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 - 리바이어던의 탄생 문제적 인간 14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지음, 진석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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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홉스'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것은 그가『리바이어던』의 저자라는 것과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라는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중학생 때 사회 시간에 공부했던 것들,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과목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어쩌면 이렇게 남김없이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지식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싶어, 홉스의 전기인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토머스 홉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그의 삶과 사상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홉스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말기(16세기 말)에 부유하지 않은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이자 비서로 수십 년을 일하면서, 고용주들의 정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학문적 역량을 쌓아왔다.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가 끝나고 왕정이 복고된 시기에도,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숱한 오해로 인해 다른 사상가들과 끊임없이 논쟁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들이 출간 금지되기까지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사상을 만들었다.


  홉스는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전제 군주정을 옹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각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상태의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언제든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약을 맺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그의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계약을 맺어 주권자, 즉 정부를 세움으로써 사람들은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홉스는 이러한 사회계약설 외에도 정치철학, 광학, 수학, 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자신만의 이론들을 정립해 갔는데,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통념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저자는 사회계약설을 비롯한 홉스의 사상과 이론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 속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짚어본다. 홉스는 주권자가 시민들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독재의 위험성을 간과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시민들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더라도 여전히 자기 보존의 권리는 갖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 독재자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는데 홉스는 그의 지적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물체는 서로 맞닿아서 힘을 주고받으며 운동하게 된다며 물체와 물체 사이에 힘과 그 밖의 것을 전달해 줄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대의 명망 있는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공기 펌프로 진공 상태를 만들자, 홉스는 미세한 공기가 유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며 그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진공 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보일은 이 연구를 통해 기체의 부피와 압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데카르트 등의 동시대 과학자들이 홉스는 과학자로서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홉스는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난 과학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학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해 때로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학술 논쟁에서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이렇게 홉스의 사상 속 모순이나 인간적인 결점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그의 업적과 한계 모두를 짚어본다.


  저자는 홉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홉스의 사상을 비판한 사람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서 타당한 점, 타당하지 않은 점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라이프니츠의 지적은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예다. 홉스가 가부장 정부도 인정한 만큼,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가부장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연 상태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홉스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그가 이야기하는 '자연 상태'가 힘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힘을 정의와 법으로 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반성문에서 자신이 '홉스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종교의 수장도 국가의 주권자가 맡아야 하며 종교 제도도 주권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성공회 주교들은 반발했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들이 당대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홉스의 생애 전반과 정치철학, 신학, 물리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축한 사상과 이론들, 그를 둘러싼 시대상과 논쟁들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정보량이 버거울 수도 있고 홉스의 논리와 비판자들의 논리, 이 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벅찰 수도 있다. 하지만 홉스와 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 책만큼 도움이 되는 책이 많지 않다. 원서가 199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홉스에 대한 최신 학설들이 반영되지는 못했겠지만, 꼼꼼하고 성실하게 홉스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고 평가하고 있다. 홉스를 무조건 찬양하지만 않고 그의 학문적, 인간적 결점까지 직시하는 객관적인 태도가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비문학 연구서인데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 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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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건축 - 인문학으로 보는 건축의 여러 가지 표정들
남상문 지음 / 현암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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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에서 건축물을 찾아보면 땅 위에 지은 구조물 중에서 지붕기둥벽이 있는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그러니 지붕 없는 건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저자는 왜 있을 수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을까그는 건축에서 지붕이 경계영역을 한정하는 최초의 조형 요소이므로, ‘지붕이 없다는 것은 건축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라고 책의 서문에서 설명한다그러므로 건축은 지붕 없는 들 위에서 서서 각자의 지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이 책은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만든 각자의 지붕이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 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스위스의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바렌도르프의 클라우스 노지 경당. 통나무를 태운 독특한 냄새가 콘크리트 벽에 배게 해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후각적 심상을 남긴다.

 이미지 출처: https://afasiaarchzine.com/2016/06/peter-zumthor-26/peter-zumthor-bruder-klaus-chapel-mechernich-35/


긴 나뭇조각이 강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박혀 있는 내리막길을 통해, 살아 있는 방문객을 죽음의 공간(납골당)으로 이끄는 스페인의 이구알라다 공동묘지

이미지 출처: https://arquitecturaviva.com/works/cementerio-igualada


장 누벨이 설계한 파리 아랍문화원의 외벽을 뒤덮은 기계 장치. 아라베스크 문양, 피어나는 꽃, 금속 장신구 등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미지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Institut-du-Monde-Arabe-Paris-France-Jean-Nouvel-Courtesy-Terri-Boake-University-of_fig8_307671319


  저자가 말하는 건축물들 중에는 창의적인 시도로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하거나 수많은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들이 있다스위스의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바렌도르프의 클라우스 노지 경당은 통나무로 거푸집을 만든 뒤 그 안에 콘크리트를 부어 건물 몸체를 만들고, 3주 동안 거푸집이 된 통나무를 불에 태운 건물이다그 덕분에 콘크리트에는 독특한 냄새가 남아방문객들에게 강한 후각적 심상을 남기고 있다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후각은 잊혔던 기억과 추억을 이끌어내는 삶의 원초적 감각이다클라우스 노지 경당이 삶의 감각을 일깨운다면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이구알라다 고동묘지는 방문객들이 죽음을 묵상하게 한다. ‘삶의 강을 형상화한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땅에 정박된 배 모습의 납골당이 나타나고그 옆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방문객들은 내리막길과 계곡을 따라가며 죽은 자의 영토로 인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프랑스의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된 파리의 아랍문화원 건물은 카메라 렌즈처럼 움직이는 금속 기계 장치로 뒤덮여 있는데보는 사람들마다 이 장치에서 아라베스크 문양피어나는 꽃차가운 기계문명반짝이는 장신구 등 다양한 것들을 연상한다단순히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지붕이 아니라삶을 더 생생히 느끼게 하거나 더 깊이 돌아보게 하며마음속의 상상을 이끌어내는 이런 건축이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일 것이다.

 

  반면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건축물들이 있다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는 이용하는 사람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건물을 오리와 장식된 헛간으로 분류했다. ‘죽은 오리는 기능에 맞게 모양새를 만들었지만그 형태만 보고는 사람들이 쉽게 그 건물의 의미와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건물을 말한다재봉이라는 기능에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었지만정작 사람들은 그 집이 재봉사의 집인 것을 알 수 없는 집이 이에 해당된다반면 기능과는 무관하지만 관습적인 기호로 치장한 건물을 장식된 헛간이라고 한다객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빽빽하게 객실을 배치한 리조트가 겉모습은 낭만적인 지중해풍으로 꾸민 경우를 장식된 헛간의 예로 들 수 있다저자는 지금 우리 도시에 죽은 오리와 장식된 헛간이 넘쳐난다고 말한다그 지역과 장소의 역사적 맥락문화유산가치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의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장소그 지역그 건물만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건축물들로 가득한 도시와 사회저자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진 원인을 돌아보며건축을 넘어 사회를 생각한다철근 콘크리트 기법엘리베이터의 개발 등 새로운 기술과 자본은 도시의 모습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기술과 자본이 건축에 혁신을 불러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건축가들도 있었다그러나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따지는 합리적인’ 가치관은 모든 공간과 건축물을 경제성과 효율성에 맞는 형태로 평준화획일화시켰다오늘날에는 공공기관과 대형 교회대형 쇼핑몰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도시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침체된 도시를 활성화시킨다는 의도였던 도시 재생도 부동산 개발 사업자들이 낙후된 지역을 싼값에 샀다 비싼 가격에 되파는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렸다재건축을 담당하는 관공서의 건축 담당 공무원들은 정작 그 지역의 주민들이 예전부터 그 지역과 관련해 간직하고 있는 그 지역만의 장소성기억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저자는 삶의 의미보편적인 가치가 드러나는 건축을 꿈꾼다온갖 이미지와 취향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유행에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저자는 오래자세히 보고 깊이 생각하면서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가려내고나만의 개성과 가치삶의 의미를 찾아가라고 이야기한다우리가 건축으로 드러내고 싶은 우리만의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때각자의 지붕들이 각자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을 것이다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편의 글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관이 뚜렷하고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뛰어난 저자답게문장도 글 전체도 정갈하다책의 만듦새도 글처럼 정갈해 군더더기가 없다표지와 목차챕터 페이지본문은 쓸데없는 장식 없이 검은 글씨와 선하얀 종이만으로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다컬러로 된 사진 도판들은 각 챕터의 뒤에 모여 있어 독자들은 텍스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전공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어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글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다건축을 넘어 건축이 삶과 세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고삶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현실을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이상을 잃지 않는다감성과 이성대중성과 깊이 사이에서도 균형을 잘 잡은그 자체로 좋은 건축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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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09-11 18: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우나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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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들을 고르다 서가 선반에서 툭 튀어나온 길쭉하고 판판한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아름다운 한복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닉네임, 본명은 우나영)'이 몇 년 전 한복을 설명하는 일러스트집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홍보 글을 보고 참 예쁜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보지는 않았었는데, 그 책이 눈앞에 있었다. 표지와 몇 페이지만 들여다봐도 예쁘고 흥미로워 보여서 끝까지 정독하고 싶어졌다. 읽어야 할 책이 여러 권 있었지만 이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지 못하고 빌려왔다.

한복에 대한 책들 중에는 너무 학술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바로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다. 책 속의 설명을 읽다 보면 한자로 된 어려운 용어가 툭툭 튀어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의 작가는 처음부터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청색', '청현색', '홍람색', '담자색' 같은 색깔 이름은 직접 그 색깔들을 보여주고, 앞으로 계속 언급될 한복의 각 구조의 명칭을 미리 설명한다. 한복의 배색과 기본 구조, 기본 의상을 미리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한복이 어떤 옷인지 큰 줄기를 파악하게 하고, 각각의 한복이 어떤 옷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나간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한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독자라도 책을 읽고 나면 한복이 어떤 옷인지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간결한 선화로 그려 더 알아보기 쉬운 한복 저고리의 구조와 각 부분

각 시대의 여성 한복을 비교한 일러스트. 왼쪽은 19세기의 여성 한복, 오른쪽은 20세기의 여성 한복이다.


일러스트는 설명하고 싶은 부분만 더 눈에 띄게 표현하는 데 사진보다 유리하다.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는 이런 일러스트의 장점을 활용해서 한복의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 종류, 입는 법 등을 더 알기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간결한 선화 안에 설명하는 부분만 색채를 넣어 강조하는 방식 덕분에 사진을 볼 때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시기에 따라 옷깃, 고름, 소매, 치마의 모양과 사이즈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나란히 배치해 두어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한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붕당이냐에 따라서 여인들의 쪽머리와 깃 모양도 달랐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려하고 섬세한 한복 일러스트

이미지 출처: 우나영 그라폴리오


화려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일러스트는 알아가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작가의 화려하고 섬세한 화풍의 장점은 한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궁중 의상에서 특히 빛난다. 궁중 의복의 복잡한 구조를 정확하게 그려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뒤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화려한 무늬를 입혀 궁중 의상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아름답다.

한복을 알고 싶어도 관련 서적들이 너무 대략적이거나 너무 학술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이 한복을 알아가기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성 한복만 다루고 있다는 것과 책의 분량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가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도 다루겠다고 했으니 후속편을 기다리고 있다. 도포, 중치막, 두루마기가 어떻게 다른 건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이니. 여자 한복을 다룬 이 책과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을 합본으로 만들어서 한복 전반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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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선언 -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
텍스트릿 엮음 / 요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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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란 나름대로의 서사 규칙과 관습으로 굳어진 특징들이 있어누구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되는 콘텐츠들, 그 콘텐츠들을 묶은 집단이다엘프와 마법사가 나오면 판타지하늘에 우주선이 떠다니면 SF, 중국을 배경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는 고수들이 나오면 무협이런 식으로. 2000년대 이후로는 장르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대중의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콘텐츠들을 포괄하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콘텐츠의 역사가 수십 년 동안 쌓여 왔고웹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 작품대중영화대중음악게임 등의 장르 콘텐츠들이 대중들에게서 큰 인기와 수익을 얻고 있다그러나 장르 문학은 문학의 주류로 여겨지는 순문학과 비교해 비주류로 여겨지곤 하고대중성이 강한 장르 콘텐츠들은 순수 예술 작품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받는다장르 콘텐츠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의 모임 텍스트릿은 장르가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미학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에서, ‘비주류 선언을 한다자신들이 또 다른 주류임을 외치는 ‘B급의 주류 선언이자 ‘Be 주류 선언이다.비주류 선언은 장르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장르와 관련된 콘텐츠들을 비평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 콘텐츠를 그저 즐길 거리로만 여기고진지하게 비평하거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텍스트릿의 연구자들은 장르 콘텐츠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우리가 장르 콘텐츠들을 즐기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짚어낸다왜 판타지 소설들은 대부분 중세시대 서양을 배경으로 할까중세시대 서양이 한국 사회에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거리가 멀고 낯선 세계이기 때문이다한국의 판타지 문학 속 중세 서양은 실제 중세 서양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서양이 근대에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낯선 동양에 대한 환상을 키워 왔지만 그들이 재현한 동양은 실제 동양의 모습과 달랐던 것과 통하는 부분이다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꿔 왔고픽션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려 했다판타지 소설 속 중세 서양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고 욕망을 채우는 공간이라는 기능을 한다이렇게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들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가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되짚어 본다이들은 장르 콘텐츠의 내용 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장르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법과 매체에서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에는 장르 문학 작가들이 PC 통신을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장르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이 시기에는 장르 문학 작품들이 주로 개인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문피아조아라 등 기업형 웹소설 사이트들이 등장했고스마트폰이 발명되고 보급된 이후로는 카카오페이지네이버 시리즈 등의 웹소설 플랫폼들에서 장르 문학이 더욱 흥행하고 있다작가는 웹소설 플랫폼에 소설을 직접 업로드하면서 창작자일 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같은 출판 주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매체에서의 변화는 내용 면에서의 변화까지 불러왔다온라인 공간에서 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서무협 소설은 어려운 무공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전달하면서 여성 인권 신장 등 당대의 변화를 반영하게 되었다이 책은 이렇게 내적인 측면만 분석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 살펴보면서 장르를 바라보는 시야를 더 넓혀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더 펼쳐나갈 수 있는 지점에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글들이 많다한국형 판타지가 어색한 이유라는 글에서는 왜 창작자들이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한국보다는 서양을 배경으로 판타지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파헤쳐 보고 있다하지만 한국의 환상성이 어떤 점에서 현실의 질서와 도덕윤리와 맞닿아 있어 현실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독자들과 어긋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또한 결론 부분에서 잘 만든’ 한국형 판타지의 예시와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로맨스와 페미니즘은 공생할 수 있을까에서 저자는 로맨스가 낭만적 사랑이라는 허울을 통해 가부장제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주장한다그리고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은 로맨스를 통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며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연대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이 로맨스 소설에 반영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그러나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이 성취하는 것은 연애 상대인 남자주인공에게 좌우되는 것인 경우가 많다남자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얻은 것이니 그의 사랑을 잃으면 사라지는 것이다그리고 로맨스와 페미니즘이 공생하려면 로맨스 소설에 강간 판타지나 폭력적인 행동이 로맨틱한 행동으로 미화되는 것 등 여성혐오적인 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이러한 면들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좀 더 논의를 진행할 만한데 결론을 내리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면이나 연구 기간의 한계 때문에 논의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르에 대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지금다각적으로 장르 콘텐츠를 비평하고 장르와 지금의 우리 사회를 연결해서 탐구해 보는 시도 자체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이 책의 부제는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이지만, ‘본격보다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도이다이 책이 텍스트릿의 첫 번째 결과물이고대표 저자인 이융희 팀장이 다음 책에서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더 깊이 있는 논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참고김지혜장르문학·서브컬처에 담긴 독자적 미학경향신문, 2019.0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30204200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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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세계사
셰저칭 지음, 김경숙 옮김 / 마음서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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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만 원권의 신사임당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지폐에 실린 인물은 다 조선시대 이씨 남자라든가천 원권에 그려진 퇴계 이황 선생이 배우 소지섭을 닮았다든가 하는 사소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지폐 자체에 크게 관심이 있지 않았다어린 시절 어머니가 반짇고리에 외국 주화 몇 개를 모아두어 그걸 갖고 놀긴 했지만 주화가 아닌 지폐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을 줄은 몰랐다그런데 각 나라의 지폐를 수집하면서 각 지폐에 얽힌 그 나라의 역사정치문화를 살펴보는 사람이 있었다그런 점에서 지폐의 세계사는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폐의 세계사는 대만의 대중 인문학자이자 여행 작가인 셰저칭이 25년간 수집해 온 외국 지폐를 통해 지폐에 얽힌 그 나라의 역사와 정치사회문화예술을 이야기하는 책이다저자는 단순히 지폐를 수집해 온 것이 아니라 지폐 디자이너를 직접 만나기도 하고 지폐의 인쇄 방식을 연구했으며 지폐 디자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찾아다녔다고 한다이 책은 그가 97개국에서 수집한 지폐 중 42개국의 지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위)1968년 발행된 네덜란드의 10길더 지폐. 앞면에서는 인물의 세부적인 특징을 단순화하고, 뒷면에는 몬드리안의 추상화처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담았다. 

(가운데) 2002년 발행된 페로 제도의 페로크로나 지폐. 화가 하이네센이 그린 페로 제도의 풍경화를 뒷면에 담았다.

(아래) 1941년 발행된 프랑스의 50프랑 지폐. 프랑스 회화 특유의 섬세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다양한 나라의 지폐 이미지들을 컬러로 담았다책장을 넘기면서 그 나라만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담은 지폐 자체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자국의 추상화가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형을 그려 넣은 네덜란드의 지폐수묵화 같은 발묵 기법으로 광활하고 적막한 바다 풍경을 그린 페로 제도(Færøerne, 영국과 아이슬란드 사이에 있는 덴마크의 자치령)의 지폐는 지폐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다. 1940년대에 발행된 프랑스 지폐들에 그려진 삽화들은 프랑스 회화 특유의 풍부한 색채와 섬세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해외는커녕 집 밖으로 나가기도 꺼려지는 이 상황에서 이 책은 지폐를 통해 다양한 나라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책상 앞으로 불러온다.


2005년 루마니아에서 발행한 1만 레우 지폐. 이 지폐에 그려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성당에는 잔혹하고도 슬픈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지폐에 얽힌 이야기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크다. 2005년 발행된 루마니아 1레우 지폐에 그려진 쿠르테아 데 아르제슈 성당 Curtea de Arges Cathedral은 잔혹하면서도 슬픈 전설을 품고 있다. 194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70여 년 동안이나 태국의 각종 지폐의 주인공이 되어 온 라마 9세 전 국왕은 국왕과 왕실의 이미지를 신성하게 만들기 위해 태국 정부가 얼마나 오랜 시간 공을 들여왔는지를 보여준다원 제국의 전성기에 궁중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포도주와 마유주벌꿀주를 뿜어냈다는 은 나무는 1993년 몽골에서 발행된 5천 투그릭과 만 투그릭 지폐 뒷면에 그려져 과거의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지폐 곳곳에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 먼 나라들의 역사와 현재가 숨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다만 워낙 다양한 나라의 지폐들을 제한된 분량 안에서 다루다 보니 각 지폐에 대한 설명이 생각만큼 깊이 있지는 않다. 42개국의 지폐 이야기를 하는데 한국어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책의 분량이 326페이지밖에 되지 않으니스스로 지폐의 인쇄 방식을 연구했다고 하니 지폐의 인쇄 방식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정교한 오목판 인쇄 기술’ 정도로 언급하는 데 그친다무엇보다 지폐가 언제 어디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개관하는 서론 부분을 덧붙였다면독자들이 지폐의 세계로 들어오는 데 도움을 주면서 지폐의 세계사라는 제목에 더 걸맞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이 책은 저자가 각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지폐를 설명하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모은 것이라, ‘테마로 보는 세계사보다는 인문 에세이집에 가깝다저자가 여행에서 느낀 감상 부분이 서정적이어서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지폐라는 키워드로 세계사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아쉬울 것이다.

 

  그리고 내용 면에서 오류도 보인다프랑스 화폐 챕터에서 저자는 1870년 보불전쟁(프랑스와 프로이센이 스페인 국왕의 선출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전쟁당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이 나라를 지키는 데 비교적 냉담했다고 설명하면서전쟁을 피해 런던이나 브뤼셀로 피신했던 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반 고흐를 든다그러나 반 고흐는 애초에 프랑스인이 아니기에 보불전쟁에 참전해야 할 이유가 없었고그 당시 런던도 브뤼셀도 아닌 헤이그의 화랑에서 직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전쟁을 피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에서 자기 경력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반 고흐는 인상파가 아니라인상주의의 영향을 받되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자기 개성을 추구하려 했던 후기 인상주의에 속한다저자가 각 지폐에 얽힌 한 나라의 역사나 한 분야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기에 이런 오류를 저질렀을 것이다.


  이런 점들로 볼 때 이 책은 지폐의 역사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아쉬운 책이지만낯선 세계의 문물들을 구경하면서 현실의 시름을 잊고 상상을 펼치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책일 것이다예쁘고 다채로운 이미지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은 사람들편안히 쉬면서 얕고도 넓은 지식을 쌓아가고 싶은 사람들은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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