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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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라는 키워드로 본 서구 천 년의 역사

1월은 변화를 생각하기에 좋은 시기다. 매해 1월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서 그 전 해와는 어떤 것이 달라졌는지, 올 한 해는 어떤 것이 달라지면 좋을지 생각해 보는 시기라면, 1999년 12월에서 2000년 1월로 넘어가는 시기는 지난 천 년을 돌아보기에 적합한 때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이언 모티머는 1999년 12월 말, TV 뉴스에서 진행자가 ‘20세기는 다른 어떤 세기보다 변화가 많았던 세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의문을 품었다. 20세기에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진보가 곧 변화일까? 그러한 현대의 업적이 과거의 모든 업적보다 중요할까? 인류의 삶이 다른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변화한 시기는 과연 20세기일까? 이 책은 그런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저자 이언 모티머는 ‘변화’라는 키워드로 중세에 해당하는 1000년부터 현대인 2000년이 되기 직전, 11세기부터 20세기까지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저자는 전 세계의 역사가 아닌 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고, 그가 말하는 서구는 지리적 단위라기보다는 중세 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뿌리로 한 문화적 연결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난 천 년 동안의 서구의 발전을 고찰하고 그 결과를 종합하고 분석하는 이유는 하나다. 인류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모색하는 것. 지난 10세기 동안 인류가 해온 것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천 년 동안의 경험들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거기서 배운 것이 있다면 어떻게 미래에 적용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각, 새로운 역사관으로 들여다보는 천 년

다른 역사책들과 같은 시각으로 지난 천 년을 바라본다면 이 책을 읽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부터 현대의 업적이 가장 중요한 변화이며 현대 이전의 시대는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통념에 반박한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사건보다 우선시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술적 진보 때문에 20세기를 인류의 역사 중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세기로 꼽지만,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세기 동안 기술적인 진보가 얼마나 이루어졌느냐가 아니다. 그 세기에 일어난 변화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요를 얼마나 충족시켜 주었느냐이다.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이루어지기에 각 사람의 필요가 모여 그 시대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필요가 된다. 각 사람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식량, 물, 공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무기나 법, 정신적인 허기를 채워주는 문화 예술까지 다양한 것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요소인 농업, 의학, 과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전과 관련된 변화인 사적 폭력의 감소, 법체계의 확립, 자아실현과 관련된 변화인 자의식의 발견, 지식의 확산, 여성의 권리 신장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통해 각 세기의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게 될 역사는 몇몇 역사적 인물들의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조금씩 변화시켜 온 과정이다.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 과학과 의학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됐을 것이라고, 그래서 이성이 종교로부터 독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변화는 이전의 것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역사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실상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는 17세기에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고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입증했으며 의학에서도 혁명적인 발전이 이루어졌지만, 그런 발전을 이룩한 학자들조차도 독실한 신앙인이었음을 지적한다. 당시 사람들은 과학과 의학이 신의 섭리를 밝히고 그것을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는 오직 발전을 향해 단방향으로 직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17세기는 과학과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세계를 이성적으로 관찰하게 된 시기였지만, 동시에 수만 명이 마녀사냥으로 죽어간 시기이기도 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기존의 세계사 책들에 정리된 내용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정리하는 것이라기보다, 세계사 속에서 인간의 삶이, 그들이 사는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저자와 함께 아주 느린 호흡으로 지켜보는 것에 가깝다.

탄탄한 통계적 근거와 체계적인 연구 방법

새로운 시각, 새로운 역사관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해도, 그것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으면 그저 파격으로 그친다. 그는 자신의 입맛에만 맞거나 얼핏 보기에 매력적인 사료들을 취사선택하지 않는다. 1차 사료들, 선배 역사학자들의 연구 자료들을 교차 검증하고 자료들의 수치가 서로 일치하지 않을 때는 오차를 좁히거나 평균 수치를 냄으로써 가장 사실에 가까운 수치를 찾아가려고 한다. 통계 자료와 그래프를 실을 때는 어느 시기, 어떤 사람들을 표본으로 한 것인지, 어떻게 해서 그런 수치가 나온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힌다. 부록으로 근대 이전의 유럽 인구 추정치를 도출해 낸 과정을 실었을 정도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역사학이 과학이나 사회과학 못지않게 치밀한 사실 검증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임을 보여준다.

또한 서문에서 내세운 포부는 거창했으나 저자의 역량이 부족해 용두사미가 되는 책들도 많다. 이 책의 저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지난 천 년 동안의 서양 역사를 살펴볼 것이며, 그 목적은 무엇인지 분명히 밝히는데, 체계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 차근차근 자신의 논지를 풀어나간다. 인구 증가, 전체 인구 대비 군사 사상자의 비율처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들은 각종 통계 결과들을 바탕으로 분석한다. 각 시기, 각 사회 구성원의 애정이나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처럼 정량적으로는 평가하기 힘든 요소들은 정성적인 평가 방법을 활용해 분석한다. 그를 토대로 근거가 빈약하거나 논리가 비약하는 부분 없이 결론까지 자신의 주장을 착실히 이끌어 간다.

소수자를 잊지 않는, 균형 잡힌 태도

제1세계의 백인 남성 학자들의 저서를 읽을 때는 서구, 백인, 남성 중심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는데, 이 책의 저자 이언 모티머도 유럽 선진국의 백인 남성이다. 그럼에도 그는 남성이 여성에게, 백인이 비백인에게 저지른 차별을 적은 분량이지만 분명히 언급한다. 콜럼버스를 그가 살았던 세기에 변화를 가져온 주요 인물로 꼽으면서도 그가 식민지에 벌인 만행도 서술하고 있다. 자국에서 명군으로 칭송받는 엘리자베스 1세도 노예 무역을 지원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유럽인들이 식민지 개척을 통해 원래 살던 고국에서의 종교적, 정치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쟁취했지만 정작 아프리카인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유는 빼앗았다는 것, 미국 독립 선언서에 평등의 개념이 담겨 있지만 그 평등을 누릴 대상에서 흑인 노예들은 배제되었다는 것도 지적한다.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에게 종속되어 있었는지, 고등 교육 기관에 진학하고 전문 분야에서 활약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는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여성들이 지식과 전문 기술을 습득하고 전문 분야로 진출하고, 자신의 권리를 쟁취했는지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변화의 주체’로 꼽은 역사적 인물 중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다. 하지만 그는 그 이유가 서구 사회가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이었기에 현대 이전까지 어떤 여성도 서양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람들이 주목하길 소망한다. 또한 양육과 보호라는 여성의 특성이 우리를 미래로 이끌기에 적합하다고, 인류에게 희망이 있으려면 21세기 변화의 주체는 여성인 편이 모두에게 더 좋을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나는 여성의 특성이 누군가를 보살피고 양육하는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는 않지만(저자도 여성의 본성이 변화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여성이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겪어온 차별을 직시하고 여성이 앞으로의 역사에서 더 활약하기를 바라는 그의 진심에는 공감한다. 이렇게 소수자를 잊지 않는 균형 잡힌 시각 덕분에 이 책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서정성과 유머 감각, 인류에 대한 애정, 그리고 희망

이 책은 많은 통계 자료와 수치를 근거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딱딱한 숫자들과 사실만 나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미권 저자들이 쓴 논픽션의 장점은 글 중간중간에 드러나는 서정성과 유머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책도 그렇다. 저자는 자신이 글을 쓰고 있는 영국 남서부 어느 작은 도시의 오래된 오두막집 이야기로 본문을 시작한다. 그 오두막집의 옛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들을 천 년 전 영국의 한 시골 마을로 이끈다. “18세기는 특별한 거품이 올라간 톡 쏘는 맛이 나는 세기였다. 인간의 비극이 쌓인 진창 위에 현란한 불꽃놀이의 폭죽 소리와 현악 사중주단의 연주 소리가 울려 퍼지는 맛이라고나 할까.”(p. 306~307.) 이런 감각적인 서술은 논리적으로 사실을 입증하는 문장보다 더 생생하게 그 세기의 이미지를 독자들의 머릿속에 새긴다. “슬프게도 헤어드라이기가 없는 사람이지만”이라며 자신이 탈모인임을 고백하는 등 슬쩍슬쩍 유머 감각을 보이는 부분은 꽤 두꺼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잠깐이나마 휴식을 준다.

무엇보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저자의 인류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다. 온갖 통계와 수치를 토대로 그가 예견한 인류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석유, 천연가스, 석탄 등 우리가 갖고 있는 화석 연료는 분명 몇 세기도 되지 않아 고갈될 것이다. 태양력, 풍력 등 고갈되지 않는 에너지원을 개발하고 있지만 아직은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중 극히 일부만 이런 에너지원에서 생산되고 있고, 이런 에너지원으로 우리가 사용할 모든 에너지, 그것도 앞으로 분명히 더 증가할 인구가 사용할 에너지를 만들어내려면 갈 길이 멀다. 한정된 토지를 놓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원을 생산할 장소로 만들지 사람이 살 집을 세울지 양자택일을 해야 되고, 제한된 자원을 놓고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며, 그로 인해 새로운 계급 구조가 형성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지금처럼 무절제하게 소비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각자의 필요를 줄인다면, 우리는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 꿈꿀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들, 값을 매길 수 없는 모든 것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한국인 독자인 우리에게 이 책이 갖는 의미

이 책은 분명히 전 세계가 아니라 서구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인이 아닌 한국인인 우리에게 이 책이 의미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우선 남의 역사도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줄 수 있다. 남의 업적은 귀감으로, 과오는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되니까.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20세기에 서구는 엎질러진 잉크처럼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대부분의 국가는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현대 의학과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 자본주의처럼 우리의 삶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개념들과 사상들까지 서양에서 왔다. 자의식의 발전, 지식의 확산, 법치주의의 확립, 인권의 보편화 등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변화는 서양인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가 예측하는 인류의 미래가 서구만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좁은 국토, 점점 고갈되어 가는 자원으로 점점 더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해야 하기에, 살아남기 위해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에서 식량, 생필품 그 밖의 물품들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서구의 국가들과 한 배를 탄 운명이다. 저자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제시한 대안은 유일한 정답이 아닐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수 있다. 저자는 자녀들과 후손들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여러분이 이 책을 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읽어두면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저자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에게도 분명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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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세기 - 서양 천 년을 바꾼 결정적 사건들
이언 모티머 지음, 김부민 옮김 / 현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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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들을 고찰해서 현재에 적용하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탄탄한 사료 조사와 통계 분석, 탁월한 통찰력, 참신하고 균형 잡힌 시각에 서정성과 유머 감각까지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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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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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語源): 어떤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어떤 말이 생겨난 근원.

  아주 일상적인 단어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요즘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더 자주 쓰이지만 그래도 일상적으로 하는 말 ‘고맙습니다’. 이 단어의 근원적인 형태를 살펴보면, ‘남의 인격이나 행위를 높여 공경하다’라는 의미의 고유어 ‘고마’가 어근이다. 이 말은 이렇게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생긴 것이다. ‘누군가의 호의나 도움을 받아 마음이 흐뭇하고 즐겁고 감동적이다’라는 지금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다. 이 책은 이렇게 말의 근원적인 형태, 또는 말이 생겨난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모둠: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

  ‘모둠’은 ‘모으다’라는 뜻의 옛말 ‘모두다’에서 나온 말로, 한 무리가 되게끔 작은 단위로 모아둔 것을 가리킨다. 이 책은 우리말의 어원과 우리말 한자어의 언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단어 하나하나들이 그 두 부분을 이루고 있다. 다양한 음식들을 모은 ‘모둠 안주’처럼 이 책에는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우리 역사에 대한 지식까지 다양한 지식들이 담겨 있다.

  이판사판. 수리수리 마수리. 찰나. 강림. 경계.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원래 불교 용어였던 단어들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많은 일상 속 단어들이 불교 용어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불교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언어와 문화,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여기서 실감할 수 있다. ‘땡전’이란 단어에는 흥선대원군의 화폐 개혁으로 대량 발행된 당오전에 대한 반감이 녹아 있고, ‘벼슬아치’라는 단어에는 원나라와의 교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렇게 우리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 말을 만들어낸 우리 조상들의 일상과 문화, 역사를 만나게 된다. 모둠 안주에서 다양한 음식을 하나씩 집어 먹듯 다양한 지식을 하나씩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감질나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쳐 애가 타다.

  ‘감질(疳疾)’이라는 병에 걸리면 땀이 나고 목이 마르며 시원한 것을 찾게 된다고 한다. 그런 증세에 빗대어 ‘어떤 일이 마음에 차지 않아서 애태우는 심정’ 또는 ‘무언가를 몹시 하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가리키는 말이 ‘감질나다’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느끼게 되는 감정이 바로 ‘감질나다’이다. 사실 바라는 정도에 ‘아주’ 못 미치는 것은 아니고 ‘조금’ 못 미친다.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조금 크고, 3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책이니 크기도 작고 페이지 수도 적다. 각 단어에 배정되는 페이지는 한두 페이지뿐이니, 아주 깊이 있게 어원과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파헤치지는 않는다. 어원에 대해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감질날 것이다. 반면 한두 페이지씩 가볍고 흥미로운 지식을 읽는 것이 더 좋은 사람이라면 이 책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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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원의 발견
박영수 지음 / 사람in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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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전에서 하나씩 전을 집어 먹듯 다양한 지식을 얻는 재미가 있지만, 어원에 대해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감질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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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의 일곱 개의 달
셰한 카루나틸라카 지음, 유소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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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1990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한창이고 정부군도 반군도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으며, 부패한 독재 정권은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고 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시대에 30대 중반의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자신이 왜 죽었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세계인 중간계에서, 그는 달이 일곱 번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 환생하지 않으면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나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에 남아 있고, 그 사진 때문에 그가 소중히 여기던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다. 자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히고 그들을 지킬지, 모든 것을 잊고 환생할지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 책을 한 문단으로 소개하자면 이렇다. 독재 정권 시기를 거쳐왔고, <신과 함께> 같은 저승과 이승을 넘나드는 판타지에 익숙한 한국 독자로서는 이런 시놉시스에 끌리게 될 것이다. 나 또한 그랬고. 하지만 이 책의 초반부를 넘어가기는 쉽지 않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선 스리랑카의 현대사와 그를 둘러싼 스리랑카 국내외의 갈등 구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이승에서는 인간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굴러다니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는 고깃덩어리가 된 인간들의 혼령이 죽었을 때의 끔찍한 모습 그대로 배회하고 있다. 주인공은 정의감과 사명감에 불타는 인간이 결코 아니며, 마약, 섹스, 도박에 중독되어 있었고 사랑에 있어서도 지고지순하지 않다. 연인이 있는데도 가는 곳마다 마음에 드는 남자들과 관계를 갖고, 마음은 주지 않았으니 괜찮다는 식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선을 긋지 않고 방치한 채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상황, 이런 주인공에게서 감동을 이끌어 내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일을 해낸다. 주인공은 비겁하고 이기적이고 우유부단한 인간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진실을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최소한의 양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사랑, 자신이 지키려던 진실이 다시 가려지더라도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는 인류애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은 산 사람에게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한계를 뚫고 닿으려 했던 곳에 닿아 현실을 움직였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가 죽어서도 지키고 결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정부가 민간인 학살을 조장했다는 증거가 된 사진은 생각보다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스리랑카의 내전은 그 뒤로도 2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원한에 찬 유령들이 산 사람을 조종해 일으킨 테러는 막지 못했고, 무고한 사람들까지 죽었다. 그런데도 가장 큰 원흉은 죽이지 못했다. 그의 몸부림은 현실이라는 견고한 벽에 보일 듯 말 듯 미세한 균열을 남겼을 뿐이다.


하지만 미세하다고 해도 그가 죽어서도, 자신의 운명을 걸고 한 일은 현실을 변화시켰다. 누군가는 그의 사진을 보고 진실을 깨달았고 그가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대피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으며, 그가 자신의 운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킨 사람들은 삶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연인에게 새로운 연인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현실은 아직도 잔혹하고 황폐하며 그가 다시 태어난 곳도 이곳 못지않게 잔혹한 세상일지 모르지만, 그가 선택한 대로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으로 갔을 테니. 짧고 불행하고 세상의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것 같아 보이는 생이더라도 분명 의미가 있었다는 깨달음을 안은 채.


이 소설처럼 독재 정권의 잔혹한 폭력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역사 연구자는 이런 질문을 받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 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이 책은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 수천, 수만 번이나 반복되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삶도 역사도 계속된다. 


P. S. 1. 스리랑카의 근현대사와 언어, 문화를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번역자가 충실히 주석을 달아주었다. '왜 이런 사소한 단어까지 굳이 스리랑카어로 적고, 뜻을 각주로 달았느냐'는 이야기도 보이는데, 이 소설은 스리랑카인 작가가 영어로 쓴 것이다. 제3세계의 작가들은 모국어 대신 영어나 프랑스어처럼 전 세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작품을 쓸 때,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작품에 모국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모국어 단어를 종종 삽입한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이 점을 충실히 살린 것이다. 주석뿐만 아니라 스리랑카의 당시 상황과 주인공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의 이야기까지 해설로 실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했다.


P. S. 2. 이 책의 쪽번호 아래에는 달 그림이 들어가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일주일을 따라가는 구성인데 한 챕터가 주인공의 하루에 해당한다. 달은 쪽번호 아래서 차오르다 다시 야위고, 마침내 완전한 빛이 된다. 쪽번호 아래의 달을 살펴보면 주인공과 모든 여정을 함께하고 결국 빛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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