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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역사 눈의 미학 임철규 저작집 1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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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은 시각이다. 본다는 것은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가장 가치 있는 감각으로 여겼었다. 서구는 그리스의 시각 중심적인 전통을 계승했고, 시각은 서구의 사유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감각이 되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서구 문화에서 눈과 시각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종교와 철학, 역사, 미술사, 신화, 문학까지 눈과 시각과 관련해 이 책이 다루는 문화적 요소들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이 책은 서론에서부터 "눈은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눈은 대상의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 부분을 전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배제하면서 눈이 본 부분만이 전체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것은 인식의 폭력이다. 또한 본 대상을 욕망이나 억압, 또는 지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화도 인식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악한 눈이 있는 한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자를 인식할 수 있을까? 눈이 있기에 타자에게 다가가고 손을 내밀고 교류할 수 있는데 너무 단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세기 프랑스 트루아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알려주면서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눈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서론을 지나, 저자는 눈과 시각에 대한 장대한 문화사를 펼쳐나간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보는 것을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감각으로 여겼다. 로마도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 신전 등의 웅장한 건축물,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검투 경기 등 스펙터클(볼거리) 문화, 시각중심적인 문화를 지녔다.  시각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중세 기독교 문화도 눈과 시각을 적대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인간의 몸을 입은 것, 즉 예수의 육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성모,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 벽화가 널리 이용되었다. 원근법과 망원경, 현미경 등 시각적인 도구들이 발명되었던 르네상스도 시각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다 빈치에게 눈은 내적 자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영혼의 창이었고,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주체는 보는 주체, 보고 사유하는 주체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얀스 산레담의 <위트레흐트의 뷔르커르크>. 이 그림에서처럼 종교개혁 이후 신교도들의 교회에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화려한 시각적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이성에도, 이성의 상징인 시각에도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신은 이성으로도, 시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상을 우상으로 간주하고 파괴했고, 청각적인 설교 말씀만을 강조했다. 시각적인 요소들은 눈에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리노이 주에 있었던 원형교도소. 중앙의 감시탑에서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다. 인간을 통제하는 시각적 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성상 등의 시각적 이미지가 성서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려한 종교 미술을 꽃피웠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는 모든 감각 중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고,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토대로 인식의 전제조건이 되는 시각을 중시했다. 그러나 18세기는 지배 세력이 시각 장치들을 피지배 세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감옥의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게 고안된 판옵티콘(원형 교도소)이 그 예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눈의 독단적인 힘에 반발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눈이 지배하는 세계, 억압하고 틀 안에 가두는 이성의 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낭만주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육체적인 눈은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상상력이 눈이 빼앗은 살아 있는 사유, 틀 안에 갇히기 전에 사유를 복원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눈먼 예언자 테아레시아스에게 통찰력을 준 것은 물리적인 눈이 아니라 상상력의 눈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채석장의 일꾼들(1849)>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만을 그대로 그려냈다.


  이에 반해 눈을 긍정하고 시각의 전통적인 권위를 회복시키려 한 것은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은 상상력과 예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낭만주의의 주장을 현실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자기기만으로 보았다. 리얼리즘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 구체적인 사물들, 인간의 구체적인 삶, 눈에 보이는 세상을 포착했다.  19세기 초에 발명된 사진도 현실의 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정신을 대변했다. 


입체주의 회화의 시작이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들을 한 화면에 풀어놓아, 원근법으로 표현되는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현실은 관찰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이 관찰한 것을 토대로 한 재현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의 예술 원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눈에 대한 회의를 품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 모더니즘이었다. 상징주의는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대상이 상징하는 관념들을 묘사했다.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는 외면이 아닌 인간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초현실주의는 물리적인 현실 아래에 잠들어 있는 무의식을 표현하려 했다. 무엇보다 혁명적인 것은 입체주의였다. 입체주의는 원근법이 재현한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을 한 화면에 풀어놓으며 현실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입체주의 회화는 절대적인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연결되며,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현실은 없고, 현실은 관찰자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과 시각이 가지고 있는 절대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눈과 시각에 대한 긍정과 부정, 신뢰와 회의가 엇갈리며 발전해 온 서구의 시각 문화를 폭넓게 살펴본다. 눈과 시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천 년의 서구 문화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감탄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갑자기 '보는 눈',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하고 보이는 대상을 욕망, 억압, 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눈에 맞서는 '눈물 흘리는 눈', 예수를 닮아가려는 '선한 눈'이 인간의 종말, 역사의 파국을 유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눈이 인식의 틀 안에 대상을 가둔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저자는 기독교 윤리라는 틀 안에 인류의 운명을 가둔다. 눈은 상상력을 제약한다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까? 눈물 흘리는 눈도 고통 받는 대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대상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폭넓은 본론에 비해 다소 근거가 빈약하고 기독교적 윤리에 갇힌 결론이 아쉽다. 


* p. s. 시각과 미학에 관련된 책인데 본문의 설명에 해당되는 도판이 본문 앞에 배치되어 있거나 아예 없어서 불편했다. 독자들이 일일이 도판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보기에는 불편하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본문의 도판 설명 부분에 해당 도판을 배치하고, 없는 도판은 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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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정치 민음 생각 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남우 외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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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인 여러분, 저는 이 책을 통해 키케로가 저를 설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로마의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연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누구보다 능했던 사람입니다. 연설의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연설의 전범(典範)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연설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연설문 일곱 개를 모았는데, 설득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연설 일곱 개 모두가 저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모든 이야기에 설득되기엔 그와 저 사이의 2000여 년이라는 긴 세월과 그로 인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 동안 제목만 들어 보았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은 소문대로 명문장이었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에 힘이 흘러넘쳐 수천 년 뒤의 독자인 저까지 압도했습니다. 제가 당시의 원로원 의원이나 로마 시민이었다면 , 그의 연설을 글이 아닌 육성으로 직접 들었다면 설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인으로서 저는 그의 연설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것만큼 카틸리나가 극악무도한 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틸리나는 다만 키케로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고, 궁지에 몰려서 과격해졌던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틸리나가 죽은 뒤에도 로마 빈민들은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과감한 그의 공약 때문이었는지 그를 역적으로 보지 않고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키케로조차 그가 악과 함께 미덕도 겸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키케로는 절차와 원칙, 법을 중시하는 자신의 신념도 어기고 무리하게 카틸리나를 처형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무레나 변호 연설」도 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무레나는 실제로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레나를 카틸리나를 막을 수 있는 대항마이자 자신의 정책을 이을 정치적 후계자로 보았기에, 키케로는 무레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돕게 됐습니다. 그는 무레나에 대한 탄핵에 "정도를 넘어서 경직된, 진리나 인간 본성이 감당하기에는 다소 완고하고 가혹한 원칙들이 덧붙여져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무레나를 탄핵한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갈리아 등 외부 세력의 침입에 노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로마의 지배층들이 반란에 더 민감했다는 것, 그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켜야 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자신의 원칙까지 어겨가며 누군가를 탄핵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정당성 있는 행동이라고 설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정되는 절대적인 정의를 위해서 그가 한 연설들에는 설득되었습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은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그가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약자를 위해 했던 연설이었습니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의 재산을 노린 친척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에게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하지만 친척들이 당시의 최고 권력자 술라의 측근 크리소고누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로스키우스를 변호하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변호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완전히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에서 어떤 사람도 법과 정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그의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변호 덕분에 로스키우스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정작 그는 크리소고누스와 술라의 보복이 두려워 2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약자를 위해 정의를 지키려는 그의 정신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습니다.

 또한 독재자 안토니우스를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 빗댄 「필리포스 연설(안토니우스 탄핵 연설)」도 제게 남기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 사후 처음에는 독재관직 폐지를 약속했지만, 점차 원로원과 민회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에 맞서 이 연설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을 막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안토니우스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 준엄한 비판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런 갈채를, 특히 선동가들로 인한 경우, 늘 경멸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요컨대 모두가 하나같이 갈채를 보내고, 앞서 인민의 동의를 얻곤 하던 자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것은 단순한 갈채가 아니라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중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중우정치를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모두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은 하나의 심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를 보면서 그의 말에 더욱 더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인 여러분, 그는  수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노예가 있는 것도, 재판을 위해 노예가 고문을 당하는 것도 당연시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공의 이익, 도덕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의 신념은 수천 년을 뛰어넘어 지금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저는 설득되었습니다.  그의 신념이 심판인 여러분들 또한 설득하기를 바라며 저는 그의 말로 제 변론을 마치려고 합니다.

"심판인 여러분, 이 나라에서 이런 잔인함을 몰아내십시오. 이 나라에서 이제 이런 잔인함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 매 순간 잔인한 행위를 보고 듣는다면, 본성상 아무리 온순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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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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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인류를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에서 해방시키는 밑거름이 됐다하지만 이성을 토대로 발전한 현대 사회는 끊임없는 갈등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이런 이성의 양면성을 두고 두 철학자 푸코와 하버마스는 상반된 시각을 가지고 있다이 책은 이성의 폭력성을 고발한 푸코와 이성을 통한 소통의 가능성을 제시한 하버마스두 사람의 사상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의 이성의 문제점과 가능성을 함께 살펴보고 있다.

 

두 사람의 이론을 살펴보기 전, 이 책은 르네상스부터 시작되어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수백 년 동안의 이성의 역사를 훑어본다준비 운동 치고는 너무 분량이 많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두 사람을 잇는 키워드인 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읽어야 할 부분이다.

 

이성이 개인의 삶 곳곳을 은밀하게 통제하는 것에 대한 대안으로 푸코는 시민들 자신이 윤리적 주체가 되도록 자신의 내면과 영혼을 배려하는 것을 내세운다하지만 평생을 사회의 규범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어느 것이 사회가 강요하는 규범이고 어느 것이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신만의 도덕규범인지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하버마스가 대안으로 내세운 생활세계의 합리적 의사소통의 활성화도 어떤 면에서 볼 때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두 사람의 대안이 현실에서 실천되고 성과를 얻는 데는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들 각각의 대안의 장단점을 점검하면서 둘을 절충한다면우리 자신과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의 촛불 시위에 대한 푸코와 하버마스의 가상대담은 이성에 대한 두 사람의 의견을 잘 정리하고 있다하지만 푸코는 촛불 시위 자체의 맹점을 지적하지 않고 촛불 시위가 일어난 한국 사회 전반으로 논점을 옮겨버린다그 결과 두 사람은 촛불 시위의 의의에 대해 깊이 고찰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고근대 이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각자 개진하는 데 그치고 만다두 사람의 이론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계속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책 소개를 읽고 가장 기대한 부분이 두 사람의 가상대담이었기 때문에 더욱 더 아쉬운 점이었다.

 

하지만 배경 지식을 먼저 쌓고 두 사람의 이론을 설명한 뒤두 사람의 가상대담을 통해 두 사람의 이론을 정리하는 구성은 단순히 두 사람의 이론을 나열하는 구성보다 훨씬 탄탄하고 효과적이다예습을 꼼꼼히 한 뒤 공부를 하고토론으로 배운 것을 다시 되새기는 것과 같은 효과이다마지막 부분인 이슈는 현대 사회에서의 이슈들을 통해 두 사람의 이론이 현대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이 책을 읽고 두 사람의 이론에서 어떤 장점을 취하고 어떤 단점을 어떻게 보완할지그렇게 해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어떻게 개선시킬지는 독자들의 몫이다독자들에게 이런 과제를 던져 주는 책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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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인문학 - 한국 인문학의 최전선
서동욱 기획 / 반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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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나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강좌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그 중 정말 인문학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강좌는 열에 한둘이 될까 말까다서점에 가서 인문학 도서들의 제목을 훑어보면 인문학조차 힐링이나 스펙 쌓기의 수단이 되어 버린 것 같다이 책은 인문학 열풍이 불지만 정작 인문학의 본질은 흐려진 지금의 현실에 문제의식을 제기한다인문학자부터 언론인출판인까지 인문학과 연을 맺고 있는 다양한 저자들이 모여 지금의 한국 인문학에 25개의 질문을 던졌다이 질문들을 통해 인문학은 무엇이고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다시 짚어본다.


이 책의 첫 질문은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적 CEO인가이다스티브 잡스를 비롯한 기업의 CEO들은 인문학에 빚을 졌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문학이 과연 진짜 인문학일까저자는 그들이 말하는 인문학이 새로운 자본주의에 필요한 정신들을 집약해 놓은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이 책은 자본과 결탁해 현실을 가리는 우아한 가림막이 되어버린 인문학을 거부하고인문학이 다른 분야의 토대가 되거나 어디엔가 써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유용성의 의무에 반대한다.


유용성은 인간을 억압한다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이것이 쓸모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책의 본문 중 비평가 김현의 글을 조금 변형시킨 이 글은 세상의 모든 것심지어 인간까지도 유용함이라는 잣대로 판단되며유용하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현실 속에서 인문학이 어떤 존재 가치를 가지는지 이야기한다인문학이 어디엔가 써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수단이 아니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인문학의 시작 자체가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였다는 데서 인문학을 인문학답게 하는 것이 비판 정신이라고 본다유용함이 가치의 척도가 되고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목표가 된 세상그런 세상 속에서 절망과 무기력타성에 빠진 삶에 의문을 제기하고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지 성찰하는 것이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자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인문학이 찾아야 할 본질은 비판과 성찰,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인 것이다.

 

인문학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지만인문 교양의 많고 적음이 사람을 바꾸지는 않는다는 이 책의 지적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대기업 CEO들은 정작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일에서는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라는 인문학의 가르침을 내팽개친다그들의 인문학은 비판과 성찰이 빠진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일 뿐이다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으려면 인문학의 가르침을 내 삶에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스스로 생각하고 길을 찾아야 한다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수리하는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이다.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어진 소프트 인문학 세트 메뉴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이 책은 싸우는 인문학의 정신을 잃지 않는 인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인문학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비판 정신을 잃고 원래의 방향에서 멀어진 지금이 책은 인문학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나침반의 역할을 한다그리고 너도 나도 인문학을 외치지만 정작 인문학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는 데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인문학 공부를 해도 정작 자신의 삶에는 변화가 없어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세상과 자신을 바꾸는 자신의 인문학이 무엇인지 고민함으로써 첫 발을 떼라고 제안한다그 발걸음들이 이어져 세상과 자신을 바꾸는 인문학이 뿌리내리길 바란다.

 

"유용성은 인간을 억압한다. 인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쓸모없는 인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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