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또 읽고

"중국의 고대 왕조인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은 공자가 가장 존경한 인물로 성인 중의 성인으로 칭송을 받는다. 하지만 그에게 한 가지 씻을 수 없는 죄과가 있다. 바로 형제를 죽인 것이다. 주공은 어린 성왕(成王)을 보좌해 수렴청정하고 있었는데, 왕위를 탐낸 두 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부득이하게 이들을 처형시킬 수밖에 없었다. 법에 따라 죄인을 처단한 것이지만, 형제를 죽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두고 '(성인이)때를 잘못 만났다'(逢時不幸)고 회상한다."




<시사저널의 고재열 기자(오른쪽)가 짝퉁 시사저널 1호(통권 899호)로 만든 영정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나는 파업기자들이 쓴 책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출판사)을 좋아한다. 몇 번 반복해서 읽어봤음에도 여태껏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이 책이 언론에 대한 나의 오랜 불신감을 달래 주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무시무시한 중동 땅을 가로질렀다는 전설적인 기자(백승기 기자), 미래가 보장된 명문 공대를 자퇴하고 오로지 시사저널 기자가 되기 위해 학교에 다시 들어간 이상한 기자(신호철 기자), 펜만 떼면 기관원처럼 보이지만 기관원보다 '그 바닥'을 더 잘 아는 기자(남문희 기자), 입사가 올해로 18년인데 17년 동안 한 가지 주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대한민국 탐사보도 모델'을 만들어낸 집념가 기자(정희상 기자), 유력 정치인에게 받은 촌지를 만연필로 돌려보냈다던 당찬 기자(이숙이 기자) 등등. 기자들의 온갖 열전은 독특하다 못해 상상초월인 데다가 편집부 전체가 고집스런 전통을 가지고 있는 생생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몰래 즐겼다.

 

오늘 mbc PD 수첩을 앞두고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달라진 것도 아니고 그때의 감동이 달라진 것도 아닌데,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기자들은 때를 잘못 만난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마음이 문득 스쳤다. 대한민국은 아직 이런 맑은 정신을 가진 기자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장자가 호접몽을 꾸었듯이, 대한민국은 18년간 시사저널이라는 단꿈을 즐기다 깨어버린 건 아닐까.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은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갔다. 보들레르가 그랬고, 스피노자가 그랬고, 공자가 그랬다. 시사저널 기자들도 그 길을 갈 것인가. 먼 미래의 기자들이 긴 꿈에서 깨어나 무너진 언론을 일으키는 단초로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독자로서 용납할 수 없다. 조금 격앙된 마음으로 TV를 틀었다.

이럴 수가.

찢기고, 뜯기고, 목 졸리고. 무엇보다도 기자 5명의 명퇴각서를 가져와서 무릎꿇고 사과하면 복귀시켜주겠다는 굴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회사측의 모습에 분노가 끓었다. 단식 농성장을 지나던 회사의 핵심 간부는 '생생하네'라는 한마디로 단식을 제대로 한 거 맞느냐는 의심을 노골적으로 쏟아붓고는 떠나버렸다. 방송은 내내 '희망'을 말하기를 잊지 않았지만, 내 눈에는 이상하게 슬픔과 절망의 모습만 보였다. 아무래도 우울증 치료를 받아봐야 겠다.

 

하지만 조그만 변화, 그러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변화가 생겨났다. 2만원 3만원 소액의 후원금을 보내주는 '개미군단'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몇 자 담을 수 없는 '입금정보'에는 짧지만 강한 메시지를 각각의 목소리로 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미안하고 가장 두려운 가족들이 오히려 포기하지 말 것을 권려했다.

"기자들은 순수하게 사랑을 지켜왔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를 바란다."(한 기자의 가족)

1년 동안 시련을 겪은 기자들은 오히려 단련되었고 1년 전의 원칙은 더욱 굳건해졌다. "문제제기를 한다면 경영상의 불이익을 감당하는 것으로 그치지만,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면 시사저널 자체가 죽는 것이다."(남문희 기자) 시사저널 기자들은 세상의 언론이 다 틀렸다고 과감히 주장한다. 세상이 다 취해 있고 오로지 나만 깨어 있다던 시인 굴원처럼.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언론은 '시대착오(時代錯誤)'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독자는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언론의 고집을 지켜온 시사저널 기자들이 때를 잘못 만난 것인가, 아니면 대다수의 언론들이 시대를 읽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이 한판 승부를 바라보는 독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힘겹게 두 번째 싸움판을 시작한 시사저널 선수들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2002년의 붉은 물결처럼 일렁인다. 시.사.저.널. 짝짝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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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7-07-0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어제 널 생각하며 보았다. 그전부터 네가 여기에 몇편의 시사저널 사태를 올렸잖아.
보면서 난 참 무심했구나 했어. 그리고 우리나라는 선진국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07-06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좀머 씨는 바틀비 씨와 쌍둥이 같다.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소설에서 만나면 꼭 인사를 해야겠다

그렇지만 아무도 좀머 씨를 봤다거나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2주일이 더 지난 다음 리들 아줌마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하기로 했고, 그 후 몇 주일이 지난 다음 신문에 아저씨를 찾는 광고가 아무도 그 사람이 좀머 아저씨란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아저씨의 여권용 사진과 함께 나왔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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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유명한 중편소설 《변신》을 읽고 놀랐던 점은 그레고르 잠자가 그렇게 흉측한 벌레가 되었는데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말했다. "지금 나는 방에서 유령을 보았어요."

"마치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불쾌하게 말하시는군요."

「불행」


<나>는 유령을 본 것을 "수프 속에서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하지만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유령이 나타나더라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의 원인과 불행의 본성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할 여유도 가지고 있다. 불행 또는 유령의 잦은 방문이 《변신》과 연결되는 지점이 독특한데 《변신》의 경우는 카프카의 몸으로 방문했다. 집이 아니라!


불행의 방문이 잦았던 것처럼 그들이 나누는 대화도 익숙하다. 마치 오래되었만 언제나 적응이 안 되는 관계처럼. 흥미로운 건 불행이 아이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왜 아이의 모습이었을까? 그것도 소녀의 모습으로.


"나는 아이입니다. 왜 그렇게 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마음을 쓰십니까?"

"그리 마음 상하진 마세요. 물론 당신은 아이입니다민 그렇게 어리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이미 어른입니다. 만일 당신이 소녀였다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나와 한 방에 틀어박혀 있지는 못할 것입니다."

「불행」




소녀를 의인화한 「불행」은 '죽음'을 의인화한 그림책 『오래 슬퍼하지 마』를 생각나게 한





집과 몸은 연관이 깊다. 미디어 전문가 마셜 매클루언이 "집은 몸의 연장"이라고 말한 것처럼 나만의 사적 공간이자 안정적인 재생산의 장소인 집에 불청객이 방문한 것은 몸이 흉측한 괴물로 변신한 것과 연장선상에 있다. 집에 방문한 불행이라는 손님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방문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불행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불행이 '세게' 상처를 내는 것보다는 사소한 스크래치 정도로 넘어가 줬으면 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불행의 경우 운명의 서슬퍼런 명령이기에 불행도 어쩔 수 없겠지만, 불행 스스로가 결정할 있는 내용물이라면 협의나 흥정도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둘은 오랫동안 불행의 견적에 대해서 협의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의 본성은 나의 본성이며, 내가 원래 당신에게 친절하게 대할진대 당신도 그렇게 할 도리밖에는 없을 텐데요."(<나>)

"그게 친절한 것입니까?"(불행)

"나는 전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나>)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불행)

「불행」


암 투병중인 중년의 사나이가 도서관의 논어 읽기 모임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암세포가 있는 부분을 손으로 다독이면서 인사를 한다고 말했다. 나에게 찾아온 암이라는 불행과 매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불행은 안 만나면 좋겠지만 누구도 불행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때로는 흥정을 해야 할 일도 있다. 불행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경우 말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불행을 이해하게 되는데, 그 원인이 나와 연관돼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와 완전히 상관 없는 불행도 있을 테지만 내가 일으킨 날갯짓이 불행을 부른 경우가 더 많다.


카프카는 왜 어린 소녀를 불행의 전령으로 택했을까? 불행이 사뿐히 걸어 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서였을까? 불행이란 게 앞문을 닫으면 뒷문으로 들어오는 날렵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오래 슬퍼하지 마』의 죽음보다는 어리고 가벼워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 같다. 불행이 떠나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기분으로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조용히 산책을 하려고 했으나 외출은 하지 않고. 불행이 전혀 방문하지 않는다면, 불행이 나를 완전히 떠나버린다면. 카프카는 불행의 의미에 대해서 나에게 다시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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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모든 작품에 어버지의 메타포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주되었다. 카프카는 형이상학적인 아버지를 그려냈다. 나는 어버지의 상상력을 사회 전체로 넓히던 와중에 토론이라는 무기를 발견했다. 토론이 자라는 곳에서는 아버지의 독재가 약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아버지의 말에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말을 입 밖에 낸다는 건 있을 수 없었지요.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동의하시지 않거나 먼저 말을 꺼내시지 않은 일에 대해 함부로 말을 한다는 것 다체가 아버지한테는 아예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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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단편 또는 손바닥소설을 보면서 즐거운 것은 카프카 장편의 실마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성, 소송, 실종(아메리카))과 대표작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의 기억이 워낙 강렬해서 단편에서 비슷한 부분을 만나면 내 감각 센서가 벌써 알림을 울린다. 내가 『성』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대표작으로 부르는 까닭은 카프카가 모든 주요 작품을 쓰고 나서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 바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이며, 카프카의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고독의 3부작을 한 권으로 압축해놓은 것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인 것이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는 영업 사원이었다. 영업이 좋은 날은 다른 직원들보다 몇 배씩 월급을 가져가지만 안 좋은 날은 기본급이 너무 적어서 불안정했다. 퇴로가 없는 삶에 질려 버린 잠자는 그대로 벌레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승객』의 승객은 잠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행을 가는 승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교통수단에 탑승하는 승객이기 때문이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다. 이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나의 가족에게서 나의 처지를 되돌아볼 때 나는 정말 불확실하다. 더군다나 내가 어떤 방향에서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요구에 어떤 것들이 있을지, 나는 임시로라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승강장 위에 서서, 고리에 의지하고 있는 것도, 전차에 몸을 내맡긴 채로 서 있는 것도, 사람들이 전차를 피하거나 혹은 조용히 가거나 혹은 진열장 앞에 멈추어 서든 간에 어쩔 수가 없다 ㅡ 물론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승객』


도입부만 놓고 보면 「승객」과 『변신』에서 별다른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승객」에서는 다른 승객, 전혀 다른 승객이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나'는 전차 승강장 위에 서 있고, 소녀는 막 전차에서 내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전차와 한몸인 것처럼 전차의 벽에 기대거나 만진다. '나'가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소녀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순간'은 어떤 목적으로 가기 위한 정거장이거나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녀는 '순간' 자체가 목적으로 보인다. 순간에 집중하고 순간을 즐긴다. 순간과 하나가 되고, 순간을 빨리 뛰어넘어 어떤 목적지로 가려는 의지 자체를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전차는 의미 없는 공간이고, '승객'이라는 존재는 단지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 전차의 규칙을 따르는 임시 존재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전차에서만 임시 존재인 것이 아니라, 처지 자체가 임시적인 존재다. 그리고 '나'는 임시인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자괴감을 느끼기까지 한다. 나는 원래부터 임시였던 것일까? 도대체 내가 있는 지금 이 순간과 전차 승강장이라는 공간은 왜 의미가 없는 것인가? 나는 왜 지금과 이곳에 의미를 둘 수 없는가? 명령과 목적이라는 압박에 자석처럼 끌려가기 때문이다. 자력이 너무 강해서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날이 하루 하루 쌓이면 '임시'라는 것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고 말 것이다.


어린이 수업을 하면서 카프카가 「승객」에서 소녀를 본 '나'의 모습을 느낀다. 나도 어린이처럼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예전에는 임시라는 꼬리표를 떼어내려고 노력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상관 없다. 임시는 임시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니까. 어떤 명령이나 의무, 직업, 목적이 아무리 강력한 자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끌려가고 있는 이 순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 느낌이 사라지면 카프카의 벌레라는 또 다른 압력이 나를 기다린다. ‘이모셔널 리터러시’(emotional literacy)! 자신의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해야 무기력과 폭력의 연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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