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는 밖으로 나다닐 기회가 별로 없지만 있으면 좋아합니다.

여건이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살아야지 별 수 있나요?

그런데 천성이 워낙 쏘다니기를 좋아해서,

그 속풀이를 온라인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일이 걸리면 열중해서 하곤 합니다.

그러다보니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도 있고, 달콤한 재미도 있습니다.

얼마 전 경향신문에서 독자 수기를 모집했는데,

쓸 건이 하나 있어서, 극적 장치와 문학성을 가미해서 올렸죠.

그랬더니 얼마 후 목소리가 굵직한 여자 분께서 전화해서

경향 독자 투고에 뽑혔으니 유기농 사과 한 박스를 보낸다는 겁니다.

고맙게 받아서 회사 가족들과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요즘은 알라딘 서재만들기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데,

리뷰가 우수작으로 뽑혀서 적립금 5만원 탔습니다.

영어책이 궁했는데, 얼른 사버렸죠.

요번에는 알라딘 편집부에서 서평단을 모집했는데,

'살아있는 교과서 시리즈' 중 '세계사 교과서'였습니다.

'살아있는 한자 교과서' 소문을 잘 들었지만 읽어보진 못했죠.

좋은 기회여서 응모를 했더니 선정됐어요.

두 권짜리 책인데, 출판사를 통해서 보내준다는 거에요.

열심히 읽고 리뷰를 써야 하는데,

읽고 싶던 책 공짜로 얻어보게 생겼으니 그게 어디에요.

이런 게 소소한 즐거움인 것 같습니다. 기뻐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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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서평단 발표]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책 받으실 분입니다.

안녕하세요,

알라딘 편집팀 김현주입니다.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서평단 모집에 많은 관심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책 받으실 10분 입니다.

깍두기 님
데메트리오스 님
로자 님
마립간 님
미나리 님
서림 님
승주나무 님
詩我一合雲貧賢 님
연두빛나무 님
chamna 님

선정되신 분들은 '서재주인에게만 보이기' 기능을 이용하셔서 댓글에 1. 이름 2. 주소 (우편번호 반드시 포함) 3. 연락처를 남겨주세요. (11월 19일 오전까지 댓글을 달지 않으시면, 가장 최근에 주문하신 주소로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다음주 초까지 <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 1권과 2권을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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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반가운 기사를 접했다. 법원이 반민족법안을 주저하고 있는 국회에 입법을 촉구하는 판결을 낸 것이다. 친일파 후손의 등기말소소송에 대해 각하 판결을 내렸는데, 아직 헌법 차원의 법적 처리가 되지 않은 과도기적 시점을 이용한  소송이어서 법안의 입법 여부 이후로 판결을 유보한다고 밝힌 것이다. 담당판사는 이 판결로 인해 이와 유사한 소송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에 대한 물음 법률적 판단은 판사의 독립적인 영역이므로 영향을 미칠지 여부를 가늠할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친일파 후손 ‘땅’ 찾기, 재판청구권 일시정지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친일파 후손에 대해 토지반환소송 자격을 잠정 중지하는 판결이 나왔다.

수원지법 민사2단독 이종광 판사는 15일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 이근호의 손자(78)가 “조부가 일제로부터 받은 경기 오산시 궐동 땅 737㎡를 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유권보존등기말소등기 소송을 각하했다.

이판사는 판결문에서 “이 사건 소는 3·1운동 정신을 계승한 헌법이 다른 법체계와 충돌, 모순되는 상황에서 사법기능의 혼란과 공공복리 위협을 초래한다”며 “이같은 위헌적 법률상태가 입법으로 해소될 때까지 이 사건에 대한 재판청구권의 행사를 일시 정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특히 이판사는 “원고는 이 사건 토지소유권이 헌법이념상 허용될 수 없음을 알았거나, 국회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환수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돼 있어 그같은 상황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며 “이 사건 제소는 현재까지 이 사건 토지소유권에 대한 제한입법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악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원고의 조부 이근호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으로 1910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와 은사금 2만5천엔을 받고 대한삼림협회 총재로 일제의 임야조사사업에 관여했다.

원고 이씨는 현재 이 사건을 포함, 모두 12건의 토지반환 소송 낸 상태다. 친일파 후손의 토지반환 소송에 대한 각하 판결은 이번이 두번째로, 2000년 서울지법이 친일파 이재극 후손이 낸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각하했으나 상급심에서 파기환송된 바 있다.

〈경향신문,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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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두칠성이 말하기를-강정구 소동과 노벨상 수상자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

런던 태생 극작가 해롤드 핀터가 금년치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에 대한 영국 언론, 문단, 연극계의 반응은 환영 일색이다. “꼭 받아야 할 사람,” “탁월한 선택,” “너무도 적절하고 훌륭한 결정” 등등의 기사와 논평으로 신문들은 이구동성 핀터의 업적과 노벨위원회의 결정을 칭찬한다. 칭찬의 요지는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가 이번에는 “제대로 찍었다”는 것이다. <가디언> 신문의 한 논평자는 “늘 엉뚱한 작가에게 잘못 상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노벨위원회가 이제 그 빼어난 명성 덕에 구출받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핀터가 수상 통보를 받고 있던 지난 13일 낮 12시, 영국의 한 방송이 “극작가 해롤드 핀터가 사망했다”고 보도했다가 잠시 뒤에 “아이구 아니네요, 노벨상을 받았답니다”로 수정하는 촌극도 벌어진다. 그 며칠 전 75살의 핀터가 더블린 방문길에 넘어져 입원한 일이 있는데 방송이 잘못 알고 오보를 낸 것이다. 즐거운 날에는 오보도 유쾌하고 반응도 유쾌하다. 핀터 왈, “덕분에 난 죽었다 살아났지 뭐야.”


나는 지금 노벨문학상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해롤드 핀터가 유쾌한 오보로 죽었다 살아나 유쾌한 농담을 던지고 있을 시간, 동양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어떤 일 때문에 사람들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북두칠성에 고하려는 게 내 관심사다. 한 대학 교수가 썼다는 몇몇 칼럼의 내용을 놓고 온 동네 시끄럽게 벌어진 실랑이가 그것이다. 이른바 ‘강정구 사건’이라 불리는 그 실랑이의 내용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어서 여기 재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록을 위해 강 교수 고발자와 비판자들의 주요 주장을 적자면 대개 이러하다.


강 교수의 글은 ‘김일성과 북한을 고무찬양’하면서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미국을 ‘주적’으로, 맥아더를 ‘원수’로 규정한 명백하고도 용인할 수 없는 반국가적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강 교수는 ‘마땅히 구속수사 해야 할 공안사범’이고 ‘현행범’이다. 그런데 그 현행범을 잡아넣어 수사하겠다는 검찰에 대고 법무장관이 ‘불구속’ 수사를 지시한 것은 또 뭐냐, 검찰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북한을 찬양 추종하는 세력들을 용인하자는 거냐, 그런 장관은 당장 해임해서 집으로 보내야 할 것 아니냐?


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애국심과 충정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 애국심은 북두칠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천지개벽 이후 지금까지 일곱 개의 반짝이는 눈으로 이 지상에 일어난 모든 일과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보아온 북두칠성 아닌가. 그러니까 이럴 땐 그 북두칠성에 자초지종을 고하고 자문을 구하는 것이 좋다.


 “칠성님, 강 교수가 국가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했다고들 하는데, 잡아넣어야 합니까?”

북두칠성이 눈을 깜박이다가 대답한다.

“설혹 부정했다고 해도 다 수갑을 채우는 건 아니지, 이 미련한 친구야.”

“어째 그렇습니까?”

“몰라서 물어? 삼신할미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걸 낳았을 때부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지 않았느냐?”

“자유민주주의는 삼신할미가 준 것이 아니고 인간이 만든 인간들끼리의 약속인뎁쇼?”

“인간들끼리 약속한 것이 곧 하늘과 약속한 것이니라.”

“자유민주주의라 해도 체제를 부정하는 자유까지 허용하는 건 아니라는데요?”

“체제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자도 관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다. 그게 그 체제의 짐이고 영광 아니더냐? 그 짐을 질 자신이 없거든 일찌감치 걷어치워라. 너희가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안달이냐?”


칠성의 이 대답은 충격적이다.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들인데 설마 그럴 리가?

“그럴 리 없죠, 칠성님. 북한과 같아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려다 보니까….”

“자유민주주의의 알맹이를 빼고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너희들의 특징이야. 너희가 전부터 헛껍데기 쭉정이만 쥐고 놀더니 아직도 그 버릇 못 버렸구나.”

“아닙니다. 쭉정이는 싫고 삼팔광땡이 좋습니다요.”

“삼팔광땡을 쥐려거든 남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어떻게 하는지 보고 좀 배워라.”

“체제가 위협당해도 가만있어야 합니까? 그게 삼팔광땡인가요?”

“아니지. 위협 당하면 맞서고 막아내야지.”

“그러면 강 교수를 잡아넣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정구가 체제를 위협할만한 조직과 수단을 가지고 있더냐?”

“가족이 있지요. 펜도 쥐고 있고.”

“가족만 데리고 체제 엎는 놈 봤냐? 펜이 힘을 갖는 건 많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움직일 때야. 강정구 펜이 그렇게 세냐? 그가 폭력꾼이냐? 내 보기론 그 친구, 파리 한 마리도 제 손으로는 못 때려잡을 위인 같던데?”


파리 한 마리도 제 손으로 못 때려잡아? 들어본 소리 같다. 영국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에 나오는 토비 아저씨, 그렇다. 그가 그런 위인이다.

“아이구 칠성님, 그건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죠. 강 교수는 허구가 아니라 실제 인물입니다.”

“한국이 인권국가로 올라서는 건 돈 몇 푼 더 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야. 너희 나라 인권위원회가 애는 많이 쓰더라만, 너희가 인권국가로 존경받자면 아직 한참 멀었어. 그런데 이 판에 백면서생 하나 잡아넣어 동네 망신 하고 싶은 거냐? 아까 자네 해롤드 핀터 얘길 하는 것 같던데 그 핀터가 누구냐? 자네도 영국 사정 좀 알 것 아닌가.”


핀터가 누구냐고? 스물아홉 편의 희곡을 쓰고 또 그만큼의 영화대본을 쓴 사람, 상 받았다고 온 영국이 축포 터뜨리고 ‘아주 아주 영국적인 작가’라며 영국 신문들이 떠들어대는 사람, 그가 핀터다. 그런데 그 핀터는 격렬한 반미주의자, 영국비판자, 전쟁 혐오자, 조지 부시를 ‘인간 백정’ ‘대량살인광’이라 부르고 자기 나라 수상 토니 블레어에게 ‘얼빠진 백치’라는 칭호를 준 사람이다. 우리라면 골백번도 더 감방에 처넣었을 그 핀터를 ‘아주 아주 영국적인 작가’라며 추어주고 존경하는 것이 영국이다. 영국인들은 아무래도 제 정신 아님이 틀림없다. 그 핀터를 두고 “인권을 위해 싸워온 사람” “억압의 닫힌 문을 박차고 들어간 사람”이라며 상을 준 노벨위원회도 제 정신 아님이 틀림없다. 그 핀터가 “미국의 히스테리, 무지, 오만, 우둔성, 호전성”을 노상 비판했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뉴욕타임스>도 정신나간 신문임에 틀림없다. 이런 것이 자유민주주의고 그 체제의 활인지계(活人之計)다. 무엇이 나라 망치고 사람 숨통 조여 창조의 힘을 고갈시키는지, 우리나라 애국자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정일(문화평론가/경희대 교수)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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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는 인도 국민들을 영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으로 이끌고 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인들에 대해 강한 적대감을 갖기 시작할 때면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러분들이 이 적대감을 극복할 때까지 그만두시오. 여러분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계속해 나가지 않을 것이오. 우리가 그들에게 계속해서 대항할 수 있는 때는 오직 여러분들이 영국인을 더 이상 증오하지 않을 때뿐이오.”


 - 영어 문제집 중에서

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적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적에 대한 증오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에게 사로잡혀 있으면 똑바로 볼 수 없다. 어떤 전쟁이든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곳을 찌르는 것이 승리의 열쇠이며, 상대를 나의 예견 안에 가두는 것이 승리의 전략이다. 대개 강자나 침략자는 상대방이 완전히 나의 역량과 사고 안에 들어왔을 때 삼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상대가 나의 사고를 넘어서 뒤통수를 때릴 때 당황해서 자멸하기 마련이다.

결국 전쟁은 자멸과의 싸움이다. 누가 먼저 스스로 무너지느냐에 따라 승부가 갈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가 승부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로지 하나의 빛나는 자세로 대응할 때 적군은 승패를 잊어버리고, ‘전쟁’ 자체에 대해 몹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부끄러움은 역사에도 새겨지므로, 결국 전쟁이라는 것은 당시의 승패와는 관계없이 두고두고 이야기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겨루어야 할 상대는 그 뒷이야기이다.

동서양을 아울러 모든 전쟁이 명분을 살리려 했던 것도, 그들이 다루는 대상이 적군에 국한되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삶도 전쟁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겹도록 부딪치는 현실이나 ‘관계’를 넘어 그 ‘오래 남게 될 이야기’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너무나도 졸전을 펼치는 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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