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 -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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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역사'는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정식 한국어 단어는 아니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을 의미하는 인터넷 속어다. 그래서 책의 제목만 보면 인류의 온갖 실수와 과오의 흔적을 담은 지도들이 담긴 책인가 싶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마흔 곳의 폐허는 누군가의 과오라기보다는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그 쓸모를 다 하고 버려진 곳들이 대부분이다. 학교에 무단 결석을 했다는 이유로 열네 살 소년이 50대가 될 때까지 가둬놨던 레녹스성 병원이나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죽을 때까지 가둬놨던 아캄펜섬처럼 '흑역사'의 의미에 딱 맞는 장소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인류의 과오보다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장소들의 쇠락이다. 원제도 '잊힌 장소들의 지도책Atlas of Forgotten Places'니 '흑역사'라기보다는 '쇠락의 역사''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마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흑역사'라는 강렬한 어감의 단어를 제목에 넣은 것 같다.


  '지도책'이라는 원제에 걸맞게 각 장소의 세부 지도는 꽤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그 장소의 과거 구조와 현재 구조, 사라진 건물과 남아 있는 건물, 장소가 있는 곳의 지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루스벨트섬(구 블랙웰섬)'의 세 시기 지도를 나란히 놓아 이 섬에서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 페이지가 인상적이다. 각 장소의 현재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에서는 폐허 특유의 스산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영미권 논픽션 저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 책의 저자도 유머 감각과 서정성이 섞인 문체로 쉽고 재미있게 책 속 폐허들에 얽힌 역사를 설명한다. 예쁜 외국 풍경도 보고 싶고 교양도 쌓고 싶다면 가볍게 읽기 좋다. 이 책의 원서가 2021년에 출간되었으니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그 시기의 독자들로서는 여행을 못 가는 대신 이 책으로 대리만족을 했을 것이다. 이제 해외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 책으로 새롭게 알게 된 장소들에 가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만 아주 풍부한 볼거리,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도 3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 책에서 마흔 곳이나 되는 폐허를 이야기하니 아주 깊이 있게 각 장소를 들여다보진 않는다. 텍스트만으로는 3, 4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이게 끝인가' 싶은 챕터들도 있고, 사진이나 지도가 기대한 것보다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는 평도 있다. 제목을 보고 인류의 온갖 추악한 면모를 이 책으로 보겠다고 기대하거나 페이지마다 이야기와 풍경들이 넘쳐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다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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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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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안녕, 이렇게 같이 책 얘기하는 건 오랜만이네.

H: 그러게. 그런데 이 책 저자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거 같은데.

B: 4년 전에 우리가 같이 얘기했던 책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의 저자야.

H: 아, 그랬지. 그런데 이 책 꽤 한참 전에 나온 책 같은데?

B: 나는 2016년 개정판으로 읽었긴 하지만 사실 2000년에 쓰인 책이 원서야.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는 손녀에게 들려주는 형식이었는데, 이 책은 아들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니 두 책의 출간 시기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지.

H: 뭔가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네. 그런데 왜 갑자기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

B: 예전부터 이런 책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읽을 책 찾다 우연히 이 책이랑 마주치니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계 시민으로서 읽어야 되는 책인데 여태 안 읽고 있었구나 싶었어.

H: 그런데 24년 전의 이야기인데, 지금 읽으면 시의성이 떨어지지 않을까?

B: 그렇긴 하지. 2016년 개정판이어서 편집자가 2000년 이후부터 2016년까지의 상황을 업데이트한 주석을 넣긴 했는데, 2016년도 벌써 8년 전이잖아.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거 같아. 2022년 1월에 <위대한 수업>이라는 EBS 프로그램에서 장 지글러 교수가 강의를 했었거든. 그때 한 이야기와 이 책에서 한 이야기가 크게 다르지 않아. 물론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걸 이야기하니 이 책 내용과 겹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이 책을 쓴 시점 이후로 세계의 기아 문제가 나빠지면 더 나빠졌지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없었던 거 같아.

H: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의미가 없잖아.

B: 24년이 지났어도 나아진 건 없다고 절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까지 계속되는 문제가 어디서 시작된 건지, 그런 문제를 만들어낸 사회 구조, 세상의 흐름은 어떤 건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지. 그걸 이 책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어.

H: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에서 얘기한 것처럼 역시 자본주의가 문제겠지.

B: 맞아. 사실 이 지구에서는 120억 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된대. 그것도 한 명이 하루에 2400~2700칼로리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하루에 10만 명이, 5초에 한 명씩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 문제는 아무리 식량을 충분히 생산해도 그 식량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배분되지 않는 거야. 당장 사람들이 죽어가도 자기들 이익이, 권력이 더 우선인 사람들 때문에.

그걸 막기 위해 법과 규제가 있는 건데, 그런 규제들을 다 풀면 세상이 알아서 잘 돌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게 자본주의, 더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야. 자본 활동의 자유를 강조하고 정부의 개입은 최소한으로 줄이라는 과거의 자유주의를 계승한 거지. 장 지글러 교수는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등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치고 몇몇 소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온 지구의 경제를 틀어쥐고 있어서, 기아와의 투쟁이 어렵다고 얘기해. 그런 사실들을 폭로해 왔기 때문에 다국적 기업들에게서 소송도 많이 당했다고 지글러 교수가 <위대한 수업>에서 얘기했던 게 기억나.

H: 진실을 말한 대가가 너무 무겁구나. 평생 그렇게 싸워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B: 엄청난 액수가 걸린 소송을 계속 당하면서도 지글러 교수는 다국적 기업과 그들이 주는 이익에 눈이 멀어 자국의 개혁도 중지시켜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아. 그리고 뜬구름 잡는 식의 정서적인 대응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하지만 자신이 구호 현장에서 봤던 사람들에 대한 인류애는 잃지 않는 게 책 곳곳에서 느껴져. 온 세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더 전하려고 하거든. <위대한 수업>에서도 영양실조 때문에 노마라는 병에 걸려 안면 조직이 녹아버린 사람들의 사진을 직접 인쇄해 와서, 이걸 꼭 방송에서 보여달라고 했던 게 기억나. 그렇게 비싸지 않은 항생제만 사 먹어도 퇴치할 수 있는 병인데, 가난해서 걸린 병이라고 했었어. 정말 이건 꼭 알려야겠다는 열의와 간곡함이 느껴졌어. 구호단체의 일이 오히려 각 지역의 지배층들의 배를 불려주고 권력을 공고히 하게 되어버린다 해도, 그 어떤 대가도 한 아이의 생명에 비할 수 없다고 하는 데서 지글러 교수의 마음이 느껴졌어.

H: 그렇게 수십 년 동안 싸워왔는데도 세상은 여전한 걸 보면,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 같다고 느껴지지 않을까?

B: 이 책의 마지막에서 부르키나파소에서의 농업 개혁이 실패로 끝난 것을 듣고 지글러 교수의 아들이 말해. 그러니까 결국 좌절과 절망만 남은 거냐고. 지글러 교수는 비극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살인적인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해. 자국민들이 자기 손으로 자기 나라를 바로 세우고, 자기 나라 경제가 자립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고.

H: 공산주의를 시작한 사람들부터 최근의 개혁자들까지 도전했지만 계속 실패해 왔던 일이야. 늘 느끼는 거지만 현실은 참 구체적이고도 너무 굳건히 우리 앞에 서 있는데, 이상은 그에 비해 단순하고 너무 멀게 느껴져.

B: 체 게바라가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품자"고 했잖아. 우선 이상을 높게 잡아야 현실을 그 이상의 50퍼센트, 70퍼센트, 90퍼센트로 점점 끌어올리지. 장 지글러 교수는 원래 인간은 자신 곁에 있는 가족, 일족, 이웃에게서만 연대감을 느꼈지만 국가를 세우면서 처음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해. 그렇게 인류가 질적으로 도약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인간적인 지구를 만들기 위해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말해. 희망은 정의를 향한 인간의 불굴에 의지 속에 있다고. <위대한 수업>을 보면 그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게 보여. 방송한 지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럴 거야.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음, 예를 들어보면 선진국들에서 소고기를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해, 그러니까 소를 더 살찌우기 위해 소들에게 풀 대신 곡물 사료를 먹이는데, 그런 축사의 연간 옥수수 소비량이 잠비아 같은 나라의 연간 필요량보다 더 많다고 하잖아. 우리가 고기를 조금이라도 덜 먹으면 그런 현상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글러 교수는 이 책에서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라고 했어. 우리가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기억하고 함께 아파한다면, 작은 것이라도 행동하고 실천하려 한다면 세상이 아주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이 책의 다음 개정판은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로 채워졌으면 좋겠어.

* 종이책이어서 업데이트되지 못한 2024년 2월 현재의 상황

- 내전 기간인 1996년 적대 세력 수천 명을 포위해 굶어 죽게 만들었던 라이베리아의 전 대통령 찰스 테일러는 2006년 체포되었고 2012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징역 50년을 선고받았다. 현재 복역 중이다.

- 현재도 기후 난민은 기존의 난민 정의(국적, 인종, 종교, 특정사회집단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 때문에 자국 내에서 박해에 이르는 차별을 받고, 그와 같은 박해 때문에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에 맞지 않기 때문에 난민으로 분류되지 않고 있다. 유엔난민기구는 '기후 난민'이라는 용어 대신 '기후 변화로 인한 강제 실향민'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 이 책에서는 2015년에 세계 인구가 71억 명이 될 것이고 그중 6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2024년 현재 세계 인구는 약 81억 명이고 2021년 기준 전 세계 인구의 56퍼센트가 도시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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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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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라고 하면 보통 전황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 전쟁을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사 책에는 전쟁 당사자 양쪽이 어디에 진영을 두었고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고 후퇴했으며, 어디에서 승리했고 어디에서 패배했는지 표시한 지도들이 가득 실려 있다. 양쪽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으며 그 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어떤 전략이, 어떤 전투가 승패를 판가름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에서 주목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고 지속되게 한 국내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남긴 의미다.

 

저자는 왜 베트남 전쟁의 진행 과정보다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역사의 큰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남아 있어, 그 외의 중요한 기억들이 잊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베트남 전쟁 특수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실린 베트남 전쟁 관련 서술에서 전쟁 특수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전쟁 특수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기억한다. 잘못된 결정으로 시작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 이 두 역사적 기억의 간극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찾는 것은 우리가 놓친 중요한 기억들이다.

 

저자는 우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당시의 미국과 한국의 국내외 정황을 살펴보면서, 미국이 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한국이 왜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는지 각자의 동기를 분석한다. 그런 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지지부진한 공격과 미군과 한국군 내의 불평등, 참혹한 민간인 학살, 전쟁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보상 등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살펴본 뒤,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서 얻어야 할 진짜 교훈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참전자의 증언부터 관련 연구서, 논문부터 미국과 한국의 정부 문서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모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했고, 미국과 한국,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의 공과를 밝히고 있기에 이 책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베트남 전쟁 자체를 넘어서서 베트남 전쟁이 있게 한 역사적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 남긴 영향을 살펴보기에, 독자들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와 그 전후 시기의 한국사와 세계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부터 사실은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건이었는데 더 큰 군사적 충돌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파병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과연 그 목적을 이루었을까? 조목조목 짚어본 뒤 저자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이다. 미국은 베트남 내의 정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을 시작했고 전쟁 중에도 잘못된 전술을 펼쳤기에 그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전공은 세우지도 못하고 철수했고, 한국은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얻어내려 철수를 미루다가 애꿎은 군인들만 희생시켰다. 양국에서 부유층, 고위층은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길 회피해 사회적으로 그보다 낮은 계층에 있던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엽제 후유증과 PTSD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한국군 중에는 포로가 한 명도 없고 실종자는 모두 탈영자들이라며 한국 정부가 외면했기에 고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까지 있다. 사회 한편에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도 전쟁 당시부터 반전 여론이 거셌으며 베트남 전쟁을 하기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대통령들이 인정한 미국과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쟁의 그림자들은 가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수고와 희생, 그로 인해 얻은 국익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국과 가족들에게 헌신했다. 그들만을 가해자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전쟁의 가해자로 만든 것은 국가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한국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게 했기에, 그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참전자들에 대한 보상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 정부의 결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그곳에 갔던 모든 사람들은 애국자이며, 그들이 나라를 위해 한 노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해 국가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고만 특별 담화에서 입장을 밝히고, 참전 군인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에 힘쓰지 않았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직시해 전쟁 특수에만 주목하는 반쪽짜리 기억을 온전한 역사적 기억으로 바꾸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저지른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며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는 것이 곧 안보라고 말한다. 또다시 냉전 논리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국민을 지켜주고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 국민 스스로가 지키고 싶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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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자격 - 게으르고 불안정하며 늙고 의지 없는… ‘나쁜 노동자’들이 말하는 노동의 자격
희정 지음 / 갈라파고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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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고 했다. 일하지 않으면 살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고 싶다고 누구나 일할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일할 자격’이 없으면 일할 수가 없다고. 그렇다면 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시장에서 ‘일할 자격’은 어떤 것들일까. 이 책에서 한마디로 요약하는 ‘일할 자격’은 ‘정상성’이다. 젊고 건강하고 신체나 정신에 이상이 없을 것.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 저자는 ‘일할 자격’이 있는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개념 자체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밝히고, ‘정상’ 노동자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이야기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며 월급이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삶. 이런 삶이 정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쏟는 노력은 비정상적이다.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을 수행할 능력과 자질이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업무 외 시간에도 자기 계발에 힘쓴다. 순종적이면서 자기 주도적이라는 모순적인 인재상은 사실상 실현하기 불가능하니 그런 인재인 척 처세한다. 이렇게 끝없이 노력해도 눈에 보이고 수치화할 수 있는 성과가 있어야만 노력하고 있다고, 성실하다고 인정받는다. 슬프게도 그렇게 노력해서 이룬 성과는 너무도 기본적인 것이다.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것. 사회에서 정상적인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쉬지 않고 달리는 마음을 자기계발서는 동력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은 불안이고 자본주의는 그런 불안을 먹이 삼아 성장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건강하고 성실하고 정상적인 노동자,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노동자는 우리 내면에 주입된 환상이고, 자본주의 사회는 그 환상을 동력으로 굴러간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돌아보면 이런 환상 속 모범적인 노동자상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사람들, 정상의 범주에 들지 못하는 현실의 노동자들이 보인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사를 반복하는 청년들, 미혼모, 정신 질환자, 자신도 노년으로 접어드는 나이인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더 나이 든 노인들을 돌보는 일로 떠밀리는 돌봄 노동자들, 과체중이어서 ‘자기 관리’를 제대로 못 하는 노동자로 치부되는 사람들, 현역병의 신체 기준에 미치지 못해 보충역이 된 사람들. 이들이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비정상’ 노동자들이다. 저자는 이들의 목소리와 이들이 처한 현실을 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들을 정상이라는 범주 밖으로 밀어내고 삶을 영위할 권리마저 위협하는지 분석한다.


  우리 사회는 노동자 자신이 정상적인 노동자, 쓸모 있는 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자기 관리, 자기 계발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을 소진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심지어 조장한다. 그러나 누구라도 나이가 들면 노쇠해지고, 언제라도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어 정상의 범주에서 밀려날 수 있다. 이 경쟁 사회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을 대체할 새로운 노동력, 더 젊고 건강한 몸들을 찾는다. 국제노동기구(ILO)가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178개의 기술협약 중 현재 한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22개뿐이고, 한국 정부가 비준하지 않은 협약들에는 직장 내 폭력과 괴롭힘 근절을 위한 협약, 업무상 재해 급여에 관한 협약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뒷덜미가 서늘해지지 않을 노동자가 어디 있을까.


  저자는 말한다. “삶을 영위할 권리는 자격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일할 자격을 요구하며 삶을 영위할 권리조차 공짜로 내어주지 않는다. 세계 인권 선언에 따르면 그 권리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인데. 이 사회가 지닌 노동의 환상에 잡아먹히지 말고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직시하라고 하지만, 그 환상을 채워주지 않는 노동자가 다시 노동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면서도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들이 다 게으른 노동자의 핑계라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두렵다. 실제로 나 자신도 ‘네가 노동자로서 경력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남 탓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자도 자신이 인터뷰한 사람도 자신도 성실한 사람, 정상적인 노동자라는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소진되다 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 되었을 때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하지만 저자는 절망하기보다는 계속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려고 한다. 일할 자격뿐만 아니라 말할 자격조차 박탈하는 힘을 뚫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동료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자신이 속하지 않은 비정상의 범주에 있는 노동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싸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1급 몸, 1등 국민, 정상적인 노동자와 그렇지 않은 몸, 국민, 노동자를 나누는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일의 세계 안에서도 나다움을 지키면서 타인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 세상은 ‘일할 자격’을 요구하면서 그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내치는 사회가 아니라, 단순히 ‘일할 권리’뿐만 아니라 더 행복하게,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일할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나도 절망하기보다는 꿈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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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누운 한국사 - 요통부터 번아웃까지 병치레로 읽는
송은호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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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재미있는 역사책을 읽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이 책은 어떨까요. 열한 명의 역사 인물들이 앓았던 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각 인물이 어떤 질병을 겪었는지, 그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살펴보고,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책의 효능과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서 시 효능

이 책의 효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입니다. 글 자체의 재미와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이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과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전자입니다. 서문과 목차만 읽어도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지고, 각 챕터의 도입부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 독자들은 쉽게 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각 챕터 앞에는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인물에게 주는 처방전이 있는데, 챕터의 내용을 명쾌하고 발랄하게 요약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처방전 페이지를 약국에서 주는 약 봉투 모양으로 디자인해서 더 유쾌합니다.


각기 다른 두 분야를 접목시킨 책은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기 쉬운데, 이 책은 역사와 약학의 균형이 좋습니다. 역사가 약학에, 약학이 역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역사 지식도 약학 지식도 함께 쌓을 수 있습니다. 각 챕터의 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았던 세계사 속 인물의 이야기도 챕터 끝마다 부록으로 넣어서 세계사 지식도 덤으로 얻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약학 전공이다 보니 약학 부분이 좀 더 탄탄하긴 합니다. 저처럼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병의 증상과 그 원인, 그 병을 치료하는 약과 치료법의 원리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작년에 나온 책이라 최근의 연구 결과, 신약 개발 현황 같은 최신 정보도 담겨 있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의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겠죠.


또 하나의 효능은 공감입니다. 고름이나 이질, 결핵처럼 현대에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은 역사 인물들도 있지만, 지금의 우리도 쉽게 걸릴 수 있는 병에 시달렸던 역사 인물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생존을 위해 늘 긴장 상태로 살면서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렸던 정조,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던 박지원, 스트레스 때문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렸던 순종 등의 역사 인물과 우리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거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래서 병에 걸리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고 역사를 만들었죠. 그 사실이 의학이 발달한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인이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감, 운동 부족, 업무 과다 등으로 어떤 면에서는 병에 더 취약해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병을 안겨주는 환경과 요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작은 위로로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으니까요.

 

독서 시 주의사항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마다 걱정되는 건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입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가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니죠. 역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옛날이야기처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역사 인물이 겪은 병과 그로 인한 역사의 비극,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성적인 문장으로 풀어나가고요.


다만 기존의 잘못된 역사 상식들이 보이니 이 점은 주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노론이 사도세자의 정적이었기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도세자가 실제로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내관과 궁녀들, 심지어 자기 후궁까지 살해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서는 정조가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탕평책을 고수한 것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 어찰 이야기도 했다면 정조와 노론이 대립 관계이기만 한 것처럼 보일 위험에서 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왕이라는 해당 챕터의 큰 그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비밀 어찰 이야기는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정치의 전체 그림을 미리 짜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도 정조의 수명을 깎아낼 만큼 고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비밀 어찰 이야기를 넣었어도 그 챕터에서 말하려는 바(정조는 살벌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평생 스스로를 채찍질해 불면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렸던 왕이었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거나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의 난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태조를 만나러 간 사자들이 태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함흥차사의 전설이 된 것이죠. ‘방석은 명석한 아들이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 이방석이 남의 집 가축을 쏴 죽이고 궁 안에 기녀를 들이고 공부를 싫어하는 등 세자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고요. 조사 하나로도 맥락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고, 대중 역사서는 더 많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팩트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 팩트가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단순한 문장이라도 신중하게 써야 하고요.


그리고 조선 왕은 제후국 군주의 위치에 있는데 황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부분도 보이고, 문종이 아직 왕이 되지 않은 세자를 시호로, 그것도 수백 년 뒤에 숙종이 추존해서 올린 시호인 단종으로 부르는 부분도 보입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작은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효능과 주의사항을 체크해 보시면 내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이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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