은 한 방울도 없는 셈이다. 백만 이상 사는 도시의 거주자는 5만 정도의 소도시보다 3배나 많은 세금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많은 범죄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비효율성 때문에 뉴욕과 클리블랜드는 거의 파산할 뻔하였다고 저자는 말한다. 엔트로피의 입장에서 수도 이전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본래부터 생물의 계에 속하는 인간이 기계와 전문화를 타고 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판단하지만, 그것은 신에게 도전하는 무모한 거인족(타이탄 족)에 다름 아니다. 생물학자들은 과도한 전문화는 한 종을 멸망케 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한 종이 특정한 형태의 생태계에 과도하게 전문화되면 그 종은 환경에 적절하게 적응할 수 없게 된다. 전환에 필요한 다양성과 융통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의를 하다 한숨을 쉬었던 교수처럼 '여기를 나가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는 모진 환경에서 건강히 살아남았던 조상들과 같은 종족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엔트로피가 모아놓은 탄산가스가 우주로 배출되는 복사열을 차단하여 발생하는 온실효과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증가하면 종은 극심한 시련을 겪게 된다.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 J. 브로노프스키, 인간등정의 발자취 중에서


우리는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가 급변하는 자연과 사회의 엄청난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겪는 부작용을 다방면에 걸쳐 체험하게 될 것이다.


벌써 우리들은 기계에 지배당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지배란 기계가 우리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욱 치밀하게 우리를 조종함을 말한다.



규모가 커지고 중앙 집중적으로 될수록 인간의 역할이 또 하나의 생산 요소 정도로 전락하는 경향이 심화된다. 예를 들면 자동차 조립 과정에서 근로자들은 기본적으로 기계가 원하는 대로 맞춰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 과정 자체가 개인이 아닌 기계를 중심으로 짜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서 인간은 작업 과정에서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급자족 능력이 감소된다. 근로자는 필연적으로 생계를 위해 기계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일의 생산된 결과만이 평가를 받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정밀하고 전문화된 공정일수록 사람이 하던 일이 세밀한 기계로 옮겨지는 현장을 우리는 많이 목격했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외출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문명과 기계화의 이로운 점을 나쁘게만 말한다고 반문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목적이 가치를 전도시키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기계화는 우리의 정신 뿐만 아니라 생존까지 위협한다. 미국 정부가 치명적인 무기 공정(트라이던트(tirdent) 잠수함 생산)에 10억 달러를 투자했을 때 1만 6천 명의 고용 효과를 가져온다고 한다. 같은 액수로 다른 분야에 투자한다면(저자는 태양 에너지 수집판 생산의 예를 들었다) 2만명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즉 4천 명이 거리로 나앉았다는 이야기이다.


정보의 과잉 현상도 이에 못지 않다. 사람의 신경조직은 한 번 일정한 분량의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사용하도록 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많은 정보가 주어지면 사람은 자연히 외면해 버린다. 정보과잉의 가장 큰 피해자들은 우리 학생들이다. 어느 교육자의 고백처럼



의사 소통은 내용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받는 것, 즉 말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대를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의 부족과, 정보의 엄청난 쓰레기를 여과 없이 내보내는 무책임한 생산자들, 이런 일방적 흐름이 소통을 모르는 아이들의 정신을 점점 고갈시키고 있다. 결국 엔트로피 카지노는 현재의 우리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미래의 우리들의 재산까지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들의 미래는 우리들의 미래 세대에게 달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의 우리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는 보장을 누가 할 수 있겠는가.


죄어드는 서민들


에너지가 점점 줄어들게 되면 남은 에너지를 두고 과열 경쟁이 벌어진다. 경쟁의 생리가 그러하듯이 크고 강한 놈이 작고 약한 놈을 잠식시키며 합종과 연횡, 생존과 도태의 국면이 펼쳐지게 된다. 그렇게 경쟁은 점점 과열 양상으로 치닫고 비로소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질 때,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죄어드는 경제적 환경의 희생물로서 점점 더 많은 수의 가난한 사람들이 에너지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되면, 정부는 복지 또는 다른 명목에 의해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야만 한다. 실업이란 결국 엔트로피 과정의 이면에 불과하다. 에너지 고갈이 빨라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거나 불완전한 고용 상태에 처한다.


소비자는 높은 물가로 고통받고, 노동자는 낮은 실질 임금 때문에 고생하게 된다. 게다가 에너지 흐름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쓰레기를 치우고 없애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몫도 역시 납세자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바로 현대인의 비애이다.



'미국인'은 어쩌면 세계 역사상 가장 불행한 시민인지도 모른다. 그는 돈 이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제공할 힘이 없는데, 그의 돈은 풍선처럼 인플레를 타고, 역사적 상황과 다른 국가의 힘에 따라 떠나가 버린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자기가 만든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는 휴식과 여흥으로 인하여 늘 지쳐 있고 자꾸만 살이 찌면 건강도 신통치 않다. 그가 마시는 공기, 물, 음식은 모두 독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죽을 때는 기가 막혀 죽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자기의 성생활이 다른 사람들처럼 만족스럽지 못한 게 아닌가 의심한다. 그는 좀더 일찍 태어났거나 아니면 좀더 늦게 태어났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등의 생각을 한다. 그는 도대체 그의 자녀들이 왜 그 모양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애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그는 실상 별로 상관도 안하고 왜 상관 않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아내가 무얼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잡지의 광고나 그림을 보면서 나는 원래 못생겼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의 모든 소유물이 모두 강탈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에 불안해진다. 그는 만약 직장을 잃는다면, 만약 경제가 실패한다면, 만약 전기·수도회사가 망한다면, 만약 경찰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트럭 기사들이 파업을 한다면, 만약 아내가 도망간다면, 만약 아이들이 가출한다면, 만약 죽을 병에 걸린다면, 어찌해야 할지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걱정들 때문에 자격이 있는 전문가를 만나 상담한다. 그러나 그 의사들 역시 그들 자신의 걱정 때문에 다시 자격이 있는 전문가들과 상담한다.


해결책


방법은 간단하다. 에너지를 덜 쓰면 된다. 에너지를 덜 쓰는 체제로 사회는 점점 변화해야 하며, 그것을 저자의 언어로 표현하면 고엔트로피에서 저엔트로피 사회로 어서 전환해야 한다. 즉 지금까지 이루어온 고엔트로피 구조를 하나씩 저엔트로피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당장 한 사람의 체질을 바꾸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스무 여러 해 동안 해오던 방식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데는 그만큼 거부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어쩌랴. 점점 엔트로피 분수령은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만일 너무 오래 지체된다면, 치러야 할 액수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는 엔트로피 청구서 한 장이 올려져 있다. 우리는 지독한 채무자이며 연체자이다. 과학과 기술로 이미 써버린 것을 충당할 만큼의 대체물을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까닭에 살육과 재해를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될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꼴이 될 뿐이다.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의 모든 것을 없애버릴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대신에 자연을 좀더 안전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세계를 돌보는 하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새로운 에너지원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오만함'을 꺾어야 하며,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각 개인이 소모하는 에너지의 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눈에 보이면서 보지 않으려 하고, 감추려고 하고, 안주하려고 하는 게으른 본성을 자극해서, '절망'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는 없다.


다시, 카지노에서


어둡고 음습한 카지노. 바에서는 매혹적인 음악이 흘러나오고 담배연기 자욱한 천장에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 술병 깨지는 소리, 환호성 지르는 소리, 이런 소리 저런 소리의 잡탕이다. 그 한 켠에서 당신은 기계 하나를 끌어안고 분주히 동전을 넣고 있다. 표정을 보아하니 좀처럼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 때 입구 쪽에서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절한 복장의 여인이 주위를 살피며 두려운 표정으로 당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다. 그녀는 당신의 아내(엔트로피)이다. 당신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녀는 두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집에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여기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당신은 나의 희망이며, 우리의 가정을 힘차게 이끌어갈 수 있음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다고 그녀는 호소한다. 그녀는 하늘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벌써 위쪽에서는 거래가 이뤄졌다. 엔트로피 카지노의 사장은 당신이 아내를 때리고 술병을 부수고, 쫓아내는 데 이미 많은 돈을 건 상태다. 이 똑똑한 사장은 인간이 낼 수 있는 행동의 믿을 만한 데이터를 놓고 베팅을 한 것이고, 그 상대자들은 당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순진하며 도의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정의 행복을 믿는다. 그 결과는 대개 예측할 수 있다. (천사를 욕보이지 말라)
찢기고 얻어맞고 상처받고 쫓겨난 아내의 집에는 아이들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아빠는 안오고 엄마만 와서 아이들에게 입을 맞춘다. 아이들이 대개 그 사실을 아는 것은 그들이 '철이 들어서'이다. 이것이 눈에 안보일 수 없을 만큼 커지기 전까지 대개 그녀들은 이 불행을 혼자 안고 가는 것이 보통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엄마를 불행으로 몰고 간 아버지를 향해 복수를 할 것이다. 이보다 슬픈 가정사가 어디 있는가. 이것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주(註)
1) 엔트로피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의도에 맞게 사용한 사람은 일의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 ∼ 1888)인데, 그의 논문 <열의 역학적 이론(On the Mechanical Theory of Heat>에서 에너지에 고대 그리스어인 tropy(변형)이라는 단어를 따서 엔트로피라 명명함으로써 에너지와 유비 관계에 있는 개념으로 확정지었다. 그에 앞서 라부아지에(Antoine L.Lavoisier, 1743 ∼ 1794)는 열은 칼로릭(caloric)이라는 무게 없는(impon derable) 입자라고 보았다. 즉 칼로릭을 많이 함유한 물체는 뜨겁고, 물체의 온도 변화는 칼로릭의 방출 또는 흡수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노(N.L.S.Carnot)는 열 기관과 수력 기관의 원리로부터 '기계적 일을 하기 위해서 회로를 이루어 가동하는 열 기관을 만들려면, 온도가 다른 두 물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하여, 서로 다른 위치의 함수, 서로 다른 온도의 함수를 통해 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물질'이 아니기에 '생성'할 수 없고, '변환'만 가능하며, 한 번 떨어진 물이 다시 솟아 올라갈 수 없고, 한 번 늙어버린 육체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없듯이 한 번 사용된 에너지는 다시 사용할 수 없거나 활용량이 급격히 감소한다. 즉 에너지가 어느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변환될 때에는 반드시 모종의 불리한 상황이 부과된다는 것을 이 법칙은 천명한다. 그 벌이란 미래에 어떤 일을 하는데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양이 손실됨을 뜻한다. 이것에 대한 용어가 바로 '엔트로피'이다.
그러나 엔트로피는 존재론적으로 에너지와 동등한 것도 아니었고, 측정의 결과로 추론된 개념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이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오를 수 없다는 일상적 경험으로부터 관념적으로 추론된 임의적 개념이었다.


2) '양적 도달 이론'은 엔트로피 이론의 응용으로 우리들이 현재 향유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채워졌을 때를 기준으로 기준 전후의 차이를 문제삼은 이론이다. 예컨대 로크 이론에 따른 '3억 만들기' 같은 유행어가 그대로 실현되었을 때 발생되는 현상을 어느 경제학자가 짚은 적이 있다. 우리가 현재 보유한 재화를 가지고는 모든 사람들에게 3억이 아니라 1억씩 줄 수도 없을 뿐더러, 그들이 모두 3억을 가졌을 때 우리가 지금 생각한 3억의 가치와 그 때의 3억의 가치가 같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것은 경제적 효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맹목적 이론임이 밝혀진다. 아울러 어떤 책에 대한 글을 쓸 때 평론에 의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원작에 의존해야 하는지 자신의 판단을 밀고 나가야 하는지의 고민은 '양적 도달 이론'으로 말끔히 풀린다.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은 평론가의 글도 원작의 글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경우다. 만약 평론가의 글을 어느 정도 보았으면 자신의 입장이 정리되었을 테고, 원작을 충실히 살펴보았다면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작가의 세계와의 타협을 이루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양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은 채 스스로를 선택의 입장으로 내몰면서 자멸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적 게으름을 만천하에 알린 결과가 될 뿐이다.


3) 저엔트로피와 고엔트로피
에너지는 일반적으로 분산되어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집중하고 짜내어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효율의 엔트로피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용하기 가장 수월한 에너지가 제일 처음에 사용되게 되어 있다. 다음 단계로 올라갈수록 처음보다 더 사용하기 어려운 에너지원으로 넘어간다. 석탄을 채굴하고, 만들고 하는 것은 땅위의 나무를 베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그러나 유정을 뚫고 원유를 채굴하는 것은 석탄의 경우보다 더 어렵고, 원자력 에너지를 얻기 위하여 원자를 쪼개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처음에는 적은 힘을 들여 많은 에너지를 뽑아낼 수 있었으나, 점점 뽑는 에너지가 산출된 에너지를 압박하게 되어 결국 적자 상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카지노에서는 결국 많은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안 쓸수록 나에게는 그만큼 이익이 되는 것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머리 거인 2006-08-2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고맙습니다.^^

승주나무 2006-08-2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흰머리 거인 님// 안녕하세요. 뭘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jeheee 2009-06-15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 사보려고 했는데, 나무님의 서평을 먼저 읽어보고 웜업을 좀 한 뒤 사야겠군요..
가끔 들러, 좋은 글들 읽으며 무지로 부터 벗어나는 데 도움을 얻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히 읽겠습니다.
 
과학혁명의 구조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혁명의 구조
- 어떻게 세상이 바뀌는가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패러다임의 스펙트럼


인문학이 고전할 때에도 기술과 과학은 항상 진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우리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첨단 기술력이라고 예견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것은 과학기술이 가지는 '축적성(蓄積性)'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쿤에 의하면 과학적 패러다임은 오히려 비축적성을 가진다고 한다. 비록 수천 년 동안 쌓아왔던 자연에 대한 해석도 새로운 해석으로 대체되고 나면 폐기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면으로 보았을 때, 자연과 인간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들은 시대마다 정신적 혼란기를 겪으며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쓴다. 수천 년 동안 고민해왔음에도 우리들의 주변에는 인간성의 부재와 불균형, 불평등, 불만 등의 인류를 내부에서 위협하는 문제에 항상 위태롭게 직면해 있다. 그렇다면 과학만 거기서 자유롭단 말인가. 우리가 축적하였다고 하는 기술력은 단지 어느 시점까지만 효용성을 가질 뿐이다. 각국에서는 지금도 가공할 만한 자연재해와 알 수 없는 질병들이 산재해 있으며 우리들의 과학기술력을 비웃는 각종 바이러스가 셀 수 없을 지경이다.
과학에서는 우리가 흔히 사조(思潮)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한 정신의 흐름이 있는데 그것을 패러다임(paradigm)1)이라 부른다. 패러다임은 어느 주어진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에 의해 공유되는 신념, 가치, 기술 등을 망라한 총체적 집합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천한다기보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서 교체되는 특성을 가진다. 돌턴이 있기 전까지 화학계에서는 용액 안에 화합물(化合物)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어서 정량적인 파악이 불가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돌턴은 섞이지 않는 고유한 성질의 원자가 일정한 성분으로 결정을 이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고 단순히 섞여 있으면서, 고유의 특성을 발하는 혼합물(混合物)이 그것이다. 화학은 그에 의해서 드디어 규칙성과 일관성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패러다임은 다른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데, 그것을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전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순에 의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라 경쟁적인 아이디어로 전환된 것이다. 자연을 이해하기란 좀처럼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과학자와 철학가들은 '모험가'의 성격을 띤다. 그들이 이해한 것은 아주 자연의 아주 미세한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의 발견에 의해 대체될 여지는 언제나 상존해 있는 것이고, 그런 혁명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좀더 근사한 자연관을 가질 수 있다.
패러다임을 스펙트럼이라 부르는 이유는 패러다임이 가지는 특성에 연유한다. 패러다임은 규정짓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체계적인 것도 아니다.



정상과학은 고도로 결정적인 성격의 활동이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규칙에 의해서 결정될 필요는 없다.
……
 나는, 규칙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파생되지만 그러나 패러다임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연구의 지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한다.


패러다임은 체계라기보다는 '사고의 다발'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적절하다. 일례로 산소의 발견자가 누구이며 최초로 발견된 때는 언제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물음에 답하기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산소의 발견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산소라는 최초의 착상을 얻은 이후에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명료한 개념에 도달하였다. 그 와중에 착오도 적지 않았으니, 이쯤 되면 최초의 발견자나 발견일 같은 것은 의미를 잃게 된다. 우리들이 '최초'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이유는 항상 정답만을 나열해온 교과서의 영향이 적지 않다. 패러다임은 과학에 있어서 어떤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뉴턴이 시간과 공간을 '절대성'의 개념으로 파악한 데 대해 라이프니츠는 '상대성'의 입장에서 보고자 하였으나 아인슈타인 등의 과학자가 나오기 전까지 라이프니츠의 '이견(異見)'은 방치되었다. 그러나 항상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사실에 대한 예견을 심어준 것도 패러다임의 요소이다.
과학자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바치는 활동을 '정상과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최초의 발견에서부터 새로운 사실의 발견 사이에 격론이 지나가고 나서 받아들여진다. 그렇게 수습된 형태의 과학이 정상과학이라 할 수 있는데, 정상과학에서 '이상현상'이 발견되고 그것이 점차 증폭되어 심각한 균열을 일으켰을 때 '비상과학'에 의해 대체되고, 그것이 이제 정상과학이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동기를 부여하고, 방향을 정하고, 알려지지 않은 가설을 던져주는 것이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이므로, 쉽게 깨지지 않는다. 이상의 징후를 받아들여야 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들을 납득시켰을 때에야 일각에서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새 이론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진다. 시대가 경직되어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성의 시기는 훨씬 늦춰질 수 있다.
이와 같이 패러다임은 몇몇의 학설로 대체되기 힘들다. '패러다임으로 패러다임을 밀어내'야 하는데 그런 일련의 흐름들이 긴 꼬리를 밝히며 스펙트럼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는 과정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 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 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 조건이다.
         141 ∼ 143


과학혁명은 기존의 패러다임[정상과학(Normal Science)]이 더 이상 세계를 설명해내지 못하거나 설명하는 데 심각한 문제를 드러낼 때, 그러한 전조들 즉 이상(anomaly) 현상을 만족시키는 비상 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 출현하는데, 이 두 패러다임의 대립기간을 지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체되는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이 때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無知)를 대치한다고 보아야 한다. 과학이라는 동일한 토양 위에 진리로 가기 위한 길만 새로 닦이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놓인 시멘트나 기초자재들은 고스란히 활용되기도 한다. 거기에 몇몇 부족했던 기초 자재들과 인물들이나 지식들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존과는 전혀 다른 목적과 방향을 위해 쓰여진다.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며, 이전의 건설계획서를 폐기하고 다시 쓴 새로운 계획서 안에 모든 소재들이 개편되어 공사가 진행된다.
정상과학은 대부분의 과학자가 일생을 통해 연구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정상과학이 도전을 받는다면 그들은 저항할 것이다.
그들의 저항은 몇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과학자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여 새로운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좀더 먼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둘째는 첫째와 유사한데, 이전 패러다임이 대체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때 패러다임은 유보된다. 이 때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농후한 예견들과 이상현상의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지구인들에게 오랫동안 세계를 설명하는 정교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관측도구의 발달로 구체적 확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대체 이론은 18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라이프니츠도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이라는 뉴턴 체계에 대해서 공간과 운동에 대한 상대적 개념을 암시하였으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과학자 사회가 나타나기 전까지 예견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연구자들을 위해 진리의 비석에 비밀을 새겨넣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밤하늘에서 우리를 비추는 별빛이 수만 년 전의 기억이듯이.
셋째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이전의 그것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유보 상태이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위치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곧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어야한다. 이 때의 저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검증 작업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검증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패러다임의 지위에 올라섰을 때 이전 패러다임은 비로소 대체된다.



이상 현상들은 대부분 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해결된다. 새로운 이론들에 대한 제안은 대부분 잘못된 것으로 밝혀진다. 만일 어느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매번 이상 현상에 대해 위기의 원천으로서 반응을 나타낸다거나 또는 어느 동료가 진전시킨 새로운 이론마다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과학은 중단되고야 말 것이다.

         262


검증된 패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이 되어, 한동안 세계를 읽는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자연의 역동성과 하나씩 벗겨지는 무지의 자각이 서로 호응하여 과학의 계절을 이룬다.



명예의 전당 - 교과서


교과서는 '명예의 전당'과 같이 역사의 화려한 주인공들을 나열한다. 뉴턴 다음에는 아인슈타인이 당연히 기다리고 있으며 하이젠베르크도 아인슈타인의 장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의 사유가 발전하게 된 배경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그에 따른 부수적 요청들과 인내의 시간들, 격론의 굴곡들이 저자들에게는 주요한 소재로 선택된다. 교과서에서 우리가 쉽게 싫증을 느끼는 이유는 역사의 극적 파노라마를 완벽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교과서를 가지고는 발견자가 자연의 해석에 매달렸을 때 느꼈을 괴로움이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분야에 대한 예견을 느낄 수 없다. 그것들은 '언급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오로지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들을 생산했던 혁명의 역할뿐만 아니라 혁명의 존재 자체까지도 교과서에는 가려져 있는데, 역사에 대해서는 편린만을 다룰 뿐이다.
그 자신의 생애에서 직접 과학혁명을 겪었던 당사자가 아닌 이상,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나 교과서 문헌을 읽는 일반인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역사적 감각은 그 분야의 가장 최근에 있었던 혁명의 결과까지로만 한정되므로, 우리의 눈에 과학은 결실이 차곡차곡 쌓인 풍요로운 곳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숙한 연구자의 눈에 그것은 자연의 역동성을 억측으로 묶어둔 엉성한 '지식의 다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다른 분야의 교과서에 비해서 과학교과서가 유독 경직된 자세로 탐구자들을 묶어놓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음악, 회화, 문학 등에서는 다른 예술가들, 특히 앞서 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함으로써 배움을 얻게 된다. 독창적인 창작에 대한 요약(compendia) 또는 편람(handbooks)을 제외하고는, 교과서는 단지 부차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역사, 철학,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교재 문헌이 보다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들에서도 대학의 기초 과정에서는 원전 자료를 병행하여 강독하게 되는데, 일부는 그 분야의 '고전(classics)'들이고 나머지는 학자들이 서로를 향해 집필한 당대의 연구 보고서들이다. 그 결과 이들 분야의 학생은 그의 미래 그룹의 구성원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해결을 시도하게 될 지극히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경쟁적이고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의 풀이들, 즉 궁극적으로 그 스스로 평가를 내려야만 하는 풀이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상황을 적어도 현대 자연과학에서의 상황과 대조해 보라. 이들 자연계 분야의 학생은 대학원 과정 3,4년에서 독자적 연구를 시작하게 되기까지는 주로 교과서에 의존한다. 다수의 과학 교과과정은 대학원 학생들에게까지도 학생용으로 쓰여지지 않은 저작들을 읽으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연구 논문과 전공 논문을 보충 독서자료로 부과하는 경우에서도 그러한 과제는 최상급반에 국한되며, 사용하는 교과서에 없는 부분을 다소 보완하는 자료에 제한된다. 과학자 교육의 최종 단계에 이르게 되면서, 교과서는 교과서를 가능케 했던 독창적인 과학 문헌으로 체계적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교육 기법을 가능하게 하는 그들의 패러다임에 확신이 얻어진 상황에서, 그것을 바꾸고 싶어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그런 연구들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모두 보다 간결하고 정확하고 체계적인 형태로 최근의 교과서에 요약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뉴턴, 패러데이(Faraday), 아인슈타인, 슈뢰딩거(Schrodinger)의 연구 보고서를 읽어야 하겠는가?
이것은 폭이 좁고 경직된 교육으로서, 아마도 정통 신학을 제외한 다른 어느 분야에서보다도 더 그러할 것이다.


인문·철학서적을 보면서 우리는 저자들과 직접 대면한다. 그들이 시대적 상식에 사로잡힌 성향이나 글쓰기의 습성, 개인적 취향 등이 고스란히 우리들의 시야에 들어온다. 특히 문학 연구에 있어서 작가의 생애 연구는 필수적이다. 만약 도스또옙스끼의 생애를 모른 채 그의 문학에 뛰어든다면 우리는 진리의 반을 잃게 된다. 이에 반해 과학 탐구자들은 저자를 직접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 잘 정리된 교과서를 통해서 이들이 가지는 시대적 무게감을 실컷 맛보게 된다. 과학 교과서는 대부분 발견과 영광·의미의 역사를 다루기 때문에 세례를 받은 연구자들은 아류가 되기 십상이다. 누구도 그 이론이 생성되기까지 전혀 엉뚱한 과정과 맹점을 알지 못하며 나아가 탐구자들에게 교과서의 인물들은 신의 지시를 받고 그런 발견을 이룬 사람으로까지 보인다.



과학 교과서들(그리고 너무나 많은 구식 과학사(科學史)들)은, 명백하게 동시에 고도로 기능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교과서의 패러다임 문제들의 서술과 해결에 기여했다고 쉽사리 평가될 수 있는 과거 과학자들의 연구 중 그런 부분만을 인용한다. 더러는 선택에 의해, 더러는 왜곡에 의해 이전시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론과 방법의 가장 최근의 혁명에 의해 과학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던 바로 그 일련의 고정된 규범들에 부합되도록, 고정된 문제들의 한 벌에 대해 연구를 수행해 왔던 것으로 암묵적으로 표현된다.


화이트헤드는 과학 교과서를 가리켜 그 분야의 창시자들을 잊기를 주저하는 과학은 패배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과학의 역사를 축적적으로 채색하려는 교과서의 횡포는 자칫 과학을 박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가 있다. 자연과 함께 인간의 정신과정도 생동하는 것인데, 정수를 뽑는다고 요약을 해버리면 독자가 그것에 대해 정당한 판단을 내릴 기회를 박탈하는 셈이다. 
진정한 과학은 패러다임의 끈질긴 투쟁의 역사이며 비축적적인 정신의 총화이다.



위대한 착각


패러다임이 일단 출현하면 그를 중심으로 명료화, 검증화 작업이 진행된다. 그 과정에서 패러다임은 대폭 수정되며 전혀 새로운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과정의 분기점이 되는 것이 발견자들의 착상인데 소위 '위대한 착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을 전체적으로 알기에 자연은 너무나 광대하고 신비롭기 때문에 이들의 판단착오는 필연적이다. 착오율을 좀더 줄이고 논의를 세련화시키는 것이 연구자들의 역할인데, 그들이 결정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바로 앞의 연구자가 했던 판단, 즉 '위대한 착각'이다. 맥스웰은 뉴턴주의자로서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르(mechanical eth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었는데, 그러한 착상을 명료화시키는 과정에서 '에테르의 끌림'이란 것은 허구가 되어버렸고 그는 본의 아니게 뉴턴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고 말았다. 이런 전복과정에서 아인슈타인까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다.
이러한 착각은 두 가지 종류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이제까지 믿고 있었던 '신앙'을 말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신의 지위를 찾아 완전히 일어서게 되기까지의 시행착오들을 말한다. 내가 말하는 '위대한 착각'도 바로 후자이다.
이런 착각들의 발견은 많은 이상 현상과 비상적 탐구를 자극시키는 원료가 된다.
우리는 모두 과학을 자연에 의해 미리 설정된 어떤 목표를 향해 부단히 다가가는 하나의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다윈의 진화론은 받아들이기 힘든 패러다임이었다. 다윈 이전에 진화는 목표-지향적 과정(goal-directed process)으로 간주되었으나, 다윈에게 있어 설정된 목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주어진 환경에서 그리고 자료가 주어진 실제 유기체들에서 작용하는 자연선택이라는 메커니즘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하며 훨씬 더 분화된 유기체들(organism)의 점진적이지만 꾸준한 출현의 원인으로 설정되었다.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evolution-towarde-what-we-wish-to-know) 대신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의 진화(evolution-from-what-we-do-know)로 대치할 수 있게 되면, 다수의 혼돈스런 문제들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학자들은 언제나 정상과학의 위치에서 탐구를 수행하지만 언젠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을 예측해야 할지를 정확히 알면서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새로움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발견한 착오의 표시들은 우리들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인도자가 된다.
이미 결과를 아는 입장에서 우리들은 발견이 이루어지기 전 단계를 우습게 보거나 무시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니, 우리 후손들은 우리들의 탐구자세를 우습게 보아 넘기지 않고, 우리들이 착오를 일으킨 부분을 더욱 신경 써서 관찰할 것이다. 그 때는 정상과학의 교과서와 '착오의 교과서'가 서로 호응하여 현재보다 유연한 패러다임의 생산체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인간이 가진 어리석음 중의 하나는 '축적과 결실'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가 이때까지 쌓아온 정신이 우리를 지켜줄 수 있으리라는 단순한 믿음이 어째서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진리처럼 자리잡을 수 있는지 의아하다. 인간은 '축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소비'한다. 세계와 시대는 그에게 좀더 다른 요구를 하고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정력을 소비하여 시대를 견딘다. '축적과 결실' 속에서는 불가피하게 허위와 기만이 틈입한다. 인간이 보다 솔직하다면 우리의 학문의 위기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무기를 갖고 무기가 자신을 언제나 지켜줄 것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시대에 편승해 있을 뿐이다. 특히 학문에 있어서는 너그러운 것은 경직된 정상과학의 주범이 되며 답보상태를 만든다. 솔직하고 진솔한 탐구는 자신과 세계의 비밀을 알려주는 유일한 열쇠다. 조금은 자신에게 냉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예전에 이 배를 탔던 사람들의 방향과 계획을 물려받았다. 우리는 방향키를 정반대로 돌릴 용기가 없다. 이 배는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이 전의 선원들이나 그들의 할아버지들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선배 선원들이 가던 방향을 따라 계속 흘러왔을 뿐이다.


정상과학은 닻이다. 세상의 대해(大海)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표시하는 부표이며, 나의 오늘을 잊어버리지 않으려는 비망록(備忘錄)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새로운 것들을 전제로 쓰여지므로 항상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패러다임은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기다린다.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며, 자연에는 우리가 평생 만나기 힘들 정도의 광대한 표본이 숨어 있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를 말해주는 이유이다.



- 주(註) -


1) 패러다임은 언어학습에서 사용되는 '표준예(exemplar)'란 뜻의 단어에서 차용해온 단어인데, 학생들이 주어진 기초 지식을 통해 예제(例題)를 푸는 방식에서 여러 가지 변형이 유도될 수 있다.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고 난 연구자가 사례를 접했을 때 각자 다른 방식의 문제풀이가 생길 수 있고, 서로의 대결을 통해서 보다 올바른 형태의 방식이 채택되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 등정의 발자취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지음, 김은국. 김현숙 옮김, 송상용 감수 / 바다출판사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인간 등정의 발자취          
- 현대를 의미 있게 하는 것들에 대한 겸손한 기억



전환



이 책의 나의 기억에 '인생을 바꾸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의 저자도 히로시마 원폭을 직접 목격하고 나서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케이스다. 개인적으로는 문학도인 선배에게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소개를 받고 신비감과 호기심이 강하게 자극되었으나, 벌써 5년 전의 이야기이다.
화려한 기술로 위장된 현대 위에, 이보다 더 놀라운 발전이 있을까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적당한 응용'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루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킨 '원천 기술'이다.




작고도 섬세한 온갖 세공품들은 핵 물리학의 어떤 장비 못지않은 발명의 재능이 필요하고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인간의 등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 단숨에 그 실례를 백 가지라도 들 수 있다. 이 풍요로움은 발명의 상호 작용에서 온다. 문화는 아이디어를 번식시키며, 그 안에서 새로운 고안은 제각기 다른 고안의 효력을 가속화시키고 확대한다.
          본문, 62 ∼ 67



화려하고 거대 단위로 변천하는 역사가 아니라, 소박하고 조그만 순간에 결정적인 착상을 통해서 거대 세계를 연 계기들의 기념비를 아름다운 필체로 묘사하고 있는 저자를 따라 수백만년 지구라는 모태에서 현재까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 인간의 유연성에 대해서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탄생




인간이 중앙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손에 돌을 든 검고 작은 동물로부터 호모 사피엔스라는 현대의 형상으로 변화하는 데 줄잡아 2백만 년이 걸렸다. 그것이 생물학적 진화의 속도다. 그런데도 인간의 생물학적 진화는 다른 어떤 동물의 그것보다 빨랐다. 그와는 달리, 호모 사피엔스가 여러분과 내가 열망해온 인간이 되기까지는 2만년보다는 훨씬 적게 걸렸다.
……
문화적 진화의 속도는 그와 같아서 일단 시작이 되면 앞서 지적한 두 숫자의 비율이 말해 주듯, 최소한 생물학적 진화보다는 일백 배나 빨리 진행된다.
'일단 시작이 되면'이라는 말이 중요한 구절이다.
         본문,  46



아기공룡 둘리를 보면 희동이와 똑같이 생긴 식인종 아기가 나온다. 형들이 희동이를 동생인 줄 알고 부모에게 데려갔을 때, '털도 없고 이렇게 비실한 애가 어떻게 동생이냐'며 형들을 꾸짖고 당장 찾아오라고 한다. 인간은 야생에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약한 신체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이 모든 존재를 넘어서는 기본적인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환경은 적자(適者)들을 붙들어 놓는다. 적자들은 환경을 거부할 수 없다. 초원에 가장 멋지게 적응한 가젤(gazelle) 영양은 그 아름다운 뜀뛰기로도 영원히 초원을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굴로 숨어들어가고, 맹수를 피해 다닐 때부터 생존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신체적 취약성 사이에서 두뇌를 끊임없이 고양시켜 왔을 것이다.



말[馬]의 저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 켄타우로스나 또 다른 반인 사티로스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그것은 스키타이족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공포심을 반영한 표현이다. 저자는 우리가 만든 힘이 우리의 의도 안에 한정되어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의도를 훨씬 넘어서서 용도를 왜곡할 만큼 균형을 상실했는가를 묻고 있다. 역사가 소박한 오솔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한다. 잉여가 우리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면서부터 농업에는 활력이 붙고 생산량이 늘어나 항상 괴롭히던 식량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자급자족 사회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 등장하면서부터 비교도 안 될 힘과 속도로 인해 농촌의 잉여에 위협을 주게 된다. 즉 전차와 승마법 등 전쟁과 약탈에 필요한 기술들이 말 위에서 이루어졌다. 아시아, 페르샤, 아프카니스탄, 몽고 등지를 아우른 스키타이족의 침략은 그리스인들에게 공포감과 동시에 호전적인 영혼을 선사했다. 전쟁은 끊이지 않고 군비 확장의 경쟁은 그때부터 달아올랐다.
말의 저주는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멘델레예프가 꼼꼼히 정리하여 더 이상 탐구하지 않았던 주기율표를 넘어 저승의 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선물을 받게 된다. 그것이 플루토늄 폭탄이다. 핵 에너지의 위력을 잘 아는 과학자들 특히 지라드는 '계획'을 무마시키기 위해 '공개 시험'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선물의 의미'를 너무나도 몰랐다. 물리학은 정열의 학문이었고 위대한 업적을 남겼으나 이제는 그것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쓰여져야 함을 인식하게 된 뼈아픈 교훈이 되었다.



말이 남긴 저주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말의 속도감은 감각을 무디게 하였다. 그 놀라운 힘과 부산물은 우리의 힘을 놀라운 위치까지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플루톤의 말을 타고 만나는 두 가지 딜레마 중 하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인간의 고뇌를 외면하는 전쟁무기로 향하는 길이다. 그리고 하나는 말 위에 서 있는 지고한 존재라는 오만이다. 이들에게 말 위의 인간과 말 아래 인간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말 아래의 인간은 그저 움직이는 노획물 혹은 전유물에 불과하다. 아우슈비츠는 말 아래 인간들을 4백만의 숫자로 본 인간의 오만함을 극렬히 보여준다. 인종과 인종의 차이는 말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신이 그어준 선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발견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판단 없이 저승의 신에게 다가가는 사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는 셈이다.



함정



인간을 인간으로 만든 것은 주어진 상황을 개척해가는 지속적인 유연성이다. 유연성이 죽은 사회는 역사 안에 묻혔으며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유연성을 살리는 방법은 유연성을 가두지 않고 숨쉬게 놔두는 것이다. 폐쇄된 사회 안에서 역사의 동력이 멎는 현상이 바로 그런 함정에 해당한다.




위대한 제국에 있는 도로, 교량과 통신은 예외없이 진보적 발명이다. 그것이 절단되면 권위가 고립되고 붕괴된다 현대에는 혁명의 제1차 목표의 전형이 바로 그 셋이다. 잉카는 대단한 정성을 들여 그것들을 보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에는 바퀴 달린 수레가 없었고, 다리 아래에는 아치(arch)가 없었으며, 통신은 문자로 씌어지지 않았다. 잉카 문명은 기원 1500년까지도 이러한 발명을 이룩하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몇천 년 늦게 출발한데다, 구세계의 온갖 발명들을 성취하기 이전에 정복당했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굴림대로 커다란 건축용 석재를 운반하여 건축을 하던 사회에서 바퀴를 이용하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몹시 기이하다는 느낌을 준다. 바퀴의 기본적 요소는 고정된 굴대라는 점을 우리들은 잊고 있다. 현수교를 만들었으나 아치를 놓쳤다는 사실 역시 매우 이상하게 생각된다. 그런데 가장 기이한 사실은 수적 정보 기록을 세심하게 보전하던 문명이 그러한 것들을 문서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라 하겠다. 군주인 잉카는 제일 가난한 시민, 또는 그를 뒤엎은 스페인의 폭력배들이나 마찬가지로 문맹(文盲)이었다.
         본문,  86 ∼ 88



마추피추가 묻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폐쇄적인 사회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잉카 한 사람을 위해서 일했고, 잉카가 그들에게 신이 아닌 유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며 무너졌을 때, 그들의 인생의 목표는 단절되었다. 이런 집단적 배신감은 잉카를 폭삭 내려앉게 하기 충분하다. 그리스인들이  자랑하는 기하학과 조형술에서 아치가 발견되지 못한 이유는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실용적이고 민주적인 사람들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인간이 축복받은 발견을 이룬다면 그것은 반드시 정신의 민주화 안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저자의 동료인 폰 노이만은 상당히 지적이고 위대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천재였다. 그는 발견의 일꾼의 자리에서 벗어나 정계의 험악한 중심가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로 이날까지도 정신과 수학에 관해 그가 다가가려고 했던 분야는 밝혀지지 않았고, 노이만은 그것을 했어야 했다. 저자는 그를 지성의 귀족주의와 사랑에 빠졌다고 평가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성실성이 담보되지 않은 과학자가 쉽게 범하는 실수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깊이를 모른다. 그냥 냉장고에서 꺼내듯이 쉽게 써버린다. 신이 부여한 깊고 고요한 능력의 의미를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며 자기보다 못한 세계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기 일쑤이며, 늦잠꾸러기 근성처럼 천성이 성실하지 못하다. 성실성은 자신의 결여를 겸허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자라나는 인간의 고요한 능력이다. 노이만의 귀족주의는 우리들의 문명을 파괴시키는 교조주의를 너무 많이 닮았다. 우리의 지성이 제 값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성은 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인간의 가능성과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할 임무를 찾아가는 것이 민주주의 지성인의 길이다.
역사를 살다간 천재들이 얼마나 많은 함정에 빠졌는가를 생각하면, 천재적 지적 능력이라는 것은 부여받은 사람에게도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이적인 발견의 역사




모래알 하나에서 세계를 보고
들꽃 하나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
한 시간 속에 영원을 잡으라.
<윌리엄 블레이크, '순결의 조짐들(Auguries of Innocence)' 중에서>
          본문, 295



발견이라는 것은 비범한 정신 외에도 확신에 가득 찬 인내를 통해 얻을 수 있다. 이들의 눈은 편견에 지배되지 않고 사물 자체와 대화를 한다. 몸소 체득한 확신을 가지고 절대정적 안에서 발견의 정수를 걷어올릴 때의 모습은 하도 눈부셔서 워즈워드는 "프리즘을 든 고요한 얼굴의 뉴튼"이라는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경이로운 발전의 순간에 이들의 표정은 마치 신의 손길을 느끼듯이 경건하였다.




이것이 중세의 연금술사들이 중국에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객들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킨 고전적 실험이다. 그들은 수은의 황화물의 하나인 빨간 색소로서 진사를 골라 열을 가했다. 그 열은 유황을 몰아내고, 신비로운 은빛 액체 금속인 수은이라는 절묘한 진주를 남겨 그 실험의 후원자에게 경탄과 경외감을 불어넣는다. 수은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산화하는데, 다시 진사가 되지 않고(처방을 작성한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역시 빨간 색이기는 하되 일종의 수은 산화물을 만들어낸다. 그렇지만 그 처방이 완전히 빗나가지는 않았다. 그 산화물은 다시 수은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빛깔은 은빛에서 빨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수은은 다시 산화물로 은빛에서 빨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이 모두가 열의 작용이다.
          본문, 107 ∼ 110



과학의 발전이란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가지 않는다. 전혀 관계 없을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서로의 발전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발전을 담보하는 것은 끊임없는 호기심과 성실한 탐구밖에 없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욕구가 행동이라는 연금술사를 만나 위대한 착각을 일으키면 그것을 해석하고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과학은 성숙하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맹수들의 공격을 피해 동굴에 갇혀 있으면서도 벽면에 무수히 나 있는 손자국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치 "이것이 나의 자국이다. 이것이 인간이다."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스페인 산탄데르 엘 카스티요에 있는 손자국들)
모든 농업권에서 가장 강력한 발명은 쟁기이다. 쟁기로 인해서 대형 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정착이라는 것은 항상 떠돌아다녀야 하는 유목에 비해 안정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발전의 필수 요소가 된다.
일찍부터 인류의 욕구는 왕성해서 인간들은 지구 전역을 돌아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근동으로, 근동에서 대륙으로 다녔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며, 빙하가 녹으며 완전히 눌러앉게 되었다.
인간이 돌과 불을 발견하기까지는 20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로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을 발견한 이후 인간은 돌의 성질에 대해 깊이 천착했다. 인간의 손은 눈에 보이는 용도를 초월하여, 안에 숨겨진 결의 법칙을 읽는다.
아치, 버팀벽, 돔은 돌의 결이 낼 수 있는 지고한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은 돌에게서 그것 이상을 읽어낸다. 즉 돌이 받쳐오던 하중을 더욱 강력히 지탱할 수 있는 재료에까지 손길이 뻗치는 것이다.
문명은 완성된 공예품들의 집합이 아니고, 공정(工程)의 정교화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의 가장 초기 단계는 '구리'의 단계이다. 정착농민들은 구리를 이용해 농구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리의 결점은 결정이 무르다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낸 사람들은 연금술사들이다. 이들은 구리에 모래 등의 불순물을 섞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었다. 주석의 발견은 놀라운 일이었다. 구리와 주석의 합금은 가히 '성년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도가 단단하여(구리의 거의 3배) 시대의 플라스틱으로 손상이 없었다. 이때부터는 보다 정밀한 공정이 아니면 새로운 발견은 쉽지 않았다. 계기(計器)에 의해 작업을 하지 않던 문명에서 강철을 주조하기 위해서는 "그 칼이 아침해의 빛깔로 이글거릴 때까지 지켜보는 것을 관습"으로 한다.



대개 인간의 두뇌를 어느 수준에 올려놓는 발상은 단순하고도 근본적이다. 과학자군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특정인이 과학의 수준을 이끌었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많은 과학자들의 뇌리에 경종을 울리는 참신한 발상이 의식의 전환을 일으키고 답보상태인 문명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
파라켈수스가 있기 전에 의사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책을 읽어주는 유식한 학자로 통하였고, 그의 조수는 하라는 대로 불쌍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파라켈수스는 '의사의 진단'을 의술의 결정적 방법으로 격상시킴으로써 환자를 오래된 책에서 자유롭게 만들었다. 의사들의 판단 여하에 따라서 오래된 의술서에 반하게 되는 치료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불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원자였다. '열소(熱素)'라고 하여 알려진 원자와 결합해서 화학작용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거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학설이었는데, 마침내 새로운 원소인 산소를 발견한 후에야 불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원소들이었고, 그 미시적인 세계만 밝혀진다면 자로 잰 듯이 그 질서를 파악할 수도 있다. 서로 결합하는 상이한 원소들의 측정량은 일정하며, 그것은 원자결합의 기본 도식을 시사한다. 이것이 돌턴이 도달한 결론이다.




"나는 기초 입자들이라 정당하게 부를 수 있는 상당수의 입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 입자들은 절대로 다른 입자로 변형시킬 수 없다."
          본문, 135



한때의 과학은 이들의 손에 의해 직접적으로 밝혀졌다. 멘델레예프, 그는 원자와의 고된 카드놀이를 통해서 일정한 무게와 성격을 지닌 주기율표를 완성했고, J.J.톰슨, 그는 원자는 분리될 수 없다는 그리스 시대의 믿음을 뒤엎어 놓았다. 러더포드, 그는 그 중성자로 핵을 열어서 변형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모두의 선두에는 그 새로운 개념들을 최초로 다져놓은 사람들, 구습 타파자들이 있으니 막스 플랑크, 그는 에너지에 물질과 같은 원자적 성격을 부여했다. 그리고 루드비히 볼쯔만, 원자―세계 속의 세계가 우리 자신의 세계만큼이나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실제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그 누구보다도 그에게 크게 빚을 지고 있다. 이것이 역사가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정복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이 믿고 있는 사실이 현실화되었고, 그것들을 현실화하려는 의지가 승리를 거두는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 그 견고한 그릇



수학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과학이 불멸의 생명을 받는 마지막 시험이다. 천문학이 다른 과학보다 체계적 발전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수학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나 화학, 생물학마저도 수학적 모형으로 그 법칙들을 형상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진보를 거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수학에서는 반드시 포함해야 할 개념들이 있는데, 증명이라는 논리적 개념, 자연의 정확한 법칙을 표현한 수리적 방법,  자연의 다이나믹한 현상을 기술하고 예측마저 할 수 있는 동태적(動態的) 특성이다. 그것을 온몸으로 실현한 사람이 바로 피타고라스이다.




피타고라스는 음악의 화음과 수학 간의 기본적 관계를 발견했다.
……
팽팽하게 쳐 놓은 하나의 현(絃) 전체가 진동할 때에 기음(基音)이 난다. 그 기음과 조화되는 음을 내려면 현을 등분(等分)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정확히 2등분, 3등분, 4등분 등등으로 나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현의 정지점(靜止點) 즉, 마디가 등분점에 정확하게 놓이지 않으면 그 소리는 불협화음이 된다.
……
피타고라스는 귀―서양인들의 귀―에 즐거운 소리를 내는 화음은 정수(整數)로 현을 정확히 등분한 소리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
피타고라스는 기하학과 숫자를 연결지은 개척자였는데……
……
피타고라스는 음의 세계는 정확한 숫자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입증했다. 나아가서 그는 시각(視覺)의 세계에서도 그 논리는 참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것은 비범한 업적이다.
          138 ∼ 140



그는 숫자를 자연의 언어라고 불렀다. 그에게 자연의 법칙들은 예외 없이 숫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사유를 물려받은 사람은 뉴튼이었다. 뉴튼은 기존에 수학이 수학으로 머물던 유클리드의 정태적 기술 방식에서 동태적 접근 방법으로 바꾸어 눈앞에 벌어지는 물리적 현상에 대한 체계적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과학은 진정으로 엄밀해졌다고 할 수 있다.
원소도 질량이라는 수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대한 세계가 드러났다. 지금은 원자의 기본 형태가 숫자적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수는 표현 가능한 것에서 불확실한 것에 대한 표현까지 범위를 넓혀오고 있다. 어느 대상이든 정확한 관찰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불확정성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모든 정보는 불완전하며 우리는 그 오차까지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가우스는 오차의 산포를 곡선의 편차나 폭으로 요약시키는 '가우스 곡선'을 만들었다. 관찰 대상이 불확실의 영역 내에 있다면, 그 영역은 관찰자의 산포도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수학은 문제를 명확하게 만들고 표현방법 또한 단순하다. 숫자에는 우주를 묶고 있는 정확한 법칙들이 담겨 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예언을 받아들여 직각삼각형을 이루는 숫자들을 다른 항성계(恒星系)의 행성들에 보내어 그쪽에 이성적(理性的)인 생명체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메시지로 삼자는 제의가 실제로 나왔었다. 숫자는 우주의 언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슬픈 역사, 의미 있는 기억




고인이 된 피렌체인 빈첸쪼 갈릴레이의 아들이며, 당년 70세인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법정에 직접 소환되어 기독교 공화국 전역의 이단적인 타락 행위를 제소하는 이단 심문관이신 존경하는 추기경 예하(猊下) 앞에 무릎을 꿇고, 거룩한 복음서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성가톨릭 사도 로마 교회가 지지하고 전도하며, 가르치는 모든 것을 항상 믿어 왔으며, 지금도 믿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이후에도 믿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나 한편―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거짓 의견을 완전히 버릴 것이며, 전술한 이론을 구두나 서면 등 어떤 형식으로든 지지, 옹호 또는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명령을 이 성청(聖聽)이 저에게 사려, 분별 있게 암시한 뒤, 그리고 전술한 교리가 성서에 배치된다고 저에게 통보한 뒤에도―저는 이미 단죄된 이 교리를 논의하고, 이들에 관한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 교리를 지지하는 매우 강력한 주장을 도출하는 한권의 책을 써서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원인이 되어 저는 이단, 다시 말하면, 태양이 세계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는 중심이 아니고 움직인다는 것을 주장하고 믿었다는 강력한 의심을 성청으로부터 받은 바 있습니다.
따라서 저에 대해서 정당하게 제기된 이 강력한 의미를 추기경 예하와 믿음 있는 모든 기독교도들의 마음에서 제거하고자, 성실한 마음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저는 앞서 말한 과오와 이단, 그리고 전술한 교회에 배치되는 다른 모든 과오와 교파 전반을 포기,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와 비슷한 의혹을 불러일으킬 어떤 것도 이후에는 절대로 구두나 서면으로 말하거나 주장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또한 어떠한 이단자, 혹은 이단의 혐의가 있는 사람을 안다면, 저는 그를 이 성청 또는 제가 있는 지방의 이단 심문관과 종무(宗務) 판사에게 고발할 것을 서약합니다. 나아가서 이 성청이 저에게 부과했고, 부과하게 된 모든 고행을 충실히 이해하고 준수할 것을 맹세하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의 약속, 확언과 서약의 어느 하나라도 위배할 경우(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을), 저는 그러한 일탈 행위에 대해서 일반적이든 특수한 것이든, 성경과 다른 전범(典範)들에 규정 공포된 모든 고통과 형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시여, 그리고 제 손을 얹고 있는 이 거룩한 복음서여, 저를 도와 주소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내 주의를 버릴 것을 선서하고, 맹세하고, 약속했으며, 자신을 거기에다 묶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증인 삼아 저는 제 손으로 위에서 지적된 신념을 포기하겠다는 이 문서를 작성하여 1633년 6월 22일 로마의 미네르바 회의에서 한마디 빠짐없이 낭독하였습니다.
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위와 같이 자필로 선서했습니다.
          본문, 188 ∼ 190



이것은 진리가 자연에 있지 않고 진리의 담당자로 여겨졌던 사람들의 손에 있을 때 나타나는 불행한 사건이다. 갈릴레오 자체도 현실감과 처세술에 대한 조금의 사려도 없이 진리가 모든 것을 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는 순진함을 드러냈다.
과학의 시련은 억압된 사회 분위기에서 기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과학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수성에도 적지 않게 의지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대개 발견되는 새로운 학설은 확정된 패러다임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는 새로운 사실들이다. 다윈의 경우가 그러하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했을 당시는 스스로도 깊은 충격을 받아서 정체성의 혼란 속에 있었다. 만약 전혀 다른 곳에서 다윈의 논문과 자매를 이루는 왈라스의 논문이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면, 우리들은 다윈을 모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치가 또 있을까. 왈라스가 내가 1842년에 써 놓은 원고를 갖고 있다 해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간결하게 간추려 놓을 수는 없었으리라!
          본문, 259



다위의 이론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가라앉았을 때, 우리들은 차분히 우리의 기원을 정리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대개의 과학의 발견은 이런 과정을 거치며 우리들에게 당연한 지식이 된다.



1900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원자의 실재(實在) 여부에 대해, 생명을 걸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하겠는가. 위대한 철학자인 비인의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는 원자는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 위대한 호학자 빌헬름 오츠왈드(Wilhelm Ostwald)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기의 그 중요한 전환점에서, 한 사람이 근본적인 이론에 입각해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완강해 주장했다. 저자는  강력하고 저명한 적수들에 맞서서 원자론을 옹호했으며 원자론이 승리할 즈음 모든 것을 잃은 패배감에 자살하고 만다. 만약 그때, 반원자론이 실제로 득세했더라면, 우리의 진보는 확실히 수십년, 아마 일변 년쯤은 퇴보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리학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생물학에 있어서도 진보에 제동이 걸렸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유럽 전체에 암울한 구름이 덮치고 있었다. 그 중 특히 1백 년 동안 괴팅겐을 덮고 있던 특별한 구름이 있었다. 1800년대 초에 요한 프리드리히 부루멘바하(Johann Friedrich Blumenbach)는 전 유럽의 뛰어난 인물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해골을 수집해 놓았다. 그가 인간의 가계를 분류하기 위해 해부학상의 척도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의 작업에서 그 해골들로 인류의 인종적 차별을 지지한다는 조짐은 없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0년에 부루멘바하가 죽은 이후부터 그 수집물은 점점 더 보태어져서 마침내는 인종주의(人種主義), 즉 범게르만 이론의 핵심이 되었는데 그 이론은 나치스들의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정식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본문, 308



상대방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을 받는 사람들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는 것을 극구 부인한다. 자신은 항상 모자란 사람이며 도의 가르침을 매번 어겨서 후회하곤 한다고 술회한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숨질 때 마침내 긴장을 풀고 편안히 저세상으로 간다. 이들을 우리는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인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인간 이하로 취급함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상대적 지휘를 차지한다. 신 아래 인간에는 여러 구분이 있으며, 다른 종과는 근본적으로 차별되었다고 판단하면서도 공식적으로 표명하려는 것이 인종주의자들의 특성이다. 이들에게 권력과 지식이 침투했을 때, 인류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를 파생시키게 된다. 도그마는 무지로 인해 생겨난다. 신에 도달하려는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는 인간이 또 있을까? 마찬가지로 신을 독점하려는 인간처럼 무지하게 보이는 경우가 또 있을까? 이 상상치도 못할 광란의 희생자 중 과학자도 적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이로 인해 세계관의 일대 전환을 겪게 된다. 저자가 인간이라는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에세이를 쓰려는 의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물리학자에서 생명과학자로 전향한 지라드의 선택은 현명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신 바로 아래 있다고 자처하는 인간의 한 족속들도 거대한 세계를 보고 있는 뉴튼의 마음과 같다면 인간의 등정은 순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세상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나는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고, 이따금 보통 것보다 한결 매끈한 돌멩이나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며 놀고 있지만, 진리의 대양(大洋)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본문, 204 ∼ 205



망망대해 앞에 서 있는 어린이의 이미지는 과학의 세계에 천착하는 사람도, 인간이나 예술, 철학에 관여하는 사람도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그림이다. 저자가 인간 발견의 장면을 그리는 필체는 하나같이 경건한 무엇이었다. 인간의 의지는 욕심에 물들지 않았고, 그의 엄밀성은 인간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다.
사고의 혁명적 전환을 불러올 학설을 쥔 학자는 불안하고 망설이는 모습으로 서 있으며, 우리들의 무지에 관해서는 언제나 겸허하다. 이들이 이룩한 과학의 발전이 대중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고 생활의 활력이 되었는지는 「광학」을 저술했을 당시 젊은 시인이었던 포프의 시에서 강력하게 천명돼 있다.




영롱한 눈의 농어는 티로스의 물감들인 지느러미를 달고,
은빛 장어는 반짝이는 몸뚱어리를 굼틀거리며,
노란 잉어는 황금빛으로 물든 비늘에 싸여 있고,
날쌘 송어들은 진홍색 반점으로 치장했노라.
          본문, 199∼ 200



어떤 때는 순수한 과학자보다 기술자나 일반 서민들에 의해서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졌다. 바늘, 송곳, 단지, 화로, 삽, 못과 나사, 풀무, 끈, 매듭, 베틀, 마구, 단추, 신발 등등의 발견은 인류의 지적인 여행 중 반드시 밟아야 할 첫 단계였으며, 아치의 힘을 더욱 강력하고 세밀하게 만든 것은 과학자들이 아니라 기술자들이었다. 때문에 기하학을 사랑하는 그리스인이나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안고 있던 페루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평민적인 문화에 의해서 발전의 결정적 단서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인간 발견의 역사는 유연성의 역사이다. 중국의 청동 공예술은 과학의 발견 이상의 유연성을 자랑하는데 청동 작품들의 주기(酒器)와 식기들―놀이의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동시에 거룩한―은 그 자체의 기술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하나의 예술을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기쁨을 준다. 우리들의 손은 이것을 과학으로, 과학에서 예술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 등정에서 발견한 저자의 놀라운 성과이다. 우리들은 자연 앞에 어떤 자세로 서 있어야 하며, 서로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저자는 매 여행지에서 깨달았을 것이다.



브로노프스키에의 이 저서에서 발견되는 놀라운 점은 서술 방식이다. 물질적이고 유물론적 유추에 의해서 논의를 진행시키는 과학정신의 글 속에서 사적이고 인간적인 감흥이 묻어난다.
과학자는 사실과 사실의 조합을 통해 거대한 비유와 은유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상상력의 극치이다.
저자의 '낯설은 글쓰기'를 보며 나는 얼마나 과학적·유물론적 사고에 우둔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기적 유전자 - 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2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적 유전자
- 생존을 위한 혈투


전체와 개체


인간의 의식이란 게 생겨났을 때부터 그것을 지배한 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은 신비롭고 재미있는 세계를 감추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풍화작용인지 권력의 생리작용인지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천과 반복을 거듭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과학과 철학, 문화와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사조는 대개 '전체를 포함하려는 야심'을 갖는 특성이 있다. 철학사나 문학사 한 분야가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전 분야가 대표정신의 한 분야를 담당하고 있으며 적어도 두어 가지 분야의 연계를 통해 자신들의 운동을 역사에 알렸다.
고대에는 우주의 기원과 최초라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시대를 지배했다. 그리고 어떤 반발을 통해서 좀더 솔직히 인간이나 무지의 자각이 대세를 이끌었던 적도 있다. 이에 대한 제안으로 '척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논리나 과학이 그에 해당한다.
'이기적 유전자'를 보면 현재 우리들의 '척도'가 생명과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과학이라 함은 보다 인간에게 실질적이고 미시적인 세계이다. 전체에 대한 고찰은 어느 정도 우리들에게 위험과 모험(어쩌면 억측까지도)을 요구한다. J.브로노프스키는 그의 저서에서 점차 시대가 요구하는 학문은 생명과학이 될 것이며, 수학자로 출발한 자신의 일생에서 생명과학의 작업에 참여했던 경력을 '축복 받은 기회'라고 술회하였다. 인간이 과학에 의해서든 철학에 의해서든 좀더 내부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면 시끌벅적한 세상에서 살되 전체에 의해 희생되는 일은 만나지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혹시 내가 이야기를 쓸 기회가 생긴다면 '개인의 도전'이라는 주제로 쓰고 싶다. 지적으로 지극히 성숙한 한 인간은 인류를 파멸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골자인데, 우리들이 내부의 눈을 통해 좀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은 타인과 나에게 커다란 축복일 것이다.


불가피한 이기성과 투쟁

서로 돕고 살며, 이웃을 사랑하라

위의 명제를 평생동안 새기며 이왕이면 착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나에게 '이기성'이란 말에는 우선 거부감부터 생긴다.
저자는 초입부터 아예 이 책에서 도덕이란 말은 기대도 하지 말라고 잘라 말한다. 특히 생물학적인 세계에서 '자비'란 곧 퇴화를 의미하며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생명체에게는 독약과도 같다. 우리들은 탄생에서부터 수백억의 정자군을 물리치고 태어난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이기성은 생물학적 시원(始原)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타(利他)라 함은 양보를 뜻하는데, 그 안에 이기적 개체가 끼여들어 이익을 독식한다면 집단 내의 이타적 계보를 보존할 수 있을까 하고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실제 우리가 이타적이라 하는 집단은 '이기성'을 전제로 생성된 것들이 많으며, 누군가는 그 지고한 뜻의 희생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민족'이나 '국가'이다. 인간의 존엄성도 만물의 영장도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희생이 아니고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서두에서 저자의 요지는 이것이다. '이기성'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걷고 생활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담겨 있는 이기성을 솔직히 인정하라고 저자는 요구한다.

자기 복제자와 생존


생존이란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생존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것이 모든 생명체의 사명이며 생명보존에 필요하다면 적당한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저자의 이론이 논리를 얻는 지점은 원초적 활동인 생존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유전자는 생존의 명수이다.
생명의 유지라는 것은 거친 바다를 횡단하는 것과 같다. 시간의 풍화도 만만치 않으며 다른 종족간의 대결도 커다란 장애이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몸이 가벼워야 하며 최고의 효율성과 역량을 보유해야 한다.
이러한 생존의 대안은 '결정(結晶)'이 있다. 결정이란 안정된 상태를 의미한다. 소금의 결정이 입방체인 이유는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이 결합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현실에 맞는 결정을 찾아서 생존하고 있다. 과일을 예로 든다면, 여기 사과가 있다. 누군가 칼자국을 내지 않는다면 나름대로의 결정을 유지하며 오랜 시간 그 모양을 유지할 것이다. 오랜 경험과 자기 생존을 통해 유전자는 나름대로의 모델을 만들었는데, 결국 그 모양은 인체라는 기계를 조종하기는 하되 간접적으로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얻어도 자식에게 전수되지 않는 까닭도 유전자의 '간접 제어' 때문이다. 때문에 짧은 시간 안에서, 유전자는 두뇌나 문화 같은 요인에 의해 통제되기도 한다.
유전자가 오랜 시간을 기울여 만든 질서를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으며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자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유전자가 100만년 후의 이야기를 쌩뚱같이 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기 복제자와 진화
 
자연선택은 무엇이고 어떻게 선택하는 것일까?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저자는 자연에는 '건축물은 있되 건축가는 없다'고 못박았다. 한 개체의 진화가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처절한 대결을 통해 상대방을 몰아내고 판의 승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청동무기로 무장한 적들이 영토를 차지하고 판을 장악하고 있을 때 철을 개발한 자들이 나타나 그들을 영토에서 몰아내고 세력을 확장한 것을 '자연선택에 의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생명활동이란 엄청난 의지력의 총화이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렬히 욕구한다.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명제는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모든 신경과 욕구가 거기에 쏠려 있다면 점점 거기에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판을 지배하게 된다. 최초에 유전자에게 부여된 지령은 '살아남아라'였지만, 여기에 하나가 추가되었다.

'녀석을 제압하고 네가 살아남아라'

여기에 적합한 사례가 바로 '의태'라는 현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 표지를 기억하여 그런 종류의 나비를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다른 종류의 나비는 잡혀 먹히게 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나비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도 종종 그것들에게 감쪽같이 속는 경우가 있으며 새들도 속는다. 정말 나쁜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이 의태가 진화하는 이유이다.          

본문. 69p

유전자의 팀플레이


진화를 자연선택이 유능한 돌연변이에게 부여하는 생존 자격이라고 한다면, 그 영예의 수상자는 군체(群體, colony : 집단)이다. 사실 돌연변이란 용어도 군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쓸 수 없다. 즉, 하나의 군체에서 돌연변이가 강력하게 자신의 위세를 뽐낸다. 유전자 군체는 자기복제를 잠시 멈추고 돌연변이를 받아들이는 작업을 하고 결국 돌연변이가 반영된 군체로 복제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이 돌연변이의 조건인데, 군체의 현실에 적합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다. 육식의 이빨이 초식동물의 세계에서 열등한 유전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능한 육식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평평한 어금니와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매우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는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본문, 76p

선택은 현실에 적합한 유전자에게 호의적으로 작용했다. 때문에 개개의 생존기계는 공동체적 진화에 익숙하다. 하나의 예로 세포 클럽은 특수한 형태로 분화하여 하나의 목적을 향해 협력한다. 어떤 세포는 먹이를 발견하는 감지기로서 공헌하고, 다른 세포는 메시지를 전하는 신경으로서, 다른 세포는 근육과 촉수를 이용해 먹이를 낚아채고, 어떤 세포는 체내에서 요구한 양대로 잘게 자르거나 분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들의 조합이 긴밀하고 견고할 때에만 모두의 생명이 보장된다.

프로그래머


우리들은 유전자에 의해서 프로그래밍된 생존 기계이지만, 막상 태어난 후에는 유전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오퍼튜너티(opportunity)호를 발사할 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우주선이 만나게 될 역경을 최대한 예측하여 그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것뿐이다. 우주선이 바위에 갇혀서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바위를 치워줄 수 없다. 그것을 저자는 '시간 지연'이라고 말한다.
시간 지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프로그래머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학습능력'을 만드는 것이다. 어떤 것과 접촉할 경우 조건 값을 넣어서 조건에 합당하면 좋은 것이고, 합당하지 않는다면 피해야 한다는 명령어를 입력한다.

"여기에 달콤한 것, 오르가슴, 따스한 기후, 방실거리는 아이 등과 같은 보상이라고 정의되는 사물의 목록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의 고통, 구역질, 공복, 울고 있는 아이 등에 해당되는 싫은 사물의 목록이 있다. 만약 당신이 무엇인가를 하고 그 후에 싫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다시 그것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좋은 사물 중의 하나가 생기면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좋다."

위의 지령이 수많은 성인병 어린이나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할지도 모르며, 이 지령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죽일 놈이 되겠지만, '학습능력' 역시 진화한다는 것을 염두해 둘 때 적절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점장인 유전자는 뇌를 지점장으로 임명해 매일같이 일변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도록 일정의 권한을 부여하고 심혈을 기울여 투자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본점장의 실수인지는 모르겠으나, 뇌는 고도로 발달하여 지점장 겸 전결권자(專決權者)가 되었다. 즉, 방침을 결정하던 유전자 고유의 업무를 대부분 인수하였고, 유전자의 방침이 부당하다면 수정할 수도 있었다. 특히 인간 세계에서 뇌는 유전자보다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정평이 나 있다. 만약 뇌가 유전자의 암호를 완전히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유전자를 지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고

이 책에서 도덕을 이끌어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을 하나의 경고로 읽어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하게 비이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거의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의 곳곳에 '격전지'로 부를 만한 지면이 있는데, 그 장을 해결하기 위해서 저자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드러나 있다.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 목적론이나 호혜적 이타성, 초월자의 존재가 등장하는 부분을 '이기성' 이론으로 채우는 것이 저자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강렬한 욕구로 인한 '이기성'은 현상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이타성이나 초월자 등의 대입은 논리적 맹점을 애써 작위적으로 처리한 흔적을 숨길 수 없다. 그것은 과학적 사고가 될 수 없고, 어떤 현상에 대한 정당한 설명이라 볼 수도 없다.
생물체에게서 유난히 강하게 나타나는 모성애를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형 배우자가 융합할 경우, 새로운 개체에 기여하는 두 배우자의 유전자가 동수인 것은 물론 두 배우자가 기여하는 음식물의 비축량도 같다. 정자와 난자의 경우도 유전자의 기여수는 같다. 그러나 음식물 비축에 대해서는 난자의 기여도가 정자를 훨씬 능가한다. 실제로 정자의 기여는 전혀 없고 다만 정자는 유전자를 가급적 빨리 난자로 운반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임신 시점에서 수컷이 자식에 대해 투자한 자원량은 공평한 분담량, 즉 50%보다 훨씬 적다. 개개의 정자는 아주 작아서 수컷은 매일 수백만 개의 정자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수컷이 서로 다른 암컷들을 이용하여 단시간 내에 많은 수의 2세를 만드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개의 배가 수정할 때 어미로부터 충분한 먹이를 받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 때문에 암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 반면에 수컷이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수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수컷이 암컷을 상대로 한 착취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본문, 231 ∼ 232p

인위적으로 해석된 생물계의 특성에 대해, 도의적인 어법을 쓰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저자의 고심이 저서 곳곳에 배어 있다.
생명체가 자식의 보존에 적극적인 이유는 '복제하도록' 프로그램된 것에 다름아니다. 자기복제를 통해서 개체를 번식시켜야 하는데, 그 막대한 부담을 누가 지느냐에 대한 혈투가 암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개체는 부성애가 더욱 강조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생명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이기성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새, 포유류, 그리고 파충류 같은 육상동물은 체외 수정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생식 세포는 매우 건조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컷의 운동 능력을 가진 정자가 암컷의 젖에 있는 체내로 주입된다. 교미 후 육상 동물의 암컷은 얼마 동안 체내에 배를 가지고 있게 된다. 만일 암컷이 교미 직후에 수정란을 낳는다고 해도 수컷에게는 여전히 도망쳐서 암컷을 트라이버스의 '가혹한 속박'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 수컷에게는 암컷의 선택을 봉쇄하고 먼저 도망칠 결단을 내릴 기회가 필연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아이를 내버려 확실히 죽게 할 것인가, 아니면 머물러서 양육을 할 것인가의 결단을 모두 암컷에게 떠밀어 버린다. 그러므로 육상 동물의 자식 보호에는 아비보다 어미에게 기회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비롯한 다른 수생동물에서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수컷이 암컷의 체내에 정자를 주입하지 않는다면 암컷이 '자식을 품고' 혼자 남아 있을 필요가 없게 된다. 수정이 막 끝난 알을 상대에게 맡기고 급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암수 모두에게 가능하다. 그러나 이때에 종종 수컷이 버림받는 이유는 어느 쪽이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하는가를 가지고 진화적인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생식 세포를 방출한 개체는 수정된 배를 상대에게 떠맡길 수 있는 점에서 유리하지만 동시에 배우자가 자칫하면 뒤따라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범하게 된다. 이 점에서는 정자가 난자보다 가벼워서 확산이 쉽다는 것만을 고려해 봐도 수컷 쪽의 위험이 크다. 암컷은 수컷이 아직 준비가 되자 않은 상태에서 알을 빨리 방출했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알은 비교적 크고 무거워서 잠시 동안은 한 덩어리가 되어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암컷은 먼저 산란하는 '위험'을 무릅쓸 가능성이 있다. 물고기의 수컷은 이런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수컷이 서둘러 정자를 방출해 버리면 암컷이 방출하기 전에 정자가 흩어져 버리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암컷은 산란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을 낳아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확산 문제 때문에 수컷은 우선 암컷이 산란하기를 기다려 그 후 알에 정자를 뿌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암컷은 실로 귀중한 몇 초간을 얻을 수 있다. 그 사이에 몸을 감추고 난자를 수컷에게 떠맡겨서 수컷을 트라이버스의 딜레마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론은 수컷에 의한 자식의 보호가 왜 물 속에서는 일반적인 것으로 보이고 건조한 육상에서는 보기 드문 일인지를 솜씨 좋게 설명하고 있다.
본문, 252 ∼ 254p

그것은 자살적 행동으로 포식자에게서 집단을 지키려는 톰슨가젤의 희생적 뜀뛰기도 같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톰슨가젤의 높이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적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보다 더 어려운 문제이다.
……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뛰기 위장이 다른 영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그것을 본 다른 영양이 행동에 영향을 받는 경우는 있어도 그것은 부수적일 뿐, 어쨌든 그것은 무엇보다도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나를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의 형태와는 다르게 포식자는 쉽게 잡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게 허세 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리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계가 멀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이기적 행위이다. 자신을 과시하려는 목적 때문에 포식자에게 다른 개체를 쫓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가를 확인하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유전자가 가지는 이기성은 '자기 복제에 미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체간의 생존경쟁을 통해 더욱 격정적인 장이 되는데, 포식자의 위협과 개체의 증산이라는 조건이 상충되어 있다면 유전자는 안전을 택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성적 매력을 갖춘 개체가 암컷 세계에서 강자로 생존할 수 있다면, 당연히 유전자는 거추장스러운 뿔과 포식자의 눈에 잘 띄는 선명하고 화려한 색상의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라


유전자가 우리에게 주는 극적 긴장은 바로 '생존'에 걸려 있다. 상식적으로 진보된 역량을 갖췄으나 환경이 그에 반한다면 유전자는 당연히 한 단계 퇴보를 반복하더라도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강자가 나타나면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정적이 나타난다. 유전자의 풀은 고요하지만, 그곳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험난한 자기성찰이 이루어져야 한다.
유전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또 하나의 사실은 통일된 하나의 비유이다. 기존의 생물학적 의식이 나타났을 때 대부분의 관심은 운반자, 즉 생물 개체에 한정돼 있었다. 뒤늦게 알려진 이유로 유전자는 생물 개체가 쓰는 장치의 부속품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중요성에서도 자기 복제자가 운반자에 앞선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운반자는 모든 생명체의 현상을 민족, 국가, 인간의 시선 안에 국한해서 설명하려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유전자는 점점 확장하여 세계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연계와 인과의 과정이 교차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한 군체로 표현되었고, 그것이 이른바 개체가 되지만, 개체와 개체는 '유전자의 긴 팔' 안에서 숨쉬고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체가 수십 수백만 년 동안 살아가는 과정이며 우주의 어떤 장소이든 생명이 생기기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유일한 실체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뿐이다. 될수록 우리는 불멸의 자기 복제자에게 말을 걸어야 하며 우리들의 기원과 추후의 향방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야 한다.
우리 인간은 수십억 년의 지구 안에서 불과 수십만 년 전에 갑자기 태어난 나이 어린 존재가 아니라 지구가 수십억 년 동안 정성껏 품어서 탄생한 결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처절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갖은 시도는 비단 유전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들도 지키고 살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죽음의 위기를 항상 목전에 둔 유전자의 용감한 행보를 살펴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생존에 대한 강한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가 하는 비감이 눈을 뜬다.


다시, 밈(meme)의 격전지로


유전자와 뇌 간의 불화를 조화시키고, 돌변하는 현실에 유연히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차세대 주자가 바로 밈(meme)이다. 그 안에는 문화와 강렬한 욕구가 담겨 있으며, 유전자처럼 복제기능도 보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강력한 기억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데, 만약 견고한 결정만 갖춘다면 유전자에 버금가는 영속성도 가질 수 있다. 밈은 낡은 유형의 진화보다 훨씬 빠르게 개체를 증식시킬 수도 있으며 독자적 유형의 진화도 이끌 수가 있다.
저자는 우리를 낳아준 이기적 유전자에게 반항할 수 있는 것처럼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뿐만 아니라 좀더 안정되고 이성적인 밈을 생산해 퍼뜨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밈은 유통기한을 가지고 있다. 찢어진 청바지, 펑키 머리 등의 유행이 가장 낮은 수준의 밈이며 그것은 곧 경쟁적인 밈에 의해 대체된다. 그것은 첨단 IT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좀더 유통기한이 긴 밈으로는 사회이론과 철학, 과학, 패러다임이 그에 해당한다. 이 밈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를수록 견고해진다. 그리고 학설을 둘러싼 광범위한 격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도 견고한 밈이 탄생한다.
다산은 학설 중에서도 10년 가는 학설이 있고 100년 가는 학설도 있다고 하였다. 어쩌면 밈 자체가 '진리'를 넘어서는 결과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것이 우리가 엄격히 알 수 없는 이유도 밈의 견고함을 더해주는 이유가 된다. 역사라는 것도 강한 밈들의 경연장이 아닌가.
그렇다면 저자가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내리려는 밈(meme)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목적론적 세계관이라는 맹신적 밈(meme)을 정당하고 과학적인 유추과정의 세계관으로 수정하려는 밈(meme)의 건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자신의 저술에서 도덕적 결론은 기대하지도 말라고 못박은 데는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종교의 유혹이 너무 강하여 모든 결과를 그와 같이 이해하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곤이불학(困而不學)의 밈 바이러스


밈이 진리를 대체할 수도 있다는 가정 하에서 밈이 가질 수 있는 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와 곤이불학(困而不學)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
니체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들은 '겸손, 이해, 금욕, 헌신'등의 덕목들을 놓지 않지만 결코 그러한 덕목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 반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위와 같은 덕목들에 지배당하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진정한 행동가들은 그것을 '마땅히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다. 대신 그들은 치밀한 관찰자이다. 인정세태를 관찰했을 때 겸손 등의 덕목이 가장 최고의 수(數)라는 것은 학이지지(學而知之)의 경지이다. 좀더 나아가면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듯이 우리들은 누군가에게 빛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신비스런 최고의 원인이며, 천(天)과 도(道)의 자연스런 흐름이다. 이런 흐름을 생(生)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생이지지(生而知之)의 경지이다.
그러나 축복받은 선지자가 아니라면 그런 궁극의 경지는 힘들다. 우리같은 범인(凡人)들은 겸손이나 이타 등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존에 유리하므로 취하는 일종의 '이기적 유전자론'의 착상에 가깝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자기의 자유중 아주 조그만 부분을 희생하면서 그보다 큰 이익과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그것이 국가가 성립하는 근본 원인이며,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다. 가장 최하의 수는 '설익은 도덕률'을 그 근본으로 삼는 경우이다. 미국의 대다수의 중고교생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서 묻고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것은 옳지 않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것이 왜 옳지 않은지 반문했을 때 그들은 당황하거나, 질문자를 불경한 사람보듯 쳐다봤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독재국가가 누군가를 찬양하는 현상도 이와 같다. 그것은 우리가 도덕률이라는 설익은 밈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가 자신의 밈을 결론적으로 진술한 이유는 "밈은 조종할 수 있으며 조종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정 우리에게 도덕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시점이 되었고, 우리들은 그 물음에 너무 오랫동안 묵묵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할 전쟁과 독재, 원폭 투하 같은 장면은 "설익은 정의"라는 밈의 작품이 아닐까? 그런 밈들은 당연히 "정당한 밈"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무지의 밈에서 자각의 밈으로 바뀐다면 우리들의 행위는 좀더 현명해질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근원"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유익한 기회가 되었다.
 만약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서 핵탄두가 발사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 권력의 깃발을 밈 바이러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이 우리 "밈 원정대"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어릴 적 즐겨 보던 '퀴즈탐험 동물의 세계'를 보면 물고기나 물방개가 자식들을 업고 다니는 장면이 나오고 제목에는 '동물들의 부성애'라고 나와 있었다. 나는 당연히 동물들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까마귀를 효의 상징으로 보고, 올빼미를 불효의 상징으로 보던 우리 옛 조상들의 사고방식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세계에 인정을 부여한 결과는 어쩌면 인간적인 냄새가 날 수도 있겠지만, 사실적 접근은 아니다. 이 책에서 격전지라 할 수 있는 부분은 '집단 진화론'과의 격론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자식을 수컷이 키우는 것이 그 종에 유리하기 때문에 종은 수컷에게 양육권을 부양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단 진화론의 결과이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이기성 이론은 그보다 근본적인 단위에서 판단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사실적 접근이자 엄밀한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우리들이 흔히 범하는 사고방식의 오류를 이 책은 잘 꼬집어내고 있는데,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넘겨버리는 한 사물과 사고에 대해서 판단유예를 주장하는 시인의 눈이나, 철학자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과학자의 엄밀성 또한 잊지 말아야 할 방법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1) "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 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 중용(中庸) 20장
즉 혹 나면서부터 깨닫는 사람이 있고, 배워서 깨닫는 사람, 애써 노력하여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는데, 그 깨닫는 한에서는 한결같다. 혹 별 마음씀 없이 실천하는 사람과, 행위의 이로움을 간파하여 실천하는 사람과, 애써 자신의 나태함과 맹점을 극복하면서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데, 실천하는 한에서는 한결같다는 뜻이다.
위의 세 가지는 깨닫고 실천한다는 한에서 같다고 판단하지만,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지적인 역량을 품부받지도 않았고 머리도 좋지 않은데다가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사람이 바로 곤이불학(困而不學)이다. 위의 세 가지 단계는 공통점이 있고 호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비록 "전장이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유연함을 유지할 수 있지만 밈 바이러스는 "아군 사이에서도 백이면 백 모두 다르고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이기성과 결합한다면 무서운 재앙이 도래할 것이다. 우리들은 주적 이외에 무서운 사방의 적과 싸워야 한다. 그것은 건강한 경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전투구이다. 반거충이의 학문이 세상의 독이 되듯이, 열악하나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이 득세했을 때 세상은 절망적이 된다는 경고를 옛부터 지속적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영복 선생의 글에 호감이 가는 것은 글에 감정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 정제된 마음의 고요한 울림이다. 뜨거운 여름날 좁은 감방 안에서 여러 명의 죄수들과 생활하면서 옆에 있는 동료를 증오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는 감옥으로부터의 토로는 알량한 이성과 뭇 감정들을 걷어낸 간결한 발림이다. 그런 그가 『강의』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은 것이다. 내가 아는 글쓴이는 누군가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배워야 할 게 많다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다. 맹자도 ‘사람의 가장 큰 병폐는 누군가의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라지 않았던가.


반신반의 펼쳐본 『강의』 안에서 귀가 순한[耳順]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부끄러웠다. 아니, 그가 나를 일부러 ‘부끄럽게’ 했다.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의』는 여러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그가 ‘강의’라는 제목을 내세운 것부터 묘한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강의에 대한 반성’이다. 이제까지 고담준론에 머무는 무미건조한 강의를 떠나 함께 울고 웃고 떠들면서 인생의 희노애락과 생생한 세상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어야 진짜 강의라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강의는 ‘감방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글쓴이가 고전에 흥미를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보다 세 권으로 정해져 있는 옥방(獄房)의 규정에 ‘단, 경전과 사전은 제외’라는 예외 때문이다. 이보다 강렬하고 필연적인 동기가 어디 있을까?


강의의 주제는 다름 아닌 중국 제일의 고전들이다. 왜 그가 중국 고전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그것은 5천년 동안 한결같이 읽히고 있는 거대한 정신의 흐름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다. 샘이란 곧 원류에서 시작해야 옳은 것이다. 그의 서술 방법에는 두 가지 배려가 담겨 있다. 하나는 책 안의 고전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배려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훑어보기는 했지만 아직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배려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글쓴이가 각권의 요지와 관점, 즉 중(中)을 잘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각권의 순차는 일관된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대륙을 관통하는 황하의 흐름, 그 문명의 영토에 갈마든 사람들의 긴 호흡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다름 아닌 ‘관계’에 관한 고찰이다. 시대와 민족에 소용이 되기 위해 영웅들은 뼈를 깎아가며 무기를 다듬고 그것은 그의 아들 손자들이 좀더 어려운 적을 극복할 수 있기 위한 재료가 된다. 이러한 사정 위에서 피를 튀기며 최후까지 아귀다툼한 전국(戰國)의 칠웅은 관계를 가지며, 왜곡된 진시황의 표상과 제국 통합의 역사가 관계를 가지며, 맹자의 성선과 순자의 성악이 근사한 관계를 갖는다.


나는 귀가 고운 이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야 맹자, 논어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관계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나와 세상의 관계가 끊어졌는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승주나무 2005-10-30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월 1주 우수리뷰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