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좋을 때다. 
너는 좋겠다. 

이제 뒷바라지 안해도 되고 속시원하지 모, 안그래?
  

아니, 새벽에 출근시키고 그럴 때가 좋았다. 그 때가 좋았다.
자식 다 크고 나니 별거 없다.
  

연년생 동생은 긴 엄마와의 동거생활을 끝내고 이제 토요일이면 더이상 자신의 출근을 도와줄,
그 무거운 가방을 끌어줄 엄마가 없는, 대신 닭도리탕을 잘한다는 남편의 곁으로 가게 된다. 언제나 지겹다,를 남발했던
엄마의 자식수발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솔직히 엄마가 아주 속시원해할 줄 알았다. 아주 예전부터 쿨함으로 무장한 엄마는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당시는
그 쿨함이 자주 오해받았지만, 이제는 정말 그 쿨함으로 자식들을 다 출가, 또는 독립시키고 자기만을 챙겨도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는 그렇게나 바라던 상황으로 당도했건만. 슬퍼하고 있다. 너무나.
나는 예의 그 무뚝뚝함과 딸애의 채근으로 오랜 통화나 따뜻한 다독임을 건네주지 못하고 쫓기듯 그녀의 투정을
강제로 끝내버렸지만. 왠지 가슴이 시리다.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게다. 엄마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왜 당연한 상식이나 당연한 예의를 풀어 놓는 것이 괜히 멋쩍고
귀찮아지는 것인지. 그래서 나중에는 꼭 후회라는 것을 하고 말게 하는지. 

그럴 때마다 그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자신의 떨리는 품에 안겨 있던 연약한, 생존을 위해 아버지를 필요로 하던,부모밖에 모르던 존재였다. 하지만 결국 부모는 아이들에게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었고, 때로는 관계가 끊어질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루마도 결국 그런 식으로 자식들을 잃어갈 터였다. <중략> 아이들은 점점 남처럼 멀어지고
제 엄마를 피할 것이다. <중략> 가족을 이루는 일 자체, 이 땅에 아이들을 낳는다는 자체가 때로 만족감을 주는 만큼
애초부터 어딘가 잘못된 일이다
.  -줌파 라히리의 '길들지 않은 땅'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페인의 그 쨍한 각성효과가 좋아, 쓰린 속을 달래가며
두 잔의 커피를 마시면, 그 후는 더부룩해지면서 우울해진다.
업되려고 마신 커피가 나를 끌어내리는 오후.
나는 왜 우울한 것인가를 고민해 보니, 대체로가 아닌, 지금 이 순간 우울의 이유는. 

책장에 꽂혀 있는 두서없이 섞여 허우적대는 후회되는 책 목록과 함께,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아닌,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면,
덜 쓸쓸할 텐데, 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돌아갈 곳이 없는 것이 자못 슬픈 것이다. 
살면서 재수시절 응큼하게 생긴 국어강사의 권유로 읽게 된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에서(이거 읽으면 논술 잘 쓸 수 있다길래), 
건진 단 하나의 문장. 볼테르의 그것.
삶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추이다, 라는 얘기
그건 왜 순간 순간 고개를 내미는지.
껄쩍지근한 일이 새벽에 등골을 스칠 때의 그 소름이 싫어 회사 뒷담화에 집중했던 시절에는
주로 신경질이, 
팀장님이 솥뚜껑 운전이라 명명해 주신 작금의 상황에서는,
극도의 단조로움이 권태를 끌고 온다. 

행복하다면 약간 농치는 거고
불행하다고 한다면 과장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젯밤 극도의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난 후 약간 울었더니,
갑자기 오른쪽 눈이 잘 안보이는 것이다. 라식 수술한지 어언 8년이 되어가는데
순간 순간 검증안된 수술이라는 악담이 떠올라 갑자기 눈이 멀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기어나왔다. 

눈이 아주 나쁘지 않다면,
안맞는 콘텍트렌즈 끼느라 눈에 온갖 허당 실핏줄 키우는 경우 아니라면,
비추다.  

무엇보다 갑자기 눈 주위에 예기치 않은 충격이 가해지거나,
눈물을 조금 흘린 후 시야가 뿌얀 경험 그 1분도 안되는 시간이 갑자기
두렵게 다가오는 경험은 상당히 불쾌하다. 나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서 계속 뿌옇게 흐려지는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하다,
눈을 위해서라도 행복해져야 겠다는 어쭙잖은 결론 다음으로,
주제할아버지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주문해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맥락의 독서이다. ㅋ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지만 거기 앉아 있는 동안 난 거의 사람을 미치게 만들 만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누군가가 벽에다가 <이런 씹할>이라고 낙서를 해놓은 것이다. 피비나 다른 아이들이 이런 걸 보게 된다고 생각만 해도 정말 사람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이 말의 뜻을 궁금해할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떤 나쁜 놈이 아이들에게 잘못된 뜻을 가르쳐주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중략> 그런 곳에다가 이런 말을 써놓은 놈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가 않았다. <<호밀밭의 파수꾼>>  
   

놀이터에 두돌 딸아이를 데리고 갈 때마다 놀이터에는 지렁이처럼 꼬부라지는 글씨로 온갖 욕설과
"철수는 어젯밤 열두시에 야동을 봤다.'" 같은 웃기지도 않은 문장들이 저마다 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 대목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진다. 읽을 때는 웃고 말았는데
정작 그런 상황을 일상적으로 목도하게 되니 나도 콜필드처럼 그걸 쓴 아이를 찾아 죽이고 싶을 정도는 아니지만,
강박적으로 다 지우고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왜냐하면 어느 날 내 딸이 분명 물을 것이기에.
"엄마, 야동이 모에요?" 이건 차라리 낫다. "엄마, XX(상상에 맡김)가 모에요?"
아무 의미도 없는 욕설의 정의를 궁금해 하는 네돌 정도의 딸아이에게 적절한 설명을 찾아주지 못해, 혹은 정말
콜필드의 우려처럼 어떤 나쁜 사람이 아주 잘못된 뜻을 가르쳐 주어(그것이 긍정적인 의미라거나)
다음날 부터 그 욕설을 하고 다닌다면, 그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사실 저 정도까지 연장된 심각한 우려를 매일 하는 것은 아니고,
콜필드가 여동생 피비를 위해 저 저속한 낙서들을 강박적으로 지우고 다녔던 풍경이 때때로 떠올라
낙서를 더욱더 유념해 보게 된다는 정도. 그리고 때로는 오히려 저 낙서를 언젠가는 읽게 될 딸아이보담은,
저런 낙서를 숨어서 하고 있었을 녀석들 생각에 대체 무신 의도에서 무신 욕구로 저런 낙서를 하게 된 것인지
궁금도 하고, 벌써 그런 숨어서 하는 약간의 불량스런 행동에 대한 공명심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놓쳐버린,
나의 단단해진 감수성이 서글퍼지기도 하고. 그렇단 얘기. 

그래도 밤12시에 야동본 얘기를 놀이터 미끄럼틀에 신고하는 건 아니잖아.! 중요한 건 안웃겨! 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문방사우에 집착했다.
지금도 팬시점에 풀어 놓으면 하루 종일도 놀 수 있다.
내 생각에 이것도 일종의 자존감 부족에서 비롯되었을 공산이 크다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내가 가져야 할 것, 가지고 싶은 것에 훨씬 더 비중을 많이 두는 습성. 

각설하고 요즘에는 로디아에 꽂혔다. 그렇다고 로디아에 관련된 것이 있냐 하면, 단 하나도 없다.-..-
그저 매일 검색과 후기 정독으로 그 세계에서 놀다 로디아 메모지 쓰니까 좋냐고 한마디 물었더니
모든 사물에 대체로 무관심한 옆지기가 또 질러댈까 두려워 그랬는지 "하나도 안좋다."고 하도 강조하는 통에
참고 있다.  

내 책상은 십곱하기십에서 충동적으로 공수한 실패한 품목들이 처절하게 누워있다. 왜 내가 화이트 보드가 필요한가? 그것도
탁상식으로 세워진다고 혹해서 구입했더니 지금은 불량한 자세로 아예 수시로 드러누워주신다. 왜 내가 그 많은 마스킹 테이프가 필요하겠는가? 딸내미님이 친히 다 방바닥에 붙이고 다녀 주신다. 몰스킨을 쓰면 내가 헤밍웨이의 문장을 조금은 빌려올 수도 있을 성싶고 로디아를 쓰면 그 모랄까, 사각거린다고 하니 그 소리에 갑자기 명필이 될 성도 싶고, 완전 착각 및 망상에서 비롯된 허무한 구매욕이지만 그래도, 나는 로디아 메모지에 로디아 연필로 장 갈 품목을 메모하고 싶다는 것.  

족욕을 시키면 잠을 잘 잔다기에 족욕을 시켜주었더니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오히려 더 자주 깨주시는 공주님처럼 나를 헛된 기대로 채우지 말 것. 제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