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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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씨의 책을 처음 본게 <나의 서양미술 순례>였었다.
10년도 훨씬 전이다.
이 책은 내게 한국의 옛 미술을 벗어나 서양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해준 책이었다.
고흐니 르느와르니 하는 그림들이 전부가 아님을, 시대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미술을 내게 보여준 책이었다. 그리고 미술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것에 대한 관심도 같이 가져다 주었다.
이후 이 책 저 책 미술사관련 책들을 뒤지며 행복한 책읽기를 가져다 주었으니 내겐 가장 고마운 책 중의 하나랄까? 

두번째 나온 <청춘의 사신>은 디아스포라에 대한 서경식씨의 고민이 구체화되고 있던 시점에 나왔던 책인듯...
그런만큼 암울한 시대를 이방인처럼 살아야 했던 화가들이 대거 소개되었었다. 익숙하던 에곤실레나 뭉크, 모딜리아니를 다시 읽게 만들어줬었다. 
그리고 여기 <고뇌의 원근법>

올 초에 덕수궁에 들렀다가 한국근대미술전을 봤었다.
덕수궁을 한 2시간 넘게 둘러다녔더니 사실 좀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도 그림이 좋았다면 피곤한게 대수였겠는가? 얼마나 맘먹고 간 서울 나들이인데...
1층의 그림들을 둘러보고 나니 그만 보고 싶어졌다.
옆지기가 자기가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가 놀고있을테니 나더러 마저 보고 오라고 한다.
그 순간 난 "재미없어. 그만 볼래" 이러고 그냥 나와버렸다.
왜?라는 옆지기의 질문에 "그냥 잘 모르겠어. 우리나라 옛 미술도 좋고 현대미술도 좋은게 많은데 근대미술들은 왜 이렇게 심심하고 재미없는지.... 여기도 유명한 사람들의 그림이 이렇게 많은데 하나도 끌리는게 없어. 다 심심해"
물론 2층에 갔으면 내 맘을 끌었을 그림이 있었을지는 알 수없는거지만 1층의 전시품만으로도 충분히 심심했었다.
그 때 잠시 왜 그럴까라는 의문을 품었지만 워낙에 뭐든지 집요하게 생각못하는 스타일인지라 다음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라며 나왔었다.

그런데 오늘 서경식씨의 이 책 서문에 참 멋지게 우리 근대미술을 평해놓았다.

한국의 근대 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않다.

여기서 단박에 풀려버린 나의 심심함의 원인이라니.... 
아름다움의 기준은 그야말로 다양할뿐더러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 그럼에도 현실이 반영되지 않은 미술의 심심함이라니...
나치 치하에서 에밀놀데의 그림은 풍경화조차도 아름답지 않다.
불길함이 가득한 붉은 색과 푸른 색들...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일수도 있고 당대의 풍경일수도 있는 색깔들... 이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예술은 색채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들... 

기독교 제단화의 형식을 그대로 빌려와 전쟁을 고발하는 오토 딕스.
예수와 성모마리아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전장으로 떠나는 군인들, 시신들, 전쟁의 고통을 배치한 그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위대하다.
형식에서도 내용에서도 이토록 전쟁을 강렬하게 고발함은말이다.
상이군인과 매춘부들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이 그림들은 관람자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지금 여기를 돌아보게 한다. 예술은 때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도 하지만 이렇듯 불편하게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예술은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 되기도 한다.
펠릭스 누스바움이 나치 치하의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그의 그림속 자화상으로 보여주었듯이...
유대인증명서를 내보이는 자화상속 누스바움은 아무런 표정이 없는듯 오히려 극도의 불안을 표현한다. 표지로도 사용된 <사형복을 입은 자화상>의 군상들은 빠져나올길없는 죽음의 문앞에 선 인간들의 극도의 불안을 오히려 무표정속에 녹여내고 있지 않은가? 

불편한 예술은 우리의 기억을 되살린다.
잊지 말아야 한다고 늘 환기시킨다. 그것이 예술의 힘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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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이유리.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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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이 세상을 바꾼다고?
때로는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1970년대에 김지하의 <오적>이 1980년대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런 역할을 했었다.
아 물론 여기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무슨 예술작품이냐고 할 사람도 있겠구나...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인터내셜가>도 예술 작품이다.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예술작품이 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예술이 무어냐고 하는 아주 오래된 해묵은 논쟁을 들추고 싶지는 않다.
예술이 무어냐에 대한 해답도 결국 그가 자라고 배운 사회적 토양위에서 생성되는 의견이겠고 결국 그의 계급적 지향을 벗어날 수 없는 한에서 주관적일뿐이다.
여기 한 판의 전시가 벌어졌다.
위대한 예술이란 자고로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관, 또는 잊지말아야 할 기억의 환기를 가져오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 그럼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이 모여 세상이 바꾸게 된다는 전제하에 모인 한 판의 전시다.  

만인에게 알려진 예술품들도 다르게 보면 다르게 보인다.
원래 무언가를 본다는게 이렇게 가변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관적인 행위에도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과 눈길이 더 많이 모이는 것들은 있게 마련이다.
지금 나의 마음, 나의 현실, 나의 꿈을 더 잘 대변해주는 듯한 작품을 만나면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런 마음과 마음들의 거대한 움직임을 가져왔던 역사의 걸작들이 이 한 권에 참으로 알차게도 모였다. 

여성화가의 자의식을 한껏 발휘했던 젠틸레스키, 프리다 칼로
시사만평 만화의 시초를 연 윌리엄 호가스, 한 발 더 나아가 국왕까지 풍자의 대상으로 삼았던 오노레 도미에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베토벤, 나폴레옹의 침략을 고발한 고야
프랑스혁명의 시대정신을 표현한 들라크루아
브레히트의 시 <예심판사 앞에 선 16세의 봉제공 엠마 라이스>와 함께 읽는 인터내셜날가의 이야기
새야 새야, 라쿠카라차, 소나무와 같은 민요의 힘............... 

이런 이야기들이 적절한 도판과 어우러진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제시된다.
기존에 알고있었던 이들의 작품과 그 배경 그리고 그것이 세계 역사에 끼치 영향을 같이 읽어가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이런 책의 재미는 내가 기존에 알고있던 인물이나 작품을 만나는 것 보다는 새로운 인물이나 작품이야기를 발굴하는 재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쉬잔 발라동의 근대미술에서 유명한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했던 여성이다.

르느와르의 그림속에서 아리따운 소녀로 머리를 땋고 있는 그녀 쉬잔 발라동
하지만 그녀는 화가들의 모델로 만족하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화가라는 존재 자체가 희귀대상이던 시절에 그녀는 모델을 서며 어깨 너머로 화가들의 작업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 화가가 된 그녀 쉬잔 발라동

어디서 많이 본듯한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
서양미술에서 흔히 나타나는 포즈, 하지만 다른 그림들처럼 그림 속 그녀는 그녀를 바라보는 화면 밖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방에 누워 그녀가 응시하는 건 누구일까?
그녀는 지금 자신만의 공간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있을 뿐, 화면 바깥에서 누가 바라보든지 말든지 그건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푸른 방>이란 이 그림속의 그녀는 쉬잔 발라동 그녀 자신이겠지.... 

우리 작가 최병수씨의 새로운 발견도 신선했다.
너무 유명한 <한열이를 살려내라> 걸개그림의 작가가 바로 최병수씨란다.
음 웃긴건 내가 <한열이...> 걸개그림도 <장산곶매> <새만금 장승 솟대>도 모두 모두 좋아하던 작품이라는 것, 근데 이 모두가 같은 사람의 작품이란 건 몰랐다. ㅠ.ㅠ
이 책에서 다시 발견한 최병수씨의 작품 


200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리우+10 세계정상회의 행사장 앞에 설치된 얼음 펭귄조각 <남극의 대표> 

지구 환경문제를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하다니...
한눈에 반할 수밖에 없는 작품
이런 최병수씨가 지금 현재는 암으로 투병중이라니 그저 부디 부디 기운차리시고 건강해지시라는 말밖에는.... 

새롭게 만난 또 한명의 작가 <세바스티앙 살가도>

<세라 페라다의 금광>
개미처럼 사다리를 오르는 저들은?
금광의 노동자들.... 모두 금을 짊어졌지만 그 금은 절대 저들의 것이 될 수 없는 그 부스러기 하나도 그들 차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비참한 삶의 모습도 구경거리 또는 상품이 되는 오늘의 세계를 비판하며 자신이 찍고자 하는 대상속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마음에 카메라를 갖다대는 작가.
그것조차도 비판받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쾌적한 비행기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와서 몇군데 카메라를 펑펑 터뜨리고 떠나는 이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영국의 뱅크시
아 정말 무슨 소설이라도 한 편 써야 될듯 괴도 루팡처럼 나타나 그림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는 뱅크시
그의 벽그림, 그리피티는 보통 일반적으로 그리피티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난폭할 정도의 과격한 색깔이나 음침함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촌철살인의 유머감각과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그리피티라니...
이 정도 되면 당연히 예술이다.
부디 영국정부가 그의 그림들을 잘 보존해주기를...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에 그려진 뱅크시의 그리피티
벽 너머 푸른 하늘이라니.....
이 정도면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야 정상인데 이래도 움직이지 않는 이스라엘의 마음은 뭘까?
역시 그림이든 음악이든 시대와 삶을 반영할때 그것은 걸작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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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9-06-25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살가도의 사진 몇장을 구매한걸로 압니다.

시립미술관 자료실에 가면 그의 국내 전시회때 비매품으로만 나온 꽤 두툼한 사진도록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주제별로...광산, 난민촌..등등으로 사진을 구분했습니다.
아니면 바람구두의 개인홈페이지 사진편에 가도 십여장의 살가도 사진을 비롯해 그가 책으로도 썻던 디안 아버스-그녀는 디안으로 불리길 원했는데,일반적으로는 다이안 아버스로 하더군요-의 사진도 보실수 있을겝니다.

뱅크시의 그리피티는 제가 언젠가 배경화면으로도 썻었는데...책이 나와있지요 아마.

바람돌이 2009-06-26 13:34   좋아요 0 | URL
시립미술관 자료실에 살가도의 사진집이라... 잘 기억해두고 다음에 시립미술관 갈때 들러볼게요. 감사합니다.
뱅크시의 책은 어제 안그래도 도서관 갔더니 있더라구요. 그래서 냉큼 집어와 지금 잘 보고 있습니다. ^^

무해한모리군 2009-06-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책입니다..
미술보다는 음악편이 더 흥미롭더군요 ^^
(제가 음악에 더 무지해서 그런듯 --)
언제나 저는 다 읽으려나~~

바람돌이 2009-06-26 13:35   좋아요 0 | URL
저는 아무래도 귀보다 눈이 좀 나은 편이라 미술이 눈이 더 가더라구요. ㅎㅎ
매일 한 편씩 음미하며 읽는 재미도 쏠쏠할 듯 한데요. ^^
 
안녕하세요, 세잔씨
류승희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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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껍질을 벗기고 싶지 않다. 잘 그리기만 한 사과는 군침을 돌게 하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 모리스 드니 

세잔의 그림이라고 화보에 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사과등을 그린 정물이거나 아니면 세잔덕분에 너무나 유명해진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린 풍경화다.
이 그림들에게서 난 무엇을 느껴야 하는거지?
왜 세잔을 위대한 화가라고 부르는 거지?
별반 잘 그린것도 없는 것 같은 평범해보이는 정물화들, 그리고 괜찮아보이지만 뭐 그렇다고 엄청 특별할 건 없어보이는 산을 그린 풍경화?
세잔의 그림에서 내가 받는 느낌은 딱 요정도라고나 할까? 
이제 나만의 느낌은 아닌 것 같은 것이 비슷한 시대의 다른 화가들 - 고흐나 고갱에 비하면 인기도 면에서 많이 처지는게 사실이니 다른 사람도 비슷하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말이다. 미술사 관련 책을 보다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디에서고 세잔은 가장 위대한 화가, 아니 화가들의 스승같은 화가들의 화가가 되어있다.
20세기 최고의 화가들인 피카소, 마티스같은 이들이 보내는 찬사는 더 이상의 찬사가 부족할듯..
그저 입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작품으로 경의를 표하기까지 한다.
세잔의 목욕하는 여인들 그림을 보다보면 저절로 마티스의 <춤>이나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떠올리게 된다.  또한 세잔의 <마르디그라>는 피에로를 그린 피카소의 일련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들고, 생트 빅트와르산 연작의 마지막쯤에 오면 칸딘스키가 떠오른다.

여기쯤 와서야 왜 그토록 많은 화가들이 세잔에 대한 경의를 표했는지 살짝 이해될듯도 하다.
기존의 회화의 모든 관습을 뛰어넘어 새로운 회화의 세계를 열어준 이. 
사물의 본질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원근법도 전통적인 소묘법도 무시할 수 있다는 아니 오히려 그럼으로써 더 사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준 이
그가 바로 세잔 아닌가? 

책은 그런 세잔이 갔던 곳을 정말 참 열심히도 찾아다닌다.
그리고 세잔이 이젤을 놓아던곳에 이젤 대신 카메라를 놓고 그림속 풍경을 찾아낸다.
그런 풍경과 그림이 나란히 놓이면 아 여기가 이렇게 표현되었구나 경탄하게 된다.
사실적인 풍경이 아님에도 단순화된 몇개의 선과 그보다 훨씬 풍부한 색채로 똑같은 풍경을 그림속에 재현해낸 것에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작가가 의도한 것보다 세잔의 생애 전반을 짓누른 고독은 그렇게 많이 와닿지는 않는다. 세잔 그보다 더 고독했던 화가도 얼마나 많은가말이다.
다만 세잔의 이젤과 저자의 카메라가 같은 위치에 놓인순간 세잔의 그림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걸 느끼는 즐거움이 더 컸다고 할까? 

아직까지는 세잔의 그림을 실제로 본적이 없으니 내가 세잔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이를듯... 하지만 세잔이라는 화가의 그림을 그저 별것없는 풍경화나 정물화로 생각하지는 않으리라..


고대 로마의 길들은 늘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 길들은 풍경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다. 그림은 바로 이와 같이 길 위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으로부터 출발한다. -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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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황금빛 유혹 다빈치 art 9
신성림 지음 / 다빈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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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열리는 클림트전을 보러가기 전에 공부삼아 오래전 사둔 이 책을 들었다.
표지의 저 키스는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지... 

"나에 대해 뭔가 알고싶다면 - 물론 화가로서의 나 말이다 - 내 그림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서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될 것이다."(클림트) 

가수가 노래로 자신을 표현하듯이 화가가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두에 클림트의 저 말을 내걸었듯이 저자는 클림트의 그림에 아주 충실하게 책을 써내려간다.
클림트의 그림이란게 대부분 어떤 역사적 평가나 논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는 어렵다.
다만 그의 황홀한 색채와 관능적인 분위기에 반하는 것이 대부분일터고 나 역시 그러하다.  
저자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클림트의 그림을 보며 느끼는 주관적인 감상과 느낌이 내용의 주가 되고 간간이 클림트와 주변 인물들 미술계의 당시 동향과의 연관등을 살피는 정도이다.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온전히 주관적인 것이고 굳이 저자의 시선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내가 느낀 감정을 좀 더 명확하게 말하거나 또는 다르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데 안내정도로 삼을 수 있을까?
그런만큼 어쩌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책의 내용이라기 보다는 도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겟다.
클림트 대표작의 대부분과 잘 보지 못했던 수많은 그림들이 도판으로 제시되어있는데 도판의 수준이 굉장히 깔끔하고 좋다. 색감도 정말 좋고.....
그의 그림들을 이렇게 책 한권으로 훑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 되어준다. 

아 그런데 이 책을 읽고 클림트전을 보러갔었다.
유명한 유디트가 걸렸고 이 책속에서 볼 수 있었던 작품들도 꽤 많이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진짜 그림은 항상 도판보다도 훨씬 좋은 경우가 더 많다는 나의 막연한 생각이 이 전시회 관람에서 흔들릴 줄이야....
클림트의 그림은 유난히 사진빨을 잘 받는게 아닐까 싶은 의구심이 확 드는 전시였다.
대표작 유디트 하나만 보더라도 오히려 도판에서 더 감동적인 느낌이었으니...
이건 슬픈 경험이다.
물론 내가 빈에 가서 그의 다른 작품들을 더 본다면 이 생각은 충분히 바뀔 수 있는것이겠으나 이번 서울 전시에서는 책속의 도판 속 클림트의 그림들이 더 좋았으니 어쩌면 좋을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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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탕 2009-03-03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 일과중 하나가 동아일보-_-에 올라오는 클림트 그림 설명 모으기에요.
거의 매일 하나씩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설명들을 싣고 있는데 나중에 어따 쓸때가 있으려나 싶어 모으고 있지요.
저도 이번주, 늦어도 다음주 내에 클림트를 보고 오려고 하는데 제발 하느님이 보우하사 제가 갔을때는 아가들이 조금만 있어주길 바랄뿐이에요.

바람돌이 2009-03-03 09:53   좋아요 0 | URL
아가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던걸요. 정말 사람에 치여서 원....ㅠ.ㅠ
전 솔직히 클림트전은 돈이 조금 아까웠어요. 생각만큼 그림이 안 멋져서요. ㅎㅎ 오히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는 퐁피두센터전이 멋지던걸요.

무해한모리군 2009-03-03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전시환경이 좋지 않았던거 아닐까요?
저는 미술관에 가면 쬐끄만줄 알았던 그림이 너무 커서 늘 깜짝 놀라곤 해요 ㅎㅎ
제취향은 클림트 보단 에곤쉴레..
퐁피두센터전 보러가야겠네요~~

바람돌이 2009-03-03 11:40   좋아요 0 | URL
오스트리아에 직접가서 보신 분의 말을 들어보면 클림트 그림을 전시하기 위한 배려가 굉장하다더군요. 어떻게 전시하느냐에 따라 달라보이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좀 더 여유있게 봤다면 어쩔지 알수는 없겠죠? ^^
퐁피두센터전은 끝날때가 다 된것 같던데 한 번 알아보세요. ^^

꿈꾸는섬 2009-03-08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보다 도판이 좋았다구요.ㅜ.ㅜ 전시회에 못가봐서 아쉬웠는데 전 그냥 책이나 봐야겠네요.ㅎㅎ

바람돌이 2009-03-09 10:43   좋아요 0 | URL
뭐 느낌이야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의 경우는 그랬어요. 오죽하면 늘 사는 도판도 하나 안사왔겠어요. 내 책들의 도판이 낫구나 하면서... ㅠ.ㅠ

simple 2009-04-2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며칠 전에 클림트전 다녀왔는데요. 유디트1, 생각보다 무척이나 감동받고 왔답니다. ^^; 솔직히 그림 크기가 넘 작아서 놀라기도 했지만, 그 생생한 얼굴 표정에 그만, 그 자리에 못박혀 보고 또 보았다지요.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비싼 입장료에 비해 조금은 아쉬운 전시회였어요. 전 평일 저녁 때 가서 그래도 비교적 붐비지는 않았다지요. ^^;

바람돌이 2009-04-25 23:58   좋아요 0 | URL
전 사람에 치었어요. ㅎㅎ 워낙 오랫동안 도판들을 봐서 그런지 생각보다 감흥이 덜해서 전 좀 어리둥절한 전시회였어요. 그래도 그림 하나가 마음에 들면 그 전시회 본전은 뽑았다고 생각해요. ^^
 
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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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제목을 이렇게 뽑아놓으면 도저히 안 읽을수가 없다.
그림을 보는 것도 즐거운데 하물며 그 뒷이야기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제목이 보통 낚시라는 것도 알면서 그런데도 낚인다.)
솔직히 제목만큼 그리 섬뜩하지는 않다. 그리고 어느정도는 알려진 이야기도 많고...
그림에 얽힌 사회적 배경 또는 화가의 개인적 트라우마 이런 것들이 주된 이야기인데 그런 이야기들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섭다고 섬뜩하기까지 하겠는가말이다. 

그래도 다행인건 낚시에 걸린건 맞는데 그렇다고 해서 전혀 헛된 입질은 아니었다는거다.그림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는 방식은 꽤 재밌다. 이야기 자체도 재밌게 읽을 수 있고...
다만 저자가 무서운 내지는 섬뜩한 얘기라고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바람에 무섭다기 보다는 심각하거나 아니면 풍자적이거나 하는 것까지 억지로 무섭다 무섭다 하는 건 좀 지나친 오버가 아닐까 싶어 책을 읽다가 자꾸 걸리게 된다.   

      

왼쪽은 드가의 아름다운 그림 <에투알>이다. 에투알은 '스타'를 의미하는 프랑스어란다.
오늘 날 우리가 보기엔 아름답기만 한 그림이지만 저자는 저 무대뒤의 검은옷을 입은 신사에게 주목한다. 발레가 오늘 날은 고급예술로 여겨지지만 드가가 살았던 저 시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회적 상황을 얘기해 주는 것이 바로 저 신사의 존재다.
드가의 시대에 무용수는 노동자계급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그리고 예술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그럼으로써 무용수는 거의 창녀로 취급받았던 것. 따라서 대부분의 무용수는 좋은 말로 후원자 실제로는 재력가의 정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단다. 실제로 드가의 그림에서 저런 검은 옷의 재력가스런 남자들은 시시때때로 출몰한다. 뭐 무섭다고까지 하기는 좀 그렇고 아름답게만 여겨지는 그림에서 당대의 사회상을 살펴보는 재미가 이렇게 있다.
오른쪽 그림은 르동의 <키클롭스>이다. 외눈의 거대한 거인으로 무서움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애기같은 얼굴이 오히려 애처로움을 느끼게 하는 거인은 어떤 의미일까?
이 그림의 키클롭스는 바다의 님프를 짝사랑해서 쫒아다니나 보답받지 못한다. 결국 질투에 눈이 먼 이 거인은 바다의 님프의 진짜 애인을 향해 바위를 집어던져 죽이고 만다.(요즘 말로 하면 스토커..)그런데 르동이 이런 그림을 그린 이유를 저자는 르동의 어린시절에서 찾는다. 르동은 태언난지 불과 이틀만에 다른 집의 수양아들로 보내졌단다. 그는 그곳에서 행복하지 못했나보다. 더구나 자신이 행복하지 못할때 르동의 형은 원래의 집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흠뿍받고 자라고 있었다.(적어도 르동이 보기에는 그러했다는 거다.)르동은 나중에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만 여전히 사랑받지 못했고 버림받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영원히 어머니의 사랑을 뒤에서 숨어서 갈구하는 아이였단다. 그렇다면 르동이 저 거인을 저렇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그려놓은게 이해가 간다. 저 키클롭스는 르동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거겠지... 역시 무섭다기 보다는 애잔한 이야기다. 

이 책에서 정말로 무서웠던 건 보티첼리의 <나스타조 델리 오네스티의 이야기>연작을 해석하는 저자 나가노 쿄코의 관점이었다. 

  

 

이 이야기는 <데카메론>에 나오는 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꾸민 것이다.
한 청년이 어떤 여자를 열렬히 짝사랑했으나 보답받지 못했다. 그래서 이 그림에 나오는 상황을 그 여인에게 보여준다. 자신과 같이 보답받지 못했던 사랑을 했던 한 기사가 자살했다. 얼마 뒤에 죄를 받았는지 그 여인도 죽었다. 그리하여 한 명은 자살, 한명은 냉혹함으로 인하여 죄를 받아 매일
같은 시간에 기사는 여자를 쫒아가 죽이고 여자의 내장을 개에게 던져준다는 것이다.
이 상황을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보여줌으로써 그 청년은 결국 여인의 사랑을 얻어 결혼하게 된다는 잔인하고도 잔인한 이야기.
그런데 이 그림속의 이야기를 살아생전 같이 했어야 했던 연인들이 함께 되지 못함으로써 죽은 후에 영생을 같이 하게 된 궁극적 사랑으로 해석하는 저자의 관점은 도저히 아니올시다이다. 이건 그야말로 남성중심의 오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저 상황을 보여주고 결혼을 얻어내는 청년 역시 요즘이라면 공갈협박죄로 걸려들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여성 작가인데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안된다. 

그래도 저자에게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 <마리 앙투아네트 최후의 초상>이다.
단두대로 끌려가던 순간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펜으로 잽싸게 스케치해낸 다비드의 작품이다.
저렇게 선 몇개로 초라해진 프랑스의 왕비의 마지막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낸 다비드는 정말 천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 한 점의 스케치속에 다비드가 부정하고 싶었고 짓밟고 싶었던 구체제의 모습을 얼마나 잔인하게 드러냈는지...
마지막 순간을 향해 가는 여인에 대한 어떠한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 정말 냉정한 스케치가 아닌가말이다.
하지만 이런 다비드가 이후에 또 나폴레옹의 대관식을 얼마나 대단하게 그려내는가를 보면 이 그림에 담긴 무서움이 배가된다. 혁명을 옹호하는 순간에도 그 혁명을 배반하는 순간에도 얼마나 철저한지.. 또한 얼마나 천재적인 능력으로 충만한 화가인지 말이다.
권력에 따라 이렇게 마음대로 자신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자가 천재적인 재주를 가졌다는 것은 정말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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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01-14 0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바람돌이님은 또 뽐뿌질을 하시고....=3=3=3

바람돌이 2009-01-14 12:00   좋아요 0 | URL
키티님은 안읽어도 대충 아는 얘길듯한데요. ㅎㅎ

프레이야 2009-01-19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비드가 그린 스케치와 리뷰, 인상적이네요.

바람돌이 2009-01-19 01:48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다비드가 간과한건 저 여인이 여왕이었다는거죠. 저 자세를 보세요. 죽을때까지 여왕이었던 여자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