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싱어의 <실천윤리학> 읽기 세창명저산책 57
김성동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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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을 몇 년 동안 공부했는데도 내가 읽어 온 인문학 책의 대부분은 해설서이다이 정도로 오래 공부했으면 원서를 읽어야 할 텐데 아직도 해설서에 의존하고 있다니 부끄럽지만해설서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원서를 읽기 전 기본 개념을 머릿속에 정립한다면 원서를 이해하기 훨씬 수월해질 테니까해설서 읽기가 원서 읽기로 이어지지 않을 때가 많은 게 문제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철학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 1946-에 대해서도 그의 원 저서가 아니라 해설서인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피터 싱어는 실천 윤리즉 규범으로서의 윤리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사안에 적용시키는 윤리학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동물의 권리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람이다.실천윤리학 Practical Ethics은 싱어의 윤리 사상 전반을 담은 핵심적인 저술이고이 책은실천윤리학의 한국어판 번역자인 김성동 교수가실천윤리학을 요약하고 해설한 책이다.


  피터 싱어는 윤리를 정당화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사회적 이익이라고 이야기한다그가 생각하는 최소한의 윤리는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 행위의 목적이나 선악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증진하는 데 두는 사상)그는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동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주장했다그런데 싱어는 이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을 적용하는 대상에 사람들뿐 아니라 동물들까지 포함시킨다동물들 또한 인간들처럼 자신을 한 존재로 인식하는 인격을 가지고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터 싱어가 동물을 인간이 이용하는 도구가 아닌인간처럼 동등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 것은 혁신적인 일이다그러나 인격을 갖춘 인간처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유로 동물들을 실험 대상으로 삼는데영아나 지적 장애인치매 노인처럼 자기 자신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람들 또한 동물과 다를 바 없으니인간의 생체 실험에는 분노하면서 동물 실험에는 분노하지 않는 것은 종 차별주의라는 그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불러왔다게다가 유전병이 두려워 유전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50퍼센트인 태아를 임신중절 하는 것보다는유전병에 걸린 것이 확실한 영아를 살해하는 것이 더 확실하며 영아와 태아 모두 의식과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하기 어려우니 영아 살해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그의 논의 또한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다철저히 결과를 중시하고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싱어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나 또한 읽으면서 싱어에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터 싱어는 자신의 실천 윤리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또한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고충분히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은 윤리적 관점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그는 우리가 왜 윤리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그 질문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반성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답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또한 단순히 우리는 착하게윤리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신어떤 사안에 대해서 어떤 것을 고려하는 것이 윤리적인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싱어에게 윤리는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피터 싱어가 말하는 논의는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생각할 실마리를 남긴다.

 

  철학자이자실천윤리학의 한국어판 번역자답게 김성동 교수는 윤리 교과서처럼 명쾌하게 싱어의 논리들을 해설한다각 장 뒤에 있는 주요 내용 정리가 싱어의 논지와 기본 개념을 머릿속에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싱어의 주장을 해설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김성동 교수 나름대로 싱어의 주장을 비판하기도 하고우리의 현실에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도 한다.


  200여 페이지의 책이지만 책 판형이 작아 몇 시간 만에도 읽을 수 있다많지 않은 내용이지만 주제 하나 하나가 오래도록 고민해야 할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김성동 교수가 명쾌하게 해설해 주었지만 김성동 교수의 해설이라는 틀 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 나 스스로 원서를 읽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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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일러스토리 1 - 모든 것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 인문학 일러스토리 1
곽동훈 지음, 신동민 그림 / 지오북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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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를 읽었을 때 이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 궁금했었다. 의학과 사회학을 전공했고 인터넷 문화잡지와 웹디자인 전문지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한국어, 영어를 포함해서 섭렵한 언어가 13개나 되고, 저서나 번역한 책도 그 분야가 제각각이다. '광범위한 분야의 지식을 대중적인 감각으로 풀어내는 지식의 큐레이터'이자 '다양한 분야에 대한 무절제한 호기심 때문에 온갖 종류의 지식을 쌓은 딜레탕트(dilettante, 예술이나 학문을 전문가로서가 아니라 애호가로서 하는 사람)'라니, 수십 가지 메뉴를 팔지만 그 중 맛있는 메뉴는 하나도 없는 식당 같은 사람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염려는 책을 읽으면서 사라졌다. 

  '모든 것이 그리스에서 시작되었다'는 부제처럼, 이 책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입문서이다. 20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입문서답게 아주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않지만,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중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잘 정리했다. 이 책으로 공부한 뒤 고대 그리스 영역 시험을 본다면 괜찮은 점수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마냥 요약정리만 잘 해 놓은 책은 아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작가 나름대로의 시선도 있는데, 그 시선이 재기발랄하다. 저자는 플라톤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저서『국가』 가 정작 중심 내용인'올바르게 국가를 다스리는 법'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가치 있는 책이라고 이야기한다. 플라톤의 주장에 따르면, 국가를 지키는 방위자들은 잡스럽고 시끄러운 음악도, 거짓 이야기인 서사시도 들어서는 안 되며 동료들과 아내와 자식을 공유해야 한다. 게다가 "개나 새들을 교배시킬 때 혈통 좋은 것끼리 짝을 맞추는 것처럼 사람도 뛰어난 남녀를 짝지어 주어야 한다."고 당당하게 우생학을 주장하고 있으니,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저자의 표현처럼 "꼴통 같은 소리"다. 저자는『국가』를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실망과 그에 대비되는 스파르타의 전체주의에 대한 호감이 낳은 미숙한 작품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정의와 권력, 국가, 교육 등 주요 사회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논의되고 있는 것들의 시초가 『국가』에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상대에게 질문을 하면서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소크라테스 철학 특유의 철학적 문답법으로 전개된다. 정치, 철학, 윤리, 논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후세에 영감을 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범접할 수 없는 고전으로만 느껴졌던『국가』에 대한 작가의 솔직한 평가를 보고 나니, 오히려 더 알고 싶고 읽고 싶어진다. 


『인문학 일러스토리 1』의 일러스트들. 간결하고 발랄한 삽화가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미지 출처: 신동민 일러스트레이터 갤러리(http://new.picturebook-illust.com)


  그리고 본문만큼이나 재기발랄한 일러스트가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면서 재미도 더해준다. 중요한 내용을 깔끔하게 그림으로 정리하면서 때로는 본문 내용을 보충설명하는 역할도 한다. 본문 옆의 작은 글상자에 담긴 용어 설명과 때때로 지은이가 개입해서 하는 보충 설명에도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이 책이 고대 그리스 문화로의 좋은 입문서 역할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요소가 챕터 끝마다 있는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같은 고대 그리스 당대의 저작부터 니체의 『비극의 탄생』, 홉스의 『리바이어던』 같이 고대 그리스 문화를 분석하거나 영향을 받은 책들까지 고대 그리스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 왜 그 책을 읽어야 하는지이유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얇지만 고대 그리스로 떠나는 플랫폼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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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발견
정승철 지음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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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삶의 대부분을 서울과 수도권에서 보냈고, 표준어를 사용하며 살아왔다. 사투리를 고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사투리 때문에 차별을 당한다거나 사투리가 사라져간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도 지방 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취업 면접을 위해 스피치 학원에서 사투리 교정을 하고 있다.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사투리가 교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수에 속해 있으면 소수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되기 쉽다.『방언의 발견』은 제목처럼 평소에 딱히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방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방언의 역사는 방언의 몰락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일본어 학습서인『인어대방 隣語大方』에서도 조선말은 서울말로 배우라고 했지만, 조선시대에 사투리를 비하하는 태도는 심하지 않았다. 실학자 이덕무는 지방관으로 일하던 시절 사투리를 쓰는 하인들과 말이 통하지 않자 하인들에게 사투리를 쓰며 지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민족 국가들은 제국주의 국가든 식민 지역 국가들이든 구성원들의 결속을 위해 표준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개화기에 들어 지식인들이 언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국어 어법과 표기법을 정리하려고 했지만, 표준어가 방언을 주변으로 밀어낸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의 일이었다. 일본어를 잘 모르는 절대다수의 조선인들과는 조선어로 소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통치의 효율성을 위해서 서울말을 중심으로 한 표준어 개념을 새로 도입한 것이다. 표준어가 자리를 잡으면서 사투리를 무시하는 경향이 조선 사회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투리는 야만적인 것, 틀린 것, 표준어는 세련된 것,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생겼다. 한쪽에서는 언어의 통일을 중시하며 표준어 정리에 힘쓰자는 주장이 나왔고, 다른 한쪽에서는 언어의 다양성을 중시하며 방언의 소멸을 우려하는 의견이 나왔다. 


 광복 이후 1960년대에 들어, 단결과 능률을 중시한 박정희 독재 정권은 방언을 분열과 비능률의 상징이자 국민 단결을 방해하는 요소로 규정했다. 당시 시행되던 '고운말 쓰기 운동'과 '국어 순화 운동'에서 교정되고 정화될 대상에는 욕설, 비속어뿐만 아니라 방언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999년에 사투리를 자동으로 교정해 주는 TV가 개발됐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실제로 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1990년대까지도 사투리는 표준어의 주변에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방언은 마냥 밀려나고만 있지 않았다. 2006년 사투리 연구 모임 '탯말두레'의 회원들이 현행 표준어 규정이 헌법에서 보장하는 국민의 평등권과 행복 추구권, 교육권을 침해한다고 헌법 소원을 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이라는 표준어의 정의 자체가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을 교양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표준어로만 공문서를 작성해야 하고 표준어로 된 교과서로만 교육을 받는 등 지역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이 기본권을 침해받는다는 주장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교양 있는'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구사하는 언어라는 의미일 뿐이고, 국가가 표준어 규정에 개입하지만 아무런 법적 효과를 갖지 않으므로 이로 인해 기본권 침해가 일어났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서울말은 지나치게 좁고 획일적인 개념이기에 서울 이외 지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소수 의견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대구 출신의 래퍼 MC메타가 경상도 방언으로 쓴 랩 <무까끼하이>나 록밴드 장미여관의 노래 <봉숙이> 등 사투리로 된 대중 가요들부터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등 방언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TV 드라마, 보도는 표준어로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사투리로 진행되는 지역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들까지, 방언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저자는 전국 모든 지역의 전통 방언이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방언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방언의 소멸 속도, 문화적 다양성이 상실되는 속도를 늦추려고 한다. 방언 연구회 회원들의 출신지 목록, 방언 사용 방송 목록 등 각종 목록의 나열을 좀 더 줄이고, 각 지역의 방언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방언들 중에서도 (서울말을 제외하고) 위상의 차이가 있는지, 방언의 가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더 깊이 분석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에서 방언을 발견했으니 후속 연구나 책에서는 방언의 다채로운 모습과 가치를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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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 마음속 상처를 치유하는 고전 속 심리여행
신동흔.고전과출판연구모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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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에 한창 빠져 있었을 때 관련 자료를 검색해 보다,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의 심리를 분석한 책을 발견했다. 우리 고전소설 속 인물로도 이런 시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인터넷 서점을 뒤져봤더니  『프로이트, 심청을 만나다』  라는 책이 있었다. 목차를 보니 한 챕터에 우리 고전소설 한 편씩, 그 소설 속 주인공의 심리를 분석하는 책으로 보였다. 


  책을 읽어보니 제목의 '프로이트'가 주는 인상과 달리, 치밀한 심리학적 분석이라기보다는 고전 속 주인공들의 심리 상담 같았다. 프로이트를 비롯한 심리학자들의 이론과 고전소설을 좀 더 치밀하게 접목시켰으면 했던 독자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고전소설 인물들의 상처에서 내 상처를 보았기 때문이다. 


  홍길동에게서는 피해의식에 짓눌려 사는 나를 발견했다.  홍길동은 서자로서 아들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의적 활동을 하면서도 늘 아버지에게서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는 율도국의 왕이라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른 뒤에도 아버지의 묏자리를 자신이 정함으로써 이복형 대신 적장자 노릇을 한다. 치열하게 노력해 나라까지 세웠는데도 서자 컴플렉스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모습이,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하면서 생긴 피해의식과 어른이 된 이후 갑질을 당하면서 얻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 닮아 보였다. 그가 피해의식을 자양분으로 삼아 남다른 성취를 얻은 것은 본받을 만한 일이지만, 자기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씻어내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꽉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심청에게서는 주변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고 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가 자녀를 돌볼 수 없어 오히려 자녀가 부모의 역할을 하는 것을 '부모화'라고 한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는 이렇게 역전된 부모-자녀 관계에서 부모화된 자녀가 어떤 심리적 문제를 안게 되는지 설명한다. 부모화된 자녀들은 타인을 강박적으로 보살피고 그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형성하지만,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입장일 뿐 정작 자신을 보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조차 스스로 외면한다는 것이다. 심청이 앞을 보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구걸을 하게 되면서부터 심청-심봉사 부녀의 부모 자녀 관계는 역전되었다. 심청은 아버지에 대한 강박적인 책임감 때문에,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인당수 제물이 되는 길을 택했다.  나는 부모화된 자녀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강박적으로 보살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오히려 인간관계가 악화되고 결국은 끊어지는 일을 겪으면서, 내 자신도 돌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다. 


  심청이 인당수 제물이 됨으로써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독립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저자의 해석은, 내게 해결의 실마리를 주었다. 심청은 왕비가 되었고, 아버지를 찾을 때도 자신의 정체가 선녀가 아닌 심봉사의 딸이라는 것이 밝혀질까 걱정한다. 예전처럼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도 염려하고 돌보게 된 것이다. 심봉사는 뺑덕어미에게 속아 재산을 잃지만, 나라에서 여는 맹인잔치에 자기 힘으로 찾아가면서 스스로 설 수 있게 된다. 내 자신이 스스로 서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 다른 사람과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걸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깨달았다. 


  이 둘뿐만 아니라,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나태하게 살다 몰락하는 이춘풍, 사랑에 집착하면서 괴물이 된 상사뱀, 일방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억눌려 망가진 사도세자까지 모든 인물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보았다.  내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뼈아프기도 했고, 나 자신과 같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에 공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는 모습에 희망을 가졌다.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들과 함께 상담실 소파에 함께 앉아 상담을 받으며 내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나온 것처럼 후련했다.


  맺음말에서 저자는 두 가지 버전의 우렁각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번째 버전에서 원님에게 우렁각시를 빼앗긴 남편은 우렁각시를 그리워하고 원님을 원망하다 죽어버린다. 반면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우렁각시가 왕에게 끌려가면서 '3년 동안 뜀뛰기를 연습해 두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그 말대로 뜀뛰기를 연습한다. 왕에게 끌려간 우렁각시가 3년 동안이나 웃지 않자, 왕은 우렁각시를 웃길 사람을 찾았다. 남편은 우렁각시를 웃기겠다며 입궐해 새털옷을 입고 뜀뛰기를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우렁각시가 웃자 왕은 남편에게서 새털옷을 빼앗아 입고 춤을 춘다. 그러자 남편은 용포를 입고 진짜 왕을 내쫓은 뒤, 우렁각시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번째 버전 속 남편은 아내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말한 대로 열심히 뜀뛰기를 연습하면서 성장했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 자신의 서사가 치유와 성장, 행복의 서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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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식인 - 서구의 야만 신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유쾌한 응수 서울대 인문 강의 시리즈 7
임호준 지음 / 민음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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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식인'이라니, 제목만 들으면 고어물 같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식인'은 문자 그대로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외래 문물이라도 좋은 것들은 집어삼켜서 흡수하고, 나쁜 것들은 배설해 버리겠다는 주의다. 이런 '식인주의'는 20세기 브라질 문화의 토대를 이루었고, 지금까지도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브라질 대중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왜 굳이 '식인'이라는 섬뜩한 이름을 붙였을까?


 '식인주의'라는 말을 붙인 이유를 알아보려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왔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럽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던 시절의 기록들 중에는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많다. 하지만 그런 기록들을 검증해 보면 하나같이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스페인은 1507년에, 포르투갈은 1570년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그러나 식인종만은 노예로 삼아도 된다는 예외조항을 두었다. 이러니 유럽 정복자들이 식인종이 아닌 원주민들까지 식인종으로 몰아 노예로 삼는 일은 수없이 많았을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유럽인들의 '원주민 식인종설'이 허위라고 반박하기는커녕, 이렇게 응수한다. 그래, 우리는 식인종이라고. 너희들을 집어삼켜서 너희들의 좋은 점은 다 흡수하고 나쁜 점은 배설해버릴 거라고. 저자는 1920년대 브라질 모더니즘 운동부터 1990년대의 브라질 대중문화까지 문학과 음악, 영화를 중심으로 식인주의가 라틴아메리카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을 설명한다. 


  1928년 식인주의자들이 선포한 「식인선언」은 서양 문명을 '먹어 삼키고자 하되' 경외하지 않는다. 또한 브라질의 민중 문화를 부흥시키려 하되 폐쇄적인 민족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식인주의의 영향을 받은 소설에는 설화, 편지, 노래, 기도문 등 다양한 종류의 텍스트가 섞여 있다. 심지어 표절도 이들에게는 훌륭한 창작의 원천이다. 식인주의를 주창한 인물 중 하나인 마리우 지 안드라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종류의 작품이든 표절에 반대하지 않네. 표절도 훌륭한 자질이 있으니까. 그건 우리를 훌륭하게 만들고, 지적인 설명이 붙은 지나친 각주를 덜어주고, 좋긴 하지만 허접하게 표현된 남의 생각을 개선시킬 수도 있게 해 주지. 하지만 표절은, 도둑질한 것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자각을 가져야 하네."(p. 135-136.)

  표절이 원본을 개선시켜 원본보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뻔뻔함에서 식인주의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문학뿐만 아니라 식인주의는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등 다양한 문화와 삼바, 보사노바, 록까지 다양한 장르가 혼합된 브라질의 열대주의 음악은 새로운 브라질 음악을 탄생시켰다. 1960년대 브라질의 군부 독재 아래서 진보적인 영화인들이 펼친 브라질의 신영화 운동인 '시네마 노부'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던 여성, 원주민,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옮겨 와 브라질의 국가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하려고 한다. 


이 책에서 식인주의의 대표소설로 소개되고 분석되는 『마쿠나이마』는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검색해 보면 브라질 열대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들을 들을 수 있다. 직접 식인주의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과 음악을 감상한다면, 식인주의 특유의 다채롭고 신선한 매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열대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노래 '트로피칼리아'의 라이브 영상과 가사를 아래에 넣는다. 

 


트로피칼리아 - 카에타노 벨로주


Sobre a cabeça os aviões

머리 위로 비행기가

Sob os meus pés os caminhões

발 아래론 트럭이

Aponta contra os chapadões

대평원을 가리키는

Meu nariz

나의 코

Eu organizo o movimento

나는 운동을 조직하고

Eu oriento o carnaval 

카니발을 지휘하고

Eu inauguro o monumento

기념비를 개막하네

No planalto central do país

이 나라의 중앙 평원에서

Viva a bossa, sa, sa

보사노바 만세 

Viva a palhoça, ça, ça, ça, ça

초가집 만세

Viva a bossa, sa, sa

보사노바 만세 

Viva a palhoça, ça, ça, ça, ça

초가집 만세


O monumento é de papel crepom e prata

기념비는 크레퐁 종이와 은으로 만들어졌네

Os olhos verdes da mulata

물라토 소녀의 초록색 눈

A cabeleira esconde atrás da verde mata

그녀의 머리카락은 초록빛 숲 뒤로 숨어 버리고

O luar do sertão

황무지의 달빛

O monumento não tem porta

기념비에는 문이 없고
A entrada é uma rua antiga, estreita e torta

입구는 좁고 구부러진 오래된 길이네

E no joelho uma criança sorridente, feia e morta

그녀의 무릎 위에는 한 못생긴 아이가 웃는 표정으로 죽어 있네 

Estende a mão

손을 내밀며......

Viva a mata, ta, ta

밀림 만세 

Viva a mulata, ta, ta, ta, ta

물라토 소녀 만세

Viva a mata, ta, ta

밀림 만세 

Viva a mulata, ta, ta, ta, ta

물라토 소녀 만세


No pátio interno há uma piscina

안뜰에는 수영장이 있다네 

Com água azul de Amaralina

아마라우리나의 파란색 물로 채워진

Coqueiro, brisa e fala nordestina e faróis 

코코넛 나무, 잔잔한 바람 , 그리고 북동부 억양, 그리고 불빛들

Na mão direita tem uma roseira

오른손에 장미꽃

Autenticando eterna primavera

영원한 봄을 확인시켜 주는

E no jardim os urubus passeiam 

정원에는 콘도르가 산책하네 

a tarde inteira entre os girassóis

오후 내내 해바라기 사이로

Viva Maria, ia, ia

마리아 만세 

Viva a Bahia, ia, ia, ia, ia

바이아 만세

Viva Maria, ia, ia

마리아 만세 

Viva a Bahia, ia, ia, ia, ia

바이아 만세


No pulso esquerdo o bang-bang

왼쪽 손목에는 총알 자국

Em suas veias corre muito pouco sangue

정맥을 타고 흐르는 아주 적은 피

Mas seu coração balança um samba de tamborim

하지만 심장에는 삼바의 탬버린이 요동치네

Emite acordes dissonantes Pelos cinco mil alto-falantes

오천 개의 시끄러운 스피커로 불협화음이 쏟아지네

Senhoras e senhores

신사 숙녀 여러분

Ele põe os olhos grandes sobre mim

그는 큰 눈으로 내게 시선을 보내네

Viva Iracema, ma, ma

이라세마 만세

Viva Ipanema, ma, ma, ma, ma

이파네마 만세

Viva Iracema, ma, ma

이라세마 만세

Viva Ipanema, ma, ma, ma, ma

이파네마 만세


Domingo é o fino-da-bossa

일요일엔 최고의 보사노바

Segunda-feira está na fossa

월요일엔 블루스

Terça-feira vai à roça

화요일엔 전원으로 나가자

Porém

하지만! 

O monumento é bem moderno

기념비는 꽤 현대적이네

Não disse nada do modelo do meu terno

내 옷의 디자인에 대해선 아무 말 하지 말게

Que tudo mais vá pro inferno, meu bem

다른 모든 것은 지옥에나 가, 제발!

Que tudo mais vá pro inferno, meu bem

다른 모든 것은 지옥에나 가, 제발!

Viva a banda, da, da

밴드 만세! 

Carmen Miranda, da, da, da, da

카르멘 미란다 만세!

Viva a banda, da, da

밴드 만세! 

Carmen Miranda, da, da, da, da

카르멘 미란다 만세!


 이 곡의 가사는 이 책에 실려 있고, 저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일부 가사는 내가 번역을 수정했다.) 근대화의 상징으로 행정수도 브라질리아가 건설되고 기념비가 세워졌지만, 그 이면에서는 한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통해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 작업의 어두운 면을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물라토(백인과 흑인의 혼혈) 소녀, 이라세마, 이파네마 등 브라질을 대표하는 인종, 자연환경, 고전 등을 나열하며 브라질적인 것을 칭송하는 노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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