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열 가지 생각
이해인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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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직접 만날 수 없거나 만나기 힘든 어른들의 귀한 말씀, 좋은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최적의 통로가 책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런 어른, 그런 작가 중 한 명이 이해인 수녀님이다. 2023년 마음산책에서 출간한 이해인 수녀의 산문집 <인생의 열 가지 생각>은 1945년생인 저자가 팔십 해 가까이 살면서 스스로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생의 열 가지 화두에 대한 글이 담겨 있다. 열 가지 화두란 가난, 공생, 기쁨, 위로, 감사, 사랑, 용서, 희망, 추억, 죽음이다.


저자에 따르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비범한 희망을 얻는 길"이다. 모두가 풍족하기를 갈망하고 사치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시대에 가난을 긍정하고 청빈한 삶을 살기를 권하는 것은 이러한 연유다. 저자가 속해 있는 수녀원에서는 내가 아파도 '우리'가 아프다는 말을 쓸 정도로 개인 중심의 사고를 지양하고 공동체 중심의 사고를 장려한다. 내가 많이 가질수록 다른 사람은 덜 가진다는 것을 상기하며, 일부러라도 나는 덜 갖고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 늘어날 때, 우리 사회가 더 살만한 세상이 될 거라는 저자의 말씀에 공감한다.


공생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선한 사람은 모두가 웃고 있을 때 우는 사람을 바라본다. 나의 슬픔, 나의 외로움만 돌보지 않고 타인의 슬픔, 타인의 외로움을 함께 돌보며 먼저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이 함께 사는 삶이다. 가톨릭에서는 좋은 일이 생겨야 기쁜 것이 아니라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으면서 살면 기쁨이 온다고 가르친다. 사랑도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먼저 사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단지, 사랑하려는 노력을 하다가 떠나는 사랑의 순례자입니다."(136쪽)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겨 본다.


저자는 암 투병을 겪으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면서 하나의 습관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자존심 상하고 화나는 일이 있을 때마다 '상상 속의 관'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속상한 일도 죽으면 다 잊힌다. 그러니 그런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지금에 집중하자. 저자는 틈나는 대로 부지런히 그동안 받은 사진, 엽서, 편지 등을 정리한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 어떤 추억이 떠오르면 바로 연락해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엇이든 은총이며,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사람의 힘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으니 항상 겸손하라는 당부도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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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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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기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전에는 엄두가 안 나서 하지 못했던 집 청소나 짐 정리를 실천한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가 은희경도 그중 한 명이다. 은희경 작가가 2023년에 출간한 산문집 <또 못 버린 물건들>에는 팬데믹 기간 3년 동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큰맘 먹고 짐 정리를 실천한 저자가 당장 쓸모는 없지만 감히 버릴 수 없었던 물건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유행에 민감한 저자는 미니멀 라이프 열풍에 발맞추어 가볍고 단순한 삶을 살고자 했다. 때마침 이사를 하게 되어 대대적인 짐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가. 술을 좋아하는 저자가 첫 번째 책의 인세로 구입한 여섯 개들이 맥주잔이라든가, 이따금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고심 끝에 구입한 감자 칼, 구둣주걱 같은 물건들은 그것의 쓸모나 사용 빈도보다 그것에 담긴 추억 때문에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사정을 약간은 변명조(!)로 직접 찍은 사진을 곁들인 짧지만 재미난 이야기로 들려주는데,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고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그런 물건 나도 있지. 절대 못 버리지..."


버리지 못한 물건이 많다는 건 그만큼 소중한 추억이 많다는 뜻도 된다. 추억이 많다는 건 경험이 많다는 뜻도 된다. 집에 마라톤 대회에서 받은 메달과 안 쓰는 토슈즈가 있다는 건 곧 저자가 마라톤을 해봤고 발레를 배워봤다는 것 아닌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며 매일 하나씩 버리는 삶을 실천하고 있지만(쉽지 않다), 저자처럼 버리고 싶어도 차마 버릴 수 없는 물건이 많은 삶이 사실은 더 바람직한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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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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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헨리 제임스의 <아메리칸>이라는 소설에 관한 소논문을 쓴 이후로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보스턴 사람들>을 읽은 건 이 소설이 19세기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인데, 읽어보니 여성 참정권 운동뿐 아니라 지금도 유의미한 페미니즘 운동 관련 논쟁들이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상당히 놀랐다. 19세기 미국의 백인 남성 작가가 여성 인권 문제에 관해 이 정도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유를 했다는 것이 놀랍고, 그가 목격한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과 현대의 여성 운동계 내부의 모습이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은 미국 남부 출신의 변호사 베이질 랜섬이 미국 북부 보스턴에 사는 먼 사촌 올리브 챈설러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초대 당일 랜섬은 올리브의 제안으로 당시 유행하던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에 참석한다. 올리브는 당대의 대부분의 남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여성에 대해 보수적이고 편협한 사고 방식을 가진 랜섬이 집회에 참석한 여성들을 보고 충격을 받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랜섬은 여성 참정권 운동 집회의 떠오르는 스타인 버리나를 보고 첫눈에 반해 구애를 멈추지 않고, 이에 당황한 올리브는 버리나를 여성 운동계에 붙잡아 두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이 소설은 크게 보면 버리나라는 젊고 똑똑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미국 남부 출신의 보수주의자 남성 랜섬과 미국 북부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 여성 올리브가 일종의 대결을 버리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결의 결과만 보면 작가가 여성 (참정권) 운동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예측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성 운동에 투신한 여성이 이성애를 잃지 못해 스스로 가부장제에 복속되는 줄거리가 상당히 현실적이고, 이것(이성애 혹은 남성애)이야말로 여성 운동의 가장 큰 걸림돌이자 장벽이라는 사실을 (19세기 옛날 사람인) 작가가 잘 간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씨들이 결국 가장 마음에 둔 것은 이 남자뿐이었다. 투표권보다 찰리가 훨씬 더 그 여자들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중략) 동네 젊은 여자들을 상대로 조사해보니 항상 이런 뻔뻔한 남자 애인이 그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때문에 그녀는 어느새 그런 남자를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남자의 희생양이 되는 여자들이 그들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그녀와 함께 있을 때 어떤 대화를 나누든 자기들끼리 있으면 자나 깨나 그런 남자 얘기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았다)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 (57쪽)


이 책은 은행나무에서 2024년에 출간된 판본으로 총 728쪽에 달한다. 일반적인 소설의 2,3배 분량에 달해서 처음에는 읽을 엄두가 잘 안 났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 이야기가 워낙 흥미진진해서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여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올리브와 남성의 입장을 대표하는 랜섬 간의 논쟁은 오늘날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SNS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성별 간 대결을 떠올리게 한다. 약 138년 전에 살았던 남성들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개탄스럽지만, 그 때에도 지금도 한결같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은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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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렘 입숨의 책 - 구병모 미니픽션
구병모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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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어렵다는 인상이 있어서 잘 읽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 아니라 장점일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서 구병모 작가의 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고 있다. 2023년 안온북스에서 출간된 구병모 작가의 미니픽션집 <로렘 입숨의 책>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이 책에는 짧은 길이의 단편 소설 열세 편이 실려 있다. 길이는 짧아도 한 편 한 편의 임팩트가 상당하다. 가령 첫 번째 단편 <화장의 도시>는 아기가 태어나면 곧바로 몸에 나노 시드를 심어서 그가 죽으면 꽃으로 피어나 그의 삶을 증명하게 하는 어느 도시의 장례 정책을 그린다. 그가 삶을 잘 살았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아름답고 풍성할 것이고, 그가 삶을 잘 살지 못했다면 그의 시체에서 피어난 꽃이 볼품없거나 심지어 썩은 냄새가 날 거라는,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원형적인 생각인데 그것을 소설로 묘사하니 환상적이면서도 기괴하다.


이어지는 단편 <신인의 유배>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나스카 지상화에 대한 상상을 담고 있다. <영 원의 꿈>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꿈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을 하게 된 청년의 이야기인데, 허구인데도 묘하게 현실의 세태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 '로렘 입숨의 책'은 네 번째로 실린 단편 <동사를 가질 권리>에서 힌트를 얻은 듯 보인다. '로렘 입숨'은 출판이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실제로 인쇄될 텍스트를 대신해 자리 채우기 용으로 사용하는 무의미한 단어 조합의 처음 두 단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생소한 단어 또는 지식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구병모 작가 소설의 특징이다. 


<날아라 오딘>은 전쟁 시 자살 폭탄 운반용으로 쓰일 동물을 훈련시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고, <예술은 닫힌 문>은 탈락하면 문자 그대로 죽는 음악 연주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상황을 그린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단편은 <세상에 태어난 말들>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신의 사전에서 부정적인 함의를 지닌 단어들을 지워서 인간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 단어나 개념을 없앤다고 해서 실재하는 현상이 사라지겠는가. 환상을 묘사해도 현실이 투영되는 구병모 작가의 작품 세계를 축약한 소설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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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이름들 - 제3회 박상륭상 수상작
안윤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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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절 가깝게 지냈으나 이제는 연락이 끊어져 소재도 알 수 없고 얼굴도 가물가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는 이름으로만 남아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만 보아도 애틋한 감정이 든다. 안윤의 소설 <남겨진 사람들>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인공 '윤'은 2006년 여름부터 2008년 여름까지 2년 간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에서 어학연수를 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8년이 지난 현재, 윤에게 그 시절과 관련해서 남은 것이라고는 당시 신세 진 하숙집 주인 라리사의 이름 정도다. 그런 윤에게 어느 날 뜻밖의 연락이 온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라리사가 자신의 수양딸 나지라의 공책을 윤에게 유품으로 남겼다는 것이다. 공책을 전달받은 윤은 번역을 시작한다. 공책에는 아내가 식물인간인 부부의 입주 간병인으로 일한 나지라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라리사는 왜 이 노트를 윤에게 주었을까. 윤은 라리사와 나지라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며 계속해서 읽고 쓴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점은 라리사가 윤에게 준 나지라의 공책에 적힌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식물인간인 아내 카탸와 그의 남편 쿠르만, 이들을 돌보는 입주 간병인 나지라의 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쿠르만과 나지라가 서로 좋아했는지 혹은 카탸가 그들을 질투했는지 아니면 격려했는지 등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관점과 판단에 달려 있다. 윤은 공책에 적힌 내용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면서도 번역을 멈추지 않는다. 진실을 알기 위한 번역 행위는 결국 윤에게 진실과 무관한 '어떤 효과'를 남긴다. 


윤은 라리사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하고자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라리사가 윤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라리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가슴 깊이 알게 된다. 라리사에게 윤이 어떤 존재였는지, 수양딸의 유품을 남길 만큼 애틋했는지 아니면 그저 마지막이라서 기억에 더 남은 외국인 하숙생이었는지도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내 이름을 안다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해 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보통의 인연이 아니다. 결국 이 소설은 인연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소설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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