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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의 눈물
권지예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2월
평점 :
여행이라는 단어는 설렘을 주는 것 같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는 20대의 마지막을 그냥 흘러보내기 싫었다. 평생 기억될 만한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해외여행이었다. 그래서 스물아홉 여름, 보라카이에 친한 동생과 갔다. 그때의 보라카이는 관광지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곳이라 많은 정보가 없었다. 그나마 그곳의 전압은 110볼트라서 어댑터를 준비해야 한다는 팁 정도만 알고 갔다. 세상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여유를 누렸다. 여행은 가지 않았다면 여행이 주는 기쁨을 나는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권지예가 10년 만에 펴낸 소설집 <베로니카의 눈물> 은 6편의 단편과 문학평론가 소영현의 해설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편을 제외하면 모두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여행이라는 에피소드로 조금 더 느리게 때로는 예민하게 인물들의 심리를 그려내고 있다. 모든 글의 주체는 여성이어서인지 공감과 생각거리를 부여해주는 글이 많았다.
-베로니카의 눈물
인생은 그저 흐르는 거야. 그냥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실어. 춤출 때처럼. 우린 그래서 모두 춤을 잘 추지. 여긴 쿠바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그냥 파도에, 리듬에, 인생의 시간에 몸을 실어.
글을 쓰기 위해 쿠바에서 한동안 지내기로 하고 집을 구한 작가.
철저히 독방의 수인처럼 격리해야 글에 집중되는 습관을 가진 작가는 시도 때도 없이 기습 방문하는 관리인 베로니카가 불편했지만 어느새 쿠바의 엄마로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많이 의지한 베로니카에게 불미한 사건으로 의심을 하게 되는데.
-낭만적 삶은 박물관에서나
쇼팽의 손에 비해 더 강건해 보이는 상드의 손과 팔. 뭉툭하고 짧은 손톱을 가진 그녀의 손은 의지적인 느낌이 강했다...... 상드가 연약하고 가냘픈 쇼팽의 손을 꼭 잡아주었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낭만을 사냥하기 위해 다시 파리를 찾아온 재이. 그녀의 몰래 파리 연인들의 키스를 촬영한다. 그러면서 파리에서의 1년간 짧은 결혼생활을 떠올리는데 그녀가 마음에 둔 사람은 결혼했던 한국 남자가 아닌 프란스 남자였다.
-파라다이스 빔을 만나는 시간
남겨진 나는 뚜껑을 분실한 향수병처럼 삶의 향기도 휘발되고 의욕도 잃은 채 몇 계절을 흘려버리고 있었어요.
하숙집 어린달 수현은 여섯 살 많았던 하숙생 민수를 수년이 지나 대학에 선배로 재회하면서 연인이 되었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명퇴 후 함께 쿠바 여행 가기로 했지만 민수의 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방을 정리하다 나무상자를 발견하는데 '쿠바에 가면 소피아 곤살레스에게 전해주길'이라는 유언과 같은 메모가 붙어있었다. 남편의 비밀을 확인하려고 쿠바 여행길에 오른 수현은.
-플로리다 프로젝트
가난이 익숙해서 두렵지는 않지만.. 그건 냄새나고 낡은 신발 같은 것. 어쩔 수 없이 신고 다니긴 하지만 당장이라도 벗어버리고 쾌적하고 디자인도 예쁜 새 신발을 신고 싶은 욕망.
친구 미연 부부의 대타로 세미나 참석차 올랜도행 비행기에 오른 현주와 딸 서연. 세미나 종료 후 모녀는 함께 간 일행과는 달리 경제력이 부족하여 어울리지 못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서연을 인터넷으로 저렴한 항공권을 찾아 둘은 쿠바로 떠나게 되는데 딸의 작은 파우치에서 두 줄의 임신 테스트기를 발견하여 딸이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지만 엄청난 사건을 알게 되고 오래전 자신의 과거가 오버랩되는데.
카이로스의 머리카락은 패키지여행지에서 만난 인간 군상에 대한 내용이었고,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유일하게 여행지가 나오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마는 실제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로 남자의 절망적인 선택이 안타까웠다. 여행은 어쩌면 방황하는 나의 선택을 결정해주는, 미로 속에서 희망을 찾아주는 열쇠 일지도 모르겠다. <베로니카의 눈물>는 그동안 수록된 작가의 글들을 모아둔 소설이었다. 짧지만 여운이 길게 남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