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를 하면 주위에서 저를 좌파라고 합디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걸핏하면 빨갱이라고 한다니까요.  

요즘은 그런 표현은 안씁니다. 옛날 얘기죠.

2차선 도로를 인도를 넓히면서 갑자기 1차선으로 만들어 버려 온갖 교통혼잡을 야기한 것을 불평하다 지방선거 얘기, 북풍몰이에 대한 비난 등 처음 만난 기사와 승객은 서로를 알아보고 신나게 시국토론을 하다 갑자기 그 대목에서 불일치를 봤다. 기사 아저씨의 나이는 대략 육십 대 어름으로 보였다. 빨갱이. 좌파. 더 많은 얘기들은 하필 그때 목적지에 당도함으로써 미완으로 남게 되었다.  

빨갱이. 우리는 언제쯤 이 용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적색 경계 경보를 울리면 우리는 언제나 얼마쯤 주춤한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이 가장 첨예하게 각을 세우는 부분도, 그리고 언제나 돌아오고 마는 원점도 이 지대에 있다. 레드 콤플렉스는 한반도 내에 그 이념을 체화하겠다고 진군했었던, 하지만 결국 파시즘적 공통 분모를 결과론적으로 가지게 된 저들과 완전히 통합하거나 치지도외하거나 하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우리에게 들어붙을 수 밖에 없는 망령이다. 

70년대 말에 태어난 나도 결국 유년시절부터 반공이념을 주입받은 세대다. 삐라를 주워 경찰서에 갖다주며 으쓱했고, 무찌르자! 공산당! 같은 반공 표어와 포스터로 모범적인 어린이로 인정받고자 했던 기억이 뿌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대로서 그런 인위적인 적대감의 주입은 하나의 에피소드 이상으로 남아 있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머리가 좀 굵어지고 나서는 의아했던 것같다. 대체 왜. 왜 이다지도 그런걸까, 싶은.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사람의 체취를 불러오고 왜 그다지도 그들이 그 사상에 도취되어 투신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한참 후에야 소설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빨치산들의 그 몽상가적이고 이상주의자적 면면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일제 강점기의 항일투쟁과 해방기의 토지개혁과 맞물려 있음을 서사를 통해 체현한 대목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북한정권으로부터 거꾸로 출발할 것이 아니라,일제치하 중국으로 추방, 혹은 도피한 독립운동세력들이 그 운동의 동인으로서의 이념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차용측면에서의 이해, 중국의 항일투쟁과 연합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인지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또한 해방기 농지재분배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친일파들의 처단 들과 조우했던 지점에 대한 인식도 필요하다. 미군정하에서 거의 대부분의 주요한 통치 체제에 친일파들을 등용함으로써 그들의 콤플렉스가 반공주의의 불꽃을 점화하는데 은밀한 역할을 했음도 마찬가지다. 

때마침 우연찮게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고 있었다.  

 

 

내 전생애는 실패했지만, 단 하나 나 자신에게 승리했다고 자평한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가 중국 공산 혁명에 뛰어들어 항일투쟁을 하는 와중에 처음에는 리리산주의자, 심지어는 우파, 마지막으로 조선인이라는 딱지로 어떻게 폐기처분되는 지를 어떻게든 납득해야 하는 일이었다. 또한 오늘날도 그렇게 한 인간에 각종 이념적 꼬리표를 막무가내로 붙이는 그 염증스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슬픈 체념도 함께 감당해야 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평양 교외에서 가난한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에 이미 조선독립군 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국외에서의 항일투쟁은 테러리즘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혁명은 잔혹성 속에 진실을 건져 올리는 일과 다름아니었다. 그들은 이상주의자기도 했지만, 삶과 역사가 박애와 그 인연이 없음을 절절하게 응시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영화 부활을 보면서 엉엉 울었던 김산은 그럼에도 톨스토이는 하나의 정적인 관성의 체현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역사는 꿈틀대는 용틀임이었고, 하나의 생명이었기에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체제를 종식시키고 금덩어리같이 귀하게 여겨졌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를 되찾아오는 일은 투쟁과 직결되었다. 

 서울 근처에 아리랑 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개 꼭대기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우뚝 솟아 있었다. 조선왕조의 압정하에서 이 소나무는 수백 년 동안이나 사형대로 사용되었다. 수만 명의 죄수가 이 노송의 옹이 진 가지에 목이 매여 죽었다. 그리고 시체는 옆에 있는 벼랑으로 던져졌다. 그중에는 산적도 있었고 일반 죄수도 있었다. 정부를 비판한 학자도 있었고, 조선 왕족의 적들도 있었고 반역자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압제에 대항해 봉기한 빈농이거나 학정과 부정에 대항해 싸운 청년 반역자들이었다. 이런 젊은이 중의 한 명이 옥중에서 노래를 한 곡 만들어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천천히 아리랑 고개를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가 민중에게 알려진 뒤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이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즐거움과 슬픔에 이별을 고하게 되었다. 이 애끓는 노래가 조선의 모든 감옥에 메아리쳤다. 이윽고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최후의 권리는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p.60~61 

우리가 전통민요 정도로 알고 있는 아리랑은 이런 피압제민들의 응어리진 애환과 한, 체념서린 수런거림이 퇴적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감옥에서 사형장으로 끌려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마지막으로 벽에 손톱으로 아리랑 가사를 긁어 놓은 것에서는 비감어린 뭉클함이 전해져 왔다. 저항하고 투쟁하다 결국은 넘고야 마는 죽음의 고개. 그러나 그 고개를 넘어간 이들은 김산이 얘기했던 것처럼 눈앞의 승리를 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역사 자체로 녹아들어가 결국 승리하고야 말았다.  

조국의 해방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다 분파주의, 파벌주의에 이용되고 희생되어 결국 고국의 해방도 미처 못 본 채 눈감아 버린 수많은 저들의 피어린 삶들은 그 자체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가 호흡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자잘한 편린 들 속에 그들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우리이기도 하다. 우리가 던지는 시선들, 우리가 하는 행동들, 우리가 내뱉는 말들 속에 그들의 유지는 체현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산은 옳고 그름의 분계선이 유동적이라고 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올바른 평가에 도달하는 과정이며 또한 그러한 진동 자체가 변화를 낳는 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간직하고 싶은 얘기다. 

누군가를 비판하면서 그들이 개념없이 사용하는 감정서린 뒤틀린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억울함을 토로한 나의 모순을 반성한다. 그 기사분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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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0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6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7 0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6-06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의 그늘에서 벗어나 뭔가 체계를 만들어가기도 전에 6.25라는 전쟁을 겪고, 통일을 겪지도 못하고 미군정의 영향탓으로 애매하게 나라의 뼈대가 만들어진 것.

그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꿰매지지 못한 상처들 속의 고름은 과연 언제즘 없어지게 될까요..?

시간이 더 지나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만 안타까움은 어쩔 수 없습니다.

blanca 2010-06-06 22:13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누구나 자기 자신은 특별하게 느끼겠지만 우리 민족은 특히나 아주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상흔이 다 아물기 전에 진정한 화해나 통합은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이건 감기의 돌림노래에 관한 얘기다.
먼저 아이가 걸리고, 나으면서 나에게 옮겨붙고, 1주일 휴지기 후에
또다시 아이가 걸리고, 나으면서 나에게 옮겨붙고, 마침내 아빠한테까지 엉겨붙고,
마침내 오늘 아침 아이는 분노의 콧물세례를 온얼굴에 받으며 열심히 콧물을 빨아 먹고 있다. 

기억나는 건 정말이지 미친듯이 코를 풀고 미친듯이 뒤돌아 기침을 해대다 늑골까지 결림을 느끼며
잠시 공포감에 전율하고 있다 그나마 나를 살게 했던 일정과 약속을 목소리 하나로 다 취소하고(여보세요, 하나로 다들 수긍)
가까스로 회복좀 됐다 싶으면 또다른 가족이 걸려서 다시 칩거생활에 들어가고
이 스트레스를 사발면과 비비빅과 바밤바를 폭식하는 것으로 풀고 그나마 사이 사이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씨네21>에 연재된 '김혜리가 만난 사람 시즌2'의 인터뷰 기사 중 출판을 허락한 22인의 얘기가 담겨 있다. 김혜리는 이미 <그녀에게 말하다>로 구면이다. 역시 <씨네21>에 개재된 인터뷰 기사를 발췌한 것인데 전작은 뭐랄까, 인터뷰이들에게 슬며시 예의차리며 다가가 살짝 건드리고 온 듯한 미진함이 아쉬웠다면, 이번 책은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인터뷰에 오롯이 녹아 낸 농밀한 밀도와 깊이가 빛난다. 특히나 그녀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배우, 시인, 물리학자, 영화평론가, 음악가에 이르기까지 그 다양한 분야를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하고 준비한 상태에서 그들을 만났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인터뷰이들에게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정형화되고 낭비적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바로 속살을 드러내고 무장해제 하게하는, 그래서 독자들은 저만치 더 멀리, 더 깊이 그들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하는 비장의 무기다.  

그들의 삶은  나의 그것보다 한층 밀도와 무게가 있었다. 나는 이 지구에 두 발을 디디고 산 것이 아니었다. 저 별을 올려다보며 꿈을 제대로 꾼 것도 아니었다. 삶을, 자신의 일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함과 경건함은 찰나와 순간에 우리의 전존재를 밀어넣고 숨쉬고 말하고 사랑하라고 설득하고 있었다. 그 어떤 책보다 생의 긍정적 에너지를 고양하는 탁월한 재능이 느껴졌다. 

제 가장 큰 이념은 웃음이고 그걸 포기하면 저는 끝입니다.
그것을 비판이고 반정부라고 말한다면 죽을 때까지 비판적이고 반정부적일 겁니다.
-김제동 

끊임없이 묻고 풍자할 권리를 역설한 그가 단순히 진보정인 정치색을 드러냈다고 오독했던 것이 미안했다. 그는 결국 웃음을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근거없이 끼어드는 억압과 제재에 대한 저항이 정치적으로 읽힌다면 그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런 그가 노대통령 1주기 추도식 사회를 봤다는 이유로 오늘 M-net 김제동 쇼에서도 결론적으로 사퇴하게 됐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결국 이 시대의 저들은 영원히 그를 오독하고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답답한 절망을 느끼게 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마침내 수군통제사의 옷을 입고 그 갑옷의 무게와 그 갑옷의 깊이를 함께 느꼈다는 김명민의 고백도 남는다. 이순신을 이해하고 느끼고 마침내 그와 한몸이 된 것 같은 경지에서 그의 심리적 고뇌의 파고까지 들을 수 있었던 그가 자신감이 생겨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내가 하려는 것, 내 안에 있는 것만 생각나고 반면 불안하면 온갖것이 보이고 신경이 쓰인다고 했던 얘기는 바로 나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그리고 들어야만 했던 바로 그 조언이다. 

저자가 시민의 각성은 기대하지만 인간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없어 보인다고 평했던 유시민이 민주주의를 정의한 대목도 흥미롭다.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욕망이 욕망을 통제하는 제도로 각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당하면 격분하면서 연대하는 행위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가 강조하는 헌법은 바로 이 연대의식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연대의식도 기본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부가적으로 발생한다는 논리로 이해된다. 이 정부가 민주주의가 뭔지 몰라 결과적 '계몽군주'를 자처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진단한 대목, 정치란 것이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 야수적 탐욕을 상대하며 짐승 같은 비천함을 감수하는 일이라고 재정의한 부분은  유시민만이 유시민이니까 할 수 있는 얘기다. 진보신당, 민노당의 주장들에 비현실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정의롭고 시련에 굴하지 않으며 좁은 길을 가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는 고백은 그가 당면한 진보진영의 통합과 포용에 어떤 식으로 대처할 지에 대한 작은 기대를 가지게 된다. 

난 한번도 연기가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그걸 직업이라고 하면 왠지 자존심이 상해요. 
<마더>의 엄마가 도준이한테 "너는 나야"하듯이 연기는 나에요. 숨쉬는 것처럼.
-김혜자 

언제나 두고 온 자신의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매체에 스스로를 많이 노출하고 싶다던 고현정의 인터뷰도 좋았다. 그녀가 연기 신인 시절에도 노메이크업으로 온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오열하던 모습들, 미스코리아 출신임에도 예뻐 보이고자 몸과 얼굴 근육을 사리는 일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그 성실해 보이던 모습은 그녀가 정작 재벌가로 홀연 사라져 버렸을 때도 진한 잔상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언제나 연기를 참 잘했다. 그녀가 십 년의 공백을 뛰어넘고도 건재할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연기자로서의 자질과 노력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채근하고 많이 노력하는 그녀의 진지함과 열성이 보기 좋았다. 그런 그녀지만 막상 촬영장에 구경나온 이가 안고온 아기를 어르고 달래며 내려놓을 줄을 몰랐다는 김혜리의 얘기는 왠지 애잔했다. 심지어 그 아기에게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고 고양이 그림까지 그려주는 모습에서 우리가 자주 잊고 마는 엄마로서의 고현정의 아픈 사연이 떠올라 콧날이 시큰했다.  

첼리스트 장한나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기억에 남는다. 그녀도 김혜자에게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이 곧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독서 같은 '간접경험'이 아니라 40분 동안 비창을 연주하면 40분 동안 비창을 사는 거란다. 이 시간 동안 그녀는 그녀가 아는 평균치의 삶에서 느끼는 애절함보다 천만배의 감정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때로는 독서도 그럴 때가 있다고 삶 속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처절하고 농밀한 감정 속에 푹 젖을 때가 있다고 항변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일까?^^ 우리도 책을 읽다 갑자기 그 속의 문자들이 매직아이처럼 떠올라 내 주변에서 뛰어놀고 살아 숨쉬고 만질 수 있는 경지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가장 그 사람다운 표정과 몸짓을 포착한 흑백 사진들과 인터뷰어가 그에 대한 개관으로 시작하여 질문과 답변을 고스란히 Q&A 형식으로 재연하다 에필로그처럼 덧붙인 추신들, 모두가 청아하고 간결하고 근사했다. 섬세한 촉수가 섹시하게 간지럼을 태우는 맛은 없지만, 그러기에 더욱 신뢰가 가고 인터뷰이들을 독대하고 그들의 고백을 경청하는 듯한 멋진 환각을 선물해 준 그런 책.  그래서 조지 가랫의 얘기처럼 진짜배기의 벌거벗은 진실에 가닿고 싶은 간절한 발돋움을 무용하게 만들지 않은 책.  

시인 김경주가 말한 것처럼 눈을 감고 조용한 공간에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 봐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책. 파도소리가 난단다. 정말이란다. 이런 얘기를 과연 누가 나에게 해 줄 것인가? 인터뷰의 마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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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1 2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2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0-06-02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혜자님의 말이 오늘 아침 정곡을 찌르는군요. 직업이니까 해야하는 사람과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이 몰입해온 사람, 이렇게 나뉠 수 있는건가요?
마지막 줄의 김경주의 말은 시인 입에서나 나올 수 있겠지 싶고요.
인터뷰를 통해 저런 속내를 끌어낼 수 있는 저자의 능력 역시 보통은 아닙니다 새삼스런 얘기겠지만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blanca 2010-06-02 09:10   좋아요 0 | URL
hnine님 반갑습니다. 김혜자 같이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그 누구보다 러워요. 예, 시인이 대우받지 못하는 시대에서 시인의 속내를 들으니 참 좋으면서도 안타깝더라구요. 이래저래 여기에 나온 사람들은 하나하나 다 부러운 면면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인터뷰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기도 하겠지만요.

stella.K 2010-06-0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급끌림입니다. 이런 인터뷰집이 있었군요. 제목이 무슨 사회과학계열쪽 같기도 하지만.^^

blanca 2010-06-02 16:06   좋아요 0 | URL
제목이, 좀^^;; 스텔라님, 옆에 두고 야금야금 읽기 참 좋아요. 관심가는 사람부터...

비로그인 2010-06-02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배기 삶을 사는 진짜배기들의 책이로군요?!

blanca 2010-06-03 16:14   좋아요 0 | URL
마기님...이런 책 한번씩 읽어주면 좀 열심히 살게 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0-06-03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의 돌림노래... 분홍 공주님이 콧물 맛나게 먹던가요? 아하하~~~
전 고현정 씨 정말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이들 얘기 들으면, 마음 한구석이 짠해요.
아이를 참 사랑하는거 같은데, 그 아이들 한번 만나게 안 해주는 전남편도 대단하구나 싶어요.

blanca 2010-06-03 16:15   좋아요 0 | URL
저도 스무 살까지 못만난다는 대목이 참 가슴아프더라구요.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저는 엄마잖아요,라고 했던 얘기들도...고현정은 뭔가 있어 보이고 실제로 뭔가를 간직하기 위해 노력하는 배우 같아요.

마녀고양이님, 저 어제 개표 방송 보고 가위눌리고 흑흑. 오늘도 계속 슬프네요...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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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온 천사가 있었다. 죽음으로 넘어가는 고통스러운 최후의 길목, 그 천사의 도움으로 노인이 본 풍경은 열일곱 첫사랑 소녀가 강가에 배를 대고 그를 맞아주는 모습이었다. 노인은 행복하게 눈을 감는다. 

십 대에 즐겨보던 미국드라마의 그 한 장면은 시리게 내 마음 한 켠에 박혀있다. 청춘이란 그런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그런 순간, 눈을 비비고 있어도 빛이 나는 그런. 죽는 그 순간에도 가장 붙잡고 싶은 가장 떠나 보내기 힘든 그런. 

윤교수의 말처럼 공교롭게도 더이상 청춘이라고 일컫기 힘든, 이제는 죽어도 요절이라고 불러주기 뭣한 그런 나이 서른 셋을 통과하며 윤이, 단이, 명서, 미루가 쓰고 읽고 걷고 울고 투쟁하고 좌절하고 분노하며 떠나 보내는 스무 살을 읽었다. 

자꾸 마음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에게도 오래전, 이라고 쓴 뒤에야 왜 그때 그러지 못했나, 싶은 일들. 살아가면서 아, 그때!라고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던 자책들을 주워모아 뒤로 뒤로 가고야 마는 처절한 스무 살의 기억들이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윤이, 단이, 명서, 미루가 통과했던 시대적 질곡을 밟고서야 개인의 고뇌를 들이밀 수 있었던 80년대의 청춘과는 빛깔이 달랐지만 나를 둘러싼 모든 소소한 일들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의 틀로 걸러 그럴듯한 것들로 만들고 싶어 더 불행했던 그 청춘의 기억들이 별처럼 하나씩 깜빡거렸다. 그때의 나는 지극히 과장적이었다. 모든 생것들이 그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들을 그때는 몰랐다. 소통이 실패해도 내가 쏘아올린 전파는 어디엔가 가 닿아 또다른 움틈을 만든다는 깨달음을 알지 못했다. 나는 무조건 슬프고 무조건 기뻤다. 나는 이들처럼 읽지도 쓰지도 않고 그저 걷기만 했다. 걸으면서 타인과 현상을 다시 들여다 본게 아니라 배경을 음악처럼 내 눈에 문지르며 주로 자책하고 자악했다. 아쉽게도 뭔가를 본 사람 같은 윤교수로부터 이런 말을 선물받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무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히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엄마를 잃고 이 도시에 온 나 윤이, 열심히 투쟁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에서 전화를 거는지도 모른 채 새벽마다 윤이에게 전화를 걸게 된 명서, 사라져 버린 연인과 그를 그렇게 만든 세상에 시위하듯 분신자살한 언니를 둔 미루,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을 사주고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던 단이. 이 넷은 젊음이 통과하는 상실의 길목의 체현 같았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운 그 골목 골목 사이마다 작가는 이런 날이 다시 올까?. 똑같은 날은 없어.라고 각인시키며 영롱하고 아름다운 구슬들을 굴려 넣는다.  

아.름.답.다. 그럼에도 진.지.하.다. 고 생각했다. 소설가들이 인간 자아의 실체를 뿌리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분명하게 드러내 줄 수 있는 과거를 재생해 내는 일을 하고 있다는 테렌스 데 프레의 얘기는 신경숙에게 가 공명한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직간접으로 통과해 온 청춘을 형상화했지만 그들은 저마다 우리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우리의 스무 살을 불러 낸다. 이 소설의 보너스는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그 기억들을 흘러가는 꽃잎처럼 아름답게 보내는 방법을 넌지시 일깨우고 그 기억들이 박혀 있던 상흔들을 삶의 의미로 메워주는 일을 해주는 것이다. 살아있어서 그 눈부신 시절을 통과해오고 마침내 여기에 이르러서 다행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것. 그건 분명 신비의 묘약 같은 이 소설의 마력이다. 

우리말로 쓴 우리의 청춘소설을 들고 나온 작가는 작가로서의 진중한 고민들과 소망들을 슬며시 끼워넣는다. 독자는 예기치 않게 그녀의 속내를 엿보게 되는 은근한 즐거움에 취하게 된다. 

그래도 언젠가는 그리고 어느날엔가는 눈 내리는 새벽에 이 책상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다가 가만히 엎드린 채 눈을 감고 싶다. 그게 지상에서의 나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면 한다. -p.26 

폭력에 이로운 문장은 단 한 문장도 써서는 안된다.-p.89 

결국 하고 싶었던 그녀의 말. 그리고 남은 말은 우.리.다. 나와 너에 관한 얘기는 내가 그쪽으로 갈게,로 연결되고 만다. 모르는 백 명을 포옹해주는 모습을 촬영하는 프로젝트의 도정에서 다시 나타난 명서의 모습은 그런 얘기들이 모인 것이다. <어디엔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그래서 서로를 찾고 마침내 만나고야 마는 모습을 환기한다. 이별하지 않기 위해 약속을 남용했던 청춘은 그런 얘기들로 이루어진 한 장이다. 이런 깨달음들을 가지고 다시 그 시간들을 살고 싶다.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명서의 말을 울컥 삼킨다.

잃어버린 것들에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말이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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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30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은 참 아름다워요^^

blanca 2010-05-31 13:53   좋아요 0 | URL
마기님 고마워요~ 아름답다니...과하지만 기분이 둥둥 뜨는 칭찬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5-31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이란 겪는 사람은 괴롭고, 훔쳐보는 사람은 부러운 그런거죠.
블랑카님... 진짜 20세로 돌아가고 싶으세여? 저는 절레절레... ^^
지금 하세요, 못한 것들. 문화센터의 수강생 언니들이 "저보고 내 나이 40만 되면 좋겠다" 그런답니다. 아하하.

blanca 2010-05-31 13:54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안그래도 친정엄마가 야단치더라구요. 자기도 젊으면서--;; 이렇게 얘기하면서요. 저도 원래 절레절레였는데요. 갑자기 올해부터 그러고 싶어졌어요. 참 이상하지요? 이것도 과정인가봐요. 다시 절레절레가 되겠지요?

비로그인 2010-06-0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에 눈물이 차오른다는 것. 그 느낌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습니다..

기억, 잊지 못하는 장면들. 어쩌면 저는 그것들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blanca 2010-06-01 17:30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결국 추억도 자기 삶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견디기 위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잊지 못하는 장면들이 있죠. 정말~ 갑자기 한 장면이 생각나서^^

강래희 2010-06-04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너무 예뻐요
전 초등학생 같아 부끄럽네요 ^^

blanca 2010-06-05 22:14   좋아요 0 | URL
예쁘다니, 괜히 쑥쓰러워지는걸요^^;;
 

그 아이는 아주 눈이 컸다. 말이 잘 통하지 않을 때 그 눈은 습관처럼 반달이 되곤 했다. 때로는 못알아들어도 알아들은 척 고개를 열심히 주억거리기도 했다. 강의 시간 그 큰 눈에 물음표를 품고 서툰 한국어로 열심히 해독하지 못할 기호같은 필기를 해대던 그 아이는 우리 학교로 유학온 재일 교포3세였다.  

나는 그 아이가 같은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아니, 솔직하게 나는 그 아이를 일본인이라고 여겼다. 묘한 이질감과 일본풍의 풍모, 그리고 서투른 한국어들 갈피짬 사이로 우리가 친해질 기회는 요원해 보였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와 단둘이 될 기회를 얻었다.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했지만 다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던 그 아이는 또 활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나는 그 때 잠시 그 아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기억을 떠올렸던 것도 같다.   

 

'추방당한 자의 시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을 읽고 나서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났다. 지금쯤 일본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바람대로 한국어 선생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지극히 요즘 일본 아이 같았던 그 아이가 하필 한국어 선생을 하겠다고 했던 대목도 묘한 대비를 이루며 떠오른다. 왜 하필 한국어 선생이었을까? 다시 이 책을 더듬게 된다. 

원래는 이산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인 디아스포라근대의 노예 무역, 식민 지배, 지역 분쟁 및 세계 전쟁으로 대부분 폭력적으로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로부터 이상을 강요당한 사람들의 의미로 확장된다. 식민지배와 제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군사정권하의 정치억압 등으로 발생한 코리안 디아스포라가 자그마치 육백만에 육박한다고 한다. 재일조선인인 저자 역시 '의식적인 피차별자'로 살아갈 것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요구하는 디아스포라다.  

이 책은 그런 저자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며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테마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고 있다. 그것은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재해석하고 '근대 이후'를 탐구하는 여정이다.   

근대 국가의 틀로부터 떨어져 나가 방랑하는 디아스포라의 삶은 끊임없이 삶의 우연적 굴절과 그것을 통해 눈물흘리며 직시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회의를 통과해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황이 단순한 굴욕주의적 감상으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런던 교외 공동묘지 마르크스의 묘비는 어쩌면 이 방랑의 길에 하나의 이정표 같다. 

철학자들은 세상을 이런저런 식으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
마르크스

스물 일곱의 마르크스가 부르짖었던 것처럼 프리모 레비가 얘기했던 것처럼 이 디아스포라적 삶의 다중심성은 근대의 광신적인 내셔널리즘의 그 인위적인 '타자'의 설정과 그것을 향햔 무자비한 배척, 증오를 직시하고 그 틀을 해체하여 더 근원적이고 유연한 휴머니즘으로의 회귀의 물꼬를 트는 것일 수 있다. 이것은 이 책의 출발점이기도 하고 귀결점이기도 하다.  

특히나 재일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역사는 한 글자 한 글자 눈물로 들어와 박혔다. 단순히 재일교포로 뭉뚱그려 이해되는 그들의 모습에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일본 신민으로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 해방기 갑자기 무국적자로 버려졌다  일본과 남한의 국적을 선택하기를 강요당한 비애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했음에도 한국국적을 선택한 이들은 출입국시 번거로운 절차를 거듭 거쳐야 하고 참정권이 없다. 군사정권하 한국으로 유학했던 두 형들이 방북 문제로 투옥되는 고난을 겪은 저자는 과연 자신이 외국에서 위험한 일체 처했을 때 한국이 나서서 보호해 줄지 자신할 수 없다고 했다. 국경이라는 것은 실체적으로 와닿지 않는 느슨한 임의적 경계 같지만 막상 우리는 모국 바깥으로 나가면 그것의 삼엄한 위엄을 실감하곤 한다. 그럼에도 안도하는 것은 우리가 돌아올 곳이 있고 우리를 지켜줄 수도 있다는 막연한 국가라는 개념이 주는 든든함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인위적이고 조악한 가느다란 경계선에 또 인위적이고 모순과 허점 투성이이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개념 하나를 얹어 두고 있는 셈이다. 그것에서조차 거부당한 디아스포라적 삶은 그래서 항상 연약할 수밖에 없다.  

재일 조선인 1세 시인 김하일의 얘기는 그 연약한 삶을 뚫고 나오는 그 처절한 모순적 개념에 대한 근원적 애정을 체현한다. 그는 한센병으로 손가락도 시력도 잃게 된다. 그러니 그가 혀로 점자를 핥아가며 우리의 역사를 읽느라 혀끝이 뜨거워졌다는 대목은 목울대를 울린다. 디아스포라적 삶이 근대의 국가적 개념을 부정하고 그 너머를 지향한다지만 결국 그들은 또 나라로 돌아오고야 만다. 이 책이 가지는 회귀적 모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회귀를 절통하게 이해할 수 있기에 그 모순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나의 개인적인 비극은 타인의 관심사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토록 자연스러운 내말, 자유롭고 풍요하고 끝없이 온순한 러시아어를 버리고
이류의 영어를 해야하는 내 설움에 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의 작가가 고뇌했던 것은 그 어린 님펫에 대한 도착적 성애가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었다. 고국 러시아를 떠나 끊임없이 방랑하다 그 방랑지에서 죽어야만 했던 그가 가장 슬퍼했던 대목은 자신의 모어를 버려야 했던 사실이다. 하고 싶은 수많은 얘기들을 1차적으로 자신의 모어의 체에서 걸러 영어로 변환시키는 지점에서 그는 항상 고뇌했다.  

이제 그 아이의 얘기로 돌아와야 할 것 같다. 그 아이도 그랬을까? 그 아이에게 모어는 일본어였다. 저자의 설명을 빌리자면 모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익혀 자신의 내부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모국어는 한국어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의 모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국어를 가르치고 싶다고 얘기했다. 할아버지의 나라쯤으로 여겨지는 모국이 그 아이를 불러낸 그 모호하지만 강렬한 힘은 근대 국가를 세웠던 그 무모하고도 위험한 동인이기도 했다. 디아스포라를 만들어 내고 또 그 디아스포라들을 끊임없이 손짓해서 불러내는 힘. 허구적이고 얄팍하다지만 또 그만큼 강렬하고 처절한 그 힘. 

대체 나라란 무엇이고 국민은 무엇이고 민족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유한성에 무한의 가능성의 환각을 덧씌운 것이 국가의 개념이자 애국자의 망상이라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우리를 가두고 또 우리를 나아가게도 한다. 이것은 또한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 내는 전쟁의 광신도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프로파겐다에 차용되어 수많은 디아스포라의 행진을 가속화시킨다. 생산적인 질문들을 만들어 내지만 대안적인 해답이 다원적인 중심성이라는 모호성으로 감침질 되고 마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공고한 개념을 마구 흔들어 대는 이러한 독서는 언제나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산다는 것은 질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은 어쩌면 저 삶의 국경 너머에서 찾아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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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5-28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DMB 로 뭔가를 보는데 서경식 교수와 한 서독의 간호사였다가 후에 화가가 된 어떤 분에 대한 다큐가 나오더라고요. 디아스포라.

일본,러시아,독일..등등 그곳으로 가게 된 우리 이웃들에 대한 생각이 잠시 마음에 머뭅니다. 그리고 관동대지진, 강제이주, 간호사들의 차별등 그들은 그런 차별을 너무나 까닭없이 당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네요.

blanca 2010-05-28 10:36   좋아요 0 | URL
아, 그런 다큐를 보셨군요. 우리가 잊고 사는 것들을 때로는 되돌아 봐야 할 것 같아요. 저 지금 신경숙쌤의 <어디선가~> 읽다가 바람결이라는 용어 발견하고 거기에 동그라미 쳤어요. ㅋㅋㅋ 뭔가 아주 심오한 의미가 있나 싶어서요.^^;;

비로그인 2010-05-28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라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내몰리듯 외국으로의 유학을 떠나게 되는 것, 그래서 기러기 아빠를 만들어내는 것...그리고 또 그 이후의....
이것도 이젠 디아스포라라고 표현해야 맞을것 같네요.ㅠㅠ

blanca 2010-05-28 10:37   좋아요 0 | URL
마기님! 맞아요. 유학생들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개를 마구 끄덕거립니다. 그런데 마기님 패션 센스 진짜 짱이시네요. 그리고 저도 저런 웨이브 머리 너무 해보고 싶어요. 저는 지독 곱슬이라 무조건 매직입니다용--;;

비로그인 2010-05-28 10:50   좋아요 0 | URL
'트위스트 펌' 인데요, 곱슬머리에게는 딱입니다.
저도 맨날 볼륨매직 했었는데,,,요거 재생시간이 짧잖아요.
ㅋㅋ일부러 유행에 역행하는 게 저의 패션 노하우?랄까요~~푸하하~

blanca 2010-05-28 10:53   좋아요 0 | URL
마기님, 저 그럼 진짜로 트위스트 펌하고 대문 사진에 사자머리 올릴 지도 몰라요. 재생시간 얘기에 완전 혹합니다. 저 진짜 담달에 할까봐요 ㅋㅋㅋ 유행을 선도하시는 것 같은데요.^^

비로그인 2010-05-28 11:10   좋아요 0 | URL
처음 하시는 거니까 좀 굵게 해달라 그러세요.
처음부터 너무 빠글거리면 스스로가 감당이 안되어요.ㅋㅋ
저처럼 가운데 가르마 하시면 더 어울리실꼬예요.
트리트먼트랑 에센스로 잡아주면 이뻐요.

유행 따라가지 않는 것...남들이 하는 건 일단 피하고 보는 것.
그냥 이거다!싶은 때가 있는데,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
남들의 평가를 너무 무시하면 안된다는 것.
색을 교묘하게 조화시키는 것.
뭐 제 머리속에는 여러가지가 맨날 날아다닙니다만....
제일 중요한 팁은~~
나의 단점을 커버하고 장점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노하우를 연구하는 것!
결론적으로...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패션을 잡아라!!!

비로그인 2010-05-28 11:17   좋아요 0 | URL
참~~이 헤어스탈은요, 그 자체가 야~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을 좀 수수하게 매치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엑서세리가 번쩍번쩍하고 화장이 진하면...정말 못봐주거든요.
ㅋㅋ제가 왜이리 참견이랍니까?ㅋㅋ

기억의집 2010-05-28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글 너무 멋져요. 디아스포라의 가장 큰 딜레마가 언어였네요. 저도 언어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편인데.. 이 글 읽으면 추방당한 자들의 언어에 생각해 볼 수 있었어요. 나의 모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blanca 2010-05-28 10:38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그전에 작가의 DNA 글 읽고 얼마나 좋았던지 몰라요. 어디선가 꼭 써먹고 싶은 얘기였어요. 게다가 스티븐 킹이라니.

언어라는 게 진짜 묘한 것 같아요. 아직 저는 이 모국어조차 제대로 이해하고 쓰지 못하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5-2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여, 블랑카님 만큼 리뷰를 쓰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왜 항상 감탄하게 만드세여? 아하하---

blanca 2010-05-29 14:37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제 기분을 업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계신듯 해요^^;; 저는 오늘 청소를 아주 열심히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헤이즐넛 티백 커피를 마시고 있어요. 감기도 많이 좋아졌지만 선거 홍보물을 보다 갑자기 우울해 졌어요. 선거 끝나고 할 얘기가 많아질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5-30 10:58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저는 선거에 엄청나게 야당이 패하면, 2년간 뉴스도 안 보고 정치판 이야기도 안 하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머....... 고민한다고 변할게 없으니 당분간 묻는 수 밖에요. ^^

꿈꾸는섬 2010-05-28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랑카님의 글을 보며 늘 어쩜 이리 짜임새 있게 구체적으로 게다가 감동까지 주는 글을 쓰실 수 있을까 늘 부럽습니다.^^

blanca 2010-05-29 14:38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정말 감사합니다. 꿈꾸는 섬님 가족도 저희 가족도 항상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온통 감기가 헤집고 가니 가족들이 다 골골합니다.

프레이야 2010-05-2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타, 모국어에 대한 나보코프의 구절들이 인상깊었던 책이에요.
요즘 전 언어를 다시 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건 뜬금없이 좀 다른 얘기지만요,
사랑하는 사람의 언어를 배워라고 하는 아랍의 격언이 있답니다.
우리는 타자의 언어를 왜 이리 잘 알아듣지 못하는 걸까요.
오해, 갈등, 싸움.. 아, 그게 따지고 보면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요.

blanca 2010-05-29 14:3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맞아요. 언어! 얼굴 맞대고 조목조목 설명해가며 얘기해도 결국은 오해만 남는 경우도 있고. 그래도 이런 언어가 있어 프레이야님과 좋은 인연도 맺을 수 있는 거니까 감사할래요.^^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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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사악하고 어리석은 SS 대원들, 카포들, 정치범들, 범죄자들, 크고 작은 일을 맡은 특권층들, 서로 구별되지 않으며 노예와도 같은 해프틀링까지,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는 인간이었다. 그의 인간성은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이 무화의 세상 밖에 있었다. 로렌초 덕에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p.187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것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작은 등롱을 발견한다. 같은 이탈리아 민간 노동자였던 로렌초는 아무 이해관계없는 그에게 여섯 달 동안 매일 빵 한 쪽과 먹다남은 배급을 제공해 준다. 로렌초는 인간이었다,고 회고하는 대목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회의적인 반문이 수용소의 경험 전체를 관통한다면 그가 인간이었다,는 깨달음은 미약하지만 그 기저에서 깜빡이는 하나의 전언 같다. 그럼에도 희망은 유효할 수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그렇다,인가? 다 읽고 나서도 또 그의 삶 전체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접하고서도 확신할 수가 없다.

데렌스 데 프레의 <생존자>들을 통하여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증언에 대한 심리학적, 인문학적, 철학적 고찰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그들의 증언을 한 사람의 목소리로 들어보고 싶게 했다. 이 책은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의 유대인으로 태어나 화학자이기도 했던 프레모 레비가 반파시즘 빨치산 부대에 가담했다 밀고를 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살아 나오기까지의 이야기의 장대한 증언록이다. 그의 얘기들은 후에 그 자신이 회고했듯 의도적으로 희생자의 한탄 섞인 어조도 아니고, 복수심으로 날선 언어도 아닌,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로 엮여 있다. 그는 단지 유대인 정치범이라는 이유로 머리칼도 이름도 다 잃어버린 채 왼쪽 팔뚝에 수인번호를 새기고 강제노역수용소에서 부나(일종의 고무)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한다. 거기에서 목격하는  악에 타협하며 때로는 그것을 생존방식에 끼워 넣으며 살아나가는 수많은 사례들, 벌레처럼 죽어나가는 자들의 모습은 그에게 인간의 존재, 더 나아가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그가 살아나갈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 같은 어떤 가능성의 체현 같은 인간형의 목도와 이 참상을 증언하고자 하는 욕구 덕분이었다.  

화학자인 저자의 문체가 대단히 심미적이고 유려하여 놀랍다. 이 세상을 지옥으로 가는 대합실로 상상한 단테의 <신곡>이 군데군데 스며 들어오는 대목과 이 수용소가 단순히 우발적이고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라 맹목적인 도그마의 귀결이자 나름 이방인에 대한 논리적인 존재방식의 구현이라는 그의 해석과 맞물려 우리가 과거의 비극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어떤 식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하여 미래를 설계해야 할 지에 대한 엄중한 성찰을 권한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 수용소체제로 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섬뜩하기조차 하다.  

한편 죽음으로 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준비하고 아이들을 씻겼다는 대목. 그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은 모습에 대한 회고. 그가 배급당번으로 지정되어 장이라는 젊은 청년과 유월의 맑은 하늘을 만끽하며 그 짧은 시간동안 그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쳐 주려고 단테의 신곡의 구절들을 기억해 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는 장면은 이 비애서린 증언록에 작고 아릿한 삽화를 그려준다.

이렇게 살아나온 그가 말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대목은 참으로 안타깝고 아이러니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생존이 평가절하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그는 훗날 그의 수용소에서의 고통의 기억들이 격렬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 대신, 자신을 더 풍요롭고 긍정적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얘기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그 극단의 마지노선이 뚫리는 것을 체험하고 나왔음에도 그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을 얘기했다. 물론 엄중한 자기 성찰을 바탕으로. 그의 다음 얘기들은 현재의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동적인 전언이다.  

나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훨씬 더 소박하고 덜 흥분되는 진실, 차근차근, 지름길로 가지 않고 공부와 토론과 추론을 통해 얻은 진실,
확인되고 입증될 수 있는 진실에 만족하는 게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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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5-27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요즘 책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저는 반성 중...
알라딘 블러그에 책 리뷰는 없고, 순 제 잡기만 올리고 있으니.. 아이고.
저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려고 사놓고, 아직도 감감 무소식 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말년에 생을 자살로 마무리 했다고 하던가요? 음.... 궁금해지네요.

blanca 2010-05-27 15:1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감기는 좀 괜찮으세요? 저는 죽음의 감기 속에 홀로코스트 관련 책을 읽는 실수를 범해서 너무 힘들어하다 오늘 급기야 병원까지 갔어요.--;; 대기실에서 아픈 사람들 보고 더 기분 우울해지고. 기침 심하게 하니 사람들 다 피하고---;; 그런데 집에 오니 갑자기 몸이 급 회복됐어요.

책은 비몽사몽 간에 너무 질러서 쌓여있구요 ㅋㅋㅋ 예, 나이 많이 들어서요. 대체 왜 그랬는지. 그런데 수용소에서 살아 남아온 사람들이 많이들 그랬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