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사 이명준의 슬픔이 담긴 상여를 천천히 따라가며
-노래는 침묵이 없으면 날 수 없는 가냘픈 한마리 새다- 탈레스


작가가 스물 다섯 살에 자신의 분신을 그려 놓은 『광장』이라는 책은 작가와 함께 수십 년 동안 진화했다. 필자가 분신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소설 속의 주인공 이명준과 그 작품인 광장 안에 쏟은 애정이다. 얼핏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거듭된 판의 변화인데, 초판은 47쇄, 재판은 41쇄, 3판은 15쇄 4판은 26쇄가 찍힐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이기도 하려니와 그가 작품 텍스트에 가한 작업의 변천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마치 도스또옙스끼를 보는 듯하다. 도스또옙스끼는 그의 역작 『죄와 벌』을 쓰기 위해 최소한 네 가지의 서술 방식을 시도했다고 하며, 『악령』이라는 소설을 쓸 때는 전반부를 다 쓰고 나서, 새로운 주인공의 발견으로 인해 모두 소각하고 다시 써 가는 열정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텍스트는 언제나 미완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새로운 독자를 만날 때마다 변화하는 여러 가지 모습의 예술 작품이 된다. 그러한 배경 지식 하나만으로 광장은 여러 번 음미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텍스트는 문학과지성사刊 4판 26쇄본(2002. 8.16)을 사용하였다.

이명준은 밀실 혹은 온실 안에서 별 탈 없이 자란 '철부지 책벌레(p63)'이다. 철학과에 들어가 지적 유희를 즐기다가 광장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광장으로 나아가려 한다. 당시의 한국 사회는 그에 따르면 '비어 있는 광장'이었으며 밀실과 광장은 너무나 커다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광장다운 광장으로 가고 싶어했으며 그것은 곧 삶다운 삶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는 터전 안에서는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명준도 차차 밀실에 길들어 가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는 싫었다. 그에 동반하여 투사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동경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사상으로 경도 되어 가족과 사랑을 묻어버리는 그런 모습은 명준이 생각한 이상적인 모델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북으로 가서 겪게 될 환멸을 살짝 암시하는 역할도 한다. 명준에게는 사랑도 역시 고귀한 삶의 목표이자 가치였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서는 무슨 대가든 지불할 의향이 있다. 이렇게 광장과 밀실, 개개인은 사랑이라는 빛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러나 파괴와 경계, 증오와 기만만이 잔재하는 사회 안에서 명준의 영혼은 심각한 상처를 받게 되고 그것이 터전을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사실 전쟁 직후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어느 정도의 무력과 획일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필요불가결 하기는 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이 우리 나라 내에 가지고 있는 모순의 충돌이기는 하지만, 이미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강대국의 시종으로 전락하여 명령을 하달 받는 입장에서 진정한 광장이 나타나지 않는다. 허울만 있는 낯선 광장 하나가 우리 앞에 놓여져 있을 뿐이며, 각자는 그것에 소극적으로 적응하기 위해서 비굴한 밀실들을 만들었으니, 사회는 점점 폐쇄적인 貪利的이 될 수밖에 없다. 명준은 그러한 문제를 젊은이다운 패기를 가지고 무리하게 제기하였으나, 성공할 리가 없었다. 명준은 자기 자신 깨지지도 않을 것 같은 바위에 뛰어들어 산화함으로써 당대의 지식인과 시민들의 양심을 각성시켰을 것이다. 그러한 역할만으로 명준은 가치 있는 인물이다. 때문에 명준은 당대 사람들의 아픔이었으며, 공통문제였다. 그에 더하여 명준은 이상으로 가기까지 시행착오를 하나씩 드러내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며, 그 문제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같은 방랑인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그 모습을 들자면 사랑에 대해서는 소유와 관능적 쾌락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며, 또 다른 소유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인애와 은혜를 소유하려 한 강한 욕구가 그것을 나타낸다. 지성에 대해서는 지적 유희라는 돌부리에 또 넘어진다. 장난 삼아 학교 신문에 작품을 투고하고, 방안에 누워 서재에서 책 내용 들추기 놀이를 하는 모습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사회의 일원에 대해서는 요령이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黨內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을 기만하며 적당히 넘어가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미웠고 비참하였다.
그가 놓여 있는 현실과 이상까지의 거리는 너무나 멀다. 그리고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스스로 보여주었다. 후에 그가 긴급한 적정 보고서를 쥐고도 태연했고, '타고르호'에서 송환 포로들의 강력한 요구와 증오에도 태연할 수 있었던 까닭, 그리고 흔연히 母女 새의 품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경험의 덕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는 거침없이 달려가는 명준의 적극적인 기질이다. 이것은 왜 명준에게 인애가 아니고, 표면적으로는 더 많이 죄지은(배신한) 은혜였나 하는 문제도 해결해 준다. 인애는 탈을 벗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조그만 연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자발적으로 드러나지 못하고, 명준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서만 꿈틀하다가 도로 닫혀버리는 그러한 탈이었기 때문에 명준과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은혜가 더욱 사랑스러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탈을 벗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적극성의 증좌가 될 만하다. 작품 내에서 은혜의 모습은 공산주의의 탈 또한 벗은 것 같았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여러 관념의 요소들, 즉 광장, 밀실, 코뮤니즘, 자본주의, 철학 등을 구사하고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근본적이면서도 단순한 힘은 사랑에 있었고, 그 사랑 또한 적극적인 기질이 있을 때라야만 형상을 얻는 것이다. 그것이 실패일 때도 역시 많은 가치를 갖는다. 이런 이유로 하여 명준이 전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명준에게는 진리의 조그만 틈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내딛어야 할 것은 무엇이며 존재의 이유까지도 거기에 담을 수 있는 틈이 점점 명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그것이 환상의 모습으로 엄마 비둘기와 딸 비둘기라는 극도로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진리란 언제나 가려져 있으며 힘들게 찾아낸 진리라는 것도 어쩌면 환상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아주 슬픈 암시를 명준의 최후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명준의 자살이다. 남한과 북한이라는 현실적인 공간 속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어서 "중립국"이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립국' 또한 명준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비관적이다. 죽음의 세계를 명준은 택했지만, 亡者에게는 다소 행복할지 모르겠지만 남겨진 우리로서는 더욱 절망이 아닐 수 없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는 이 항거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필자가 감상문을 쓰기에 앞서 달아놓은 코멘트와 광장 안에서 나타나는 작가의 세계관이 궤를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 눈 쌓이고 강풍이 몰아치는 산 위에 가야만 얻을 수 있는 진리라는 꽃은 그것을 꺾기 위해 도전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비추며, 도처에 죽음이라는 함정이 깔려 있다. 이명준은 그것을 꺾었을까? 아니, 그렇지 못하다. 명준은 꽃의 모습을 보았을지 모르겠으나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것은 명준이 믿은 잠정적인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명준은 필자에게 그런 꽃이 있고, 거기 이르기 위해서 밟아야 하는 위험과 여러 조건들을 음유시인처럼 읊어주었다. 그래서 내 앞에는 눈 쌓인 산이 그려지는데, 당시 작가의 나이와 같은 스물다섯으로서, 작가와 명준은 합세하여 필자를 놀리는 것 같아서 언짢음을 감출 수가 없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요즘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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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지음 / 서광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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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번에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핵문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번에는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스트레스는 내가 아는 한 인류의 최대의 적이자 골치덩어리가 아닐까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신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 가지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이제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 않으면 안되게 생겼다.

스피노자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비롯해서 하나의 주제나 힘은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다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반드시 행동의 형식으로 실현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감정일 경우에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알기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보다 더 큰 감정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예컨대 삼국지에서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형제들이 국가의 왕위와 영토를 두고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자가 나타나서 그들의 국가를 통째로 삼키려 하자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제삼자를 대항해서 열심히 싸웠다. 서로 협력하면서... 그리고 제삼자가 물러나자 다시 그 전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나 더욱 커다란 감정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한 가지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어떤 슬픔이나 괴로움도 일단 그것을 이해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를 괴롭힐 수 없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내 생활에 지혜를 적셔 주었다. 나는 참는 것은 잘 하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참음'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어머니의 예민한 성격을 받아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문제가 있으면 크게 반응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막상 이해하려고 하자 여러 괴로움들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화를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으며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는 가설을 추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에 관한 예증을 몇 가지 발견했다.*

우당도서관을 나와서 산책로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밑에는 물웅덩이가 있었고 말 두 마리가 버려진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 정말 어떻게 저렇게 잘 수 있을까 하고 나는 놀랐다. 지난번 술먹고 집에서 '꼬라박아' 같이 잔 것과 거의 같았다. 까치들은 그 옆에 벌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앉아서 쉬고 있는 말 위에까지 다니면서 말을 희롱하고 있었다. 그 때 숲에서 우렁찬 말의 울음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마치 사자가 '으르렁' 하는 소리를 말의 그것으로만 바꿔놓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많은 까치들 중에서 한 마리도 놀라서 날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걸 보고 이제는 참새들이 허수아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상기했으며, 인간과 세균과의 진화하는 전쟁에 대해서도 상기했다. 물론 그것들은 오래된 타성과 습관에 기인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저 무서운 울음소리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화를 내면서 말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과장이거나 '오해' 또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무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겠지만, 펼쳐 놓으면 정말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대한다.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무지가 그렇다. 그러나 무지를 애써 달고 사는 사람들은 밉다.

화를 내거나 감정을 일으키는 것중에 정당한 것이 있다. 그것은 그 오버액션이 필요한 상황에서 했을 때이다. 인자한 선생님은 누구나 좋아하지만, 사람이란 편하게 되면 기어오르기 마련이다. 그것이 또한 극을 넘어가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는데, 학생 시절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 때 선생님은 크게 화를 내서 학생들의 잘못된 생각을 돌려 놓는데, 그러한 액션은 정당하다.


그렇다면 이해에 관해서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겠는데, 무엇을 이해라고 하며, 어디까지 이해라고 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 특히 이해를 하려고 참는 것 자체가 이해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직관'이 '그것은 완전히 아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그 문제를 일단 보류해둔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어머니를 죽이는 등의 파렴치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하면서 화를 내고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지만, 그 행동이 이해가 가기 때문에 화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한 것은 그 살인사건이 그 사람의 죄만이 아니라, 나도 당연히 그 중의 한 부분을 물려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적인 문제로 보기도 하는데, 그것도 역시 이해의 한 부분이다. 지하철 사고 역시 그렇다. 그것은 괴로운 문제이지 화가 나는 문제들은 아니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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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강의 - 상
남회근 지음, 채책 기록. 송찬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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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후감이라고 쓰니 참 감회가 새롭다. 이것을 번역해서 뜻을 알아낸 것은 최근이었는데 '읽은 후의 감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남회근 선생의 논어강의라는 책은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 비싸다. 특히 나처럼 별다른 생계도 없는 학생에게 삼만여원의 돈은 형성하기 힘들다. 게다가 상하권을 구입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린다. 그래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발견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미친척하고 하권을 주문했다. 그리고 하권이 도착하기 전에 냉큼 상권에 대한 독후감을 써버릴테다.

글을 쓰는 건 아무리 봐도 힘들다. 방금 전까지 독후감을 쓰기 위해 책을 좀 봤는데 지금 내 눈 사정이 말이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눈을 더 좁혀서 거의 졸린 눈을 하고 쓰고 있다. 작가들이 참 존경스러울 때가 바로 지금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러나 원작에 촛점이 실리느냐, 독자에게 촛점이 실리느냐에 따라서 내용이 달라지게 된다. 전문직종이 아닌 바에야 대체로 쓰는 타입은 후자가 될 것인데 그것도 아직 숙성하지는 않다. 내가 글을 쓰는 방식이 그러한데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을 다 비워내야 속이 풀린다. 그것은 시적 거리감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이다. 그렇다고 감상으로 도배를 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창작을 하는 편이 수월하겠다. 다른 책을 보고 혹은 작품을 보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자기 지론이나 문장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더 솔직한 이유는 전일에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서다. 많은 자료들 앞에 선뜻 집필을 하기가 머뭇거려지지만 빨리 내가 선정한 자료들을 훑어보고 칼을 뽑아야겠다. 아! 오늘도 서론이 너무 길다.

사실 논어에 관한 에세이라면 논어 자체의 내용만 두고라고 유익한 일이다. 덕분에 나는 논어와 한 노인의 이야기 두 맛을 한꺼번에 보았다. 그전에는 그래도 논어책 한두번은 읽은 경력으로 자신있게 책을 쥐었다.(참고로 이 책을 읽기 전에 논어 전편을 어느 텍스트라도 잡고 봐두면 도움이 크다) 그러나 이전에 내가 익혔던 해석의 방침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개 이러한 경우에 남는 것은 허무한 공허나 독단의 기만 정도인데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회근이라는 파격적 해석자는 모습을 살짝 감추고 건강한 원시의 깔끔함이 남겨졌다. (공맹 유학을 원시 유학이라고도 한다) 확실히 노인의 노련함이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남회근이라는 노인이 구름을 걷어가고 남은 뚜렷한 자리는 사실 한마디 뿐이다. 그것은 '경으로 경을 이해한다'는 이른바 '以經解經'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대개 머리말을 보는 타입이다. 머리말에 들어가기 전에 흑백사진으로 남회근 선생의 근영이 나왔는데, 일자눈썹에다 코든 머리든 손가락이든 볼이든 둥글둥글하다. 웃는 표정도 그렇다. 그 웃는 표정은 머리말에서 나에게 한가지 암시를 주었다. 그것은 마지막 대목이었는데

이 책이름을 '별재別裁'라고 정한 것도 이번의 강의가 정통유가의 정학 밖에서 다른 체재로ㅎ 이루어진 단지 개인적인 견해일 뿐, 학술적인 부류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학상달下學上達의 일을 논할 만한 정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초판 머리말 중에서

별재라는 것은 아마 우리말로 별책부록 정도가 아닐까 한다. 저잣거리에서 파는 눈요기용 책이라는 의미가 문맥에 보인다. 왜 정통유학에 깊이 통하고 불교 도교에다가 대학 교수까지 하여 논문이라면 달인이 되었을텐데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이 의문은 책을 선택한 후에 자세히 느낀 것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남선생이 문화와 민족의 근대사적 아픔을 온몸으로 쓰리도록 감당했고 누구보다 사랑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구에 가득 차 있다는 억측으로 본다면 이는 분명히 이전 학문적 접근에 대한 회의일 것 같았다. (이것에 대해 여친은 좀처럼 수긍할 수 없다는 눈치다) 그리고 어투를 존댓말로 써 내려가는 것도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존댓말로 써 내려간다는 말은 내가 생각할 때 상당한 경지에서 나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리고 차분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실타래를 풀어나가듯이 말 속에서 같이 돌면서 풀어나가는 듯한 인상을 준다. 크리슈나무르티가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종전에 원문과 주석을 두루두루 보던 습관을 버리고 주석을 일단 버려둘 것을 제안한다틀렸다고 하기 일쑤다. 이 글을 읽고 과거 문화와 선인들을 내가 얼마나 과소평가하고 있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것은 특히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그 원문을 앞뒤좌우로 잘 살펴보라고 한다. 뭐가 보이지 않느냐 하면서. 사실 우리는 죽은 사람들의 위치나 존재를 너무 자의적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정리해내지 못하면 그것을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선현들을 무시하거나 마음대로 다루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더욱 가려내기 어렵다.

문화와 기술이 언제부터 결별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혹은 결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둘은 서로 뜻이 맞지 않았는지 기술은 앞만 보고 내달렸고 문화는 가만히 멈춰 버린 것 같다. 선현들과 이전문화의 성실치 못한 재판(再版)에 불과한 우리는 실마리도 알지 못하고 사장시켜버린 고귀한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가. 축성술, 건축술, 종을 만드는 기술, 도자기 만드는 기술 등 많은 기술은 선현의 업적을 따라가지 못할 뿐더러 제대로 모방하지도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책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침 최근에 내가 다니는 서당의 훈장님이 말씀하셨는데, 이전에 편집 기술은 정말 오묘하고 세밀하다고 한다. 그 때도 당연히 '영원한 맹자'를 보고 있었는데, 맹자는 권도라는 말은 한마디도 안하면서 권도에 대해서 여러 방향으로 말하고 있었다. 맹자도 이러할진대 할아버지 혹은 증조할아버 격인 논어는 어떠하겠는가? 한학에 정통한 학자들도 한문의 문장은 모두 맹자나 논어에서 나온다고 한다. 당시로 말하면 세계제일의 인재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논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지금 각국의 석학들이 성경을 자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과 비슷하다. 남회근 선생은 논어의 문장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기적으로 연결된 잘된 글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러한 문맥적 상호작용을 염두해 두면서 한권의 책을 서술해 나갔다. 역사가는 하나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카아가 말하듯이 한 사상에 대한 해석도 관점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관점이 있으면 그에 대한 비약도 따르기 마련이다. 간간히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노인의 숙련된 이야기로 충분히 커버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부분은 이전의 해석에 대한 비판이다. 중국이 한창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을 때는 많은 중국인들이 세계 정세에 궤를 같이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감에 휩싸였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상을 부수고 그의 토대 위에 세워진 문화를 논리적, 비논리적으로 비판하려고 달려들었지만 화무십일홍처럼 얼마 못가 다시 복원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비판에 가세하던 서양에서 공자를 배우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들의 시대가 그들에게 준 너무나 무거운 짐을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절박한 발상에서 시작한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그들을 조용히 두둔해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최근 김교수라는 사람이 공자를 죽이고자 나섰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읽어보았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금도 변하지 않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가 진정으로 공자를 죽이기를, 그렇지 못한다면 후세에 교훈이 되도록 정당하게 죽이려는 시도라도 남겼으면 했다. 진정한 질문이 진정한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서점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커버 색깔이 시원한 바다출판사 색으로 바뀌었고 판과 쇄를 수십번 하였더랬다. 씁쓸한 미소 외에 별로 느껴지는 게 없었다. '당신은 공자를 죽였다기 보다 쉽게 열정을 보이는 국민의 기질을 이용해서 돈을 챙긴 거요?'라는 질문을 견딜 수 있는지 마음속으로 물음을 가져본다.
논어강의의 저자는 공자의 해석자들이 공자를 의곡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이 사태에 직면했다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내 생각에 그것은 하나의 가설이라고 본다. 좀 더 다른 무엇이 요구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공자가 영원에 닿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논어텍스트는 대개 주자집주일텐데 주자주 정도를 버리는 것은 아깝지 않으나 존경하는 율곡선생의 구결까지 때로는 버려야 한다는 대가가 따른다. 한문에 달려 있는 토씨를 구결이라고 한느데, 그것은 옛부터 율곡 선생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구결이 바뀌면 문장 성분도 바뀌고 해석 자체가 바뀌게 된다. 이것이 저자가 보이는 두번째 억측의 여지도 되지만 그는 자신의 해석의 확실한 근거들을 들고 있다. 가끔 쉽게 넘어가 버리기는 하지만 다른 해석들처럼 빙산을 절단기로 깎아서 공허하게 하는 형세가 아니라 새로운 빙산으로 예전의 빙산을 쳐서 대치시키는 형세라고 표현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보고서 내가 얻은 소득이라면 숨겨졌던 문맥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경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故의 수수께끼'에 말려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의 내용 뒤에 '때문에'라는 말이 나오면 분명히 인과관계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전에 논어를 읽을 때 공자는 어쩔 때는 유동적이며 인정세태에 두루 통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어떤 때는 완고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공자의 말 자체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어려움에 특히 배려를 하고 문맥을 살리고 공자의 본의를 복원하는데 거의 모든 페이지를 썼다. 덕분에 나는 공자의 올바른 모델에 접근하는 상을 머릿속에 갖게 되었고, 한 이십년 정도 젊은 공자를 모시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은 가장 큰 소득이다.

좀더 본격적인 글을 써서 이 글이 나타내고 있는 특징들을 살펴보고 싶지만 글의 성격도 성격이고, 그렇게 할 시간이 없기도 하기 때문에 예고편으로 하나의 대목만 귀뜸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논어의 제일 첫편은 학이편으로 '배움'이라는 의미를 알려주는 중요한 장이다. 이 때의 '학'이라는 개념은 좀 더 확장을 해야 하는 개념이다. 나는 독서라는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서 더욱 넓은 개념으로 가고자 하였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이 '학'의 개념은 심오하기도 해서 지금까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나름대로 그것을 해석해 본다면 '하나하나 체험하고 직접 깨우쳐 가면서 얻은 진정한 지식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하는 '현명한 자를 벗으로 두어 자기의 잘못을 고쳐나가고 제힘껏 부모를 모시고 온몸으로 주인을 섬기고 벗과 교제할 때는 신의 있게 말을 한다면 비록 글공부는 하지 않았다고 할지라고 나는 반드시 학문을 한다고 평가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학문정신의 모습이 보인다. 또한 자로가 공자에게 '선생님, 백성들이 있고 사직이 있는데 꼭 독서를 해야만 학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은 대목에서는 분명히 차이점이 드러난다. 학이시습지운운 하는 장 다음에는 바로 유자가 효제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효제와 학을 연결시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즉 효제는 가족들에 대한 윤리를 강조하고 있는 덕목이며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벗과의 교제도 강조한다. 가족은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 있는데 어버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몸을 잘 아껴서 과로사에 이르거나 상하지 말하야 하며 형제들과의 우애도 잘 지켜야 한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세상에 가족에 대해서 부끄러운 점이 없거나 잘못이 없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일 것이다. 그 점으로 따지면 아직 나는 '학' 자의 한 획도 긋지 못했다. 항상 누나에게는 성급하고 애티나는 말을 쉽게 내뱉고 내몸을 관리하지 못해 벌써 열번이 넘는 전신마취를 하여 부모의 속을 태웠다. 이것은 나를 모르는 다른 사람에게 적절히 대응하는 것의 몇백배는 더 힘든 경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과거 중국의 국가 개념은 하나의 대가족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유가는 그러한 관계에 주목한 학파다. '가'는 할아방(할아버지)의 할아방의 할아방 중에 왕할아방에서부터 시작해서 씨를 낳고 또 그 씨가 씨를 낳아서 형성된 국가이다. 때문에 왕실이 한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효제라는 것은 나라 전체로 연결되는 개념이다. 게다가 친구와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라면 사회관계까지 효가 걸쳐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인'과 '학'의 근본이자 시작이라고 저자는 보고 있다. 일단 본문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한다.

논어의 백미는 담박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논어를 읽고 있으면 자꾸 눈물이 나려구 한다. 안연이 죽어서 공자가 통곡할 때는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을 가거나 조용하게 한마디 하는 대목에서는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 답답하고 눈물이 콱 쏟아질 것 같다. 그 이유를 한번 고민해봐야겠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하권을 보고나서 논어를 마음속에서나마 정리해야겠다.

사람의 뼈대를 형성하는 것은 고전이지만 고전에 침잠하면 그만큼 고전적인 사람이 된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고전적인 부분을 유머로 승화시켜서 하나의 장점을 갖지 못한다면 어딜 가서 사랑받을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요즘 나의 큰 숙제이다.



* 賢賢易色, 事父母, 能竭其力, 事君, 能致其身, 與朋友交, 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胃之學矣 -學而 8
** 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 先進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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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페인트의 주위에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정치적 참여가 가장 활발한 사람은 ‘신상품사업개발단장’이다. 신상품사업개발단의 창립 이념은 ‘이제는 물질보다 정신을 팔자’이다. 정신을 팔다니, 정신을 팔아서 무슨 수익을 올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정신은 어떻게 파는 것인가. 처음에는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물론 쇼페인트의 친구들은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이제는 놀라지도 않지만, 그보다 기대가 더하다.

이들의 특징은 특이하지만 유용하고, 기발하지만 평범한 데서 출발한다.

 

신상품단장이 이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아주 평범한 사연에서 출발한다. 하루는 친구들과 식당에 가서 밥을 시켰다.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도 밥을 시켰는데, 거기가 먼저 밥이 나왔다. 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맛있게 먹겠습니다'라든지 '감사합니다' 등으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단장은 아주 순간적으로 물질과 화폐의 교환으로 대표되는 경제 논리가 일순간 '고마운 감정'으로 인해 무너진 현장을 포착했다. 그렇다. 물질의 교환과, 고마움의 표시는 분명히 다른 차원이다. 곧이어 단장의 상에도 밥이 왔다. 그도 '감사히 먹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환히 웃으며, '맛있게 드세요. 김치 이번에 담가서 맛이 잘 들었을 거에요' 하고 한마디 붙이는 것이었다. 이 순간 받은 '정감의 세례'를 통해 이 일에 뛰어들었다고 술회하였는데, 참 시시하기도 하다. 습관보다 미미한 정감이 거대한 관계론을 낳을 수 있는가. 아무튼 그 '관계론'은 이만큼 커진 것이 사실이다.

 

나는 그와 만나며 요즘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완결된 텍스트 운동’이 바로 신상품개발사업단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완결된 텍스트 운동’이란 몇몇 인식 있는 신문사에서부터 시작한 운동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접하는 텍스트인 신문에서부터 한글맞춤법을 준수해 학생이나 일반인들, 외국인들이 한국어, 띄어쓰기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한 운동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구호는 ‘모든 신문 텍스트의 한국어 문법 교재화’이다. 이 운동은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다. 외국에서도 이 운동을 벤치마킹해서 자국 언어 사용의 정확성을 높이고 있다.

이로 인해 멀게만 느껴졌던 한글맞춤법이 보편화되었음은 물론, 한글맞춤법이 한글의 특징을 잘 구현한 작품이라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었다. 한글의 어떤 성분과 어떤 성분이 만나면 유독 특이한 화학 현상을 일으키는가도 사람들은 잘 알게 되었고, 거의 모든 종류의 글쓰기에 맞춤법이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

이것이 시작된 계기는 신상품개발사업단에서 출판한 ‘신문맞춤법’이라는 책이 화제를 일으키면서부터이다. 신문맞춤법은 신문사가 맞춤법을 좀처럼 지키지 않아, 국민들의 언어 생활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는 사실을 폭로한 책이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은 신문맞춤법 총칙 제2항이다.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는 총칙 2항을 교묘하게 변형해 ‘문장의 각 단어는 붙여씀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이다.(‘붙여 씀’도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이나 신문맞춤법은 이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신문사 측은 지면 배분 관계로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해 왔으나, 조사 결과 띄어쓰기를 엄격히 적용해도 지면의 1%를 초과하지 않으며, 그것도 각 기사의 폭을 줄이거나, 남은 여백을 이용하면 대부분 해결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눈에 띄는 조항은 ‘단위명사는 절대로 띄어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물론이고, 오백 원 같은 것들은 의미를 구분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거의 모든 문장을 '붙여쓰기'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문맞춤법은 띄어쓰기 조항을 특히 어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사업단의 노력으로 몇몇 대형 신문사를 시작으로 교열부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각 신문사는 맞춤법을 준수하고 있으며, 지금은 교재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기사를 써내고 있다. 이 운동을 온몸으로 겪은 한 기자는 ‘맞춤법이 마치 반드시 지켜야 할 법률인 것처럼 생각돼 반발심도 생겼으나, 우리말을 절묘히 표현한 작품임을 알게 되고 나서 우리말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였고, 다른 기자는 ‘맞춤법 공부가 문법 능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논리력도 상당히 강화시켜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이 사업단이 ‘악학대사전(惡學大事典)’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단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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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클리오님의 "과거에서 찾아낸 현재와 미래"

저도 이 책 덕분에 '이주의 리뷰'에 뽑혔는데, 클리오 님의 글을 읽으니 제가 '전체에 대한 고찰'이 부족했음을 알 수 있겠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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