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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평점 :
나는 난민이자 망명 신청자다. 익히 들어서 별 것 아니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결코 단순한 말이 아니다. -17쪽
소설의 첫 문장은 아니지만 실제 첫 문장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문장이다.
소설의 주인공 살레 오마르는 60이나 된 나이에 살던 곳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한다.
소설은 그가 영국 게트윅공항에 도착하고 망명신청을 하는 순간부터 그의 여정과 심리를 집요하리만큼 따라간다.
그동안 독자는 내내 궁금하다.
이 사람은 왜 난민이 되었고, 왜 망명을 신청했을까?
3부분으로 나뉘는 이 책의 1부에서는 여기에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를 끈질기게 주인공을 통해서 따라가고 있을 뿐.....
임시 수용소에서 주인공은 난민을 돕는 친절한 영국인의 집으로 옮겨진다.
그 곳에는 그 외에도 먼저 영국에 도착해 난민 심사를 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
친절한 영국인들은 그들 자신의 자비심에 과잉되어 있고, 불쌍한 난민들을 돕는다는 사실에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이들을 대하지만, 사실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먼지쌓인 방 한칸일 뿐이다.
이곳에 먼저 와있는 게오르기라고 하는 체코 청년의 난민신청심사가 잘 안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한다.
그 때 게오르기를 관찰하는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게오르기는 그 대화를 뜨거워진 눈으로 따라가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것은 존엄성이 꺾여버린 비참한 광경이었고, 자신들의 열정의 결과를 논하는 사람들의 바로 그 열정이 유지되는 것에 목숨이 달린 그는 비극적인 몸뚱이였다. -89쪽
이 소설에서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문장이었다.
한 번도 내 자신이 난민이 된다는 생각을 못해보았고, 내 삶의 방향이 나 아닌 사람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되리란 생각을 못해보았던 내 삶은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난민이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이고, 그럼에도 누군가가 자비를 베풀어주지 않는다면 바로 그 돌아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돌아가 죽어야 하는 사람, 즉 자신의 삶과 생명이 온전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타인들의 결정에 달려있는 존재.
그럼으로써 뜻하지 않게 비극적인 몸뚱이가 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
관념으로 생각하던 난민이 육체와 생명을 가진 실체로 확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답이 이런 문장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하리라고 생각해보지 못한 타자의 입장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리고 다시 돌려 내게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럼으로써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예의를 갖추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중과 환대의 태도를 갖추는 것.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이토록 절실하게 타자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할까?
2부에서는 또 한 명의 난민이 등장한다.
라티프 마흐무드라는 이 인물이 난민이 되는 것은 조금 독특하다.
아프리카 동부해안의 잔지바르 섬 출신인(작가의 고향이기도 한) 이 인물은 복잡한 가족사를 뒤로 하고 독립 이후 사회주의국가와의 수교를 강화했던 탄자니아의 정책에 따라 동독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 만난 펜팔친구였던 엘레케라는 동독청년과 그는 서방 세계로의 망명을 꾀하고 성공하는 것이다.
딱히 정치적인 이유도 생명의 위협도 아닌 내가 더 열망하는 곳, 열망하는 생활방식으로의 이주다.
이런 형태의 난민이 가능할까를 생각해봤는데 냉전 시대 동독에서의 이주라면 가능했겠구나 싶기도 하다.
물론 라티프가 그의 고향 잔지바르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망명을 했다면 아마도 바로 송환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상대적으로 젊었고, 적응의 에너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라티프의 이야기는 그의 고향에서의 삶을 서술하는데 치중하고 있다.
그리고 1부의 주인공 살레 오마르의 삶과 교차되는 지점들이 등장하며 3부에서 두 사람의 만남과 엉킴을 예고한다.
살레 오마르는 자신의 이름으로 난민이 되지 못했다.
그가 쓴 이름은 라티프 마흐무드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더군다나 둘은 원수라면 원수관계였다.
라티프 역시 그 사실을 안다.
왜? 내 아버지와 우리 가족의 집을 빼앗았던 이 사람이 나의 아버지의 이름을 쓰고 있는거지라는 궁금증 때문에 라티프는 살레 오마르를 만나러 오고 그의 얘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이제 소설은 살레 오마르가 난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라티프가 고향을 떠난 이후 고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가 펼쳐진다.
잔지바르가 독립을 하고 왕조국가에서 공화국이 되고, 그 과정에서 섬의 권력자들이 바뀌고, 당연히 그런 변화에 편승한 누군가는 권력의 부스러기를 잡고 무기를 휘두르고,누군가는 납작 업드려 굴종하거나,아니면 그 칼날에 희생당하거나, 모두가 익히 아는 상황들이 벌어진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벌어지는 희생이 정치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한 번의 광풍이 몰아쳐서 정치적인 희생이 지나가고 나도 광풍은 꺼지지 않는다.
정치의 자리를 대신해서 정치의 껍질을 쓴 사적인 복수의 장의 펼쳐진다.
살레 오마르는 바로 그 사적인 복수의 대상이 되었고, 아무 말 못하고 11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던 감옥에서 겨우 돌아온 고향, 이미 오래 전에 그의 아내와 딸은 전염병으로 죽은 뒤였다.
살레 오마르는 그럼 여기서 복수를 꿈꾸었을까?
이 소설이 가지는 장점이 여기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나면 복수를 꿈꿀 희망도 사실상 가지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살레 오마르 역시 무언가를 도모할 힘도 의지도 없다. 그저 이곳에서 무탈하게 살고 싶을 뿐이다. 다시 수용소로 감옥으로 가고 싶지 않을 뿐.....하지만 세상 일이 늘 그렇듯이 운명은 살레 오마르를 또 감옥으로 내몬다.
그리고 살레 오마르는 난민이되어 망명의 길에 오르는 것이다.
집안의 원수였던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 마흐무드는 이제 어떻게 될까?
망명지에서도 둘은 오래된 집안의 원한을 간직하고 싸워야 할까?
아니 이곳에서는 둘은 둘다 외로운 이방인으로 고단한 삶과 외로움과 싸우는 존재들일 뿐이다.
서로의 현재를 그저 안아주며 테이크 아웃 음식을 나누고 기댈 뿐이다.
살레 오마르의 삶에서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자신이 불합리한 일을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방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레 오마르 역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누군가가 불합리한 일을 당했다면 아마도 똑같지 않았을까?
그것은 나아가 아프리카 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역사 어디에서나, 그토록 자신만만한 너희 유럽도 똑같지 않느냐고 작가는 말한다.
그 사진 속에는 세 명의 유대인이 넙죽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닥 솔을 지고 빈의 인도를 쓸고 있었습니다. 그들 주변에 그들 아주 가까이에, 그들의 뒤와 앞의 인도에 빈 사람들이 무리지어 빼곡히 서서 히죽거리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모든 나잇대의 사람들, 어머니들과 아버지들과 할아버지들과 아이들이 누구는 자전거에 기대 있고 다른 누구는 쇼핑백을 든 채 점잖고 일상적인 모습으로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러는 동안 그 세 사람은 그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켄크로이츠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세 유대인의 굴욕에 웃음을 터뜨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어요. 그 세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신만이 아시겠죠. - 373쪽
이 작가의 능력이 참 빛나는 순간이 이런 순간이다.
단 하나의 우화로 아프리카의 역사에 코웃음치는 유럽에게 한 방을 날려버리는 거다.
너희라고 다르냐? 결국 야만의 역사는 아프리카든 유럽이든 다를게 없다고 말이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도 이런 이야기들을 이렇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이방인으로 살아왔던 오랜 경험의 축적이리라 짐작한다.
다만 별 하나를 뺀 것은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 때문이다.
1부에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게 했던 서술들이 2부 라티프의 이야기에서는 지나치게 작위적인 면도 보이고, 라티프라는 인물 자체가 지나치게 현실감이 없달까, 그가 가족이고 고향이고 모든 것을 버려버리는 과정이 그렇게 개연성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프리카 그것도 이슬람교도속에서 자란 라티프가 이토록 쉽게 가족을 한 순간에 버려버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이야기가 긴장감을 놓쳐버린다.
덕분에 살레 오마르와 라티프의 긴장으로 팽팽해야할 3부 역시 미리 김이 빠져버리는 모양새다. 3부쯤 오면 더 이상 살레 오마르의 이야기가 궁금해지지 않는 이상한 경지까지......
소설이 가져야 할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몇몇 빛나는 장면을 충분히 견인하지 못하는,
그래서 작가가 중점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난민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탐구인지, 동아프리카의 부당한 역사에 대한 비판인지, 서구 문명의 오만함에 대한 경고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안타까움을 낳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