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미망'을 읽으며 간간이 질러 놓은 책들은 각종 사정으로 더듬더듬 집을 찾아 오지 못하고 있었다.
판매자의 사정으로, 혹은 배송폭주로, 이제 '미망' 下권을 집어들며 백만년 만의 홀가분한 일요일 외출에 동행할 책인
'롤리타'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 폭발하고 말았다.
분명 22일 그렇게나 위무도 당당하게 연거푸 두 번이나 문자로 오늘 배송될 예정 어쩌구 저쩌구 하며 설레발 치던
그 위용은 간데없고 오후에는 급기야 경비실로 갔다고 그러더니 이틀에 걸쳐 경비실이며 택배사한테 전화도 하고, 심지어 소화전까지 열어보며 그 책의 행방을 모색했는데 간 곳이 없었다. 평소 택배 기사 욕하는 재미로 스트레스 푸시는 경비아저씨께서는 심지어 택배기사 훈련좀 시키라는 말까정 하시며 혼자 열이 올라 괜히 신이 나시고. 남욕할 때는 왜 있잖은가. 갑자기 의욕충천하여 생동하는 그 느낌. 그래서 뒷담화는 계속되나 보다.
약속시간 강박 같은 것이 있는 나로서는 항상 약속장소에 홀로 당도하기 마련이라 텅빈 시간을 우두망찰 허공에 혹은 사람들에 시선을 던지며 분침이 스치고 가는 그 허무한 공백으로 가슴까지 뻥 뚫려 버리는 듯한 느낌을 못견뎌하다 결국 십분이나 혹은 삼십 분 정도 늦는 친구들의 지난 날들 나를 서운하게 했던 일까지 더듬게 되는 병폐를 가장 못견뎌한다. 약속 늦는 친구들만 그것도 심지어 한시간 늦고도 되레 큰 소리 치는 배짱이 두둑한 아이들로만 선별해서 그러안고 있는 나의 인간관계도 그닥 평범하진 않지만, 고로 책이 꼭 있어야 한다. 책 없이 길을 나서다 보면 더불어 자꾸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혹은 흘려 버리게 된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악취미까지 있으니. 이런 나에게 위의 두 책은 심부름 보낸 다섯살 사내아이처럼 이리 저리 참견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엉뚱한 짓만 하다 빈 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아니, 그마저도 아닌게 오지도 않고 있으니 나를 부대끼게 하고 있다. 자꾸 오지 않은 녀석들을 더듬다 보면 새로 불러들일 녀석들이 괜히 치일 것 같아 주춤주춤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역시 안왔다. 남한테 항의하는 것에 울떡증이 있어 잔뜩 날선 각오까지 하고 고객센터에 전화하자마자 괜히 막 흥분하여 단어들 지들끼리 막 서로 엉키는 와중에 "고객님, 주소가 서울시 동작구........ 맞으시죠?"에 뻥 터졌다. 거기는 나의 친정집 주소다. 그렇다. 배송지에 떡하니 친정집과 부재시 엄마 이름까지 써논 주소를 선택하여 입력해 놓고 안온다고 난리난리 치며 괜히 택배사들의 배송날짜 맞추기 강박의 희생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드는 연극 무대에서 내려오며 나는 자아성찰을,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이 솔직히 두번째다. 롤리타는 그렇게 엉뚱한 곳에서 천대 받으며 웅숭그리고 있겠지. 아놔, 나 어떡해야 되는 거얌? 그리고 제발 토요일까지 최영미의 책만큼이라도 왔으면 싶다. 그리고, 연말이 가기 전에 되도록이면 참으려고 했는데 다시 책을 한 권 더 사야 될 명분을 얻었다. 친정 부모님보고 '롤리타' 들고 오시라고 할 수는 없으니. 그나저나 자기 계발서로 책장 한 칸을 다 채우고 뿌듯해하시는 아버지가 나의 '롤리타'를 펼쳐 보시는 일은 없으리라 믿는다.
김영하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는 원전을 뛰어넘는 재미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탈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것을 번역한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에 빚진 바가 크다. 그의 번역은 원전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남이 써 놓은 이국의 언어들을 자신의 언어에 맞춤하게 대응시켜 펼쳐내는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과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일이다. 고통스럽고 가치 있는 일이다.
이덕일의 '이회영과 젊은 그들'은 엄청난 재력가 집안에서 거의 재산 전부를 독립운동자금으로 써버리고 여섯 형제들까지 바친 드라마틱한 얘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요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지향하는 천상의 별처럼 누군가는 그 별에 손을 뻗쳐 그 눈부심을 움켜쥐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처럼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위 두 권을 연말 마무리용으로 데리고 와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