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클리오님의 "부당한 것에 맞설 수 있는 용기"

이 책은 저도 선배의 추천으로 일찌감치 읽어보았습니다. 나치 시대에 맞선 사람들에 대한 책으로 '부분과 전체'와 함께 보니 좋았습니다. 정면적 저항은 누구나 꿈꿀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자신의 생활에서 의연히 저항하는 것은 좀 더 현실에 맞는 선택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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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비젠탈의 질문


두어 주일 전이다. 아침신문을 대강 훑다가 시몬 비젠탈이라는 유대인의 별세 기사에 눈이 딱 멈췄다. 마침 그가 쓴 ‘해바라기’(박중서 옮김. 뜨인돌 펴냄)를 사서 읽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구나 싶었다. 애초에 생소했던 이름이 새삼 의미있게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책 내용은 해바라기의 서정성과 동떨어진 전율로 참담하다. 그렇다면 향년 97세로 삶을 마치는 순간의 당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신문은 오스트리아 빈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떴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미진한 느낌을 어쩔 수 없다. ‘나치 사냥’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었던 탓이다.

나치 사냥꾼 비젠탈이 겪었던 고뇌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건축가 생활을 하던 비젠탈은 1941년 나치수용소로 끌려가 3년을 보냈다. 홀로코스트 속에서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둘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것으로 얘기가 끝났다면 이번 책을 포함한 몇몇 나치 고발 서적의 저자로만 알려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그때부터 파천황의 대사업을 마음먹었다. 30여 명의 다른 집단수용소 출신 생존자들과 함께 유대역사기록센터를 설립해서, 1,100여 나치 전범들을 법정에 줄줄이 세운 것이다.

수십 년이 걸렸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안네 프랑크를 체포한 경찰관이, 이들의 촘촘하고 집요한 색출 활동에 차례차례 걸려들었다. 비젠탈은 네덜란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정부의 훈장과, 미국 의회가 주는 황금 메달을 받았다.

그의 이름을 기려 세운 시몬 비젠탈 센터는 또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성명도 발표(2001년)했다. “주변국 침략에 대한 사실이 충분히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나무랐다.

그러나 ‘해바라기’의 내면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이런 게 아니다. 기왕에 보아 온, 차라리 지루하기까지한 그때 그 이야기와는 다른 질문을 중심화제로 밀고 나간다. 회개와 용서와 침묵에 대한 응답을 줄창 물어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시물레이션 아닌 실제상황을 곧바로 들이대면서 말이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기신기신 수용소 생활을 견디던 비젠탈은 어느 날 ‘임종실’에서 얼굴과 온몸을 붕대로 감은 나치스 친위대원의 참회를 듣는다. 죽기 직전의 스물한 살짜리 SS대원은 고백한다. 2백명 가량의 유대 어린이와 여자와 노인을 3층 가옥에 가두고 불을 질러 총질하는 살인행위에 자기도 가담했노라고. 어린애의 눈을 손으로 가린 채 2층에서 뛰어내린 부부를 떠올리며 읍소한다.

“저는 마음 편히 죽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발... 누구든지 유대인을 만나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쉽지 않으리라는 건 압니다만 당신이 대답해주지 않으면 저는 결코 마음 편히 죽지 못할겁니다.”

하지만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선다. 고뇌끝에 대답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자초지종을 들은 수용소 단짝들의 의견 또한 갈렸다. ‘자네가 그를 용서했다면, 자네는 평생 자네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이 모두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모를까,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말할 수조차 없는 사치’라는 소리도 나왔다.

그래서 그는 책을 통해 호소했을 터이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를 고민해달라고.

가해자 참회 있어야, 피해자 용서를 고뇌하거늘

1976년 미국에서 ‘해바라기’가 처음 나온 후로, 아닌게아니라 신학자와 윤리 지도자, 또는 작가들의 답변이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해서 20년 후에 그런 견해를 모아 개정판을 다시 냈는데, 한국에서는 이번 여름에야 번역 출간된 모양이다.

여러 나라 여러 계층 인사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바 아니지만, 한 독자로서의 나 역시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유대민족이 살았던 잔인무도한 세월을 십분 인정하되,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저 같은 군림은 무엇인가. 독일은 과거의 죄상 앞에 무릎을 꿇었거늘, 일본은 한사코 잡아뗀다. 오히려 은혜를 입혔다고 떵떵거린다. 그게 짧은 홀로코스트와 ‘야금야금 36년’의 차이인가.

‘비젠탈딜레마’는 필경 용서의 문제다. 때문에 과거사로 논란이 그칠 날 없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지난 날의 숱한 양민 학살과 ‘광주’의 예에서 경험했듯이,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없다. 용서할 준비는 되어 있는데 참회는 없다. 그것이 지금껏 겪은 한국적 과거사의 두드러진 특성이다.

망각은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지만, 용서는 의지의 문제라고 시몬 비젠탈은 술회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고난을 당한 장본인 뿐이라는 지적을 곁들여 슬픈 글쓰기의 끝을 맺고 있다.


글쓴이 / 최일남
· 소설가
· 前 동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 작품: <흐르는 북> <서울사람들> <누님의 겨울> <석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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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어깨 적성검사연구소 엮음 / 박문각 / 2005년 10월

 

이 책을 만들 때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전공적성이란 걸 처음으로 알게 해준 책이었거든요. 수능도 아닌 것이 논술도 아닌 것이 사람 머리를 이랬다 저랬다 정신없게 만들었어요. 한양대는 전공적성의 원천기술이자 특허를 가지고 있는 학교이고, 지금도 참신한 문제를 자꾸 제작하고 있어서 저를 괴롭히고 있지요. 한양대는 언어간 관계를 중시하는데, 사각형을 그리고 위쪽 단어와의 관계, 옆쪽 단어와의 관계, 대각선 위쪽 단어와의 관계, 이렇게 삼단 관계를 묻는 문제를 출제하고 있고, 특히 패러디 속담에도 진한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양대 지원하시는 분들은 패러디 속담과 다이나믹한 단어 관계를 숙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주대는 두 번째로 괴로운 책입니다. 이 책 때문에 저는 직업병에 걸렸답니다. 아주대는 특히 자료해석 문제가 많이 나오거든요. PSAT라는 공직자 직무적성 시험에 나오는 자료해석 문제를 활용하여 만들었는데, 언제까지 남이 만든 자료를 가지고 활용할 수도 없고 해서 신문을 열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그래프가 있으면 저는 딱 두 가지만 생각하죠. '이것으로 문제를 만들 수 있을까, 없을까?' 그렇지만 문제 만드는 재미가 있는 교재였습니다.

 

 

 

 

 

경희대는 아주대 계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인성검사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죠. 인성검사야 뭐 제가 바른생활맨이다보니(퍽) 만드는 것이 수월하...겠구나 생각했는데, 인성검사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생활이 아니라 상상력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상황극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대체로 논리추론 비중이  크고, 아주대와 한양대 딱 중간에 놓여 있는 경향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전공적성을 나눌 때 '한양대 계열'과 '아주대 계열'로 나누거든요.

 

 

 

 

 

인하대는 한양대 계열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양대는 어법을 중시하는데 인하대도 마찬가지로 어법에 많은 문제를 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추나 단어간 관계, 일반논리 같은 것이 주로 출제됩니다. 그렇지만 인하대만의 색채가 조금은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요즘 인하대랑 아주대 모의고사 만들고 있는데, 머리에서 피가 나올 지경입니다. 그래도 좋은 문제 만들려고 경쟁사들의 문제들을 모조리 활용하고, 신문이나 언어 관련 홈페이지에서 소중한 자료들도 참고해가면서 막강 모의고사를 만들고 있으니, 학생들의 공부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듯싶습니다.

 

 

 

 

 

홍익대는 한양대 계열의 막내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공적성 문제중에 가장 개성이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홍대는 이번 전공적성 시험을 통해 막강 수입을 올렸다고 합니다. 홍대가 전공적성을 폐지하면 제 일은 하나 줄어드는 거지만, 암튼 홍대만큼 기본기를 강조하는 대학은 없을 것입니다. 응용적 사고능력보다는, 어법과 일반논리(삼단논리), 단어간 관계 등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자료해석이나 응용논리 비중은 약한 반면 이들 기본기 문제들이 많이 출제되니, 혹시 전공적성 시험에 대비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저는 맞춤법이나 어법을 존중하는 한양대 계열(한양대, 인하대, 홍익대)의 책에 애정이 갑니다.

이렇게 대학별 실전편을 만들다 보니, 어느덧 저도 전공적성에 대해서는 준전문가가 다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항상 진화하기 때문에 사태의 추이를 제대로 파악하고 양질의 문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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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8
최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윤의 소설『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이하 ‘꽃잎’)은 소설로서 묘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일단 작품 안에서 뚜렷한 반동 인물이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 소설의 창작 의도와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글쓴이는 하나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시점을 배열하여 사태에 대한 다각적 조명을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다분히 신비롭고 희미하며, 메시지의 전도사는 가장 힘 없는 자, 그것도 제정신이 아닌 ‘소녀’를 필두로 세웠다. 즉 글쓴이는 5․18 참극의 현장에 모자란 소녀와 불안정한 장씨, 미미한 젊은이 몇몇을 담궜다가 끄집어 내서 소설 위를 걸어다니게 만드는 데 그들은 가슴 한 쪽에 결여를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찾아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나는데, 이 이야기는 바로 ‘기약 없는 여행에 관한 기록’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과 구조는 명확하다. 그날을 시작점으로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그날 이후 싫지만 대면할 수밖에 없는 흔적․고통을 하나씩 걸머지고 인물들은 여행을 떠난다. 때문에 소설은 표면적 갈등보다 이면적 갈등에 더욱 관심을 쏟으며 장막, 희미함, 비정상, 약자의 이미지가 주를 이루는 것은 이 점을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
그것은 일종의 조직적 낯설게 하기이며 독자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려는 글쓴이의 의도이다. 글쓴이의 언어로 표현하면 ‘바이러스’에 걸린 독자들은 그 ‘물음표’에 주목하기 시작했으므로, 시선을 소녀에게 맞춰둔 채 소녀의 비문법적이고 암호 같은 말들과 그보다 더 이상스런 행동들을 따르며 소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중심인물들의 대체적인 특징은 자신 안에 이중성, 모순성, 동요를 곳곳에 노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 폭력이 정당한가, 폭력에 대항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정의와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혼란에 기인하며, 그것은 국가, 곧 나라에 대한 폭력과 이를 강요하는 권력 앞에 약자들이 놓이게 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것을 소설 속에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장’이다. 장을 말할 때는 그가 일정한 벌이 없는 방랑아이며 초여름의 무더위, 짜증, 불안, 공격성 등의 이미지와 함께 보아야 한다. 무모한 공격성은 장면#2를 연상케 한다. 만약 나에게 이 소설의 첨삭 권한이 주어진다면 ‘장’에게 진압군에서 탈영하여 숨어산다는 조건값을 주고 싶다. 유리된 불만 많은 떠돌이에게는 일반적인 전형을 연상하기 어렵다. 때문에 ‘장’은 소녀가 필요한데 그 근거마저 한미하다고 본다. ‘장’이 자신의 소설적 캐릭터마저 반납하고 소녀에 매달릴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까. 이 부분이 글쓴이가 가지고 있는 ‘소녀’와 ‘사건’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제주도를 떠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작가적 관점에서 이야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

4․3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저자 현기영의 회고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여러 시선을 가지고 ‘그날’을 조명하고자 한 작가의 세심한 의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과 ‘단면적 불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건’이 시종일관 은유와 환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비해 소녀는 좀더 맹목적이고 적극적으로 짊어진 ‘짐’과 상대하려 한다. 소녀는 ‘가족’이라는 역사의 가장 실질적이고 명확한 주체를 상징하는데, 때문에 소녀의 숙제는 오빠를 찾는 것과 엄마의 그림자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중간지점은 오빠를 닮은 ‘장’과의 동거였으며, 종착점은 죽은 이들에 대한 위로와 고행이다. 실제로 무덤마다 꽃을 꽂아주었으면서 소녀는 왜 다시 떠나야 했을까? 그것은 이 소설의 맨 첫마디에서 암시되고 있는 것 같다.

‘다른 수많은 소녀들이 여전히, 언젠가는, 성실한 시선과 충격에 마모된 몸짓으로 젊은 당신의 뒤를 좇아와 오빠라 부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장막의 형상에서는 자유로웠지만 더 어두운 자신의 허상, 역사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들 자신의 허상을 상대하러 떠난 것이다. 즉, 소녀는 떠나간 진실이며 우리들은 그 진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글쓴이의 우려 섞인 속삭임은 아니었을까?
그러면 우리는 결론적으로 소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소녀는 희미한 진실의 흔적을 지닌 채 우리에게 걸어오면서, 동시에 우리로부터 떠나고 있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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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서중석 지음, 역사문제연구소 기획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의 현대사는 오욕과 공작, 기득권의 역사이자 투쟁과 저항, 반성의 역사이다. 격동적인 역사성은 민족의 감성을 타고 크고 작은 너울을 이루며 사납게 흘러간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 비해 이를 서술한 역사서는 이론에 치중하거나 너무 학문적이어서 생명을 불어넣지 못했다. 특히 역사는 권력의 쟁투사와 서민의 일상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전까지의 역사서는 역사의 어느 한 면만을 부각시킨 측면이 없지 않다.

이이화 선생은 그래서 ‘어느 누가, 때로는 암울하고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열정에 넘치는 우리의 현대사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추천사)’고 술회하고 있다.

그렇다고 현대사를 가만히 놔두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우리의 전통이 현대사를 통해 어떻게 계승되었으며 왜곡된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 미래에 대한 강한 확신이 생긴다. 그러나 나 자신부터도 현대사에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동아전과 위인 계보에서 말석을 차지한 전두환 대통령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가졌던 일은 철없는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치더라도, 지금도 나는 박정희와 6월 항쟁, 제주도 4.3 사건 같은 굵직한 역사에 대해서 단 한마디의 언급을 덧붙일 자신이 없다. 접해본 역사서도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본 편파적 역사 아니면, 자학적인 역사, 강자에 의해 좌우된 정치권력사가 전부이다. 관점을 전혀 달리하는 두 역사관 사이에 어떠한 연관관계도 비유도 이끌어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이것은 우리 젊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처지인 것 같다.


그러던 중 좋은 역사책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현대사의 한 맥락에 관해 자료를 찾으러 서점에 갔는데, 사진과 그림, 만평 등을 함께 수록한 재미있는 역사서를 발견한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서 네 시간 동안 다이어리에 베껴 쓰고 숙제를 해결하였는데, 이와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싶었다. 이참에 현대사의 대강이라도 훑어보는 게 좋을 듯하여 덜컥 책을 사버렸는데, 이 책은 빈약한 내 현대사적 감각에 균형을 잡아주었다.


먼저 문체부터 평이하고 차분하다. 글을 읽는 내내 조용한 찻집에서 대화를 나누듯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고, 앙금이 깊은 부분에서는 나름대로의 격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여의도 KBS 건물 담벼락에는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만 장 붙어 있어 애간장을 끓게 했다.’(본문 321쪽)


오랜 시간 숙고하여 냉정을 끝까지 유지하고 있었으며,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반감을 가지는 독재자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긍정적 측면을 짚고 있었다.


유신체제는 정치적으로만 질곡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었다. 그런가 하면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신은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었고, 사회, 문화, 예술에 참신한 자극이 되었다. (글쓴이 서문)


그리고 서술의 논리와 현장성을 높이기 위해 당시의 만평이나 사진 등 각종 시청각 자료를 첨부하거나, 사건일지나 당사자의 수기를 덧붙여 글이 갖는 일방성을 극복하고 다양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서는 재고(再考)를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의 상징인 새마을 운동은 대부분 장면 정권의 구상에 의지하고 있었으며, 국가보안법은 일제 시대 총독부에 의해 제정된 치안유지법이, 이승만 정권의 필요에 의해 사용된 법률이다. 그리고 4.3사건에 대한 글쓴이의 견해도 타당하면서 흥미롭다.


1948년 4월 3일 한라산에 봉화가 오르고 무장대가 경찰서와 서청 등을 습격하면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외부와 고립된 제주도 지형을 고려할 때 그것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본문 81쪽)


역사를 전체적인 틀 안에서 비교적 냉정하게 서술하면서도 이 책에는 하나의 관점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미화하거나 증오해서는 안 되고, 모든 사건은 현대를 이루는 소중한 재료가 된다는 생각이다.


나는 이 책의 저술에서도 각별히 유념했지만, 현대사를 가르칠 때 학생들이 현대사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도록 마음을 많이 쓰고 있다. 해방이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했는가, 그래서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상당히 빠른 수준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던 점 그리고 교육의 확대로 한글세대가 대거 탄생하고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1950년대에 1960~1980년대 경제발전의 초석이 놓였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가르친다. 특히 나는 한국 사회를 발전시킨 역동적인 힘을 중시한다. 역동성의 기반인 평준화가 왜 그렇게 빨리 성취되었나를 설명하고, 1956년 정ㆍ부통령 선거 등 여러 선거에서 유권자의 한 표가 독재정권을 위협했던 것을 강조한다. (글쓴이 서문)


참고로 이 책을 쓴 서중석 교수(성균관대)는 역사교육연대 상임대표이고 한중일 공동역사교과서 제작작업에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그 동안 요즘의 역사 논란을 보고 있으면, 역사는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지키고 이어나가고, 가능성을 발견해 나가는 실천의 대상에 가까운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모르고 넘어갔던 사실이나 잘못 이해했던 사실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현대사적 감각을 가다듬는 기회를 삼아도 즐거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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