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움직이게 만드는 힘 프리 윌
박원순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실패한 진보세력, 박원순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 박원순 강연과 그의 책 <프리윌>을 통해 알아본 진보의 가능성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이명박 후보의 과반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국민들은 이제까지 '진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해온 정치세력들에게 '가짜진보'라는 엄정한 평가를 내렸다.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가 지난 1월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와 함께 실시한 ‘2007년 유권자 성향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의 이념구성은 진보와 중도를 합해 63.9%에 이르렀다. 중도 실용주의가 두터워지기는 했지만 보수 이념이 50% 가까운 당선자를 만들어낼 만큼 강성하지는 않았다. 이는 유권자들이 '현재의 진보'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라는 시각을 반영한다. 민노당의 몰락도 유의미한 현상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의 결집에도 불구하고 2002년 대선 95만7148표(3.9%)라는 선전을 했던 민노당 권영길 후보는 이번 대선에서 유권자 확대와 결집도 완화라는 자유로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71만1715표(3%)라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받아 '진보세력의 죽음'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진보라는 이름을 처음부터 다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자면 역할모델이 필요한데 마침 '아름다운가게'의 5년 성과를 정리하는 박원순 씨의 저서 '프리윌'이 출판됐다. 때에 맞춰 열린 박원순 씨의 북세미나 강연(2007년 12월 17일, 교보문고)의 녹취록과 <프리윌>의 서평을 통해 '미래의 진보'를 위한 과제를 정리해 보았다.


 



1. 영업자 마인드 - 자세를 낮추고 서민의 언어를 쓰라

아름다운 가게는 2002년 안국1호점이 개장된 이래 현재까지 102배의 성장을 거뒀다. 전국적으로 84개의 지점을 개설하고 판매익은 100억원대에 달하며, 180여명의 상근 간사와 5,0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멈추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라는 다소 생소한 모델을 성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경력과 무관하게 박원순 상임이사는 시종 자세를 낮췄다. 그의 모습을 보고 필자는 영업 직원의 절실함과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배고픔'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채용하고 있는 간사들에게까지 영업을 한다. 이사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자신을 '원순 씨'라고 부르는 게 얼마나 친근해 보이느냐며 간사들을 압박하는 모습이 그의 책 곳곳에 스며 있다.

"소품이 필요하다면 의뢰해 주세요. 전국의 지점망을 탈탈 털어서라도 찾아낼 수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말고 기부해 주세요."
"만약 인생의 목표를 아직 잡지 못하는 젊은이가 있다면, 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누구나 환영합니다. 하지만 월급은 좀 적을 겁니다.(웃음)"(강연 요지)





<박원순 변호사는 2시간 가까운 강연시간 동안 낮은 자세와 유행가 같은 비근한 언어 사용으로 보통사람인 청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강연의 내용에서도 지식인의 냄새가 나지 않는 비근한 언어사용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강연에서는 사투리 제목의 책을 예로 들며 친근하게 다가가기도 하고("혼자 살면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혼자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도 있지 않아요") 누구나 아는 관용구를 이용해 뜻이 잘 이해되도록 배려했다.("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요") 그의 책 <프리 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사람은 '정'에 약하다. "그놈의 정 때문에"라거나 "정은 죽지도 않아" 같은 유행어도 한국에만 있는 말일 것이다."(책 117쪽)

그것은 전문적 지식인, 특히 아직도 어려운 용어를 밥먹듯이 쓰는 '법조계' 생활을 했던 사람에게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현장의 땀냄새가 그대로 보이는 듯했다. 그렇다고 아주 대중적으로 쏠린 것도 아니다. 비근한 용어를 사용하되 던지는 메시지는 심오했다.

"공공장소에서도 유리문을 열고 들어갈 적에 뒤도 쳐다보지 않고 손을 놓아버리기 때문에 뒤에 오던 사람들이 문에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뒤에 오는 사람이 없는지 조금만 기다려주고 뒤에 있는 분은 '고맙습니다' 하고 감사를 표시하는 문화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강연 요지)

동양 유학의 기본 교재인 '대학(大學)'이라는 책에는 학문하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해 놓았다. 즉, 지도자가 몸소 행동하고 마음으로 터득하고 남은 것들을 자신의 근본으로 삼고, 결코 백성들의 일상이나 상식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皆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요 不待求之民生日用彛倫之外라<대학 서문>) 박원순 이사는 경전의 기본정신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허황한 구호나 어려운 관념만을 되풀이하며 대중의 외면을 받은 진보 세력들에게는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는 대목이다.



2. 역지사지 - 서민의 처지를 깊이 고민하라

박원순 상임이사에 의하면 '아름다운가게'는 고물상이다. 고물상으로 100억을 벌 수 있을까 의아해할 수 있지만 왜 헌 물건을 소재로 삼았는가를 따져본다면 아름다운가게를 세울 적의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가게가 지향하는 나눔과 순환의 가치는 그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나눔과 순환의 실천을 위에서가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부터 하자는 운동이 바로 아름다운가게의 탄생설화이다. (책 83~84쪽)

경향신문이 10월 8일부터 11월 29일까지 특집기획 <'사회적 기업'이 희망이다>에서 소개한 사회적 기업의 면면을 살펴보면 아름다운가게가 왜 고물상을 사업아이템으로 삼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경향신문의 기획에 따르면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에까지 건너간 '빅이슈'는 노숙자들에게 잡지판매 대행권을 주고 자립할 수 있게 한 사회적 기업이다. 역시 영국의 ‘브롬리 바이 보 센터(BBBC, Bromley By Bow Center)'는 정원 관리와 목공 수업 등 5개 프로젝트를 통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됐다. 프랑스의  ‘레소 플뤼(Reseau-plus)’는 노인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이동과 목욕, 식사를 돕고 말동무도 되어주는 돌보미 서비스이다. 스코틀랜드의 포스섹터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자는 목적에서 1990년 설립됐는데 주로 자수 서비스, 세탁소, 음식 배달, 비누가게 등을 사업체로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이란 본질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업'이어야 한다. 세계의 유명한 사회적 기업들이 세탁이나 자수 등을 주요 업종으로 선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프리윌>에서 글쓴이는 사회적 기업이 가져야 하는 자세를 친구들의 입을 빌려 분명히 설명했다.

"미국의 사회적기업인 루비콘 관계자는 '우리는 빵을 팔기 위해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용하기 위해 빵을 팝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7쪽>

"사람들이 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경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강의실 안에서 보호받은 채 모든 해답을 다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오만한 일임을 깨달았죠. 나는 가난한 이들을 스승으로 삼겠다고 결심했습니다."<유누스 그라민 은행장의 말, 220쪽에 재인용>





<박원순 이사는 대중들과의 스킨십과 세심한 배려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강연이 끝나고 펜 사인회를 할 때는 직업을 물어보고 그에 맞는 문구를 고민해서 정성스레 기록하고 밝은 표정으로 책을 돌려주었다> 

 

3. 아름다운 정체성 - 모순을 피하지 말고 그대로 뚫고 가라

"아름다운 가게는 참 모호한 존재다. 매출과 효율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효율적인 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 매출을 자꾸 이야기하게 되는데, 어떨 때는 ‘장사하러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다. NPO(비영리단체)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반대로 합리성과 효율성에 소홀할 수밖에 없다."(강연회)

<프리윌>에는 박원순 이사가 '아름다운가게'를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눈물겹게 묘사돼 있다. 그는 강연회에도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그것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가게는 박원순 이사가 1991년 영국에 거주할 때 옥스팜이라는 헌 물건을 취급하는 가게의 시스템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서 추후에 구체화한 사업이다. 역할 모델을 확고히 하기 위해 17박18일의 해외 벤치마킹을 다니며 구세군과 굿윌의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조직망과 운영 시스템, 실무 노하우들을 서캐훑이하듯 메모해 왔다. 구세군 매뉴얼을 얻기 위해 벌였다던 일명 '007작전'은 책에도 강연에서도 모두 소개되었는데 구세군에서 매뉴얼을 협조하는 데 매우 조심스러웠기 때문에 각자 조금씩 본 것을 기억했다가 숙소에서 짜맞추는 식으로 신규가게를 열 때 필요한 한 달 전의 체크포인트, 일주일 전의 체크포인트, 3일 전의 체크포인트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점검사항을 챙기고 나서 아름다운가게를 시작했다.

박원순 이사에 의하면 사회적 기업의 성공 조건은 공익적 가치만을 가지고는 모자라며 기업적 가치만 가지고도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짜 공익적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일반 기업 못지 않는 치밀하고 철저한 영업 전략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기업의 논리만 받아들인다면 일반기업이 되기 때문에 '사회적 기업'으로서 정체성을 소중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프리윌>에서 그 사례를 세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특징적인 것을 몇 가지 소개하면, 일반 회사에서 재고품을 최소 가격으로 넘겨주겠다는 속칭 '땡처리' 제안이 왔을 때 이 문제를 심각하게 논의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거부'였다. 이유는 물건을 싸게 사와 판매한다면 그것은 일반 장사꾼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어느 지점에 도난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하지만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절대로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취지와 목적은 그에 걸맞는 아름다운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박원순 이사에게 직접 물었다. 아름다운가게라는 몸으로 따지면 우리나라의 허파와도 같은 소중한 존재이며, 사회적 기업의 자랑스러운 모델이지만 '나쁜 공기'가 너무 많아 허탈하다고. 삼성비자금 사건으로 불거진 재벌독재 문제나 노동자 탄압, 무리한 FTA 문제 처리 등 나쁜 공기가 너무 많다고. 박원순 이사는 마치 'BBK 특검 논란'에 대해서 사자후를 던지듯 대답했다. 그의 대답을 결론으로 삼아도 좋겠다.


"다양한 것이 아름답다. 우주를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려지는지는, 우주를 어떻게 그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시민단체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재벌기업, 대기업의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부정적인 부분만 고치려 하기보다 있었으면 하는 것을 만드는 것, 이른바 포지티브의 역할이 그래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개척 영역을 자꾸 개척해야 한다. 우리나라 직업의 가짓수가 일본의 절반이라고 한다. 이 말은 뒤집으면 아직도 만들 직업이 대기업의 문제는 문제대로 고치고 포지티브한 부분을 자꾸 만들어가야 한다."(강연 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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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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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제목 : 관용열린사회 
저자 : 김용환 지음
출판 : 철학과현실사 | 1997.08 


나는 '관용하는' 사람(관용인)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관용에 대해서 심각한 질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사실상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질환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사람에 따라서 수년에서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내가 서두부터 이렇게 비관적으로 운을 떼는 이유는 수천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몇몇 사람만이 '관용의 자격'을 스스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사람, 이를테면 장자나 이탁오 같은 사람들만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에 갇혀 살았다. 일례로 '사생활'이라는 말도 동양에서는 생소한 개념이다.
이것이 얼마나 생소한지를 설명하는 예화가 있다. 조선 시대의 '왕'은 사생활이 철저히 봉쇄당하는 불쌍한 존재였다. 심지어 간밤에 몇 번째 궁녀와 잤는지까지 기록될 정도였다. 우리에게 사(私)라는 것은 항상 공(公)과 상대되는 의미이며,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들이 정신에 비해서 '육체'를 하찮은 것으로 평가절하한 현상과 일맥 상통한다.
이 글은 책에 대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종알대기보다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1. 관용의 사전적 의미는 버려라

   
  관용03 (寬容)
「명」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 또는 그런 용서. ≒아용(阿容). ¶관용을 베풀다/이번 한 번만 관용을 베풀어 주시면 개과천선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습니다.§<국립국어원>
 
   


'관용'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매우 재미 없는 녀석이다. 대부분 '목적어'로 사용되며, 그 수법도 '관용을 베풀다'는 식의 뻔한 관용구만 즐겨 활용된다. 때문에 우리는 '관용을 베풀다'는 뻔한 표현보다도 '아량을 베풀다'는 보다 근사한 표현을 사용한다. '관용'은 '베풀다'에 갇힌 단어이다.
관용이 목적어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관용하다'라는 동사 역시 표제어에 등록돼 있다.

   
  관용-하다02
「동」【…을】 =>관용03. ¶상사는 때에 따라 부하의 잘못을 관용할 줄도 알아야 한다.§<국립국어원>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뜻은 나오지도 않았고 위의 관용03을 찾아보라고 안내만 써 있다. 그리고 예시 역시 '관용을 베풀다'형으로 썼다. 글쓴이는 '관용'의 출발을 '우리 모두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하자고 하였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는 '국어사전'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사전적 의미에서 확인한 것과 같이 우리나라에서 '관용'이라는 말은 권위주의의 가치를 담은 별 의미 없는 수사라고 할 수 있으며, 일종의 편견이다.
나의 사전에서 관용이라는 말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해방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관용을 권위자의 행위로만 인식했다. 사실 관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권위자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2. 조작된 공포감이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 휴전선을 놓다.

 

관용은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것이다. 자신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타협의 자세를 가지고 상대를 대등하게 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등한 관계라면 분명히 자신이 양보를 해야 할 지점이 생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기득권 중에서 공자의 아래와 같은 비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자가 말했다. 비루한 무리들과 어떻게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무엇을 얻거나 이루지 못하면 그것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며, 이미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하고 있구나. 만약 그들이 그것을 잃을까 노심초사한다면 세상에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 <논어, 양화편>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與,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苟患失之, 無所不至矣. 」
 
   

전쟁 이후로 우리는 불관용에 갇힌 상태가 되었다. 상실과 좌절, 패배, 틀림은 관용으로 가지 못할 정도로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는 당연히 안정되지 못한 상태, 만족하지 못한 상태, 갈등이 증폭된 상태이다. 사실 이것은 기득권의 논리인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왠만한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읊고 다니며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이에 비해 관용은 자유의 상태, 대등한 상태, 안정된 상태, 합의된 상태, 갈등이 해소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것이 불관용과 관용의 거리이다.
이것은 비단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개인'의 차원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오직 인자만이 누군가를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 <논어, 이인편>
子曰:  「唯仁者能好人, 能惡人. 」
 
   

관용은 개인에게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는 개념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매우 관용적이기 마련인데, 스스로에게 철저히 불관용하는 것이 관용을 실천하는 첫 번째 계단이다. 특히 관용은 '관계'를 전제한 용어이기 때문에 개인이 관용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사회의 성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실 말하기는 쉽지만 스스로에게 불관용하기란 쉽지 않다. 나의 오류를 인정해야 하며, 나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1/2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궁극적인 반성을 이끌어내야 한다. 글쓴이는 이것이 어느 한쪽의 자세여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제1원리 :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 이 원리는 관용이 가능하기 위한 필요 조건이다. 나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한 타자의 의견이나 행위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간섭이나 방해 같은 부정적 행위를 자발적으로 중지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상호 호혜적인 진술일 때만 의미가 있는 원리이다. 즉 이 진술 안에는 자기 부정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이 틀릴 수 있다는 동시 반성의 고백이 함축되어 있어야만 한다. 나의 오류만을 인정하는 일방적인 진술일 경우 우리는 타자의 의견과 행위에 대해 관용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의 의견에 동의해야 할 의무만이 발생한다." <관용과 열린사회, 62~63쪽>  
   



3. 관용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라는 미덕을 붙인다고 했을 때, 끼워지지 않고 자꾸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이유는 관용을 학습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서구의 관용 문화나 발전된 합리적 사고 등을 예시하며 비판하거나 아쉬움을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불필요하거나 문제를 더욱 풀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놈팽이와 사랑에 빠진 아는 여자' 또는 그 반대 경우인 아는 남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주더라도, 이 모든 설명은 그가 '한번 대어 보는 것'만 못하다.

글쓴이는 서양에서 관용이 자리잡게 된 역사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서구의 관용 문화는 피의 반성"이라는 것이다. 엄청난 피를 흘린 후에 그 반성으로 관용의 문화가 정착되기는 했지만 서양의 종교는 아직도 '이기적인 하느님'을 신봉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양이든 동양이든 '종교'가 불관용의 본산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하지만 '관용의 종교'라는 이례적인 사례도 있다.  특이하게도 인도의 철학에서는 '다른 신'을 인정하고 있다. 바가바드기타라는 책에는 "어떠한 신자가 신앙을 가지고 어떤 형태의 신을 예배하기를 원하더라도 나는 그의 신앙을 튼튼하게 해준다"(vii. 21)는 선언이 담겨 있다. 물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완성도 있고 깊이가 있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이지만, 이런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동양의 문화를 기억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구호적으로 '관용' '관용' 하는 것이 관용에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될까? 차라리 관용이 없음으로 인해서 무자비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피해를 보는 사례들을 수집해서 이 상황에 대한 개별 해법을 고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글쓴이(김용환)가 주장하는 관용이란 한국 사회에서 선언적 의미에 머무른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고백했듯 철학자가 '관용'에 대해서 접근하기는 매우 취약한 구조다. 관용은 윤리적 문제라기보다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문제, 즉 일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해괴한 일들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불관용과 관용 사이에 간극을 좁히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동시 반성의 고백이라는 말도 이상론에 머무를 가능성이 있다. 쌍방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면 그 구조를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 이후 국방장관 회담, 장성급 회담, 총리급 회담 등이 자꾸 열리지만 협의가 쉽지 않은 까닭, 6자 회담이 매우 느린 속도로 진행되는 현재의 모습은 이를 충분히 증명한다. 만약 이 문제를 풀기를 원한다면 보다 실증적인 사례연구를 통해 성공의 사례와 실폐의 사례를 보여주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4. 관용을 '한다'는 것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관용'을 한다는 것은 수많은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말한다. 수천년 동안 쌓여 있던 고정관념을 드러내야 하고 스스로는 궁극적인 반성을 통해 관용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관용 주파수'가 호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어려운 까닭은 선교행위처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떠나서, '관용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유롭다는 뜻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너저분한 관습과 타성에서 무거운 몸을 일으켜, 몸과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먼지들을 털어내어 한껏 가벼운 상태가 아닐까? 나는 나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관용인'이 되고 싶다.

 

질문 :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관용을 실천하고 상대방의 관용을 이끌어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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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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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이 자꾸 하고 싶었던 말은 '짱돌'이나 '바리케이트'는 아닌 것 같다. 사회적 협의니 세대간 연합이니, 구조니, 시스템이니 하는 말을 자주 담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조'의 문제를 '개체'의 문제로 보려는 경향이 많다. '88만원 세대'의 문제는 상식적으로 보아도 '구조'의 문제가 맞지만, 386세대나 그 앞 세대가 '못난 놈'으로 매도하는 것은 사실 '구조'의 문제를 회피하려는 비겁한 수사에 불과하다.
당장 삼성의 문제만 보아도 그렇다.

1차 저지선은 삼성 계열사 사장이 책임진다. 구조본이 다치지 않게 하는 게 지상 명제다. 이들이 총대를 메지 못하면 최종 저지선은 김인주, 이학수 등이다.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전무를 사수하는 게 구조본의 절대 목표다.
- 시사인 9호, 12쪽,김용철 변호사 증언


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스스로 징역에 들어가더라도 절대로 지켜야 하는 지상 과제가 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구조'를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이 싸움은 '본질'과 '개체' 간의 피말리는 결전이 될 것이다. 삼성은 활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이번 사건이 개별 사건으로 처리되도록 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일신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낱낱이 드러나면 이제까지 편법, 탈법, 위법으로 만들어놓은 모래성이 다 무너지기 때문이다.

靑 “‘삼성 특검’ 수사대상 너무 광범위” 거부권 시사(기사클릭)

신당 ‘삼성 특검안’ 수정 시사(기사클릭)

'88만원 세대'에서 피해야 할 대목과 주시해야 할 대목이 있다. 피해야 할 대목은 프랑스와 영국 등 사회적 타협을 이뤄낸 나라들, 아니면 최소한 일본 같은 나라를 당장 롤 모델로 삼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우석훈은 사회적 합의를 이룬 국가들이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단 몇 쪽으로 설명하는 바람에 젊은 독자들로 하여금 현 정부와 386 이전 세대에 대해서 공분을 갖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아니라고생각한다. 사회적 협의에는 비용이 따르는데, 우석훈이 예시로 든 나라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값을 치렀다. 영국만 놓고 보자.

다가올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던 19세기를 살았던 스튜어트 밀은 '생산의 원칙'과 '분배의 원칙'이라는 두 가지 경제 현상이 공존한다고 생각하였는데, 이 생각의 단초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영국 소녀들의 노동과 임금에 대한 그의 관찰이었다. 15세 소녀들의 노동이 성인 남성에 비해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임금은 대부분 1/3 혹은 절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것을 보면서 밀은 '분배의 원칙'이라는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들이 개입한다고 보았다. <책 54쪽>

존 스튜어트 밀은 신자유주의, 그러니까 뉴라이트 계보의 가장 상위에 링크된 인물이다. 중앙일보가 예전에 뉴라이트를 홍보하러 다닐 때 그 기원을 '밀'까지 타고 올라가는 계보도를 그린 바 있다. 하지만 우석훈은 존 스튜어트 밀을 극찬하여 말하길 "경제학사를 통틀어 단 한명의 천재를 고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밀을 꼽을 것이지만, 또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을 곱으라고 해도 역시 밀을 꼽을 것"이라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자랑스런 68혁명의 세대들에 대한 예시가 소개되는 데, 386과 68세대를 매우 흥미롭게 비교했다. 68세대는 자신들의 투쟁을 사회적 협의로 승화시켰지만, 386은 한낱 허울 좋은 절차 민주주의 따위로 덮어버리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386은 샤르트르라는 지성이 부족했고, 지성의 저변도 부족했다. 이 책의 도움을 얻어 '존재와 무'라는 책을 구매하려고 했는데, 전국 서점에 모두 다 품절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구조에 한발 다가가기도 전에 두 발짝씩 퇴보하는 지금의 상황인데, 우석훈은 '인질'의 비유로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6년 동안 사교육에 붙잡혀 있던 사람들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어렵다. 당연한 일이다. (중략) 지금 막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이 완전하게 인질극이 된 6년간을 거친 첫 세대인데, 이들 중 좋은 대학에 간 소위 이 세대의 엘리트들이 대학에 드렁와서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책 224쪽>

이 구절을 보고 요즘 대학생들이 홍대 앞에서 흥청망청 세월을 보내는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상투적이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서울대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난 5월에도 서울 관악구 신림동 고시원에서 인문대 남학생이 목숨을 끊었다. 학교측에 따르면 최근 2년간 10명의 서울대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정신건강 이상을 호소하는 학생도 늘고 있다. 2004년 대학생활문화원에서 상담을 받은 학생은 190여명이었으나 2005년은 280여명, 2006년은 300여명으로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대 보건진료소에서 직접 정신과 치료를 받은 학생수도 2004년 159명, 2005년 493명, 2006년 680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올 6월까지만 해도 211명의 학생이 정신과를 다녀갔다.
- 경향신문 7월 13일자


물론 이 사건이 6년간의 트라우마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교육의 완벽한 감시 아래 있었던 이른바 한국식 엘리트들이 겪고 있는 현상은 썩 건강한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3년간 논술강사로 일했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트라우마는 학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사에게도, 학부모에게도 없지 않다.

국회 교육위 소속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이 21일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입시·보습학원 수는 2001년 12월말 1만3천7백8개에서 2006년 6월말 현재 2만7천7백24개로 5년 사이에 1만4천16개가 증가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의 1만6천6백95개와 비교해서는 1만1천29개가 늘어 66.1% 증가한 것이다. 이같은 학원 숫자는 전국 초·중·고교수 1만8백89개의 3배에 가까운 수치다.
연도별 증가를 보면 2002년에는 전년도에 비해 2,987개, 2003년 2,120개, 2004년 3,243개, 2005년 4,044개가 각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 경향신문 2006년 9월 21일자

내가 직장을 때려치우고 돈을 덜 받는 곳으로 가게 된 이유다. 채용이나 입시와 같은 선발은 결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문제는 선발시스템에 대한 기준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숫자가 거의 모든 것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과정을 모두 왜곡하기 때문에 의식 있는 교사나 부모들의 열의를 모두 좌절시키고, 대신에 '위기감'을 키우는 데, 이것을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심지어 부모에게 협박해서 돈을 뜯어먹는 것이 사설학원의 구조다. 이러한 현상이 교육부와 학원 간의 짬짜미의 혐의가 짙다고 책에 밝히고 있다. 일개 학원 강사였던 나를 포함해 우리나라의 많은 강사들은 까놓고 사기를 치느냐 아니면 얼마간 견디다가 떨어져 나가느냐 하는 선택에 들게 된다. 직장 채용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기업문화에 맞춰 모델링된 선발체계가 전무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하다.

지난해 대기업 마케팅팀에 입사한 김모씨(29)는 최근 불안에 떨고 있다. 이력서에 기재한 ‘가짜 경력’ 때문이다. 김씨는 해외 배낭여행은 물론 동아리 활동 경험이 전혀 없었다. 4.0이 넘는 고학점 외에 뚜렷하게 내세울 게 없었던 김씨는 고민 끝에 친구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배낭여행 경험과 동아리 활동, 아르바이트 경험을 모두 꾸미기로 했다. 근처에 가보지도 않은 영상 제작 동아리에서 주된 활동을 했다고 기록했다. 밟아보지도 않은 유럽에서 한달간 배낭여행했다고 자기소개서에 썼다. 화려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만든 김씨는 원서를 낸 대기업 세 군데 모두 합격했다.
- 경향신문 2007.8.12일자



그러나 이보다 더 위험한 상태는 스트레스도 없고 병증도 없는 편안한 상태의 이들이다.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가족아동학 전공팀은 다음주 서울대에서 열리는 ‘제11회 가족아동학 심포지엄’에서 위와 같은 조사자료를 발표했는데, 초등학생들이 다니기 싫은 학원을 억지로 다니고, 학원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우리들의 생각과는 딴판으로 오히려 만족도를 표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을 서울대 우울증과 비교했을 때 더욱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6년간 사교육을 받았던 지금의 대학생들이 '유괴'에 비유한다면, 사교육에 이제 발을 들여놓은 초등학생들은 '마약'에 비유할 수 있다. 이미 사교육에 최적화돼 버린 것이다.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감정을 배제한 인간들과,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 대량생산되고 세뇌교유과 쾌락에 만족하는 인간들의 모습과 점점 닮아가고 있는 모습은 오싹하기 이를 데 없다.
우석훈이 결말에 던지는 화두는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 그는 이것을 '창조적 파괴'라고 하였다. 젊은이들의 선택은 두 가지가 있다. 기득권이 만들어 놓은 '룰'이라는 좁은 소로를 따라가면서 점점 로봇으로 변모해가느냐, 룰을 거부하고 가시밭길로 가느냐. 이미 어떤 선택을 할지는 나와 있다.

서울지역 7개 대학신문이 대선을 맞아 지난달 7개 대학(고려대·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중앙대·한양대) 학생 20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정치·사회 의식 조사 결과 서울대생 응답자의 40.5%가 자신의 정치성향을 ‘보수적’이라고 밝혔다.
- 경향신문 11월 12일자

"하이힐 위에서 혹사당하는 여학생을 위해 발 마사지기를 도입해야 합니다.”
의료기기 업체의 광고 문구가 아니다. 이번주에 시작된 서울대 총학생회선거 후보의 공약이다. 이 후보는 피곤에 지쳐 음악감상실이나 학교 사무실에서 새우잠을 청하는 남학생을 위한 남성전용 휴게실 도입도 핵심공약으로 제시했다.
- 경향신문 11월 7일자

자꾸 서울대만 예를 들어서 좀 뭣하지만, 신문에서 다뤄주는 대학이 서울대밖에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편안한 것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은 결국 로봇이 될 텐데, 젊은이들이 모두 로봇이 된다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현실화될 것이다. 가진 자들의 시나리오가 벌어질 것이며 종국에는 벨기에처럼 무정부상태로 가다가 독립을 할지도 모른다.

벨기에라는 국가를 과연 유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점점 확산되고 있다. 플랑드르 지역인 알의 마크 데메스메커 부시장은 “우리가 벨기에에서 얻는 ‘부가가치’는 거의 없다”며 “차라리 분리하는 편이 낫다. 600만 플랑드르인은 스스로도 충분히 유럽의 부유한 소국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11월 13일자

우석훈은 싸우라고 하지만, 한마디를 덧붙여야 했다. 그것은 협상의 기술이다. 여기에 관련해서는 내가 '시사저널 사태'로 한창 기자들과 싸우고 있을 때, 백승기 발행인이 나에게 해준 말을 인용한다.
"전쟁터에서 총 들고 피터지게 싸워도 한쪽 테이블에서는 웃으면서 협상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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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成勳 2008-01-19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왕 굳ㅋ 잘 읽었습니다. 논문으로 발표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추천해 드렸습니다.
 
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대학에서 강의를 들을 때의 일이다. 서양의 문예사조사를 가르치던 노 교수는 문예사조를 결정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는 것을 발표했는데, 일명 '반발의 원리'였다. 내용인 즉슨 예컨대 16,17세기에 부흥했던 고전주의는 과거의 미를 추구하며 조화와 형식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는데, 이후에 등장한 낭만주의는 이를 거부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개성을 추구하였다. 뒤에 나타난 사실주의나 상징주의도 반발, 혹은 반발의 반발로 태어났다는 일관된 원칙이 '반발의 원리'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원리가 훨씬 오래 전부터 정리되었다고 옆에 앉은 선배가 귀띔해 주었다. 문예사조와 관련해 한 가지 더 귀기울일 만한 원리는 최신의 사조가 이제까지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며, 그래서 한 시대의 사조는 '독식'에 대한 욕구가 강력하다. 비단 문예사조만 그러할까. 철학사는 물론 학문의 영역을 넘어 '승계구도'를 가지고 있는 모든 구성원 내면에 탑재된 욕망이다.

내가 88만원 세대를 이야기하면서 갑자기 문예사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책이 지향하는 행동이 바로 '반발'이며, 이 책이 우려하는 현상이 바로 '승자 독식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이름을 '승자 독식 세대'나 '배틀로얄 세대'로 지으려고 했었다는 서문을 보아도 글쓴이들이 이 개념에 얼마나 몰두했는지 알 수 있다. 우석훈의 글에서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사실 나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몰랐다. 세계와 경쟁하고 영원히 경쟁해야 하는 추상적이고 비장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 책을 읽고 개념을 바로 잡았다. 경쟁을 위해 필요한 선결 조건은 바로 '룰', '협의', '장치'인데, 이것을 모두 걷어치운 상태에서 아무런 형평성도 없이 싸움을 붙이는 것이 무한경쟁이 의미하는 본뜻이었다. 이 정도까지 왔다면 사실 '경쟁'이라는 말은 불필요하다. '무한약탈' 정도 될 것이다.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이전 세대와 88만원 세대가 벌이는 세대 간 승부나 돈과 권력과 시스템 등 모든 것을 갖춘 삼성과 김용철 변호사, 사제단, 몇몇 소신 있는 언론사가 펼치는 전쟁은 마치 대기업에 맞선 중소기업의 처지를 생각나게 한다. 벌칙 없는 싸움이라면 탈벌, 편법, 위법에 능숙한 자가 언제나 이긴다. 그래서 여기서 제기된 과제는 '경쟁 구도'를 만드는 것이다. 진짜 인생 걸고 싸울 만한 경쟁의 틀이 필요하다. 그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구할 수 있도록 구체화시켜야 하며, 이것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협력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과정 역시 하나하나가 다 과제이다. 결국 우석훈의 결론도 '싸우라'는 것인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을 써야 할 것이다. '싸움의 기술'을 만들어내기에는 88만원 세대는 훈련이 잘 안 돼 있다. 알라딘과의 인터뷰에서 우석훈은 20대의 70%가 이 책을 읽어주기를 기대했다고 하는데, 실제 20대 구매자는 기대치의 1/3이 조금 넘는다. 이렇게 된 이유 역시 이 책에 기록돼 있다. 오로지 마케팅의 대상으로 바라보거나 정체 불명의 오합지졸로 바라보거나 심지어 미래를 좀먹는 죄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점점 좁은 문으로 '양떼몰이'를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대는 충분히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했고, 그들 역시 점점 좁혀 들어오는 룰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한창 대학2년생의 로망에 취해 있을 때, 학교에서 한자사전과 국어사전을 들고 다니고, 도서관에서는 철학사나 문학작품을 읽은 이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88만원 세대'와 그 후배들을 '할당량 세대'라고 부르기로 했다. 할당량 세대는 20대는 물론 초등학교, 유치원생까지 포함하는데, 하루나 일주일 단위로 해야 할 몫이 정해져 있는 세대이다. 물론 그 몫을 정하는 계획에 참여할 기회가 거의 없다. 좋은 초등학교, 좋은 중학교, 좋은 고등학교,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으로 언제나 지상과제가 놓여 있기 때문에 할당량을 거부한다거나 '좋은 목표'의 궤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가 느끼는 사회적 압력이 대단하다. 물론 나도 할당량을 강요받았으나 나를 가르친 스승들은 한사코 그러한 강요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주문했다. 나는 주류에서 다소 벗어나 아웃사이더로 남는 길을 택했는데, 그때의 결정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강요를 받아들였다면 태평로 삼성그룹 앞에서 삼성을 양해 성토할 기회도 없었을 테고, <시사IN> 기자들과 함께 싸우며 새매체를 일으키는 데 참여할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고분고분하게 다 받아들이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간 20대들을 보면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출입카드가 달린 목걸이를 차고 다녀야 하고, 지금까지의 강요보다 더 어려운 강요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사내는 주체가 아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그의 생각이 아니다. 그저 회사에서 그의 머리에 미리 입력해놓은 문장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휴머노이드가 미리 입력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제 말을 기계적으로 생성해 내뱉는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 ‘삼성 로봇’이 사람과 너무 똑같아 보인다는 점이다.
- <시사IN> 9호, 진중권의 칼럼 "'기계'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다" 중에서

중앙일보의 기자들은 어떤가. 자신들의 사주가 구속되던 날 현장에서 도열하면서 한목소리로 '회장님 힘내십시오!'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주류'의 피곤함이 엿보인다. 얼마 전에 만난 기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통쾌하게 논평을 했다.

"기자의 월급이 올라갈수록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없는데, 반대로 기자가 박봉이면 엄청난 '사회적 불만'을 지면에 쏟아낸다."

결국 이러한 주류의 굴욕 하나하나가 88만원 세대를 더욱 고착화시킨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기대를 걸 것인가? 우석훈은 이 계획에서 작정하고 386을 배제하려 한다. 이 책에서도 386에 대해 논한 지면은 몇쪽 되지 않는다.

그러나 프랑스의 68세대와는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중략)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의 68세대들이 공교육 체계를 대학까지 연장시키면서 다음 세대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의 기회를 가지고 20살에 독립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은 반면 우리나라의 386은 학벌주의와 겨에엘리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반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지금 10대와 20대가 맞게 된 조금 황당한 상황들은 사실 이 386세대에게 상당한 역사적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177~178쪽>

글쓴이는 이 이 책에 대해서 386의 피드백을 별로 얻지 못했다고 고백했는데, 그것은 당연하다. 이 책은 '88만원 세대'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쉽게 보았던 부분은 386과 88만원 세대 간의 타협점을 제시해 주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저자가 386에게 느낀 반감과 실망의 골이 이만큼 깊음을 말해 주는 것이겠지만, 덕분에 386도 이 책이 던지는 의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협의'보다는 '저항'에 무게중심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88만원 세대에게 맡긴다는 의미인지 '싸우라'는 선언 외에 어떤 명확한 제안도 발견할 수 없다. 결국 싸우기 위해서는 '구조'를 바라보아야 할 것인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토플책을 내던지고 바리케이트를 세우라는 과제를 88만원 세대들이 수행할 수 있을까? 기득권자들은 엄청난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88만원 세대들이 모의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조직이나 세대내 협의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그들은 '각자'에게 유배된 상태다.
프랑스처럼 중고등학생이 전국적으로 들고일어설 수 없을 바에야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하면서 세대를 대변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88만원 세대와 처지가 비슷한 10대가 연대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구성한다면 사회변화의 터전으로 삼을 수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현행 선거법에서는 선거권을 만 19세에게 부여하고, 피선거권은 그보다 훨씬 뒤인 25세 이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더군다나 25세라는 근거조차 불명확하므로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동일하게 18세로 정한다면 게임은 해볼만 할 것이다. 결국 수탈당하는 세대가 수탈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인데, 기성세대는 그들의 반발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20대를 착취하는 룰은 어떻게 관찰할 것인가. 부당함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20대에게 맡겨진 과제라면 매우 절망적이다. 우석훈에게 책을 몇 권 더 쓰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대 간 대결구도를 세대 간 화합 구도로 전환하는 책을 하나 쓰라. 아니면 20대가 짱돌을 던지고 바리케이트를 던지기까지 결단할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라.
정작 20대의 각성을 요구하는 방법밖엔 없단 말인가. 길을 돌고 돌아도 마주치는 출구는 바로 이 지점뿐 없단 말인가. 오호 통제라. 순환논리의 터널이 너무나 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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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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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나는 너무 착한 작가다
-
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 방청기


패배한 열망과, 찢겨진 오시리스의 살갗이 재생한 작가 김연수



<김연수 신작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생활을 낱낱이 저격당한 소설가 지망생의 푸념과 문예과 수시에 합격하고 축사를 기대하는 고3수험생의 메시지, 문예창작과에서 습작하는 친구들의 열망과 소소한 호기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9일 혜화동에 있는 극단 연우소극장에서는 예스24와 문학동네가 공동기획한 소설가 김연수씨의 강연 ‘소설 쓰는 이야기와 소설가로 사는 방법’을 듣기 위해 40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김연수씨에 의하면 20대에는 열망이란 열망은 온갖 총집합한 나날이었으며 패배를 거듭한 끝에 빅뱅이 일어난 자리에서 작가 김연수가 태어났다고 했다. 열망의 화법이 귀에 들어온다. 철저히 파괴된 열망일수록 응어리는 단단해진다. 이집트의 오래된 신 오시리스처럼 낱낱이 찢겨진 열망의 부분들이 회생하여 인생의 새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29일 혜화동 연우소극장 40여 명의 독자들이 독자와 가까운 거리에 앉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다.>

우문현답과 현문우답

김연수 작가가 이번에 새로 건립한 왕국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홍보를 위한 자리인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소극장이라 무대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작가는 배우처럼 많은 '즉흥극'을 보여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대담에서는 '우문현답'과 '현문우답'을 구분할 수 없는 문답이 오갔다. 

독자1 : 소설의 무목적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의미를 담으려 하는데 교수님은 도대체 의미가 뭐냐고 하신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작가 : 교수에게 소설을 보여주고 대답을 기대하지 마라. 차라리 친한 친구에게 보여줘라. 그런데 그 친구도 별로 해줄 말이 없을 것이다. 그냥 좋은 대로 살아야지 별 수 있겠나?

독자2 : 작중인물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 무지 쌈빡하고 성깔 있다. 상황논리에 짓눌렸으면서도 벗어나려고 악다구니를 치는데, 혹시 작가한테도 덤벼드는 거 아닌가?
작가 : 나는 인물들과 싸우기보다는 스스로와 자주 싸우는 편이다. 이번 작품에도 그린 인물이 맘에 들지 않아 나와 많이 다퉜다.

독자3 : 라디오PD 지망생이다. 요즘 소설가, 시인들이 라디오나 방송을 많이 하더라. 목소리가 좋은데 나중에 나와 함께 라디오 프로그램 같이 해볼 생각 없나?
작가 : (손을 전화기 모양으로 하고 귀에다 대고) 나중에 연락 해라. 꼭 듣고 싶었던 FM이 있었는데 김천에서는 들을 수 없었다. 서울의 펜팔 친구가 TV 안테나를 높은 데다 걸어보라고 하더라. 새벽 두 시인데 음파를 확인해줄 사람이 없어서 밤새 360도 돌리다가 지쳐서 옥상에서 쓰러졌다. 별이 참 밝더라.

이런 식이다. 소극장에서 그것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마이크도 없이 작가와 독자들은 시덥잖은 이야기에서부터 진솔한 이야기, 섬뜩한 이야기를 매우 극적으로 즐겼다. 하루는 유치원 정도밖에 안 된 딸내미가 자기 소설에서 가장 야한, 그러니까 베드신이 나오는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읽고 있길래 뺏아들었는데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그 부분'을 확 접더란다. 소설의 원 제목은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인데 딸이 제목을 이렇게 하면 소설이 잘 나가지 않는다면서 차라리 ‘모기인 동시에 하마인’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겠냐며 진지하게 제안해 왔다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소설의 제목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엉뚱하면서도 발랄한, 그러면서도 김연수다운 성찰이 묻어 있는 강연의 내용을 요약한다.





<김연수 작가가 그의 신작('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들고 집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그러니까 유배기간에 첫문장을 발굴한 것이다



출판사에서 청탁이 들어오면 주로 쓰는 편이다. 특별히 써보겠다고 마음을 따로 먹지는 않는 편이다.

막연히 생각나는 것은 '버려진 상태'에 대해서이다. 누군가는 버려져서 어떤 곳에 허름하게 놓여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 공교롭게도 독일 대사관에서 한국 작가를 대상으로 독일 문화 체험 비슷한 사업을 하는데, 나에게 전화가 왔다. 독일 시골로 가서 3개월 살다 오라는 것이다. 무턱대고 하겠다고 신청을 했다.

대사관에 갔더니 수표 500만원 어치의 유로화를 주면서 생활을 하고 주소와 연락처를 주었다. 밤베르크였다.

17세기 대저택에 무지 넓은 집이었다. 정원, 분수, 조각상, 싱글침대. 천정은 어찌나 높은지 잠이 오지 않을 정도였다. 하는 일이란 아침 먹고 설거지, 점심 먹고 설거지, 저녁 먹고 설거지였다. 그러다가 문득 누워서 생각했다.

17세기에 지어진 집이라면 많은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하고. 그 중에서 한두명은 자살도 했을 것이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도망도 쳤을 것이다.

온갖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온갖 생각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찾아왔다. 독일어를 모르는 관계로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치겠더라. 자기네들끼리 한참 웃다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알아듣기만 했다면 상상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뭘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쓸 이유가 생긴 것이다.


라운지 소설(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을 생각했다. 즉 이 이야기 쓰고, 저 이야기 듣고 하는 거다. 처음부터 의도는 이야기를 있는 대로 털어내보자는 거였다.

쓰다 보면서 고민한 것은 어떻게 이 이야기들을 하나로 묶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나는 장편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숭고한 경외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포만감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감화 있지 않은가. 소설에서 장편의 장치가 필요했다.



심심해서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미술관에 찾아갔다. 원래 무엇이든 처음부터 살피는 성격이라 처음 부분에 너무 공력을 많이 들였나 보다. 얼마 못가 지쳐서 소파에 길게 누워버렸다.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맞은편에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그보다 '가판대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나를 자극시키는 그 무언가는 '누드사진'이었다. 옛날에 아버지가 보던 설악산 입체사진이 기억이 나는데 그거랑 비슷했다. 그 사진이 마음을 계속 끌었다.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한 것이 내 성격이다. 좀 설렁설렁한 편이어서, 이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이고, 저 사람 이야기도 옳아 보인다. 이것을 한때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그 사진을 보고 당시의 고민이 '드디어' 해결됐다. 입체사진을 보는 순간 왼쪽도 아니고 오른쪽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서로 합쳐야만 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소도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첫 문장이 되었다.

 


“처음에 나는 그 사진이 남양(南洋) 군도에서 왔다고 생각했다. 카우치 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세상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 담긴, 가장자리가 불에 그슬린 사진이었다.”(예의 맨 처음 문장)

 


참고로 말하자면 이것은 후일담 소설이 전혀 아니다. 개인적 경험이 전혀 없다. 특히 백병원에서 기식한 적은 절대 없다. (웃음, 본문 제17장(131~140쪽 참조))







<김연수 작가가 자신의 신작 소설 중 일부를 낭독하고 있다 >

 


나의 소설속의 인물들은 절대고립에서 환상을 찾아 기어나왔다

 

94년도 등단작품은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이다. 신작을 쓸 당시 그 시절로 돌아가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돌아간다’라는 것은 착시현상에 불과하며 지금 이 순간에서 그 당시를 회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이 시점, 이런 사람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것이므로 현재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때의 시점에서 그런 시선은 갖기가 어려웠다. 프락치 교육 같은 것이 특히 그렇다.


이 소설의 주제라고 생각하는데, 존재의 고립된 순간에 대한 체험이다. 성인들은 그때 순간을 본다. 그때 모든 변형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마귀를 보았고, 부처님은 마구미를 보았다. 다들 환상을 많이 보고 세상으로 되돌아온다. 모든 사람들이 사실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한번쯤은 전적으로 고립된 후의 세상을 맞닥뜨렸을 대 그때 바라보는 세상이 어떤가 하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세상의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런 경험을 한 사람에 대해서만 써보자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모두 그런 종류의 경험을 가지게 된다.



두 개의 사진, 아니 두 개의 포개진 사진

 

이 소설은 두 개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①입체 누드 사진, ②노을 사진

강시우 프락치가 탈출해서 죽으려 했을 때 노을을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죽으려 하는데, 노을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

소설은 두 개의 사진을 놓고 시작한다.


단순히 인물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거다.

그 이야기는 사실과 다르 수 있지만 저 사람도 역시 나처럼 즐거운 순간이 있을 거고 그런 관점을 살려서 소설을 썼다.

회고담 듣는 게 나는 제일 좋다. 그들은 지금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결국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나아진다. 그게 이야기의 효능이다.





<강연회가 끝난 후 즉석 사인회를 가졌다> 


[작가 인터뷰]프로소설가라고? 나는 너무 착한 소설가이다, 그게 싫다.

소설 쓸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 갈팡질팡할 때는 재능이라는 말을 믿는데, 재능을 확인해보려 하는 확인욕이 나에게도 있었다.

당시 직장은 공기업에서 운영하는 곳이어서 6시에 퇴근을 하고 11월에는 5시에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하면 7~8시가 되는데, 그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1시까지 자고, 일어나 2시까지 소설을 썼다.

내가 자발적으로 쓴 소설은 단 두 작품이다. ‘꾿빠이 이상’, ‘사랑이라니 선영아’였다.

청탁없이 쓴 소설이다.

규칙적으로 계속 글을 쓰는데, 쓸쓸했다. 귀신이 나타나 잡아갔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실제로 귀신 환상을 경험한 적도 있었다.

3시간에 15매 정도 쓰면 아무 문제가 없이 너무 해피했다. 15매 프린트하고 다음날 야외 벤치에 앉아서 1시간 동안 계속 고친다.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타이핑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계속 고치면 20매로 불어난다. 나의 행복도 불어난다.


중요한 것은 계속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상을 받거나 독자들이 많이 읽어주는 것은 그 다음 문제다. 독자들이야 이해하든 말든, 30대 초반에는 건방지게 많이 썼다. 나도 사전 찾아가면서 썼는데, 독자들도 사전 찾아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소설의 인물들과 다툰 적이 있나? 주인공을 내놓으라든지 쓸데없이 인생에 간섭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인물들이 시비를 걸어온 적은 없었나?

-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 스스로와 다툰 적이 있다. 그려놓은 인물이 맘에 들지 않은 것이다. 이번 소설만 해도 강시우를 몹쓸 녀석으로 그릴 생각이었는데, 결국 그 녀석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쁜 인물이 되지 못했다. 그 점이 몹시 아쉽다. 그런 점에서는 프로소설가가 아니라 아마추어 소설가라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꼭 '프로소설가가 되어' 악당을 그리고 악당과 한판 멋지게 다퉈보고 싶다.



'프로소설가'라던데?

- 취중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가 그렇게 썼더라. 내가 그 말을 한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프로소설가라는 게 있다면 ‘함께 읽는’ 소설가가 프로가 아닐까.

지금은 약간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에 중점을 두는 소설을 쓸 계획이다.



소설가를 꿈꾸는 소녀에게?

- 글쓰기는 ‘순간의 문제’이다. 20대 초반에 나는 엄청난 열망이 있었다. 심지어 출판사로 찾아가 본 적이 있다. 그때 무턱대고 원고를 건네받은 사람이 장석남이다. 등단하는 날 통화를 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열망을 품고 있을 때는 백전백패다. 백전백패해도 열망 자체가 존재하지 않은가. 그것이면 되는 거다.



원형을 재현한다는 구상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 유령작가를 쓸 때만 해도 나의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진실을 담지 못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상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와 플로베르의 차이점이 있다.

플로베르가 있던 시절에는 정확한 작품으로 재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었다. 그러기에 리얼리즘이 가능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서 우리 세대가 직면한 현실은 재현할 수 없는 일종의 판타지와 같다. 각자가 갖고 있는 비현실적인 세계. 현재의 소설세계도 판타지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정점에 있는 작가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결국 ‘원본’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스무 살 때 나한테 세미나를 해준 선배들은 ‘진리가 있다’고 나를 세뇌시켰다. 물론 ‘맑스의 진리’였다. 1,2년 반복적으로 듣다 보니 매트릭스처럼 잠이 깨면 완전한 세계와 닿을 것만 같았다. 존재와 이미지가 분리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세상도 있고 나도 있고 이렇게 계속될 것이다.

진짜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나의 소설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는 비루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진리에 대해서 부역하지 않으니까.

밝히려고 해도 밝혀지지 않는 진리란 없고 남는 것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나의 글쓰기는 구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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