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 오는 날에만 읽겠다고 마음 먹은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설국』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설국』과 그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 여행기의 비중이 꽤 큰 데다 책의 도입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면서 걷다가는 (전봇대의) 전깃줄에 목이 걸린다는' 에치고유자와의 폭설. 그 안에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자도 일부러 눈이 올 때를 기다려 에치고유자와에 갔다니 이 책을 눈 오는 날에 읽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책을 사고 4년이나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지만. 눈 오는 날에 조금씩 읽다 눈이 많이 오던 지난 달 어느 날 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눈이 오는 오늘 이 글을 쓰고 여기에 올린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 지금까지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고 나서 그의 문학 세계에 들어갔다 빠져나온 느낌이 들었다.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인생 여정과 문학 세계, 그 둘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들을 여행한 감상을 촘촘하게 엮어나가기 때문이다. 바느질한 자국도 보이지 않고 눈이 녹아 스며들 듯이. 책장을 덮고 나니 저자와 함께 눈 내리는 겨울날 일본 곳곳을 여행하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 온 것 같다.

저자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세계를 두 단어로 요약한다. '섬세한 허무'. 가와바타가 태어났을 때부터 소년 시절까지 가족들의 죽음이 이어졌고, 청년 시절에는 첫사랑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떠났다. 슬픔과 이별이 지배했던 성장기를 보냈기에 그는 인생이 허무하다는 것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환희와 분노, 선과 악을 넘어서서 그가 닿은 곳은 허무였다. 소설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는 서사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 인용된 가와바타의 묘사들만 읽어도 그가 섬세하게 그려내는 허무에 압도되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물든 세상 앞에 선 기분이었다.

적막한 설원의 아름다움에는 매번 매혹될 수밖에 없지만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가 돌아올 곳은 결국 따뜻한 집과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니까. 가와바타의 단편 한 편도 안 읽어보고 말하기에 우습지만, 내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짐작한 가와바타의 문학 속 세계는 그런 설원과 같다. 나는 선문답 같은 가와바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보다는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비판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 더 공감한다. 섬세한 허무의 극한까지 파고드는 가와바타의 묘사는 매혹적이지만, 문학과 삶이 별개가 아니라는 신념 아래 사회 비판적인 작품들을 쓰고 직접 행동했던 오에의 행보를 지지한다(사실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도 한 편 안 읽어봤으면서 이러는 것이 우습지만). 내게도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허무보다는 삶을 지향하니까. 그럼에도 분주하고 복잡한 현실 세계에 지치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 속 세계에 잠시 머물다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섬세한 허무와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가 이 정도면 됐다고 느꼈을 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로벌 푸드 한국사 -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외래 음식의 역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위스키, 아이스크림, 초콜릿, 피자, 커리, 우유, 빵, 차, 향신료, 이 아홉 가지 글로벌 푸드의 한국사를 살펴보는 책이다. 글로벌 푸드는 처음에는 특정 지역에서만 만들어지고 소비되었지만 사람들의 이동과 교역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지금은 전 세계에서 만들고 먹는 음식을 가리킨다. 저자는 이 음식들이 언제 처음 한반도에 들어왔고 어떻게 한국인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얻었는지,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한 챕터에 한 음식씩, 그 음식의 기원에서부터 그 음식과 관련된 최근의 유행까지 쭉 훑어보는데 역사적 사실들을 가볍고 쉽게 서술하고 있다. 거기에 컬러로 된 사진, 그림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어 지루하지 않다. 작가가 에필로그에서 이야기하는 K푸드의 미래에 거창한 포부가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홉 가지의 글로벌 푸드를 통해 근대 이전부터 현대까지 그 음식과 관련된 세계사와 한국의 생활사를 접할 수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저자가 권하는 방법이다. 독자들도 자신의 글로벌 푸드 경험을 떠올려 보는 것이다. 저자는 개인과 공동체의 글로벌 푸드 경험사가 많은 이들의 식탁 위에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하니, 나도 나의 글로벌 푸드 경험기를 간단하게나마 써보겠다. 우선 위스키는 입에 대본 적도 없으니 그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콘 아이스크림이 하나에 500원이었던 시절 어른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콘 아이스크림을 사러 슈퍼에 달려갔었고, 장미꽃이 새겨진 초콜릿 블랙로즈가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러운 초콜릿인 줄 알았다. 처음 먹어본 피자는 초등학생 때 부모님이 큰맘 먹고 사주셨던 피자였는지, 학교에서 단체로 주문한 피자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렸을 때 엄마가 만들어주던 한국식 카레보다는 철 들고 나서부터 먹게 된 일본식 카레와 인도 커리를 더 좋아하고, 셋 중에선 인도 커리를 제일 좋아한다. 우유에 대한 기억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주번이 매일 교실로 들고 오던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 상자와, 학교 한쪽의 우유 창고에서 풍기던 우유 비린내다. 초등학생 때는 설탕이 살짝 입혀진 은방울과 하얀 크림이 든 보름달빵을 좋아했고, 고등학생 때 급식을 먹기 귀찮으면 매점에서 파는 옥수수빵으로 저녁을 때우곤 했다. 는 커피를 안 마시는 내게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선택지였고, 중동에 여행 갔을 때는 향신료를 가리진 않았는데 베트남 음식을 먹을 땐 꼭 고수를 뺀다. 이렇게 각자의 기억에 새겨진 글로벌 푸드를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면, 책에서 알게 된 역사와 책에는 없는 나만의 역사가 겹쳐 더 풍부한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는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생각한 방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역사 인물이나 역사물 속 캐릭터가 이 책에 실린 아홉 가지 음식 중 어느 음식을 먹어봤고 어느 음식을 못 먹어봤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요즘 빠져 있는 캐릭터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2년경에 사망했으니 근대가 시작된 이후에 들어온 위스키, 아이스크림, 초콜릿, 피자, 커리, 빵은 당연히 못 먹어봤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온 살균한 대량 생산 우유가 유통되기 이전 한반도에서의 우유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우유는 조선 시대 왕과 왕족들이나 먹을 수 있었으니 못 먹어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는 마셔보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이 책에 따르면 한반도에 차가 알려진 것은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년~647년)고 차를 재배하기 시작한 건 흥덕왕 3년(828년)이라니 살아 있을 당시에는 차도 못 마셔봤을 것이다. 향신료 중에서도 후추는 조선 중기에야 양념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고추는 임진왜란(1592년~1598년)을 전후해서 들어왔으니 두 향신료가 들어간 음식도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그 인물이 생전에 보냈던 일상을 더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생각보다 늦게 한반도에 들어왔고 한반도에서의 역사가 짧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글로벌 푸드의 역사에서 얻은 교훈을 K푸드에 적용해 만방에 한국을 알리겠다는 결심까지 할 필요는 없다. 음식 하나도 아주 먼 길을 거쳐 우리에게 와서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니,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난처한 클래식 수업 4 - 헨델, 멈출 수 없는 노래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4
민은기 지음, 강한 그림 / 사회평론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헨델의 음악뿐 아니라, 평생 음악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알게 됐다.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휴가지에서 생긴 일
마거릿 케네디 지음, 박경희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결말 스포일러 포함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살인이 벌어지고, 살인자를 찾는 데 주력하는 전개의 영화 장르를 '후던잇(Who done it)'이라고 한다. 관객은 '누가 죽였는지' 궁금해 '후던잇'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된다. 이 책을 끝까지 읽게 하는 건 '누가 죽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다.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을 책 도입부에서 이야기하고, 참사가 벌어지기 일주일 전 현장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이 있다고 서두에서 이야기했으니 몇 명은 살아남겠지만, 현장에 있던 20여 명의 등장인물 중 누군가는 분명히 죽을 것이다.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에, 이 소설이 추리소설이나 스릴러가 아닌데도 독자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참사의 징후는 점점 더 선명해져 독자의 마음속 불안감은 더 커져간다.

참사가 일어난 현장은 1947년 8월까지 영국의 한 바닷가 절벽 아래 있었던 호텔이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절벽에 간 균열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는데, 마침내 절벽 한쪽이 무너져 내려 호텔 위로 쏟아졌다. 호텔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작가는 절벽이 무너지기 일주일 전으로 우리를 데려가, 그 일주일 동안 이 호텔에 있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호텔 자체가 당시 영국의 축소판인 것처럼 호텔 안에는 노인부터 어린아이, 귀족부터 서민까지 다양한 연령과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서로 어떤 관계인지 드러나고, 평소라면 만날 일이 없었던 사람들이 서로 얽혀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사람들은 평생 동안 갇혀 있었던 틀에서 벗어나 변화한다. 그런 변화가 어찌나 감동적인지 '이 사람들은 제발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제 막 새 삶을 시작했는데'라는 마음이 든다. 반면 자신의 이기심과 관성, 탐욕에 사로잡혀 조금도 달라지려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은 "못된 사람은 몇 명뿐이지만,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지옥으로 몰아가고도 남아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다. 책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죽길 바라는 것이 바람직하진 않지만,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들이 죽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도 픽션에서도 나쁜 사람만 죽지는 않으니, 비호감 캐릭터들만 죽을 리 있겠는가. 독자들의 마음을 울렸지만 목숨을 잃어 독자들을 더 안타깝게 할 등장인물들도 있을 거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가는 정말 비호감 캐릭터들만 죽인다. 그것도 개연성 있게. 한국 고전소설만큼이나 권선징악을 확실히 보여주지만 그것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뒤표지의 문구처럼 등장인물 모두에게 구원의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준은 단 두 가지다. 반성하고 스스로 변화하려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작은 선의라도 타인에게 베풀려고 했는가. 그중 한 가지라도 한 사람은 살아남지만, 한 가지도 하지 않고 원래의 상태 그대로 머문 사람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완전무결한 선인은 아니고 죽은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처참히 죽을 만큼 악독한 악인은 아니지만, 작품 속 세계의 신(그러니까 작가)의 결단은 단호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기에, 결말은 더욱더 단호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희망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 속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고 피곤하더라도 누군가 놓고 간 물건을 가져다주는 작은 선의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작가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준 사람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는다. '누가 죽을 것인가' 하는 의문은 결말에서 '누가, 왜 살아남았는가'로 바뀌고, 책을 덮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바뀐다. 그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작가가 이 소설로 이야기하려는 메시지는 지극히 권선징악적이고 교훈적이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고루하거나 도식적이지 않다. 20여 명의 등장인물들은 납작한 선역도 악역도 아니고 우리처럼 각자의 장점과 약점, 선한 면과 악한 면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관계를 형성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변화해, 몇십 페이지 전만 해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면모를 보인다. 끝내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탐욕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들도, 변화하고 성장하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대상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서사와 개성을 갖춘 캐릭터로서 살아 숨 쉰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드라마에 이들 중 누가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더해져, (한국어 번역판 기준) 500페이지가 넘는 이 소설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결말이 궁금해 새벽까지 읽었을 정도다. 서스펜스와 감동을 모두 잡으면서도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지 않도록 작가는 절묘하게 균형을 잡는다. 그래서 읽는 동안에는 즐겁고, 읽은 후에는 여운이 남는다. 단호한 결말 너머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단한 삶을 이어가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을 믿기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읽는 베트남사 처음 읽는 세계사
오민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남들이 관심 많이 가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남들이 관심 없는 것에는 관심이 많다. 그래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영미권보다는 낯선 문화권에 더 끌린다. 이 책도 그런 이유에서 읽었다. 세계사 시간에 중국과 일본, 유럽사는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베트남 역사는 동남아시아를 다루는 짧은 장에서 몇 줄씩 언급됐을 뿐이다. 그나마도 기억을 못 하니 베트남 역사에 대한 내 지식은 전무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낯선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책을 선택했다.


  낯선 역사를 읽는 것의 장점은 읽으면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역사책을 읽을 때는 강감찬이 거란군을 물리치고 고려에 평화가 올 것을 알고, 2차 세계대전 관련 역사책을 읽을 때는 결국 나치 독일이 패망할 것을 안다. 폭군이나 독재자가 측근한테나 힘을 실어주고 멋대로 정치하면 결국 망하는 등, 익숙한 역사의 패턴이 있긴 하지만, 베트남의 역사는 꽤 드라마틱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근대 이전의 왕조사나 근대 이후의 전쟁사나. 남의 나라 역사를 갖고 이렇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는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낯선 것만 나오면 지치기 마련이니, 책을 끝까지 읽으려면 낯익은 내용들도 필요하다. 이 책에 나오는 베트남 역사는 낯선데 묘하게 낯익은 데가 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세계에서 내부에서는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하고 밖에서는 왕국이라 칭한다. 중국을 지배했던 왕조들의 견제와 침략에 대비하면서 그들의 문물과 정치 체계, 특히 유교 사상과 과거 시험, 지방 행정 체제를 받아들여 나라의 기틀을 세운다. 근대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스스로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서구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근대 국가로 자리 잡는 것은 쉽지 않고, 결국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된다. 철도, 공장, 군사 시설 등이 세워지지만 결국 식민지가 아니라 본국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은 독립 운동을 하면서도 사상과 이념의 차이 때문에, 독립 운동의 주도권 때문에 분열하고 갈등하다 결국 독립을 맞는다. 여러 강대국의 이해관계 속에 두 나라로 갈라진다. 이 설명만 들으면 한국사를 쭉 설명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근대 이전에는 중국 중심의 세계에서 독립국으로 살아남고, 근대 이후에는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갈등 사이에서 살아남았다는 점, 그리고 유교와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닮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꼈다.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만큼이나, 우리 못지않게 강인하게 역사의 격랑을 헤쳐왔다. 근대 이전에는 중국에게서, 근대 이후에는 서양에게서 문물을 받아들이고 필요한 것을 배우면서 나라의 역량을 키우려고 애썼다. 베트남전쟁 때문에 우리에게는 베트콩이라는 적군 이미지로 굳어진 북베트남 정부와 정부군도,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국내외의 정세를 살피고 기민하게 대응했다. 그렇기에 수적으로도 열세이고 무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미국을 이기고 통일을 이뤘다. 지금은 자본주의를 일부분 받아들여 경제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들도 물론 과오와 실책이 있고 지금도 자신들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서 밀림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운 적군으로 굳어졌던 그들의 모습이 새롭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 또한 역사에서 항상 외세의 가해에 맞서는 피해자이자 저항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이 책은 짚고 넘어간다. 17세기 이래로 베트남을 캄보디아를 침략하거나 내정 간섭을 하면서 괴롭혔고, 프랑스의 식민 지배 시기에는 베트남인들이 중간 관리인으로 고용되었기 때문에 캄보디아인들에게는 베트남인들이 역사 속 악역이었다. 베트남의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 내부에서 벌이는 잔악한 행위들을 못 본 척하기도 했다. 세계사 속 복잡한 이해관계에 따라 그들도 가해자가 되기도, 방관자가 되기도 했다. 베트남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책이지만 저자는 베트남의 이런 다면성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다면성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줄 것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가 쓴 입문서이기에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다. 하지만 주요 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 그 과정에서 사용됐던 전략과 무기, 결과와 그 영향까지 다루는 등 생각보다 꽤 깊이 들어간다. 특히 베트남전쟁에 대해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라면 이 책으로 베트남전쟁의 개요를 머릿속에 정리하기 좋을 것이다. 연표와 풍부한 사진 자료, 당시의 세력과 전쟁 진행 상황을 표시한 지도들도 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베트남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쭉 훑어보고 대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