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한 가족이 보였다.
엄마, 아빠, 일고 여덟살 정도 되보이는 언니, 동생.
엄마가 아빠를, 혹은 딸들을 따라 움직이는 시선을 따라 가다 보니 그 가족 속에
나의 엄마, 아빠, 그리고 연년생 여동생.
정말 너무 추워서 온몸을 달달 떨며 택시를 기다리던 어느 날이 날아와 꽂혔다.
그 가족 만큼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지루할 틈이 없었던 시간들. 
너무 생생해서 때로는 너무 희미해서 과연 그 기억 속의 내가 지금의 나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
도리질을 하게 되는 시간들.
 

그리고 어쩌면 또 나의 미래가 될 지도 모를 모습. 나. 남편. 아이 둘.
과거와 미래가 차창 밖으로 기억되고 상상되는 시간의 틈새를 비집고 이제는 하늘나라로 가고 없는
이모의 모습. 이모부. 사촌여동생 둘의 고맘때 모습들도 떠올랐다.
 

어느 엄마가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이모는 유독 사촌동생들에게 희생적이었다.
그 자신 비쩍 마른 몸으로 딸 둘을 졸졸 따라다니며 밥을 먹였고 자신의 몸에 걸칠 옷 한 벌 사는 것에 벌벌 떨며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것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그 모습은 갑작스러운 암선고와 함께 한창 직장생활에 치여
얼굴이 누렇게 떠가는 동생들을 남겨두고 허망하게 가버렸다. 아기자기하고 작은 재미와 잔정이 가득했던
그 사랑스러운 가족은 그렇게 엄마가 남겨두고 간 빈자리의 깊이와 넢이 속에서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다.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나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이모. 

나의 과거와 미래와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을, 차창 밖으로 우연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었을 그 한 가족에게서
발견하고 나의 마음에서는 뚝뚝 무언가 아픈 물이 내리고 있었다. 너무 시려서 몸이 떨렸다.

끊임없이 다가와 현재를 허물고 저멀리 달려가 버리는 잔인한 시간의 그 불가항력적 힘 속에서
그 모든 절실한 감정들. 생생한 사건들. 심지어는 절절하게 사랑한 사람들까지도 허무하게 묻어버려야 하는
인생이란. 참 아픈 것이다. 지금 글을 쓰고 딸아이와 씨름하는 이 시간도 화석처럼 희미하게 무언가를 새기고는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윽고 나는 주름살이 자글자글 패인 얼굴로 뒤를 또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과거얘기를
읊조리게 되겠지. 그리고 몸의 기관이 한 군데씩 탈이 나고 불편을 느끼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든 고역이자
투쟁처럼 변하면 차라리 죽기를 바라면서 죽음과 슬며시 화해하려는 그 본능적인 비굴함에 굴복하게 될것이다. 
그래야 죽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때가 되면 생은, 삶은 그래도 의미있고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아니 유한한 삶 속에서 그래도 가장 가치있고 매달릴 만한 지향이라는게 무언지 깨닫고는 갈 수 있을까?
이런 모든 생각들이 과거의 추억들과 뒤범벅 되는 그런 시간들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때로 참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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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31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추억이지요.

blanca 2010-01-31 14:58   좋아요 0 | URL
예. 요새는 추억에 너무 젖어 있어 큰일이에요^^;;

저절로 2010-01-3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염세주의에 빠져 인생을 들어먹을뻔한 시기가 있었지요.후후훗..그때만해도 서른자에 시옷만 달려도 '참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울'것 같아 스물아홉까지만 살아야지 했거든요..근데 참 이상도하지요 시옷을 넘고 미음을 넘어가는 고개에서도 박완서씨의 포근한 피옵이 부러우니 아직 살만한가 봅니다 그려.(추억을 삶아먹고 살아 그런가봐요)

blanca 2010-01-31 23:38   좋아요 0 | URL
지금 열심히 시옷이 언제 끝나고 미음은 어디쯤이며를 세어 보고 있네요^^;; 에파타님의 얘기가 참 힘이 되네요. 그리고 기다려집니다. 저도 그렇게 되겠지요?

기억의집 2010-02-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젊었을 때는 죽음을 생가해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애를 낳고 키우면서
오히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어요. 딸린 식구들이 없었을 때는 죽음, 뭐 그까이 거! 이랬는데
지금은 혹 내가 읽찍 죽으면 어쪄지!하는 두려움이 생기더라구요.
주변에 젊은 엄마들이 암에 걸려 수술하고 견뎌내는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blanca 2010-02-01 16:09   좋아요 0 | URL
저는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면서....맞아요. 이젠 제 목숨도 저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진부한 얘기지만 건강이 제일의 축복인 것 같아요.
 

커피와 면음식을 우격다짐으로 구겨넣다 보면 꼭 주기적으로 위염이 온다. 고객 상대하는 일을 그만두면
나는 더이상 카페인으로 나를 각성시킬 필요가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커피를 마셔야 하는 이유는
시시각각 튀어 나오니 나의 위는 낭패일 수밖에. 담배를 못피워서 비행기를 못탄다는 예전 팀장님 얘기를
이제 나는 진실로 이해할 수 있다. 커피가 없는 하루를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있으니 두돌 딸내미가 묻는다.
 

"엄마, 아퍼?", "마니 아퍼?" 그리고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신이 난 눈치다. 아프다는 것의 의미는 알지만
타인의 고통을 동감해 주지는 못하는 시기인 건지, 아니면 얘만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엄마, 추워?", "어불(이불) 더퍼." 그리고는 돌아나간다. 

드문드문 정말 뜬금없이 "아빠, 머찌다!"를 되뇌이기도 한다. 아빠가 출근할 때 모직 코트를 걸치고 현관에 나서면
딸내미는 감탄을 보낸다. "우와! 아빠 머찌다!" 살이 쩌서 나날이 성인 곰돌이가 되어가는 아빠가
멋지면 또 얼마나 멋지겠는가. 

정말 신기하다. 프로이트의 구강기, 항문기 같은 도식을 그닥 동감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데 생식기(3~5세)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눈으로 보게 되니(비약일 수도 있지만) 거참 신통하다. 아이는 만 두 돌을 넘어가면서
정말 아빠가 너무 멋지다고 극찬을 해댄다. 연애시절 나에게도 못들었던 찬사를 휘감고 다니는 푸우님께서는
몸둘 바를 모르는 눈치다.  

  

엄마는 이런 파스타까지 준비하여 너를 기쁘게 해 주려고 하는데 너는 아빠만 멋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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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27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딸에게 질투하시는군요.^^
딸들은 그래서 이 다음에 아빠랑 결혼한다고 선언하잖아요.ㅋㅋ
아들을 낳으세요~ 그럼 엄마랑 결혼한다고 할테니까요.^^

우리도 어릴 때 엄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하지 않았던가요?
난 그런 거 같은데~~^^

blanca 2010-01-27 21:29   좋아요 0 | URL
아들을. 성별이 마음대로 조절이 되야 말이죠 ㅋㅋㅋ

라로 2010-01-2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파스타로 파스타를 만들어 봤지만 성공한적이 없어요,,,엄청 오래 삶아야 할껄요~.ㅎㅎㅎ
님의 아이가 정말 제 막내랑 동갑이군요!!!!
그런데 그런 말까지 한다는 말이죠!!!!딸아이들이 빠른건지? 우리 녀석이 늦된건지??ㅠㅠ

blanca 2010-01-27 21:31   좋아요 0 | URL
nabee님 안녕하세요~ 안그래도 오늘 대박 실패봤답니다.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맛이던군요-..- 아, 저 이런 얘길 들을 때마다 너무 부러워서. 막내가 제 맏딸이랑 동갑이라 하면 제가 갈 길이 너무 먼 것 같이 느껴져 가슴이 답답해진답니다.

302moon 2010-01-27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 쓰림은 어떠세요?
위염이라면, 음식도 가리고 그래야 하죠?
저는 중학교 때까지 위염이 있었는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던 기억이/
맛난 걸 마음대로 못 먹었던 게 젤 안 좋았어요. ㅜ
물이랑 과일을 커피랑 같이 드시면 어떨까요?
아이가 곰돌이 캐릭터를 많이 좋아하는 듯^^
제가 아는 녀석 중에도 딱 아빠 곰 같은 애가 있는데,
은근히 그 녀석에게 아이들이 신기하다며(;) 많이 붙던/

blanca 2010-01-28 14:06   좋아요 0 | URL
ㅋㅋㅋ 나아지고 있어서 다시 카페인을 들이키고 있답니다. 음식을 가려야 하는데 그게 참. 아빠 곰. 이건 딱 제 옆지기 얘긴데. 그래서 딸도 판박이 곰이랍니다.
 

: 주변에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들은 뚱보가 된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옆지기 : 그건 맞는 것 같아.  (지금 살들을 실하게 채워가고 있으며 밤12시경 항상 정크푸드를 보충) 

---------------------------------------------------------------------------------

: 바렐라라는 학자는 임종할 때 전부인이랑 현부인이랑 다 같이 지켰대. 

옆지기 : 그건 문화차이다. 우리나라에서 그게 가능할 것 같아?  

--------------------------------------------------------------------------------- 

옆지기 : 그래서 가장 권해주고 싶은 책이 뭐야? 감동을 떠나서 가장 재미있는 책. 

:  태백산맥. 아, 진짜 식음을 전폐하고 열권을 읽게 되.
  

옆지기 : 나는 영웅문. 

: 그건 무협지잖아. 

옆지기 : 무협지가 어때서?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얘기하지마.  

---------------------------------------------------------------------------------------------- 

결국 항상 <영웅문> 얘기가 나오고 만다. 정말 읽어보고 얘기해 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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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25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정말이지 책은 안 읽고서 뭐라 할 자격이 없지요.ㅋㅋ
아~ 태백산맥 3권까지만 읽어서 끝내야 하는데...서평단을 하지 말아야지 정작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못 읽어요.
만날 숙제하기 바빠요. 어흐흑~ ㅜㅜ

blanca 2010-01-25 08:57   좋아요 0 | URL
서평단이 은근 부담스러울 것 같아요. 게다가 순오기님 원고도 쓰셔야 하잖아요. 그래도 그런 걸로 바쁜 거는 진짜 부러워용~

프레이야 2010-01-25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열두 시 넘어 빵 먹었어요.ㅜㅜ
태백산맥!!

blanca 2010-01-25 08:58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은 날씬하실 것 같은데. 옆지기는 엄연한 비만이랍니다. 살도 가속도가 붙는 것 같아요 ㅋㅋㅋ 태백산맥 진짜 넘 재미있어요~

하이드 2010-01-25 0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무문,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있네요. 주인공이라도 함 살펴봐야지 기억날듯. ㅎ

blanca 2010-01-25 08:56   좋아요 0 | URL
^^;; 영웅문이었더라구요.

저절로 2010-01-2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름신 왕림하사 태백산맥,토지 크윽 한번에 지름..이번엔 영웅문도 확 질러버려?

blanca 2010-01-25 13:04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 태백산맥과 토지를 한번에요? 우왕. 대단해요.토지만 해도 스무 권 넘지 않나요? 저는 도저히 용기가 안나서요. 글구 토지를 드라마로 두 번 보고 나니까 다 읽은 줄 완전 착각하고 있어서--;; 저 태백산맥 읽다가 하도 눈이 아파서 대하 소설은 함부로 시작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잖아요. <아리랑>도 최명희 <<혼불>도 홍명희 <임꺽정>도 다 읽고 싶은데 눈을 한쌍 더 만들고 시간도 한무더기 퍼와야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에파타님 화이팅! 참, 글구 <영웅문>은 ㅋㅋ지르지 마시고 빌려 읽으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비로그인 2010-01-2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 얘기하지마.


아하! 그러고 보니! 읽지도 않고 말하면 안되지, 하고 끄덕끄덕.

blanca 2010-01-25 15:08   좋아요 0 | URL
저도 은연중 무협지라고 괜히 선입견 가지고 그랬던 것 같아요. Jude님 말씀이 맞지요. 오늘 참회를 좀하고^^;; 격려도 좀 해주고 그래야 겠어요.

루체오페르 2010-01-25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안녕하세요.^^ 즐찾해놓고 들르고 했는데 댓글도 답니다.
영웅문! 저도 한 표 보탭니다. 정말 읽어보고 말을 해야 합니다. 무협의 수준을 넘어선 문학이죠. 저자가 김용 인데 세계적으로도 유명하고 중국에선 신필 이라고 불리고 그의 작품을 분석한 학술집,전집도 있고,여러모로 대단한 작가,작품입니다. 영웅문 말고도 천룡팔부, 소오강호(영화 동방불패의 출처), 녹정기 등 여러 작품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영웅문이고요. 전 1,2,3부 중에서 2부 신조협려를 가장 좋아합니다. 분위기를 잘 표현한 글이 있어 남깁니다. 여튼 영웅문은 그냥 무협소설이라 하기엔 하나의 문학으로 이미 대접받고 있으니 한번 보셔도 후회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판타지소설 중에서도 그런 작품이 가끔 있듯이요. 예를 들어 교과서에도 실린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같은 작품.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인가? -원호문(元好問)- 세상 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길래 삶과 죽음을 함께 하도록 하는가? 천지의 남북을 짝지어 나는 새들아, 너희들은 몇번의 여름과 겨울을 함께 보내었더냐? 사랑의 기쁨과 이별이 고통, 그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으니, 그대는 마땅히 무슨 말이 있어야 하리. 아득한 만리에 구름만 자욱하고, 온산에 저녁 눈 내릴 때, 그 홀로 누구를 찾아가야 좋은가를...! 조기매피당은 금(金)나라의 시인 원호문이 지은 사패(詞牌)이다. 이 시가는 신조협려라는 김용의 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 주제가 주인공인 양과와 소용녀의 지고지순한,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랑에 있는데 이 시가가 하도 절묘하게 그 마음을 잘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한다. '정이란 무엇이길래 생사를 가름하느뇨 그 사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으니...'
출처:빅토리오의 쉼터(http://victorio.egloos.com/3429895)

blanca 2010-01-25 15:10   좋아요 0 | URL
아. 루체오페르님 반갑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이런 댓글 환영입니다. 저 솔직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 퉁박주고 여러번 그랬는데 옆지기는 꾸준히 영웅문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렇군요. 이 답글을 보여주어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302moon 2010-01-25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마을에는, 옆지기 분들과의 훈훈한 이야기가 가득해서 또 좋은 듯. 저는 아직 옆지기가 없으니까, 동생&친구들과의 에피소드로 채워볼까. (웃음)

blanca 2010-01-26 11:06   좋아요 0 | URL
그런게 더 잼나요. 채워주세요~

기억의집 2010-01-27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협지는 좀 아니었는데 김용의 영웅문은 중국교과서에 실릴 정도라고 하던데요.
언젠가 한 나이 60 넘어 영웅문 읽어볼테야요^^

blanca 2010-01-27 14:04   좋아요 0 | URL
진짜요? 우와, 그렇군요. 옆지기는 중학교 때 읽고 대학교 때 울면서 또 몇 번이나 읽었다고 해서. 저는 표지보고 야설인지 알았어요--;;

하이드 2010-01-28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웅문이라면...
전 1,2,3부 한 열번씩은 읽은 듯. 동생두요.

생각해보니, 정무문은 주윤발 나오는 도박영화였던듯도 ^^a

blanca 2010-01-28 14:04   좋아요 0 | URL
우와! 하이드님 읽었어요? 정무문 ㅋㅋㅋ 맞아요. ㅋㅋㅋ 갑자기 웃음이...
 

만삭에 뒤뚱거리며 집근처 도서관에 출근도장찍던 시절.
박완서의 책을 들고 근처 백화점 지하식당에서 배식을ㅋㅋ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 풀썩 자리를 튼 50대의 아주머니가 그 책에 안광을 철하고 있었다.
자못 민망해져 갈 찰나 아주머니는 "저, 책좀 볼까요? 제가 박완서를 좋아해서." 하며 나에게서 책을 건네 받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앞표지 뒷표지도 검사하고 책 속도 한 번 후루룩 넘겨보고 아쉬운 듯 다시 그 책을 돌려주었다. 

본론은 그게 아니라 갑자기 그 배경음악 같은 웅성거림을 뚫고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식당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며 포효하면서 펼쳐졌다. 그 는 아이란 다 그런거지,라고 용인하고 보아넘겨 줄 수준을 훌쩍 넘는 것이었다. 모두가 너무 놀라서 그 뒹굴면서 파닥거리는 그 어린 아이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할 만한 강도였다.
엄마는 그 아이를 통제하지 못해서 어쩔줄 몰라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이를 대면할 시간을 얼마 안 남긴 나로서는
그 아이가 아주 유난히 버릇이 잘못 든 극단적인 경우인 줄 알았다. 그리고 내 배 속에서는 아주 예쁜 순둥이가 귀여운
물방울 놀이를 하고 있을 거라고 안위하며 이기적인 구경꾼을 자처했다.
문학적 감성을 잃지 않았다는 듯 책에 안광을 철하던 그녀의 안광은 그 아이와 젊은 엄마를 두루두루 성찰한 후
이윽고 나에게 다시 와 꽂혔다. 입술근육을 실룩거리며 "왜저래? 왜 저렇게 냅둬? 참나!"
그녀의 문학적 감수성은 타인의 곤란한 상황에 대한 철저한 변경의 냉랭함으로 이미 치환되어 있었다.
그녀의 강한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에 건성으로 대꾸하고 그 장면은 나의 기억 뒤켠으로 스며갔다. 

나의 아이가 그 여자아이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오랜만의 외식후 식사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주차된 차가 비집고 나올 틈을 기다려야 하는 이상한 기다림에 지쳐갈 무렵
나의 아이는 갑자기 부츠를 신고 대기실 의자로 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
새된 소리를 지르면서. 나의 저지는 약효가 없었고 아이의 비명은 더욱 강도를 더해갔다.
울고 싶어질 찰나. 내 옆에서 잔잔하고 근엄한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구원처럼 흘러나왔다. 

의자에 올라가려면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지.
너 참 예쁘구나.(빈말이겠지만 ㅋㅋ)
당근과 채찍의 이 절묘한 조화라니. 그는 분명 무언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분명하다.
 

그 두 마디에 딸아이는 갑자기 온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냥 멀찌거니 구경하지도, 그렇다고 배려없는 참견도 아닌 그의 따뜻한 개입은 뭉클했고
무언가 나의 가장 아픈 부분을, 치유되지 않은 외상까지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때의 냉랭한 구경꾼이자 공모자였던 아줌마와 나를 기억하게 된다.
거창한 연대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아니 오히려 비난받을 만한 연대를 한 셈이 됐지만
그 자리에서 침묵하고 그 곤란한 상황을 관망하고 심지어 약간 즐기기도 했을 우리들과
떼쓰는 아이를 저지해 보려 너그러운 개입을 시도한 그 남자의 차이가 주는 간극이 나를 가르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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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7 1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7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솔직히 <롤리타>를 아주 재미있게 읽지는 않았는데 이 책 참 이상한게 읽고 나서 계속 생각난다.
끈적끈적한 잔상 때문이 아니라 괜히 마음이 처연해진다고나 할까. 네이넘에 로리타를 키인하면
당장 19금 인증을 받아야 한다. 다시 롤리타라고 치면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제레미 아이언스와 도미니크 스웨인 주연의 영화인데 호평 일색이다.
책보다 낫다는 얘기까지 있다. 장면 하나하나가 뮤직비디오 같다나. 실제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만든 경력이 있단다. 

그런데 98년도 영화를 어둠의 경로로 찾아 보려 했던 눈물나는 시도는 좌절을 거듭했다.
일단 롤리타, 롤 리 타, 심지어 lolita, 롤리, 어둠의 망 구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것을 향해
암호를 해독하듯 이리저리 설레발을 쳐봤지만 야동 목록만 뜬다. 저작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나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린 그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다 서광을 만났다. 열심히 다운받았다. 

그런데 일이 너무 쉽다 생각해서 중간 정지하고 play 해보니 고색창연한 흑백화면이 뜨더라.
큐브릭 오빠가 60년대에 롤리타까지 손댄 지는 몰랐다.  

언덕 위 집에서 빵사먹으러 아기랑 내려가는 길은 고행이었다.
다시 내가 롤리타를 빌리러 그 전혀 친절하지 않은 대여점 아저씨한테 가서 롤리타를 발음해야 하나? 
나보코프 아저씨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이라 했던 그 롤리타가
그 나른한 아저씨 앞에서는 분명 젊은 애엄마가 이 추운데 애까지 데리고 나와 볼만치 화끈한 것으로 둔갑할 것이
분명한데. 

원래 가질 수 없는 것은 더 절실해지기 마련이다.
당장 롤리타를 그 제레미 아이언스의 시원하면서도 아득한 눈빛이 연기하는 험버트를 보지 못하면
안될 것 같은 절박감에 아니면 사서라도 봐야 겠다고 결심한 와중에... 

롤리타는 요기에 있었다. 그것도 대여료만한 가격에.
문제는 오늘 주문해 버린 안나 카레니나에 추가 주문을 해 보려 했는데 이미 출고 작업중이어서 안된다는 것.
또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알아버렸다. 내가 요즘 실제 세상에서 격리되니 그런 간접 경험들에 집착하게 되버렸다는 걸.
경험한 것은 적고 읽은 것은 많았다,는 보르헤스가 왜 그런지 알아 버렸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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