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순정의 땅, 히말라야를 걷다
김홍성 지음 / 세상의아침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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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발밑을 보고 한발 한발 힘주어 걸었다.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사라졌다. 
나중에는 아무 생각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내 몸의 움직임만 간간이 느껴질뿐이었다...



내가 오른 최고 높이의 산은 속리산 문장대이다. 산을 전혀 오르지 못하던, 타지 못하던 내가 천고지를 올랐을때의 감격은 정말 이루 말할수가 없다. 그런데 그 천고지가 다섯개 여섯개는 있어야 하는 히말라야, 지상에서 가장 순결한 땅인 '라다크' 의 마카밸리와 잔스카르를 향한 저자의 때묻지 않은 순결이 사진과 그의 글에 모두 녹아 함께 트레킹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사진을 들여다 보고 또 봐도 라다카인들은 정말 순박하면서도 순진하다. 깊게 폐인 주름에도 척박한 그들의 삶이 녹아 나 있는듯 먼지가 묻은 옷을 입고 있지만 전혀 때묻지 않은 깨끗한 모습으로 보인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히말라야의 깨끗함을 닮아서일까.

그의 발길을 쫒다 보면 백개의 물집과 늘 지나는 민가를 뒤져 밥보다 더 찾는 '' 이라는 우리의 막걸리와 비슷한 술과 함께 하는 그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늘과 가까운 곳이라 그런지 밤이면 더욱 아름다운 곳,주먹만한 별과 가끔 떨어지는 별똥별은 어떤 느낌이며 의미인지 한번 가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 본다. 봐도 봐도 질릴듯도 한데 척박함의 어느곳에 그들의 '' 이 숨겨져 있는지 가고 싶어진다.

척박한 땅에서 보는 쌍무지개도 보리밭도 노을도 다 다른 의미로 다가올 듯 하며 욕심부리지 않고 그들 나름 자연과 동화되어 산소부족에도 잘 견디며 강인하게 살아가는 그 삶을 직접 만난다면.. 과연 저자나 무진스님처럼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아무 욕심없이 히말라야를 대했기에 사진에도 글에도 그의 욕심보다는 순결과 순정이 담겨 있는 듯 하다. 티비에서 언젠가 '차마고도' 라는 다큐를 했다. 그 프로를 너무도 감동적이게 보아 재방을 할때 다시 보기도 했는데 이 책의 그 길과 차마고도는 어느 지점쯤에서 일치하지 않을까 한다. 먼지가 풀풀 날려도 한줌 소금을 위해 한줌 곡식을 위해 먼 길을 가던 그 사람들처럼 많은것을 욕심내지 않고 그저 '히말라야' 만을 바라보아서인지 글과 사진이 좋다.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한 일 년쯤 이렇게 빈둥대며 눌러 살고 싶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렇게 골목길까지 훤해지면 떠날 때가 된 거야..'
'골목을 알면 떠날 때가 된 것이다. 형님, 그게 바로 시네요.'
'정에 붙들리면 더이상 방랑자가 아니다. 골목길 끝의 주막집 노파는 물론 우리도 정들기 전에 작별을 나누자. 그것이 바로 하염없는 방랑자들의 숙명..' 

순박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미루나무, 예전에 우리 동네에도 미루나무가 많았었고 우리네 때묻기 시절엔 미루나무가 많았었는데 이곳엔 미루나무가 그래도 많은지 사람과 함께 하는 나무가 참 인상적이다. 힘들지만 가끔은 밤하늘의 별들이 시가 되고 지나는 바람이 시가 되고 태초의 시작처럼 울려대는 천둥소리가 시가 되고 돌풍에 날아가 붉은 강물에 떠내려가는 자신의 껍데기 같은 흐물흐물한 침낭이 시가 될 수 있는 곳 히말라야, 저자의 순박함처럼 정이 넘쳐나는 사람들이 척박함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곳 라다크를 그와 함께 걷고 나니 라다카들처럼 나도 힘이 솟아 나는것 같다. 그 땅에는 강인함을 주는 무언가가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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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너는 자유다 -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난 낯선 땅에서 나를 다시 채우고 돌아오다, 개정판
손미나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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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가고 싶어. 내 몸도 마음도 그걸 간절히 원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내, 그럼 가면 되잖아. 누가 가지 말래?...


휴식이 필요하다고 느낄때 그녀가 읽은 책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파울로 코엘료의<연금술사>는 그녀에게 '지금' 떠날 용기를 주었다. 터닝포인트처럼 대한민국에서 쟁쟁한 아나운서였던 그녀가 현실을 박차고 나가 새로운 도전을 해 볼 기회를 안겨 주었던 작가와 책의 내용은 그녀에게 새로운 삶과 희망을 안겨 준 듯 하다. 지금 그 자리에 안주를 해도 남들에게는 부러운 자리이건만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할건만 같은 일들이 그녀에게 마법처럼 일어났다.

서어서문학과를 나온 그녀에게 스페인은 낯선곳이 아니기에 어쩌면 더 많은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희망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루어지겠지만 어쩌면 뜻하지 않은 행운도 그녀의 편이었던 것 같다. 인연처럼 아는 지인을 만나러 일본여행을 갔다가 일본의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스페인 남자 둘, 그들을 다시 만나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어쩌면 인연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녀가 스페인에 가고 싶었던했던 이유도..

여행은 공부를 목적으로 하든 여행을 목적으로 하든 먹거리를 목적으로 하든 정말 내 일상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생의 활기를 불어 넣어 주는 것 같다. 그것도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이는 정열의 나라일때는 더 할 수 밖에 없다. 투우와 정열의 춤으로 유명한 스페인, 그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구미가 당기는데 그녀의 책에는 사진보다 그녀가 보고 느끼고 직접 겪은 일들이 자세하게 나와 있어 읽는 맛이 더 하다. 궁금증이 일때 쯤에 한장의 확인샷이 첨부되어 있어 다른 여행 에세이보다 그녀가 노력한 흔적들이 더 보인다.

그간 정든 방송생활을 접고 다시 공부를 하겠다는 각오도 대단한데 공부와 여행 자유를 모두 잡은 듯한 그녀의 글 속에서 함께 웃고 울고 그녀와 스페인 여행을 함께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듯한 표현이 좋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에 자신의 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듯이 웃는 자에게는 복이 더 많이 온다고 하였던가. 그녀의 활짝 웃는 얼굴마다 행복과 희망, 생의 활력이 넘쳐 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녀에게 내재된 정열이 스페인에서 모두 발산한것 처럼 스페인 두루 공부와 여행을 하며 그녀가 전해 주는 감칠맛 나는 여행 이야기가 나도 얼른 비행기를 타고 '환상의 섬' 으로 날아 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다. 

낚시바늘에 새끼손가락이 끼었던 추억담을 읽으며 얼마나 웃었던지 눈물이 다 났다. 그마져도 행복한 추억담이 될 수 있는 그녀만의 자유, 자유는 찾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 같다. 우린 언제나 현실을 핑계삼아 '자유가 없다' 고 변명하며 살기에 바쁜데 그녀처럼 용기를 내어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어느 순간을 만들어 보는 것도 남다른 생의 의미가 있을 듯 하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능력도 찾고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하며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웬만한 햇빛은 양산이나 모자로 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해가 비치는 쪽을 따라다니며 그 따스함을 즐긴다. 아무래도 스페인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식물처럼 광합성 작용을 하는 것 같다.. 그녀의 표현처럼 그도 일년여 스페인 생활에서 스페인 사람들처럼 광합성 작용을 하고 돌아온 것은 아닐까. 햇빛에 그동안 자신안에 누적되어 있던 먼지들을 모두 태워 버리고 <희망과 열정> 으로 가득 채우고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덤으로 읽는 독자에게도 희망과 열정을 전해 준듯 하여 그녀를 따라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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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가는 길 - 일곱 살에 나를 버린 엄마의 땅, 스물일곱에 다시 품에 안다
아샤 미로 지음, 손미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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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난한 자의 자식인지 부잣집에서 태어났는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란다. 어떻게 값지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돼. 동포들을 도우면서.좋은 일을 하면서 말이다... ’아샤, 너는 갠지스의 딸이란다.’


손미나가 스페인 유학시절 읽고 눈물을 펑펑 흘리고는 출판사를 찾아가 한국에 소개하고 싶다고 하여 나오게 된 책이다. 아샤(희망이란 뜻)는 태어나면서 부모와 헤어져 수녀원에서 살다가 7살에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입양이 되었다. 당시 그녀가 입양이 되려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양부모는 쌍둥이자매를 입양하려 했는데 우연찮게 입양하던 때에 쌍둥이중 하나가 잘못되면서 아샤가 또 입양이 된 것이다. 어쩌면 그녀의 이름처럼 희망이 그녀의 운명에 작용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모두, 혼자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까..
그이 양부모는 그녀를 만나기전부터 그녀에 관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를 입양하기 전의 일은 모르지만 입양되는 순간부터 기억하게 하려고 쓴 부모의 일기에서도 그녀를 얼마나 사랑과 애정으로 키웠는지 알 수 있고 그녀 또한 그런 양부모 밑에서 구길살 없이, 바로셀로나에서는 그녀가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그녀 나름의 길을 찾아 올바른 성인으로 잘 자랐지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 했다.

봉사활동을 위해 인도를 20년만에 처음 찾은 그녀, 그녀를 맡아 키워주고 그녀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기까지 머물렀던 수녀원을 찾아 자신의 지난 날을 찾아 보려 했지만 자세하게 자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지 못한다.하지만 다시 7년후에 찾았을때 그녀는 뜻하지 않은 ’언니’의 소식을 접한다. 그녀에겐 언니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언니를 찾아 수소문 한 결과 언니의 소재를 파악하고 찾아 나서려던 순간에 형부가 수녀원으로 찾아 오고 그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형부로 인해 언니네 동네는 잔치분위기. 

촬영팀들과 언니네 집을 찾아 나섰지만 그녀와 언니 사이엔 언어의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눈빛과 마음으로 통하는 핏줄의 힘, 이곳에 와서 비로소 자신이 이곳이 뿌리라는 것을 알겠듯이 보이는 사람 모두가 비슷하다. 여기도 아샤 같고 저기도 아샤 같다. 그녀 언니 또한 그녀와 비슷하다. 언니를 만남으로 인하여 더 많은 자신의 지난날과 만나게 되는 그녀, 비로소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에 안착한다.긴 만남을 하지 못하고 수녀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비밀리에 그녀의 언니인 우샤를 다시 찾아가길 바라고 그녀와 함께 하는 몇 사람들과 언니를 찾아간다. 갑자기 방문한 그녀의 출현에 놀라하는 조카들의 ’이모’ 소리,에 내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언니에게서 자세하게 자신의 어떻게 해서 고아원에 가게 되었는지 듣게 되고 자신을 낳고 세달후에 돌아가신 엄마의 부재때문에 이복언니인 그녀의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언니에게 맡겨져 젖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부모가 될 뻔한 그녀의 이복언니 사쿠바이를 찾아 나선다. 이복언니인 사쿠바이를 찾아감으로 인하여 자신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듣기도 하고 마지막을 함께 했다는 언니 사쿠바이의 말에 자신의 엄마는 죽었지만 모두의 기억속에 아직도 아름답게 존재 하고 있음을 느낀다. 

왜 우리는 누군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문제보다 어디에서 왔는지 혹은 어디 출신인지에 더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해답은 없었다..자신의 뿌리와 고향인 인도를 찾았다가 평범한 음악선생님의 삶에서 TV진행자로 NGO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 그녀가 수녀원의 나선형 계단을 올라 수녀님에게 ’엄마와 아빠를 만들어 주세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바로셀로나로 보내주세요..’ 하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현재 삶은 자신이 다시 찾게 된 언니의 삶과 어쩌면 똑같을 지도 그 삶이 자신의 삶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언니와 자신의 이름이 바뀌어 자신이 언니의 <희망>을 뒤바꾸어 가진것처럼 자신의 <희망>을 찾아 스페인에 입양이 된 것이며 다시 찾은 고향에서 언니와 그외 가족들과 부모님들에 대한 이야기며 자신의 뿌리를 찾고 나서 더욱 자신의 인생을 다시 보게 된 아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부정적인 면이 ’입양’ 에 대한 종지부를 찍 듯 그녀의 삶은 많은 이슈가 되기도 하고 가슴 뭉클하게 한다. 그녀의 양부모가 그녀에게 쏟은 ’부모의 정’ 은 배 아파 낳은 자식만 자식이 아니라 ’가슴으로 낳은 자식’ 도 충분히 자신의 자식이 될 수 있으며 입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다. 

인도,극과 극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나라. 불과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돈을 가진 서구화된 사람들과 그야말로 무일푼의 빈곤충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며 세계적으로 규모가 큰 영화 산업을 자랑하고 세계적인 지식인들을 배출하며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구시대적 사고방식과 옛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 인도를 가족을 찾고 자신의 지난날을 찾음으로 인하여 멀게만 느껴졌던 인도를 그녀는 다시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샤의 첫번째 인도 여행까지는 다큐멘터리를 보듯 무덤덤하게 읽어 나갔는데 갑자기 언니를 만나고 가족들과의 상봉에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시야를 흐렸다. 역자가 눈물을 펑펑 쏟았다는 것이 나와 같은 부분이 아닐까. 자신의 잃어버렸던 부분과 ’혼자’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따듯한 자신의 핏줄로 채워짐으로 인하여 양부모와는 다른, 뿌리의 정으로 인하여 가슴 뭉쿨해지는 카타르시스적 이야기를 전해준 아샤의 ’엄마에게 가는 길’ 은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진들에서 그녀의 환한 웃음이 있어 더욱 행복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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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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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에 들거나 직맹에 들거나 어쨌든 조그만 핑곗거리만 있으면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까지도 증오했다...


자기 자신까지 증오했던 과거, 작가가 표현한  '기독교와 맑스주의' 인 손님은 그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끼쳤길래 자기 자신까지 증오하며 살게 만들었을까.. 황해도 신천마을에서 살던 형 류요한과 류요섭, 그들은 한국전쟁후에 미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지난날의 과오때문에 커튼으로 온집안의 햇빛을 차단한채 사는 요한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있듯 지난 과거 그가 저질른 떠도는 영혼들 때문에 그의 일상은 평화롭지 못하다.

동생 요섭이 북한 방문을 하게 된 어느날, 북한으로 떠나기 삼일전에 갑자기 형 요한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평화롭게 운명하였다 하지만 요섭은 석연치 못하다. 형을 화장하며 그는 남몰래 골편 하나를 챙겨 넣는다. 목사로 있는 그는 북한 방문에서 가족을 찾지 않으려 자신의 고향을 거짓으로 답했지만 북한측에서 그에게 은밀히 접근하듯 하여 그의 고향방문과 가족들을 상봉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형이 전쟁중에 저질른 과오, 형의 손에 의해 죽어간 영혼들이 그의 곁을 떠돈다. 북에 남겨진 가족들을 만나기도 하고 고향을 방문하며 지난 과거와 영혼들과의 화해를 하듯 형의 지난날을 풀어 가난다. 기독교와 맑스주의는 평범하던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아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죽고 죽이고 서로를 증오하게 만든다. 자신이 살기 위하여 남을 죽여야만 하는 현실, 그렇게 <손님>은 신천마을 사람들의 삶을 엄청난 힘으로 뒤흔들어 놓고는 역사에 오점을 남기듯 그 과거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다시금 그 과거와 화해를 하게 하듯 살아 남은자들의 발길을 그 상흔의 장소로 이끈다.

적은 내부에 있듯이 그들 자신속에 자리한 이념이 무엇이길래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피를 보아야 했는지 작가는 황해도의 뻣뻣한 사투리와 함께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영혼들과 함께 그들의 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함께 과거와 현재로의 여행을 하며 화해를 해 나간다.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 했는데 읽고 나명 수긍을 하게 만든다. 방북사건으로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이 책을 읽는 때 마춤하여 신문의 한귀퉁이를 장식한 그의 발언은 5.18이라 그런지 더욱 뒤숭숭하게 만들었다. 이 작품과 <오래된 정원>을 읽은 독자로 그가 왜 그런 발언을 해야 했나 생각을 잠시 해 보며 요섭이 형의 골편을 고향땅에 묻음으로 인하여 그를 불면의 밤으로 이끌던 영혼들과 작별을 하게 되지만 내겐 더 무거운 짐만 남은 듯 한 느낌이었다. 작가가 기록하지 않았으면 역사에 그냥 묻혀 버렸을 황해도 지방의 전쟁의 상흔은 그를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언제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더 읽고 싶은 작품이다. 우린 어쩌면 아픈 상처라고 하여 덧날까봐 쉬쉬하며 덮어두려고만 했지 꺼내어 다독이며 화해하고 작가의 진혼곡처럼 상흔을 달래려고 했던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 '손님' 이 표지의 무거움처럼 한동안 무겁게 가슴을 내리 누를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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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청소년 현대 문학선 8
김주영 지음, 정현주 그림 / 문이당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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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는 제일 작지만 고래보다 크고 의젓하며,강직하고 담대한 어족이다.그리고 내장까지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몸체로
일상을 살면서도 알을 밴 흔적만은 감추는 은둔자의 삶을 산다..

<홍어>에 이어 읽은 멸치는 홍어에서는 아버지의 부재였지만 이 소설은 어머니의 부재이다.집을 나간 어머니, 어머니의 부재로 인하여 외삼촌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된 아버지, 그는 포수이지만 사냥을 나가서 돌아올땐 언제나 빈손이다. 그가 포획한 것은 토끼새끼 한마리 여지껏 그의 아들도 마을사람들도 구경을 하지 못했기에 그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집나감과 동시에 아버지는 외가댁을 자신이 차지하고 외삼촌은 내 쫓듯 하여 배가 다른 외삼촌은 유수지근처에 움막을 짓고 산다. 그는 염소 한마리와 함께 살면서 무엇을 먹고 사는지 도통 모를 정도로 그가 음식을 먹는 것을 본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네살의 대섭은 어느날 동네친구들과 쥐불놀이를 하다가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하여 쥐의 몸에 휘발유를 묻히고 성냥불을 그었던 것이 학교 옆 사택의 창고를 태우는 불을 내고 만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이미 창고는 타서 재가 되었기에 그는 외삼촌의 움막으로 피한다. 어머니가 떠난 자리엔 이웃마을을 여자가 드나들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려 하는데 대섭은 그녀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움막으로 가져다 주는 도시락을 받아 먹기는 하지만 그녀와의 마주침은 피한다.

외삼촌과 움막에서 지내며 유수지 주변의 자연에 눈을 뜨는 소년, 너구리 굴이며 새를 관찰하는 일이라든가 외삼촌의 일상을 좀더 가까이 접해가는 소년의 눈에는 외삼촌과 아버지의 관계며 집에 드나드는 여인의 관계등 자신이 풀 수 있는 방법으로 풀고 싶어 아버지가 외삼촌과 함께 사냥을 가기로 했다며 외삼촌과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다. 그 거짓말은 진짜처럼 받아 들여지고 아버지와 외삼촌 그리고 소년은 멧돼지 사냥을 나가게 된다. 멧돼지 사냥을 성공한다면 그 소문에 어머니가 돌아올수도 있다는 소년의 생각, 하지만 사냥의 성공률은 아버지의 천식으로 볼때에 성공율이 낮지만 외삼촌을 믿어본다. 유수지 주변의 동물들의 동태를 모두 파악하고 있는 외삼촌, 그를 믿고 사냥에 나선 아버지와 그외 사람들.

외삼촌의 동물적 감각에 의해 멧돼지를 사냥하게 되지만 아버지가 맞추었다고 생각한 부위가 아니고 멧돼지는 총을 맞아 죽은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싸움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죽어 있다. 그리고 멧돼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외삼촌. 마을에서는 멧돼지 사냥의 성공으로 축제분위기이지만 소년은 유슈지 외삼촌의 움막으로 외삼촌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외삼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년은 유수지 물 속으로 잠수 하여 들어가 외삼촌의 흔적을 찾아 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그러던 그의 눈에 멸치떼가 보인다. 

내게 있어  아버지라는 명사에 묻어 있는 상념은 불안감이었다. 어머니처럼 어느 날 문득 내 곁을 속절없이 떠나 버릴 것 같은 매몰참이 아버지의 표정에서도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설득이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혀에 있는 것일까.아니면 눈이나 귀에 있는 것일까.사람의 손에 길들여진 강물은 흘러가도 본래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강의 미덕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러니까 강은 흘러가는 그대로 두어야 온전한 강의 모습을 지탱한다.

민물에 살지 않는 멸치떼가 갑자기 나타난 것은... 멸치 떼는 내장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일 만치 투명했기 때문에 물결 위로 떼 지어 내려앉는 햇살 그 자체처럼 보이기도 했다. 햇살이었을까.. 외삼촌과 아버지의 합작으로 인하여 멧돼지 사냥은 성공을 거두고 외삼촌의 작살로 인하여 그도 큰 상처를 입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를 위하여 멧돼지를 죽여주고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버린 외삼촌, 그 둘 사이엔 '소년의 어머니' 가 자리하고 있다. 외삼촌과의 관계를 의심했던 아버지와 아버지 옆에 어머니가 있는 것을 온전한 사랑으로 여겼던 외삼촌의 관계는 사냥의 성공으로 인하여 모두 풀어진 것일까.. 소설은 모호함을 남겨주며 민물에 살지 않는 멸치떼를 등장시켜 아직 소설이 끝나지 않은 것과 같은 여운을 독자들에게 남겨준다. 하지만 유수지 주변의 아름다움과 작가 특유의 우리말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쓰는 문체는 정말 그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느낌이 뭐랄까 무언가 유수지 깊은 곳에 가라 앉은 무언지 모를 앙금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여운을 따라 '작가의 '을 다시 한번 더 읽어 보았다. 작가는 멸치에 대한 그의 느낌을 세세하게 표현해 놓았다. 이 소설 또한 그 멸치를 바라보는 작가의 느낌처럼 모든 것이 '작가의 말'에 함축되어 담겨 있듯 속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이면서도 알을 배면 '은닉' 한듯 보이지 않는 모호함이 잘 들어나 있는 말이 그가 표현한 '은둔자의 삶' 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외삼촌의 주거지였던 움막과 유수지, 유수지 그 심연에서 멸치떼와 함께 하나가 되어 노니는 소년의 모습이 경이롭게 보이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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