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의 역사 - 파란색은 어떻게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는가
미셸 파스투로 지음, 고봉만.김연실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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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랑을 좋아한다. 비 개인 하늘의 옅은 파란색부터 정장 재킷의 짙은 남색까지 내 주위의 다양한 파란색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니『파랑의 역사』를 처음 봤을 때, “파랑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칩니다”라는 홍보 문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홍보 문구에 걸맞게 『파랑의 역사』 는 파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따르면, 파란색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랑 받는 색이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파랑은 안정과 평화의 색이다. 그리고 자유와 꿈의 색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도 파랑을 그런 색으로 생각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까지, 저자는 사람들이 파랑에 부여한 의미와 위상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랑의 역사’는 사람들이 파랑에 부여한 의미와 위상의 역사이다.


영화 <킹 아더>(2004)의 한 장면. 유럽의 북방 민족인 켈트 족의 전사 기네비어(키이라 나이틀리)는 적들에게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해 얼굴과 몸에 푸른색을 칠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파란색은정확히 파란색 하나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무관심의 대상이었다그리고 파란색이 오늘날 안정과 평화의 색으로 인식되는 것과 달리고대 로마 사람들에게 파란색은 공포의 색이었다로마를 위협하던 북방의 게르만 족과 켈트 족이 적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파란색을 몸에 칠하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오늘날에는 전형적인 백인 미남미녀의 조건으로 꼽히는 파란색 눈도고대 로마에서는 추하다는 취급을 받았다.(책에서는 설명되지 않았지만파란색 눈도 게르만 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후 12세기까지 천여 년 동안이나 파란색은 유럽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위) 영국 왕 리처드 2세를 위해 그려진 두 폭 패널화(1395년경) 중 오른쪽. 성모가 파란색 옷을 입고 있다. 

(아래) 장 푸케, <필립 4세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영국 왕 에드워드 1세>(1460년경). 왕좌에 앉아 있는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란색 겉옷을 입었다.


  그러나 12세기 들어 성모 마리아의 옷이 푸른색으로 그려지면서 푸른색의 위상은 높아졌다중세 성화에서 성모는 아들 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뜻으로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상복의 색깔이었던 파란색은 성모의 슬픔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색이었다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삼고 있었던 프랑스 왕은 성모를 따라 푸른색 옷을 입었고뒤이어 서양 사회 대부분의 왕들이 푸른 옷을 입었다문장(紋章국가나 단체 또는 집안 따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는 상징적인 표식)에 푸른색을 넣는 왕가나 귀족 가문들도 많아졌다파란색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대청과 인디고를 이용한 파란색 염색 기술도 발전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의 삽화.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었던 재킷의 파란색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색이 되었다.


  14세기에서 15세기 사이 유럽 각국에 사치 단속법이 시행되고, 16세기 말 종교 개혁이 시작되면서 빨간색노란색 등의 화려한 색채들은 탄압을 받고 검은색이 유행했다하지만 파란색특히 어두운 파란색은 검은색과 비슷한 색인 덕분에 관대한 대우를 받았다그리고 18세기에서 19세기 유럽 전역에서 낭만주의가 유행하면서파란색은 사랑과 이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주인공 베르테르가 입었던 재킷도 파란색이었고또 다른 낭만주의의 대표 소설 하인리히 폰 오터프딩엔』 의 주인공이 찾아 헤매는 것도 푸른 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 장교의 제복(위)과 청바지를 입은 이란의 젊은 여성들(아래). 이처럼 파랑은 절제의 색으로도, 자유와 해방의 색으로도 쓰인다.


  파랑은 현대에 들어서도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검은색과 비슷한 절제의 색이라는 점에서 짙은 남색은 제복의 색으로 널리 쓰인다반면 공산국가와 개발도상국이슬람 국가들에서 청바지가 서양을 향한 개방과 자유의 상징이 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파랑은 자유의 색이기도 하다또한 중립과 평화안정을 상징하는 색이 되어 국제연합의 상징색으로 쓰이기도 한다

  파랑은 상징적으로 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도 않고빨강처럼 강렬하거나 공격적이지 않다파랑은 가장 투명한 색이다인간들이 그 투명함에 다양한 의미들을 부여해 왔을 뿐이다파랑을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파랑에 대한 우리의 선호나 감정이미지는 사회와 역사에서 영향을 받아 온 것이라고 이 책은 이야기한다저자의 전공이 유럽사이기 때문에 서구 세계 밖에서의 파랑의 역사를 살펴보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파랑에 투영된 인간의 정서와 문화경제사회는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P. S.  각 단원과 소단원의 제목, 인용문, 페이지 숫자, 각주 숫자를 보랏빛이 도는 파란색으로 표기한 덕분에 파랑이라는 주제에 더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푸른색을 담은 도판들 덕분에 보는 즐거움도 컸다. 그러나 베르메르의 푸른색 사용법에 대한 설명은 188페이지에 나오는데, 설명에 해당하는 도판은 193페이지에 있는 등, 설명과 그 설명에 해당하는 도판이 서로 떨어져 있어 보기에 불편했다. 이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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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 동화에 숨은 역사 찾기
박신영 지음 / 페이퍼로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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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 스포일러 포함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서 안나 공주에게 손을 내미는 한스 왕자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에서 한스 왕자는 이렇게 노래한다. “항상 저의 자릴 찾아 헤맸었죠즐거운 파티에 갈 때나작은 모임에서.” 한스 왕자는 왜 자기 자리를 찾아 헤매야 했을까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를 읽으면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왕위를 계승하는 왕자가 아니라면 자기 살 길을 스스로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근대 이전 유럽에는 작은 나라들이 많았고작은 나라에 왕자가 많을 경우 영토를 분할해 상속하면 국력이 약해지는 문제가 생겼다그래서 왕위를 계승하는 왕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왕자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개척해야 했다가장 좋은 방법은 여왕이 될 이웃나라의 외동 공주나 첫째 공주와 결혼해 그 나라의 왕위를 상속 받는 것이었다그래서 형이 열두 명이나 있던 한스 왕자는 안나 공주를 유혹해 아렌델의 왕위를 상속 받으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동화 속의 왕자 공주들 또한 당시의 사회적역사적 맥락과 무관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동화전설신화소설은 지어낸 이야기이지만 이야기가 만들어진 당시의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으니까저자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신데렐라’, ‘빨간 모자’, ‘빨간 머리 앤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나 문학 작품들의 역사적 배경들을 살펴본다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동화와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지나쳤던 역사적 배경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위)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속 마법약을 만드는 마녀의 모습. 그러나 민간의학으로 사람들을 치료해 주던 여성들이 마녀로 몰리는 것이 진실이었다. 

(아래) 영화 <베니스의 상인>(2004) 중 샤일록(알 파치노)과 안토니오(제레미 아이언스)의 재판 장면. 유대인 상인 샤일록은 악인으로 묘사되지만 그는 사실상 유럽 사회에서 소수자이고 약자였다.


  그러나 단순히 재미만 주는 책은 아니다이야기 속의 역사적 배경을 통해 이야기 뒤에 가려진 소외된 존재들불편한 진실을 보여준다앞에서 이야기했던 백마 탄 왕자들의 진실을 알면 동화 속 왕자 공주의 낭만적인 로맨스에 대한 환상은 무참히 깨진다왕위 계승자가 아닌 왕자들에게 로맨스는 낭만이 아닌 생존 수단이었다숲속에서 혼자 사는 여인들은 민간 의학 지식으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지만환자들이 낫지 못하거나 사망했다는 이유로심지어 약값이나 치료비를 내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녀로 고발당했다그것이 동화 속 마녀들의 진실이었다한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겉보기에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퍼뜨리는 작품 같다그러나 원전 속에는 유대인 상인 샤일록의 재판 이야기 외에도외양과 내용물이 일치하지 않는 상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그럼으로써 사랑과 자비 같은 기독교인의 미덕을 이야기하면서 유대인 샤일록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기독교인 주인공들의 이중성을 비판하는 것이다이야기의 당의정을 벗기고 아름답기는커녕 불편한 진실들을 볼 때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꼭지 수를 줄이고 각각의 주제를 더 깊이 파고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그러나 일본의 작가 키류 마사오의알고 보면 무시무시한 그림동화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면에 치우쳤던 것과 달리역사적 배경을 꼼꼼히 짚어보면서 독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는 것이 장점이다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서 분량상 다루지 못했던 우리나라와 아시아 지역의 이야기들을 담은 후속편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세상에는 우리가 파헤쳐야 할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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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 경계와 일탈에 관한 아홉 개의 사유
강상중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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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외라는 개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어떤 사람에게는 자기 이론을 구성하는 데 있어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자 골칫거리일 것이다반면 어떤 사람에게는 새롭게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예외를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막을 수 없는 변화의 계기로 보고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다예외는 생각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이 책은 역사학정치학경제학법학과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전문가 아홉 명이 예외라는 화두로 각자 풀어낸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소수의 특수한 사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예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들을 지닐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저자들은 예외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과학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하나의 과학 법칙이 정립된 이후 그 법칙에 대한 예외가 어김없이 나타난다대부분의 예외는 기존의 법칙 안에 포섭되지만어떤 예외는 기존의 법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칙이 된다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과학은 발전해 간다또한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즉 예외가 되지 않으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독립적인 사고를 하는 예외적인 사람들은 역사의 변화를 일으키는 도화선 역할을 한다법과 예법제도가 옳지 못하면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이 옳다고 판단하는 대로 행동하라고 주장했던 공자가 그런 예외적인 인물의 대표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것이 공연한 것만은 아니다저자들은 예외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무시하지 않는다평범한 중학생이 이유 없이 어린아이를 죽인 사건처럼 예외로서의 극단적인 악도 존재한다도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회였던 조선에서조차시신을 이용해 무고한 사람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고 돈을 갈취하는 도뢰(圖賴)’라는 예외적인 범죄가 성행했다박정희의 유신정권에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민주주의의 토대가 되는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예외 상태의 통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책은 이렇게 위험한 예외들에서도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관념에 얽매이고 당장 눈앞의 도뢰 사건을 해결하는 데 급급해도뢰가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에 대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그러나 우리는 예외 상태의 통치였던 독재를 통해통치 권력을 규제하는 절대적 규범의 존재 자체가 문제를 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박정희라는 한 인격이 통치 권력을 규제하는 절대적 규범이 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계급민족이념 등 어떤 절대적인 규범이 통치 권력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다절대적 규범이 권력을 작동시키게 하는 대신 여리고 나약한 존재들이 상위의 권위 없이 연대하는 것이것이 우리가 예외 상태에서 배우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한편 예외는 배제당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정치학자 박상훈은 한국의 지역주의를 통해예외와 배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왔던 한국의 정치 현실을 비판한다그는 지역주의라는 해석의 틀을 악용해 사람들을 분열시켜 온 세력들에 맞서지역을 넘어 실업자비정규직이주노동자 등 더 많은 예외와 배제의 대상을 돌아보자고 이야기한다기획자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까닭은 예외들의 희생 덕분이고우리 자신 또한 언제든지 예외와 배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예외를 배제당하는 존재로 볼 때예외를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우리나라의 세월호 사건 등 최근 예외적인 사태들이 늘어나고 있다그리고 성소수자이민자 등 예외적인 존재들의 존재감도 전 세계적으로 점점 커지고 있다그러나 국가는 예외적인 사태에서 어떤 것도 배우지 못하고 있고사람들은 예외적인 존재들에 대한 적대감을 공공연히 드러낸다이렇게 계속해서 예외적인 것들에 대해 아무 고찰 없이 외면하거나 거부한다면우리는 예외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도 못하고함께 살아가는 법도 배우지 못할 것이다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 책은 말한다우리는 예외를 막을 수 없고예외를 잊어서도 안 된다고그리고 묻는다예외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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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을유세계사상고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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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이제 '이상향'을 가리키는 흔한 말이 되었다하지만 과연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향을 뜻하는 말로 만들어낸 것일까유토피아라는 말을 탄생시킨 그의 소설 유토피아를 읽어보면그가 생각했던 유토피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토머스 모어는 친구들과 함께 포르투갈인 선원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에게서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다유토피아에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으며함께 노동해서 얻은 대가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다모두가 재화를 풍족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화에 욕심을 내지 않고,보석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을 받는다죄인에게는 신체에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대신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게 한다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서로의 종교를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않는다.(그런데 정작 모어 본인은 종교재판에서 개신교도들을 화형시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사회이다하지만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사리사욕이 없는 인간일 때에야 실현 가능한 사회이다하지만 사리사욕이 전혀 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모어 자신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했기에 '어디에도 없는 곳(그리스어 ou(없는)와 topos(장소)를 합친 말)'이라는 뜻의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그리고 유토피아 내부의 제도들 중에서도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다른 제도나 관습과 모순되는 것들도 있다. 심지어 유토피아조차도 노예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다.(16세기의 인물인 저자의 한계로 볼 수 있다.)유토피아도 결코 완벽한 이상향은 아닌 것이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했던 당시 유럽에서는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착취했고지주들이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소작농들을 내몰았다. (이런 현상을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한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빈부격차와 실업율 증가, 빈민 문제 등의 사회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이런 현실이 이 책에서는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고 표현된다. 이런 영국의 현실에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도둑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모두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주자는 혁신적인 주장까지 한다. 이 책이 나온 지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기본소득제(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의 도입을 두고 찬반 논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유토피아는 당시 현실의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었지만현실의 불합리함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완벽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당대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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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철학을 만나다 - 문학과 영화로 철학하기
장병희 지음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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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크 나이트> 스포일러 있음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악당 조커(히스 레저)는 죄수들이 탄 배와 일반 시민들이 탄 배에 폭탄을 설치하고, 각각의 배에 상대쪽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폭장치도 함께 놓는다. 두 배는 운항 중 엔진 고장으로 멈추게 되고, 조커는 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자정이 되기 전에 상대쪽 배를 폭발시키는 기폭장치를 누르면 그 배는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30분이고, 두 배에 탄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두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두 배에 탄 사람들 모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폭탄이 설치된 두 배에 탄 승객들. 상대쪽 배를 폭발시키는 기폭장치를 누르면 살려주겠다는 조커의 제안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갈등과 고민 끝에 두 배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는 것을 포기한다. 조커는 양쪽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자 직접 기폭장치를 작동시키려 한다. 하지만 첨단 감청 장비로 조커의 위치를 파악한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이 조커를 제압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자신들을 희생하려 한 양쪽의 결단이 결국 서로를 살린 것이다.

  이 책 『예술, 철학을 말하다』에서는 '다크 나이트'의 이 장면으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론을 설명한다. 결정의 순간 직전까지 배에 탄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그들(das Man)이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그들'은 일상에서 평균적인 기준에 의존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실존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인간이 원하는 미래의 자신의 존재 방식)을 위해 매 순간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 실존에 대한 고민 없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의존하고 평균적인 삶을 지향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귀속'이라고 하고 귀속하면서 살아가는 삶 '비본래적 삶'이라고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양심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반적 의미의 양심이 아니라, 남들을 모방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삶, 실존적인 삶, 본래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실존적 선택을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인도적 행위를 실천하는 진정한 세계-내-존재(세계 안의 다른 존재들과 다양하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 넣었다.)이자 고유한 자신이 된다. 배 안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세계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실존을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 철학의 개념과 이론을 이렇게 영화, 시, 소설, 희곡 같은 예술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에 적용하면서 풀어나간다. 이전의 철학이 인식, 진리, 본질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추구해 왔던 것과 달리 현대 철학은 개별적 존재, 즉 현실 세계 속의 개인과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 속에 그려진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에 현대 철학의 개념과 이론들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철학은 결코 인간의 실제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삶의 현실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나 보편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살아가면서 내가 체험하는 고뇌는 살아 숨 쉬는 현실이고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고, 철학적 사고는 그런 현실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고뇌로 가득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민을 예술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철학자들의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고민들, 그리고 그 고민들 끝에 나온 개념과 이론들을 보면서 우리는 삶의 고민과 고뇌도 끌어안으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예술과 철학의 만남뿐만 아니라 철학과 현실의 만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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