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국민들을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으로 이끌고 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인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기 시작할 때면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들이 이 적대감을 극복할 때까지 그만두시오. 여러분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 나가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대항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여러분들이 영국인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을 때뿐이오.”


 - 영어 문제집 중에서

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적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에게 사로잡혀 있으면 똑바로 볼 수 없다. 어떤 전쟁이든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을 찌르는 것이 승리의 열쇠이며, 상대를 나의 예견 안에 가두는 것이 승리의 전략이다. 대개 강자나 침략자는 상대방이 완전히 나의 역량과 사고 안에 들어왔을 때 삼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상대가 나의 사고를 넘어서 뒤통수를 때릴 때 당황해서 자멸하기 마련이다.

결국 전쟁은 자멸과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스스로 무너지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승부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하나의 빛나는 자세로 대응할 때 적군은 승패를 잊어버리고, ‘전쟁’ 자체에 대해 몹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부끄러움은 역사에도 새겨지므로,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당시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겨루어야 할 상대는 그 뒷이야기이다.

동서양을 아울러 모든 전쟁이 명분을 살리려 했던 것도, 그들이 다루는 대상이 적군에 국한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삶도 전쟁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겹도록 부딪치는 현실이나 ‘관계’를 넘어 그 ‘오래 남게 될 이야기’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너무나도 졸전을 펼치는 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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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고성(古城)들의 건축시대를 한눈에 분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굴뚝들이 눈에 잘 안 띄면 17세기에 지었다고 보면 틀림없다. 윌리엄 3세 등 당시 왕들은 벽난로 숫자대로 재산세를 매겼다. 창문이 드문 고성이라면 대개 18~19세기 초반에 지은 것들이다. 벽난로세 대신 창문 수에 따라 창문세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귀족들조차 창문을 없애고 어두컴컴한 생활을 택했다.

이처럼 건축양식은 물론 생활양식까지 바꿔놓는 게 세금이다. 옛 소련에는 '무자세(無子稅)'란 희한한 세금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세였다가 나중에는 인구증가책의 수단이 됐다. 독신 남녀나 자녀 없는 부부에게 소득의 6%를 물렸으니 아이를 낳지 않고 배겨낼 재간이 없었다.

요즘 영국.스위스가 도입을 추진 중인 비만세도 눈여겨볼 대상이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에서 세금을 거둬 사회문제의 하나인 비만 퇴치에 쓰겠다는 것이다.

 - 중앙일보 「분수대」<세금> 7월 11일

 

 

사회생활에서 '세금'이라는 것은 넓게 보면 '대가'와 같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든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대가는 당장 값을 치러야 하기도 하지만, 먼 시간 후에 저도 모르게 치르는 경우가 있다. 특히 동양에서는 몇 대를 지나 후손에게 그 행동의 결과가 나타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때를 지나도 반드시 어떤 방향에서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하며,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가 시간 일분을 소홀히 보내도 '시간의 복수'를 맞이하는 것처럼, 우리가 했던 선택이 어느 한 순간 평가되면서 나의 모습을 규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가피하게 어느 하나의 선택을 했을 때, 그에 대해 피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를 때의 마음은 고달프다. 정말 옳고 타당한 선택을 했을지라도 부당하게 값을 치러야 하는 경우도 많다.

 

굳이 대가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말과 행동은 '영원'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피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어느 순간에라도 당당히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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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폴리데크테스 왕도 오래지 않아 죽고 말았으므로, 왕위 계승권은 당연히 리쿠르고스의 것이었다. 실제로 리쿠르고스는 얼마 동안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왕비인 형수가 잉태중임을 알게 된 리쿠르고스는 즉시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만약 태어날 아기가 남자아이라면 왕비의 소생이 왕국을 계승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자신은 오직 후견인으로서 장차 출생할 아기를 대신하여 정무를 도와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섭정을 스파르타 인들은 프로디쿠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왕비로부터 리쿠르고스에게 비밀스런 제안이 전해졌다. 자신과 결혼을 하고 리쿠르고스가 왕위에 오른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신의 아기를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왕비의 사악함에 몸서리를 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거절의 뜻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면서 감사와 기쁨의 뜻을 전하는 사신을 보내었다. 그러나 아기를 강제로 유산한다면 왕비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차라리 아기가 출생하는 대로 자신이 직접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계교를 통하여 마침내 왕비는 아기를 분만하기에 이르렀다. 왕비가 진통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리쿠르고스는 사람을 보내어 옆에서 모든 일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만약 여자아기를 낳거든 여인들에게 맡기고, 남자아기를 낳거든 자신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상관하지 말고 즉시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일렀다.

 


때마침 리쿠르고스가 여러 원로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때 왕비가 남자아기를 낳았다. 아이는 곧 식사하고 있는 리쿠르고스에게 전달되었다.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받아 안고 둘레에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스파르타 인들이여, 그대들의 왕이 나셨소.”

 


말을 마친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 카릴라우스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만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리쿠르고스의 고귀하고 올바른 성품에 감탄하고 기뻐하였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고스 편 」

 


사람이 자기 몸 하나도 가누기 힘들다고들 하는데, 정계와 같은 곳에는 워낙에 대립과 암투가 강해서 양쪽이 만족할 만큼 행동하기가 어렵다. 대개 그 어려운 입장에서 유연히 벗어나는 사람들은 양쪽 중 어디에도 편중되지 않고 완숙한 제3의 대안을 내놓는다.

 


그것은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만큼 서로 약점과 모순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사람이 친분을 가지고 설득하거나, 살이 저미도록 간절하게 설득하는 것은 극복하기 어렵다고 했다. 결국 냉정함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리 상대가 달콤하고 강력하게 설득한다 하더라도 중심을 잃지 않고,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유혹과 설득 중 가장 이기기 힘든 것은 사회라는 조건이다. 사회의 조건에 따라 사람들은 희비가 엇갈리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기도 한다. 무턱대고 저항할 수도 없는 입장이고, 그렇다고 간, 쓸개 다 빼놓고 끌려갈 수도 없는 입장이다. 특히 리쿠르고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섭정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균형감각을 지키기 힘들다. 동양에도 주공이라는 사람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섭정을 펼쳤는데, 인정(仁政)을 펼쳤음에도 주위의 모진 모함에 시달려야 했다. 권력의 핵심이나 일상의 자리에서나 선택을 언제나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어디서든 성공의 열쇠는 분위기를 압도하고 장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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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타르코스 지음, 김병철 옮김 / 범우사 / 1999년 2월, 350쪽 

 

호전적인 스파르타의 법률에도 은 나라와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전쟁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다. 적군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익숙해지면 전쟁을 통해서 오히려 적을 훈련하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후세의 아게실라우스 왕은 이러한 점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왕이 자주 전쟁을 한 결과, 처음에는 상대도 되지 않았던 테베스가 라케다이몬과 세력을 겨룰 지경으로 강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날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아게실리우스 왕을 보고 안타르키다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고 또 할 줄도 모르던 테베스 사람들을 훌륭한 전사로 만드시느라 그토록 애를 쓰시더니, 그 값을 톡톡히 받으셨군요.”

  - 『플루타르크 영웅전』, 리쿠르구스」 편 중에서

 

습관의 힘은 무섭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사람은 죽음에도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누군가에 의해서 하나의 고착화된 이미지로 보인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더구나 그것이 내가 만든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옳은 소리를 한다지만 너무 자주 마음속의 이야기를 해버리면 진실의 의미는 이상하게도 상쇄되고 만다. 화를 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무는 개 짖지 않는다’라는 속담처럼 정말 무서운 사람은 자주 화내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섭다.


습관과 함께 우리가 가진 적응력도 있다. 어디에 떨어지든 금세 적응해 버린다. 문학자나 철학자는 어디에든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작을 만들어낸다.


나는 내가 제일 무서울 때가 이미 어떤 일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잡고 있을 때이다. 거기에 이미 나는 없다. 어떤 일에 부딪치면 기계처럼 자동 동작이 나오는 것이다.


참 궁금하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만 신은 신비로운 것들을 보여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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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드는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눈이 가려 있는지를 알고, 마음 깊이 물들어버린 말을 들으면 그가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알며, 못된 말을 들으면 그가 어떻게 원칙에서 멀어졌는지를 알며, 그가 둘러대는 말을 하면 아쉬워하는 바를 안다.

詖辭에 知其所蔽하며, 淫辭에 知其所陷하며, 邪辭에 知其所離하며, 遁辭에 知其所窮이니라.

- ꡔ맹자ꡕ , 「공손추 상」 2


맹자는 바르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은 분명 뭔가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기울어진 부분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때로는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꾀가 많거나 기술이 좋아서 온전히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빤히 보고 있는 사람 앞에서 술수를 부리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말은 서로에 대한 약속이기 이전에 자신에 대한 약속이자, 진실에 대한 약속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진실에 닿아 있어야 말로서의 품위와 의의를 지킬 수 있다. 그러나 말로서 말을 무마하고, 진실까지 어떻게 해보려는 사람들은 이미 듣는 사람에게 정당하지 못한 약점을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오래 속일 수 없다. 지금까지 속여 온 것도 그들의 기술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믿음 곧 진실의 힘 때문이었다. 진실의 힘이 다 떨어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랜 길을 돌아 진실로 다가가는 말은 있다. 그러나 진실에서 멀어지는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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