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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반어법 ㅣ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_ "자유의 몸일 때 마음속에 새겨두었던 책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거죠." (p.230)
_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책은 한 권도 읽지 않았어.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거야. 앞으로도 계속 내 자신의 인생에서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게 견딜 수가 없었어. (p.414)
_ 궁극적으로 극악무도한 사람이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악이 시스템적으로 분산되어 있어요. 그거야말로 자본주의 국가의 악 같아요. (p.441)
_ 이 세상에는 역사 자료를 읽고 또 인간의 영혼에 관련된 근원적인 뭔가를 배우지 못하는 역사가가 역사가가 얼마나 많은가 (p.453)
어떤 소설가들은 소설 속 주인공이 소설가의 분신이라고, 소설 속 이야기가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착각하지 말아달라고 한다. 물론 그들의 말대로 소설가의 실제 삶과 허구를 착각하지 않는 자세는 독자들에게 꼭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떤 소설은 소설가 본인의 생애와 너무나 닮아서 착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요네하라 마리의 장편소설 <올가의 반어법>이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처음 몇 장을 읽고 소설이 아니라 저자의 수기인 줄 알았다. 1960년대 초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주인공 히로세 시마가 무용가의 꿈을 접고 현재는 러시아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는 점,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몇 명을 우여곡절 끝에 다시 찾는 점(이 이야기는 요네하라의 다른 책 <프라하의 소녀시대>에 담겨 있다) 등은 저자의 실제 삶과 똑같다.
하지만 저자가 '80%가 픽션, 20%가 논픽션'이라고 공언한 대로 비슷한 건 앞부분에 나오는 설정 정도이고 뒷부분은 기존의 요네하라 마리 책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내용이다.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인 무용교사 올가는 우아한 옷차림, 몸동작과 달리 입이 험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욕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졌다. 어른이 된 후로도 그녀의 욕을 기억하고 있었던 일본인 제자 히로세 시마는 불현듯 그녀의 삶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그 길로 모스크바로 날아가 흔적들을 찾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올가 선생님에게는 스탈린 독재 시절 '알제리'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전적이 있었으며, 러시아 국적을 숨기고 체코 프라하의 학교에서 무용선생으로 취직한 수상한(?) 이력이 있었다. 오직 무용만을 사랑하는 것 같았던 올가 선생님에게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는 누구일까? 시마는 점점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시마가 올가 선생님의 자취를 쫓는, 일종의 추리소설 형식을 띠고 있지만, 올가 선생님의 이야기만 떼놓고 보면 과거 소련을 무대로 펼쳐지는 역사극이다. 이 시절의 이야기는 끔찍하기 짝이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반정부 인사로 지목되어 목숨을 잃고, 남은 가족들은 영문도 모른채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으며, 이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생활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갖은 폭력과 고문에 시달렸다.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은 물론 이름조차 모른 채 고아원에서 살다가 입양되었다. 이렇게 독재 정권에 의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들이 기록으로만 수백만 명,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까지 합하면 수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잔혹하고 끔찍한 현실에 쉬이 스러질 법도 한데 꿋꿋이 살아낸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올가 선생님이 수용되었던 '알제리' 수용소에서만 해도 그렇다. 그들은 비록 푸짐한 밥도, 따뜻한 이불도 제공받지 못하고 하루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였지만, 매일밤 이른바 '수용소 낭독회'라는 것을 열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수용소 낭독회란 책도 영화관도 TV도 없는 수용소에서 서로의 기억력에 의지해 <안나 카레리나> 등 과거에 읽은 책이나 보았던 영화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인데, 매일밤 수감자들끼리 재미난 이야기를 하고 연기와 노래를 하며 한바탕 웃고 울며 즐기고 나면 밥을 안 먹고 잠을 못 자도 다음 날 아침 피부가 반짝반짝 빛나고 생기가 돌았다고 한다.
올가 선생님이 구사하던 걸진 욕도 수용소에서 배운 것이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분노와 극복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수용소의 여인들은 구수한(?) 욕으로 풀었다. 한참 욕을 하고나면 어쩐지 힘이 솟고 무서운 것도 사라졌다. 역사상 수많은 정권과 정부와 권력자들이 있었지만 모두 사라지고 이야기와 욕은 대대로 전승되고 있는 것은 다 이 때문이 아닐까? 아무리 무서운 일이 벌어져도 민중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하고 욕으로 대신 억누린 마음을 풀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가진 치유의 힘, 회복의 힘을 믿게 해주는 소설 <올가의 반어법>. 요네하라 마리의 팬이라면 필독, 팬이 아니어도 반드시 읽어보길 권한다.