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알라딘 우수리뷰로 뽑혀서 영어책 두 권을 사게 되었습니다. 고맙고 즐겁기도 해서 내친 김에 서재도 정리하고, 알라딘 가족들과 이야기도 나눌 겸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만남에도 형식이 있어야 하기에, 동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동화는 처음 써보지만, 제가 쓰는 장르는 퓨전 동화입니다. 시사와 철학에 무게를 실어서 써볼 예정입니다. 호응이 괜찮아야 할텐데. 이 글은 원제가 '생명의 기원에 관하여'인데, 너무 거창해서 스토리의 주제에 맞춰 바꾸었습니다.

몽상가 쇼페인트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고생만 하다가 죽을 때도 곱게 죽지 못하는데, 도대체 사람이 태어난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쇼페인트는 항상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베아트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하게 되자, 비로소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아트는 불행히 쇼페인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쇼페인트는 처음의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는 고통을 주려고 누군가 사람을 태어나게 하는구나 하는 절망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베아트를 만나 행복을 느끼는 것은 나중에 맞을 더욱 커다란 고통을 위한 과정일 뿐이야. 사기꾼의 수법처럼 처음에는 조그마한 이익을 주다가, 걸려들었을 때 왕창 빼앗아 가는 것이 세상의 원리야.

쇼페인트는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세상도 가족도 국가도 나중에 벌어질 일에 비하면 사기꾼의 미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관계를 버리고 방랑자가 되었습니다. 하염없이 걷다가 지치면 풀섶을 모아다가 한숨 자고, 또 걸었습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힘들면 쉬고..

그러다가 그는 몹시 추운 땅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이제까지 밟아온 어떤 땅보다도 추운 곳이었습니다. 너무 추워 한발짝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쇼페인트는 추위를 피할 만한 곳을 찾았습니다. 마침 동굴이 있어서 거기서 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동굴 앞에서 이상하게 생긴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쇼페인트가 가까이 온 줄도 몰랐습니다.

보르테르! 왜 자꾸 생명을 낳는 거야. 그의 생명이 다해서 죽여야 할 때 얼마나 소름끼치는 줄 알아? 그의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겠지만, 마치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 같단 말야. 네가 반만 낳는다면, 나의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 거야.

그러자 듣고 있던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매르서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여기는 너무 춥지 않나. 나는 불을 때는 것처럼 세상에 하나의 불을 낳는 거네. 세상을 밝히고 따뜻하게 하려고 한숨도 쉬지 않고 계속 생명을 만들어내는데, 만들어내면 만들어낼 수록 더 추워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네. 새생명을 하나 낳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건지 알기나 하나? 자네는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다가 숨통만 조금 건드려놓으면 되지만, 나는 내가 낳은 생명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단 말일세. 힘들게 만든 불이 세상을 더욱 춥게 하고, 애써 살린 빛이 세상을 더욱 어둡게 할 때 쓰라림을 자네는 아는가?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말게.

쇼페인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누군가를 괴롭히며 태어났고, 평생 동안 괴롭히고 있다는 것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테니까요. 쇼페인트는 보르테르의 고통에 압도된 셈입니다.

보다 큰 기쁨과 보다 큰 슬픔 안에서 쇼페인트는 자신의 자리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졸속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름을 보면 아시겠지만, 쇼페인트는 쇼펜하우어, 베아트는 베아트리체, 보르테르는 볼테르, 매르서스는 맬서스를 패러디했습니다.

특히 보르테르는 볼테르가 역설적으로 풍자한 깡디드의 캐릭터를 다시 한 번 역설적으로 풍자해서, '모든 것은 최고의 것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것을 위해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사실로 받아들인 의미입니다. 맬서스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조정하기 위해 기근이나 전염병이 필요하다고 한 사람이라서 그런 이미지를 좀 땄습니다.


다음 호에는 '고이즈미 씨의 私的 총리 개념'이라는 동화를 연재합니다. 많은 기대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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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홍영남 (옮긴이) | 을유문화사
 
이기적 유전자는 도킨스의 유전자 첫번째 책으로 개체는 유전자의 이동을 위한 로봇일 뿐이라는 이론으로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그의 유전자가 불멸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은 참으로 리얼하다. 유전자와 유전자의
복제를  통해 유전자의 작품이자 아들들이 그 시대를 살다가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생명과 생존을 유전자 단위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홍영남 (옮긴이) | 을유문화사

<이기적 유전자>에서 던졌던 화두이다. 이 책은 <이기적 유전자>의 후편 격으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가 행동하는 영역을 하나의 생물체 '안'만이 아닌 그 생물체의 '바깥', 사회와 문화 전반으로 확장시켰다.(알라딘)

 

 

 

 

<이기적인 유전자>와 <확장된 표현형>으로 잘 알려져 있는 리처드 도킨스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 양상을 다룬 책.(알라딘)

 

 

 

 

리처드 도킨스 (지은이), 이한음 (옮긴이) | 바다출판사

지난 25년간 리처드 도킨스가 썼던 기고문과 연설문, 회고록과 논설문, 서평과 헌사 가운데서 정수만을 가려 뽑아 엮은 책(알라딘)

도킨스의 저작들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된 책들의 저작 순서는 위와 같다.

도킨스의 책을 읽기 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을 먼저 읽는다면, 도킨스의 철학을 좀 더 완숙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킨스와 다윈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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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라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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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무시무시한 진실


들어가기 전에


요즘 영문학 작품을 가지고 독서스터디 비슷한 것을 하고 있어요. 좀 쫓기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읽고 토론하고 배출하는 모양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아요. 그 첫 작품이 암흑의 핵심은 아니에요. '테스'였는데, 아직 제가 정리를 못했네요. 비교적 짧은 분량인 이 이야기가 영문학 첫번째 후기가 되었군요. 두 주 동안 세 작품 정도 남았는데, 영문학 후기는 일단 5편이 될 것 같아요. 소설에 관해 후기를 쓰는 것은 낯설군요. 차라리 소설을 쓰듯이 후기를 남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무튼 제 사제 데뷔작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진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죄수들만이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알게 모르게 온갖 방법과 수단을 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어떻게 불러도 상관이 없겠지만 천만다행히도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던 소수의 우리들은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빅터 플랭크, 『죽음의 수용소에서』 중에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암흑을 가끔 상상하지만, 진짜 경험해보지는 못한다. 대개 암흑을 끊임없이 그리는 가운데 그려진 그림이 암흑이라고 판단하기 쉽지만, 진정한 암흑은 우리의 상상보다는 오히려 본능에 호소하는 것 같다. 인간성의 심연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극단의 정글에서 제국주의는 드디어 분열된 자아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는 화자인 말로가 콩고로 가는 제국주의의 기선을 타고 가는 선장으로서, 거기서는 이미 전설이 되다시피한 ‘커츠’라는 사람에게 점점 다가가는 틀로 진행된다. 어떠한 가식적 이념도 여지없이 알몸을 드러내길 요구하는 밀림 안에서 화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분열된 이상이며, 그 이상을 둘러싸고 서식하는 ‘백인’들의 행태이다. 그가 '백인‘이라는 표현으로 그들과 단절하는 이유는 밀림이 이야기하는 진실과 그 진실의 세례를 온몸으로 견뎌낸 커츠라는 인물을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그것이 지배인이 오래도록 건재하며 커츠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이다. 커츠는 콩고행 직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제국주의가 표방하는 정의의 이념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제국주의는 목적이 분명한 제국주의임이 드러나자마자 커츠의 이상은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진실에서 통속적인 가치밖에 갖지 못한 지배인은 당당히 살아남고 보다 깊숙이 진실로 다가가려는 커츠와 화자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음에 준하는 국면을 맞게 된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뭇 그 지역에 고용되어 있었던 흔한 상인 중 한 사람이었을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의 명에 복종했지만, 그가 사람들에게 애정이나 두려움의 감정을 불어넣진 못했고 또 존경도 받지 못하고 있었지. 그는 그저 불안감만 불어넣고 있었던 거야. 불안감, 바로 그거였어. 어떤 명확한 불신감이 아니라 그저 불안감이었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구. 이런, 뭐라 할까. 이런 능력이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 그에게는 일을 조직한다든가, 주도권을 잡고 일한다든가, 심지어는 질서를 잡는 재주 같은 것이 없었어. 그 주재소의 형편이 말이 아닌 상태에 있었다든가 하는 그런 몇몇 가지 것을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었지. 그는 학식도 지성도 갖추고 있질 못했어. 그가 지배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연유는 어디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그가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일 걸세……. 그는 거기서 3년 임기를 이미 세 번이나 채웠으니까……. 일반적으로 뭇사람들의 체질이 그곳 기후로 인해 망가지는 판에 혼자서 기세등등하게 건강을 누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야.
- 본문 중에서



인간의 기층과 기생하는 무리들



이 이야기는 커츠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마치 원심 운동을 하듯이 전개된다. 커츠는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방면의 진실을 함의하고 있는 인물이다. 빛과 어둠과 진실을 모두 함유한 모순이 바로 커츠라는 인물 안에 그려져 있으며 어떤 이는 거기서 어둠을 살라먹기도 하고, 빛을 맹신하기도 한다. 화자가 처음 만난 회계 직원에게 커츠는 ‘주목할 만한 인물’인데, 그것은 ‘그 고장에서도 가장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그는 다른 모든 교육소에서 수집한 상아를 모두 합친 것만큼 많은 상아를 보내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커츠라는 인물의 기층 중 가장 테두리를 형성하는 진실의 모습이다.



그분은 마치 천둥과 번개처럼 원주민들 위에 군림했던 겁니다. 원주민들은 일찍이 그런 걸 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아주 무서워했던 겁니다. 그분은 아주 무서운 사람으로 비쳤던 거지요. 우리가 커츠 씨에 대한 판단을 내릴 때는 여느 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듯이 할 수가 없다구요. 없고말고요.
- 본문 중에서


화자가 말하는 그의 마지막 제자라는 청년은 커츠를 위대한 이념을 갖춘 사상가로 보고 있었다. 사실 원주민들이 생전 보지 못했던 모습이란 것은 다름아닌 이념을 말한다. 이념은 죽음보다 강하다. 이념 아래 추장들은 매일같이 그의 앞에서 기어다녔던 것이며, 커츠씨가 화자에게 우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젊은 마지막 제자에게는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젊은이는 커츠에게 반항하다가 심판받은 자들의 목을 가리켰다. 커츠의 막사 양쪽 기둥에 하나씩 그들의 목은 박혀 있었다.



그는 내가 그곳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말뚝 위의 머리들은 커츠에게 반항한 자들의 머리라는 것이었네. 내가 웃으니까 그는 몹시 충격을 받는 듯했어. 반항자들이라니! 그간 원주민들을 적이니 죄인이니 일꾼이니 하는 말로 지칭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지만, 이제는 그들을 반항자라고 부르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던 걸세. 그 말뚝에 꽂힌 반항자들의 머리는 내가 보기에 완전히 진압되어 있는 듯했네.
- 본문 중에서


그러나 마지막 제자가 커츠와 같이 파멸에 이르지 않은 이유는 ‘이념’이 그를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이념’이 진실을 가려 주는 대신 그의 젊음을 자극하여 주었다.



나는 일종의 감탄이랄까 아니면 부러움이랄까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지. 그 매력적 아름다움이 그를 충동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했고, 그로 하여금 위해를 받지 않도록 해주었던 거야. 그가 밀림으로부터 얻어내고자 한 것은 숨을 쉴 공간과 뚫고 나갈 공간뿐이었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한 한 최대의 위험과 최악의 궁핍을 감수하면서라도 존속하며 전진하는 것이었거든. 일찍이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비타산적이며 비현실적인 모험 정신이 한 인간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면, 그 정신의 지배를 받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얼룩백이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
- 본문 중에서


 


하지만 그의 순수하고 젊은 헌신은 우상과 숙명론의 기만에 갇혀 있었다. 이들의 젊음은 ‘악한 의도’에 의해서 오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히틀러 유겐트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때문에 화자는 '그 헌신이야말로 일찍이 마주쳤던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커츠의 약혼녀가 서식하고 있는 기층은 커츠의 기억이다. 그것은 본성이나 밀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젊고 자상한 애인의 기층이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친구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말하더군. <그분은 사람들에게서 가장 좋은 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방편삼아 사람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곤 했지요.> 그녀는 감정에 겨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건 위대한 사람들의 천품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말을 계속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는 내가 기왕에 들은 적이 있는 불가사의함과 황폐함과 슬픔으로 가득한 다른 모든 소리들을 동반하고 있는 듯했지.
- 본문 중에서


그녀의 커츠에 대한 감정과 신념을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그녀의 마음은 충분히 진실을 담고 있으며, 커츠 또한 감정을 속인 적이 없다. 그녀는 커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고 싶어한다. 화자를 전율케 했던 진실의 소리를 그녀에게 들려주는 것은 그녀에게 하나의 거짓을 조장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화자는 알고 있었다. 하나의 진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거짓으로 둔갑하는 것은 우리들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차라리 적절한 거짓을 섞어서 그녀 나름의 진실에 위배되지 않을 정도로 타협하는 것이 화자에게는 최선의 선택인 듯 했다.



<그분의 마지막 한마디는 당신의 이름이었습니다.>
가벼운 한숨 소리가 들리더군. 그러자 어떤 끔찍한 희열의 외침,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승리와 말할 수조차 없는 고통이 섞인 외침으로 인해 내 심장은 갑자기 고동을 중단하는 듯했어. <저는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확신하고 있었지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는 거야. 확신하고 있었다는 거야.
……
내가 커츠를 정당하게 대접해서 그가 실제로 했던 그 무서운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고 하더라도 하늘이야 무너지지 않았을 거야. 커츠는 자기가 정당한 대접을 받는 것을 원할 뿐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그를 그렇게 대접할 수가 없었어. 나는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 진실이 그녀에게는 너무 암울하게, 온통 너무 암울하게만 들렸을 테니까.
- 본문 중에서


그것은 이를테면 하나의 데드라인이다. 그 선을 중심으로 커츠와 화자의 군과 ‘백인들’이 나뉘어진다. 지배인이 커츠에게 불평을 하는 것도 일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제자가 그 선을 넘어선 커츠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증언해준다.



그분은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지요. 그래서 이곳 생활을 싫어했다구요.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떠날 수가 없었던 거예요. 나는 기회를 엿보아 그분에게 너무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자고 간청해 보기도 했어요. 함께 떠나겠다는 제의도 했죠. 그럴 때면 그분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지만 계속해서 남아있는 거에요. 또다시 상아 사냥을 하러 나선 후 몇 주일 동안은 보이지 않곤 했죠. 그는 이곳 원주민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잊고 있었던 거예요. 아시겠어요?
- 본문 중에서



암흑의 핵심



핵심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각 기층을 하나씩 잡고 오르다가 비로소 기층과 대면하는 경우가 있고, 온갖 곳에 널려진 핵심의 강요에 못이겨 대면하는 경우가 있다. 화자에게 기층은 핵심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핵심이다. 그가 별다른 세계를 볼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감수성만으로 눈을 뜬 것이다. 때문에 그는 콩고에 가기 전에 자기가 짐승과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그리고 화자가 콩고에 가서야 비로소 그것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들을 감싼 관습 때문이다.



자네들은 이해할 수가 없을 거야. 자네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나? 자네들이야 단단한 보도를 딛고 서서, 늘 자네들을 격혀라거나 덤벼들 듯 다정한 이웃들에 둘러싸인 채, 푸주한과 경찰관 사이를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추문과 교수대와 정신병자 수용소 따위를 거의 종교적으로 두려워하며 살고 있으니 자네들이 어떻게 상상인들 할 수 있겠나? 경찰관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철저한 고독으로 인해, 그리고 다정한 이웃이 여론이랍시고 속삭여주는 경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는 철저한 침묵으로 인해 한 인간의 자유로운 발길이 어떤 특정한 태초의 땅으로 인간을 이끌고 갈 수 있는지를 자네들은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거야. 이런 경찰관이니 이웃이니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있느냐 없느냐가 실은 큰 차이를 이루는 법일세. 그런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자네들은 자네들 자신의 타고난 힘에 의존해야 하고 또 스스로 충실하게 살 수 있는 능력에 의존해야 해.
- 본문 중에서


콩고라는 땅은 화자의 오래된 본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화자로 하여금 소름끼치도록 만들었으나 비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이며, 커츠가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 이유이기도 하다.



그 땅은 이 세상의 땅같이 보이질 않았어. 우리는 정복당한 괴물이 족쇄를 차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는 데만 익숙해 있었거든. 그러다가 거기서 괴물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던 거야. 그건 이 세상 풍경이 아니었고, 게다가 그 사람들은……아니야, 그들을 인간답지 않다고 할 순 없었어. 내가 가장 괴로웠던 건 그들 또한 비인간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는 바로 그 생각이었어. 그런 생각은 서서히 떠오르는 법이지. 그들은 소리지르며 깡충깡충 뛰거니 제자리에서 빙빙 돌거니 하면서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어. 그러나 그 광경을 바라보던 우리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그들 또한 우리들처럼 인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야성적이고 열정적인 소동이 우리와는 먼 친족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어. 그건 흉측한 생각이지. 아무렴, 흉측한 생각이야.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용감한 인간이라면 그 무섭게도 솔직한 소동에 대해 우리가 마음 속으로 희미하게나마 맞장구치는 흔적이 있다든가, 우리가 태초의 밤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소동 속에 들어 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생각이 든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커츠와 화자는 밀림이 말하는 모든 인상들을 공유한다. 극한의 배고픔과 맞서는 인간에게 미신이니, 믿음이니, 원칙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며, 도덕이나 사회성 같은 것이 낄 자리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엄연한 사실로 다가왔다. 우리들은 사실 이 진실로부터 도시와 사회로 도망간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화자는 이미 커츠의 분신이다. 아니, 이 미지의 자연과 인간들 모두 우리들의 분신이다. 그들은 다만 이 진실이라는 갈림길에서 각자 헤어졌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그간 내가 체험해 온 것은 바로 커츠의 극한 상황이었어. 사실, 그는 마지막 한 걸음을 성큼 내딛으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갔던 거야. 그러나 나는 그 문턱에서 머뭇거리다 물러서도록 허용되었지. 아마도 그와 나 사이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을 거야.
- 본문 중에서


그러나 진실에 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생이라는 건 우스운 것, 어떤 부질없는 목적을 위해 무자비한 논리를 불가사의하게 배열해 놓은 게 인생이라구. 우리가 인생에서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우리 자아에 대한 약간의 앎이지. 그런데 그 앎은 너무 늦게 찾아와서 결국은 지울 수 없는 회한(悔恨)이나 거두어들이게 되는 거야. 나는 죽음을 상대로 씨름을 해왔어. 그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다툼 중에서도 가장 맥빠진 다툼이지. 그 다툼은 어떤 막연한 회색 공간에서 일어나는데, 발 밑에 딛고 설 땅이 없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으며, 구경꾼도 없고, 소란도 없고, 영광도 없고, 승리를 향한 커다란 욕구도 없고, 패배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도 없고, 미지근한 회의(懷疑)로 가득한 그 진저리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자신의 정당함에 대한 많은 믿음도 없이, 또 우리 적수(敵手)인 죽음에 대한 믿음은 더더구나 없이 다투기만 하는 거야. 만약 이런 것이 궁극적 지혜의 형식이라면 인생은 우리 몇몇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일 수밖에 없어. 나는 내 삶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릴 마지막 기회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지만, 어차피 내게는 아무런 할말도 없었을 것임을 알고 굴욕감을 느꼈을 뿐이야. 내가 커츠를 주목할 만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
- 본문 중에서


이 무시무시한 진실의 모습을 직접 대면한 커츠는 단지 <무서워라! 무서워라!>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고, 화자는 커츠의 사랑스런 애인 앞에서 은폐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의 핵심이자 암흑의 핵심이며 은폐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위험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진실을 가슴속에 품고 죽음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화자에 따르면 진실이란 위대하지만 비정하며, 우리들의 사회란 죽어가는 흑인 노예가 어색하게 두르고 있는 소모사(梳毛絲) 조각과 같다. 화자는 진실의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작업장에서 쫓겨나 서서히 죽음을 기다리는 흑인 노예의 비유를 통해 희미하게나마 그려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곳은 다름아니라 작업을 돕던 원주민 중의 몇몇 사람이 물러나서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더라구.
그들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고 죄수들도 아니었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다운 데는 없이 질병이나 기아로 인해 죽어가는 검은 셩상들에 불과했으며 그 침침한 녹음 속에 어지럽게 누워 있었을 뿐이야 일정 기간의 고용 계약이라는 합법적 수단으로 해안 각처에서 끌려온 후 자기네 체질에 맞지 않은 환경에 내던져진 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다가 지금은 병이 들어 비능률적인 노동자로 전락하니까 작업장에서 기어나가 그늘에서 쉬도록 허락되었던 거야. 이 죽어가는 형상들은 이제는 공기처럼 자유로웠지만 한편 공기처럼 엷은 존재들이기도 했어. 나무 그늘 속에서 반짝이고 있던 그들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어. 그래서 내려다보니까 바로 내 옆에 한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 피골이 상접한 검은 몰골은 한쪽 어깨를 나무에 기댄 채 다리를 죽 펴고 누워 있었어.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우묵히 들어간 휘둥그런 눈이 나를 멍청하게 쳐다보는 거야. 그러나 그 안구의 깊은 곳에서 새어나오던 이미 시력을 잃은 듯한 흰 빛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중이었어. 그는 젊은이 같았는데 혹시 소년이 아닌가도 싶었지만 우리로서는 그들의 나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웨덴 선장의 배에서 얻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선원용 비스킷을 하나 그에게 내미는 일밖에 없었다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걸 움켜잡긴 했지만 다른 동작이나 다른 눈길은 보이지 않더군. 그는 목에 하얀 소모사(梳毛絲) 조각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왜 두르고 있었을까? 그걸 어디서 구했을까? 그건 배지였을까, 장식품이었을까, 부적이었을까 아니면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조처였을까? 혹시 어떤 이념이 그것과 관계되어 있기라도 했을까? 이런 생각이 들더군. 어쨌든 바다 건너에서 가져온 이 하얀 실 토막이 그의 검은 목에 둘러져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지.
- 본문 중에서



에필로그




“진실은 시간이라는 이름의 옷을 벗어버린 진실이지. 바보들이야 입을 벌리고 몸을 떨고 있겠지만,
용감한 인간이라면 진실을 알면서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네.”
- 본문 중에서

여기서 진실은 무엇인가?
→ 이 소설은 진실의 층위를 문제삼고 있다. 분열된 자아와 분열된 진실이라는 문제는 혼란된 시대상황만큼이나 우리들의 지적 체력을
요구하는 본격적인 문제들이다. 화자는 이 이야기에서 "백인들"과 나를 구분하고 있고, 오히려 "원시인"들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사실 그것은 저자가 의도적으로 '뒤틀은 구조'이다. 여기서는 오직 '옷입은 원시인'과 '옷벗은 원시인'이 있을 뿐이다.
'시간'은 문명과 동의어이다. 이곳에서 원시인들이 보이는 원초적 행위들이 화자에게 익숙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소름끼쳐 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전혀 다른 대상으로 보인다. 진실은 그들을 비웃고 있다. 물론 화자도 그
비웃음을 벗어날 순 없다. 진실은 화자에게도 좀처럼 속살을 보여주지 않으며 좀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커츠를 매혹시키고는
파멸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의 진실은 비정한 진실이자, 익살스러운 존재이다.


커츠는 어떠한 유형의 식민주의자이며, 그는 식민주의의 어떤 측면을 대변하는가?
→ 커츠는 식민주의 그 자체이다. 즉 식민주의가 가지는 온갖 생리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커츠가 콩고에 들어가기 전에 제출한
보고서에 의하면 그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계도해야 한다는 사상이 다분히 드러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커츠의 궁핍함이 그려진다.
식민주의자들의 양면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겉으로는 교화를 외치면서도 실질적인 이익을 끝까지 추구하는 식민주의 근성이다.
그 모순은 커츠의 막사에 걸려 있는 두 개의 목을 만나 여지없이 드러난다.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교화시키려는 백인들의 가식이 똑바로 보인다. 그들은 위압으로도 누를 수 없고, 설득시킬 수도 없다.
명분과 정의가 없다는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화자는 그들이 '진압된 것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커츠의 가장 통속적인 측면에 기생하는 지배인과 회계 직원은 좀더 노골적으로 식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실적에 의해서만 커츠를 판단하고 있으며, 지배인은 더 나아가 '좀더 뽑아낼 수 있었는데, 커츠가 괜히 반발심만 키워서 일을 그르쳤다'
고 불평하기까지 한다. 커츠가 식민주의의 늪을 빠져나오려고 한 순간 "백인들"에게도 "진실"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다.
커츠의 죽음이 어떤 '죄과'를 의미한다면 이것이 커츠의 명백한 죄과일 것이다.


말로는 왜 커츠의 약혼녀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는가?
→ 그것은 이 이야기가 다루고 있는 '진실 자체'의 문제를 함축한다. 커츠는 진실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그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오히려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면 진실 자체는 이미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진실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때로는 조작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진실이 그만큼 진실과 멀다는 것을 말하며,
최소한 진실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과학자들이 흔히 하는 오류는 순진하게 진실의 정당성을 맹신한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그러했고, 갈릴레오가 그러했다. 우리는 그나마 진실의 편린을 정성스레 모아, 좀더 안정적인 진실의 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말로가 커츠의 약혼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이다.


커츠는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핵심’을 궁극적으로 인식하게 되는가?
→ 만약 '어둠의 핵심'을 '진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면, 커츠는 이미 죽는 순간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물론 진실의 제일보를
보여준 것은 커츠였으나, 이제는 말로가 진실의 증언자가 되고 있다. 진실의 모습은 커츠의 삶보다 더욱 복잡하다.
커츠가 죽은 이유는 진실의 모습을 온전히 사유하지 못한 이유가 크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어느 정도 관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커츠는 출발부터 진실을 배반하고 있었고, 자신이
대면한 진실의 일부를 꽉 움켜잡고 동화되어 버린다. 깊고 어두운 수렁에 빠져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말로가 암흑의 핵심에서 살아돌아온 것을 보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진실의 모습이 궁극적으로 어두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말로는 왜 커츠에게 집착하며 동질감까지 느끼는가. 영국에 돌아와서도 커츠를 기억 속에서 지우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 말로가 커츠를 찾는 이유는 의무감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 호기심이 더 강했다. 그의 보고서를 이미 보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들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말로는, 원주민들이 자신의 오래된 본성을 일깨워주었듯이, 오래된 영혼을 일깨워준 커츠를 만나고자 한다.
즉 커츠는 말로의 분신이다. 진실은 오래도록 두 영혼을 묶어두고 있었으며, 그 구속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둘에게 부과된 사명이다.
커츠가 그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거기서 온갖 모순과 원초적 본성에 시달리며, 그것을 정확히 주시하는 마지막 순간에 '두렵다'는
일말의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말로는 이 지점에서 커츠와 헤어진다. 진실은 커츠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말로를 놓아주지만, 오른손을 놓아주었을 뿐이다.
말로는 또다른 손을 펴보기 위해 커츠만큼의 무시무시한 모험을 감행해야 하며, 그때까지 '유보된' 것이다.


말로의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 왜 말로와 커츠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 만약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낀 인물이 있다면 이 두 사람 뿐일 것이다. 나머지 인물들은 모두
'백인들'이나 '약혼녀', '지배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이들은 진실의 핵심이 아니라 각 층에 서식하는 기식자들이며, 배경과 같은
인물들이다. 때문에 이들은 진실이 굳이 구속하려 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름을 가진 두 명확한 인물을 구심점으로 그려진 수채와와 같다.


왜 말로의 기억 속에서 커츠는 ‘목소리’ , ‘담론’ , 또는 ‘달변’으로 이미지화 될까?
→ 말로는 진실의 허상이다. 진실인 듯 보이지만, 이미 이만큼 진실에서 빗겨져 있다. 이야기 속에서 실제로 화자가 말로와 대면하는
지면은 극히 적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든 지면은 커츠에 관한 풍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곧 진실이 자신의 몸을 숨기는
오래된 습관과 일치한다.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다. 커츠의 존재가 '목소리'나 '담론'으로 이루어진 것은
진실로 가기 위한 '이정표' 혹은 진실이 파놓은 '함정'일 수 있다.
오히려 진실은 말로가 커츠를 만나기 위해 겪어가는 과정 속에 녹아들어 있으며 그것이 또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커츠는 분명 진실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진실의 증언자는 말로이며 그의 '행동'인 것이다.


화자가 말하는 진실의 모습이 왜 이렇게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었는가?
→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생명을 걸어야' 한다. 곧 진실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저자의 진실은 희미하며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 꽂힌 조그만 백년초와 같다.
그런 극단적이고 원초적인 조건이 없다면 진실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저자에게는 명백하다.
이미 진실을 포기한 군상들이 이야기 곳곳에 널려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 건 명백하다.
우리들이 옛 성인처럼 달관의 경지에 있지 않고서야 생활 속의 관조는 불가능하다. 더구나 이렇게 인간성이 말살되고 모순이 팽배한
곳 속에서 진실을 얻기란 콩고의 어둠 속을 탐험하는 것보다 요원한 일일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신념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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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 기타 한길그레이트북스 18
함석헌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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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바드기타(Bhagavad Gita)
―나는 오늘 궁극(窮極)에 다녀왔다



궁극(窮極)을 향한 노래

『바가바드기타』는 궁극을 향한 노래이다. 이는 신에 대한 종교에 대한 옳은 행위에 대한 논증을 설파하는 것도 아니다. 『바가바드기타』가 가지는 유일한 논증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운 비유이다. 궁극으로 가기 위해서는 놀라운 과정을 감수해야 한다 '사지가 주저앉고, 입은 바싹 타며, 전율이 내 몸을 휩싸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고뇌를 견뎌내야 하며, 전장에서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은 혈육이며, 지고의 순례길 중에는 온 형제 가족이 낙오되거나 죽은 끝에 결국 혼자 남은 외로운 수행길을 감당해야 한다. 이 때 귀를 맑게 하는 아름다운 깨달음의 노래는 나를 더 이상 슬픔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지고자가 나를 위해 배려한 과정이며, 그러한 지고지순한 진리가 쉽게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궁극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자유를 의미하며, 자아를 초월한 초자아란 하나님이 완전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상태이다. 스피노자는 그 상태를 꿈꾸어 '신을 향한 지적 사랑'을 갈구했으며, 파스칼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참한 상태'를 체험했다.
궁극에도 시간은 있지만, 이 때의 시간은 '영원을 헤아리는 사고방식'이다. 연대순으로 이루어진 역사는 별 의미가 없다. 영원이라는 관념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창조의 상대적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졌던 어떤 물건의 생애를 생각해 보는 일인데, 인도인들은 창조의 분야에서 가장 오랜 수명을 가진 존재를 거룩한 어머니 혹은 우주적 어머니라고 불렀다. 우주적 어머니로부터 인간의 생애에 이르기까지는 수없이 많은 단위가 놓여 있는데, 어머니의 시간 개념으로 가장 말단의 단위인 칼리 유가(kali yuga) 하나만 해도 사람의 생애 43만 2천년이다. 그래서 영원에 가깝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머니와 나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의 벽이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인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사고하는 방식이 인도인의 시간관이었다.
'궁극'을 경험한 자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힘겹게 찾아 올라갔던 정신의 여정은 간단한 한마디 말로 녹아야 하며, 그 말 한마디가 인생 이해의 전부를 뒤집어엎어서 사람은 단번에, 아주 완전히, 모든 얽매임을 다 벗은 영원한 해탈의 지경에 올라가게 한다.
'궁극'의 의식에 도달한 사람은 개인 생명의 수준에서 행하던 사고방식을 뛰어넘어 우주적 생명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단맛을 본 사람은 모든 단맛을 다 이기듯이 우주적인 의식을 체험했던 사람은 그 축복의 맛을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한다. '궁극'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미 인정세태의 괴로움은 사소한 추억에 불과하리라.

이 궁극의 노래는 노래의 언어로, 노래의 귀를 통해 받아들여야 한다. 사변적인 언어로 받아들이면 아름다운 향연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영혼의 가락과 정열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당신의 내면 속에서 따라부르는 그 노랫소리가 바로 이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략적인 줄거리와 서술 방식


『바가바드기타』는 쿠루크셰트라 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무대로 한다. 하스티나푸라에 자리잡은 쿠루족의 두 형제 가문, 즉 카우라바 형제들과 판다바 형제들이 쿠루크셰트라 들판 양편에 군대를 대치시키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살육전을 벌이려는 극적인 상황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의 대화가 이루어진다. 바라타 왕국의 정당한 후계자였던 아르주나의 맏형이 두료다나의 술책에 빠져 도박으로 나라와 형제들을 다 잃고 13년 간 고행을 하게 된다. 시일이 지났을 때 두료다나는 반환을 거절했고, 생활을 꾸려 나갈 약간의 땅조차 수용하지 않아 결국 형제끼리 창을 겨누는 비극적인 상황으로 이야기는 비화되었다. 아르주나는 이 전쟁에 대한 확실한 대의 명분을 가지고 전쟁터로 나가지만 상대편 군대에서 자기 사촌들, 아저씨, 할아버지 등 혈족들을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의 혈족을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혈족을 죽이고 왕국을 통치하느니 차라리 숲으로 은거하여 궁극자에 대한 명상에 몰두하는 고행자의 삶을 택하려 한다. 그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싸우라'(ii. 8)고 말하면서 둘의 토론이 시작된다.
이야기의 서두에 전쟁이 나온 것은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모순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전쟁이 주는 극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두료다나와 아르주나는 같은 전장에 서 있지만 그들의 싸움은 이미 같은 종류가 아니다. 두료다나는 다만 권력과 부를 유지하려는 자기욕망의 표현인 반면, 아르주나는 자신의 고뇌와 만인의 사명을 안고 싸우는 입장이다. 이 둘은 모두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말끔히 요약되며 크리슈나가 '싸우라'고 주장한 요점도 여기서 비롯된다.

오래된 인도의 경전인 이 책은 어느 경전과 같이 주석가들의 적절한 비유가 돋보인다. 라다크리슈난, 간디, 함석헌 등의 저술가들은 경전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계의 고전들과 인물들을 끌어다 이 책의 '보편화'에 기여했다. 궁극의 초월정신은 어디든 통하며 지고의 경지에서 마주앉아 세상을 논한다.
『바가바드기타』는 인도의 경전 중 가장 궁극에 가까운 저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 역시 궁극의 입장에서는 한낱 사소한 제도에 불과하다.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
……
프리다의 아들아, 내게 돌아오는 자는 비록 죄의 탯집에서 났더라도, 여자로, 바이샤로, 수드라로 났더라도 다 최고의 경지에 이를 것이니,



사실 『바가바드기타』 안에는 어떤 경지나 단계 같은 것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깊이 이해하고, 깨끗이 비우고, 참되게 행동하는 것을 통해 신에게 보다 깊이 다가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가득할 뿐이다.


궁극의 가르침


너는 슬퍼할 수 없는 자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다.



아르주나는 관계에 현혹되어 있다. 즉 그는 아직도 제자나 스승, 친척은 그들 자체 때문에 소중한 것이 아니고 자아 때문에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난 자는 반드시 죽게 되고, 죽는 자는 반드시 나는데,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이 어찌할 수 있다는 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르주나가 옅은 감정에 정신을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다. 아르주나는 자아를 우주적 입장에서 사려하기 힘들다. 적과의 갈등과 대립이 2중, 3중고로 다가오는 이유도 물질과 환경에 영향을 받고 홀가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과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압박자와 고통과 죽음에 직면한다.
인간의 생에서 모든 행동은 필연적으로 반동을 받는 법이고, 우리의 영혼을 끝까지 얽어매 지고자와의 대면을 어렵게 한다.
이 때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에게 들려주는 첫 번째 궁극은 '평정한 마음'이다. 꼭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어떤 일도 없으며, 아직도 얻지 못해서 꼭 얻어야 한다는 어떤 물건도 없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일을 하고 있다. 이 때 나의 행동은 행동 자체에 있는 것이지 결과에 이끌리지 않는다.


행동의 결과를 네 동기가 되게 하지 마라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의 자유는 우리의 모든 의식을 지고자에게 기울여 복종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은 자유처럼 보이지만 사실 감각의 지배를 받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조금 알면 독단적이 되고, 조금 더 알면 묻게 되고, 또 조금 더 알면 기도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존재해 나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진다.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사상가는 모두 종교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진정한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우주적 영(靈)의 기계로서, 모든 운명을 지고자에게 맡기고 또 우주적 질서의 유지를 위해 살아간다. 자신의 운명을 모두 맡길 수 있으려면 믿음도 두터워야 하겠지만, 세계에 대한 절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로서 신과 나는 하나가 된다. 신과 하나가 될 때 나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으며 나의 행동과 말들은 생기가 돋는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지배도 아니며 신을 위해 일할 뿐이며,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안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차가 아무리 빠르게 달린다 해도 차부는 움직이지 않듯이,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 안에는 신이 타고 있다.
크리슈나가 아르주나의 차부였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무장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면 언제나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실망에 떨어졌을 때 위로해 주시기를 지체하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우리 갈 곳을 대신 기어 올라가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로 돌아갈 때까지 길이 참고 견디시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궁극의 평정을 얻고 난 후 두 번째 궁극의 가르침은 '행위'이다.


너는 네 명함을 받은 일을 행하여라. 행(行)은 비행(非行)보다 나으니라. 행함 없이는 네 육신의 부지조차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바가바드기타』에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실천'의 덕목이다. 평정을 갖춘 행위는 십만 대군보다 의연하며 강력하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서 탄생하였다. 해야 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만일 일하기를 그친다면 이 세계는 망해 버릴 것이다. 나는 혼란을 일으킨 자가 될 것이요,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식은 그 완전한 지경에서는 이해와 체험의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완전한 지경에 이르려면 세계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행위'라 함은 노자가 주장하는 '무위(無爲)'를 포함한다. 무위는 자신의 행위하되 따로 행위한다고 말할 것이 없는 상태다. 항상 일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일하는 자라는 주장을 아니하는 사람의 '행위'는 무행위요, 외양으로는 행동을 피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천만 칸 기와집을 짓고 있는 사람의 무행위는 행위다. 이러한 행위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은 자신이 하는 행위는 없고, 지고자의 '명'을 받고 행할 뿐이다. 마치 차부가 이끌 듯이 움직이는 말과 같다.


행위 속에 무행위를 보며 무행위 속에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자니라. 그러한 사람이 요가를 닦는 사람이요 모든 행위를 완성하였느니라.



그의 몸은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행동자는 하나님이지 그 자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행위를 이겨낼 때까지 언제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만, 직접 전장에 나가거나 산을 기어오르지는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의 관계이다. 나는 자신를 무(無)에까지 낮춘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보는 것이 『기타』의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자연을 닮았다. 하나님이 부리는 대로 꽃을 피우고 바람을 일으키는 대자연과 나는 하나가 되며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완성한다. 이 때 나의 행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오래된 동양의 정신에서 '불성무물不誠無物', 즉 성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생장할 수 없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이 없이 아이는 어린이도 될 수 없으며, 설사 어른이 되었다 할지라도 사랑을 나누어줄 수 없다. 세상에 사랑을 나누얼 줄 수 없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태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세상은 지고자의 지속적인 사랑과 인내로운 기다림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


 활을 양껏 당기지 않고는 살이 힘있게 나갈 수 없고, 마음을 속으로 당기어 그 밑바닥에까지 이르게 하지 않고는 힘이 날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이 활발하며 강하지 않고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정화, 즉 희생을 계속함이 필요한 것을 말해 준다.



무위는 곧 내버림이다. 아르주나가 고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버리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안고 갔기 때문이다.


장자 - 안회(顔回)가 "감히 묻잡니다. 마음 씻기[心齋]란 무엇입니까" 한다. 중니(仲尼)가 "네 뜻을 하나로 하여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으며,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운으로 들어라. 들음은 귀에 그치는 것이고, 마음은 가져다 맞추는 쪽[符]에 그치느니라. 기운이란 비어 가지고 물건을 대하는 것이다. 도는 오직 빔에 모인다. 비게 함이 마음 씻음이니라"고 답한다. 안회가 "제가 처음에 그렇게 시켜주심을 얻지 못했을 때 정말 스스로 회(回)이옵더니, 시켜주심을 얻고 나니 비로소 회란 것이 있지 않습니다. 이러면 빔이라 할 만하옵니까." 스승이 "됐다" 하였다.



내버림이란 것은 수십년 동안 자신이 갖고 있었던 성향이나 습관, 이성 등을 모두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아의 저항도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림은 행위를 통해 높은 수준(영적인 수준)에 있는 신령한 의식 안에 존재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사람이 무지하면 수십 년 동안 틀린 지식을 신봉할 수 있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진리의 빛을 쬔 사람이라면 승복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신 의식으로 들어간다. 거기가 바로 집 중의 편안한 집이며, 완성된 자아의 모습이다.


진정한 신


『기타』의 특징은 앞에서 말한 대로 유연한 신앙에 있다. 궁극의 종교로 가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바로 유연성이다. 아직도 중동에서는 민족간 분쟁과 종교간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윌 듀런트는 종교 등의 미묘한 문제로 생기는 대립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만행의 역사를 보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이 없고 반드시 지정된 신만을 섬겨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기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오지에 가서 똑같은 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불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의 강요는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 그의 신 둘을 모두 죽이기 때문이다.


맑은 물을 얻기 전에는 더러운 물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라, 인도의 만신당(萬神堂) 안에는 군중들이 섬기던 가지가지의 신들이 다 모시어져 있다. 하늘의 신, 바다의 신, 시내와 숲의 신, 먼 옛날의 전설의 신, 부락 호수의 남신 여신. 시대가 지나가는 동안 어떤 것도 잃어서는 아니 된다는 두려움에, 모든 진실된 확신을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고 조화시켜 보자는 생각에, 그것은 자신 속에 형형색색의 요소와 동기를 다 포함하는 하나의 엄청난 종합에 도달하게 됐다. 종교 안에서 깜깜하고 원시적인 미신이 시글거리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은 욕망에 의해 그려진 신이기 때문에 『기타』가 추구하는 초월적 신과는 다르다. 이들은 자신이 욕구하는 것만을 취할 뿐이다.

거룩한 바탈은 해탈을 위한 것이고 귀신 바탈은 얽어매임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판두족의 아들아, 슬퍼하지 마라, 너는 거룩한 바탈로 났느니라.



정통종교의 이름으로 자유와 독립, 인간의 존엄을 거짓으로 해석한 종교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있다. 처음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해석이 나오는 현상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스승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사리사욕을 살짝 집어넣은 경우다. 가르침이 천년이고 만년이고 전달되기 위해서는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온몸을 비우고 맑은 정신으로 그저 지고자의 명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임의의 판단은 불성실과 죄악의 결정적인 증거이다.

 

인간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저 주는 복만을 바라는 것은 결코 같은 말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은 죄 속에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는 그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지 결코 덮어놓고 무조건 그러시는 것은 아니다. 연잎이 물에 젖지 않는 것은 젖지 않는 성질을 제 속에 길러내어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누가 거기 무슨 칠을 해주어서는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뺑끼칠장이가 아니다. 그런 따위 그릇된 신앙이야말로 이 세상의 권세자와 야합하여 역사를 언제까지라도 구정물 속에 썩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가리켜 예수는 "거룩한 것을 돼지에게 주는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러한 악행을 저지르게 되는 이유는 우리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이든 행위든 성(誠)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변태되기 십상이다. 궁극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는 '성실함' 밖에 없다. 그것도 임의에 따라 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이미 나의 결정을 초월한 행위이다. 나의 최고의 판단에 의한 행위는 신이 시키는 행위다. 우리가 인(仁)을 생각하고 있으면 인을 행할 수 있지만, 인한 행위가 수천 년에 걸쳐 나오지 않는 이유는 인이 틀려서가 아니라 행위의 지속성을 담보할 바탕이 허약하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란 것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우리가 자유라 부르기는 거북스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들의 일생 동안 자유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자유가 내가 생각했던 자유보다 더 자유로워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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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6-09-1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가를 하려는데 궁금해서 책도 보려고 합니다. 땡스투!
 
소피의 세계 (합본)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장영은 옮김 / 현암사 / 199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피의 세계
- 잔치



잔치論


소피의 세계는 철학 파티를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책 전체의 내용이 잔치라고 할 수 있다. 잔치에는 어중이떠중이, 이야기꾼, 훼방꾼 같은 온갖 군상들이 모여 있다.
잔치란 '불러온다'는 의미이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오면 좋고, 그들과 함께 기쁜 일을 함께 한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잔치의 문화는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남몰래 외딴 곳에 가서 함께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둘의 관계를 천명하고 거기를 시작점으로 삼음으로써 둘의 관계는 우연히 만들어졌다거나, 끌림에 의해서만은 아닌 좀더 정당한 가치를 획득한다. 잔치의 포용성은 엄청나서 철천지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누군가 당신에게 완전히 멀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잔치'와 '놀이'를 권해 보라.



20세기의 인간상으로 떠오른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는 놀이를 노동을 위한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 속성으로 본 개념이다.(네덜란드 문화사학자 요한 호이징가)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되리라. 잔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고조시키며, 힘을 북돋우고, 활력을 준다. '잔치'의 의미를 잊어버린 교육은 이미 죽은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다. 누군가 인생에서 놀이와 잔치가 떠나지 않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는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리라. 누군가 아주 간결하게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잔치란 다양한 사람들이 두서 없이 모여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격조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잔치의 한 종류인 '놀이'를 살펴보아도, 명확한 규정 내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낸다. 아마 우리들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의연하게 가둘 수 있는 것은 '잔치'밖에 없으리라.


소피의 세계는 철학자들을 초대한 잔치에 환상과 추리라는 놀라운 재료를 추가하여, 우리들을 가상과 현실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환기시켰을 뿐이다.


문학과 철학의 협연(協演)


문학과 철학은 사이가 안 좋은 쌍둥이 자매와 같다. 잔치에 함께 초대되어 하나가 춤을 추면, 다른 하나는 춤을 추지 않는다. 둘이 같이 춤을 추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감수자의 말처럼 철학은 개념으로 말하고, 문학은 이미지로 말하기 때문에 상충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할 때 절묘한 협연은 물건너 가는 게 아닐까 한다. 플라톤은 철학자로 불리기를 원하여 자신의 정신세계를 유감없이 펼쳐보였으니, 문학가와 철학자 모두의 아버지가 되었다. 철학자이지만 오히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러셀이나 베르그송은 하나의 형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끊임없이 연구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세계에 충실하였기에 그러한 평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된다. 서점에 널브러져 있는 '저자세의 철학서', 철학은 뛰어나긴 한데, 어떻게 뛰어난지, 어떻게 인생에 유용한지 이야기할 수 없는 문맹의 철학자들, 철학의 대중화라면 으레 '통속 철학'을 떠올리는 철학의 무지자들. 이들은 잔치판 옆에서 암표상, 사기꾼들을 모아 놓고 또 다른 잔치를 벌인다.
소피의 문학은 철학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절묘한 문학적 가치도 빛나는 작품이다. <소피>는 철학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을 때는 꿈처럼 철학의 전체를 어림해 볼 수 있고, 철학에 어느 정도 관여한 후 읽었을 때는 긴 여정 안에 쉬고 있는 두 발과 어깨를 편안하게 주물러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소피>가 문학적 가치를 얻는 이유는 견고한 구조 때문이리라. 철학의 이야기와 문학의 이야기가 만나는 점은 유기적 조합이 이루어진다. 그러면서도 이야기는 철학에 끌려 가지 않고, 독자적인 형식을 발휘한다. 철학은 종종 인물의 엉뚱한 행위와 애매한 단서를 찾는 열쇠가 되기도 하여 문학과 철학의 묘한 협연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소피>는 비유의 힘이 강하다. 성서에서 예수는 여러 번 비유의 효용을 말하던 비유의 천재였다. 비유는 철학의 기본 명제인 '관계'를 긴밀히 연결시킬 수 있으며, 자칫 철학적 논의에 피로한 독자에게 '단비'가 되어주기도 한다. 건강한 비유는 건간한 작품을 낳고, 철학과 문학을 단번에 만나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사실 '비유'는 문학가의 긍지만이 아니라, 철학자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남자든 여자든 철학자에게 이 세계는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신비의 세계로 비쳐진다. 철학자와 어린이는 이처럼 중요한 공통된 특성을 갖고 있다. 철학자는 일생 동안 어린 아이마냥 감수성이 뛰어나다고 장담해도 좋으리라.
- '본문' 중에서


지고한 시간들의 잔치


철학은 오래된 질문의 전승이다. 삼천 년 전 사람이나 지금의 사람이나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같은 물음일텐데,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린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수많은 질문으로 나뉘고 각 방면에 정통한 사람들이 계승하였다. 마치 빅뱅의 현상처럼 매우 높은 밀도를 지니고 있던 간단한 사유가 폭발하는 순간 '잔치'는 시작되었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으나 먹을 것은 아직도 많고 할 이야기도 무궁무진하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 가지 주제가 잔치를 주도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신이 모든 것을 꾸미고 사람들을 지켜주었다. 어려운 일이나 궁금한 점은 모두 신에게 물어보았기 때문에 잔치의 이야기도 신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를 꿈꾼다. 신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욕구가 몇몇 사람의 가슴속에 샘솟았다. 신이 아니더라도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일은 자명한 이유에 의한다는 확신까지 생겼다. 그 다음은 인간이었다. 이렇게 신에서 인간, 인간에서 물질, 물질에서 관념으로 이야기의 주제를 넘나들면서 잔치는 더욱 흥미로워졌고, 이에 따라 여러 이야기꾼들이 자리를 주도하였다.


때문에 괴테는 잔치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을 대문 왼편에 이렇게 써놓았다.


지난 삼천 년의 세월을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깨달음도 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리


고매한 선각자들의 잔치


오랜 시간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주옥같은 시간들을 장식했다. 시간이 흐를 때마다 이야기를 주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전광석보다 빠른 신을 포착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사람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이다. 물질의 근원을 이야기할 때는 탈레스와 원자론자들이 있었고, 인간의 발견은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가 있었다. 그들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낳았으니, 이들은 자신의 뜻을 제자에게 전승하고 제자는 또 다른 제자에게 전승하여 삼천년의 시간을 한줄로 꿰뚫으며 경험과 이성 사이에서 건강한 논쟁들이 쏟아져 나왔다. 강한 논객이 나타날 때마다 그가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고 사람들은 놀라고 즐거워 하였으나, 새롭게 나타나는 강자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의 사유로 세상을 다 설명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맹자도 역시 잔치집 문을 나서며, 잔치를 열 밸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대문 오른편에 써놓았다.


한 마을의 큰 선비는 다른 마을의 큰 선비와 벗하고, 한 나라의 큰 선비는 다른 나라의 큰 선비와 벗하며, 천하의 큰 선비는 역시 천하의 큰 선비와 벗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옛 현인들을 논하고, 그의 시를 음미하며, 그가 쓴 책들을 낱낱이 살펴본다면 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때문에 그의 시대를 논하고 먼 옛 현인까지도 벗삼는 것이리라.


"一鄕之善士斯友一鄕之善士, 一國之善士斯友一國之善士, 天下之善士斯友天下之善士.
以友天下之善士爲未足, 又尙論古之人. 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 萬章章句 下-8


낯설음, 화합, 화해


당신이 국경 아래쪽에 있었더라면 나의 친구가 되었겠지만, 그 위쪽에 있으니 나의 적이오.
-파스칼, <팡세> 중에서


우리들의 의식과 환경은 거의 완벽히 우리를 가둬놓는다. 아무 문제없이 수많은 세월을 살 수 있으며,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를 의식하고 발견하자마자, 친숙했던 것들이 낯설게,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더욱 위험한 이유는 자신과 타자 모두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서로에 대한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와 브루노가 죽은 것 역시 이 위협 때문이다.
소피가 철학 선생을 만났을 때나, 힐데와 소피가 만났을 때 느끼는 낯섦은 그것을 뜻하며, 그것을 지켜보는 주위의 반응은 걱정스럽다. 그들의 의식 속에 소피의 고뇌를 해석할 언어가 없기 때문에 '마약'이나 '연애'를 유력한 원인으로 생각한다.
철학은 세상을 안배한 조화에 정신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호기심을 갖고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면, '놀라움'과 '감성'은 신이 주신 선물이 분명하다. 세상은 경이로 가득 차 있으나, 유년기를 넘으면서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계절이 바뀌고 생명이 태어나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경계에 익숙한 사람들은 가끔 만나는 '생명'을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삶을 넘나드는 경계에서 힐데와 소피는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것은 독자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존재가 확고하고, 자명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의 존재까지도 불안하게 만든다. 어느 천문학자가 보는 별은 수천년 전의 모습이었던 것처럼, 우리가 보는 모습이 현재의 모습인지 과거의 모습인지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또한 내 존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다.


철학은 화합과 조화의 예술이다. 국경과 전선을 넘나들며 공평한 이데아의 세계 안에 우리는 모두 형제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며, 밝은 혜안만 가진다면 계급이나 격차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설파한다. 엠페도클레스나 플라톤, 칸트 등이 철학자로 더욱 존경받는 이유는 학설과 사유를 종합하고 화합했기 때문이다. 기발하고 신선한 상상을 하는 것은 누구의 머리에서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상상을 '세계적 사유'로 발전시키기까지는 고된 과정과 치밀한 논리의 전개가 필요하다.
소피의 파티장에 만화와 동화의 주인공들이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의 유년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없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어디까지가 존재이고 비존재인가 하는 기준을 다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차라리 수십억 년 동안 타고 있는 거대한 불의 불꽃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실재적일 것이다. 영원의 차원에서 존재를 생각하고, 가치판단의 세계를 좀더 넓고 깊고 오래된 그것으로 관찰할 때 나의 존재는 드디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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